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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은 불평등인가?
‘다름은 불평등인가?’ 다름의 뜻은 ‘별다른 것’ 또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점. (=차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정리되어 있다. ‘별다르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을 때든 생각은 “다른 것에서 생기는 불평등은 없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고, 전 세계 사람들은 한국을 포함한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인도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유럽인, 브라질인, 터키인 등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각자만의 나라 출신에 불평등을 느끼고 있을까? “각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문화와 사회 혹은 정치에 불만족은 느낄지 몰라도 다른 사람과의 출신을 비교하며 불평등을 느끼고 있진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다름은 불평등인가?”에서의 중심을 ‘다름’이 아닌 ‘불평등’에 맞추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한 불평등이란, “사람의 특성 즉 피부색, 언어, 외모 등을 기반으로 차별하며 기존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불평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 다름에 있어서 차별이 생기는 경우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흑인 인종 차별”이 떠올랐다. 흑인 인종 차별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있어왔다. 모두가 알고 있을 법한 불평등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도 흑인 인종 차별은 이어지고 있다. 단지 피부가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아주 오래전에 흑인 노예 제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흑인들은 사람다운 취급을 받지 못하며, 노예로 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 노예제도 반대’ 세력이 생겨나고 정권도 바뀌면서 ‘흑인 노예제도’ 또한 폐지되었다. 하지만, 말만 ‘흑인 노예제도 폐지’ 일뿐, 흑인이 버스에 타면 백인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반드시 뒷자리에 앉아야 했고, ‘유색인종 전용’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실, 식당 심지어 개수대까지 백인과 같이 편의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들 외에도 흑인들을 향한 백인들과의 불평등은 계속되었고,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아직까지 뉴스와 기사에선 인종차별을 다룬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를 알리고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흑인 인종 차별에 관련된 영화, 다큐멘터리가 많이 있다. 흑인 인종 차별에 관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헬프(2011)’, ‘히든 피겨스(2016)’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본론으로 돌아와 “다름은 불평등인가?”에서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니 너무 많은 불평등의 사례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다름은 불평등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쯤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졌음을 느꼈다. ‘불평등’을 초점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지속해서 찾아보니 너무 힘들었다. 나는 평소에 나쁜 생각, 마음을 안 가지고 살려 노력한다. ‘나쁜 생각과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세상을 향한 색안경을 스스로 쓰는 거나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 피해자들이 사람으로 써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과 인종 차별 가해자들이 윤리적 범위에서 벗어난 행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보이는 당당함에 인류애가 떨어졌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경계심은 상황을 악화 시킬 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없게 만든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싶다면, 색안경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떠한 색안경이라도 말이다. 상대방을 향한 조금의 편견이라 해도, 편견을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상대방과의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예시를 들자면, 친구관계인 a와 잘 지내다가 다툼이 벌어져 사이가 안 좋아졌다. a와의 악감정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a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를 끝으로 고민이 해결될까? 이번 예시에 대한 정답은 없고, 정해진 답변도 없지만, 악감정이 그대로인 상태라면 좋은 방향으로 a와의 관계가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이미 a와의 관계에서 색안경을 쓴 상태로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 봤자 좋은 관계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조차 못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따라 이번 주제인 ‘다름은 불평등인가?’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름을 초점에 두고 불평등을 보면 다름은 불평등이 아니라고 보였다. 하지만, 불평들을 초점에 두고 다름을 보면 다름은 불평등처럼 보였다. 즉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확실한 건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것은 유색인종분들이 피부색을 떠나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좋은 마음가짐을 가지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나쁜 마음가짐을 가지면 세상이 더럽게 보인다는 상식적인 내용의 글이지만,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기 너무도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유를 위탁할 필요도 있는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유를 위탁할 필요도 있는가?’ 말이 조금 어렵다는 생각에 쉽게 풀어보자면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배제할 필요도 있는가?’ 정도로 해석 가능하겠다. 먼저 나의 개인적인 생각부터 말해보자면 인간관계,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소속감을 전제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인간관계에 따른 소속감은 주로 본인에게 주어지는 이익 즉, 감정 교류 또는 공감을 얻기 위해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혼자라면 느껴질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를 하는 이유라면 감정적이고 복합적인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대상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고 돌아오는 무엇인가가 손해라면 관계를 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공동체에 따른 소속감은 인간관계의 소속감과 동일하게 감정 교류, 공감, 외로움의 부재를 위해 소속감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면 ‘공동체의 목표’이다. 본인이 원하는 바가 있고 동일한 것을 원하는, 바라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했을 때 ‘아, 저기에 소속되고 싶다.’라는 이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 역시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고 돌아오는 무엇인가가 손해라면 공동체에 속할 이유가 없으니 나오려고 한다.
이 두 형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유의 배제이다. 만약 특정 인간관계, 공동체에 속해 있는 동안 자신의 자유 즉, 의견, 생각 등이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면 계속 머무르고 싶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계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이익에 충족했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상대방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렇지 않다면 있던 정마저도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의 자유’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에 따른다. 어떤 사람과 인간관계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를 들어 점심을 먹으러 간다 했을 때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 또는 본인이 참석하고 싶지 않으면 말할 수 있는 자유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물론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앞에서 말한 소속감을 전제로 관계 속에 일종의 사랑의 욕구는 ‘매슬로의 5단계 인간 욕구’ 중 3단계에 속하는 인간의 욕구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라는 사람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욕구는 단계를 지닌다는 욕구 5단계 가설을 주장했다. 보다 우선적인 욕구 단계가 채워지면 다음 욕구 단계가 생겨난다는 가설이다.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다. 모든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욕구이고 물, 음식, 산소 등 생명 보존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하려는 욕구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 안정의 욕구’이다. 당장 생명 유지는 가능하더라도 맹수가 출몰하는 숲 한가운데에 있다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을 안전, 안정의 욕구로 볼 수 있고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을 선호하는 성향으로 표현할 수 있다. 3단계 욕구는 ‘사랑, 사회의 욕구’이다. 사람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싶고, 집단 내에 자신의 자리를 갖고 싶은 욕구이다. 여기서 사랑, 사회의 욕구는 사랑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4단계 욕구는 ‘존중의 욕구’이다. 존중의 욕구는 두 가지 행태로 나뉘게 되는데 ‘내부적인 존경 요인’과 ‘외부적인 존경 요인’이다. 내부적인 존경 요인은 자아 존중감, 자율, 성취로 정리 가능하고 외부적인 존경 요인은 지위, 신분, 인정,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정리 가능하다. 쉽게 말해 내부적인 존경 요인은 스스로가 자신을 존중해 주는 욕구를 말하고, 외부적인 존경 요인은 사회를 기반으로 자신이 존중받았으면 하는 욕구를 말한다. 내가 예시든 말에 존중의 욕구를 찾아본다면 ‘점심을 먹으러 간다 했을 때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 또는 본인이 참석하고 싶지 않으면 말할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한 ‘최소한의 자유’가 존중의 욕구이고 이는 ‘외부적인 존중 욕구’로 말할 수 있다.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말 뜻 그대로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욕구를 실천하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게는 욕구를 동기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야 말겠어!’라는 것은 일종의 자아실현이지만, 이때 가지게 되는 욕구가 ‘성장 욕구’가 되어야 한다.
타인으로부터 또는 본인으로부터 영향받아 생긴 욕구 또는 결핍은 성장 욕구가 아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기완성의 욕망이기 때문에 잠재적인 자신의 모습을 실현하려는 성향이다. 진정한 자신에게 가까워지려는 욕망 즉, 자신이 진정으로 될 수 있는 정점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매슬로는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천한 사람은 세상의 1%에 해당된다.’라고도 이야기 한적 있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이론에서 핵심은 ‘하위 욕구가 만족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가 발현되고 하위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의 욕구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는 것 즉, 동시에 2가지 욕구를 가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하나의 욕구만 가지고 그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심리학자 ‘클레이턴 앨더퍼’라는 사람은 조금 다른 이론을 주장했다. 바로 ‘앨더퍼의 ERG 이론이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에서 생리적 욕구와 안전, 안정의 욕구를 묶어서 ‘E (existence needs) : 존재 욕구’, 사랑의 욕구와 존중의 욕구 반을 묶어 ‘R (relatedness needs) : 관계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와 존중의 욕구 반을 묶어 ‘G (growth needs) : 성장 욕구’라고 정리했다. ERG (존재 욕구, 관계욕구, 성장 욕구) 이론은 5단계 이론과 달리 ‘높은 수준의 욕구, 낮은 수준의 욕구 모두가 어느 시점에서는 동기 부여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한 번에 하나의 욕구가 아닌 둘의 욕구 또는 여러 개의 욕구가 동시에 발현된다는 이론이다.
본론으로 넘어와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개인적인 생각을 앞에서 이야기한 5단계 이론과 ERG 이론의 정의를 빌려 정리하자면, ‘인간관계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이론의 4단계인 존중의 욕구를 전제로 소속감을 받아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건강한 관계의 조건은 ERG 이론의 존재 욕구를 상대방에게 드러냈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유대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건강한 관계이다. 이것은 상대방에게도 적용된다. 인간관계는 쌍방향이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소속감에서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 인간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 때문에 존재 욕구, 관계욕구, 성장 욕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지만 진심으로 특정 관계에 소속되고 싶고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소속 욕구가 강하다면 본인의 욕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더라도 본인은 그것은 인지 못하고 관계욕구에만 몰두하게 된다. 어느 정도의 거리도 관계욕구에 있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도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따라 이것이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유를 위탁할 필요도 있는가?’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자유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자유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주로 무엇을 할 때 자유롭다고 느낄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욕구에 따른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지친 일상생활을 벗어던지고 욕구에 따른 여가 시간을 가지곤 한다. 예를 들어 퇴근한 직장인이 ‘아 집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을 때 또 다른 경우로 ‘아 맛있는 음식 먹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을 때 우리는 흔히 ‘쉬었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쉼 속에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란 욕구 충족에 따른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본의 양만큼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많은 돈을 벌려 하고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한다. 하지만, 욕구를 충족했다면 행복도 따라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에 ‘강신주’ 철학자는 ‘이상, 의지, 노력이 없다면 자유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왜 자유에는 고통이 따르는가?’라는 영상 속 강신주 철학자의 말을 생략하여 정리해 보았다.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너무 뚱뚱해요. 평일에 직장 다녀와서 가만히 쉴 수도 있는데 갑자기 ‘날씬해지고 싶어’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인문학적으로 이걸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상을 그려 놓아야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이상을 실천하려 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이 만약 타인이 정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정한 거면 그것은 자율이 아니라 타율이에요. 다시, 그 이상이 자율로 정해진 이상이라면 노력이란 것을 합니다. (중략) 이해해야 하는 용어가 하나 있는데 의지에요. 의지라 하면 이상을 꿈꾸는 걸 의지라고 해요. 앞에 예시든 뚱뚱한 아가씨의 의지는 ‘날씬해져야겠다.’가 되겠죠. 그렇게 매일 운동을 하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유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랑은 많이 달라요. ‘내가 날씬해져야겠어!’, ‘내가 이렇게 좀 되어야 되겠어!’라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휴일에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사람이에요.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까. 자유의 이면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게 돼있습니다.”
강신주 철학자의 말에 따르면 ‘자유에는 이상, 의지,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이상과 의지는 자신 스스로가 정해야만 자율이 성립된다. 자유가 성립됐다면 이에 따른 노력 즉, 고통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로 간단하게 정리가 가능한데 나는 ‘욕구를 충족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라는 것에 과학적 이야기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뇌 과학과 관련된 ‘노력의 깊이’이다. 윗글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영상 속 강신주 철학자가 한 말 중에는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좋은 성적을 위해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 쉬는 것이 자유구나’ 착각하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덧붙여 ‘생각이 없는 사람은 휴일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사람이에요.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까.’라는 말도 했다. ‘이게 뇌 과학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라고 생각할 것 같으니 왜 뇌 과학이랑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겠다.
우리 뇌에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주로 보상, 의욕, 쾌락 등을 맡고 있는 행복 호르몬이다. 보상의 과정을 크게 보면 욕구, 노력, 보상 순으로 정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운동해서 멋진 몸을 만들 거야!’라는 말을 했을 때 운동해서 멋진 몸을 가지겠다는 욕구, 이에 따른 운동, 결과로 멋진 몸을 얻은 보상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예시는 우리의 삶 속에 쉽게 볼 수 있다. ‘게임을 열심히 해서 높은 티어를 얻을 거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갈 거야!’ 등 항상 욕구에 따른 보상을 얻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상의 과정에서 노력이라는 과정이 빠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약물을 사용해 멋진 몸을 얻고, 부정행위를 하여 높은 티어 또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노력 없이 욕구와 보상만 있는 보상 과정을 ‘즉흥적인 보상체계’라고도 말하는데 사실 노력을 하고 얻는 보상이든, 노력을 안 하고 얻는 보상이든 쾌락은 똑같이 느낀다. 하지만, 이런 즉흥적인 보상체계는 우리를 안 좋은 길로 빠뜨린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다. 학창 시절 학원이나 학교를 빼먹은 적이 있다면 다 알고 있을 이야기지만, A는 학원 또는 학교 가야 하는 시간에 늦잠을 자 결국 땡땡이를 치게 되었고 친구와 놀거나 pc방에 가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A는 ‘오늘만 빠지고 다음부턴 안 그래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을 때 과연 A가 학원과 학교를 또 빠지게 되었을까? 난 당연히 빠졌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담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결말이지만, 뇌 과학적으로 말해보자면 A가 땡땡이를 쳤을 당시 느꼈던 도파민으로 보상체계에 영향을 주어 A의 잘못된 행동이 습관화되고 두 번, 세 번, 여러 번 땡땡이를 쳤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뇌 과학에선 이런 과정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물론 A가 학업에 진심이고 공부에 중독된 학생이었더라면, 땡땡이를 쳤을 때 느꼈던 도파민의 영향을 무시하고 학업에 다시 열중했을 테지만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독은 쾌락의 종류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충족도 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만약 당신이 등산, 헬스, 독서, 스포츠, 영화 등의 여가활동에 쾌락을 느껴 재밌고 계속 생각난다면 그것도 중독이다.
본론으로 돌아서, 퇴근 후 자유라는 명목하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를 했을 때 노력 과정과 보상이 너무 얕아서 진정한 자유,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일하고 왔으니 뭐 하기엔 너무 힘들고 귀찮은데, 그냥 게임이나 해야겠다.’라고 한다면 노력의 깊이가 얕아 보상체계의 전제 벗어나니 당연히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럼 쉬는 시간에 아무거나 열심히 하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건가?’라는 의문은 가졌다면 나는 ‘정답’이라고 답해주고 싶다. 물론 아무거나 열심히 한다고 해서 최상의 쾌락과 행복을 가져다줄 순 없겠지만,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다음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운 결과, 보상을 얻었으면 그것은 ‘순결한 자유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답변은 “자유는 보상체계를 동반하여 쾌락을 얻었을 때 이루어진다. 욕구에 대한 조건은 타인으로부터 정해진 또는 영향받은 욕구가 아닌 자율적 선택으로 이루어진 욕구이어야 한다.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열심히 노력한 만큼 쾌락 또는 보상을 받는다. 단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타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는 무엇인가는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자율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타율이고, 사회로부터 받은 업무, 일 또한 사회의 쳇바퀴 역할임으로 타율이다. 만약 자율로 무엇을 하려 하는데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안 하거나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핑계이고 합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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