“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이 시는 사사기 5장, ‘드보라의 노러속에 나오는 구절이다(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인들의 압박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갈 때에 구원자로서 등장한 인물인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어미’로 표현하고 있다. 이 독특한 표현은 드보라의 권위와 위치, 리더십을 보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어머니와 같은 보호하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여성이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과 그러한 위치에 오르는 것에 대한 신학적 부담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드보라는 불편한 존재이다. 반면 여성해방신학자들에게 드보라는 귀감이 되는 영웅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녀들에게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려는 사람들에게 딸들의 이름으로 ‘드보라’만큼 선호도가 높은 이름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명성과 인지도가 높음을 보여 준다.
참고로 성경에 동명이인으로 또 다른 드보라가 등장하는데, 창세기 35장 8절에 나오는 리브가의 유모의 이름이 드보라이다. 본문에 나오는 드보라는 사사기 4, 5장에만 국한되어 등장한다. 이 유명한 드보라가 등장한 배경과 그녀의 역할을 본문 속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드보라가 등장하는 배경(삿 4:1∼3)
사사기를 보면 대(大)사사들을 소개할 때마다 나오는 일종의 구조적인 형식이 있다. 그 형식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은 위의 형식을 그대로 좇아서 변형 없이 소개된다(3:7∼11). 그 이후에 소개되는 사사들은 기본적으로 위의 형식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조금씩 스토리를 변형, 확장하는 방식으로 단조로움을 피하고 흥미를 더하여 각각의 사사들의 독특성을 나타내고, 그러면서도 신학적인 메시지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기의 문학적인 기교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드보라 스토리의 경우에도 일단 배경에 있어서는 위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 알림: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1절)라고 시작한다. ‘또’라는 단어 속에는 에훗이라는 사사가 죽은 후에 그들이 다시 악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2) 여호와의 반응: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으로 이번에는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2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야빈은 여호수아 11장에서 여호수아에게 진멸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한 정황으로 보아 ‘야빈’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왕조의 칭호로써 여호수아 이후에 다시 하솔을 건립하고 왕조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때 진멸했던 자들에게 도리어 압제를 당하는 수모와 아이러니가 돋보인다. 사사기는 그 원인이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야빈이 군대장관을 두었는데, ‘시스라’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소개하고 있다. ‘시스라’는 가나안인들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용병, 즉 고용된 군인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싸움 전문갗가 시스라의 직업이다.
(3) 압제당한 연수: 야빈 왕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야빈 왕에게 철병거 구백승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철병거는 사사기 1장 19절에서도 언급되는데, 유다 지파가 골짜기의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로 철병거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함께하실 때에 유다 지파는 산지 거민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다. 결국 저자가 ‘철병거’를 통하여 시사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능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철병거를 더 두려워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의 신앙의 정도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여호수아가 요셉 족속에게 했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수 17:18)는 말씀이다. 철병거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부족’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4) 부르짖음: 이스라엘 자손이 견디다 못해 여호와께 부르짖는다(3절). 여기까지는 위의 형식의 틀을 커다란 변형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
(5) 다섯 번째는 구원자, 즉 사사를 세우시는 차례인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드보라다(4∼5절). 두 가지의 놀라운 점이 있는데, 하나는 처음으로 리더로서 ‘여성’이 등장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드보라와 바락이라는 인물이 짝(pair)으로 역할을 한다는 점이 앞의 사사들의 경우와 구별이 되고 있다(6∼10절).
(6) 여섯 번째로 구원하시는 방법이 소개되는데,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시스라가 죽는 장면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인물 야엘이라는 여성의 활약상이 소개된다(11∼24절). 이것도 새로운 요소이지만 거기에 더해 가장 독특한 부분은 이 사건 이후에 사사기 5장 전체가 ‘드보라의 노러로써 4장의 내용을 시로 전개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마치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출 14장), 그 장면을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의 노러로 시의 형태를 빌려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한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드보라의 역할과 위상이 모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5장 끝 부분을 ‘태평을 알리는 연수’로 마감하고 있다(5:31,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이렇듯 위의 형식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변형과 확장으로 드보라의 스토리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부분들을 전부 다룰 수는 없고 위에서 드보라가 소개되는 다섯 번째 부분만을 중심으로 드보라에 대해 좀 더 연구해 보고자 한다.
2. 드보라의 등장과 그녀의 역할(삿 4:4∼10)
4절에 보면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라고 기록하고 있다. 랍비돗은 ‘횃불’(torche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랍비돗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나중에 등장하는 바락은 ‘번개’(lightning)를 의미하는데, ‘랍비돗’과 그 의미가 상통하므로 드보라가 바락의 아내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랍비돗을 바락의 별명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또한 랍비돗이 남편 이름이 아니라 ‘횃불의 여성’이라는 드보라를 묘사하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다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 평범한 배경을 가진 여인으로 나와 있다. 그녀는 또한 여선지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사가 되었다’(히브리어로 ‘샤파트’)라는 표현은 원어로 보면 폭이 넓은 단어이다. 예를 들어 신명기 1장 16절에서는 재판관들에게 공평히 ‘판결하라’(샤파트)는 문맥에서 ‘법적인 의미’로 쓰였다(참고: 출 18:16). 그러나 사무엘상 8장 5절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샤파트)고 요청하는데, 그러한 문맥에서는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문맥에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를 선택하여야 한다. 일단 본문에서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잠시 보류하고 5절을 계속 보기로 하자.
5절은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는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곳으로써 여호수아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엘르아살이 묻힌 곳이다(수 24:33).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으로 사무엘의 사역과 연관이 많은 곳이다(예: 삼상 1:19; 2:11; 7:17; 8:4; 16:13; 28:3 등). 벧엘은 사사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물었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쓰는데(18, 23, 26∼27절), 그 이유는 그때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벧엘에 있었기 때문’(20:27)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 언급된 세 지명이 다 직·간접적으로 제사장의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곳들이다. 드보라는 바로 그러한 곳 사이, 즉 라마와 벧엘 사이에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을 언급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볼 때에 사사기 후반부에 기록된 레위인들의 타락된 모습(17∼19장), 전반부에 기록된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세대들이 ‘여호와와 그의 행하신 일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평가(2:7∼10), 사사기 전체에 흐르는 영적 타락상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역할 부재와 그들의 영적 부패가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있는 곳이나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구한 것이 아니라(참고: 민 27:21)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그러한 역할을 기대한 것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는 표현도, 조금 복잡하더라도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며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이스라엘 개개인을 가리키는 뜻으로 백성들이 각각 드보라에게 나아갔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집합명사의 개념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나타내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후자의 개념이 1∼3절에서 쓰인 표현이다. 또한 블락(Block)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사사기 전체에서 이 표현은 항상 후자의 개념으로 쓰여졌다. 그러니까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여호와께 구하고자 드보라에게 나아갔다고 해석된다.
“그에게 나아갚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면 ‘그녀에게 올라가다’가 된다.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드보라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지정학상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을 위에서 언급된 사사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5절의 표현과 동일)이 벧엘에 ‘올라갗 하나님께 묻는 장면과 (20:18, 23, 26∼27) 연결시켜 본다면 ‘백성들이 드보라에게 올라간 것’은 ‘여호와께 계시를 받기 위해 올라갔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재판을 받더라”는 무슨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판을 위하여 드보라에게 올라갔다’가 된다. ‘재판’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고 발음한다. 이 용어는 의미의 폭이 넓고 구약에서 아주 다양하게 너무나 많이 사용된 단어이다. 개역한글판에서 ‘재판을 받다’라고 번역한 것도 이 단어의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히 ‘미쉬파트’가 아니라 정관사가 붙어 있다. 백성들이 ‘그 미쉬파트를 위하여 드보라에게 올라갔다’는 것이다. 정관사가 있다는 것은 그냥 단순하고 일반적인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지목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백성들의 부르짖음(3절)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미쉬파트’를 가리키고 있다.
3절에 나오는 ‘부르짖었다’(히브리어로 ‘쟈악크’)는 단어와 ‘미쉬파트’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욥기 19장 7절에 보면 “내갉 부르짖으나(쟈악크)… 신원함(미쉬파트)이 없구나.”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나 ‘미쉬파트’가 없으신 것에 대한 욥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왕의 현명한 결정도 ‘미쉬파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다투는 사건의 판결도 ‘미쉬파트’라고 나와 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판결함(미쉬파트)을 듣고… 판결함(미쉬파트)을 봄이더라”(왕상 3:28). 이것은 ‘미쉬파트’라는 단어가 꼭 법정에서 재판관들이 내리는 판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폭넓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사기에서는 특히, ‘부르짖었다’는 동사는 항상 여호와께만 연결되어 사용되었다(삿 3:9, 15; 4:3; 6:6; 10:10). 그러니까 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드보라를 찾은 이유는 부르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 즉 ‘미쉬파트’를 듣기 위함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이러한 취지를 살려 5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미쉬파트’를 위하여 그녀에게 올라갔더라.”가 된다. 그녀에게 온 이유는 그녀가 여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쉬파트’라는 하나님의 응답이 그 다음 절(5절)에 등장하는 ‘바락’이라는 사사이다. 드보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네 손에 붙이리라.”(4:6∼7)고 바락에게 전달한다. 바락이 가기를 주저했을 때 사실 바락은 드보라의 권유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광을 얻지 못하고 시스라를 죽이는 일을 야엘이라는 여인에게 빼앗긴’(‘야엘’ 참고) 대가를 치루었다. 또한 이러한 드보라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사사기의 저자는 드보라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대로 예언이 성취된 참 선지자(true prophet)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신 18:22).
이제까지 우리는 ‘여(女)사사’로서의 드보라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드보라는 전형적인 대(大)사사의 패턴에 맞지 않는다. 모든 대사사들은 “구원자”라든가(3:9, 15) 또는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니”라는 유사한 표현들과 함께 나온다(2:16; 6:14; 8:22; 12:2; 13:5). 그러나 그러한 어떤 표현들도 드보라에게는 쓰여지지 않았다. 또한 모범 사사 옷니엘 이후에 나오는 대사사들의 묘사 속에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점점 가미되어 소개되는데(바락도 마찬가지), 드보라의 경우에는 그러한 패턴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다른 사사들과 구별되어 있다. 실제로 바락은 후에 사사들의 명단에 등장하는데 드보라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삼상 12:9∼11; 히 11:32). 그녀를 전형적인 ‘대사사의 대열’에 넣어 해석하지 않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역할과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업그레이드(up-grade)가 되어 있다. 4절에 나오는 ‘사사가 되었다’는 표현은 법적인 의미보다는 정치적으로 ‘다스린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무엘상 7장 15절부터 17절에서 ‘다스린다’(샤파트)는 사무엘의 역할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그녀는 위에서 언급된 대로 ‘드보라의 노러(바락보다 드보라가 먼저 언급됨)를 통하여 ‘모세의 노러(이스라엘 자손보다 모세가 먼저 언급됨)와 그 권위를 같이하며, 참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고, 국가적인 위기에 백성들은 그녀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으며, 바락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시켰다(4:14; 5:12). 어떤 학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녀는 ‘명예박사’처럼 ‘명예사사’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명예스러운 것은 그녀가 영적으로 어두웠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기댈 수 있고, 하나님을 대변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한 ‘이스라엘의 어미’(5:7)라는 사실이다. 어떠한 해석을 하든지 그녀의 리더십과 위상은 결코 깎일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여호와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사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구조적인 형식의 틀의 반복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거듭, 반복하여, 계속적으로’여호와 앞에서 악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열두 사사들을 사용하여 나타내는 숫자적인 의미는 그들의 죄가 한도를 넘어 반복되면서 ‘죄의 무한계성과 끝없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패턴을 보며 사사기를 읽는 독자를 분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들의 죄를 짓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투사하여 봄으로 죄의 늪이라는 것이 이토록 깊은가를 보며 ‘인간의 죄성’에 대한 두려움까지 갖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또, 거듭, 반복하여, 계속적으로’죄악된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은혜’라는 단어의 참 의미이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이다. 어두운 시절에 하나님은 어김없이 드보라와 바락을 통하여 그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반복되는 불순종’속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이런 의미에서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는 말씀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고처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라는 말씀을 기억하자.
둘째, 하나님이 들어서 쓰신 드보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드보라가 바락에게 전쟁에 임하도록 명했을 때 바락은 주저했다. 단순히 바락의 용기와 믿음 부족을 탓하기 전에 그가 처한 현실의 실제와 심각성을 고려해 보라.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야빈의 손에 학대를 받았으며, 그의 구백승의 철병거에 맞서야 하는 전쟁은 사실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한 명령에 대하여 바락이 택한 것은 드보라에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4:8)라는 말 속에서 바락은 드보라의 존재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드보라의 영성(靈性)이다. 바락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백성이 그녀에게 국가적 위기에 찾아온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선지자로서 그녀는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어두움에 비치는 ‘횃불’처럼 랍비돗의 아내로서 암흑기의 사사시대에 빛의 역할을 한 리더요, 정신적 지주였다. 사사기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고 존경받는 리더로는 단연 드보라가 꼽힌다.
둘째는 그녀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녀는 그대로 전달하고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빈이라는 폭군을 물리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녀는 믿었기 때문에 바락을 종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함께 동반해 달라는 바락의 요청에 그녀는 주저 없이 응한다. 전쟁에 대한 그녀의 적극성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9절),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10절)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14절)고 명하는 장면 속에서도 그녀가 직접 전쟁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는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사 바락을 세우시고 그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드보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5:1~3). 한 사람의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 때에 종말의 암흑기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드보라와 같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들도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이 되도록 더욱 힘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