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震壇)』,제2호,태구(台仇),「중한 양국의 협력과 아시아의 미래(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1920년 10월 17일)
2024년 8월 18일
중국 혁명당 인사 태구(台仇)는 「중한 양국의 협력과 아시아의 미래(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진단』, 제2호, 1920년 10월 17일) 글에서 1913년부터 신규식 선생과 사귀었고 신규식 선생의 인품이 성실하고 고결하고 옛날 성현을 많이 닮았다(誠懇高潔,類多古風)고 높이 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공부하였고 한중 양국의 관계는 상호간섭이 없었다고 평론하고 한국이 독립국가 자격을 가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신규식 선생이 한중 양국은 공화제 국가를 만들어 새로운 아시아를 만들자는 주장에 동참하였습니다. 신규식 선생이 조직한 신아공제사(新亞共濟社)의 뜻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신규식 선생이 중국에서 혁명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인품이 어떻고 설득이 어떠하였는지 또 중국인들이 한국 인식을 어떻게 바꾸고 동참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혁명당 인사 태구(台仇)가 누구인지는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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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당 인사 태구(台仇), 「중한 양국의 협력과 아시아의 미래(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진단』, 제2호, 1920년 10월 17일)
“중한 양국이 협력하고 새롭게 아시아를 개조하자는 두 가지 주장은 신해년(1911)에 한국 지사 모군(신규식)이 처음 주장하였고 중국에서는 혁명당 당수 모모(손문, 孫文) 이외에는 호응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습니다. 나(台仇)는 1913년부터 한국에서 온 동지(신규식)와 사귀었고 그의 성실하고 고결한 인품이 옛날 성현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또 한국의 오천 년 역사를 두루 읽어보면서 풍속, 정치, 문화 등이 독립국가의 자격을 충분히 가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과거에 교통이 불편하던 시기에는 한국의 일부 집정자가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는데 이것은 국가 교제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중국)가 때로는 한국을 번국(藩屏)으로 상대하였으나 큰 나라로서 어떤 책임을 다하지는 않았고 더구나 한국의 내정에는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어져 내려와서 관습이 되었습니다.”
『震壇』,二號(1920년 10월 17일),台仇,「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
中韓共進、改造新亞之說,往在辛亥(1911),倡自韓國志士某君(),在中國方面,除革命黨首某某外,應之者甚寡。余自癸丑(1913)以還,得與彼邦同志遊,覺其誠懇高潔,類多古風,再研覽五千年來之歷史,則風俗、政教、文化……等,無不具有獨立國家之資格。昔以交通不便,間有一部執政者,遣使來華貢獻,亦與國交際之常。吾國或待以藩屏,竊未盡何種大邦之責任,且毫無干涉內政,相沿遂成風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