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김씨 삼강정려(彦陽金氏 三綱旌閭)
위치 : 정읍시 용계동 정문안마을 안쪽
구조 : 정려각 맞배지붕, 겹처마 - 현판
규모 : 각 185㎝×185㎝×216㎝
연혁 : 1629년(仁祖 7) 2월 일 명정(命旌), “충신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안주목사 겸 방어사 김준 지려(忠臣 贈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行 安州牧使 兼 防禦使 金浚 之閭)” 1629년(仁祖 7) 2월 일 명정(命旌), “열녀 증 숭정대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안주목사 겸 방어사 김 준 처 증 정부인 김씨 지려(烈女 贈 崇政大夫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行 安州牧使 兼 防禦使 金浚 妻 贈 貞夫人 金氏 之閭)” 1629년(仁祖 7) 2월 일 명정(命旌), “효자 증 통정대부호조참의 김유성 지려(孝子 贈 通政大夫戶曹參議 金有聲 之閭), 1629년(仁祖 7) 2월 일 명정(命旌), 정려각 옆에 충노 헌충 비(忠奴 獻忠碑)가 있다.
설명 : 정읍시 용계동 정문마을 안쪽에 자리한 언양김씨 삼강정려는 200여 평의 대지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건물로 정려각 안에는 정판 3매가 나란히 걸렸는데 벽면 전체를 상하 2단으로 나누어 홍살을 박아 외부에서도 볼 수 있게 했으며 삼강(三綱)의 내용을 음각(陰刻)하였다. 글씨는 송동춘(宋東春) 명필이 썼고 건물 둘레 4면은 이조식 담장으로 쌓았고 정면 중앙에 문루를 세웠다.
김준(金浚) 1582(宣祖 15)~1627(仁祖 5)
본관은 언양(彦陽)이요 자는 징언(澄彦), 광필(匡弼)의 아들로 고부 금정리(현 정읍시 용계동 정문마을)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나 무예(武藝)에 힘써 1605년(선조 38) 24세 때 무과(武科)에 올랐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교동(喬棟,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현감에 이르렀으나 임기가 되어 고부 향리로 돌아왔다. 1614(광해 6)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집에 다녀간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있었기에 효성이 남달랐던 것 같다. 때마침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이 극도에 이르렀고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전관을 제수했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가하여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고 경력(經歷)으로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로 승진 되었고 이듬해인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후영장(後營將)을 맡아 임진강(臨津江)상류를 수비하게 되었는데 병력은 1천명도 못되는 숫자였다. 얼마 뒤 임진강 상류를 지키고 있던 이경립(李景立)의 부대가 패하여 투항하자 적은 서울로 쳐들어왔는데 그는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을 도와 적군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으며 때마침 황해도 봉산(鳳山)고을이 피폐하여 민심이 흉흉하자 조정에서는 적임자를 고르고 있었는데 주위의 천거로 봉산군수(鳳山郡守)에 제수되어 부임한지 1년도 못돼서 봉산고을은 태평한 세상이 되자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1625년(인조 3)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안주목사(安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임명되었는데 안주는 북방의 요새지였으나 수비 병력이 창성(昌城)과 의주(義州)에만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병사조차도 없는 곳이여서 유사시에는 방어에 아주 취약한 곳이었다. 1627년(인조 5) 1월 13일 청나라의 태조 누루하치(奴兒蛤赤)는 용골대(龍骨大)를 선봉장으로 하고 조선의 항장(降將) 강홍립(姜弘立)을 향도로 하여 정병 3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침범해오니 이른바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1월 19일 청천강을 건너온 청군(淸軍)의 선봉부대가 안주성의 북문으로 육박해왔지만 수성군(守城軍)의 결사항전으로 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공격을 멈추었고 다음날 글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니 다음날엔 총병력을 동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집중공격을 퍼부어 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때 전황을 살피던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은 강화도에서 피난 중인 인조왕께 장계(狀啓)를 올리기로 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외로운 성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인데 평안감사 윤훤(尹煊)은 수하에 군사를 두고 있으면서도 하루길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구원하려 하지 않으니 신(臣) 등은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로소이다’라는 글을 써놓고 강화도로 보낼 사람을 고르고 있었는데 성안에는 김 목사(金牧使)의 18세 된 아들 유성(有聲)이 함께 있었다. 남 병사는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면 어린 소년들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측은하게 여겨 유성을 사자(使者)로 골랐는데 곁에 있던 김 목사가 ‘그것은 안 될 일이요 성의 함락이 조석으로 임박하여 장병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국인데 홀로 내 아들만 살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 나로서는 이에 응할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물리쳤다. 충(忠)과 의(義)에 불타는 김 목사의 의연한 말에 남 병사도 두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을 골라 보냈다고 하는데 성중에는 둘째아들 유성 외에도 처(妻) 김씨(金氏, 이무렵 첫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1619년에 사별하였음)와 김씨가 낳은 세 살난 딸, 봉산군수의 아들 나수소(羅守素)에게 출가 했다가 근친와 있는 본처 소생의 둘째딸이 함께 있었다. 형세가 급박하자 사돈인 봉산군수는 안주성으로 하인을 보내 며느리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그는 ‘오랑캐가 성밖에서 성을 함락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내 식구를 내보낸다면 성안의 민심이 동요될 것이다’ 하면서 허럭하지 않았다. 딸도 아버지의 결심에 따라 ‘오직 죽음뿐이니 지하에서 다시 만나자’는 최후의 유서를 혈서로 써서 두 하인에게 주면서 ‘너희들이 다행이 살아 나가거든 이것을 낭군님에게 전하라’고 일렀다. 결사항전으로 버텨오던 성안의 군사들이나 백성들은 3일 동안이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뿐 아니라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쳐 있었는데 청나라의 용골대와 마대부(馬大夫)는 직접 선봉에서서 성벽을 기어올랐고 다른 적군들 수만명도 동문과 북문으로 물밀듯이 몰려드니 사세는 이미 기울고 말았다. 북문의 문루에서 활을 쏘고 군사들을 독전(督戰)하던 김 목사는 적병들이 문루 아래까지 접근해오자 최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병사 남이흥, 박천군수 윤혜, 노장 함응수와 함께 북향사배(北向四拜)한 뒤 미리 준비했던 화약포대에 불을 당겨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으니 향년 46세였다. 아들 유성도 아버지의 순절소식을 듣고 적병을 맞아 싸우다 순절했고 종 헌충(獻忠)은 적군이 몰려들자 문을 지키고 있다가 적병과 싸우다 죽었으며 처 김씨도 세 살난 딸과 함께 죽었으데 봉산군수의 아들 나수소와 혼인했던 딸도 은장도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은채 적에게 발견되어 치료를 받고 보호되던 중에 단식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후 평안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안주성의 순절사실을 조정에 아뢰었고 인조(仁祖)임금은 ‘한 집안이 삼강(三綱)을 갖추었도다’고 치하하고 그해 7월 8일에 유해(遺骸)를 향리인 고부 금정리에 예장(禮葬)하게 하였으며 숭정대부우찬성(崇政大夫右贊成)을 증직하는 한편 명정(命旌)을 내리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을 보내어 제문(祭文)으로 그 영령을 위로하였다. 막내아들 태성(泰聲)은 아직 어려서 배성들이 숨겨주어 살아남았으며 처 김씨에게는 정부인(貞夫人), 아들 유성에게는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를 증직하는 동시에 정려(旌閭)를 내렸고 나수소의 처 김씨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1632년(인조 10) 정읍 정충사(旌忠祠)와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고 1681년(숙종 7) 좌찬성(左贊成)을 가증(加贈)하였으며 장무(壯武)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향리에는 김준부조묘(金浚不祧廟)와 삼강정려(三綱旌閭)가 있다.
* 정읍문화원에서 2009년도 사업으로 정읍의 정려를 발굴 정리하여 양장본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 언양김씨 삼강정려 중 김준장군편을 소개한다.
언양김씨 정읍종친회장 김성실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