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3세 동자 경석군에게 보임
이낱 원상(圓相)은 성현과 더불어 범부와 한 몸이요 다른 것이 없다.
저 육처(六處)에 치달아 부침(浮沈)하여 그 맑은 광명의 둥근 이치를 미(迷)한 이는 범부요 능히 정신을 모아서 오로지 순일하여 어지러이 치닫지 않는 이가 성인이로다.
이 둥근 이치는 만물 조화의 기관이니 돌이켜 비추어서 비추는 공이 극도에 도달하면 성현들의 깊은 문을 불쑥 들어갈 수 있도다.
그 마음을 맑게 하고 그 마음을 고요히 함이 제일의 묘한 방법이니 어느 곳 어느 때나 참구하되 능히 시종여일하면 자연히 성공하리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나니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져 다함을 요구한다.
총명으로는 능히 업력을 대적치 못하며 옅은 지혜로 어찌 능히 생사를 면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면하고자 하려면은 오로지 선정(禪定)의 힘을 익혀야 한다.
평소에 굳게 재물과 여색을 따름은 선정력을 얻지 못해서이며 임종할 때에 심성(心性)의 혼미함도 이로 말미암아서이다.
*이 법어는 한암스님의 필사본 「경허집」에서 새로 발굴하여 이 책에 실은 것이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어
그 빛이 만상을 삼켰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면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10 법자 만공에게 주다
수산 월면(叟山月面)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부처 주고 주장자를 잡아 한번치고 이르기를 “다만 이 말소리가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또 말해 봐라. 이 무슨 도리인가?”
또 한 번 치고 이르기를 “한번 웃고는 아지 못커라 낙처가 어디인가.
안면도의 봄물이 푸르기가 쪽과 같도다.”하고 주장자를 던지고 흐음하고 내려오다.
11 법자 혜월에게 주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면
자성에는 소유가 없도다
이와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곧 노사나 부처를 보리라
세간의 형식은 놔두고 글자 없는 도장을 거꾸로 제창하노니 청산다리 한 관문으로 서로 싸바르노라.
임인년 늦은 봄날
경허가 혜월에게 주다
12 경허화상이 한암스님에게 준 전별송
나는 천성이 인간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행인정사에서 원개사(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였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아침저녁의 연기 구름과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가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을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쓸쓸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은밀스런 원개사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래서 시 한 수 지어서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같은 포부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게 없지만
뜬 세상 흩어지면 또 언제 보랴
한암스님은 이와같은 경허화상의 전별사(餞別辭)를 받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로 답을 하고 이별을 아쉬워 했을 뿐 경허화상을 좇지는 않았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가 없을까요
만고에 빛나는 마음 달이 있는데
뜬 세상 뒷날 기약 부질 없습니다.
13 상당법어
주장자로 한번치고 치르기를 다만 이 말소리가 이것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일러 봐라.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또 한번 치고 이르기를 한번 웃고는 어디로 간 줄 몰랐더니 안면도의 봄물이 푸르기가 쪽빛 같더라.
부처와 중생 내가 알 바 아니고
해마다 으례히 취한 미친 중일뿐
때로는 일없이 멀리 바라보니
먼 산이 구름밖으로 층층히 푸르르네
세간만법 무엇이 덥고 시원한가
때에 따라 둥글고 모나고 하네
너른 천지에 모든 유정(有情)들
낱낱이 영지(靈知)가 공했으니 삼가 통하려 하지 말라
산은 은은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 꽃은 피고
새는 우짖네 도인의 사는 지혜가 다만 이러하니
어찌 구구하게 세속정리에 따르겠는가
(이 한 글귀는 「청허집」가운데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