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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月軒記
漢都之東駱峯之麓 吾洞也 環山三四里 林壑窈窕 有溪自北 抱村而南 淙淙不絶者 泮水流也 沿溪左右 舊多名園 今無存者 溪西有小丘 丘上多生嘉樹 望之蔥鬱 層階繚墻 儼然幽麗者 宜城賜第也 丘之下 有松偃蹇如人 精舍數椽 翼然於其畔者 松月軒也 有幅巾道人碧眼丹頰皓鬚如畫 携藜杖披鹿裘 逍遙於軒下者 主人翁也 主人爲誰 雙湖南公也 公之先大父駙馬琴軒公 以風流文雅 處綺紈如布衣 亭臺遊觀 傾一時 軒前有賜井 水淸而甘 井側植一松 歲久 松與主人俱老 亭亭數丈 蒼翠可人 尤與淸宵觀月爲宜 公蕭然適意 日哦其間 遂以此名其軒 軒之創蓋久 而得名始乎公 火于戊午 公卽新之 壬辰之亂 棄之而西 及歸墟矣 公徘徊躑躅於破瓦頹礎之間 撫孤松臨井欄 悲不自勝 旣又自解曰 是松 吾先人所手種也 吾自童子時 遊戲於茲松之下 于今八十一歲 軒再火而松猶在焉 斯固奇矣 而亂離八年 少而健者皆死 餘存蓋寡 吾獨全吾之命 復歸故基 松在庭中 月在天上 依然面目 不改舊色 是則軒雖廢 而其實固未嘗亡也 斯非幸歟 遂鳩材遂雇工 典衣而重營焉 是時公家無甔石 所居不蔽風雨 桷不斲取不撓 簷不雕取不漏 涼除燠室 略備舊制 而一庭松趣 盡包而有之 松若增其靑 月若增其明 軒不待飾而已煥矣 每淸秋靜夜 萬籟俱寂 月出東峯 皎然入戶 起視前庭 松影滿地 涼風乍動 戛玉篩金 公輒散步沈吟 樂而忘寢 松陰月影 與公爲三 泠然神會 澹然形化 不知此身之在乎人間也 公性不解飮酒 客至必傾壺而酌飮 未幾 輒歌呼嘯詠 喜作五言詩 往往酷類淵明 年旣耋矣 聰明不衰 行步如飛 人以爲地仙云
송월헌기(松月軒記)
한양의 동쪽, 낙봉(駱峯)의 기슭이 바로 우리 동네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4, 5리에 숲과 골짜기가 깊으며, 시내가 북쪽으로부터 마을을 감싸고 남쪽으로 졸졸 흘러 끊이지 않는 것은 반수(泮水)의 물줄기이다. 시내를 따라 좌우로 옛날에는 명원(名園)이 많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시내 서쪽에 작은 구릉이 있고 구릉 위에는 좋은 수목이 많이 자라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하며 층계를 쌓고 담장을 둘러 그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의성(宜城)의 사제(賜第)이며, 구릉의 아래 솔이 사람의 모습으로 구불텅하게 서 있고 정사(精舍) 몇 칸이 그 곁에 날개를 편 듯 서 있는 것은 송월헌(松月軒)이며, 복건(幅巾)을 쓰고 푸른 눈, 불그스레한 뺨, 흰 수염의 그림 같은 풍모로 여장(藜杖)을 짚고 녹구(鹿裘)를 걸치고 헌함의 아래에서 거니는 도인(道人)은 주인이다. 주인은 누구인가? 쌍호(雙湖 남상문(南尙文)) 남공(南公)이다. 공의 선대부(先大父)인 부마(駙馬) 금헌공(琴軒公 남치원(南致元))은 풍류와 문아(文雅)를 갖춘 분으로 부귀한 신분임에도 포의(布衣)처럼 살았으며, 집안의 정자와 누대 등 정원의 풍광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헌(軒) 앞에는 사정(賜井)이 있는데 물이 맑고 달다. 우물 곁에는 한 그루 솔을 심어 두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솔이 주인과 함께 늙어 우뚝이 몇 길 높이로 자라 그 푸르른 빛이 바라보기에 좋으며, 특히 맑은 밤에 달구경하기에 더욱 좋다. 공이 탈속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며 날마다 여기에서 시를 읊다가 마침내 이로써 헌의 이름을 삼았다. 헌이 창건된 지는 오래지만 헌의 이름은 공이 처음 지은 것이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화재로 소실되자 공이 즉시 신축하였고, 임진왜란에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와 보니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공은 부서진 기왓장과 무너진 주춧돌 사이를 서성이고 외로운 솔을 어루만지고 우물에 가 보면서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를, “이 솔은 나의 선인(先人)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이 솔 아래에서 놀았는데 어느덧 81년이 되었다. 헌은 두 차례나 불탔으나 솔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는 진실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난리가 난 8년 동안 젊고 건장한 이들은 거의 죽어 남은 사람이 적은데, 나만 홀로 내 목숨을 보전하여 다시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와 보니 솔은 뜰에 있고 달은 하늘에 있어 예전의 면목 그대로이고 옛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 이렇고 보면 헌은 비록 폐허가 되었으나 사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야말로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고, 재목을 모으고 공인(工人)을 고용하는 한편 옷을 저당잡혀 경비를 마련하여 헌을 중건하였다.
이 당시 공의 집에는 조금의 양식도 없고 거처하는 곳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서까래는 깎지 않아 그저 휘지 않을 정도에 그쳤고 처마는 다듬지 않아 그저 비가 새지 않을 정도에 그쳤으며 섬돌과 방은 그럭저럭 옛 모습을 갖춘 정도였으나, 뜰 가득한 솔의 아취(雅趣)만큼은 죄다 가질 수 있었다. 솔은 더욱 푸른 듯하고 달은 더욱 밝아진 듯하여 헌은 꾸미지 않아도 매우 훤하였다. 매양 맑은 가을 고요한 밤, 만뢰구적(萬籟俱寂)하고 달이 동쪽 봉우리에서 솟아 교교히 문 안에 비쳐 들 때 일어나 앞뜰을 보면 솔 그림자는 땅에 가득하고 서늘한 바람은 선뜻 불어 금옥(金玉)을 울리는 듯한 음향이 일어난다. 공은 문득 뜰을 거닐면서 나직이 시를 읊조리고 즐거움에 젖어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잊으며, 솔 그늘과 달 그림자와 공이 세 벗이 되어 맑게 정신이 서로 통하고 담담히 형체가 서로 어우러져 이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른다.
공은 천성이 술을 마실 줄 모르지만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병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는다. 오언시(五言詩) 짓기를 좋아하며 왕왕 그 작품이 도연명(陶淵明)과 매우 흡사하다. 연세가 매우 많은데도 총명이 감쇠(減衰)하지 않고 행보(行步)가 나는 듯하니, 사람들이 지선(地仙)이라 한다.
最樂堂記
駱山之麓 舊多名園 而箕城公子之第爲第一 奧如也有林巒溪壑之趣 曠如也有都邑郊原之望 又有迴巖曲嶼層階怪石佳木奇花之勝 入之使人神驚而魂爽 洞迷而逕疑 雖處不遠城市 而恍然如隔塵離俗之區 兵火之後 屋盡墟矣 至其林木園池 則宛然如昔 而殆有所增飾焉 豈天慳鬼護而留勝賞於人間耶 公乃盡棄昔日巍樓傑閣 擇其最勝之地 搆一堂而名之曰最樂 堂成而勝益奇 一日 余與公觴於堂之上 問曰 堂名何義 願聞公之樂 公把酒而笑 夷然不答 余曰 百花爛階 香氣襲人 禽聲鳥語 上下相續 公於是樂乎 綠陰初匀 群鶯亂啼 池荷受雨 水檻生涼 公於是樂乎 霜染而楓丹 菊秀而香吐 䈎脫而山容瘦 水落而巖姿露 公於是樂乎 白雪滿山 層氷懸瀑 公於是樂乎 公曰 此吾家四時之勝 吾固樂之 然皆樂之寓於物 非樂之得於心者也 曰 然則佳賓滿堂 美酒盈尊 絲竹迭奏 觥籌交錯 公其樂此乎 公曰 樂矣而非吾自得之樂也 曰 荷鋤而種蔬 決渠而灌花 臨水而觀魚 登丘而望遠 或漱淸泉 或摘新芳 或邀月而醉 或迎風而醒 公其樂此乎 公曰 斯眞吾自得之樂 而然其最樂則未也 余曰 噫嘻 余知之矣 昔東平王蒼有居家之最樂 公之樂 必此也 公曰 唯唯 非曰能之 願勉焉 余起而拜曰 夫樂 七情之一也 目樂乎色 耳樂乎聲 口鼻樂其臭味 身體樂其安佚 乃人之常情也 飯蔬食而樂 一簟瓢而樂 世復有其人哉 今公以宗歲重宰 生長富貴 未嘗知人間有憂辱事 則凡奢華逸豫之可以爲公之樂者 固非一端 樂聲色樂犬馬 樂財利樂驕侈 夫誰曰不可 而今乃以刻苦爲善 爲平生之最樂 非天資篤厚克去己私者 其孰能與於此 眞所謂翩翩濁世之佳公子也 孟子曰 賢者而後樂此 不賢者雖有池臺鳥獸 不能樂也 遂書此以勉公
최락당기(最樂堂記)
낙산(駱山) 기슭에는 옛날에 명원(名園)이 많았는데 기성 공자(箕城公子)의 저택이 그중 제일이었다. 그윽하게 계곡과 숲의 정취가 있고 드넓게 도읍과 들판의 전망이 있으며, 또 휘도는 바위, 굽은 섬, 층층의 섬돌, 괴이한 바위, 아름다운 나무, 기이한 화초 등 빼어난 경치가 있어, 이 정원에 들어서면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 정신이 서늘하게 한다. 이곳은 골짜기의 갈래가 복잡하고 길은 종잡을 수 없어 위치는 비록 성시(城市)와 멀지 않지만 흡사 속진(俗塵)을 멀리 벗어난 별천지와도 같다.
병화(兵火)를 겪은 뒤 집은 모두 폐허가 되었으나 수목과 연못은 완연히 옛 모습 그대로였으며 오히려 더욱 아름다워진 듯하였으니, 어쩌면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보살펴 인간 세상에 빼어난 경치를 남겨 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이에 옛날의 거창한 누각들을 죄다 버리고 그중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을 가려 집 한 채를 짓고 최락당(最樂堂)이라 이름하였다. 집이 완공되자 경치는 더욱 빼어나게 되었다.
하루는 내가 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집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공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하니, 공이 술잔을 잡고 웃으면서 잠자코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내가 “온갖 꽃들은 섬돌에 흐드러지게 피어 그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위아래에서 서로 이어지리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녹음이 막 퍼지고 꾀꼬리는 어지러이 울며 못의 연꽃은 빗방울을 받고 물가 난간에는 서늘한 기운이 일 터이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서리 맞아 단풍잎이 곱게 물들고 국화꽃이 향기를 토하며 잎새가 지고 산의 모습이 여위고 물이 줄어들어 바위가 자태를 드러내리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흰 눈이 산에 가득하고 두터운 얼음이 폭포에 드리워질 터이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하니, 공이 “이는 우리 집 사철의 경치이니, 내가 진실로 보고 즐깁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즐거움이 외물(外物)에 깃든 것이지 즐거움이 마음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반가운 손님이 집에 가득하고 좋은 술이 동이에 가득하며 관현(管絃)의 악기가 번갈아 연주되고 술잔이 서로 오갈 터이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하니, 공이 “즐겁지만 내가 자득(自得)하는 즐거움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호미를 매고서 채소를 심고 도랑을 틔워서 화초에 물을 주며, 물가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구릉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하며, 맑은 물로 양치질도 하고 새로 돋은 꽃잎을 따기도 하며, 달빛을 맞이하여 술에 취하기도 하고 바람을 쐬어 취기(醉氣)를 깨기도 할 터이니, 공은 이를 즐거워합니까?” 하니, 공이 “이는 진실로 내가 자득하는 즐거움이긴 하지만 가장 큰 즐거움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아아, 나는 알겠습니다. 옛날 동평왕(東平王) 창(蒼)이 집안에 있으면서 가장 큰 즐거움이 있었으니, 공의 즐거움은 틀림없이 이것이겠군요.” 하니, 공이 “예, 예.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힘써 실천해 보고자 합니다.” 하였다. 내가 일어나서 절하고 말하기를, “즐거움〔樂〕은 칠정(七情)의 하나입니다. 눈은 색(色)을 즐거워하고 귀는 소리를 즐거워하고 입과 코는 냄새와 맛을 즐거워하고 신체는 안일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즐거워하고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워하는, 그러한 사람이 세상에 다시 있겠습니까. 지금 공은 종척(宗戚) 중신(重臣)으로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인간 세상의 근심과 곤욕이 있는 줄 모르고 자랐으니, 무릇 공의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사치와 안락은 진실로 많을 것입니다. 성색(聲色)을 즐기고 견마(犬馬)를 즐기며 재물과 이익을 즐기고 교만과 사치를 즐긴들 누가 안 된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각고의 노력으로 선(善)을 실행하는 것을 평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으니, 천품이 독후(篤厚)하여 자기의 사욕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면 뉘라서 능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른바 ‘혼탁한 세상을 훌쩍 뛰어넘은 훌륭한 공자(公子)’라 하겠습니다. 맹자(孟子)가 ‘어진 이라야 이를 즐길 수 있지 어질지 못한 이는 비록 연못과 누대와 조수(鳥獸)를 가지고 있더라도 즐길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고, 드디어 이를 써서 공을 면려하노라.
[주-D001] 동평왕(東平王) 창(蒼)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의 여덟째 아들인 유창(劉蒼)을 가리킨다. 그는 경술(經術)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명제(明帝)가 “요즈음 동평왕이 집에 있으면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하고 묻자, “선(善)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秋香堂記
西都古稱繁華 亭臺樓觀之以名傳於四方者 皆甲乙焉 兵火之後 莽爲丘墟 今之稍復者 蓋不能十之二三 營衙之北 舊有小堂 名曰秋香 堂之左右 植以叢菊數畝 每至深秋花發 香氣滿堂 堂之始名 蓋以此云 金公守伯 以節鎭茲都之明年 慨然有志興廢 乃於聽政之暇 徘徊頹礎之間 捐俸鳩材 首建斯堂 堂成而余適奉使道此 與公觴于堂上 酒半 公屬余曰 是堂也地奧而勢曠 處卑而境靜 吾甚愛之 吾將盛植黃花 逍遙於其畔 君盍爲文以記堂之興廢 余曰 噫 公獨愛其堂乎 我愛其名 夫植物 發榮於春 風香於秋者 獨有菊耳 古人取其香 或以比其操 或以配其德 觀其歲華晼晩 草木變衰 孤芳燦然 傲視風霜 有似山林逸士守幽趣於荒寒之野 又似正人君子保晩節於危難之時 彭澤東籬之採 寄閑情也 魏公北門之詩 況晩節也 二公之所以愛之者雖同 而其托興之意則有異焉 蓋以所處之地不同也 今公於舊都佳麗之地 花臺月榭之可修可新者 固非一二 而獨以斯堂爲先 未知公之托興也 於二者何居焉 公位顯而才大 朝夕且將歸相吾君 以展事業 人之所以望於公 公之所以自期負者 俱在於晩節 吾知公輕裘緩帶 嘯詠於霜葩之下 必以魏公之所自況者 自勉於胸中 未知公以爲如何 公起拜曰 得之矣 敢不勉旃 遂書爲秋香堂記以勉公
추향당기(秋香堂記)
서도(西都)는 예로부터 번화한 곳으로 이름났거니와, 사방에 이름이 알려진 정자와 누대는 모두 세상에서 으뜸을 다툴 정도였다. 그러나 병화(兵火)를 겪은 후 소실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고 지금 조금 복원한 것은 열에 두셋도 되지 않는다. 관아의 북쪽에 옛날에 추향당(秋香堂)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었고 당(堂)의 좌우에 국화 몇 이랑을 심어 매양 가을이 깊어지면 향기가 당 안에 가득하였으니, 이 집의 이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공 수백(金公守伯 김이원(金履元))이 도읍에 부임한 이듬해에 개연(慨然)히 폐허가 된 곳을 중건하겠다는 뜻을 가졌다. 이에 정무(政務)를 보는 여가에 주춧돌만 남은 빈 터를 서성이다가 자신의 녹봉을 덜어서 비용을 마련하고 재목을 모아서 가장 먼저 이 건물을 중건하였다.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나는 마침 중국으로 사신 가는 길에 이곳을 경유하며 이 당에서 공과 술잔을 나누었다. 술이 반쯤 취했을 때 공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당은, 땅은 그윽히 깊고 형세는 넓게 틔었으며 위치는 낮고 주위는 고요하여 내가 매우 좋아합니다. 내 장차 국화를 많이 심고 그 곁을 배회할 것입니다. 그대가 글을 지어 이 당의 흥폐(興廢)를 기록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공은 단지 이 당만 좋아하십니까? 나는 그 이름을 좋아합니다. 대저 식물은 봄바람에 발영(發榮)하니 가을에 향기를 풍기는 것은 국화뿐입니다. 고인(古人)은 그 향기를 취하여 자기의 지조나 덕에 비겼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초목이 시들 때 홀로 찬연히 꽃을 피워 풍상(風霜)을 굽어보는 품이 산림(山林)의 은일(隱逸)한 선비가 황량한 들판에서 그윽한 멋을 지키고 있는 것을 닮았으며, 또 정인군자(正人君子)가 위태한 난국에 만절(晩節)을 지키는 것을 닮았습니다. 팽택(彭澤)이 동쪽 울 밑에서 이 꽃잎을 딴 것은 한가한 정취를 부친 것이요, 위공(魏公)이 북문(北門)에서 지은 시는 자신의 만절에 비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비록 같지만 그 탁흥(托興)한 뜻은 다르니, 대개 처지가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D001] 팽택(彭澤)이 …… 것이요 : 팽택은 팽택 현령(彭澤縣令)을 지낸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중양절(重陽節)에는 국화꽃을 따서 꽃잎을 술에 띄워 마시는 풍속이 있다.
[주-D002] 위공(魏公)이 …… 것입니다 : 위공은 송(宋)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그가 북문(北門)을 지킬 때 중양절에 막료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벌이면서 지은 시에 “늙은 정원사 가을 모습이 담담한 것 부끄러워 말고, 국화가 뒤늦게 향기로운 것을 보라.〔不羞老圃秋容淡 且看寒花晩節香〕” 하니, 식자(識者)들은 그의 만절(晩節)이 높을 것임을 알았다 한다. 《事文類聚 卷29》
지금 공은, 구도(舊都)의 미려한 지역에서 풍광이 좋은 누대와 정자로 중수하고 신축할 만한 것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유독 이 당을 먼저 중수하였으니, 공의 탁흥은 위 두 분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공은 지위가 높고 재능이 뛰어나니 조만간 조정으로 돌아가 우리 임금님을 보필하여 사업을 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하는 바와 공이 스스로 자부하는 바가 모두 만절(晩節)에 있을 터이니, 공이 가벼운 갖옷을 입고 느슨한 띠를 걸치고 서리 맞은 국화 아래에서 시를 읊조리면 반드시 위공이 국화를 자신에 비긴 것으로써 가슴속에서 스스로 면려(勉勵)할 것입니다. 공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니, 공이 일어나서 절하고 “옳습니다. 감히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써서 추향당기(秋香堂記)로 삼아 공을 면려한다.
坡州山城記
松京東國都西臨津之左漢水之北 一峯陡起於平野之中者 是爲坡州鎭山 四面峭絶 傍無對峙 其巓有古城址 未知創於何代而廢於何時 癸巳春 倭賊尙左京城 都元帥權慄 以孤兵據幸州 與賊戰大破之 賊欲悉衆再戰 權元帥以坡山尤可守 移陣以待之 賊果以遊騎來覘三匝 而知其險不可犯乃止 自後群議重此地 咸欲修擧 而州新刳於兵 力綿未遑 圮垣頹堞 莽爲狐兔之窟 乙巳春 余按畿節 始一登覽焉 昔人相度 非偶然也 余卽上聞于朝 請先修築茲城及幸州 疏下備局 屬少安 朝廷惜民力 又方專事禿城竹州 未暇竝擧 事遂寢 而余亦瓜滿去職 居常往來于懷 逮戊午 柳公希亮 巡察是道 時西鄙有警 請用文武幹局人爲州牧 仍兼右道防禦使 俾主茲城之役 防禦柳侯實膺簡命而來 旣上任 先審茲城 雖賓旅旁午 接應靡暇 而其晨夜經紀者 未嘗不在茲城 計工賦事 分休迭役 凡四閱月而功訖 城東西北 皆有門樓 西北隅有砲樓 頗軒豁可望 有廳房以治事 有倉廒以貯穀 城內有二大井 城底四面 皆有泉 在數十步內 內井雖渴 可取給也 是役也 柳侯每朝上山 芒鞋徒步 或躬抱大石 以率下人 無不競勸績用成 若柳侯 可謂不負簡任矣 事聞 命增秩資憲以褒之 天朝遊擊趙公佑 手書天設形勝國西重門八字以揭之 余儐梁勅使 還時 柳侯請余一語爲不朽計 是固余志也 嘉柳侯之能成 略記顚末如右云
파주산성기(坡州山城記)
송경(松京) 동쪽, 국도(國都) 서쪽, 임진강(臨津江) 좌측, 한수(漢水) 북쪽에 한 봉우리가 평야에 불쑥 솟아 있는 것이 바로 파주(坡州)의 진산(鎭山)이다. 이 산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주위에는 마주 보는 산이 없다. 이 산 정상에 옛 성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쌓았고 어느 시대에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 왜적이 아직 서울에 남아 있을 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幸州)를 거점으로 삼아 적과 싸워 크게 무찌르니 적이 무리를 모두 동원하여 재차 침공하려 하였다. 권 원수(權元帥)는 파산(坡山)이 수비하기에 더욱 좋다고 여겨 군진(軍陣)을 그곳으로 옮겨 적을 기다렸는데, 적이 과연 유격대를 보내어 세 차례나 성을 둘러보고는 험준하여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이후로 사람들이 이곳을 중시하여 성을 다시 보수하자는 중론이 있었으나, 이 고을이 막 병화(兵禍)를 겪은 터라 힘이 미약하여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성벽과 성가퀴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어 왔다.
을사년(1605) 봄, 내가 경기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음 이 성에 올라가 보고서 예전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내가 즉시 조정에 보고하여 이 성과 행주의 산성을 먼저 보수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 상소가 비국(備局)에 하달되었으나 마침 시국이 겨우 소강(小康) 상태에 접어든 때라 조정은 민력(民力)을 아꼈고 또 독성(禿城)과 행주에 전력을 쏟고 있던 터라 이 성까지 보수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으며 나도 임기가 차서 직책을 떠났으나, 평소에 늘 마음속에 잊히지 않았다.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유공 희량(柳公希亮)이 이 도를 순찰하였는데, 이때 서변(西邊)에 경보(警報)가 있던 터라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간국(幹局)을 갖춘 사람을 이 주(州)의 목사(牧使)로 삼고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를 겸임하면서 이 성을 보수하는 일을 주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방어사 유후(柳侯)가 실로 그 임명을 받고 왔다. 그는 부임하자 먼저 이 성을 살펴보았으며, 비록 빈려(賓旅)가 많아 응접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나 밤낮으로 계획하고 경영하는 것이 늘 이 성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사를 헤아려 임무를 부여하고 번갈아 일하고 쉬게 하여 넉 달이 걸려서 공사를 마쳤다. 성의 동쪽ㆍ서쪽ㆍ북쪽에는 모두 문루(門樓)를 두고 서북쪽 모퉁이에는 포루(砲樓)를 두었는데 자못 높고 전망이 후련히 틔어 전망이 좋으며, 업무를 보도록 청방(廳房)을 두고 곡식을 비축할 창고를 두었다. 성안에는 두 곳의 큰 우물이 있고 성 아래에는 사면에 모두 샘이 수십 보(步) 거리 안에 있어 성안의 샘이 마르더라도 물을 길어올 수 있다. 이 성을 보수할 때 유후가 매일 산에 올라 짚신을 신고 도보로 다니며 몸소 큰 돌을 들고 아랫사람들을 인솔하자, 사람들이 모두 힘써 일하여 공사가 무사히 이루어졌으니, 유후 같은 이는 선임(選任)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자급을 올려 포장(褒奬)하였다. 천조(天朝)의 유격(遊擊) 조공 우(趙公佑)가 손수 ‘천설형승 국서중문(天設形勝國西重門)’ 여덟 자를 써서 높이 걸었다. 내가 양 칙사(梁勅使)를 빈접(儐接)하고 조정으로 돌아올 때 유후가 나에게 한마디 글을 써서 사적을 길이 전해 주길 청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나의 뜻이다. 유후가 이 일을 완수한 것을 훌륭히 여겨 그 전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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