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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8번뇌란?
번뇌와 번뇌가 아닌 것을 분별한다는 것을 그렇게 쉽지가 않다.
현실적으로 보면 번뇌라는 것과 번뇌 아닌 깨달음, 즉 보리(菩提)라는 것이
실상은 똑같은 자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든 사람은
번뇌의 본체나 보리의 본체가 원래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즉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탐욕의 불, 번뇌망상의 맹렬한 불을 끄지 않으면 결국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고
고통의 윤회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런 번뇌로부터 떠남은
마치 몸을 괴롭히는 병마에서 벗어나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는 것과 진배 없다.
다만 마음의 병이란 눈앞의 즐거움, 괴로움에 연연하여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번뇌는 결(結)이라 한다.
또한 결업(結業)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번뇌로 인해 여러 가지 악업이 발생되므로,
그로 인해 얽혀지는 업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번뇌망상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백팔번뇌란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108이란 숫자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생각은 각각 어떤 대상을 만나면
그로 인해 좋다, 나쁘다, 평등하다의 세 가지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18가지의 번뇌를 가져오며,
또한 고통, 즐거움,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세 가지 작용으로
18가지의 번뇌를 내게 하니 모두 36가지가 된다.
이를 과거, 현재, 미래 3세간의 것을 계산하게 되니
108번뇌가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3계(三界), 견혹(見惑), 88사(八八使)와 수혹(修惑), 10혹에 10전(纏)을 더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번뇌를 떨쳐버리려면 도를 닦아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2. 12연기란?
불교는 인간이 죽음을 포함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八苦)는 숙명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가 원인이 되어 받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연기에 따라
고의 원인을 밝히고 단계적으로 고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12연기법이다.
12연기를 12지(支)연기라고도 한다.
지(支)란 가지라는 뜻으로 고가 일어나는 단계를 12가지로 분석한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은 밝혀 알았느냐(明), 밝히지 못했느냐(無明)에 따라
모든 업(業)과 괴로움, 생사윤회가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명과 무명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12연기의 차례에 따라 살펴보면.
(1) 무명(無明) : 실재(實在)하지 않는 무상한 것을 실체(實體)로 착각하고
그 무상한 형체를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집착해버리는 어리 석음을 말한다.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인 것이다.
연기(緣起)와 사제(四諸)의 도리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고,
참다운 인생관도 없으니 인생의 고뇌와 불행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2) 행(行) : 이처럼 밝지 못한 상태(無明)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함으로써 습관, 성격, 소질 등 바르지 못한 자기가 형성되어 간다.
즉 이른바 업(業)이 지어지는 것이다.
(3) 식(識) : 이러한 행(行)에 의해 형성된, 잠재된 힘으로
육근(六根)을 통해 받아들인 모든 인식을 판단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한다.
(4) 명색(名色) : 명(名)은 정신적인 것을 말하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을 말한다.
명색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로
인식작용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5) 육처(六處) : 명색이 있으므로 그것을 지각하는 능력이 일어난다.
곧 눈, 귀, 코, 혀, 몸, 의지(意志)라는 육처가 그것이다.
(6) 촉(觸) : 촉이란 <접촉한다> <충돌한다>라는 뜻으로
감각하는 기관(육처)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 : 色, 聲, 香, 味, 觸, 法) 과
감각, 지각의 주체(六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가 화합,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 가지가 만나므로 감각과 지각의 인식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7) 수(受) : 수(受)는 감수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촉에 의해 즐거움이나 괴로움,
그리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도 아닌 느낌의 세 가지가 일어난다.
(8) 애(愛) : 애(愛)는 심한 욕구(渴)를 말한다.
수(受)에 의해 일어난 맹목적인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9) 취(取) : 애(愛)에 의하여 일어난 욕구가 추구하는 대상을 소유화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릇된 소유의 마음으로 살상하고 훔치며 망녕된 언어를 사용하고, 사취하는 등
몸과 언어로써 업(業)을 짓게 된다.
(10) 유(有) : 취(取)에 의하여 <있음>이 발생한다.
몸과 말로써 짓는 행동 뒤에 일어난다.
☞ 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욕망이 있는 욕계(慾界)와
욕망은 없으나 물질이 남아 있는 색계(色界)와
욕망과 물질은 없으나 정신적인 것이 남아 있는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이다.
이 삼계는 모두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11) 생(生) : 이러한 유(有)로 말미암아 존재 자체가 형성된다.
(12) 노사(老死) : 생으로 말미암은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을 말한다.
즉 생사에서 비롯되는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
이 생과 사는 단순히 육체적인 생사만이 아니라 자신이 나고 죽는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3. 격의불교란 어떠한 의미와 의의를 지니는가?.
중국불교의 성격을 논할 때만 특별하게 사용되는 용어인 격의라는 말은
중국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은 불교교리를 널리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유교나 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으로부터 유사한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하여 설명하는 편법을 가리킨다.
이러한 방식에 의거하여
전개된 불교의 총칭이 격의불교라고 한다.
유교보다도 도교의 영향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주로 도교의 사고방식을 이용하여 불교의 이해를 도모한 것이 격의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여
인도에서 성립된 이질적인 불교를 중국 화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에 격의불교의 의의가 있다.
불교의 몇몇 관념들이 중국에 맨 처음 출현하게 된 데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이 분명히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관념과 실천에 있어서
불교와 도교 사이엔 표면상 많은 유사점이 있다.
중국에서 초기에 성립된 불교문헌들은 불교의 관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흔히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오해를 깊게 하였다.
격의불교를 본격적으로 제창했던 사람은 축법아(竺法雅)인데,
그는 숫자로써 교리를 정리하는 법수(法數)에 관해서 격의라는 해석방법을 적용했다.
예를 들면, 오계를 설명하면서
유교의 오상(五常 : 仁, 義, 禮, 智, 信)이라는 윤리개념을 차용하여 이해시키려 하는 등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번역어가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타(他)문화의 언어를 이해하기 쉽게
자(自)문화의 기존언어를 빌어 방편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격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타문화의 언어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초기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격의는 당시의 귀족사회에서 많은 지지를 받으며 번져감으로써 원의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일에 등한히 하고
불교를 중국사상과 혼합 및 융합 시켜 본래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불교 본래의 현실해결 적인 실천적 입장이 도외시되고,
무위적, 도피적 성격의 종교로 불교가 오해되게 만들었으며,
대상 전체를 왜곡하고 거기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격의불교는
문화적 주체성을 강조하거나 문화의 수용방식으로 권장할 만하지만
극복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
4. 관세음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대승불교의 수많은 불. 보살 가운데에서
대중들과 가장 친근한 분이라면 단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들 수 있겠다.
이 같은 관세음보살은 달리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보문품’에 의하면
이 보살의 이름을 특히 관세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언제나 세간의 소리를 관찰하고 계시기 때문으로
갖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들이 일심(一心)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그에 따라 33가지 응화신(應化身)으로 나타나서 즉시 구원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관무량수전>에 의하면
이 보살은 사람이 죽어갈 때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나타나
그를 극락세계로 맞이해 간다고 하며,
<화엄경>에서는
바다에서 재난을 당한 이들을 구호하는 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불교의 깊은 교리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여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난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부르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 모습을 나투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구제의 대승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계신 자비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런 만큼 예로부터 이 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은 일반적인 성관음(聖觀音) 이외에도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백의(白衣), 수월(水月), 여의륜(如意輪)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이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관세음보살의 구제활동을 제각각 형상화 시켜낸 것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관음전(觀音殿) 등으로 부르고 있다.
5. 교단이 삼보 가운데 하나로 공경되는 이유는?
불교에서는 불 법 승의 삼보를 삶의 지표이자 수행의 의지처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특히 승보 즉, 교단이 포함되어 있다.
승보의 승(僧)은 본래 승가(僧伽)를 줄인 말로서,
다른 말로는 중(衆) 또는 화합중(和合衆)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화합의 무리라는 뜻으로,
엄격한 계율과 청정한 생활을 통해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는 수행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승가란 처음부터 집단을 일컫던 말로서 출가 자뿐 아니라 재가의 신자들까지 포함된 말이어서,
우리가 스님 한 분을 승가로서 공경하는 것은 전체 승가를 대표해서 그 스님을 예우하는 것이다.
승가가 우리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와 같은 수행과 화합의 공동체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우리들의 수행이나 올바른 삶에 모범이 되고
부처님의 바른 법이 이 땅에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승가의 내부에서는 부처님 당시부터 누구 나가 선우(善友)를 통했는데,
화합해서 한 길을 가는 좋은 벗 내지는 어진 벗이란 의미로,
우리들이 자주 쓰는 선지식(善知識) 또는 도반(道伴) 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때 제자 아난다로 부터 승가 안에서 좋은 벗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미 도를 절반이나 이룬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좋은 벗을 지니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도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올바른 수행의 공동체 안에서 머물면서 서로 도와 수행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다시 말해 승가가 중시되는 것은 각자의 수행 상에 막대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었다.
6. 나라마다 스님들의 생활방식이 크게 다른 이유는?
불교는 인도라는 사회 문화적인 토양을 기반으로 성립하고 발전했지만,
인도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찍부터 범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해 갔다.
그것은
불교가 그만큼 보편적인 가르침을 지향하는 종교였음을 입증하는 종교로서,
그런 사실은 불교보다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거나
불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된 힌두교와 자이나교가
아직도 인도의 민족종교로서만 머물고 있는 점과 비교해보면 명백하다.
또한 불교가 그처럼 보편적인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면에서 불교가 다른 나라의 문화들에 대해서 대단히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들이
처음부터 아무런 제약 없이 여러 나라 말로 자유롭게 번역 될 수 있었다는 것이 한 증거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불교의 개방성 내지 포용성은
나라마다 각기 다른 자연환경이나 기후조건, 생활문화 등을 고려하여
나름대로의 새로운 불교문화들을 다양하게 산출해 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나라마다 생활방식이 크게 달라 보이는 이유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하루에 한끼를, 그것도 오전 중에만 먹을 것을 가르치셨지만,
중국이나 한국 등 북방의 추운 나라에서 그것을 지키려면 그것을 수행이전에 건강 유지도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출가 수행자가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셨지만,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는 스님들이 직접 논밭을 가꾸며 사원 내에서 자급자족체제를 구축함으로서
왕권에 속박 받지 않고 건실한 수행풍토를 유지할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계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보다 그 참뜻을 헤아려
각각의 처지나 실정에 알맞게 적용시켜 꽃피워낸 것이 각국의 불교문화인 것이다.
7. 대승불교는 어떻게 성립하였고 어떤 가르침인가?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삶의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시된 불교는
애당초 대단히 생기 발랄한 가르침으로서 부처님 당시에 이미 인도대륙의 지역으로 전파되어
엄청난 민중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부유한 재가신자나 왕족들의 후원으로
사원제도가 정착되고 출가 자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가자 교단은 점차 고답적인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출가 신행자들이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교한 연구에만 몰두하여
불교 본연의 임무인 중생교화를 등한히 하게 되었던 것다.
그러자 부처님의 사리탑에 대한 예배 등을 통해 신행 생활을 영위하던 재가신자들과
그들을 지도하던 일부 출가 수행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원전 1세기 무렵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존 승당의 폐쇄적인 태도를 소승(小乘)이라 비판하며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고 일컬었다.
대승이란 큰 수레를 뜻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소승이 몇몇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인데 반해
자신들의 가르침은 폭넓은 중생구제를 한다는 목적이었다.
특히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에 자극 받아 자신들도 현실생활에 여러 가지 선행을 쌓아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되리라는 즉, 스스로 보살이라는 자각을 기초로 성립된 이 새로운 신앙운동은
부처님의 본래 정신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오랜 동안 자유로운 사상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같은 대승의 교의를 담은 경전들을 대승경전이라고 하지만,
<반야경>을 위시하여 <법화경><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 들에는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구제력과 아울러 끝없는 보살행 및 중생구제의 원력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8. 무명의 뜻은?
무명(無明:Avidya)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또는 진여(眞如)에 대하여 비진여(非眞如)를 말한다.
진여를 설명함으로써 무명의 뜻이 명확해진다.
진여는 우주 만유에 보편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본체를 말한다.
이 진여는 우리의 사상개념으로 미칠 수 없는 진실한 경계, 즉 오직 성품을 증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거짓이 아닌 진실하다는 뜻과 변천하지 않는 여상(如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명은 무명번뇌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두워서 명료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마치 수건이나 헝겊으로 두 눈을 가린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자신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고 그 결과 고민만 생기게 된다.
그러면 무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보면
부처님 말씀에 삼법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12연기라고 한다.
☆☆☆
이 12연기의 법상을 알음을 지혜(또는 반야)라고 부른다.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팽배해 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성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 놓은 것이 곧 12연기이며
이 과정을 깨달음으로써 무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다고 간주하는 망상을 하기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형태에 얽매이게 되어 무명이 되는 것이다.
즉 본래 있지 않은 생사를, 무명에 의해 있다고 봄으로써 고통이 생기므로
무명의 타파는 고통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9. 무상이란?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셋으로 표시한 것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하는데
이 중 첫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세상 모든 생물은 태어나서(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고,
거대한 것이나 미세한 것이나 모든 존재는 머물다가 끝내는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 만고불변의 자연 이치이다.
무상이라 하면
예로부터 흔히 세상의 현상이 좋은 방향으로부터 나쁜 방향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가리켰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사람은 죽는 것> 등의 나쁜 방향으로 가는 것만을 무상이라고 했기 때문에
무상이라는 말에는 염세적, 절망적인 뜻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되게 한다.
그러나 무상의 본래의 뜻은
순경(順境)으로부터 역경(逆境)으로 전락하는 것 뿐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의 변화도 포함하는 것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건강하던 젊은이가 병이 나거나 사망하는 수가 있으며,
병약자가 건강해지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무상이 불교의 근본명제(根本命題)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데에는
이론적 이유와 실천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천적으로 무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한다.
무상관의 제일의적인 것은 종교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현 상태가 나쁘게 변화하는 경우, 불행과 비애를 강하게 느끼고 무상의 허무한 느낌을 통감하게 되는데
이때 고뇌와 비애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이상을 구하려는 데에서 종교심이 싹트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상을 관찰함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변화무쌍함을 느껴 집착심과 교만심이 없어지게 한다.
그러한 태도는 주위 사람과 융화가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한번 지나간 과거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느끼게 되므로
현재의 상황과 자기 소질과 인격을 반추하여 촌각을 아껴 정진, 노력하게 하는 것이다.
10.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시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옆에 모시기도 하고 때로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좌우에 모시기도 하는 보살로,
말하자면 각기 지혜와 행원(行願)이라는 부처님의 두 가지 커다란 덕성을 상징하는 분이다.
이 가운데 문수보살의 문수라는 이름은
본래 인도말 만주슈리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 문수사리(文殊師利)를 줄인 것으로,
달리 만수실리(曼殊室利)라고도 하고 묘길상(妙吉祥) 또는 묘덕(妙德)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여러 대승경전에 두루 등장하기도 하여
주로 부처님의 지혜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분으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경전에서부터 나오고 있으므로
본래 대승불교가 성립할 당시의 실제 인물에서 유래된 분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문수보살을 사찰에 모실 때는
손에 칼을 들고 있거나 사자를 타고 있는 형상을 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번뇌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칼이나, 용맹과 위엄의 상징인 사자를 통해
지혜의 준엄한 성격을 암시한 것이라 보여진다.
보현보살은 달리 변길(遍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분인데,
주로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의 의지 즉,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는데 비해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탄 경우가 많은 것도 행원이라는 것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묵묵하게 그러나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코끼리를 통해서
보살도 실천의 올바른 자세를 일깨우는 것으로,
이와 같은 보현보살의 뛰어난 실천력은
특히 <화엄경> <보원행원품>의 귀절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이라는 두 가지 이상을 통해 대승보살도의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11. 미륵불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미륵부처님(彌勒佛)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셔서 중생들을 제도하실 미래세의 부처님으로,
지금은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미륵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아직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미륵보살이라고도 하는데,
미륵이란 인도의 옛말 마이트레야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사랑, 우정, 자애 등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따라서 한문으로 번역할 때는
뜻으로 옮겨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한다.
한편 초기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미륵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실존 인물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미륵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과 <미륵당래하생경> <미륵대성불경> 등이 나오고 부터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의 내용에 따라
역사적으로 미륵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의 두가지 양상을 띠고 있다.
상생신앙(上生信仰)이란
현제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희구하는 아미타신앙과 흡사한 왕생신앙이고,
하생신앙(下生信仰)이란
앞으로 이 땅에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을 숭상하여 십선업(十善業)을 닦으며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장차 전륜성왕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미륵이 태어나 용화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세 차례의 설법으로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이 땅에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건설하시리라는 것으로,
이와 같은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우리는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殿), 자씨전(慈氏殿)이라고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미래불인 미륵부처님 이외에도
과거불, 현재불 등을 모시는데, 이를 통틀어 삼세불(三世佛)이라고 한다.
12. 밀교는 어떻게 성립하였고 어떤 가르침인가?
밀교(密敎)란 말 그대로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의미인데,
불교의 다른 교설들이 모두 드러내놓고 설해진 가르침 즉, 현교(顯敎)인데 반해
자신들의 가르침은 본래 부처님의 심중에 감춰져 있던 것으로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 은밀하게 전수되는 교의임을 표방한 것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세계의 본질을 가장 본격적으로 다루는 가르침이란 입장으로,
다른 의미에서는 대승 불교의 최종단계라는 의미에서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한다.
밀교는 본래 독자적인 불교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불교 수행의 실제적인 형태 속에 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인정되는데,
특히 흰두교의 부흥에 자극을 받아 7세기 중엽부터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 동안 불교의 융성 때문에 침체를 면하지 못하던 인도의 전통사상인 바라문교가
민간의 토속적인 신앙들을 흡수하여 흰두교로 재편되면서 상당한 민중적 호응을 얻게 되자
그에 대한 대응과 융합으로 나온 것이 밀교다.
밀교의 본질은 대승불교의 심오한 사상들을 고도의 상징적인 의례나 수행법안에 용해시켜
그 전승을 꾀하면서도 진언(眞言)이나 관상(觀想) 등 신비적 수행을 통해 종교적인 깨달음 뿐 아니라
재앙의 소멸이나 기타의 세속적인 욕구까지도 충족 시키고자하는 다분히 대중적인데 있었다.
이 같은 밀교의 교의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특히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시며
삼밀가지(三密加持)의 수행에 의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밀교는 특히 불교의 각종 의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도 그 잔재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13. 법당 안의 신중단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가 있나?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일체중생에 대한 구제가 강조되어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 신앙 형태의 특징 가운데 한가지가 인도 재래의 토속신뿐 아니라
불교가 전파되는 여러 지역의 토속신까지도 불교신앙에 수용하여
불법의 수호신으로 편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앙의 유형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신중단을 들 수 있는데,
불법을 옹호하는 성중들을 모신 신중단에는 호법성중, 화엄성중, 혹은 신장이라 불리는 신중등이 있다.
다시 말해 보통 법당안에 부처님을 모신 곳 옆에 자리잡은 신중단에는
불법을 옹호하며 착한 사람을 돕고자 발심한 선신들과 함께
불자들을 돕고자 서원력으로 화신을 나투신 성현들이 자리하신다.
그 가운데 팔대금강신장은 발심한 성현이고,
제석천이나 사왕천, 대법천 등은 이 땅을 평화롭게 지키고자 하는 천상의 성중들이며,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 팔부신장은 신부의 성중이다.
그밖에 많은 호법선신들이 있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불법을 옹호하며 착한 사람들을 돕는다.
신중단에 모신 성현들은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위력이 대단해서
혹은 자비, 혹은 위엄을 나투면서 정법을 수호하고 착한 사람들을 가호한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을 수호하겠다고 원을 세웠고
또 부처님께 부촉을 받은 바이므로 특별히 청하지 않아도 착한 불자를 수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중단에는
부처님이 아닌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셨으므로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를 드린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의 참다운 대상은 부처님이며 부처님의 바른 개달음이다.
그러므로 신중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기원을 할 때도 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14. 법당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우리들은 법당(法堂)이라고 하면
흔히 본존이 모셔져 있는 그 사찰의 중심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실제 불상이나 보살상을 모신 전각을 법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선종이 설하면서부터 이며
고려 초까지만 해도
부처님을 모신 곳은 금당(金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금당이란 부처님을 금인(金人)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금구(金口)라고 하듯이
부처님이 모셔진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직도 법당이란 말보다 금당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당시까지의 전통적인 사찰에서는
본래 부처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던 금당과
법문을 설하고 대중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강당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특히 선종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예배나 신앙의례보다도 법문을 더욱 강조했으므로
사찰의 중심건물을 불상도 모시지만 주로 법문을 설하는 장소 즉, 법당으로 지었던 것이다.
규모가 작은 사찰에서는 불상을 모신 곳에서 법문을 설하고 각종 의례를 행했기 때문에
통념상 사찰의 중심 건물을 모두 법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법당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그 사찰의 본존을 모셔 놓은 곳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포함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상들을 모셔 놓은 곳을 지칭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법당은
말 그대로 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서,
우리 불자들이 법회뿐 아니라 예불과 참회, 기도, 정근 등을 행하는 장소다.
그러므로 법당에 출입할 때는 아무쪼록 정숙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15. 보살님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지물)들은 무엇인가?
불상과 더불어 우리들의 신앙과 귀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보살상들은
손에 갖가지 물건을 들고 계신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물건들은 지물(持物)이라고 해서
그것을 들고 계신 보살님들의 특별한 서원이나 덕성 등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지물들은 겉모습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부처님의 내면적인 면모를
손 모양을 통해 암시하고 있는 수인(手印)과 마찬가지로 불. 보살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특히 지물을 통해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손가락의 모양을 통한 수인보다는 손에든 물건을 통한 계인이
아무래도 그 표현의 방식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와 같은 지물은 보살만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이 들고 계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약사여래부처님이 들고 계시는 감로수병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 감로수 병에는 불사(不死)의 약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을 병고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약사여래부처님의 서원을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감로수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이유로 해서 감로수병은 관세음보살의 지물로도 등장하고 있다.
지물로 사용되는 물건들은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연꽃이나 법륜, 여의주, 경책, 칼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중에서 연꽃은 번뇌에 물들지 않은 밝은 지혜, 법륜은 진리의 끊임없는 전파,
여의주는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불. 보살의 능력, 경책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며,
특히 문수보살이 자주들고 있는 칼은 지혜의 단호하고도 날카로운 면을 상징하고 있다.
16.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여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삼법인(三法印)이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해 왔습니다만,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현실에 대한 투철한 관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면 그 세 가지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쉽사리 영원한 것을 꿈꾸지만
이 세상에서 참으로 영원한 것을 찾아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모든 것은 한 순간도 쉴새없이 변해가고 있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죽어갈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첫 번째 진리이다.
두 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독자적인 실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때는 모든 사물들에 나름대로의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그 사물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잘 살펴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그것일 수밖에 없는 독자적인 성품은 아무 데도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원인과 조건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모든 것은 괴롭다는 뜻이다. 현실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이고
독립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것들이 영원하기를,
본질적이기를 바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세상은 온통 괴로움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이다.
17. 부처님들이 굉장히 많은데 불교는 다신교인가?
다신교란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신들을 함께 숭상하는 종교 유형으로서,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몇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구성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다소 전근대적인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는 종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오직 일원적인 원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유일신교와는 상대되는 개념으로,
말하자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세계의 잡다한 구성 요소들을 제각각 신격화 시켜낸 것이
다인격의 여러 신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교에서 여러 부처님 혹은 여러 보살님들을 모시고 있는 것은
불교가 다원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이 세상의 근본원리는 오히려 일원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불변하고 보편 타당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진리는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 이 세상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부처님이란 그러한 진리를 몸소 깨달아 체득하신 분이고
보살님이란 그와 같은 깨달음의 도상에 있는 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교의 입장에서는
다신교가 아니면서도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얼마든지 계실 수 있고,
또 그 수에 제한을 받을 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특히 보다 폭넓은 중생구제를 표방하는 대승불교가 성립하여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원력에 의한 구원이 강조되면서
각기 특색이 있는 여러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신천행이 널리 설해 졌고
그에 따라 사찰에서 여러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만,
그들은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이념 즉,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표상하는 분들이며
우리들을 구제하여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한결같은 목적을 지닌 분들이다.
18. 부처님 옆에 모시는 두 보살은 어떤 분인가?
사찰의 법당 안에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각각 한 분씩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모셔져 있는 보살님을 우리는 협시보살(脇侍菩薩)이라고 한다.
여러 부처님들의 곁에서
한량없는 중생구제를 보좌하고 보완하면서 시중을 드는 보살이라는 뜻으로서,
이와 같은 협시보살은 본래 중앙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여러 가지 덕성을 보다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강조하기 위해서 모셔지는 분들이다.
이것은 법당에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가에 따라
양옆에 어떤 어떤 보살님들이 모셔지는가가 결정되는데,
예를 들면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의 경우에는
각기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행원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모시거나,
대자대비의 관세음보살과 대원본존 지장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또한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극락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고,
약사전의 약사여래부처님께는
모든 보살들의 우두머리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서 모셔진다.
협시보살들은 본존으로 모시는 부처님들에 비해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고 온갖 화려한 장식을 두르고 있는 등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띠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무명의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최고의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님은 아득히 멀기만 한 분인데 반해
보살은 그 사이에 계신 분들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협시보살들의 또 다른 중요한 임무는
그와 같은 부처님과 중생사이의 현격한 격차를 메워주는 일종의 교량 역할이라고도 하겠다.
19. 부처님 뒤에 모시는 탱화는 어떤 것들이 있나?
우리들의 귀의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사찰의 주요 성물이라고 하면
탑이나 불. 보살상 이외에도 탱화(幀畵)를 들 수 있습니다만,
탱화란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위시한 수많은 성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각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성된 불. 보살상에 비해
평면적인 회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
탱화를 모시는 것도
본질적으로 불. 보살상을 모시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조각에 비해 그 표현의 방법이 얼마든지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탱화는 독립적으로 모셔져 예배와 귀의의 대상이 되는 이외에도 불. 보살상의 뒤편에 모셔져
앞에 모신 불. 보살상을 미쳐 다 표현해내기 어려운 불교의 상징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탱화로서,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서는 탱화를 통해 불. 보살의 장엄한 국토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탱화들은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모셔진 탱화인가에 따라 상당탱화, 중단탱화, 하단탱화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여기에서 상단이란 불단을 가리키고 중단은 보살단, 하단은 신중단을 지칭한다.
또 주존으로 모신 분이 어느 분인가에 따라 여러 불. 보살님들의 태화 이외에
나한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제석천룡탱화, 시왕탱화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그 밖에 그려져 있는 내용에 따라 구분되는 경우도 있다.
즉, 팔상탱화나 감로탱화, 아미타내영탱화 등의 구분이 그것인데,
팔상탱화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팔상성도를 그려 모신 것이고,
감로탱화는 우란분재에 얽힌 내용,
아미타내영탱화는 사람들의 임종 시 아미타부처님이 맞이해 가는 광경을 각각 묘사한 것이다.
20. 부처님이란 무슨 뜻이며, 어떤 분을 가리키나?
부처님이란 인도의 옛말 붓다에서 온 우리말로,
본래는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한자로 번역할 때
소리나는 대로 불(佛) 또는 불타(佛陀)라고 하기도 했고,
뜻으로 옮겨 각자(覺者) 등으로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가 부처님이고,
그로 인해 완성된 삶으로 나아 간 이가 부처님이다.
또한 누구나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불교에서는 일찍이 인류 역사 속에 실재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부처님들이 계심을 가르치고 있다.
21.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명칭 - 여래십호(如來十號)
부처님의 위대한 덕성(功德相)을 나타내는 열 가지 명칭을 여래 십호라 합니다.
각각의 명칭은 여래(如來),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세존 등이며
간략하게 설명해 보면,
첫 번째로, 여래(如來)란 범어로 tathagata라 하는데
이것은 ‘진리로부터 온 사람’이란 의미와 ‘피안에 도달한 사람’이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진리를 여실히 깨닫고 가셨다’는 의미로 여거(如去)라고도 한다.
두 번째, 응공(應供)은 범어로 arhat인데,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 천상의 중생들로부터 ‘마땅히 공양 받을 만한 덕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세 번째, 정변지(正偏知)는 범어로 samyaksambuddha(삼먁삼불타)라 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자비를 갖추어 온갖 우주간의 물심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정각(正覺), 등각(等覺),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 정진도(正眞道)라고도 부른다.
네 번째 명행족(明行足)은 범어로 vidyacarana-sampanna라 하는데,
‘지혜와 실천을 겸비한 이’란 의미로 명(明)은
무상정변지(無上正偏知), 행족(行足)은 각족(脚足)이란 뜻으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가리킨다.
즉, 부처님은 삼학의 각족에 의하여 무상정변지를 얻었으므로 명행족이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선서(善逝)는 sugata라 하여, 호거(好去), 묘왕(妙往)이라고도 번역한다.
이 의미는 ‘깨달음의 세계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시는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윤회에서 벗어나 대 지혜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세간해(世間解)는 ‘세상을 잘 아는 이’란 뜻으로, 범어로는 lokavid라고 한다.
좀더 설명하면,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생활원리를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진리의 세계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속성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 번째 무상사(無上士)는 범어로는 anuttara(아뇩다라)를 말하는데, ‘더없이 높은 분’을 의미한다.
복덕과 갖춤은 물론 계행(戒行) 등이 완전하여 이보다 더 완전한 이가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말로 무상장부(無上丈夫)라고도 한다.
여덟 번째 조어장부(調御丈夫)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분’이란 의미로,
부처님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지(大智)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범어로는 purusa-damya-sarathi 란 한다.
아홉 번째 천인사(天人師)는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모두 해탈케 하는 원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열 번째 불세존(佛世尊)은 범어로 buddha-lokanatha라고 하며,
불타는 ‘깨달은 사람’,
세존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뜻으로, 합쳐서 ‘깨달음을 얻은 존귀한 사람’ 이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덕성을 갖추고 중생들의 제도에 힘쓰시는 분으로 인류의 모범이며, 위대한 스승이다.
22.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범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해 왔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불교는 그 양상에 따라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두 가지로 나누어 지고 있다.
남방불교란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 아시아 각국의 불교로서,
스리랑카를 위시한 타이, 미얀마, 캄푸치아, 라오스 등지의 불교를 말한다.
이에 반해
북방불교란 티벳과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산재해있는 불교이다.
말하자면
인도로부터 남쪽으로 전해진 불교와 실크로드를 거쳐 주로 북쪽으로 전해진 불교를 가리키는 것인데,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주된 차이는
북방불교가 대승불교를 전승하고 있는데 비해
남방불교는 테라바다 즉, 상좌부(上座部)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좌부란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100년쯤 지나서 부터 시작된 불교교단의 분열을 통해 등장한 20개 부파 가운데 하나로,
교학사상이나 수행의 전통 및 계율의 준수 등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한역<아함경>과 같은 수준의 초기 경전인 <팔리어 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종래에는 이들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승불교 우위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오히려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초기 교단적인 전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들 나라의 불교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다분히 유신론적 경향에 의거하여 깨달음 그 자체보다도
청정한 믿음이 좀더 강조되어온 북방불교와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아직도
엄격한 계율과 참된 수행을 중시하고 있는 이 그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23. 불교교단의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불자들의 수행과 화합의 공동체인 승가는 출가 자뿐만 아니라
재가신자까지도 포함한 칠부대중(七部大衆), 혹은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칠부대중이란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의 일곱 부류를 일컫고,
사부대중은 그 중에서 미성년자를 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만을 지칭하지만
보통은 칠부대중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일반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비구란 출가한 성년의 남자 스님을 뜻하고,
비구니란 여자 스님을 뜻한다.
어원적으로 본다면 비구와 비구니라는 말은
인도의 옛말 비크슈와 비크슈니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걸식하던 사람을 의미하던 말이다.
그러므로 비구와 비구니는
재가신자들의 보시에 의해 생활하면서 수행과 전도에만 전념하는 전문 수행자로,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남방불교의 경우는 227계와 311계)의 구족계를 수지한다.
우바새란 재가의 남자 신자를 의미하는 말로 청신사(淸信士)라고도 하며,
우바이는 재가의 여자 신자로 청신녀(淸信女)라 한다.
인도의 옛말 우파사카와 우파시카를 옮긴 것으로,
돌보아주고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5계를 지키고 출가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경제적으로 출가 수행자들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것이
재가 신자들의 역할이다.
사미란 출가는 했지만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20세 미만의 남자를 말하며,
사미니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18세 미만,
식차마나는 18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 출가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일종의 견습생으로서,
사미와 사미니는 10계를 지니고
식차마나는 정학녀(正學女)라고 해서 6법계를 지킨다.
24. 불교에는 어떤 기념일들이 있나?
불교의 기념일은 모두 부처님의 일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부처님의 탄생과 구도, 입멸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장(章)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불교의 4대 기념일이 정해졌다.
가장 크게 기념하는 것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인 사월 초파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성대하게 봉축의식을 행하며
모든 불교인들이 그 날의 의의를 되새기고 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은 2월 8일이라는 설과 4월 8일이라는 설이 있다.
이러한 설로 혼란을 막기 위해 1956년 11월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린 제 4차 세계불교도대회에서는
양력 5월 15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공포,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기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관습에 따라 음력 4월 8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매년 그날을 <부처님 오신 날> 국정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출가절(出家節)도 중요한 불교의 기념일이다.
부처님께서 싯타르타 태자 시절에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하신 후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생, 노, 병, 사(生老病死)의 수레바퀴를 벗어나기 위해 택하신 결단이 바로 출가다.
이는 문제로부터의 회피가 아닌, 문제와의 정면대결인 셈이다.
음력으로 12월 8일은 성도절(成道節)이다.
6년에 걸친 고행 끝에 드디어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의 깨달음을 구하시어, 각자(覺者)인 부처가 되신 날이다.
바로 이 날을 기해서 부처님께서는 전 인류에게 더할 수 없는 진리를 몸소 나타내 보여주시는 대 스승이 되신 것이다.
선정에 드셨던 그 자리, 보리수나무 아래서 눈을 들어 홀연히 비치는 한 줄기 별빛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 구하던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법칙을 깨달으셨는데,
그로 인해 지금도 보리수나무, 보리수 열매는 지혜를 상징하게 되었다.
보리수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것에는 이런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절(涅槃節)이 있다.
음력 2월 15일인 이 날은 부처님께서 45년간의 전법(傳法)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쌍 사라나무 아래에서 고요히 입멸하신 날이다.
☞ 부처님께서는 울며 매달리는 제자들을 향해
「너 스스로를 의지하여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진리 자체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등불을 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법귀의 자귀의(法歸依 自歸依),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그 유명한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25. 불교는 부처님보다도 진리를 신봉하는 종교라는데
불교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만 기초하여 성립된 대단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종교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를 우리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진리와 부처님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절대 이치로서,
그것은 부처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인격체인 부처님은
단지 그 진리를 깨달은 이로서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그러한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불교는
부처님이라는 인격체보다는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존립근거 즉,
진리를 더욱 존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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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전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이러한 불교의 기본태도를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벨루바나정사에 계실 무렵의 일 이었다.
박카리라는 제자가 중병에 들어 죽음을 앞둔 채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뵙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몸소 그를 찾아 가셨다.
부처님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박카리는 애써 몸을 일으켜 부처님께 예배하려 했다.
그러자 그를 말리며 부처님께서 타이르셨다.
'늙어빠진 이 몸뚱이를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진리를 본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의해 사시는 분으로서,
우리들이 진정 귀의하고 예배해야 할 대상은 부처님의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이 당신의 삶으로 구현하고 계시는 진리 그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26.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소멸해버린 이유는?
☞ 불교가 오늘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이며
그 최초의 뿌리를 내렸던 토양인 인도에서 소멸해 버린 데 대해서는
대체로 인도 불교가
말기에 이르러서 전반적으로 밀교화 되어버린 것과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이라는 두 가지 원인 거론되고 있다.
10세기 무렵부터 인도대륙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슬람교도들의 침공을 받아
한때는 이슬람 왕국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흔히 한 손에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이라는 격언이 일깨우듯
이슬람교의 타종교에 대한 박해와 회유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불교는 상당히 많은 사원이 그들에 의해 약탈,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들이 학살당하는 등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참화를 입고 마침내 인도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유로서
불교가 소멸하게된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밀교의 성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박해를 받았던 힌두교는
아직도 인도 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존속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7세기 중엽 이후 힌두교의 부흥에 자극 받은 불교는
급속히 밀교화 되어가기 시작했는데, 애당초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에 부흥하기 위해
각종 의례나 제식, 신비적인 주술 따위에 의존하며 힌두교의 여러 신들,
예를 들면
범천(梵天)이나 제석천(帝釋天), 변재천(辯才天), 부동명왕(不動明王)까지도 존숭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밀교는
심지어 남녀간의 성행위를 수행의 한 수단으로 삼는 탄트라 불교로까지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석가모님 부처님이래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청정한 수행이라는 독자적 특성을 잃어버린 불교는
이미 내적으로 힌두교에 흡수돼 갔던 끝에
13세기경 이슬람교의 박해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27. 불교에서는 삶의 괴로움이 어디에서 유래한다고 봅니까? (삼독)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고통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인생의 현실은
괴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
그와 같은 삶의 현실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이치를 밝게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현실에 얽매여 온갖 업을 지으며 헛되이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진리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 중생들은
왜 진리를 쉽사리 깨닫지 못하고 무명 속을 헤매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중생들에게 번뇌가 아주 많다는 의미에서 백팔번뇌(百八煩惱)라는 말까지도 씁니다만,
그러한 번뇌들이 중생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웬 만큼의 노력으로는 올바로 진리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번뇌들 가운데 가장 뿌리깊은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를 꼽는다.
이것은 흔히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번뇌의 작용이 독약과도 같으므로 삼독이라 한다.
경전에는 삼독의 속성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은
각기 물감이 풀어진 물, 끓는 물, 이끼가 낀 물과 같아서
그런 물에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들은 마음이 번뇌로 덮여 있기 때문에 진리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닦아 가는 것이
바로 불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28.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삼신불(三身佛)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나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불교계 내부에서는 부처님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부처님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완성된 삶의 모습을 보이실 수 있었을까? 하는
부처님에 관한 탐구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삼신설(三身說)이라는 사상이었다.
삼신설이란 부처님에게는
그 성격상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는 세 가지 몸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서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본질(本質) 내지는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근거는
그 깨달으신 진리에 있으므로 진리가 바로 부처님의 본질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같은 법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부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세상 만물 안에 두루 내재하여 계시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부처님의 화현(化現)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처님 즉, 법신불을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 한다.
한편 보신이란 부처님은 일정한 서원이나 수행의 과보로서 부처님이 되셨으므로
부처님의 또 다른 본질은 그와 같은 수행 내지는 원력이라고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신으로 이루어진 부처님 즉, 보신불로는 아미타 부처님이나 약사여래 부처님 같은 분을 예로 든다.
또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기능이 중생의 구원이므로 구원할 사람들의 요구에 의하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신 부처님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예이다.
☞ 그리고 이 같은 세분의 부처님을 함께 모시는 것이 삼신불(三身佛)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미타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
혹은 노사나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좌우에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29. 불교의 수행은 근본적으로 어떤 원리를 지니고 있나? (삼학)
인간의 수많은 번뇌 가운데 마음으로 짓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삼독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소멸시켜 고요하고 평안하며 아무런 걸림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불교의 수행입니다만,
그와 같은 수행 법들은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
즉,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 수련을 그 기본원리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교의 여러 수행 법들은
모두가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세 가지 수련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계율이란 일상생활 속에 지켜야 하는 자발적인 도덕 규법들로
제가신자들이 받아 지니는 오계(五戒)를 위시한 십선계(十善戒), 팔재계(八齋戒) 등을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이상의 계율들을 통해 절도 있는 생활을 습관화 시켜 나감으로서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헛된 욕망을 제어하여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선정이란 좌선(坐禪)과 같은 정신집중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래 선정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요가의 일종으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호흡과 자세를 가다듬고 의식을 한곳으로 통일시키는 수련 법이다.
이 같은 수행은 특히 산란한 마음이나 동요된 마음, 분노 따위를 제어하여 마음속에 지혜를 일으킬 터전을 마련한다.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는 이와 같은 선정수행을 특히 중요시하여 거기에 깊은 사상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기르는 수행으로,
우리의 몸이나 감각 등에 대해 덧없고 괴로우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관찰하고
연기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지혜의 수행을 통해 진리를 통찰하게 되면
마음속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게 된다.
30. 불교는 어떤 종교이며,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다른가?
불교는 그 어떤 절대적인 신이나 신의 계시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교조 석가모니부처님의 순수한 인간적 노력에 의해 성립된 세계 역사상 유일한 종교로서,
이와 같은 불교의 종교적 특징은 그 교리 전반에 걸쳐 대단히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부처님은
당시의 인도를 풍미하고 있던 여러 종교사상들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요약하여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
이것은 불교가 어떤 종교이며
다른 종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규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된다.
☞ 그 세 가지란
첫 번째는 존우화작인론(尊祐化作因論)이라 하여
이 세계가 이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근본원인은 초월적인 신적 존재의 의지라는 주장이고,
두 번째는 숙작인론(宿作因論)이라고 해서
과거의 어떤 원인이 숙명적으로 현재의 세계뿐 아니라 미래의 세계까지도 결정짓고 있다는 주장이며,
세 번째는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이라 해서
이 세상의 온갖 현상에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은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므로 그릇된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절대자가 있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먼 과거에 정해진 그 어떤 숙명에 따라 풀어져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그럴만한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결과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무엇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며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기초하여 합리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종교임을 알 수가 있다.
31.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다고 보나?
세상만물은 끝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서
그 속에 영원불멸의 독자적인 실체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지만,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근본원리,
다시 말해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이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 불교에서 가르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근본이치 가운데
첫 번째는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지만,
하나의 결과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는 인연(因緣)의 법칙이다.
세상만물의 변화는 인과 연 즉,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에 따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싹이 트는데는 씨앗이라는 직접적인 원인뿐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수분, 햇빛 등의 간접적인 조건들도 똑같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어서 세 번째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만물은 인과와 인연의 법칙에 따르고 있지만,
개개의 사물들은 다시 서로가 서로를 의존해서 존립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되려면 자식이 있어야 하지만,
자식은 또 부모가 있어야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이치들을 잘 헤아려보면
만물에는 일정한 법칙이 내재되어 있고 그런 법칙성이 바로 만물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즉 세상만물은 그 자체가 진리를 담고 있고,
또 그 진리야말로 만물을 만물이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한 마디로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서로가 서로를 말미암아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32. 불교에서는 우주의 시원(始原)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대부분의 종교들은
우주의 시원(始原)으로부터 자신들의 교리를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세계가 어떻게 발생하였고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종교인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됐다고 가르치고 있을까?
물론 불교에서도 우주의 시원에 관한 가르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장아함의 세기경(世記經)과 ‘기세경’‘기세인본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가르침들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 논의들은 당면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로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한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부처님은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것은 당시 인도사상계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중요한 논제였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즉 독화살에 맞은 사람이 자신이 맞은 화살의 종류, 재료, 성분 등이나
자신을 쏜 사람의 이름, 나이, 가문 따위를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고 치료받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의 치료도 받기 전에 죽을 것이다.
다시 말해 쓸데없는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매진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독화살에 맞은 사람과 같은 처지이다.
우주의 시원(始原)처럼 확인할 길 없이 무익하기만 한 논의에 매달리기보다
주어진 현실을 정확히 관찰하고 그 속에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33.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불교에서의 법(法), 혹은 법보(法寶)라고 해서
진리를 부처님 및 교단과 더불어 삼보의 하나로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법 즉, 진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불교에서 쓰는 법이란 말은 인도의 옛말 다르마를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소리나는 대로 옮길 때는 달마(達磨)라고 한다.
이 말은 본래 유지하는 것, 인간의 행위를 지키는 것 정도의 의미였는데,
인도에서는 관습, 습관, 의무, 사회제도나 질서, 착한 행위, 진리, 본질, 종교적 의무 등
대단히 다양한 의미로 쓰여졌다.
또 불교에서도 법이라는 개념은
진리, 법칙, 행위규범, 바른 것, 사물이나 존재, 본성, 부처님의 가르침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의 낱말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포괄적으로 담겨지게 되었을까.
본래 석가모니부처님은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만,
그때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란 다름 아닌 이 세상이 이와 같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이치, 즉, 법이었다.
또한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에 의하면
이 세상 만물은 모두 그와 같은 법칙을 근거로 존립하는 것일 뿐
독자적인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니므로
사물이나 존재, 본성 따위도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도 그와 같은 진리였고,
부처님 권장하신 바른 길, 착한 행위도 모두 그와 같은 진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법은 진리 이외에도
사물이나 존재, 본성, 올바른 행위, 부처님의 가르침 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한자의 법(法)자가 물 수(水)자와 갈 거(去)자를 합쳐서
물이 흐르는 방향 즉, 자연의 순리를 의미하듯 불교의 진리도 그와 같은 것이다.
34.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불교는 그 어떤 절대자나 절대자의 계시 따위에 의존하는 여타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오로지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성립된 종교인만큼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도 대단히 긍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다.
흔히 불교의 가장 보편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업설(業說)이라고 합니다만, 업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의 업 즉, 스스로의 의지적인 행위의 선악에 의해
장차 좋은 결과를 받기도 하고 나쁜 결과를 받기도 하며
천해지기도 하고 존귀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짓는 업즉,의업(意業)으로,
불교에서는 의업을 특별히 사업(思業)이라고 하여
신체적 행위나 언어 활동 즉, 신업(身業) 및 구업(口業)과 구별하고 있다.
신업과 구업이
사이업(思而業), 다시 말해 생각하고 나서 짓는 업인데 반해
사업이란 그보다 선행하는 업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수행을 권하는 입장에서도
법등명 자등명 법귀의 자귀의(法燈明 自燈明 法歸依 自歸依)라고 해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으며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에 귀의하라고 하셨다.
즉 불교에서의 수행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와 자기 자신만이 의거해야 하는 것으로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성과 더불어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의지적인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일깨운 가르침이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태도에 대해
우리들은 흔히 자력교(自力敎)라는 말을 쓰고 있다.
35. 불교는 염세적인 종교 같은데 과연 그런가?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힘으로써
완성된 삶, 성스러운 도(道)로 나아가기 위한 불교의 수행은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투철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덧없고 유한하며 비본질적이고 오직 괴로울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인식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출가수행자가 선택하는 길은
가정과 재물, 사회적인 지위 따위를 모두 포기하는 길이며,
나아가서는 온갖 명예와 욕망과 안락과 집착까지도 벗어버려야만 하는 것이어서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못 비정하고도 험난한 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불교는
염세적인 종교가 아닌가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오랜 동안 유교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던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사회의 일부에서는
출가생활이 전제가 되는 불교의 수행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러면 불교는 과연 염세적인 종교일까?
그 해답은 이상과 같은 냉철한 현실인식과 세속생활의 포기가
불완전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임을 이해하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일찍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말하자면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유롭고 평안하며 안온한 가운데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참으로 완성된 삶이 불교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분명한 목표를 향해 정진해가는 태도를
염세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현실에 대해
이 정도 투철한 관찰도 없이 인간의 구원을 외치는 종교들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엄격히 말해
인류를 올바로 계도해야 할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6. 불교에서는 우리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괴로울 뿐이라는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입니다만,
우리 인생의 현실에 대해서 불교는 특히 업(業)과 윤회(輪廻)로서 설명하고 있다.
윤회란 먼저 옛날부터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굳게 신앙되어 온 가르침으로서,
모든 생명체는 죽은 다음에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바꿔서 다시 태어난다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모두 오랜기간 동안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고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업(業)에 의해 내세에 천상과 같이 더 좋은 곳에 태어날 수도 있고
짐승이나 지옥처럼 더 나쁜 상태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생을 결정하는 요소인 업(業)에 대해 대부분의 인도 전통 사상들은
신에 대한 정성 어린 제사나 자신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가르쳤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카스트라는 계급제도가 엄격히 유지되던 사회로서,
내세까지도 현재의 계급과 연관시켜 하층계급의 사람은
단지 자신의 직분에 만족하며 성실히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업이라는 것에 대해
종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통해 인간의 평등을 선언 하셨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가 업(業)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천해지기도 하고 고귀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에는 신체적인 행위나 말뿐이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포함된다.
그리고
선업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사의 고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현실로서, 그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하신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37. 불교의 윤회(輪廻)와 업(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상의 언어에서 윤회와 업은
불교를 상징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개념이다.
특히 업은 이 말이 지닌 본래의 의의가 무시된 채,
자신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합리화하는 말로서 쓰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것도 다 네가 타고난 업이다.”는 등의 말을
우리는 흔히 사용하던가 또는 듣고 있다.
따라서 업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 된다.
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불교의 교리 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업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일반화된 데에는
교리를 실제에 적용함에 있어서의 잘못된 경향 때문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리를 따지기 이전에 당장 눈에 띄는 모순도 있다.
업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관념에서 업이라는 개념은 윤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일상적인 관념에서 업이라는 것이 없는 편이 좋을 부정적인 것이라면
윤회 또한 원해서는 안될 부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신앙 인들은 사후에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길 바라며,
그 다음의 세계에서도 더욱 좋은 신분으로 자신의 삶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불교의 교리 상으로 보면
업과 마찬가지로 윤회로부터도 탈피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에 있어서 교리와 현실과의 괴리는
결국 윤회와 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적용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38.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경지란 어떤 상태인가?
불교는 스스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락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뜻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이라고 도 하고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여 즐거움을 베푸는 종교라는 뜻에서
발고여락(拔苦與樂)의 가르침이라고도 합니다만,
불교에서 이상으로 삼고 있는 영원히 안락한 경지란
보다 구체적으로는 열반(涅槃) 혹은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열반이란 인도의 옛말 니르바나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불어서 끈다는 뜻을 지니고 있던 말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온갖 헛된 욕망과 집착의 불길이 완전히 꺼져버린
고요하고도 평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말은
그 의미에 따라 멸(滅), 멸도(滅度), 적멸(寂滅)등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또한 해탈이란
아무런 걸림이나 장애가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일컫는 말로서,
특히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이야기한다.
먼 옛날부터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나고 죽는 고통만을 거듭하는 괴로운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던 인도의 여러 종교사상들은
한결같이 그 종교적인 목표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두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바로 해탈이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해탈이 곧 열반이라고 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교설을 정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부처님은 윤회를 인정하고 윤회를 결정하는 요인을 업이라고 보아 선업(善業)을 권장하기도 했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길은 열반에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올바른 수행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완전히 제거된
고요하고 평안한 열반의 경지는 아무런 걸림이 없으므로 윤회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39.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바르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팔정도)
불교는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어 가는 가르침으로서,
그 구체적인 방법은 여덟 가지 바른길 즉, 팔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그 여덟 가지 바른 길의 바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기준에서 올바른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특히 정견(正見) 즉, 올바른 견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바르다는 것의 기준은 중도(中道)라고 해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독자적인 실체라는 것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서 존속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만,
그와 같은 현실을 올바로 보고 거기에 입각해서 스스로의 적절한 자리 매김을 해 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관계 속에서만 존립하는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살펴 쓸데없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 중도로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일찍이 보리수 아래에서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실 때
지나친 쾌락과 지나친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나 중도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실 수 있었다고 한다.
☆☆☆
불교에서는
이러한 중도의 입장에 대해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비유를 들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벨루바나정사에 계실 무렵
소나라는 비구가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쉽사리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그만 출가 수행을 포기할 생각을 했다.
그때 부처님은 소나의 그런 생각을 아시고 거문고를 비유로 들어 타이르셨다.
즉 거문고의 줄을 너무 팽팽하게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늦추면
제대로 된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도 지나친 집착이 없이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조급하다보면 들뜨기 쉽고 너무 미루면 나태해져서 올바른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가르침이었다.
40. 불교는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나?
우리나라에 맨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17대왕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즉, 서기 372년의 일이다.
이해 2월에 중국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보내옴으로써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2년 후에는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최초의 사찰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간의 공식적인 전래로서,
그 이전에 민간 차원에서는 이미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던 것 갔다.
즉 동진(東晉)의 지도림(支道林)이라는 고승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당시의 고구려 스님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도림이라는 스님은
소수림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돌아가신 분이므로 연대적으로 훨씬 앞서는 것이다.
사실 소수림왕 시절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지 400년 가까운 시기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 즉,
384년 9월에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인도의 스님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온 것이 그 처음이다.
그때 왕은 교외까지 나가서 스님을 맞이하고
이듬해 2월에는 한산(漢山)이라는 곳에 절을 짓고 열 사람의 스님을 출가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에서 불교가 처음 공인된 것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직후인 제 23대 법흥황(法興王)14년 즉, 527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중국을 통해서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오늘날에는 중앙아시아나 남방으로부터 직접 도래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41. 불교의 각 종파들은 어떻게 해서 성립되었나?
본래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
상당기간은 경전을 한역(漢譯) 즉, 한문으로 옮기는 것이 커다란 과제였고,
사실상 중국불교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방대한 양의 불교 경전들을 거의 남김 없이 번역해 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번역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수많은 경전들의 교학(敎學) 사상적 위치를 확인하고
그들 사이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인도에서의 불교에서는 일정한 시기를 두고
꾸준히 교학이 발전하며 그때그때 새로운 경전들이 만들어 졌지만,
그것이 중국에 전해질 때는 그 발전의 순서나 역사성이 무시된 채,
특히 대승과 소승의 경전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유입이 되었으므로
도대체 어떤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고 어떤 것이 부수적인 것인가 하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뛰어난 스님들은
불교 교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는데 모든 노력들을 경주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일을 우리는 교상판석(敎相判釋), 또는 줄여서 교판(敎判)이라고 하며
그에 따라 성립된 것이 중국불교의 각 종파(宗派)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교단조직을 수립한 것이 종파로서,
이 같은 종파를 최초로 세운 이는 천태종(天台宗)의 창시자인 지의(智)였다.
그리고 교학상의 다른 입장이나 중요시하는 경전과 수행 법에 따라서
화엄종(華嚴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선종(禪宗), 정토교(淨土敎) 등
여러 종파가 제각각 발전하여 마침내 종파불교라는 중국불교의 가장 큰 특색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같이 종파를 앞세우는 전통은 한국이나 일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2. 불교는 철학일 뿐 종교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던데
흔히 불교는 인생의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가 여타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철학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굳이 종교와 철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보려고 하는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와 같은 구분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근원적으로 헤부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두 가지 토대를 기반으로 이원적으로 형성된 서구문화는
언제나 헤부라이즘적 요소인 종교적 감성과 헬레니즘적 요소인 철학적 이성을 상호 융합시키기가 힘들었고,
거기에서부터 종교와 철학이 서로 다른 범주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발생한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우리 동양 권은
본래 일원적인 문화 토양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없었다.
모든 사상은 철학인 동시에 종교였고,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불교를 놓고
철학이냐, 종교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기만 하다.
또한 구태여 철학과 종교를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철학이 완전한 철학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그 어떤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종교가 올바른 종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나름대로의 철리(哲理)가 깃들여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의 종교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신이나 거기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적 영위가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서구적인 사고가 빚어 낸 편견이고 오해에 불과하다.
불교는
철학이라면 실천수행이 전제된 철학이고,
종교라면 철리(哲理) 탐구가 동반된 종교이다.
43.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여타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신이나 신의 계시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성립된 종교인 불교는
그 추구하는 바 궁극의 목적도 대단히 인간적인데 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그 어떤 절대자를 통한 구원이나 은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기초한 합리적인 실천으로 이 세상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면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위로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바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참된 지혜와 자비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보리수 아래에서 우주와 인생을 관찰하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 즉, 아무런 걸림이나 장애가 없이
영원히 자유롭고 평안하며 고요한 상태인 열반(涅槃)에 이르셨을 뿐 아니라,
온갖 탐욕과 무지와 격정 속에서
미망의 삶만을 거듭하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르침의 횃불을 높이 드셨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앉았던 자리가 따뜻해질 사이도 없이
평생을 전도 여행에 바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전의 모습에서 참으로 완성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처님을 본받아 스스로의 완성된 삶을 추구해 나감과 아울러
이웃에도 일깨워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각성된 사회,
다시 말해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44. 불교에 토속신앙적인 요소가 많이 유입된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의 사찰들에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독성각, 용왕당 등
불교 본연의 신앙과는 다소 관계가 없는 조상들이 모셔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들은
우리나라 전래의 토속신앙이나 중국의 민간 신앙인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아
불교 안에 수용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인간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합리적인 실천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종교로서,
스스로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고
참된 진리를 일깨움으로써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자기 목표를 구원하는데
그 어떤 강압적인 방법이나 강제적인 수단을 쓰지 않는 것이 불교의 또 한가지 커다란 특징으로,
역사상 불교가 개입된 종교전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불교의 전파는 언제나 폭넓은 인간 이해와 그를 바탕으로 한 관용성과 포용력이 전제가 되어왔기 때문에
이 땅의 자연환경이나 기후조건 등을 깊이 고려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 문화를 존중하여
그것들을 무작정 부정하기보다 함께 공존하는 길을 찾아왔다.
따라서 민중교화에 크게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것이 토속신앙이라 할지라도 불교에서는 과감히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는데,
그런 결과가 오늘날 사찰 안에 모셔져 있는
각종 비 불교적인 존상이나 토속신앙과 결부된 불교의 민간설화들이다.
다만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토속신들을
모신 전각이 왕성히 사찰 안에 세워지게 된 것은 조선중기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유교정권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불교계의 필사적인 노력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
45. 불상의 손모양과 자세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사찰에 모셔져 있는 불상들은 특정한 손 모양을 하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
그것들은 괜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손 모양은 흔히 인상(印相)이라 하여
그 부처님의 서원이나 공덕 또는 몸소 증득하신 경지 등
겉모습만으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 특히 손가락의 모양만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수인의 종류는 부처님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데,
석가모니부처님의 경우만을 예로 들어본다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선정인(禪定印), 항마인(降魔印), 전법륜인(轉法輪印),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 가운데 선정인은 부처님이 삼매에 드신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결가부좌한 자세에서 왼손을 단전 근처에 놓고 오른손을 그 위에 포갠 뒤 두 손가락의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댄 것이다.
또 항마인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악마의 방해를 물리치신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앉은 자세에서 오른손을 내밀어 손끝을 가볍게 땅에 댄 것이다.
전법윤인은 설법하신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끝을 서로 맞대 동그랗게 꼬부린 것이다.
그리고
시무외인은 오른손을 펴서 윗족을 향해 어깨 높이까지 든 것이고
여원인은 반대로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내려뜨린 것인데,
이것은 각기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들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것과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불상의 자세도 여러 가지여서 일반적으로 앉아 계신 좌불(坐佛)과 서 계신 입불(立佛) 이외에
특히 누워 계신 와불(臥佛)이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46. 불상의 신체적 특징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불상에는
보통 사람들의 신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들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사실 부처님의 높으신 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고자 고심한 흔적들이라 하겠다.
우주와 인생의 최고 진리를 깨달은 분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 고귀한 인품과 원만한 덕성뿐 아니라
남달리 출중하고 수려한 용모의 소유 자셨다고 합니다만,
역사적으로 불상을 제작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불상에 그와 같은 부처님의 외모 이외에
일반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인적인 성품까지도 담아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외형상의 특징들을 고안해 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의 형상에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라는 상서로운 모습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삼십이상이라는 것은 본래 먼 옛날부터 남 다른 위업을 성취한 위인들의 관상에는
32가지 비범한 면이 있다는 인도의 속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팔십종호란 그것을 보다 자세히 부연해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삼십이상과 팔십종호가
처음부터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실히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 전해지는 경전들 사이에도 그에 대해선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공통점들을 들어본다면
금색상(金色相)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전신은 금빛을 띠고 있다든가,
정성육계상(頂成肉계相)이라 해서 정수리에는 상투처럼 살이 부풀어 있다든가,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이라 해서 양 눈썹 사이에는
부드럽고 흰털이 오른쪽으로 말려 있다던가 하는 것들을 꼽을 수 있겠다.
47.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라는 사람이 있던데
우리들이 불상에 예배드리는 행위가 과연 우상 숭배인가를 거론하기에 앞서
우상숭배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상숭배란 여러 가지 모습의 신상을 세워 놓고 그것을 향해서 기도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신상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도와 줄 것을 요청하며 그밖에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갈구한다.
또한 신들은 그들에게 건강이나 복, 재물 따위를 베풀어주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저지른 죄악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배경에는 전근대적인 미신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고,
신자와 믿음의 대상 사이에는 일종의 거래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현대적인 이익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생에 깃들여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각자의 노력으로 깨달아 이해함으로써 완성된 삶으로 나아갈 것을 일깨우는 종교이다.
불상을 모시는 것은 그와 같은 인생의 고귀한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스스로 그 길로 나아가신 부처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불상을 모시지 않아도 부처님의 높으신 덕과 위대한 성품을 되새기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불상은 그러한 부처님의 위신력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우리들의 믿음을 도와준다.
우리들은 원만하고도 자재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우러러봄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평정, 침착함을 얻으며 위대한 스승이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계심을 느낀다.
또한 불상에 경배하고 정성껏 공양함으로써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더욱 수행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상으로 표상되는 불교의 영원한 이상에 귀의하는 것이 불상에 예배하는 참 뜻이다.
48. 불상은 왜 모시며 어떤 유래가 깃들여 있나?
<불설대승조상공덕경>이라는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한때 천상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설법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상에서 우다연이라는 왕이 부처님을 그리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전단향나무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한 것이 불상(佛像)의 시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후대에 경전의 형식을 빌어 지어진 이야기로,
역사적을 본다면 불상이 처음 제작된 것은 2세기 초엽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서이었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 신자들은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한 사리탑을 중심으로 예배와 공양을 행해 왔으며
부처님의 덕을 기리기 위한 회화작품들 중에서도 부처님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피하여
보리수나 금강좌, 법륜, 부처님의 발자국 등으로 부처님을 암시해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스스로가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형상을 세우지 말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부처님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 자체가 부처님의 한량없는 덕성을 일부분으로
국한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자유롭게 조각으로 표현하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윽고 불상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형상을 눈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모신 채
예배드리고 싶다는 민중적 욕구를 억누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불상을 모시고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행상의 방편으로서 불상을 통해 부처님의 덕성과 그분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한 것일 뿐
불상이라는 형상에 그 어떤 신비적인 힘이 있어 거기에 의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
49. 불이문 혹은 해탈문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찰들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들이 수없이 건립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대문들에 해당하는 입구의 일주문과 중턱의 천왕문 및 마지막의 불이문(不二門)은
보통 입구에서부터 법당을 바라보며 일직선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이 세개의 대문이 산문(山門)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불이문은 달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하는데,
세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고 이층으로 지어져 위층은 누각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이 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그 사찰이 본존격인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는 말하자면
부처님은 너와 나, 중생과 부처, 미망과 깨달음, 생사와 열반 등 온갖 상대적인 개념들을 초월하여
모든 것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에 계신다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상징해 놓은 것으로서,
그러한 곳에 이르는 문이므로 불이문이라고도 하고 그와 같은 경지가 곧 해탈이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의 초입에 세워져 잇는 일주문이 중생들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불자들에게 세속이 번뇌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한마음으로 돌아올 것을 일깨우는 문이고,
천왕문이 거기에서부터 사천왕의 수호를 받는 청정도량임을 표시하여
몸가짐과 언행을 더욱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비해,
불이문 또는 해탈문은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이 불이문 안으로 들어설 때는
그곳이 바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가 깃들어 있는 신성하고도 복된 곳임을 명심하여
보다 엄숙하고 지극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겠다.
50. 불자들이 건설해야 할 이상세계란 어떤 사회인가?
위로는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달아 스스로 완성된 삶을 성취하고
아래로는 이웃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각성된 사회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만,
특히 그와 같은 이상 사회를 우리 불교에서는 정토(淨土)라고 하고 있다.
정토란 청정한 국토라는 뜻으로,
본래는 부처님이나 부처님이 되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보살들이 주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중생들의 온갖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들끓고 있는 이 세상이 예토(穢土)인데 반해
정토란 불. 보살들이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시며
번뇌의 대상이 될만한 부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청정무구하고 안락한 것으로서,
아미타 부처님의 서방극락정토나
약사여래 부처님의 유리광세계,
미륵 부처님의 용화세계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스스로 지혜를 닦아 불도(佛道)를 완성하기보다는
좀더 쉬운 방법으로 그와 같은 세계에 태어나
부처님의 지도 아래 수행을 완성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신앙이 민간에 널리 유행했으며,
아미타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극락왕생신앙은
아직도 많은 신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토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헤아려 본다면
그 참뜻은 아무래도 우리들 모두의 노력으로 이 땅을 정토세계로 만들어 나가는데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영원 불변의 진리만이 모든 것의 가치 기준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불 살생의 계율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모든 이들이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부터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유마경>에도 나오듯이 마음을 청정히 함으로써 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51. 불자들은 스스로에 대해 어떤 존재라고 여겨야 하나?
불교인 또는 불제자를 가리키는 불자(佛子)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부처님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이를 의미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부처님의 대를 이어 스스로 부처님이 될 사람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중생들은 자신의 불성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이 되리라는 불교의 기본 입장을 담고 있는 말이 불자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 보살(菩薩)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하겠다.
보살이란 인도의 옛말 보디삿트바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로
보리살타(菩提薩)를 줄인 것으로
보디란 깨달음을 뜻하고 삿트바란 중생이란 의미인데,
본래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전하는 전생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을 일컫던 말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타마 싯닷타라는 한 인간으로 태어나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기 이전에
수 없이 많은 생애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꿔 태어나면서
무수한 선행을 쌓은 결과 마침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본생담의 주제입니다만,
거기에서 주인공이 되는
부처님의 전생의 모습을 지칭하던 것이 보살이었던 것이다.
즉, 장차 깨달음을 이룰 중생이란 의미였다.
이와 같은 보살이란 말의 의미를 잘 되새겨보면 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보살이며,
바꿔 말하자면 우리들은 모두 보살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일찍이 왕이나 왕자, 수행자 상인 등으로서
선행에 힘쓴 결과 부처님이 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스스로의 처지에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누구나 스스로가 보살임을 자각하고 보살행을 닦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52. 불자들은 이웃에 대해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나? (사무량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경전의 말씀은
세상 만물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서 함께 존속해 가고 있는 연기의 이치를 설한 것으로서,
이 세상은 어느 누구도 혼자 존립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가르침이었다.
불교에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대단히 중시하여
수행도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이익을 도모함과 아울러 이웃에도 그 이로움을 베푸는 것
즉,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의해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웃에게는
특히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사무량심이란
불자들이 이웃에 대해 지녀야 할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 번째의 자무량심이란 자애로운 마음을 이야기한다.
모든 이들에게 끝없이 어질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두 번째의 비무량심은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웃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처럼 여기는 것으로
진리에 미혹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애처롭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다.
희무량심이란 기뻐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웃의 기쁜 일을 사심없이 함께 사심없이 기뻐해 주는 마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무량심이란 평등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어디에도 얽매이는 바 없고 집착하는 바 없는 공정한 마음가짐을 뜻한다.
불교는 자비(慈悲)의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이 설하신 바도
자비 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만,
그 자비란 바로 이상과 같은 사무량심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인 자무량심과 비무량심을 합한 말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며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비의 참뜻이다.
53. 불자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은 ? (육바라밀)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가 보살 즉,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존재임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이 그대로 수행의 터전임을 깊이 명심하여 실천 수행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만,
그때 불자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밀한다.
여섯 가지 완전한 수행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여섯 가지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이다.
첫 번째, 보시바라밀이란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라 하여 세 가지 보시를 권장하고 있는데,
재물이나 가르침을 베푸는 것과 아울러 남을 두려움에서 구해주는 덕행을 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준수하는 것으로,
특히 계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지혜롭게 운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세 번째, 인욕바라밀은 욕된 것을 참고 견디는 자세를 말한다.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무리 참기 힘든 것도 인내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정진바라밀은 끊임없는 노력을 뜻한다.
스스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쉼 없이 한 길을 가는 용감한 자세를 일컫는 말이다.
다섯 번째, 선정바라밀은 정신집중의 수련을 이야기한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는 수행을 통해 어지럽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서
언제나 동요됨이 없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은 지혜가 완성된 생활을 뜻한다.
사물의 참다운 이치 즉, 연기의 이법을 올바로 터득해
아무 데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슬기로운 생활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54. 불자들이 항상 간직해야 할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는?
불교를 삶의 지표(指標)로 삼아 보다 올바르고 보람찬 인생을 추구해 가는 불자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삶에 임해야 할까.
불교는 그 자체가 모두 불자들의 올바른 삶의 방향과 태도를 일깨우는 것이므로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르침들입니다만,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여건이나 사회적 조건들을 감안 할 때
다음의 몇 가지는 특히 불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들이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로 삼보(三寶)에 대한 예경심(禮敬心)과 더불어 삼보를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겠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및 불교 교단은 우리 불자들 모두의 귀의처이자 마음의 보루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불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삼보 수호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둘째, 불자들은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불서들을 읽는 습관을 일상화해야 하겠다.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도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므로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다.
셋째, 정기적으로 수입 중 일정액을 사찰이나 자선기관에 보시하는 생활을 체질화해야 하겠다.
특히 사찰은 신도들의 희사금으로 운영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은 이들에게 전해 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사찰의 활발한 활동을 위하여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넷째, 스스로 배워 익히고 깨달아 아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웃에게도 베푸는 생활을 습관화해야 하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이웃에 전하는 노력에 의해 생명을 지니며
그로 말미암아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정토 세계의 구현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55. 비로자나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비로자나 부처님(毘盧蔗那佛)은 달리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이라고도 쓰고
줄여서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자나불(蔗那佛)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란 인도의 옛말 바이로차나를 소리나는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태양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뜻으로 옮길 때는 변일체처(遍一切處) 또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 하는데,
태양이 모든 곳을 두루 비추는데 비유해서 이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밀교에서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경>과 밀교 경전들의 교주인 법신불(法身佛)로서,
말하자면 우주와 인생에 깃들여 있는 영원 무변하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본체로 하는 부처님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들의 본질인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해서 모시는 부처님으로,
온 우주에 두루 충만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 안에 내재해 있어
다른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세상 만물이 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다.
이와 같은 비로자나 부처님에 대한 해석은
예로부터 불교계 내부에서 대단히 구구하여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또한 진리를 몸으로 하고 있는 그 속성상 특별한 형상이 있을 수가 없지만,
사찰에서 모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불상은 흔히 지권인(智券印)이라고 해서
오른손으로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말아 쥔 손 모양을 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본래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보통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 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부르고 있다.
56. 사물이란?
사물(四物)이란
범종(梵鍾), 법고(法鼓), 운판(雲版) 그리고 목탁이라고도 하는 목어(木魚)를 말한다.
범종이란 큰 종을 말하는데 순수한 우리말로는 인경이라고 한다.
본래 이 종은 중국에서 들어왔는데 중국의 종과 인도의 건추(健추)를 본받아 만든 것이다.
사찰의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치던 것인데 그것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석예불이나 의식 때 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종소리 그 자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중생이 종소리만 들어도
- 번뇌가 없어지고
- 지혜가 자라나며,
- 보리심이 생기고
- 지옥에서 벗어나고
- 삼계(三界)에 윤회(輪廻)하는 일도 없이
성불(成佛)하고 중생이 제도 되어지이다.」라는
축원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은 사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이처럼 간절한 원이 담긴 범종소리는
지옥 중생의 영혼까지도 제도한다고 하며,
법고는 축생들을 위해 친다고 한다.
법고도 범종과 같이 조석예불 때는 물론 의식 때 친다.
법을 전하는 것을 일컬어 법고를 울린다고도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북소리가 세간에 널리 퍼지듯 불법이 전해지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또 중생들이 불법에 따라 온갖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이 북소리에 따라 적군을 무찌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목탁, 즉 목어는
본래 중국의 선원(禪院)에서 아침 죽 때와 낮의 밥 때를 알리는 데 쓰던 것이다.
원형은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길고 곧게 깍고 그 속이 비게 파내어
두드리면 소리가 나게 만들었던 것이 차츰 작고 둥근 모양으로 변해 왔다.
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감는 일이 없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열심히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전하기도 하고,
스승의 말을 듣지 않던 수행자에 얽힌 전설도 있다.
스승의 말을 안 듣던 제자가 죽어서 물고기가 되었는데
스승의 말을 안 들은 죄로 등에 나무가 났다.
☆☆☆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등에 나무가 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나타나서 죄를 참회하고
등에 난 나무 뿔을 없애달라고 애걸하였다 한다.
이에 스승이 수륙재를 베풀어 그에게 물고기의 몸을 벗게 하고
등에 난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달아 놓고 게으른 후학들을 경책하였다고 한다.
수중고혼을 제도하고자 소리를 내는 목탁, 목어는
염불, 예배, 독경 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중요한 법구이다.
사물 가운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운판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조류,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한다고 한다.
그 소리만 들으면 안식을 얻고 제도된다고 한다.
운판도 범종과 같이 청동으로 부어서 구름무늬 모양으로 만든다.
본래 선종(禪宗)에서 부엌이나 재당(齋堂)에 달아놓고 대중에게 식사 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한다.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 걸어 두고 화재를 막는다는 주술적인 뜻도 있다고 한다.
57. 사원 건물의 단청과 벽화 등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서 혹은 교화적 의미를 갖는 내용을 그리는 실용화로 불화(佛畵)가 있다.
불화는 그 재료 및 기능에 따라 흙, 나무, 돌등에 천정화나 벽화를, 종이나 베 등에 탱화나 경화 등을 그리게 된다.
벽화는 흙벽그림, 돌벽그림, 판벽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천정화는 목조사원의 천정을 보호하기 위해 채색하여 덧입히는 것이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화려한 장엄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천정에도 여러 도안으로 상징적 요소를 문양화해서 채색하게 되는데 이것을 단청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불화 특히 천정이나 기둥, 벽면에 그린 단청이나 벽화 등은
법당을 장식하면서 또한 종교적인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그려졌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뜻에서 교화용으로도 그려진다.
성스러운 불교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교리의 이해는 물론 신성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사원의 벽화로 불생도나 불전도 같은 설화적인 그림을 많이 그려
일반 대중들이나 초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불교교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불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그려졌습니다만,
예를 들면 지옥의 여러 가지 유형을 그려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따라 어떤 지옥에 떨어진다는 지옥변상도가 있다.
이것은 죄를 두려워하게 하는 좋은 교재가 되었다.
또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아미타부처님이나 미륵부처님에 의해 좋은 곳으로 인도된다는 내용을 그린
아미타내영도나 미륵내영도 같은 그림도 권선의 좋은 교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58. 사찰에서 사용하는 법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사찰에서 사용하는 법구에는
불음(佛音)을 전하는 사물(四物) 즉, 범종, 목어, 운판, 법고가 있고
이 외에 요령, 죽비, 악기, 향로, 다기, 바지그릇, 촛대, 석등 등이 있으며
염주와 같이 수행을 위한 법구도 있다.
대표적인 법구의 용도를 살펴보면, 종(鐘)은 법종이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의식에서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재하여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즉 북소리가 세간에 울려 퍼지듯이
불법의 진리로 중생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북은 홍고(弘鼓)와 소고(小鼓)로 나눠진다.
홍고는 법종과 같이 범종각에 두고 조석예불 때에 치게 되고,
소고는 염불의식 때에 많이 사용된다.
주로 축생을 제도하기 위한 법구이다.
운판은 청동 또는 철로써
구름무늬 모양의 넓은 판을 만들고 판위에 보살상이나 진언을 새기기도 하며
가장자리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나 구름과 달을 새기기도 한다.
성종에서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이기 위하여 울렸던 기구였는데,
차츰 불전 사물의 하나로 바뀌어 조석예불에 치는 의식용구가 되었다.
즉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메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를 만들어 걸어두고 두드리는 것인데,
처음에는 대중을 모으는데만 사용하던 것이 뒤에 독경이나 의식에 쓰는 법구가 되었으며
물 속에 사는 물고기를 제도한다고 한다.
목어에서 유래된 목탁은 사람을 모을 때 뿐만 아니라
염불, 독경, 예배할 때 등 불교의식에서 가장 폭넓게 쓰여지는 도구가 되었다.
59. 사찰이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성립되었나?
사찰(寺刹)은 다른 말로 절, 도량(道場), 가람(伽藍)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곳일 뿐 아니라 스님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수행을 하는 곳이고,
또 불교의 대중적인 교화활동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의 입장에선 사찰은
불 법 승의 삼보가 깃들여 있는 신성하고 거룩한 신행의 요람이자
불법의 전승과 전파가 이루어지는 소중한 터전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사찰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본래 초기의 불교교단에서는 무소유를 표방하여 출가수행자들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유행하면서 나무 밑이나 동굴 속 또는 무덤가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따라서 승단에 정해진 주거지가 있을 수 없는데,
나중에 우기의 3개월 동안은 유행을 중단하고 한 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제도가 확립되고
이어서 부유한 왕족이나 재가신자들로 부터 원림(園林)이나 정사(精舍)를 기증 받는 일들이 늘어나자
점차 승단이 일정한 곳에 정주하게 되면서 승가 자들의 집단적인 거주지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승원은
어디까지나 출가수행자들이 공동으로 기거하면서 수행하고 공부하던 공간으로서,
오늘날의 사찰처럼 불상을 모셔놓고 예배를 드리며 신앙의례를 행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출가 자나 재가신자들의 예배와 신앙의례는 달리
석가모니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한 사리탑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불상을 모시는 습관이 일반화되면서
마침내 불상이나 탑 등을 모신 예배의 장소와 출가 자들의 주거지가 통합되기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다용도의 사찰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60. 사찰 안의 부도전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가 있나?
부도(浮屠)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으로서
부도(浮圖), 부두(浮頭), 포도(蒲圖), 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고 있는데,
원래는 불타와 같이 붓다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솔도파 즉, 탑파가 조금 변한 소리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뜻하는 붓다에서 부도라는 말이 나왔다고 본다면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부처님을 섬기는 스님들까지 부도라 부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도라는 용어로 스님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탑은 가람배치에 관계되는 시설이지만,
부도는 가람배치와는 관계없이
사원의 앞이나 뒤쪽의 일정한 구역에 부도전(浮屠殿)을 두고 여러 부도를 이곳에 설치한다.
부도전의 신앙의례는
스님의 기일제와는 관계가 없이 일년에 한번씩 시제(時祭)로 행한다.
매년 2월 또는 10월에 행하며,
제의절차는 불보살에게 먼저 권공의례(勸供儀禮)를 행하고
이어서 묘탑의 주인공에게 시식의례(施食儀禮)를 행한다.
이 의식은 해당 사찰의 문도들이 주관하고 문도들에 의해 행해진다.
부도전은 성종 및 고승신앙(高僧信仰)과 관계가 깊다.
묘탑 즉,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선종이 들어온 이후 부도의 건립이 크게 유행하였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부도에 따르는 탑비(塔碑)가 건립되어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 문화상 등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
61. 사찰입구에 있는 일주문은 어떤 의미가 있나?
우리들이 사찰에 찾아가는 경우
절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하며,
일주문이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해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두 개 혹은 네 개의 기둥을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어 만든 문이 일주문으로서, 여기서부터 사원 경내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세운 것에는
사찰의 경계임을 표시하는 이외에도 일심(一心)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는데,
세속의 온갖 번뇌로 들끓는 어지러운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오로지 진리에 귀의하는 한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월정사 일주문
또한 이 같은 일주문에는 일반적인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귀절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 안으로 들어 와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간의 알음알이로 해석하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에 의해
이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지만,
실상 우리들의 생각이라는 것은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기보다
왕왕 스스로의 욕망이나 이기심, 감정 따위에 얽매여 떠올리는 번뇌 망상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이것이 맞니 저것이 틀리니 하는 식의 시기와 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우리들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세속의 알음알이를 잠재우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일주문은 그러한 중생들의 세간심을 경계하면서
이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로 이르는 입구임을 일깨우는 구실을 하고 있다.
62. 사찰에 있는 여러 가지 전각들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찰들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각각의 이름들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름들은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건물에 모셔져 있는 불. 보살들에 따른 것으로서,
그 건물의 이름을 보면 우리들은 그 곳에 모셔진 분이 어느 분인가를 알 수 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예를 들면 가장 일반적인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서, 대웅(大雄)이란 부처님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또 대웅전과 비슷한 것으로 대웅보전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아울러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을 함께 모신다.
▶비로전
한편 법신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은 비로전, 화엄전, 대적광전등으로 부르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건물은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용화전, 미륵전 등으로 부르고,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곳은 약사전이라고 부른다.
보살들의 경우에도 관세음보살이 본존일 때는 관음전, 광명전, 대비전, 원통전 등으로 부르는데,
특히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함께 명부의 시왕을 함께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사찰의 주요 전각들에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 용왕을 모신 용신각, 칠성님을 모신 칠성각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토속신앙이 불교에 포섭되어 지어진 건물들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전각의 이름에 따라
교리상 그 사찰이 본래 어느 종파의 소속이었나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화엄종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광명전이라 했고
천태종에서는 원통전이라 했던 것이 그 예이다.
63. 삭발은 왜 하는가?
석가세존께서 출가를 결심하고 카비라성을 빠져 나와 마부인 챤다카와 작별을 고할 때
「지금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苦)에서 해탈할 것을 서원하는 뜻으로 삭발을 하겠다.」고 말한 후
머리를 깎고 수행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칠흑 같은 머리와 수염을 깎은 후 출가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당시 자유사상가나 사문들이 모두 삭발을 하고 출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마누법전』에는 「수행자는 머리를 삭발해도 무방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힌두교도 중에도 삭발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의 경전에는 출가 자에게 있어서 머리나 수염은 곱게 단장해야 하는 번거로움 등
16가지 방해요인이 있으므로 이를 깎아버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스님들은 삭발을 한다.
머리카락을 인간들의 번뇌에 비겨 번뇌초 또는 무명초라고도 한다.
그래서 번뇌를 없앤다는 뜻에서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이다.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인 깨끗하고 맑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마음뿐이 아니라 몸까지도 깨끗하게 간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삭발을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마음과 몸을 함께 맑고 깨끗하게 하여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숭고한 서원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삭발보다는
마음의 순수성이 더 중요하다는 뜻에서 마음속의 삭발이 중요하다.
우리 불가의 선종에서는 매달 4자나 9자가 들어있는 날을 삭발 일로 정하여 삭발을 하는데
자기 머리를 자기 혼자서 깎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감사하는 공생(共生)과 화합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이러한 삭발은 의례적인 관습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갖기 쉬운 쓸데없는 욕망과 교만을 버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또한 수행하는데 번거로움을 덜어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깎은 머리를 생각하고 항상 스스로 반성하며 경책으로 삼기 위함이다.
64.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의 실천원리는? (사성제)
인간 삶의 유한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와 같이 불완전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옳은 삶,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성취하기 위한 가르침인 불교는
그 실천원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해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경전에 의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네 가지 진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네 가지 진리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고성제(苦聖諦)로서, 말하자면 괴로움에 관한 진리이다.
즉, 나고 병들고 죽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등
우리 인생은 온통 괴로움 투성이라는 것이 첫 번째 진리이다.
두 번째는 집성제(集聖諦)로,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이다.
즉 이 세상이 이와 같이 괴로운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갈애(渴愛) 때문이라는 것이다.
갈애란 타는 듯한 목마름과도 같은 집착을 뜻하는데,
현실의 모든 것들은 일정한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거기에 끈질기게 집착하고 그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멸성제(滅聖諦)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진리이다.
즉 괴로움은 갈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갈애만 없애면 괴로움은 자연히 소멸하여 영원히 평안하고 안락하며
아무런 걸림이 없는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불교에서는 그러한 경지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네 번째는 도성제(道聖諦) 이다.
괴로움이 소멸된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그것은 여덟 가지 바른 길 즉, 팔정도(八正道)를 이야기한다.
65.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과거칠불은 어떤 분들인가?
과거세에 계셨던 부처님들을 과거불(過去佛)이라고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특히 아득히 먼 옛날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는 모두 일곱 분의 부처님들이 계셨다고 해서 과거칠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 일곱 분이란
비바시부처님(毘婆尸佛), 시기부처님(尸棄佛), 비사부부처님(毘舍浮佛), 구류손부처님(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부처님(拘那含牟尼佛), 가섭부처님(迦葉佛), 석가모니부처님(釋迦牟尼佛)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물론 인류 역사상 이 땅에 실제 사셨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불교의 경전들은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직접 설해졌거나 또는
그 분에 의해 설해지는 양식을 취하는 것이지만,
그 분을 제외한 여섯 부처님들은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된, 말하자면 전설적인 부처님들이다.
한편 경전에 따라서는 이 이외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고 수기(授記)를 한 것으로 유명한 연등부처님(燃燈佛)을 위시하여
24분의 과거세 부처님을 드는 경우도 있고 53분을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 정확한 숫자나 부처님의 이름이 우리들의 올바른 신행에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때 당신이 깨달은 진리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오래된 옛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서 번성했던 옛 도시를 찾아내게 된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수행의 길은
부처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던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것으로서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고
우리들에게도 설해지게 된 것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66.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기본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
그 어떤 권위적인 가르침이나 절대자의 계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의지적인 노력에 의하여
마침내 우주와 인생을 관철하는 크나큰 깨달음을 성취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후 80세의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인도 각지를 수 없이 돌아다니며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전파하는데 만 진리를 바치셨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무지나 그릇된 욕망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에게
올바른 삶의 의지와 참된 인생의 목적을 일깨워 진정한 안락과 행복의 길을 열어 보이고자 노력하신,
참으로 완성된 삶을 사신 이의 거룩한 여정이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데 추구하셨던 기본적인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어떠한 입장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베푸셨을까.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을 하기에 앞서 잠시 망설이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는 너무도 깊고 미묘해서
얘기해도 알아들을 사람이 별로 없으리란 생각에서이었다.
또한 가르침의 방법도 문제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돌이켜 가르침을 펴기로 하셨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 진리를 구하여 수행하던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권위적이거나 일방적인 교설의 태도를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하여 상대가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흔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방식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합니다만,
의사가 환자의 질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상대방의 수준이나 이해정도를 살펴서
중생에게 가장 절실한 가르침을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푸신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입장이었다.
67.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의 교단은 어떤 모습이었나?
불교의 교단을 의미하는 승가라는 말은 인도의 옛말 상가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으로,
본래는 공화정를 펴던 고대인도의 부족공동체나 상업활동을 위한 조합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단이 상가라는 말로 불렸던 사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합의에 의한 민주적인 운영방식이 교단의 기본적인 지도이념이었음을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불교교단은 출신 부족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문할 수 있었으며,
일단 교단의 일원이 되면 먼저 출가하고 나중에 출가한 차이에 따른 위아래는 있었지만
대체로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특히 계급을 중시하여 계급이 다른 사람과는 결혼은 물론
식사나 대화조차 금지되어 있던 당시의 인도사회에서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었다.
☞ 출가수행자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사의지(四依止)라고 해서
다음이 네 가지 규정이 이상적인 것으로서 제시되고 있었다. 즉
그 첫 번째는 탁발(托鉢)로서 식사는 걸식에 의해 하루에 한 끼만을 먹었으며,
두 번째는 분소의(糞掃衣)로 옷은 남이 버린 누더기를 고쳐서 입었다.
세 번째는 수하좌(樹下坐)라고 해서 나무 밑이나 숲 속, 동굴, 무덤가 같은 곳에서 기거했으며,
네 번째는 부란약(腐爛藥)이라고 해서 병이 났을 때는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만든 허술한 약만을 썼다.
말하자면 극도의 내핍과 금욕 및 철저한 계율의 준수만이 초기불교의 생활상으로서,
그것은 수행생활의 외적인 형식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출가수행자들이 온갖 헛된 욕망과 탐욕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의 탐구와 그 전파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남들과 똑같이 그런 생활로 평생을 보낸 이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이셨다.
68. 석가모니부처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석굴암 본존불 (출처: 불국사 홈페이지)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釋迦牟尼佛)은
일찍이 우리 와 같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우주와 인생의 최고진리를 깨닫고
완성된 삶으로 나아가신 역사상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인도의 동북부지방 히말라야 기슭에 있던 한 작은 나라인 카필라밧투의 태자로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연로한 숫도다나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태자는 태어날 당시 카필라밧투의 국민들이 태자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태자의 이름을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싯닷타라고 지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생모인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은 지 이레만에 돌아가시고
이모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손에 의해 양육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총망 받는 젊은이로 성장한 싯닷타태자는
이윽고 생 노 병 사라는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쳐 심각하게 고뇌하던 끝에
29세 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과 부모 처자를 버리고 출가 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하셨다.
그것은 유한한 인생의 현실에서 벗어나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였다.
그후 6년간 당시의 전통적 수행방법인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에 피나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태자는 35세 때 마침내 두 가지 수행을 모두 포기하고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던 중
샛별이 뜨는 것을 보고 크나 큰 깨달음을 이루어 진리의 완성 자 곧 부처님이 되셨다.
부처님은 깨달은 이, 진리에 눈뜬 이를 의미한다.
69.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나?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안락과 행복의 길을 열어 보이기 위해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도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서 그에 알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교화의 방법을 채택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로 사용하셨던 교설의 방법들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첫째,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 비유나 인연담을 많이 하셨다.
둘째, 부처님은 가르침을 펴실 때 문답을 자주 사용하셨다.
대화를 통해 가르치면서 상대가 올바로 이해하고 있으면 그대로 긍정하기도 하고 틀렸으면 되묻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해를 도우셨다.
셋째, 운문의 형태로 가르침을 설하신 경우가 많았다.
입으로 염송하기 쉬운 운문을 통해서 암기와 기억을 도운 것이다.
우리들이 자주 접하는 경전 중에 <법구경(法句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운문으로 된 가르침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넷째,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설화나 가르침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재해석하는 방법을 많이 쓰셨다.
기성의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작정 부정하기보다는
일단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입장에서 올바른 이해를 일깨우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특했던 부처님의 교화 방법은 위의(威儀)를 통한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의 참으로 완전 무결한 삶의 모습을
대중들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심으로써 대중들 스스로가 감화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70.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라는 것이 있던데
예로부터 인간의 삶은 그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삶과 죽음을 거듭 하면서 윤회(輪廻)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던 인도 사람들은
성자나 위인들의 생애도 그저 한생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생의 인연에 따라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해 왔다.
▶천상에서의 보살 21×29㎝ 출토지미상 2∼4세기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에도 고타마 싣닷타라는 한 인간으로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오랜 동안 여러 생을 전전하면서 선행을 쌓은 결과 그와 같이 위대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라는 것이 민간 설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게 되었다.
<자카타> 혹은 <본생담(本生譚)>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부터 왕이나 왕자, 수행자, 상인등의 민간만이 아니라
원숭이, 앵무새, 비둘기, 코끼리 등 동물로까지 바꿔 태어나면서 온갖 미담과 선행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도리천에서 내려오심 36×34㎝ 스와트의붓타라 제1유적출토
어렵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교리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다른 경전들에 비해
옛날 이야기 식으로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인과응보(因果應報)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가르침을 일깨우는 이 이야기들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그 양도 대단히 많아졌다.
남방불교 쪽에 전하는 대장경 안에서는
<자카타>가 독립된 한 부류를 이루면서 모두 54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한편 역사적으로는 설화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자극 받은 일반 신자들 사이에
우리도 선행을 쌓아나가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수 있겠다는 신앙을 불러 일으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본생담이다.
71.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부처님이 사셨던 나라, 인도에서는 옛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관습과 더불어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여 숭배하는 유골숭배의 풍습이 있었습니다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45년간의 중생구제와 진리전파를 위한 일생을 마치고 쿠시나라에서 입멸(入滅)에 드시자
부처님의 장례도 재가신자들에 의해 인도의 전통예식대로 화장으로 치러졌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장례같은 일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힘쓰라고 유언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쿠시나라에 살던 말라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이번에는 부처님의 유골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다.
뒤늦게 부처님의 입멸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의 왕들이
각기 생전의 부처님과의 인연을 빌미로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며
심지어는 군대를 동원하는 사태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때마침 도냐라는 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생전의 덕을 일깨우며 중재에 나서서
유골을 여덟 등분하여 여덟 나라에서 각기 사리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유골 분배가 끝난 후 현장에 도착한 모리야족은 할 수 없이 화장을 하고 남은 재를 가져갔고
도냐에게는 유골을 분배할 때 썼던 병이 주어졌는데, 그들도 각기 그것들을 탑을 세워 봉안했다.
그것을 근본팔탑(根本八塔) 혹은 근본십탑 (根本十塔)이라고 합니다만,
그후 아쇼카왕 때에는 불교를 널리 포교하기 위해
여덟 개 탑 속의 유골을 꺼내 인도 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불자들은 대대로 사리탑을 석가모니부처님 대신으로 여기며 정성껏 공양해왔는데,
사리탑의 사리란 인도의 옛말 사리라에서 온 말로, 유골을 의미하던 말이다.
72. 석가모니 부처님은 성도 후 어떤 생활을 하셨나
보리수 아래에서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은
그 이후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완벽하고도 완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흔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들이 많습니다만,
깨달음이야말로 부처님을 부처님일 수 있게 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그 깨달음의 내용을 다름 아닌 부처님의 삶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석가모니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신 후 어떤 생활을 하셨을까.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직후에 잠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지 않을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깨달은 진리는 너무도 깊고 미묘한 것이어서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일반인들은 얘기해 봐야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더 이상 의지할 스승도, 그 무엇도 없다는 생각에서 심한 외로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당신이 깨달은 것은 진리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그 진리를 의지 처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 진리의 전파에 평생을 바치기로 생각을 바꾸셨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은 녹야원에서 안냐탸 콘단냐 등 다섯 비구를 상대로
최초의 가르침을 펴신 이래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오직 스스로의 헛된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의 제도에만 매진하셨다.
우리들은 초기경전 속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통해서
권위적이거나 계시적인 자세를 철저히 배격하고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에서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일깨우고자 노력하시던 석가모니부처님의 자상하고도 인자하신,
그야말로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모습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73. 석가모니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어떤 분들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아래 출가한 제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뛰어났던 열 분을 우리는 부처님의 10대제자라고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사리풋타로, 우리들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하는 분이다.
지혜가 특히 뛰어났던 분이라 지혜제일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마하목갈라나로, 목건련(目 連) 또는 목련(目連)이라 알려진 분이다.
신통력이 뛰어났으므로 신통제일이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를 지옥에서 제도한 일화로 유명하다.
사리풋타와 함께 초기 교단의 양대지주 역할을 했지만, 두 분 모두 부처님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는 마하캇사파로, 대가섭(大迦葉) 또는 그저 가섭(迦葉)이라고 한다.
금욕적인 생활이 뛰어났으므로 두타제일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교단의 후계자가 되어 경전의 결집을 주재했다.
네 번째는 아누룻다 즉, 아나율(阿那律)이다.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다 눈이먼 일화로 유명한데, 안보고도 아는 신통을 얻었으므로 천안제일이라고 한다.
다섯 번째는 수부티 즉, 수보리(須菩提)이다. 연기설을 잘 이해했으므로 해공제일이라고 한다.
여섯 번째는 푼나 만타니풋타 즉, 부루나(富樓那) 이다. 설법제일이었다.
일곱 번째는 마하캇차나 즉, 가전연(迦 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서 설명하는데 뛰어나 분별제일이라 한다.
여덟 번째는 우팔리 즉, 우바리(優波利)로, 계율을 잘 지켜 지계제일이라 한다.
아홉 번째는 라훌라 즉, 라후라(羅喉羅) 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아들로, 밀행제일이라 한다.
열 번째는 아난다 즉, 아난(阿難)으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설법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제일이라 한다.
74.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의 부처님들은 어떤 분인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도 많은 부처님들의 이름을 들고 있고,
또 사찰에서는 그런 부처님들의 상을 모시고 예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 아득한 과거에 계셨다는 비바시 부처님을 위시해서
시기 부처님, 비사부 부처님, 구류손 부처님, 구나함모니 부처님, 가섭 부처님뿐 아니라
서방 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 부처님, 미래세에 이 세상에 출현하실 것이라는 미륵 부처님 등이 그런 분들이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실재하셨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뿐인데, 그 이외의 부처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우리들이 역사적인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불교의 창시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그 이전에 계셨다는 부처님들이나 그 밖의 다른 부처님들은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분들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부처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에 의해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분들이다.
그러면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에서 스스로 깨우쳐 가는 것인데,
아무리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부처님들이 계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라는 분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즉 부처님이란 영원하고도 보편 타당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며,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되셨다.
그 진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진리가 상존하는 한 언젠가는 그것을 깨닫는 분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여러 부처님들이 계심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75.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에 얽힌 설화가 많은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다룬 경전이나 전기들에는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수많은 설화들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는 특히 요즘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힘든 얘기들이 자주 눈에 뛴다.
예를 들면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기 위해 당시의 풍습대로 친정인 콜리성을 찾아가던 길에
룸비니 동산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껴 아셔카나무 꽃가지를 잡고 옆구리로 태자를 출산했다든가,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으며 온갖 천신들이 나타나 예배하고
연못 속에선 용들이 나와 오색의 따뜻한 물을 뿜어 태자를 씻어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특히 갓 태어난 태자가 사방으로 일곱걸음 씩을 걸은 뒤에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도다.
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선언을 했다고 경전에는 전하고 있다.
▶도솔래의상
그러면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와 같은 이야기들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전기를 저술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작가들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보다 감명 깊게 전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탄생부터가 보통 사람들과 달랐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의 이상의 신비적인 이야기들 안에는 많은 암시들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도의 고대 종교인 바라문교에서의 교리 중에는
바라문의 탄생은 이마로,
크샤트리아의 탄생은 옆구리로,
바이샤의 탄생은 평범하게,
수드라의 탄생은 발등으로 탄생한다고 믿어 왔던
신화적인 말들을 (아리안 족이 인도를 침입, 식민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함.)
끌어들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족 출신 이였음을 나타내고,
탄생 때의 이변들은 부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일컬으며,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부처님이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을 이루셨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76.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는 많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
그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여러 종교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이때 그릇된 출가중심적 불교 이타행(利他行)이 결여된 소승적(小乘的)인 것과
믿음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안점은
계율이나 교법에 얽매여 전통을 고집함으로써 형식화 되어 가는 부파 불교의 벽을 깨뜨리고
특정인 즉 출가 수행승 만이 중심이 되는 좁은 생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중생은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석존의 자비와 지혜를 믿고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의 완성을 위해 정진한다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석존의 참뜻이었고, 석존이 현세에 출현했던 근본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서력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2∼3세기에 이르러 용수, 제바 등의 뛰어난 사상가에 의해 사상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른바 초기 대승불교시대로서 기나긴 대승불교의 역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라 하겠다.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붓다관을 새롭게 하여 무수한 붓다와 보살을 창조해냈다는 점이다.
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유신론적이며, 1불 사상에서 다불(多佛)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을 발단으로 해서
미래불사상(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해서 석존 대신 중생을 구제한다는 사상)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내세불사상(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또는 동방묘회국의 아촉불)과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 : 이 세상의 사방 어느 곳에나 붓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상,
그 대표적인 것이 비로자나불이다)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 : 붓다는 현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했다.
다음 특징으로는
소승이 자기형성에 중점을 둔데 반해
대승은 대중구제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는(下化衆生) 출가주의에서 재가주의로 중점이 바뀐 점이다.
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상(理想像)을 만든 점이다.
보살이라는 말은 원시경전에도 나오지만
원시경전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의 석존 즉 <수행자로서 불도에 정진하는 자>라는 뜻이었으나
대승에서는 이를 확대 해석해서 불교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은 될 수 있어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고 한데 대해
대승에서는 모든 중생 보살도인 육바라밀을 완전히 닦으면 해탈한다고 했다.
동시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끝으로
소승의 분석적 방법에 대해
대승에서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 점이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분별(分別)적 방법에서 무분별(無分別)적 방법으로 변한 것이다.
즉 분별지(分別智)에 대한 무분별지(無分別智 ? 般若라고도 함)라는 술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석존이 연기설을 설한 것도 그 방법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분별의 가르침 즉 지혜의 도(道)는 범속한 대중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석존 당시의 제자들이 대부분 교육받은 귀족 출신의 우수한 지성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석존의 이런 분석적인 방법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이런 분별적인 엘리트주의의 불교를 직관적 방법에 의해
대중 쪽으로 되돌리려고 한 것이 대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77. 수행을 하면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근거는? (불성)
열반경에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제각기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있다는 뜻에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고 있는데,
바로 그 불성 때문에 수행을 하면 누구나 이상적인 경지 즉,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면 불성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불성이란 흔히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로 표현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부처님다운 점을 말한다.
또 불성은 여래장(如來藏)과 같은 뜻을 지닌 말로서, 말하자면 부처님이 될 씨앗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에 부처님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란 뜻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뿌리깊은 번뇌 때문에
그와 같은 자기 자신의 본래 면모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생이고,
부처님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이라는 것도
결국은 번뇌를 제거하여 자기 안에 내제되어 있는 부처님의 면모를 찾아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불성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기능하고 있는 신체적인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세상만물의 이치, 다시 말해 연기의 법칙을 잘 관찰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만물은 독자적인 실체랄 것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내제되어 있는 영원불멸의 진리만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것이 연기의 가르침입니다만,
중생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도 중생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진리 때문이며
그와 같은 영원불멸의 진리가 바로 불성인 것이다.
78. 수행하는 스님과 포교하는 스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든 불자들이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할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스로 열심히 실천 수행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함과 아울러
주위 모든 이 들에게도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일깨워
이 세상을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각성된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것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실현에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과제가 등장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수행과 사회 교화의 두 가지로서,
이 두 가지 과제 가운데 어느 것이 자신에게 긴요한가 또는 적성에 맞는 일인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우리 불교에는 현실적으로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는 스님들과 포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스님들이 계신다.
그런데 사리를 냉철히 따져본다면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서,
수행하는 스님과 포교하는 스님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지 않고서 대중들을 교화하겠다고 나선 것은
전혀 어불성설일 뿐 아니라 수행의 궁극은 아무래도 대중들을 향한 보살도(菩薩道)의 실천으로 나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유마경>는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보살도 앓고 있고 중생이 나아야 보살도 나을 것이란 유명한 귀절이 나옵니다만,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참된 인식이란 세상만물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며
모든 것은 나와 한 몸이라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포교를 하는 스님들도 틈틈이 수행을 쌓아 나가지 않으면 안되고
수행을 하는 스님들도 세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작정 무관심해서만은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끝없는 자기 수행의 도중에 있으며,
스스로 얻은 것만큼 베풀어야 하는 것이 보살의 길인 것이다.
79. 스님들은 왜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출가수행하나?
스님이 되는 것은 출가(出家)라고 해서 말 그대로 가정을 버리고 나서는 것을 의미하며,
석가모니부처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극도의 금욕과 자기절제를 견제로 한
대단히 힘든 수행의 생활로 들어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출가수행은 어디에서부터 유래된 것일까.
본래 인도에서는 먼 옛날부터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 출가의 풍습이 있었다.
즉 인도의 정통사상인 바라문교에서는 아쉬라마라고 해서 사람의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누어
각시기에 알맞은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쳤는데,
거기에는 출가가 인생의 궁극적인 길처럼 권장되고 있었다.
맨 처음의 학생기(學生期)에는 성장하면서 적당한 스승을 모시고 학업을 닦고,
두 번째는 가주기(家住期)에는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가업에 종사하며,
세 번째 임서기(林捿期)에는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출가하여 숲 속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유행기(遊行期)에는 모든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종교적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하실 당시에는 정통사상에 이반하여
새로운 종교적 이상을 모색하는 많은 사문(沙門)들이 나타나 제각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출가자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도 부분적으로는 그와 같은 사회적 풍습에 따라 출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교단에서 스님이 되려고 출가하는 것은 비단 그러한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참된 수행을 위해 세속의 온갖 애증과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가정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다 큰 자기실현을 위해 작은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니다.
80. 스님들의 계율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들이 있나?
스님들의 생활 규범을 지칭하는 계율(戒律)이라는 말은 본래 계(戒)와 율(律)이 합해진 말로,
계란 자율적인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고 율은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타율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것이다.
계는 인도의 옛말 쉴라를 옮긴 것으로 본래는 습관이나 행위, 성격, 경향 등을 의미하던 말이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특히 삼학의 하나로서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도덕적 수행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도들에게도 적용되는 오계(五戒)를 들 수 있는데,
살생과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행을 지켜나가다 보면
그것이 습관화 되어 마음속에 악이 소멸되고 선을 증장시킬 터전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율이란 비나야를 옮긴 말로, 규칙이나 규율, 규범들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계와는 달리 교단의 일원으로서 승가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생활 규범들을 말한다.
특히 이러한 생활상의 규정들은 수범수제(守犯守制)라고 해서
교단에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새로 제정하신 것들로서,
본질적으로는 계의 정신을 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 적용시킨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계와 율의 모든 조항들을 모아 놓은 것을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즉, 계본(戒本)이라고 합니다만,
우리나라 스님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분율(四分律)에는 비구에게 적용되는 구족계가 250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외에도 비구니 348계, 사미 10계, 사미니 10계, 식차마나의 6학법 등이 있으며,
계율 조목이나 제정유래, 승단의 제도등을 모두 모아놓은 것을 율장(律藏)이라고 한다.
81. 스님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
스님이 된다는 것은 세속의 온갖 욕망을 벗어버리고 구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정 기간의 수련을 마친 다음에는 각종 의례를 집전하고 재가신자들의 신행을 지도하는 성직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각 종단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입문에 일정한 자격조건이나 교육의 과정들이 정해져 있다.
물론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는
별다른 격식없이 삼귀의의 서원을 하고 출가를 허락 받으면
그것으로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승단이 오랫동안 존속해 오면서
차츰 수계의 규정들을 위시한 여러 가지 규범들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과정과 조건들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스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단 계를 받기 전에 일단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일정한 수습기간을 거쳐야 하며,
이 기간에 있는 사람들을 행자(行者)라고 한다.
행자 기간에는 초심자로서의 여러 가지 계행이나
사찰생활에 필요한 기본의식 및 예의범절 등을 배우는 동시에
밥짓고 나무하는 등 사찰의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 한다.
이것은 물론 사찰의 생화풍습을 익힘과 아울러 세속에서의 온갖 인연을 잊고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 부과되는 수련의 연장 과정이다.
소정의 행자생활을 마치면 사미계나 사미니계를 받게 되는데,
오늘날에는 종단에서 마련한 단일계단인 수계산림에서 최종교육을 받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계를 받는다.
그리고는 강원이나 선원 혹은 승가대학 등에서 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승납 4년 이상 연령 20세 이상이면 비구계나 비구니계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런 구족계를 받은 이를 스님이라고 하지만
보통은 사미계만 받아도 스님이라고 부른다.
82. 스님들의 대중생활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교단을 가리키는 승가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공동체 내지는 무리를 일컫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승가에서의 생활은 어디까지나 대중생활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스님들에게 부과되는 계율도 그 부분이 공동체의 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들이었다.
율장에 나오는 승가의 생활 규정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대단히 세부적으로 승가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내용들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승가의 대중생활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자자(自恣)와 포살(布薩) 및 대중공사(大衆公事)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자자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안거가 끝나는 날에 행해지던 것으로,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대중들 앞에 나서 그 동안 자신들의 생활에 잘못된 점이 있었으면
지적해 달라고 청해서 참회하는 것이었다.
또한 포살이란 보름마다 한번씩 승가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계본을 읽어나가면서
계율을 어긴 바가 있으면 스스로 나서서 대중들 앞에서 참회하는 것이었다.
참회의 방법에는 범한 계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에 따라
승가로부터 추방되는 것에서부터 그저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승가가 겉으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화합을 유지해 나가려면
아무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죄의식이 없어야 하고,
그 때문에 이와 같은 참회의 의례가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중공사란 우리나라 불교에서 지금까지도 실행되는 것으로서,
전체 대중이 모여서 사찰의 크고 작은 일을 기탄없이 함께 상의한 것이다.
승가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합의를 대단히 중요시함으로
율장에는 그와 같은 대중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토론의 방식에 대해서도
상세한 규정들이 베풀어져 있다.
83. 스님들의 동안거와 하안거는 어떻게 유래되었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보름까지와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끼지
일년에 두 차례를 각기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라고 해서
스님들이 산문 출입을 자제하고 수행에만 정진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안거제도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출가 수행자들은 어느 한곳에 머무는 일없이 유행(遊行)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인도에서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우기가 되면
땅 속의 작은 동물들이 기어 나오기 때문에
길을 걸어 다니다보면 그것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고
또 교통도 불편한데다가 각종 나쁜 질병들이 나도는 경우도 있어
유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기의 3개월간은 유행을 중지하도록 설하신 것이 안거의 시작이었다.
이 기간 동안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공부와 수행에만 전념하며,
특히 안거의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라는 독특한 참회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승가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안거의 풍습은
그후 부유한 재가신자나 왕족들이 건물이나 토지 등을 희사함으로서
스님들이 한 곳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사원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또 각지로 돌아다니던 스님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서 계율이나 승단의 제도 등을 정비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안거제도를 통해
화합과 수행을 터전으로 하는 승가의 결속력을 재확인하고
승가 고유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후조건에 따라 여름 석달과 겨울 석달 동안을 안거 기간으로 삼게 되었는데,
이 같은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라고 하고 끝내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84. 스님들은 일체의 생산활동을 하면 안 된다는데
출가수행은 무소유(無所有) 즉,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생활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유가 우리 마음속에 온갖 탐욕과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재물이 있는 사람은 재물로 말미암아 걱정이 생기고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으로 말미암아 걱정이 생긴다는 경전의 말씀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일깨운 것이었다.
초기 불교의 교단에서는
출가자가 생활상에 꼭 필요한 소지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하게 하였으며
일체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었다.
오로지 청빈과 금욕을 통한
정신적인 안정과 진리탐구만이 출가 수행의 절대 목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활동의 금지는 다른 면에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출가 수행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눈에 띄게 하는 일없이 걸식에 의해 생활하는 수행자들을 바라보며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숫타니파타>라는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언젠가 어떤 농사짓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먹고사는데 당신도 직접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도 농사를 지어먹고 산다.
믿음이 나의 씨앗이고, 수행이 내 밭을 윤택하게 하는 하며, 지혜가 나의 농기구다.
이와 같은 농사를 통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매를 거둔다.’ 고 대답하셨다.
말하자면 출가 수행자는
출가 수행자 나름대로의 사회적인 역할이 있음을 일깨운 것으로서,
그것은 요즘 말로 하자면 일종의 정신노동이라 할 수 있다.
85. 스님들의 탁발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스님들이 저자거리의 집들을 방문하며
쌀이나 약간의 금품 따위를 동냥하는 것을 탁발(托鉢)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탁발의 풍습은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즉 인도의 출가 수행자들은
일체의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대신 탁발을 통해서 식생활을 해결했는데,
불교 교단에서도 그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스님들의 생활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걸인들의 구걸 행위와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
오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는 수단이었던 만큼 거기에는 엄격한 규칙들이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하루에 한번 오전중의 정해진 시간에만 한다거나,
민폐를 줄이기 위해 하루에 일곱 집씩을 방문하여 조금씩 얻어서 모은다거나,
가난한 집과 부유한 집을 차별하지 않고 차례대로 방문한다거나,
탁발을 유도하는 어떠한 언행이나 태도도 내비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또 가르침이나 그 밖의 것을 베푼 댓가로 공양을 받아서도 안되고,
먹다 남은 것을 보관해 두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다른 의미에서 탁발은
그 자체가 수행자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잠재우는 수행의 하나였을 뿐 아니라
재가신자들에게는 출가 자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상당한 공덕이었으므로
재가신자들의 복덕을 위한 출가 자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원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사원 안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게 된 이후에도
탁발은 일부 수행으로 일부 스님들간에 꾸준히 행해져왔고,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조계종에서는 종헌종법으로 탁발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대 사회 속에서 성직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다.
86. 스님들의 호칭 중 선사, 종사, 율사 등의 의미는?
우리말의 스님이란 스승님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고,
승가의 준말 승(僧)에 존칭 어미 님자를 붙여 승님이라고 하던 것이 변해서 스님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스님이라고 하면 불교의 출가 수행자를 높여 부르는 말임엔 틀림이 없다.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에는
화상(和尙), 사문(沙門), 대덕(大德), 대사(大師) 등이 있다.
화상이란 본래 스승이란 뜻으로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을 뜻하던 말인데,
나중에는 그냥 덕 높은 스님을 칭하게 된 말이며,
사문이란 본래 쉬라마나라고 해서
바라문교에 대응하던 인도의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들을 칭하던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문 중의 한 사람으로 통했는데
그 후 불교에서 출가 수행자를 일컫게 된 말이다.
대덕이란 덕이 높은 분, 대사란 큰스님을 뜻한다.
한편 스님들에게는 그 행적이나 덕성에 따라 여러 가지 칭호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조사(祖師), 종사(宗師), 선사(禪師), 율사(律師) 법사(法師)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조사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정통의 법맥을 이어받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조사란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높은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한 선사란 오랫동안 성을 수행하여 성의 이치에 통달한 분을 일컫는 말이고,
율사란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분을 지칭하는 말이며,
법사란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밖에도 국사(國師), 왕사(王師), 제사(帝師)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명칭은 역사적으로 한 나라의 황제나 국왕이 덕높은 스님들을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위촉했던 직책이었다.
87. 아미타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아미타 부처님(阿彌陀佛)은 다른 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하는데,
<아미타경>이나 <무량수경> <관무량수경>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부처님이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이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 세자제왕불이라는 부처님아래에서 출가하여 법장비구로 있을 때
유명한 48대원을 세우고 오랜 동안 수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부처님이 되신 것으로,
현재는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 극락(極樂)이라는 곳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다고 한다.
극락(極樂)이란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에 의해 세워진 불국토로서,
다른 말로 안양국(安養國) 또는 안락국(安樂國)이라고도 하며
온갖 죄악이나 괴로움이 없는 청정하고 평안하며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48대원은
누구든지 그곳에 가기를 원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열번 부르면
모두 그곳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것을 비롯하여 모두가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맹세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먼 옛날부터 이 부처님은 많은 이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괴로운 삶의 현실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극락에 왕생하여 보다 편안하게 불도를 닦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계시는 분이
바로 아미타 부처님인 것이다.
이와 같은 아미타 부처님을 사찰에서 모실 때는
보통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함께 모시며,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진 전각은 무량수전(無量壽殿), 극락전(極樂殿) 등으로 불리고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 부처님만이 아니라
동방 묘희세계의 아촉불(阿 佛) 등 동서남북의 방위와 관련된 부처님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부처님들을 타방불(他方佛)이라고 한다.
88. 약사여래 부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야 하나?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은 보다 갖추어진 이름으로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동방으로 갠지스강 모래알 수의 열 배에 해당하는 국토를 지나 정유리정토(淨琉璃淨土)라는 곳에 계신다고 한다.
본래 <약사여래본원경>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 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이 부처님은
보살이었을 때 12가지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셨다고 하는데,
▶그 12가지 서원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이나 남들의 몸에 광명이 치성할 것,
둘째 위덕이 높아서 중생들을 모두 깨우칠 수 있을 것,
셋째 중생들의 욕망을 모두 만족시켜 모자람이 없도록 할 수 있을 것,
넷째 모든 중생들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끌어 들일 수 있을 것,
다섯째 모든 중생들이 깨끗한 업을 지어 삼취정계를 구족하게 할 수 있을 것,
여섯째 모든 불구자들이 온전한 몸을 갖게 할 수 있을 것,
일곱째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모든 여인들이 남자가 되게 할 것,
아홉째 마구니나 외도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知見)을 얻도록 할 것,
열째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모든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
열 한 번째 모든 중생들의 배고픔을 면하여 안락하게 할 수 있을 것,
열두 번째 가난해서 의복이 없는 이들이 훌륭한 옷을 얻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의왕(大醫王)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모든 이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중생들에게 온갖 현세이익을 베푸는 구제불(救濟佛)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약사전(藥師殿)이라는 전각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함께 모시어
손에 약병을 들고 계신 모습이 특징이다.
89. 연꽃을 왜 불교의 상징이라고 하나?
유명한 염화시중(捻花示衆)의 미소에서 부처님이 들어 보이신 꽃이 바로 연꽃이라고 알려져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법좌에 올라 연꽃을 들고 아무 말 없이 대중들을 둘러 보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처님의 뜻을 깨닫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마하가섭(摩詞迦葉)만은 부처님의 참뜻을 헤아리고
살며시 웃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염화미소의 유래이다.
이처럼 연꽃은 불교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꽃으로 예부터 소중히 여겨왔다.
그것은 연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덕성(德性)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특히 부처님께서는 청정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을 곧잘 연꽃에 비유하셨다.
연꽃을 일러 만다라화(曼陀羅華)라고도 한다.
오묘한 법칙이 연꽃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이 바로 연꽃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항상 맑은 본성(本性)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 연꽃은 못에서 피어난다.
물이 더럽거나 지저분하여도 그 속에서 귀한 꽃을 피워내는 그 모습이
마치 무명(無明)에 둘러싸였어도 깨달아서 불성(佛性)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본 것이다.
또한 연꽃은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인 보살을 상징하기도 한다.
부처님이나 보살의 청정미묘한 미소가 연꽃송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비유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곧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난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즉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불교인들은
갖가지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는 사바세계에서 중생으로만 남아있을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수많은 불교 예술품들이 연꽃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불, 보살이 앉아 있는 좌대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바로 그것이 연꽃임을 곧 알 수 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불, 보살이 연화대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경전에서는
특히 책의 제명마저도 연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 바로 그렇다.
『법화경』의 연화나 『화엄경』의 화엄이란 결국 연꽃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보살의 온갖 실천행위를 비유한 표현이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들의 무명과 어리석음,
즉 이러한 진흙 속에서도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90.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팔정도)
불교에서는
인간 삶의 괴로움이 갈애로부터 비롯되며
수행을 통해 마음속의 번뇌와 무명을 없애면
고요하고 평안하며 자유자재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만,
그와 같은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팔정도(八正道)라 하여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정견(正見) 이다.
올바른 견해를 뜻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현실이나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불교수행의 첫 번째 덕목인 것이다.
두 번째는 정사(正思) 이다.
올바른 생각을 뜻하며, 특히
마음으로 짖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가지 악업을 제거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정어(正語) 이다.
올바른 말을 뜻하는 것으로서,
입으로 짓는 거짓말과 이간질, 욕설, 아부등 네 가지 악업을 소멸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정업(正業) 이다.
올바른 행동으로서,
몸으로 짓는 살생과 도둑질, 음행의 세 가지 악업을 소멸해가는 것을 의미헌다.
다섯 번째는 정명(正命) 이다.
올바른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특히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가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올바른 직업을 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여섯 번째는 정정진(正精進) 이다.
바른 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정념(正念) 이다.
올바른 기억을 의미하며, 옳은 생각들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여덟 번째는 정정(正定) 이다.
올바른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삼매(三昧)의 수련을 통해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수행을 뜻한다.
말하자면
올바른 참선이나 염불, 기도의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91. 염주는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것들이 있나?
염주는 수주(數珠)라고 하며
- 염불할 때나
- 진언을 외울 때,
- 또는 절을 할 때에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사용한다.
오늘날 염주는 번뇌를 끊는 도구 즉,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염주 하나를 굴릴 때마다 번뇌가 끊어짐을 상징하므로
일념으로 염주를 돌릴 때에 따라 부처님 광명이 자신에게 충만해지고
죄업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염주를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에 들고 엄지 손가락을 이용하여
불 법 승 삼보의 명호를 부르면서 하나씩 앞으로 넘긴다.
불보살께 예배할 때는 팔에 감거나 목에 걸기도 한다.
요즈음은 합장주라고 하여 손목에 차고 다니는 짧은 염주도 있다.
염주는 108개가 가장 일반적인데,
이는 108번뇌를 끊는다는 의미이며 최승주(最勝珠)라고 한다.
염불이나 천배 등에 쓰이는 1,080주는
상품주라 하며, 염주알이 절반인 540개일 때도 있다.
또한 108개의 절반인 54개로도 하는데,
이는 보살 수행의 계위인 4선근,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절반인 27개로 하는 염주는 27현성을 표시한다는 말도 있다.
이와 같은 염주는 그 만드는 재료에 따라
보리자염주, 금강주, 목환자염주, 율무염주, 시우쇠염주, 수정염주, 산호염주, 진주염주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근래에는 화학제품으로 만든 것이 보편적으로 많이 보급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염주에는 모주(母珠)라는 큰 구슬이 있어 부처님이나 보살을 표시하여 모시게 된다.
그러므로 백팔염주를 가지고 염불을 하게 되면
우리 중생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고통과 슬픔인 백팔번뇌를 모두 소멸하고
안락을 얻게 되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92. 올바른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교의만이
참된 진리임을 표방하는 많은 종교들이 혼재하고 있어
선택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종교들은
일반인이 쉽게 확인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교설로부터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어
어려움을 한층 더 해주고 있다.
그러면 올바른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종교가 참으로 올바른가를 가려내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기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몇 가지만 들어보겠다.
우선 첫째로 신자를 모으기 위해 현세적 이익을 앞세우거나
그와 같은 이익을 미끼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종교여야 한다.
믿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느니 소원이 이루어진다느니 하면서
눈앞의 이익을 들먹여 금품이나 기타 것을 요구하는 종교들은 거짓된 것일 수 있다.
둘째, 인과법칙에 입각한 건전한 사회윤리의식이 살아 있는 종교여야 한다.
선과 악의 인과율이 무시된 허황된 믿음이나 의례만으로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는 그릇된 것임에 틀림없다.
셋째, 진리에 임하는 태도가 합리적이어야 하겠다.
교조적인 가르침만을 반복한다거나 과학적인 사실에 위배된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는 종교는 올바른 종교일 수 없다.
넷째, 진정으로 인간을 화해시키는 종교여야 한다.
겉으로는 화합과 융화를 표방하면서도 신자와 비신자, 자기종교와 타종교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종교는 참된 가르침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는 종교여야 한다.
이것은 올바른 종교라면 그 종교 자체의 진정한 존재의의인 동시에
그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93. 입문하려는데 처음 불자가 되는 과정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에 기초한 합리적인 실천을 통하여 올바른 삶,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종교인 불교는
입문을 하는데도 특별한 절차가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의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했던가를 스스로 깨닫고 이제부터는 올바른 가르침에 의지하여 참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각오만 있으면 된다.
▶산사의 아침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는 출신성분이나 가문, 학벌, 지위고하 따위에 상관없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며 교단에 귀의한다는 삼귀의(三歸依) 의 서원을 하고
평생동안 지켜야 할 생활의 규범인 계율(戒律)을 받으면 그것으로 입문이 가능했으며,
일단 그렇게 해서 입문한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의 완전한 평등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는 예전과는 달리 산업화가 폭넓게 진행되어 있는 대중사회로서
사찰에서도 수많은 신자들의 신행생활을 보다 효율적, 체계적, 계획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신도관리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각 사찰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사찰에는 입문자를 위한 일정기간의 교육과정들이 개설되어 있고
그런 과정이 끝나면 계를 받을 수 있는 수계의 기회들도 주어진다.
따라서 사찰의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니기 편한 적당한 사찰을 선택해 신자등록을 하고
사찰의 스님들과 상의하면 입문과정의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사찰이 아니라도 불교교리를 배울 수 있는 교양대학이라든가
그 밖의 여러 가지 교육프로그램들도 많고 입문자를 위한 서적들도 많으므로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불교신행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94. 자비에 대하여
자비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고뇌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
자(慈)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이익과 안락을 보태주는 것이고,
비(悲)란 고통받는 사람의 불이익과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이다.
석존께서 출가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자비를 어떻게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출가를 만류하는 부모와 처자를 떠나서 수행자의 길을 걸은 것은
개인적으로는 자신과 육친, 가족과의 인간적인 정을 끊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었겠지만
크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괴로움과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대자대비인 것이다.
석존께서 정각을 이루었을 때
그 깨달음의 내용을 중생들에게 설할 것이지, 설하지 말 것인지를 생각한 끝에
고뇌에서 신음하는 대중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구제하려는 비원(悲願)을 세우고 전법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존의 자비심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심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불교인의 기본적인 마음자세인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다른 것들과 어울려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연기설의 원리이며,
자신의 보다 나은 생활을 원한다면 먼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체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
그것이 행복을 구하는 길이다.
95. 자자와 포살이란 어떤 의례인가?
종교는 필수적으로 다양한 의례나 의식을 요구한다.
이런 형식들을 통해 각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취지와 신심을 고취하고
종교인으로서의 자세를 확립함과 동시에 결속을 다지기도 한다.
실제로 의례나 의식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많은 의례들 중에서 초기에 형성된 정착한 것이 자자와 포살이다.
전자는 승려들이, 후자는 주로 재가 신도가 행하는 의례이다.
승단을 유지해 나가는 기반은 두말할 나위없이 승려의 권위이고,
이 권위는 승려의 청정성과 성스러움에서 나온다.
권위의 원천인 청정성은
승려의 생활이 실제로 얼마나 바르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생활을 함에 있어, 항상 반성하고 죄를 지었으면
참회하여 청정성을 유지해 나가게 하는 조직상의 기능이 필요하게 된다.
자자와 포살이라는 의례는 바로 그런 필요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입된 것이다.
자자란 안거의 종료일에 그간 함께 지낸 동료들끼리 율의 가르침을 잘 준수하였는지
또는 그것을 깨뜨린 일은 없었는지를 서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승원생활이 확립되면서 승려들은 대개 함께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안거때 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로서 자자와 같은 종류의 의례가 실시되었는데,
그것이 포살이다.
다시 말하면
안거 때의 참회의식은 자자이고,
일상시의 자자와 유사한 의례는 포살인 셈이다.
그러나
포살은 재가 신도에게도 일상적인 의례가 되었다.
포살이란 우뽀사타라는 인도 말의 음을 빌어 표현한 용어인데,
이는 원래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오던 습속이었다.
중요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실시하는 단식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나중에는 일반적으로 중요한 행사나 행동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을 가리키게 되었다.
특히 사제인 바라문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을 성스러운 날로 정해놓고
그 전날 밤부터 화당에 머무르면서 단식 내지 절식을 하여 깨끗한 하루를 보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를 흔히 포살이라고 하였다.
애초에 불교는 마음이 우선 청정해야 함을 중시하여, 그런 습속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일반 민중 사이에 뿌리 박혀 있음을 보고서 그것을 발전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민중적인 습속의 형식은 채택하되 그 실질을 불교적 내용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는 민중교화를 위해 불교가 흔히 사용했던 환골탈태의 방법이다.
그 경위야 어찌되었던
불교에도 이 습속이 비교적 일찍부터 도입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포살은 승려들에게도 있었지만, 승려의 포살은 재가 신도의 포살과 그 내용이 다르다.
승려의 포살은 매월 2회 보름과 초하루에 상가의 승려 전원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열린다.
여기서는 율장에 정해진대로 승려들이 지켜야할 계율의 조목들을 읽어 나간다.
이를 위반한 승려는 그 사실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큰 죄를 범한 자는 별도의 처분을 받으며,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비교적 가벼운 범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이 의례는 승려 개인은 물론 상가 전체의 청정을 유지하게 하는 데에 막대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이를 철저히 고수해 온 남방불교에서는 승려들이 변함없이 권위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재가신도의 포살은
성스러운 날로 정해진 날에 가까운 절에 모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오계를 받으며,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하루를 생활하는 것이다.
포살일에는 속인일지라도 역시 단식이나 절식을 하면서 성적행위를 금하는 등의 금욕생활을 하였다.
말하자면 이 날만은 출가수행자가 되어 불교인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되새기고 다짐하는 것이다.
팔재계는 시대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차이나 발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계의 실천과 더불어
“때가 아닌 때에 음식물을 먹지 않는다”
“꽃이나 향료로 몸을 단장하지 않으며, 그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다리가 달린 좋은 침대가 아닌 마루에서 잔다”는 3종의 계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계란 잘 알다시피
생명을 해치지 말라,
남의 것을 탐하거나 훔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잘못된 성생활을 하지 말라.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할 약물 같은 것을 복용하지 말라의 다섯 금지 조항이다.
결국 포살이란
재가 신도에게는 오계를 한층 더 확대하여 준수하면서 깨끗한 하루를 보내는 정진결재일이며,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 모든 생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도록 결의를 새롭게 하여,
그 습관을 몸에 배이게 하는 날인 것이다.
이런 좋은 의례가 우리나라와 같은 대승불교권에서는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선 사원 자체가 일반 신도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한다.
승단의 권위는 청정을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보장받을 수 있을텐데,
속인들이 감히 접하지 못한 위치에서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승과 속의 거리감을 낳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속인들이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도시에 인접하거나 도시 안에 있는 사찰도 건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아울러 지적되는 원인은 계율에 대한 승속의 자세이다.
소승이라고 경시하는 남방불교에 비해 형식에 얽매이길 싫어하는 대승불교의 전반적인 경향이
계율의 엄격한 고수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한다.
이런 경향이 결정적인 약점은 될 수 없다고 인정되지만,
포살의례의 활성화는 분명히 그러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96. 재가신자들이 교단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재가의 남녀신자를 지칭하는 우바새와 우바이라는 말은
본래 돌보는 사람 또는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거기에서 보면
교단의 외호, 특히 교단에 대한 경제적인 뒷받침이
재가신자들의 일차적인 임무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사회전체가 철저히 산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계 일부에서도 거기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스님들이 직접 수익사업을 관장하고 계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출가하신 스님들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수행과 교화로서,
교단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생업을 지니고 있는 재가신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하겠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적인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스님들이 신자들의 덕목을 키우는 밭이라는 복전사상(福田思想)이 대단히 발달해 있어
재가신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복전인 스님들의 수행을 자진해서 돕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수행을 감시하기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많원 버스에 스님이 타면 남자 승객들이 그 스님 곁으로 파고들어
스님이 여자 승객과 신체적으로 접촉하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님들의 수행과 청정한 생활을 돕고,
특히 스님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하는 것 역시 재가신자들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출가와 재가를 너무 엄격히 구별하는 태도로서,
적어도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좀더 적극적인 재가신자들의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즉, 출가나 재가나 위없는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똑 같은 보살로서,
스스로 언젠가는 부처님을 이룰 몸임을 깊이 자각하여 지혜와 자비의 삶을 실현해 가는 것,
그것이 불자들 모두의 길이기 때문이다.
97. 중도(中道)란? 중간, 중용과 어떻게 다른가?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傭)이 아니다.
중도의 <중(中)>이란 팔정도의 <정(正)> 즉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좌, 우 중간할 때의 중간은 좌, 우에 대한 위치적인 처지를 말하지만
중도의 중은 그런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 더 자유로운 자연성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보되 걸림(선입견, 편견 등)이 없는 상태이다.
석존은 다섯 비구들에게,
「나는 쾌락도 고행도 무익하고 하등한 것이어서 다 버렸으며,
두 극단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닫게 되었고,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세상의 일들을 바르게 통찰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즉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모두 이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인 것이다.
연못의 진흙은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니다.
<더러움>이다.
반면에 백련(白蓮)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고 순백한 <깨끗함>이다.
이 더러움과 깨끗함은 극히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이 더러움 속에서 피어난다.
진흙과 연꽃과는 서로 양극을 이루지만
사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즉 불이(不二)인 것이다.
인간들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생 - 사, 승 ? 패, 정 - 부정, 독 - 약, 선 ? 악,
더 나아가 나 ? 너라는 것은 모두 둘이 아닌 하나이며
다만 인간이
이를 둘로 갈라서 차별을 할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의 <중>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눈(觀)인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중도가 아니다.
선, 악도 역시 그렇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는 것이다.
사성제 중의 고제 ? 고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 까닭도,
이 고가 있음으로써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고가 있음으로써 낙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고락도 하나이다.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또는 집착해서 보는 것은 중도가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라고 하는 것이다.
98.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시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다른 이름으로
지지보살(持地菩薩), 묘당보살(妙幢菩薩) 또는 무변심보살(無邊心菩薩)이라고도 하며
<대승대집지장십륜경> <지장보살본원경> <점찰선악업보경> 등에서 주로 설해지고 있는 보살이다.
<지장십윤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실 때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위촉받은 분이라고 한다.
흔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아무도 없어 지옥이 텅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유명한 이 보살에게는
따라서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말하자면
중생제도의 맹세가 누구보다도 강하고 위대한 분으로서,
그 원력의 힘으로 자신의 안락은 뒷전으로 돌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서 그를 구원하는 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을 한 체 지팡이나 지혜를 상징하는 보배구슬을 든 형상을 하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
특히 지옥 중생들의 제도와 관련하여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의 보존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의 옆에 모셔지기도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득대세(得大勢), 대정진(大精進)이라고 하며
본래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을 보좌하는 보살로 잘 알려져 있는 분이다.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의 이마에 아미타부처님의 화불을 모시고 있는데 비해
보병을 지니고 있는 것만이 다를 뿐 그 형상이 관세음보살과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따라서 역사상 독립적으로 신앙된 일은 없이
다만 아미타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만 모셔지는 분이다.
99. 진정한 회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종교를 믿는 이유는
우선 종교를 통해 나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삶의 행복을 위해서다.
이런 개인적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윤리 규범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불교는
개인의 행복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명백히 제시한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서 종교의 소임을 다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일반의 교훈은
노력하면 그만큼의 댓가를 받는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또 노력한 결실을 얻고자 하고,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댓가를 요구한다.
그런데 불교는
정당한 그 댓가나 결실을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돌려줄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것을 회향(廻向)이라 부른다.
불교인들이 흔히 실시하는 회향식은 그러한 의사의 집단적 표명이다.
회향이란 자기가 닦은 공덕을 돌려준다는 것으로,
그 돌려주는 대상은 보리, 즉 깨달음과 중생이다.
보살의 대표적인 실천강령인 육바라밀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흔히 보살행이라 말하는데,
보살행의 이념은
나와 남의 이익을 동시적으로 추구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바로 이것이 회향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보살행의 종국적인 태도가 회향인 것이다.
이 회향에 대해 ‘화엄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두 다 회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
처음 예배하고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을 수순하기까지
그 모든 공덕을 온누리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돌려,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한다.
나쁜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일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인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보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 다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없이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힘쓴다.
보살은
대자비를 완성하여 중생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돌려,
중생을 위해 활동하길 조금도 쉬는 일이 없다.
보살은 깨달음의 마음으로써 온갖 선을 닦고,
모든 중생을 위해 지도자가 되어 지혜의 길을 제시하고,
모든 중생을 위해 진리의 태양이 되어 온누리를 비춤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길 조금도 쉬는 일이 없다.
보살은 부처님이 설한 최상의 진리를 듣고 마음 속 깊이 새길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중생에게 설법하여 다음과 같이 회향한다.
‘저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무수하고 끝없는 세계 속의 모든 부처님들을 바르게 생각하여
보살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세계를 있어서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해
영원토록 보살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저는 모든 세계에 있어서 모든 중생을 위해
마찬가지로 영원토록 보살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
이처럼 웅대하고 비장한 의지로 표명된 회향의 정신은,
남의 잘못한 댓가는 내가 받겠으며
내가 잘한 댓가는 남에게 돌리겠다는 자비심의 극치로
고도의 헌신과 자기 희생이 회향의 정신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회향은
업보의 전환을 의미하며 보살행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100. 참회란?
과거로부터 지어온 잘못은 물론 현재 생활하는 가운데
지은 모든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또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부처 앞에 고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
다른 종교에서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불교에서는 특히 참회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계(戒)란 타율적인 규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것이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거니와 자신마저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먼저 참회하고 나서 자신의 원을 세우라고 가르친다.
▶불교에는 두 가지의 참회의식이 있다.
하나는 보름과 그믐에 대중(스님)이 한 곳에 모여 계경(戒經)을 다시 한 번 공부하면서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는 의식이다.
이것을 포살(布薩)이라고 한다.
일반 재가신도들도 법회 때 포살을 겸해서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자(自恣)이다.
스님들이 안거를 끝내는 마지막 날, 함께 공부하던 대중들이 모여
서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동안에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꾸중듣기를 청하는 것을 말한다.
☞ 또 참회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불상 앞에서 자신의 죄악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사참(事懺)이다.
즉 예불, 독경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마음으로 이치를 따져 몸과 마음의 번뇌를 끊어 죄를 짓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하는 이참(理懺)이다.
이와 같은 참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내밀한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용서를 청하는 겸허한 태도다.
이는 부처님께 향하는 거짓 없는 마음의 표시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이기도 하다.
남이 강제로 시킨다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라는 거울에 그 동안 정직하지 못했던 자신을 비추어 보고
참된 자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욕이며 갈망인 것이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