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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由品- 11
慧能이 後至曺溪하야 又被惡人의 尋逐하고
乃於四會에 避難獵人隊中하야 凡經一十五載라
時與獵人으로 隨宜說法이러니
獵人이 常令守網하라하면 每見生命하면
盡放之하고 每至飯時하야는 以菜로 奇煮肉鍋하니
或이 問則 對曰, 但喫肉邊菜라하니라
一日은 思惟하니 時當弘法이라 不可終遯일새
遂出至廣州法性寺하야 値印宗法師의 講涅槃經이러니
時에 有風吹幡動이라 一僧은 云幡動이라하고
一僧은 曰風動이라하야 論議不己어늘
慧能이 進曰,
不是風動이요
不是幡動인데 仁者心動이라하니
一衆이 駭然이어늘 印宗이 延至上席하야
眞詰奧義할새 見慧能의 言簡理當하되
不由文字하고 宗이 云, 行者는 定非常人이라
久聞黃梅衣法이 南來러니 莫是行者否아
慧能曰, 不敢이로라 宗이 於是에 作禮하고
告請傳來衣鉢을 出示大衆하고 宗이
復問曰, 黃梅付囑을 如何指授니잇고
慧能曰, 指授卽無하니 惟論見性하고
不論禪定解脫이니라
00000
육조스님의 행적에 대한 소위 行由品(행유품).
행유품 이야기가 아직도계속되고 있습니다.
慧能(혜능)이 後至曺溪(후지조계)하야 했는데
지난 이야기까지는 법을 받아가지고,야밤중에
도망을 나왔지요?
그런데 道明(도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쫓아와가지고,
옷 과 발우를 빼앗으려고 할 때, 옷 과 발우를
바위위에다 얹어놓고 숨어 있었는데, 그 도명이
옷 과 발우를 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자 얼른
생각을 바꿔서, ‘이 행자가 큰도인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내가 법을 구하러 왔노라.”고 말하면서 얼른
나오시라고 그렇게 됐지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나와서는,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正與麽時(정여마시)에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아니할 때,
그럴 때 어느 것이 그대의 모습이냐?
그대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냐?
참 모습이냐? 참 생명이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역시 도명이라는
사람까지도 거기서 깨닫게 됐고,
또 도명이라는 사람이,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 할까요? 하니까 혜능 스님이 있다가,
逢袁則止(봉원즉지)하고
袁이라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그치고,
遇蒙則居(우몽즉거)하라 蒙이라고 하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에서 살아라.
이렇게 끄트머리에 됐어요. 그러니까
도명이 예배하고 서로 헤어졌지요.
헤어지고
얼른 되돌아가서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쪽으로 가보니까 없더라.” 하고 거짓말을
해서 딴 데로 돌려보내서
육조스님을 무사히 도망시킬 수 있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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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能(혜능)이 後至曺溪(후지조계)하야→혜능이 그러다가
曺溪山(조계산)이라고 하는데 이르러서, 여기서는 또
조계산에서 피해갔다가 나중에는 또 조계산에서 살게 되고
그렇지요.
한국 불교도 육조스님의 법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하는 뜻에서, 전통 종단을 “曹溪宗(조계종)”그렇게 합니다.
우리나라 송광사 있는 산 이름도 조계산.그렇게 했는데요.
후에 조계라고 하는 산에 이르러서,
又被惡人(우피악인)의→또 악인들의 쫓아오는 바를
尋逐(심축).→찾고. 쫓아오는 것을 입게 됐다.이 말입니다.
거기까지 찾아 나섰더라 이것이지요. 그래서 또
乃於四會(내어사회)에서→사회라고 하는 곳에
避難獵人隊中(피난엽인대중)이라→엽인들. 사냥꾼들
무리 속에서 피난을 하게 됐다.
여기 四會라고 하는데, 저 앞에: (강) 예언에
오조스님과 헤어질 때, 逢懷則(봉회즉) 하는
그런 말이 있었지요. 懷를 만나거든 거기서 그치라.
고 하는 그런 말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 예언하고
맞아 떨어져요.
祖-云(조-운,) 逢懷則止(봉회즉지)하고
遇會則藏(우회즉장)하라
거기 모일 會자.알 會자가 있지요?
遇會則藏(우회즉장)하라 會라고 하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감추라. 자기 몸을 감추라. 이 말입니다.
藏자는 “숨으라” 이 뜻이 되겠지요.그러니까 四會라고
하는 지명을 오조스님이 이렇게 예언을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四會라는 땅에서 사냥꾼들의 무리 속에서피난을 했는데,
凡經一十五載(범경일십오재)라 15년 동안 사냥꾼들
무리 속에서 피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참 대단한 일이지요. 어려운 일입니다.
도를 통해 가지고서, 얼른 법을 펴야할 입장인데...
또 섣불리 나갔다가는
그때 신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 분들이 전국에 흩어져서는, 옷과 발우.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하는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들이 충분히 잊어버릴만한
그런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한 것이지요.
15년쯤 지났으니 사람얼굴도 변했을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이 찾고자하는 마음도 이제는
시들했을 것이고, 각자 자기 돌아 갈 데로 돌아가고,
자기 공부 할 바데로 공부 하게 되었을 테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時與獵人(시여엽인)으로→
그 때에 사냥꾼들하고 어떻게 살았느냐?
엽인으로 더불어 隨宜說法(수의설법)이라→
편의를 따라서, 꼭 법문 한다 하는그런 모양새를
갖추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그냥 생활하는 속에서
설법하게 되면 설법을 했는데...
獵人(엽인)이 常令守網(상령수망)이라→
말하는걸 보니까 사냥꾼들하고는 달라서 늘
그물을 지키도록, 다른 사람들은 몰이를 해오지요.
짐승을 몰이 해오는 것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고,
육조스님은
못 빠져 나가도록그물을 딱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못 빠져 나가도록 지키게 했는데,
每見生命(매견생명)이면→살아있는 짐승을
만약에 보게 되면,
盡放之(진방지)라→다 놓아 주었다. 이겁니다.
그냥 두면 그 사람들 손에.그물에 걸려서 죽게
될 테니까,
육조스님은 살아있는 생명을 보면 몰래.
그 사람들 몰래 전부 다 놓아 주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每至飯時(매지반시)하야는→
매양 밥 먹을 때 이르러서는,
以菜(이채)로서 奇煮肉鍋(기자유과)라→
유과. 고기를 지지는 냄비에다가 채소를
거기에다가 얹어서 먹었다.
그러니까
고기는 안 먹고
고기를 그 사람들에게 삶아주고는,
고기물이라든지 뭐 그 옆에 하며는 맛이 좋겠지요?
그렇게 같이 익혀서 먹으면서...
或(혹)이 問則(문즉)→“왜 그렇게 고기는 안 먹고 늘
채소만 먹느냐?” 그렇게 하니까,
對曰, 但喫肉邊菜(대왈, 단끽육변채)라→
이 유명한 말이에요. 육변채. 나는 육변채만 먹는다.
육변채. 고기 가에 있는 채소만 먹는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뒤에 편집하는 사람들이,
뭐 그 소상한 그런 내용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관계없이 그렇게 좀 이치에 맞도록
이렇게 꾸미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안 먹을 수는 없고 그 사람들은 늘 사냥을 해서
전부 고기를 주식으로 했을 테니까요.
육변채를 먹을 뿐이다.
一日(일일)은 思惟(사유)하니→
그러다가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러다가 진짜 사냥꾼이 되고 말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생각 하니까
時當弘法(시당홍법)이라→때가 마땅히 법을 펼 때가됐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는 내가 나가서 법을
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낌새를 차리게 된 것이지요.
不可終遯(불가종둔)일새→가히 끝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계속 도망만 다닐 것이 아니라...
遂出至廣州法性寺(수출지광주법성사)하야→
드디어 나가서 광주 법성사 에 이르렀다. 이겁니다.
지금의 광주예요. 홍콩옆에 있는 광주요.큰 도시지요.
제가 중국 맨 처음에 갔을 때, 그때는 곧 바로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홍콩을 거쳐서 갔는데, 마침 또 비행기가
잘못되어가지고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갔어요.
홍콩서 기차를 타고 광주 어느 역까지 갔는데,
거기는 국경이었어요.국경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갔는데, 첫 도시가 광주였어요.
법성사도 들려보고 그랬는데, “광주 법성사다.”
그랬어요. 그 때 그 사찰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値印宗法師(치인종법사)의 講涅槃經(강열반경)이러니→
법성사라고 하는 절에 가서,
인종법사의 열반경 강하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그 절에 들렸는데, 인종법사 라는 이가
열반경을 강의를 하고 있었더라.
時(시)에→ 그때
有風吹幡動(유풍취번동)이라→經山林(경산림).
예를 들어서 화엄경산림. 무슨 경산림하면
사찰에서 대단한 불사거든요.
佛事(불사) 중엔 제일 큰 불사입니다.
“경산림”그러는데 열반경을 강한다 그러면,
열반경산림! 그래요. 한 달이나 아니면 100일 한 철이나,
일정을 정해가지고 크게 행사를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찰에서도 오고, 신도들도 오고, 성황을 이루지요.
유명한 법사가 경을 강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경산림” 그래요. 그때 마침 바람이...
그런 불사를 할 때는 幡(번)을 많이 걸어 놓습니다.
五方幡(오방번). 十方幡(시방번).
시방번 같은 것은 冥府(명부)에 해당 되는 것이고,
오방번 하면 동서남북에 따라서 부처님을 뜻하는,
東方瑠璃光世界藥師如來(유리광세계약사여래)=
大醫王佛(대의왕불).
西方極樂世界阿彌陀如來佛
(서방극락세계아미타여래불).
이런 것을 크게, 지금 같으면 현수막이지요.
그 현수막. 그런 것이 절에서부터 발달했는지
아무튼 크기도 그만 해요. 요즘 큰 현수막같이,
그것을 밑으로 길게 거는데 요즘에 보니까
현수막을 밑으로 걸더라고요. 밑으로 거는 현수막이 많지요.
데모할 때 보면 밑으로 많이 세우잖아요.
절에서는 본래 그렇게 밑으로 세웠었어요.
옆으로 거는 법이 잘 없고
꼭 밑으로 내려서 걸었는데,
그것을 법당에 걸어놓는 경우도 있고,
행사 때는 도량에, 온 도량에
그런 것을 많이 걸고 천수경에 있는
다라니를 梵唄(범패)로 써서
그것을 걸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신장들께서,
큰 佛事(불사)에 가피를 내리소서 하는 뜻도 되고,
시방번같은 것은, 보호 해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걸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래서 여기도 그런 것을 많이 걸어놓고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던 모양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로
자주 人口(인구)에 회자되는 말인데요.
一僧(일승)은 云幡動(운번동)이라하고→
한 스님은 바람이 펄렁거리니까,
“아 저거는 번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一僧은 曰 風動(왈 풍동)이라→
“아니야, 번이 움직이지만 바람 없이
어찌 번이 움직이나?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야.”
두 스님이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지요.
다 맞는 말이지요.
論議不己(의론불이)라→
논의가 끝나지 않고 계속 옳으니 그르니
일종의 법담 형식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떠꺼머리총각
慧能(혜능)이 進曰(진왈),→
혜능이 떡 나아가가지고 하는 말이,
끼어든 것이지요. 다투는데 끼어들어서 하는
말이,
不是風動(불시풍동)이요
不是幡動(불시번동)인데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번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서 번이 움직였다손 치더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움직이지 아니하면,
그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 한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움직인다고 인식함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이
인정이 되니까, 그 움직인다고 인식하는 주체는 뭐냐?
결국 마음이다 이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一衆(일중)이 駭然(해연)이라→
놀랐지요. 아! 이거 대단한 소리를 한다.
이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거든요.
지금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이거야 뭐
그야말로 너무나도 기초적인 상식에 불과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 경을 강하는 자리에서,
아마 초심자들이 되었던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印宗(인종)이→
이상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延至上席(연지상석)하야→
상석에 모셔서 대접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眞詰奧義(진힐오의)라→
경에 대한 깊은 뜻. 아니면 불법에 대한 깊은 뜻을
하나하나 묻게 되었습니다.
※
眞詰(진힐) (詰묻다 힐)
이라고 하는 것은 따져 묻는다 이겁니다.
비판적으로 꼬치꼬치 묻는 것을 진힐이라고 그래요.
이 眞자를 불교에서는 아주 잘...
경을 주워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써요.
경을 해석 하는 이들에게는...
詰.
묻다라고 하는 뜻인데, 그냥 순리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으로 묻는 것. 그런 입장을 眞詰이라고 합니다.
見慧能(견혜능)의 言簡理當(언간이당)이라→
혜능의 언간리당함을 보았다.
말은 간단한데, 이치에는 딱딱 맞더라 이것이지요.
말은 간단하면서도 뭐 긴 설명 없이 딱 딱 조리에
맞게 하더라 이것이지요.
不立文字(불입문자)가고요. 또 문자를 말미암지 아니 해요.
말 했다 하면 언필칭 경전의 구절을 인용 하든지,
옛날에 누가 한 이야기를 이끌어 오든지
뭐 그렇게 하는데, 이분은 전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모르니까 인용도 못하고
전혀 문자하고는 관계없이
그렇게 이치에 맞는 말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宗(종)이 云(운),→인종법사가 말하기를,
行者(행자)는 定非常人(정비상인)이라→
행자께서는 결정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가
久聞黃梅衣法(구문황매의법)이 南來(남래)러니→
옛날에 듣기를 황매산 에서
옷과 법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라고 하는 말을
일찍이 들었는데,
15년 전 일이니까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지요.
“법의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라고 하는 그런 말을
들었는데,
莫是行者否(막시행자부)아→혹시 행자가 아니오?
“행자가 그때 그 오조스님의 법을 이어받고.
옷과 발우를 가지고 종적 없이 사라져버렸던
그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인종법사도 뭔가 느낌이 달랐겠지요?
慧能曰, 不敢(혜능왈, 불감)이로다→
혜능이 말하기를, “아이고 감히 내가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런 뜻으로, 말뜻은
그렇지요. 불감. 하는 말은... “아이 나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만, “사실입니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내용은 “사실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실이다.” 라고 인정하는 말이
不敢 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내가 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천만에요. 뭐 이런 뜻이지요.
宗(종) 於是(어시)에 作禮(작례)하고→
인종법사가 그냥 퍽 엎어져서 예배를 올리고,
告請傳來衣鉢(고청전래의발)을出示大衆(출시대중)하고→
전래해온 의발을, 뒤에 짊어지고 있던것을 끌르는데
그 때 전해 받은 옷과 발우지요. 그것을 대중 앞에
내보이게 되었지요.
宗(종)이 復問曰(부문왈),→인종이 다시 묻기를,
黃梅付囑(황매부촉)을 如何指授(여하지수)니잇고→
황매스님께서, 황매산의 오조스님께서
부촉. 불교에서는 분부. 부탁. 또는 가르침.
특히 뒷일에 대해서 遺囑(유촉)을 한다 그럴까?
遺言(유언)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를 부촉이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소임을 줄 때,
“咐囑章(부촉장).” 그런 말도 써요.
임명장 이라는 말보다는 부촉장이라는 말을 잘 써요.
황매산의 오조스님께서 어떻게 가르쳐주었습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指授卽無(지수즉무)하니→가르쳐 준 것은 없어요.
나한테 가르쳐준 것은 없는데, 惟論見性(유론견성)하고→
오직 우리 오조스님께서는 견성만 이야기 했다.
各自(각자) 자기의 성품을 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가르쳤더라 이것이지요. 그리고
不論禪定解脫(부론선정해탈)이니이다→
선정. 해탈은 크게 말하지 않았다 이거예요.
오직 견성하라. 뭐니 뭐니 해도 자기 자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적이고...
불교의 시발이 神의 계시가 있어서
어떤 가르침이 나왔다더라.
또는 어떤 학문이 축적하고, 축적하고
발달해가지고 유교처럼...
옛날에,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문왕이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뒷사람이
거기에 설명을 붙이고, 그 설명에서
다시 공자가 繫辭(계사)를 쓴다든지,
註譯(주역)을 본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발전해가지고 비로소 유교 같은
그런 체계적인 학문이 생겼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불교는...
그것이 다른 종교와 아주 크게 다른 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꼭 인식 하고 있어야 돼요.
神의 계시가 절대 아니고요.
그러면 학문의 어떤 발전 과정을 통해서
오늘 날 까지 이런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저 마음 하나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자성하나 보는 것.
그것 가지고 그냥 불교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저렇게 이야기 하고, 이야기가 길어졌지요.
많아졌지요. 사실 見性(견성)! 이거 하나가지고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이 여기에서 견성이라는 데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性品(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一切萬法(일체만법)의 自性(자성)! 그러지요.
일체만법의 자성이라...
일체만법의 자성을 보았다가 견성이지요.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인데, 불교는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육조단경에서 더욱 이것을 빼버리면
눈이 빠진 결과가 되지요.
일체만법의 자성이라.
일체만법이란 사람을 위시한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뭐라고 했지요?
法性(법성)이라 그랬지요. 일체만법이라고 했으니까...
일체만법을 하나하나 개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자성이라고 그래요.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법성그러고,
이것을 어떤 깨달은 입장에서 말할 때는,
깨달음의 본바탕.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불성이라고 그러지요.
“부처의 성품이다.”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이다.”
이렇게 자성. 법성. 불성. 이런 말을 씁니다.
법성이라고 하는 것도 일체만법의 자성.
만법이라는 법과 성품이라는 성.
그러니 법성이 되고, 그 일체만법들의 하나하나의
개체적인 본질에서 볼 때는 자성이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 같은 거예요 사실은...
자성이나 법성이나 불성이나 진여나, 또 더 발전하면
반야나 지혜나 공이나 결국은 같은 이야기인데,
뭐 禪定(선정)을 닦는다. 生死(생사)를 解脫(해탈)한다.
물론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최종 목표는 견성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惟論見性(유론견성)입니다.
오조스님이 그랬지만,
역시 이건 육조스님도
특별히 주창하는 가르침이거든요.
※
그래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견성을 해서,
일체만법의 자성을 깨달아가지고, 거기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 했고,
육조스님 역시 마찬가지로 일체만법의 자성을
깨달아서 그것 으로서 법을 이어 받게 되었지요.
불교의 출발은 순전히 인간에서부터 출발했고,
인간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고, 결국 인간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 귀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이고 인간이 뭐 별 수 있겠나?”
이렇게 이해하기로 시작한다면,
그 사람들은 그리되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있지도 아니한
그 神을 우리가 막연하게라도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선한 것 같고 높은 것
같으면서도 그것은 사실은 공허한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그런 대목 이지요.
인간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神. 神하지만
사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지요.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요.
신학자들도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분명히 인간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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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由品
宗이 曰, 何不論禪定解脫이니꼬 能이 曰,
爲是二法이요 不是佛法이니
佛法은 是不二之法일새니라
宗이 又問, 如何是 佛法不二之法이니이꼬
能이 曰, 法師- 講涅槃經하야 明佛性이
是佛法不二之法하리니 如高貴德王菩薩이
白佛言하사되 犯四重禁과 作五逆罪와
及一闡提等이 當斷善根佛性否이까
佛言, 善根에 有二하니 一者는 常이요
二者는 無常이어니와 佛性은 非常이며
非無常일새 是故로 不斷을 名爲不二며
一者는 善이요 二者는 不善이어니와
佛性은 非善이며 非無善일새
是名不二라하시니 蘊之與戒를
凡夫는 見二어니와
智者는 了達其性이 無二하니
無二之性이 卽是佛性이니라하니
印宗이 聞說하고 歡喜合掌言하되
某甲의 講經은 猶如瓦礫이오
仁者論義는 猶如眞金이니다하고
於是에 爲慧能剃髮하고 願事爲師어늘
慧能이 遂於菩提樹下에 開東山法問하니라
00000
宗(종)이 曰(왈),
何不論禪定解脫(하불론선정해탈)이니→
왜 선정이니 해탈이니 그 아주 고급스러운 말.
불교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말인데,
선정을 닦는 문제, 생사를 해탈하는 문제,
그것을 왜 말하지 않습니까?
能(능)이 曰,
爲是二法(위시이법)이요 不是佛法(불시불법)이니→
이것은 二법이 된다 이겁니다. 두 가지 법이 되고,
불법은 아니다. 그럼 불법은 뭐냐?
佛法(불법)은 是不二之法(시불이지법)일새→
이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특히 육조스님. 특히 육조단경에서 見性(견성).
일체만법의 자성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각도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그 뒤에 인도의 뛰어난 조사스님들은 빙빙 돌려가지고
별별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그래서
수많은 경전과 어록이 나오긴 했는데,육조스님은
어디에다가 중심을 두고 같은 견성의 문제.
마음의 문제를 설명을 하는가 하면, 불이. 둘이 아니다.
둘로 되어있는데 결국은 둘이 아닌 이치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결국은 中道(중도)의 가르침 이지요.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육조스님이 선종인데
무슨 중도는 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
하지만은 敎(교)고 禪(선)이고 불법인 이상은,
불교인 이상은 중도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나면 선이고 교고 불교가 아닌 것이 되고,
제대로 불교를 간추릴 줄 아는 사람은 꼭 중도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래서 어떤 선사의
어떤 기상천외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중도의 이치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육조스님께서 선정이다. 해탈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요.
그걸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좋게 이야기를 잘 하고요.
그러나 그것은 중심 되는 가르침은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되면 두 가지로 이야기가 된다.
상대적인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지요.
선정을 통해서 해탈을 얻는다. 그래 버리면
상대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법은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마경에도 불이법을 최상의 법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 사찰에 들어가면 不二門(불이문)
이라고 하는 것이 의례히 있게 마련이지요.
둘이 아닌 법이다. 둘이 아닌 도리다.
세상은 전부 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거기에만 딱 봉착이
되어 있으면 그것은 치우치는 소견. 편견.
치우친 소견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둘로 이루어져 있지만 또 둘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차원까지 알아야 비로소 불법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남녀. 시비. 선악. 여기 앞에:
(강)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
그것이 벌써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中道(중도)!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러니까 그것은 다 소위 부정을 뜻하는 것이거든요.
선과 악을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 부정 하느냐 하면,
그것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 인간의 삶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생길 수 있다고 거기에 치우쳐 버리면, 거기에 떨어져
버리면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 정말 圓融無碍(원융무애)
한 마음의 경지는 꿈에도 못 본다 이것입니다.
원융무애한 정말 위대한 마음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선도 악도, 시도 비도, 남도 여도, 동도 서도 거기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하는 그런 가르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不二 라고 하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것입니다.
선도 악도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宗旨面(종지면)에,
근본취지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있어야 되고,이런데
대해서 좀 생각을 많이 해야 납득이 될 그런 대목입니다.
그러나 납득이 되고 안 되고 간에, 불법의 바른 이치를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는,
불이의 법.
중도의 이치.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다른 인과 문제라든지 다른 방편의 이야기가 많지만,
최소한 육조단경을 앞에 놓고는, 달리 딴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육조스님은 뒤에 유언이 있어요.
유언이 있는데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둘이 아닌 도리.
상대 하나하나가 전부 상대로 되었는데, 상대를 초월한
중도의 이치를 가지고 법을 펴라.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건 나의 제자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럴 정도로, 특히 육조단경에서는
우리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간에
불이의 도리! 중도의 도리를
이야기 안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뒤에 가면 36계라고 하는 것.
서로서로 상대되는 도리를 36가지로
분류를 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불법은 불이의 법이다.
佛法은 不二의 法일새.
宗이 又問(우문),→ 인종 법사가 또 묻기를,
如何是 佛法不二之法(여하시 불법불이지법)이니이꼬→
불법이 둘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불법으로서
둘이 아닌 법입니까?
能이 曰,
法師-講涅槃經(법사-강열반경)하야→
법사가 열반경을 강해서 明佛性(명불성)이
是佛法不二之法(시불법불이지법)하리니→
불성을 밝히는 것이 불이의 법이니라.
여기 불성이라고 했지요?
불법은 둘이 아닌 법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둘이 아닌 법이냐?
열반경은 내가 듣기로
불성을 드러내는 경전인줄 알고 있다.
그 불성이 바로 불법이 둘이 아닌, 불이의 법이다.
불성이란 곧 마음이거든요.
앞에서: (강) 자성. 법성. 불성 그렇게 했는데, 다른 말로,
쉬운 말로하면 마음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열반경에서
불성을 왜 그렇게 치우쳐서 이야기했느냐?
부처님이, 그 위대하신 인격자가 보통 사람들처럼
이 육신이 소멸로 들어가니까 거기에 대한 제자들의
실망이 너무 크지요. 육신은 누구나가 다 죽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부처님 같이 위대한 분은 안 죽었으면
싶은데, 죽으니까 얼마나 실망이 크겠어요?
불성은 영원하다.
常住不滅(상주불멸)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열반경에서는 주로 많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성을 밝히는 쪽으로 되어 있지요.
열반경은요.
如高貴德王菩薩(여고귀덕왕보살)이 問佛言(문불언)하사대→
예컨대 열반경에, 육조스님이 무식하다고 해도
15년 동안 사냥꾼들 밑에 있으면서, 아마 경전도 많이
보고, 충분히 그럴 시간이 있었으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뒤에 보면 어떤 경우는 “경을 읽어라. 내가
한번 들어보고 그 이치를 설명하겠다.” 처음 대하는 경은
그렇게 해요.
금강경 같은 것도 금강경주해가 있는데,
그것을 구결이라고 그러거든요.
육조스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그 대목이 끝나면 말로 하는 거예요.
말로 했다고 해서
입 口(구)자. 비결 이라는 訣(결)자.
(口訣)
그래 금강경에는 구결이라고 그래요.
말로 설명을 하는 그런 형식을 취했지요.
열반경에 高貴德王菩薩(고귀덕왕보살)이라고
하는 품이 있는데,
白佛言(백문불언)하사대
犯四重禁(범사중금)과
作五逆罪(작오역죄)와
及一闡提等(급일천제등)이
當斷善根佛性否(당단선근불성부)이까→
고귀덕왕 보살이 부처님께 물었어요.
四重禁.
계를 범한 것. 이것은 불교에서 250계. 348계.
또는 48계. 10중대계 그렇게 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엄격하게 말하는 계율이
殺(살). 盜(도). 淫(음). 妄(망). 네 가지를 이야기해요.
살생. 도적질. 음행. 망어. 망어는 대망어 라고 그래요.
깨닫지 못 했는데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그 망어를 여기서는 대망어 라고 하는데,
그것을 범하고, 또
五逆罪를 짓고... 오역죄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가지 해서는 안 될 일인데, 이것이
殺父殺母(살부살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성인을 죽이고,
出佛身血(출불신혈)이라.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조달이라고 하는 사람이, 제바달다지요?
제바달다가 언덕위에 있다가 돌을 굴려서
그 파편이 부처님 발에 떨어져 가지고,
피가 많이 났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원인이 돼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
破和合衆(파화합중).
화합한 어떤 단체를 이간질을 해가지고 그 화합한
대중을 깨뜨리는 것. 이것은 참 의미 있는 말입니다.
아버지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과 맞먹는 죄가
됩니다.
화합하고 있는 단체를 깨뜨리면...
그건 이간질 시키든지 뭘 하든지,
불란을 일으켜서 화합을 깨뜨리는 것.
이것은 아주 단체생활 하는데
정말 그거는... 개인적으로 어디 가서
무슨 다른 살 도 음 망 을 저지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되는 것이지요.
일천제. 일천제라고 하는 것은, 단선근이라 해서
크게 나쁜 짓을 많이 해서라기보다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것. 그걸 선근을 끊은 사람이라고
그래요. 이 일천제라는 말은 인도 말입니다.
선근이 끊어진 사람.
이 세 종류등이 마땅히 선근 불성을 끊은 것입니까?
불성이 아예 없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佛言(불언),→ 부처님의 대답이
善根(선근)에 有二(유이)다→
선근이라고 하는 것. 거기에 두 가지가있을 수 있다.
一者(일자)는 常(상)이요
二者(이자)는 無常(무상)이다→
하나는 영원한 것.
하나는 영원 하지 않은 것. 무상한 것이다.
佛性(불성)은 非常(비상)이며 非無常(비무상)일새→
이것 중요한 말이에요.
불성은 항상 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항상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중 부정이니까 항상 하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것이 불교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항상 하다고 하든지,
아니면 항상 하지 않다고 無常하다고 하든지,
그래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여기에 그만 부딪히는 거예요.
그러나 불성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 이상은 달리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마음이라고도 합시다.
우리 마음이 항상 한 것 같기도 하고 어때요?
朝夕之變(조석지변). 조석지변 같기도 하고,
그냥 뭐 조석지변이 뭐요.
금방 일초 매분 매초마다 변하는 것은
그건 또 어떻게 된 거냐? 이겁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보면 또 계속 되는 것 같고...
뭔가 뿌리는 계속 되는 것 같아요. 계속 되는 것이
뭐지요?
비무상 이지요. 계속 안 되는 것은 비상 이지요.
항상 하지 않다 이것이지요.
是故(시고)로 不斷(부단)을→
그런 까닭에 끊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을,
名爲不二(명위불이)며→
이름 해서 不二라고 한다. 둘이 아니라고 이름 한다.
끊을 수 없는 겁니다. 본래 이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성을 끊는다.” 이런 말을 썼는데,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그것이
一者는 善(선)이요
二者는 不善(불선)이다→
하나는 선일 수 있고, 하나는 불선일 수 있다.
우리 마음이 선한가 하면 악 하고, 악한가 하면
또 선하고... 그래서
佛性(불성)은 非善(비선)이며 非無善(비무선)일새→
선도 아니고, 선하지 아니한 것도 아니지요.
是名不二(시명불이)라→
이것이 이름이 둘이 아닌 도리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뭐 말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둘이라고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이건가 하면 저거고, 저건가 하면 이거니까요.
때로는 둘이고, 때로는 하나이니까 이렇게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蘊之與戒(온지여계)를 凡夫(범부)는 見二(견이)어니와→
온. 오온 이예요. 色(색). 受(수). 想(상). 行(행). 識(식).
이것을 우리 몸과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
몸 하나.
수= 感受(감수)하는 것.
상= 생각하는 것.
행= 생각이 자꾸 변화해 가는 것.
식= 認識(인식)의 主體(주체).
수 상 행 식 이렇게 몸과 마음을 蘊이라고 그러고,
그리고 戒(계) 는 18계지요.
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意(의).
五官(오관)에서 意識(의식)까지.
그래서 불교에서는 오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 오관 을 해서 의식까지 육관을 말하지요.
육관의 대상은 색. 성. 향. 미. 촉. 법입니다.
거기서,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눈은 사물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혀는 맛을 보고,
코는 냄새를 맡고,
몸은 촉감을 감지하고,
이런 상대적인 여섯 개와 여섯 개를 상대해서
어떤 인식작용이 또한 여섯 개가 있지요.
그래서 삼 육 십팔 해서 18계라 그럽니다.
그것을
범부는 견이 전부 둘로. 상대적인 것으로 보지만,
智者(지자)는→
지혜로운 사람은了達其性(요달기성)이 無二(무이)하니→
그 성품. 그 본질을 깨달아 알아 기성이 무이한 것을
요달한다 본 성품은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본다. 사물을 보고 거기서
“아, 어둡다 밝다, 희다 검다.” 라고 인식하지요?
그러면 세 가지 아닙니까?
여기 “見二. 둘로 본다.”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입니다.
하나에서 눈도 인식이 되고,
눈이 상대하는 사물도 인식이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식 작용도
거기서 하나의 뿌리에서 일어난다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라고 하면 안 되지요.
왜냐?
눈 따로 있고 사물 따로 있으니까요.
또 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식이 따로 있고요.
또 그 인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고요.
그것을 셋이라고도 못하고 둘이라고도 못하고,
그렇다고 꼭 하나라고 고집도 못해요. 고집도 못한다고요.
그래서
“善(선)도 아니고, 不善(불선)도 아니다.”
“常(상)도 아니고, 無常(무상)도 아니다.”
이런 표현을 하게 됩니다.
無二之性(무이지성)이 卽是佛性(즉시불성)이다→
둘이 아닌 성품이 곧 불성이다.
그 본질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둘이 아니지만, 둘이 아니면 하나냐?
그렇지만 하나라는 말은 안 쓰잖아요.
이것이 둘 이라고 치우쳐서 생각하는
그 집착을 깨뜨려 주는 말입니다.
둘 이라고 집착을 하는 말을 깨뜨려 주는 말이라고요.
하나라고 하면 하나에 또 집착을 해버리지요.
이것은 불교의 아주 근본가르침이 돼가지고,
처음 듣는 분들은 좀 어렵게 생각이 들어요.
또 이것이 어려운 거예요. 이 이치에 꿰뚫어 알아버리면,
이 중도 사상. 중도의 공식을 꿰뚫어 알면
불교 다 아는 것이지요. 불교의 근본취지는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다.” 하면 하나라는 말을 안 쓰는 이유.
둘인데 왜 둘이 아니냐? 둘이라고 보고 있는 우리의
집착을 깨뜨려 주어야 그것이 재대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圓融無碍(원융무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 여” 라고 이렇게 우리가 꼭 그렇게 線(선)을
그어놓고 생각하면, 집안과 삶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뭐 예를 들어서 “집안일은 여자가 한다.”라고
그렇게 딱 정해놓고, 치우쳐놓고 딱 그렇게 선을
그어놓고 생각하면 밥 안 해주면, 평생 열흘이 가도
밥 안 해먹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밥해 먹어야지,
없으면 밥해 먹어야지요. 청소도 해야 되고 빨래도
해야 된다고요. 그리고 또 남자가 돈 못 벌어오면
여자가 벌어야지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원융무애하게 바로 인식하고 사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남자가 돈 벌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 산다.”
딱 그래 놓으면, 여자가 죽어버리면 남자도 죽는 거예요
그냥...
바로 따라 죽어야 된다고요. 여자가 어디 볼일 보러 가
버리면, 남자가 밥 못 해먹으니까 죽어야 되잖아요?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렇듯이 모든 존재를, 모든 것을 선이다 악이다.
시다 비다. 라고 딱 고정시켜 놓고 보면, 그것은
백이면 백. 다 틀리게 되어 있어요. 다 잘못되게
되어 있습니다. 善할 때, 딱 “선이다”라고 우리
기준으로 “선이다”해 놓으면, 어디가도 선 이라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거든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우리는 된장찌개가 얼마나 구수하고 입맛을 돋웁니까?
예를 들어서 미국이나 저기 유럽. 아파트 같은데서
된장찌개 끓였다간 당장 쫓겨나요.서양에선 똥 냄새
보다도 훨씬 못 맡는 것이 된장 냄새예요. 차라리
대변 냄새는 맡을 수가 있는데,
된장 냄새는 못 맡는다는 것입니다.
한 번 끓였다가 혼이 났다는 겁니다.
반상회인가 뭐 붙여가지고 공사를
붙여가지고, 시말서 쓰고 절대...
다 갖다버리고...
그런 예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한 번 된장 먹으려고 아파트 안에서 된장 끓였다가
먹지도 못하고 바로 쫓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도 우리 상식으로, 우리
기준으로 그냥 선이다 악이다 하고 그래요.
그것은 아주 지극히 표면적인 이야기인데,
된장 문제니 善 문제니 하는 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문제인데, 모든 존재의 근본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렇다.”
라고 딱 집착해서 봐 버리면 그것은 바로 못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마음은 더욱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마음은 더 그래요.
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는 정말 이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요. 그래 不思善不思惡하라.
그랬을 때 당신의 참 생명이 어디 있느냐?
참 생명은 무엇이냐? 이거지요.
우리는 늘 선이다 악이다. 시다 비다.
치우쳐서 있거든요. 그 치우쳐 있으면
완전한 생명의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
無二之性(무이지성)이 卽是佛性(즉시불성)이다→
둘 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성품이 불성이다.
印宗(인종)이 聞說(문설)하고→
인종 법사가 설하는 것을 듣고는,
歡喜合掌言(환희합장언)하되→
화~ 정말, 정말 기가 막힌 소리를 하거든요.
그래도 이분은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큰 법사라고 해서, 열반경도 강했던 사람이니까
말도 잘 알아들었겠지요.
이런 아주. 아주 간결한 뼈대뿐이잖아요.보면 뭐
긴 설명 없거든요.
某甲(모갑)의 講經(강경)은 猶如瓦礫(유여와력)이오→
마치 내가 열반경을 강의한 것은 기와 쪼가리 같고,
仁者論義(인자론의)는→
그대가 그 의미를 론의하는 것. 의미를 논하는 것은,
猶如眞金(유여진금)이다→ 마치 진금과 같다.
나는 그 동안 헛소리 했다 이겁니다. 기왓장 쪼가리.
저기 뭐 조약돌 보여줬고, 그대는 진금을 우리에게
선사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於是(어시)에 爲慧能剃髮(위혜능체발)하고→
혜능을 위해서 머리를 깎아주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머리를 못 깎은 것이지요.아직까지 행자지요.
15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願事爲師(원사위사)라→대중들이 전부 스승 되기를,
스승으로 섬길 수 있기를 원하거늘,
慧能(혜능)이
遂於菩提樹下(수어보리수하)에 開東山法問(개동산법문)하니라→
혜능이 드디어 보리수 아래서, 보리수가 꼭 있었다기보다,
거기도 보리수가 있었다고 봐야 되겠지요.
동산 법문을 열게 되었다.
인종법사가 원하니까 동산 법문을 열게 되었다.
거기 아마 동산이었던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