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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도래한 성씨
중국에서 도래한 성씨는 총 227개의 성씨가 있는데 안씨중에는 죽산안씨(구), 광주안씨, 탐진안씨, 태원안씨를 나열했다. 말도 안되는 설명내용을 어지할꼬...
현명한 독자께서는 잘못 설명된 내용을 잘 아실거라고 믿습니다. 올바른 성씨유래가 널리 설파되도록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소주 가씨(蘇州賈氏)
시조는 가유약(賈維鑰). 명(明)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계원도찰사(薊遼都察使)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군(明軍)을 이끌고 와 안주(安州)싸움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돌아갔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아들, 손자와 함께 다시 들어와 부산에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원래 가씨(賈氏)는 주나라 문왕(周文王)의 자손으로 공명(公明)이 가백(賈伯ㆍ賈는 지금의 낙양, 소주 일대) 에 봉해짐으로써 가씨(賈氏)가 되었다.
2. 회산 감씨(檜山甘氏)
시조는 감규(甘揆), 원(元)나라 사람(원래는 노<魯>나라 한림학사)로 고려 충정왕 1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따라 원조(元朝)의 한림학사(翰林學士)들이 배종(陪從)해 올 때 함께 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때 함께 온 분들은 공소(孔紹), 장경(張敬), 황보영(皇甫榮), 독고억(獨孤億), 서문씨(西門氏), 남궁씨(南宮氏), 변숙(邊肅) 등 학사들이라 한다. 회산(檜山)은 지금의 창원(昌原)이다.
3. 남양 갈씨(南陽葛氏)
제갈(諸葛)씨의 시조는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이며, 그의 20세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귀화하였다. 고려조 고종 때 제갈공순의 12세손 제갈홍(諸葛泓), 제갈형(諸葛瀅) 형제가 각기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여 성(姓)을 삼았다.
4. 신천 강씨(信川康氏)
시조는 강후(康候). 기자(箕子)가 동래할 때 서주(西周) 무왕(武王)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8조(條)를 제정하고 윤리를 교화한 공으로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되고, 아버지 강숙의 '康'자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중시조(中始祖)는 강지연(康之淵)이며, 후대에 곡산(谷山)ㆍ재령(載寧)ㆍ충주(忠州)ㆍ진주(晋州) 등의 별관이 생겼으나 신천(信川)으로 통일하였다.
5. 충주 강씨(忠州强氏)
강(强)씨는 진(晋)나라의 대부(大夫) 강검(强검)의 후예로, 송(宋)나라 휘종 때 강준명(强浚明)과 이종(理宗) 때 경순(警巡) 강신(强伸) 등이 전해오고 있으나 동래(東來) 시기는 알 수 없다. 강씨(强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ㆍ감숙성 남동부 위수에 면한 상업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진(晉)나라 때 사람인 강일(强일)이 시조(始祖)가 되며, 우리나라 강씨는 북송(北宋) 휘종(徽宗) 때의 전당(錢塘) 출신인 강준명(强逡明)의 후손으로 전하나 언제 동래(東來)하였는지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어 상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강씨(剛氏)는 1908년 민적부에 기재할 때 강씨(强氏)를 잘못 적은 것이라고 한다. 강씨(剛氏)는 청(淸)나라 덕종(德宗ㆍ제 11대 황제, 재위기간은 1875~1908) 때 사람인 강의(剛毅)가 만주(滿洲) 출신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지낸 것으로 문헌(文獻)에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에 동래(東來)한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6. 여주 개씨(驪州介氏)
‘한국씨족통보(韓國氏族統譜)’에 따르면 개씨(介氏)는 중국 태평(太平ㆍ지금의 山西城)에서 계출(系出)되었다 한다. 주양왕(周襄王) 때 진(晋)에 개자(介子)가 있어 왕광림(王光臨)으로 개명(改名)했다고 한다. 동래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7. 청주 경씨(淸州慶氏)
경씨(慶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서 제(齊)나라 공족(公族)이었으나,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하내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현존하는 관향은 청주(淸州) 단본이다. 시조로 전하는 경진은 고려 명종 때 정의광정대부를 지냈다. 중국에서 왔다는 근거가 없어 중국과 확실히 연계할 수 없다.
8. 태인ㆍ해주 경씨(泰仁ㆍ海州景氏)
시조는 경여송(景汝松).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뒤 평양(平壤)에 세거하였다. 그 뒤 보계(譜系)를 잃어 고려조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와 동남도병마사(東南都兵馬使)를 지내고 태산부원군(泰山府院君)에 봉해진 경차(景磋)를 일세(1世)로 하고 있다. 그 뒤에 또 소목(昭穆)이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직제학대사공(直提學大司空)을 지낸 경상조(景祥祖)와 좌복야(左僕射)에 있었던 경상록(景祥祿) 형제를 관조(貫祖)로 삼아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로 분관하였다.
9. 수안 계씨(遂安桂氏)
시조는 계석손(桂碩遜). 명(明)나라 천수(天水)사람으로 성양 태수(城陽太守) 경횡(炅橫)의 셋째 아들이다.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홍무제(洪武帝ㆍ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와 예학(禮學)을 전수한 뒤,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다. 수안(遂安)은 황해도 북부에 위치한다.
10. 광령 고씨(廣寧高氏)
시조는 고유보(高有寶). 명(明)나라 사람으로 명(明)ㆍ청(淸) 교체기에 청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인조 초에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는 송(宋)나라 진종 때 위국(衛國)의 충렬무왕인 고경(高瓊)의 후손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광령(廣寧)은 중국 지명이다.
11. 용궁ㆍ면천 곡씨(龍宮ㆍ沔川曲氏)
곡씨(曲氏)는 1960년도 국세조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로 용궁(龍宮), 면천(沔川) 두 본이 있다. 원래 중국 성씨로 당(唐)나라 때 장군을 지낸 곡환(曲環)이 있다. 동래(東來)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태조때 평찰(評察)를 지낸 곡긍회(曲矜會)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된 성씨임을 알 수 있다.
12. 김포 공씨(金浦公氏)
시조 공윤보(公允輔). 당(唐)나라때 사람으로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18학사 중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김포에 정착, 공씨(公氏)의 시조가 되었다. 공씨의 선계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이자 공자(孔子)의 제자로 72인의 반열에 들었던 공숙문자(公叔文子), 즉 공하수(公夏守)라 하였다.
13. 곡부 공씨(曲阜孔氏)
시조 공소(孔紹)는 원(元)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공민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 8학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공민왕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졌다.
공씨의 선조는 공자(孔子)로, 세록에도 문선왕 공자(文宣王孔子)를 시조로 기세(起世)하면서 곡부 공씨 중국종통曲阜孔氏 中國宗統)편에 엮고 있다. 중국 노(魯)나라의 공자(孔氏)와 동원임으로 곡부(曲阜)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14. 선산 곽씨(善山郭氏)
곽씨(郭氏)는 중국의 성씨로서 주문왕(周文王)의 아우 괵중(괵仲)이 괵(괵)에 봉함을 받은 후 괵과 비슷한 음을 따서 곽공(郭公)이라 불렸기 때문에 곽(郭)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선계는 주(周)나라 왕손 곽목(郭穆)인데, 고려조에 호를 암곡(巖谷)이라 한 정의공(正懿公) 곽경(郭鏡)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져 포산 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뒤 고려 중기에 은청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銀靑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 겸 태자첨서(太子詹書)를 지낸 곽우현(郭佑賢)이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져 선산 곽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때 포산 곽씨와 합보(合譜)하여 포산으로 통일했으나, 그 뒤 세계간의 연대차가 발견되어 서천공(西川公) 곽우현(郭佑賢)을 시조로 하고 있다.
15. 현풍(포산) 곽씨(玄風ㆍ苞山郭氏)
시조는 곽경(郭鏡). 송(宋)나라 관서(關西)의 홍농(弘農) 사람으로 문연각 한학사(文淵閣翰學士)가 되었다. 고려 인종11년에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 16년 등과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평장사 문하시중(平章事文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현풍 곽씨 중에는 한때 본관을 선산(善山). 해미(海美). 강릉(江陵) 등 별관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이 의례 현풍 곽씨(玄風郭氏ㆍ시조 郭鏡)의 후손이라 써 왔기에 1979년 종회 의결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
16. 능성 구씨(綾城具氏)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진(晋)나라 대부(大夫) 구병(具丙)으로 전하여,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고종 11년(1224년)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잠(朱潛)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구존유(具存裕)의 장인은 송나라 사람 주잠(朱潛)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송나라가 몽고(蒙古)에 게 패망하자 7학사와 함께 금성(錦城ㆍ지금의 나주)에 망명해 왔다. 유명한 주희(朱熹)는 처(妻) 고조(高祖)가 된다.
17. 창원 구씨(昌原具氏)
'창원구씨세보(昌原具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창원 구씨는 원성(原姓)이 구씨(仇氏)로 한(漢)나라 명환(名宦) 구남의 후손 구성길(仇成吉)이 동래(東來)하여 혜종 2년(945년) 서경(西京)에서 공(功)을 세워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贊成事ㆍ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생원(生員) 설(雪)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조선 세종(世宗)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종길(宗吉)을 중시조(中始組)로 계대(繼代)하여 오다가 정조 15년(1791년) 현재의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18. 평해 구씨(平海丘氏)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丘)자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營丘)의 구(丘)자를 자손(子孫)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구대림(丘大林). 중국 당(唐)나라 장군으로 신라 문무왕 3년에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도시조(都始祖)인 황락(黃洛) 장군과 함께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경북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에 표착, 평해 구씨(平海丘氏)의 조상이 되었다.
19. 담양 국씨(潭陽鞠氏)
시조 국주(鞠周)는 원래 송(宋)나라 사람으로 인종 4년(1126년) 황제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잡혀가자 남송(南宋)으로 옮겼다가 고려 인종 6년(1128년) 부인 영산 신씨(靈山辛氏)와 변구만(邊九萬) 등과 함께 동래(東來)하였다. 인종은 그를 감정관(監正官)에 제수했고, 그 뒤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위를 떨쳐 추성군(秋城君)에 봉해졌다. 추성(秋城)은 지금의 담양(潭陽)이다.
20. 국씨(國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국씨(國氏)는 중국 성씨로, 유명 인사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정(鄭)나라 재상(宰相) 자산(子産)을 들 수 있다. 자산의 본명은 국교(國僑)이다. 국씨는 백제 8대 성(姓) 중 하나이다.
21. 토산 궁씨(兎山弓氏)
시조는 궁흠(弓欽). 본래 중국 태원(太原)의 후손으로 은(殷)나라 말에 동래(東來)하여 토산(兎山ㆍ황해도 금천군에 있는 지명)에서 세거(世居)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계가 실전(失傳)되어 궁계신(弓繼信)을 일세(1世)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궁씨(弓氏)는 중국의 성씨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숙궁(叔弓)이 궁(弓)자를 따서 성을 삼았다고 한다.
22. 행주 기씨(幸州奇氏)
시조는 기우성(奇友誠). 백제 온조왕(溫祚王) 때 시중(侍中)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행주(幸州)에 세거, 행주(幸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기씨는 행주(幸州) 단일 본으로 기자조선을 연 기자(箕子)가 선계조(先系祖)라고 밝히고 있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이다.
기자(箕子)의 41세손 기준(箕準ㆍ哀王)이 연인(燕人)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남천(南遷), 현재의 익산으로 옮기고 그의 7세손 기훈(箕勳ㆍ元王)에 이르러 3형제를 두었는데 그들은 각기 다음과 같이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첫째 우성(友誠)은 덕양(德陽ㆍ幸州奇氏)
*둘째 우양(友諒)은 상당(上黨ㆍ淸州韓氏)
*셋째 우평(友平)은 북평(北平ㆍ平壤鮮于氏)가 되어 지금까지 통혼을 하지 않고 있다.
23. 행주 기씨(幸州箕氏)
기씨(箕氏)는 고대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사람인 기자(箕子) 후예라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행주 기씨(幸州奇氏)와 동원(同源)으로도 전해진다.
24. 해평(선산) 길씨(海平ㆍ善山吉氏)
시조는 길당(吉瑭). 길씨(吉氏)는 중국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해 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당(吉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는 중국 당(唐)나라에서 열경(列卿)의 벼슬에 있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증조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낸 길시우(吉時遇)를 시조로 삼아 기세(起世)하였다.
25. 영양 김씨(英陽金氏)
시조는 김충(金忠). 당(唐)나라 사람으로 형주자사(荊州刺使) 겸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그는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 신라 경덕왕 14년 일본에 초빙되어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착.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는 뜻으로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였다. 사성(賜姓) 전 아들을 김씨(金氏), 사성(賜姓) 후 아들을 남씨(南氏)로 하였다.
26. 태원 김씨(太原金氏)
시조는 김학증(金學曾). 명나라 신종 때 복건성 도어사(都御使)를 지냈고, 한림태원백(翰林太原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평(金坪)이 한림시강(翰林侍講)을 지낸 뒤, 인조 4년에 우리나라에 망명, 김해 대종산 아래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태원(太原)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27. 금성 나씨(錦城羅氏)
시조는 나총예(羅聰禮). 금성 나씨는 본래 중국 축융(祝融)씨의 후예인 운씨(鄖氏)였는데 춘추시대에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써 나(羅)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당(唐) 태종(太宗) 때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있던 나지강(羅至强)이 우리나라에 망명, 지금의 나주(羅州)에 정착한 뒤 신라조의 좌승상(左丞相)에 올랐다.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일 뿐 아니라 시조가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는 연유로 금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나문서(羅文瑞)를 시조로 하는 군위 나씨 (軍威羅氏)는 금성 나씨(錦城羅氏)에서 분적된 것이다.
28. 나주 나씨(羅州 羅氏)
시조는 나부(羅富). 고려조에 정의대부감문위 상장군(正議大夫監門衛上將軍)을 지냈다. 나부(羅富)는 남송(南宋) 고종조 때 고려조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왔다가 미쳐 돌아가지 못한 사이에 송(宋)나라가 멸망, 여황(艅艎ㆍ지금의 나주)에 눌러 살게 되어, 후손들이 나주로 관향(貫鄕)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29. 안정 나씨(安定羅氏)
시조는 나천서(羅天瑞).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에 안정백(安定伯) 겸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졌다. 안정 나씨는 나주 나씨에서 본이 옮겨졌다고 한다. 또 원래 당(唐)나라 태종 때 한림수찬관(翰林修撰官)으로 있다가 참소를 입어 우리나라에 피신, 지금의 나주에 정착, 관향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30. 영양ㆍ의령ㆍ고성 남씨(英陽ㆍ宜寧ㆍ固城南氏)
시조 남민(南敏). 중국 당(唐)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사람으로 원명은 김충(金忠)이었다.(영양 김씨 참조) 고려 명종 때 남민(南敏)의 후손 3형제가 높은 관직에 올라 남홍보(南洪輔)는 영양 남씨(英陽南氏), 남군보(南君輔)는 의령 남씨(宜寧南氏), 남광보(南匡輔)는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31.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는 남궁원청(南宮元淸). 고려 성종조의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감물아백(甘勿阿伯ㆍ감물아는 함열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그는 중국의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이유성(李惟成), 황보검(皇甫儉) 등과 함께 기자(箕子)를 따라 동래하여 사도(司徒)를 지낸 남궁수(南宮隋)의 후손이다.
32. 양주 랑씨(揚州浪氏)
랑씨(浪氏)는 중국 양주(揚州ㆍ지금의 강소성 강도현) 단본이며, 시조는 단지 랑충정공(浪忠正公)으로 전해올 뿐 어느 시대 인물인지 알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랑씨(浪氏)는 중국 강서성(江蘇省) 양주(揚州)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명(明)나라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낸 랑초(浪礎)라는 사람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고 등주(登州)에 유배되었다가 화(禍)를 피해 조선조 인조 때 배를 타고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33. 노씨(盧氏)
우리나라 노씨는 노수(盧穗)를 도시조(都始祖)로 한다. 그는 중국 당(唐)나라 때 범양(范陽)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신라 효성왕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아들 9명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평안도 정주(定州)에 정착하였다가 용강(龍岡)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곡산 노씨(谷山盧氏), 광주ㆍ광산 노씨(光州ㆍ光山盧氏), 교하 노씨(交河盧氏), 만경 노씨(萬頃盧氏), 신창 노씨(新昌盧氏), 안강ㆍ경주(安康ㆍ慶州盧氏), 안동 노씨(安東盧氏), 연일 노씨(延日盧氏), 장연 노씨(長淵盧氏), 풍천 노씨(豊川盧氏), 해주 노씨(海州盧氏) 등 대부분이 노수(盧穗)의 후손이다.
34. 노씨(魯氏)
중국 은(殷)나라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8백 의사(義士)를 데리고 온 성씨 중의 한 분으로 여러 번의 변란을 겪으며 비조(鼻祖)의 이름이나 관작(官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노씨(魯氏)는 주(周)나라 때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노후(魯候)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이 ‘魯’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노씨(魯氏)는 강화(江華), 광주(廣州), 밀양(密陽), 함평(咸平) 등이 있는데 모두 동조(同祖), 동원(同源)이다.
35. 개성 노씨(開城路氏)
노씨(路氏)는 중국 내황(內黃)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한(漢)나라 때 노(路) 땅에 봉해진 황제(黃帝)의 후손이 지명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시조 노문경(路門儆)은 원래 원(元)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고려조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행하여 동래(東來), 개성(開城)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개성(開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36. 교동 뇌씨(喬洞雷氏)
본관 교통(喬洞)은 강화도에 딸린 섬으로 연산군이 귀양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뇌씨(雷氏)는 본래 중국 성씨(姓氏)라고 하며, 동래 시기는 알 수 없다.
37. 강음 단씨(江陰段氏)
원조(遠祖)는 단일하(段一河). 중국의 연안성(延安城) 강음현(江陰縣)사람으로 명나라 헌종조에서 내원직각(內院直閣)을 지냈고, 뒤에 노(魯)의 영조사(領詔使)가 되었다. 그의 4세손 단만리(段萬里)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총병장(摠兵將)으로 왔는데, 그때 그의 아들 단희상(段希詳)이 함께 왔다.
강음 단씨(江陰段氏)는 단만리(段萬里)를 중시조로 섬기는데, 강음(江陰)은 황해도 김천군에 있던 지명이다. 단씨(段氏)는 희성(稀姓)임에도 10여개의 본관이 있는데 ‘범단씨대동보(汎段氏大同譜)’를 작성하고 있어 본관이 하나로 통일될 전망이다.
단씨(段氏)는 본래 중국 경조(京兆: 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 (系出)된 성씨(姓氏)로 정장공(鄭莊公)의 아우 숙단(叔段)의 후손이 이름자인 단(段)을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38. 한산 단씨(韓山端氏)
단씨(端氏)는 한산(韓山) 단본으로 옛 문헌에도 보이는 성씨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단씨(端氏)는 본래 중국 성씨라고 한다.
39. 밀양 당씨(密陽唐氏)
시조는 당성(唐誠). 본래 절강성(浙江省) 명주인(明州人)으로 원말(元末)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 창업을 도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태종 12년 가정대부 공안부윤(嘉靖大夫恭安府尹)이 되었고 밀양 당씨(密陽唐氏)로 사관(賜貫)되었다.
당씨(唐氏)는 중국 진양(晋陽ㆍ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도당씨(陶唐氏ㆍ제요를 일컬음)의 후예(後裔)가 당(唐)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40. 밀양 대씨(密陽大氏)
시조는 대중상(大仲象). 원래 당(唐)나라 장군으로 말갈족을 통치하였으며 진국공(震國公)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세워 228년간 왕권을 유지하였는데, 거란(契丹)에게 멸망하자 애왕(哀王)의 아들 대탁(大鐸)이 자손을 이끌고 밀양(密陽)에 와 정착하였다. 한편 발해(渤海)가 망하자 후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투하하여 왕씨(王氏ㆍ太氏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를 하사(下賜)받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41. 성주ㆍ팔거ㆍ성산 도씨(星州ㆍ八莒ㆍ星山都氏)
도씨(都氏)는 중국 여양(黎陽ㆍ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사람인 도계(都稽)가 한무제(漢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呂嘉)의 반란을 평정하여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도씨(都氏)는 도계(都稽)의 후손 도조(都祖)가 성제(成帝ㆍ중국 전한 제11대 황제) 때 고구려(高句麗)에 건너와서,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인 비류(沸流), 온조(溫祚)와 왕권쟁탈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여 유리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였으며,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공헌한 후 우리나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문호(門戶)가 열렸다. 성주(星州), 성산(星山), 팔거(八莒ㆍ지금의 漆谷) 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다 동조(同祖), 동원(同源)이다.
42. 순천 도씨(順天陶氏)
시조 도구원(陶球元)은 원나라의 진사(進士)이다.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원(元)나라 세조 2년, 곧 고려 충렬왕 22년에 원(元)의 빈탑실련(賓塔實憐) 공주의 배신(陪臣)으로 우리나라에 와 순천에서 눌러 살았다.
'순천도씨김포세보(順天陶氏金浦世譜)'에 의하면 순천 도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진(晋)나라 사람인 도단(陶丹)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도간(陶侃ㆍ257~332)이 진(晋)나라 무장(武將)으로 진(晋)왕조가 오(吳)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하는 데 훈공을 세웠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무장 도간(陶侃)의 증손(曾孫)이다.
43. 고성 도씨(固城道氏)
도씨(道氏)는 중국 성씨로 고성 단본인데, ‘도곡총설(陶谷叢說)’ ‘전고대방(典故大方)’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다.
도씨(道氏)는 한(漢)나라 때 중국 여음(汝陰ㆍ지금의 안휘성 영주지방)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도씨(道氏)의 연원(淵源)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발견된 성씨이나 자료가 충분치 못하다.
44. 남원 독고씨(南原獨孤氏)
선조(先祖) 독고공순(獨孤共舜)은 원래 중국 하남성 남원(南原) 출신으로 고려 중엽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며, 독고공순(獨孤公舜)이 신라 말엽에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해 정착세거(定着世居)한 것이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세조 독고신(獨孤信)은 고려조 충숙왕 때 유명한 학자로 남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독고씨(獨孤氏)는 중국 고양(高揚ㆍ지금의 직예성 보정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남원(南原)ㆍ광릉(廣陵ㆍ중국)을 비롯하여 나주(羅州)ㆍ황주(黃州)ㆍ의주(義州) 등 다섯 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한다.
45. 광천 동씨(廣川蕫氏)
시조 동승선(董承宣)은 한무제(漢武帝) 때의 대유(大儒)로 광천백(廣川伯)에 봉해진 동중서(蕫仲舒)의 43세손으로 고려말에 와 접위사(接慰使)로 복지(卜地)하게 된 동승선(蕫承宣)으로부터 비롯됐다. 광천(廣川)은 동중서(董仲舒)의 고향으로 중국의 하북성에 있다.
그런데 광천 동씨(廣川董氏)에는 동승선의 후손 외에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도진사(都眞使)로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명장(明將) 동일원(董一元)의 후손이 있다. 동일원은 명군이 철수할 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따라 종군했던 아들 대순(大順)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후금(後金)의 난이 일어나자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46. 동방씨(東方氏)
동방씨(東方氏)는 중국 제남(濟南ㆍ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나왔다고 하여 동방(東方)을 성(姓)으로 삼은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동방씨(東方氏)의 중시조는 조선조 정조때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을지낸 동방숙(東方淑)으로 알려졌다.
47. 두릉 두씨(杜陵杜氏)
두씨(杜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경조(京兆ㆍ협서성 관중도 장안현)에서 시작된다.
*두경령계(杜慶寧系) : 두경령(杜慶寧)은 중국 북송 태종(太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왕위계승 문제로 직언과 극간을 하다가 소주자사(蘇州刺使)로 좌천되어 가던 중 배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에 표착하였다. 두릉(杜陵)은 지금 의 전북 김제군 만경면을 말한다.
*두교림계(杜喬林系) : 두교림(杜喬林)의 아들 두사충(杜師忠)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여송(李如松) 장군을 따라 구원군으로 와 활약한 뒤 그 아버지를 시조로 삼고 정착했다.
48. 상곡 마씨(上谷麻氏)
중시조는 마귀(麻貴). 명(明)나라의 대장군 병부상서(大將軍兵部尙書)로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원병을 이끌고 온 명나라의 제독이다. 관향인 상곡(上谷)은 하북성(河北省)에 있고, 시조 역시 원조(遠祖)인 회회국왕(回回國王) 마립(麻立)으로 하고 있다.
49. 만씨(萬氏)
만씨(萬氏)는 보통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원병(援兵)으로 왔던, 명(明)나라 경리사(經理使) 만세덕(萬世德)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그 이전부터 나타난다. 만씨(萬氏)는 중국 부풍(扶風ㆍ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한(漢)나라 명제(明帝ㆍ후한의 2대 왕, 재위기간 58~75년) 때 28장군(將軍)의 한 사람인 만수(萬修)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50. 충주 매씨(忠州梅氏)
매씨(梅氏)는 충주(忠州) 단본이다. 권문회(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매씨(梅氏)는 본래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부(濟南府) 출신인데, 매씨(梅氏)를 사성(賜姓)받고 관향을 충주(忠州)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대 인물로는 조선조 중종 때 황간(黃澗)사람인 매한손(梅漢孫)이 있다.
51. 신창 맹씨新昌孟氏)
시조 맹가(孟軻)는 유명한 아성(亞聖) 맹자(孟子)이다. 그의 50세손 맹우현(孟尤鉉)이 고려 원종 때 국자감(國子監)을 지냈으며, 그의 셋째 아들 맹리(孟理)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뒤 그의 아들 의(依)가 조적(曺頔)의 난(亂)으로 공을 세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져 본관을 신창(新昌)으로 삼았다.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맹자(孟子)를 시조로 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출세한 후손 중 맹리(孟理)를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있고 있다.
52. 서촉ㆍ연안 명씨(西蜀ㆍ延安明氏)
시조 명옥진(明玉珍). 중국 수주(隨州) 사람으로 원(元) 순제 23년(고려 공민왕 12년) 성도(成都)에서 대하(大夏)를 세워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들 명승(明昇)이 사립(嗣立), 왕통을 이었으나 주원장(朱元璋)의 신흥 명나라 군세에 밀려 나라가 망하고 공민왕 21년 어머니와 함께 우리나라에 망명하였다. 그 뒤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태조가 그를 화촉군(華蜀君)에 봉했다. 후손들은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서촉(西蜀)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서촉 명씨(西蜀明氏)와 동조동근(同祖同根)인 연안 명씨(延安明氏)는 연안(延安)에 세거하며 번행(蕃行)하게 된데서 연안을 관향으로 하는 후손도 있게 되었다.
53. 모씨(毛氏)
시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라고 한다. 모씨(毛氏)는 중국 서하(西河ㆍ지금의 산서성 하동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아들을 모(毛)에 봉하여 모(毛)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헌(文獻)에 나타는 모씨(毛氏)의 본관(本貫)으로는 광주(廣州ㆍ중국 산동성)를 비롯하여 서산(瑞山)ㆍ김해(金海)ㆍ공산(公山ㆍ공주의 별호)이 전한다.
54. 함평 모씨(咸平牟氏)
모씨(牟氏)는 본래 중국 평양(平陽ㆍ지금의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며, 고대(古代) 축융(祝融)의 후예(後裔)가 고을 이름을 성(性)으로 삼은 것이 시원(始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시조는 모경(牟慶). '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의하면 모경(牟慶)은 북송(北宋)의 휘종조(徽宗朝ㆍ 북송의 8대 왕, 재위기간 1101~1125)에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호북경서(湖北京西) 선무사(宣無使)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송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흠종(欽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랐다.
고려 인종 4년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이 일어나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평란(平亂)의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그 뒤 다시 우리나라에 와 평장사(平章事)의 직첩을 받고 모평군(牟平君ㆍ모평은 咸平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진주 모씨(晋州牟氏)도 함평본(咸平本)과 동원(同源)이다.
55. 사천 목씨(泗川睦氏)
시조는 목효기(睦孝基). 고려 고종때 낭장동정(郎將同正)을 지냈다. 고구려 영류왕 24년, 당(唐)나라에서 파견되어 건너온 8학사(八學士) 중 한분인 목종(睦種)이 사천 목씨(泗川睦氏)의 선시조(先始祖)라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뒤 경남 사천(泗川)에 살아, 그곳을 관향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형제 사이의 우애가 남달라 성을 목씨(睦氏)라고 했다고 전한다.
56.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씨(閔氏)는 중국 농서현(농西縣ㆍ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다. 시조(始祖)는 민칭도(閔稱道). 고려조에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 민씨(閔氏)는 본래 공자(孔子)의 제자 10철(十哲)의 한 사람인 민손(閔損ㆍ자는 자건<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가 사신으로 왔다가 여흥(驪興ㆍ지금의 驪州)에 정착하였다. 민칭도(閔稱道)의 선계(先系)와 대수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8세손 민지(閔漬)가 고려 원종조에 문과에 오르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여흥(驪興)이 관향이 된 게 아닌가 여기고 있다.
57. 거제 반씨(巨濟潘氏)
시조는 반부(潘阜). 남송(南宋)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뒤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연경(燕京)이 점령당하자 몽고군에 잡혀갔다. 고려 원종 7년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이 원종 손위(遜位)로 입몽(入蒙)했을 때 세자(충렬왕)의 부탁으로 그를 데려왔고 이름도 부(阜)로 고쳤다. 거제(巨濟)ㆍ결성(結成)ㆍ광주(光州)ㆍ남평(南平) 등으로 분적 되었으나 단일본이다.
58. 반씨(班氏)
반씨(班氏)는 중국 부풍(扶風ㆍ섬서성 관중도 장안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되었다. 반(班)씨는 중국 고대 전욱(顓頊)의 후예, 또는 초(楚)나라 사람 투반(鬪班)의 후손으로,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나 언제 우리나라에 왔는지 알 수 없다. 본관은 개성(開城), 고성(固城), 광주(光州), 평해(平海)로 전해오고 있다.
59. 온양 방씨(溫陽方氏)
시조는 방지(方智). 중국 하남성(河南省) 출신인데 신라 문무왕 9년 중국한림학사(中國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문화사절로 와 설총(薛聰)과 더불어 예의를 강론하고 선교와 교육으로 ‘동방문교(東方文敎)의 종(宗)’이라 일컬어졌다. 후에 방운(方雲)이 고려 태조조에 좌복야(左僕射)에 오르고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져 온양 방씨(溫陽方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60. 남양 방씨(南陽房氏)
시조는 방계홍(房季弘). 고려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중국 당나라 문소공(文昭公) 방현령(房玄齡)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 보장왕 주청(奏請)으로 우리나라에 온 당(唐)의 8학사 중 한 사람인 방준(房俊)의 9세손이다. 남양(南陽)은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하고 있다. 수원 방씨(水原房氏) 시조 방정유(房貞儒)는 남양 방씨(南陽房氏) 시조 방계홍(方季弘)의 손자라고 전하는 문헌도 있다.
방씨(房氏)는 당나라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이 634년(당태종 정관 8년, 고구려 영류왕 17년)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동래(東來)하여 남양(南陽)에 사적(賜籍)한 것이 시초가 된다.
61. 방씨(邦氏)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문도대현(鴈門道代縣) 출신으로 명나라 당왕(唐王) 때의 사람인 방포(邦苞)의 후손이 귀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근대 인물로는 우리나라 기독교사상 최초의 목사로, 기독교 초창기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방기창(邦基昌) 목사를 들 수 있다.
62. 개성 방씨(開城龐氏)
시조는 방두현(龐斗賢). 원래 원나라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를 지냈는데, 고려조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한 육시랑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하여 개성(開城)에 정착, 세거하였다.
63. 태원 방씨(太原龐氏)
시조는 방발(龐浡). 원래 중국 태원인(太原人)으로 지휘도총장(指揮都摠長)을 지냈는데,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 세거하였다고 한다. 연대는 미상.
64. 수원 백씨(水原白氏)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황제의 후손인 백을병(白乙丙)의 원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조에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사서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신라 선덕왕 1년에 망명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명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백씨는 모두 동원(同源)을 이룬다.
65. 금성 범씨(錦城范氏)
시조는 범승조(范承祖). 중국 랑야(瑯琊)사람으로 원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원의 계국공주(薊國公主)를 배종(陪從)하여 고려 충렬왕 때 왔다. ‘갑오보(甲午譜)’에 보면, 그는 우리나라에 올 때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 등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는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羅州)에 터를 잡아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66. 안주 범씨(安州凡氏)
시조는 범영부(凡永富). 선계는 중국 하남(河南)사람이며, 시조 범영부(凡永富)는 고려 우왕 때 문화안집사(文化安集使)를 지냈다고 한다. 관향은 안주(安州) 단본이다.
67. 황주ㆍ원주 변씨(黃州ㆍ原州邊氏)
도시조(都始祖)는 변려(邊呂). 송(宋)나라 롱서(瓏西) 사람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 때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 황주 변씨와 원주 변씨는 모두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주 변씨(黃州邊氏) : 시조인 변려(邊呂)가 황해도 취성(取城ㆍ지금의 황주)에 세거의 터를 잡았고 상장군(上將軍)에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되고 있다.
*원주 변씨(原州邊氏) : 시조 변려(邊呂)의 후손 중 변순(邊順)이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로천호후(審陽路千戶侯) 벼슬을 지냈는데, 그 손자가 원주 변씨 시조인 변안렬(邊安烈)이다. 그는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배행(陪行)해 왔으며, 화려한 관직을 거쳐 예부상서(刑部尙書)가되었다.
68. 장연 변씨(長淵邊氏)
시조는 변경(邊鏡).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문하습비후(門下習秘侯)를 지냈다는 설, 신라 때 아찬(阿飡)을 지냈다는 설,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는 설이 있다. 그의 후손 변유령(邊有寧)이 고려 인종 때 연성부원군(淵城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삼았다. 연성(淵城)은 장연(長淵)의 옛 이름이다.
69. 초계 변씨((草溪卞氏), 밀양 변씨(密陽卞氏)
시조는 변정실(卞庭實). 고려 성종조에 등과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다. 팔계(八溪)는 초계(草溪)의 옛 이름인데 초계(草溪)는 경남 합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선계(先系)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변원(卞源)이다. 그는 당제(唐帝)의 명을 받아 '효경(孝經)'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 사신으로 왔다. 변정실(卞庭實)의 4세손이 밀양(密陽)으로 이거(移居)하여 일부가 그 곳을 관향(貫鄕)으로 쓰고 있다.
70. 면천 복씨(沔川卜氏)
시조는 복지겸(卜智謙).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됐다. 그의 선조는 중국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오계(五季)의 난(亂)을 피해 배를 타고 건너와 당진(唐津)의 면천(沔川)에 도착하여 서해에 들끓던 해적(海賊)을 소탕, 민생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71. 롱서 비씨(隴西丕氏)
비씨의 본관은 ‘롱서(隴西)’ 단본이다. 롱서(隴西)는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지명이다. 비씨(丕氏)는 희성(稀姓)으로 약 4백년전 귀화한 성씨라고 한다.
72. 빈씨(賓氏ㆍ壽城, 達成, 大邱, 靈光)
빈(賓)씨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노(魯)나라의 빈모가(賓牟賈)가 공자를 섬겼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수성(壽城), 달성(達成), 대구(大邱), 영광(靈光)은 동일본이다. 달성 빈씨(達成 賓氏)의 시조는 빈우광(賓于光ㆍ宇光)으로 빈모가(賓牟賈)의 후손이다. 송(宋)나라 말엽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송(宋)이 망하자 서적(書籍) 1만 7천권을 가지고 고려로 망명, 학풍(學風)을 진작시켰다 한다.
73. 경주 빙씨(慶州冰氏)
시조 방여경(冰如鏡). 명(明나라) 때 예부시랑(禮部侍郞), 내각한림(內閣翰林)을 역임했다. 조선조 세조 때 사신으로 동래하여 정착, 세거(世居)하였다. 세조는 그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고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하였다. 그 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경주(慶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74. 청주 사씨(靑州史氏)
시조는 사요(史繇).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 출신이며 명(明)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 후 명옥진(明玉珍)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받아, 공민왕 21년 망명해 와 임천(林泉)에 숨어 살다가, 누명이 벗겨져 명(明)의 홍무제(洪武帝)의 초서로 지금의 파주에 세거(世居)터를 마련하고 그의 출신지명을 따라 청주(靑州)로 관향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75. 사씨(謝氏)
사씨(謝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우리나라에는 청(淸)나라 말기에 귀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山) 2본으로 전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다.
76. 효령 사공씨(孝令司空氏)
시조 사공도(司空圖). 당(唐)의 희종(僖宗) 때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황소(黃巢)의 난을 만나 일가족을 대동하고 동료 7학사와 함께 신라 효공왕 1년(897년)에 동래해 왔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출신으로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과도 교우가 깊었다. 고려 충숙왕 때 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진 사공중상(司空仲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효령(孝令)은 경북 군위(軍威)에 있는 지명이다.
77. 남양 서씨(南陽徐氏), 당성 서씨(唐城徐氏)
시조는 서간(徐趕).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신라 문무왕 때 8학사의 한분으로 와 당성(唐城ㆍ남양의 옛 이름)에 정착, 신라의 태사(太師)가 되어 남양군에 봉해졌다.
당성 서씨(唐城徐氏)는 남양 서씨(南陽徐氏)의 시조 서간(徐趕)의 13세손 서득부(徐得富)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의 후손 가운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같은 인물이 배출되면서 독자적으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78. 이천 서씨(利川徐氏)
시조는 서신일(徐神逸), '이천서씨세보(利川徐氏世譜)'에는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이천(利川)의 서하성(徐河城)에 와 살게 됨으로써 지명을 따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달성 서씨(達成ㆍ大邱徐氏), 봉성 서씨(峯城徐氏), 장성 서씨(長城徐氏)도 이천 서씨(利川徐氏)와 맥을 같이 하며 다같이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
79. 절강 서씨(浙江徐氏)
시조 서해룡(徐海龍)은 중국 절강성(浙江城) 사람이다. 후손 서학(徐鶴)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동래하여 공을 세우고 성주(星州)에 정착하여 살았다.
80. 서씨(西氏)
1930년대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이다. 중국 청(淸)나라 덕종 때 서랍포(西拉布)와 몽고인 서림(西林)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귀화한 성씨로 보인다.
81. 안음 서문씨(安陰西門氏)
시조는 서문기(西門記). 중국 하남성(河南省) 사람으로 중랑장(中郞將)에 이정(理政)을 겸하였다. 그가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시신(侍臣)으로 공민왕비인 대장공주(大長公主)를 호종(扈從)해 와 공민왕으로부터 안음군(安陰君)에 봉해졌다. 안음은 현재 경남 함양(咸陽)의 안의면(安義面)이다.
82. 조주 석씨(潮洲石氏)
시조는 석성(石星). 명(明)나라의 호부(戶部), 공부(工部),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명나라가 청(淸)에 망하게 되자 그의 차남 석재금(石在錦)이 숙부인 참정공(參政公) 석규(石奎)와 그의 손자와 함께 망명, 가야산 아래 성주(星州)에 정착, 관향을 성주(星州)라고 하고 혹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 조주 석씨(潮州石氏)라 하였다.
83. 해주 석씨(海州石氏)
시조는 석성(石星).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구원병을 보내 우리나라를 도운 것으로부터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장남 석담(石潭)이 요동(遼東)을 거쳐 해주에 표착하였고, 조정에서는 그를 수양군(首陽君)에 봉하여 해주를 사관(賜貫)했다.
84. 충주 석씨(忠州石氏), 홍주 석씨(洪州石氏)
시조는 석린(石隣). 중국에서 왔으며 고려 의종 때의 경인란(庚寅亂)에 서경낭장(西京郞將)으로 발탁되었고, 명종 6년에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헌하여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기초를 세웠다. 홍주 석씨(洪州石氏)는 충주 석씨(忠州石氏)에서 분관되었다.
85. 보성 선씨(寶城宣氏)
시조는 선윤지(宣允祉). 명나라 명전시책(明殿試策)에 장원하고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로 있다가 고려 우왕 8년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로 제수했다.
86.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
시조는 기자(箕子). 비조(鼻祖)는 선우정(鮮于靖)이다. 기자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그 맏아들 송(松)이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우인 중(仲)을 우산국(于山國)에 봉하여 조선의 선(鮮)자와 우산국의 우(于)자를 따서 선우(鮮于)씨로 바꾸었다. 기자가 중국 은(殷)나라 성탕(成湯)의 후손이라는 데서 그 출신지 태원(太原)을 관향으로 삼았다. 위만(衛滿)의 난(亂)과 온조(溫祚)의 변에 선우씨가 화를 입을까 변성(變姓)하여 씨족이 한미(寒微)해졌던 바, 고려 문종조에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선우정(鮮于靖)이 나오므로 중흥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87. 경주 설씨(慶州偰氏)
시조는 설손(偰遜). 원(元)나라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 7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망명 귀화하여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다. 선조는 위그르 사람으로 설련하(偰輦河)에 세거(世居)하면서 설씨(偰氏)로 창씨했고, 태전(太傳) 설극직(偰克直)이 그의 8대조가 된다. 귀화 후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88. 경주 엽씨(慶州葉氏)
시조는 엽공제(葉公濟). 송(宋)나라 사람으로 송의 고종조에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랐다. 송(宋)과 몽고(蒙古)간의 화의(和議)에 반대해 7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담양(潭陽)에 정착하였다.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하다가 경주(慶州)로 이적 하였다.
89. 창녕 성씨(昌寧成氏)
시조는 성인보(成仁輔). 고려조에 중윤 호장(中尹戶長)을 지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민을 다스리는 호족장(豪族長)을 뜻한다. 성(成)씨는 본래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숙무(叔武)의 후예라고 한다. 당나라 학사 성경(成鏡)이 우리나라에 와, 그 후손이 번창했는데 고려 때 성숙창(成淑昌)이 호장부정(戶長副正)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성인보(成仁輔)라고 한다.
90. 평산 소씨(平山邵氏)
시조는 소옹(邵雍). 소씨(邵氏)는 소자(召字)가 변하여 이루어진 성이라 한다. 소옹(邵雍)은 주(周)나라 소공(召公)의 원손(遠孫)으로 영천단(潁川團) 연추관(鍊推官)을 지내고 신안백(新安伯)에 봉해졌다. 세계(世系)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평산(平山)에 살면서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있다.
91. 송씨(宋氏)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에 보면 우리나라 송씨(宋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중국 당(唐)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이라 한다. 언제 귀화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 후 7세 송순태(宋舜泰)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여산 송씨(礪山宋氏), 은률 송씨(恩律宋氏),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여산 송씨(礪山宋氏) : 시조 송유익(宋惟翊). 나라에 공훈이 많아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여산 송씨에서 신평 송씨(新平宋氏), 양주 송씨(楊州 宋氏)가 파생되었다.
*은률 송씨(恩律宋氏) : 시조 송천익(宋天翊). 그 뒤 세계를 실전하여 그의 후손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하고 있다. 송대원은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률균(恩律君)에 봉해졌다.
*서산 송씨(瑞山宋氏) : 시조 송문익(宋文翊). 그뒤 세계를 실전하여 조선조에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낸 송이석(宋而碩)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 외에 김해 송씨(金海宋氏)와 용성 송씨(龍城宋氏)를 비롯한 대부분의 송씨가 도시조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92. 남양 송씨(南陽宋氏)
시조는 송규(宋圭). 당나라 말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간신의 참소로 7학사와 함께 신라에 와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93. 순씨(舜氏)
순씨(舜氏)는 1930년 국세조사대 처음 나타난 성씨로 중국 하동(河東)에서 계출(系出)되었다. 본관은 임천(林川), 파주(坡州)가 있다.
94. 연일 승씨(延日承氏), 광산 승씨(光山承氏)
시조는 승개(承愷). 고려 정종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우리나라 승씨(承氏)의 조상은 중국 동한(東漢) 명제 때의 랑야(琅琊)사람인 승궁(承宮)으로 위대부(衛大夫) 성숙승(成叔承)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건초 1년, 왕망(王莽)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와 경북 연일(延日)에 터를 잡았다. 광산 승씨(光山承氏)도 승개(承愷)의 후손이다.
광산 승씨(光山承氏)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광주(光州)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靖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승개(承愷)로 전한다.
95. 남원 승씨(南原昇氏), 밀양 승씨(密陽昇氏)
시조는 승신(昇信).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하(夏)나라를 세워 롱서왕(隴西王)이 된 명옥진(明玉珍)의 후손이다. 2대 왕 명승(明昇)은 명(明)나라의 전우덕(傳友德) 장군에 패하여 공민왕 21년에 망명해 왔고, 조선조의 태종은 그를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했다고 한다. 승신(昇信)은 그의 네째 아들로 본래의 성(姓)을 버리고 아버지 이름자인 승(昇)으로 개성(改姓)했다.
96. 절강 시씨(浙江施氏)
시조는 시문용(施文用). 명(明)나라 무장으로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낸 시윤제(施允濟)의 아들이다. 그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합천(陜川)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후 돌아가지 않고 성주(星州)에 정착하였다.
97. 능향(태인) 시씨(綾鄕ㆍ泰仁柴氏)
시조는 시등과(柴登科).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독진장(督陣將)으로 왔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유격장(遊擊將)으로 와서 싸움에 이기고 돌아갔다. 그뒤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게 망하자 그의 아들 시식(柴植)이 명(明)의 유신(遺臣)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와, 전라도 태인(泰仁)에 눌러 살게 되었다. 능향(綾鄕)은 신라 때 태인의 관할 지역이다.
98. 거창 신씨(居昌愼氏)
시조는 신수(愼修). 중국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신종(神宗) 때 진사를 지냈다. 고려 문종 때 우리나라에 사신으로와 문종으로부터 후대를 받았고 숙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중국의 신(愼)씨는 본래 고대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초혜왕(楚惠王)의 아들 연(連)이 신현愼縣)이란 곳에 숨어 살면서 성(姓)을 신(愼)으로 고쳤다고 한다.
99. 영산 신씨(靈山辛氏), 영월 신씨(寧越辛氏)
시조는 신경(辛鏡).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올라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롱산(隴山)의 영주(寧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 한다. 그러나 그 뒤 계서가 분명치 않아 고려조의 신경(辛鏡)을 시조로 삼아 기세(起世)하고 있다.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 편에는 영주(寧州)가 중국에 없다며 귀화 성씨가 아니라고 변증하였다.
100. 풍산 심씨(豊山沈氏)
시조는 심만승(沈滿升). 중국 오흥(吳興ㆍ중국 절강성 북부, 태호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도시) 사람으로 고려 예종 5년 호종단(胡宗且), 유재(劉載), 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와 풍산현에 정착하였다. 그는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청관직(淸宦職)에 발탁되었고 이어 상서봉어(尙書奉御), 태자첨사부첨사(太子詹事府詹事)에 올랐다.
101. 죽산 안씨(竹山安氏<舊>)
시조 안방준(安邦俊). 그의 아버지 이원(李瑗)은 원래 당(唐)나라 종실(宗室) 사람으로 신라 애장왕 8년에 건너 와 개성에 살았고, 그의 아들 3형제는 이지춘(李枝春),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인데, 경문왕 때 왜구의 노략질을 토평한 공로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하여 안씨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장남 이지춘은 안방준으로 사명 받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102. 광주 안씨(廣州安氏)
시조 안방걸(安邦傑). 죽산 안씨(竹山安氏<舊>)의 시조 안방준의 동생으로 원명은 이엽춘(李葉春)이었다. 고려 태조조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17세손 안원형(安元衡)은 죽산 안씨(竹山安氏<新>)의 시조가 되었다.
103. 탐진 안씨(耽津安氏)
시조는 안원린(安元璘). 고려 충혜왕 2년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府使)에 이르렀고,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다. '병오보(丙午譜)' 서문에 보면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에서 계출되었다고 한다. 안원린은 중국 롱서(朧西) 사람으로 신라(新羅)에 와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란 칭호를 받은 이완(李椀)의 16세손이며, 그의 장남 안우(安祐)는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난을 평정했다.
104. 태원 안씨(太原安氏)
시조 안만세(安萬世). 원(元)나라 태원(太原) 사람으로 전서(典書)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陪從)하여 동래해 정착, 세거하였는데 공민왕 때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105. 애씨(艾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애씨(艾氏)는 중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애공(艾孔)의 후예이며, 우리나라의 애씨(艾氏)의 연원에 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없다.
106. 청주 양씨(淸州楊氏)
시조는 후한(後漢) 양진(楊震)의 43세손 양기(楊起)로, 원(元)나라 금자광록대부 중서성정승(金紫光祿大夫 中書省政丞)으로 있을 때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배종(陪從)하여 왔다. 그뒤 다시 원(元)나라에 들어가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여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고, 청주(淸州)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양씨(楊氏)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멀리 중국 홍농(弘農ㆍ지금의 河南省) 출신 당숙우(唐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까지 그 선계가 올라가지만 우리나라는 청주 양씨(淸州 楊氏)를 비롯, 밀양(密陽), 남원(南原), 중화(中和), 안악(安岳) 등을 관향으로 하는 양시(陽氏)가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107. 통주 양씨(通州楊氏)
시조 양복길(楊福吉). 중국 통주(通州) 출신으로 명(明)나라 9의사(義士)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동래하여 함께 북벌(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자 귀화, 정착하게 되었다.
108. 양씨(襄氏)
양씨(襄氏)는 본래 중국 주(周)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양중(襄仲)의 후손으로 익호(謚號)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 양씨(襄氏)와의 관계는 명확지 않다. 1960년 국세조사 조사에는 238명이 파악되었다.
109. 경흥 어씨(慶興魚氏)
명(明)나라 상서시랑(尙書侍郞) 어석규(魚石奎)의 손자 어계복(魚繼福)이 함경도 경흥에 정착, 어씨(魚氏)로 사성(賜姓)받았다고 전하는 문헌이 있다고 한다.
110. 함종 어씨(咸從魚氏)
시조는 어화인(魚化仁)으로 고려 명종 때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냈다. ‘계축보(癸丑譜)’에 보면, 함종 어씨(咸終魚氏)는 중국 풍익현(馮翊縣) 사람인데 남송(南宋) 영종(고려 명종 1년) 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의 강릉(江陵)에 왔다가 뒤에 평안도 함종현(咸從縣)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하였다.
111. 영월 엄씨(寧越嚴氏)
시조는 엄임의(嚴林義). 고려조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고 나성군(奈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중국 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여러나라에 전파할 때 엄임의(嚴林義)를 정사(正使)로, 영월 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辛侍郞)을 부사(副使)로 파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엄임의(嚴林義)는 그 뒤 영월 땅 행정(杏亭)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가 되었다. 영월 엄씨에서 분적한 상주 엄씨(尙州嚴氏)도 있다.
112. 의령 여씨(宜寧余氏)
시조 여선재(余善才)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있으면서 천자(天子)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미움을 사, 우리나라에 건너와 고려 조정에서 의춘군(宜春君)으로 봉해졌다. 의춘(宜春)은 의령(宜寧)의 옛 이름으로 우리나라 여씨(余氏)는 모두 의령(宜寧) 단일본이다.
113. 여씨(呂氏)
시조는 여어해(呂御海). 본래 중국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황소(黃巢)의 난을 피하여 신라 헌강왕 3년에 우리나라에 와 전서(典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성주 여씨(星州ㆍ星山呂氏)와 함양 여씨(咸陽呂氏)로 분관되어 왔다. 그러나 병화(兵火) 등으로 중간에 보판(譜版)을 잃어 세차(世次)를 확인 고증할 길이 없어, 고려 말에 삼중대광(三中大匡)을 지낸 여양유(呂良裕)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114. 곡산 연씨(谷山延氏)
시조는 연계령(延繼苓). 고려조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을 지냈다. 중시조는 연수창(延壽菖)으로 원래 중국 하남성(河南省) 홍농(弘農)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원종의 아들 충렬(忠烈)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원세조 홀필렬(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정략 결혼을 당했다. 1274년 충렬이 왕위 계승을 위해 고려에 환국할 때 원(元)의 문하대장군(門下大將軍)의 직에 있으면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호종(扈從), 고려로 건너온 인물이 연수창(延壽菖)이다.
115. 연씨(燕氏)
연씨는 본래 백제(百濟) 8대성의 하나로 ‘북사(北史)’,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는 여러 가지 연씨(燕氏)가 나타난다. 한편 연씨(燕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공자(孔子)의 제자 중 연급(燕伋)이 있었고, 한(漢)나라 소제(昭帝) 때는 창(倉)이 있었는데 연(燕)의 나라 이름을 성씨(姓氏)로 삼았다고 한다.
116. 파주 염씨(坡州廉氏)
시조는 염형명(廉邢明), 혹은 교명(郊明)이라고도 함. 후당(後唐) 때인 오계(五季)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온 뒤 지금의 파주인 봉성(峰城)에 터를 잡은 뒤 고려 태조의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분이다.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봉성(峰城), 곡성(曲城), 파주(坡州) 순으로 개관(改貫)되었다.
117. 의흥 예씨(義興芮氏)
시조는 예악전(芮樂全)으로 고려 인종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고, 문장과 덕망이 빼어난 석학(碩學)이었다. 그의 선대는 중국에서 왔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 단정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산서성(山西省)에 예성(芮省)이 있고, 경남 울주군(蔚州郡) 천전리(川前里)의 신라 화랑각석(花郞石刻)에서 예씨성(芮氏姓)의 금석명(金石銘)이 발견되기도 해서 부정할 수도 없다. 의흥(義興)은 경북 군위군(軍威郡)에 있는 지명이다.
118. 오씨(吳氏)
오씨는 신라 지증왕 1년 중국에서 건너와 한동안 함양(咸陽)에서 살다 귀국한 오첨(吳瞻)을 도시조(都始祖)로 하여 여러 파로 분적(分籍)하였다. 오첨(吳瞻)은 22년간 살다가 돌아가고 이 땅에 남은 오응(吳膺)의 후손이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오응(吳膺)의 12세손 오광우(吳光佑)가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현손인 오연룡(吳延龍)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오씨(吳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고려 고종 3년, 오첨(吳瞻)의 23세손 오수숙(吳守叔)이 오현보(吳賢輔)ㆍ오현좌(吳賢佐)ㆍ오현필(吳賢弼)과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각기 해주군(海州君)ㆍ동복군(同福君)ㆍ보성군(寶城郡)에 봉해졌다.
*해주 오씨(海州吳氏) : 시조 오현보(吳賢輔) - 함평 오씨(咸平吳氏), 나주 오씨(羅州吳氏), 낙안 오씨(樂安吳氏), 삼가 오씨(三嘉吳氏), 의성 오씨(義城吳氏), 평해 오씨(平海吳氏)가 파생됨.
*동복 오씨(同福吳氏) : 시조 오현좌(吳賢佐) - 군위 오씨(軍威吳氏)가 파생됨.
*보성 오씨(寶城吳氏) : 시조 오현필(吳賢弼) - 화순 오씨(和順吳氏), 흥양 오씨(興陽吳氏), 장흥 오씨(長興吳氏), 전주 오씨(全州吳氏), 함양 오씨(咸陽吳氏), 두원 오씨(荳原吳氏)가 파생됨.
119. 해주 오씨(海州吳氏)
시조는 오인유(吳仁裕).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해 해주(海州)에 터를 잡았고 성종조에 검교군기감(校軍器監)을 지냈다. 오씨 문중(吳氏門中)에는 이같이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있다. 오첨(吳瞻)과 오인유(吳仁裕) 간의 관계는 고증할 자료가 충분치 않다.
* 연일 오씨(延日吳氏) :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장남 오연경(吳延慶)을 시조로 하고 있음.
* 울산 오씨(蔚山吳氏) :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차남 오연지(吳延祉)를 시조로 하고 있음.
120. 의령 왕씨(宜寧玉氏)
시조는 옥진서(玉眞瑞)로 중국 당(唐)나라 사람이다. 고구려 영류왕 18년 교수 자격으로 건너온 8학사 중 한 분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조에서 벼슬하며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가르쳐, 그 공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고려 신종 때 창정(倉正)이란 벼슬을 했고, 문장이 뛰어났던 옥은종(玉恩宗)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관향을 의령(宜寧)으로 삼았다.
121. 봉성(금구) 온씨(鳳城ㆍ金溝溫氏)
‘봉성온씨족보(鳳城溫氏族譜)’에 보면 시조는 숙우(叔虞)라 했다. 중국 주(周)의 16대왕 성왕(成王)이 아우 숙우(叔虞)를 온국(溫國)에 봉함으로 성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계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나라 봉성 온씨의 시조는 평강공주(平康公主)와 결혼한 온달(溫達) 장군이며, 고려 공민왕 때 우부시랑(右部侍郞)을 지낸 온신(溫信)을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봉성(鳳城)은 전북 김제군 금구(金溝)이다.
122. 개성 왕씨(開城王氏)
시조는 국조(國祖)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의 증조부가 된다.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인데 족보에는 동양군(東陽君) 왕원(王垣)을 1세조로 기세하고 있다. 선계에 관해서는 멀리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동래(東來)하였고, 그 뒤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사사(師士)가 되어 왕씨(王氏)로 사성(賜姓)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23. 제남 왕씨(濟南王氏)
시조는 왕이문(王以文). 중국의 제남부(濟南府) 장구현(章丘縣)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봉강(鳳崗), 자는 기양(岐陽)인데 효종이 이문(以文)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올 때 배종(陪從)하여 입국했다. 제남부(濟南府) 장구현(章丘縣) 상원장(常遠庄)에서 나왔기에 후손들은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124. 해주 왕씨(海州王氏)
시조는 왕유(王儒). 중국 산동성(山東省) 사람으로 고려조에 귀화하여 태조(太祖) 때 사성(賜姓)되었고, 대상(大相)을 지냈으며 장순공(章順公)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나 그 수는 극소수이다.
125. 요씨(姚氏)
요씨(姚氏)의 본관은 휘주(徽州), 수원(水原) 등이 있는데, 병란을 피하여 귀화한 명나라 유신(遺臣)의 후예라고 한다. 요씨(姚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한(漢)나라 때 현도태수(玄菟太守)를 지낸 요광(姚光), 당(唐)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요박(姚泊) 등이 나타난다.
126. 목천 우씨(木川于氏)
시조는 우방령(于邦寧)으로 고려 인종, 의종 때 상서좌복야(上書左僕射)를 지냈다고 한다. 우씨(于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 우(邘)땅에 정해지자 우(于)자만을 써서 성을 삼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이다.
127. 원주 원씨(原州元氏)
시조 원경(元鏡)의 처음 이름은 경(慶)이다. 중국 원성(原城) 사람으로, 당태종(唐太宗) 때 고구려가 ‘도예지사(道藝之士)’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자 당(唐)나라에서 원경(元鏡) 등 8학사를 파견하여 왔다고 한다. 그는 당(唐)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의 벼슬을 지내다 고구려에 와, 두 나라의 국교를 회복시켜 보장왕은 그에게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128. 비안 원씨(比安袁氏)
비안은 경북 의성군에 위치하고 있다. 원씨(袁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진(陳)나라 공자 원도도(轅塗濤)의 후손으로, 뒤에 ‘원(轅’)자에서 ‘차(車)’를 떼 버리고 ‘원(袁)’으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129. 장흥 위씨(長興魏氏)
시조 위경(魏鏡). 신라조에 아손상서시중(阿飡尙書侍中)에 올랐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다. 그는 당태종(唐太宗)이 신라 선덕여왕의 도예지사(道藝之士)의 초청에 따라 보내준 8학사(魏. 房. 洪. 睦. 奇. 殷. 吉. 奉) 중 한 사람으로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130. 강화 위씨(江華韋氏)
시조는 위수여(韋壽餘)로 고려 건국 초인 광종 11년에 중국에서 건너와 사선관(司膳官)이 되고 관복(官服)을 제정, 과거(科擧) 도입(導入)에 큰 공헌을 했다. 위씨(韋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태고시대 황제(黃帝)의 손자 전욱(顓頊)의 후손인 팽조(彭祖)의 후예로 당(唐)나라 때 크게 번성했던 씨족이었다.
131. 거창·강릉·백천(居昌·江陵·白川劉氏)
시조는 유전(劉荃). 그는 중국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뒤 고려 문종 36년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 유전(劉荃)은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41세손으로 왕안석(王安石)이 제정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 부당하다고 극간(極諫)하다 참소를 받아 지금의 영일군에 와 살았다고 한다.
132. 무송 유씨(茂松庾氏), 평산 유씨(平山庾氏)
시조는 유금필(庾黔弼).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三中大匡統合三韓翊贊功臣)에 책록되고 태사에 추증되었다. 중국 한(漢)말 진(晋)나라 초기에 유순유(庾荀悠)가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 눌러 살게 됨으로써 유씨(庾氏)의 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계대가 분명치 않아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유금필(庾黔弼)을 실제의 시조로 삼게 된 것이다.
133. 옥천 육씨(沃川陸氏)
시조는 목보(睦普)로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사람이다. 후당(後唐) 명조 때 8학사의 수반(首班)으로 우리나라에와 신라 경순왕의 사위가 되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뒤 480여년간 소목(昭穆)을 알수 없게 되어 후손 목인단(睦仁端)을 기세조(起世祖)로 세계를 잇고 있다.
134. 행주 은씨(幸州殷氏)
시조는 은홍열(殷洪悅).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신라 문성왕 12년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벼슬은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경기도 고양군 행주에 정착했음으로 그를 시조로, 본관을 행주(幸州)로 하였다.
135. 죽산 음씨(竹山陰氏)
시조는 음준, 원나라 사람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를 배종하여 왔다. 고려 왕조에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136. 고성(철성) 이씨((固城ㆍ鐵城李氏)
시조는 이황(李璜).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눌러 살았다. 이황(李璜)은 그의 24세손으로 고려 덕종 때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거란군(契丹軍)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철성군(鐵嶺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철성(鐵城)은 고성(固城)의 옛 이름이어서 철성(鐵城)을 관향으로 하는 이씨도 고성 이씨(固城李氏)와 같은 뿌리이다.
137. 상주(상산) 이씨(尙州ㆍ商山李氏)
시조는 이민도(李敏道). 중국 롱서(朧西)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원(元)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 조선 개국 때 공을 세웠다. 상산군(商山君ㆍ상산은 상주의 옛 이름)으로 봉해졌고, 조선인으로 동화케 하기 위하여 이태조(李太祖)의 명령으로 본관을 롱서(朧西)에서 상주(尙州)로 하였다.
138. 양성 이씨(陽城李氏)
시조 이수광(李秀匡).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中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그는 출중한 인품과 강유겸전(剛柔兼全)으로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에 비견되었고,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契丹)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다고 한다.
139. 연안 이씨(延安李氏)
시조는 이무(李茂). 중국 당(唐)나라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長)으로 우리나라에 와 백제를 평정한 후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40. 롱서 이씨(隴西李氏)
시조는 이장경(李長庚).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중흥조이다. 이장경의 증손 이영(李英)이 명(明)나라에 귀화하여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5대손 이여송(李如松)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명나라 원군 총지휘관으로 우리나라에 와 평양성을 탈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공을 세웠다. 롱서 이씨(隴西李氏)는 성주 이씨와 같은 뿌리로서 ‘성주이씨대동보’(甲寅譜) 편찬을 계기로 두 종파가 동보하기에 이르렀다.
141. 단양 이씨(丹陽李氏)
시조는 이배환(李盃煥). 고려조 삼한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韓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다. 단양 이씨(丹陽李氏) 태천파(泰川派) ‘경인보(庚寅譜)’ 서문에는 “이씨는 중국 롱서(隴西)에서 크게 번성한 대성(大姓)으로서 선계를 중국에 두고 있다”고 하였다. 이씨가 우리나라에 온 뒤 이배환(李盃煥)은 단산(丹山ㆍ丹陽의 옛 이름)에서 나와 왕건(王建)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142. 안악 이씨(安岳李氏)
시조는 이진(李震). 중국 한(漢)나라 롱서(隴西) 사람으로 한(漢)무제 원봉 3년 동정군(東征軍)을 이끌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ㆍ?∼BC 108)을 정복,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는데 공을 세웠다. 한무제로부터 낙랑태수(樂浪太守)로 임명된 뒤 왕검성(壬險城ㆍ平壤)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안악 이씨(安岳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143. 원주 이씨(原州李氏<舊>)
시조 이춘계(李椿桂). 고려조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고, 인조와 의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중국의 한(漢)나라 고조 때 사람으로 진시황(秦始皇)의 가정(苛政)을 피해 우리나라 진한(辰韓)에 피난왔다. 오랜 옛 일이어서 세계가 불확실하나 신라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진민(李眞民)이 원조(遠祖)라고 하며, 이춘계(李椿桂)는 그의 28세손이다.
144. 정선 이씨(旌善李氏)
시조는 이양혼(李陽焜).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금(金)나라의 전쟁을 피해 우리나라에 와 경주에 정착함으로써,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관향을 정선으로 삼게 된 것은 그의 6세손인 이의민(李義旼)과 아들 이성순(李性純)이 고려 명종 26년 최충헌(崔忠獻)에 피화(被禍), 손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하여 세거한데 연유한다.
145. 청해 이씨(靑海李氏)
시조는 이지란(李之蘭). 중국 남송(南宋)의 충신인 악비(岳飛)의 다섯째 아들 정(霆)의 6세손으로 성은 동(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이다. 그의 아버지 아원(雅遠)은 원(元)나라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으며, 아버지에 이어 천호(千戶)가 되었다가 고려 공민왕 20년 귀화하면서 이지란(李之蘭)으로 개명하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아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원향(原鄕)인 중국 청해성(靑海省)을 연유로 하여 본관을 삼았다.
146. 태안 이씨(泰安李氏)
시조는 이기(李奇). 중국 당나라 때의 이승남(李昇南)의 후손으로 고려 광종 때 난(亂)을 피해 우리나라 태안에 들어와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서 태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7세손인 이천(李蕆)이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안(泰安)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147. 태원 이씨(太原李氏)
시조는 이귀지(李貴芝). 고려 충렬왕 때 태원(太原)에서 난을 피해 와서 사재판서(司宰判書),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고 한다. 손자 이방무(李芳茂)는 낭장(郞將)을 지냈는데, 조선조 개국원종공신(開國願從功臣)으로 벼슬이 사정(司正)에 이르렀다. 뒤에 북청(北靑)으로 이거, 정착하면서 본향인 중국의 태원(太原)을 본관으로 삼았다.
148. 아산 이씨(平山李氏)
시조는 이부명(李敷明). 평산 이씨(平山李氏)의 원조(遠祖) 이부명(李敷明)은 중국 당(唐)나라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8세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산(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쳤고,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러나 그뒤의 세계를 실전, 그의 원손(遠孫)인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이자용(李子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선대는 중국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 말에 우리나라 평산(平山)에 들어와 백성들을 교화(敎化)한 분이라고 하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149. 화산 이씨(花山李氏)
시조는 이용상(李龍祥). 안남(安南ㆍ베트남) 국왕 이용한(李龍翰)의 아우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여 고려 고종 때 옹진(甕津)의 화산(花山)에 망명, 정착하였다. 이 사실을 고종이 알고 13년에 화산군(花山君)에 봉했다. 안남국(安南國) 시조인 교지군 왕(交趾郡王) 이공온(李公蘊)을 시조로 하면서 그의 7세손인 이용상(李龍祥)을 중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150. 이씨(異氏)
이씨(異氏)는 중국 당(唐)나라 덕종때 운남왕(雲南王) 이모심(李牟尋)이 선조라고 한다. 이씨의 본관은 동성(童城), 통진(通津), 남원(南原), 밀양(密陽), 청양(靑陽)이 있다.
151. 태원 이씨(太原伊氏)
이씨(伊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상(商)나라 탕왕(湯王) 때의 명상(明相) 이이(伊尹),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어사중승(御使中丞) 이가(伊嘉) 등이 문헌에 전해오나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 지는 알 수 없다. 본관은 태원(太原ㆍ忠州), 은천(銀川ㆍ 白川)이 있는데, 은천 이씨(銀川伊氏) 시조는 알 수 없고, 태원 이씨(太原伊氏)의 시조는 이란취(伊丹取)라는 이름만 전해온다.
152. 교동 인씨(喬桐印氏)
시조는 인서(印瑞). 신라 유리왕(279년) 때 사신으로 신라에 건너왔고, 왕이 아찬(阿湌)과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하였다. 관(貫)은 인서(印瑞)가 중국의 풍익 인씨(馮翊印氏)로 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인빈(印邠)이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이 되어 교수 인씨로 바꾸게 되었다. 교수(喬樹)는 교동(喬桐)의 옛 이름이으로 고려 인종 때부터 교동 인씨로 부르게 되었다.
153. 연안 인씨(延安印氏)
시조는 인후(忍侯). 고려조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올랐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그의 선계는 몽고 사람으로 본명은 홀자알(忽刺歹)이었다. 그는 고려 충렬왕비(忠烈王妃) 제국공주(齊國公主)를 배종(陪從)하여 우리나라에 온 뒤 귀화, 인후(印侯)로 사성명(賜姓名)되었다고 한다.
154. 임씨(林氏)
태원(太原)인 임온(林蘊)을 원조(原祖ㆍ得性祖)로, 중국 당나라 말엽 한림학사를 지내다 정치적인 화를 피해 신라에 온 8학사(林八及, 薛仁敬, 許董, 劉荃, 宋圭, 崔沍, 權之奇, 孔德狩) 중의 한분인 임팔급(林八及)을 원조(元祖ㆍ東渡祖)로 받들고 있다.
임씨는 우리나라 10대 성씨 중의 하나다. 이중 평택 임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이다. 평택(平澤)은 시조 임팔급(林八及)이 자리잡았던 고을 이름이다.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후대에 와서 선산(善山), 진천(鎭川), 예천(醴泉), 부안(扶安), 옥구(沃溝), 익산(益山), 울진(蔚津), 조양(兆陽), 안동(安東), 옥야(沃野), 전주(全州), 은진(恩律), 이안(利安), 임천(林川), 순창(淳昌), 장흥(長興), 보성(寶城) 등 25개 관향으로 분관되었다.
155. 장흥 임씨(長興任氏)
시조 임호(林灝). 중국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송(宋)의 철종시 이부상서(吏府尙書)를 지낸 뒤 당시 중국인들의 동국 진출이 빈번함에 따라 우리나라에 귀화, 정안현(定安縣ㆍ장흥)에 정착해 세거의 터를 마련하였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연대는 고려 정종 때이다. 그의 아들 임의(任懿)가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부시랑 평장사(文部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그를 1세조로 삼게 되었다.
156. 풍천 임씨(豊川任氏)
시조는 임온(任溫). 그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에서 고려로 건너와 6세손에 이르기까지 황해도 풍천에서 살아 풍천 임씨가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들 선대가 꼭 중국인은 아니라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157. 장씨(張氏)
우리나라 장씨(張氏)는 중국의 장백익(張伯翼)으로부터 관(貫)을 이어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5세 장정필(張貞弼)이 우리나라에 와 영남의 노전(蘆田), 곧 지금의 인동(仁同)에 살게 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장정필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웠다.
장정필(張貞弼)은 덕수(德水), 절강(浙江)을 제외한 결성(結城), 인동(仁同ㆍ玉山), 안동(安東), 순천(順天), 구례(求禮), 봉성(鳳城), 단양(丹陽), 목천(木川), 예산(禮山), 옥구(沃溝), 울진(蔚珍), 지례(知禮), 진안(鎭安), 진천(鎭川), 창녕(昌寧), 청송(靑松), 홍성(洪城), 하산(夏山), 흥양(興陽), 여흥(驪興), 부안(扶安) 등 여러 장씨의 도시조(都始祖)로 대접받는다.
158. 덕수 장씨(德水張氏)
시조는 장순룡(張舜龍). 본래는 회회국(回回國)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귀화했다. 회회국은 지금의 아라비아에서 신강(新疆) 위구르까지 이르는 회교지역(回敎地域)을 일컫던 명칭으로 그의 출신지역은 어딘지 분명치 않다. 그는 고려 원종 15년,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왔으며, 충렬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성명을 받고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에 봉해졌음으로 덕수(德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덕수는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지역이다.
159. 절강 장씨(浙江張氏)
시조는 장해빈張海濱). 중국 명(明)나라 절강성(浙江省) 오강현(鳥江縣) 사람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유격장군(遊擊將軍) 오유충(吳惟忠)의 휘하장사로 출진, 죽산(竹山)과 충주(忠州)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울산(蔚山)전투에서 부상,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했다. 후손들이 여러 대를 그곳에 세거해 오면서 시조의 출신지인 절강(浙江)을 관향으로 삼아 왔다. 절강 장씨(浙江張氏)는 원래 중국 한(漢)나라 승상(丞相) 유후(留候) 장량지(張良之)의 후예이다.
160. 아산 장씨(牙山蔣氏)
시조는 장서(蔣壻).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금자광록대부 신경위 대장군(金紫光祿大夫神慶衛大將軍)으로 있으면서 금(金)나라와 항쟁을 주장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 우리나라 아산(牙山)에 표착하였고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다. 그것은 고려 예종 때 일이다. 장(蔣)은 나라이름으로 지금의 여남현(汝南縣)이라고 하며, 아산(牙山) 단본이다.
161. 거창 장씨(居昌章氏)
시조는 장종행(章宗行). 고려 충렬왕조에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예문관 대제학겸 춘추관사(藝文舘大提學兼春秋館事)를 지냈다. 중국 장씨(章氏)는 남당(南唐) 때 건주자사(建州刺史)를 지낸 자조(仔釣)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장빈(章頻)은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 형부낭중(刑部郞中)을 했고 그 후손인 장감(章鑑)이 남송(南宋)의 도종(度宗) 때 우승상(右丞相)을 지내다 화를 피하여 고려에 와 음습(蔭襲)했으나, 소목(昭穆)이 분명치 않아 장종행(章宗行)으로 기일세(起一世)하였다. 장종행(章宗行)의 아들 장두민(章斗民)이 공민왕 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평토한 공으로 시중공(侍中公) 아림군(娥林君ㆍ아림은 현재의 居昌)에 봉해졌다.
162. 장씨(莊氏)
본래 중국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후예로 장자(莊子ㆍ莊周)는 전국시대의 대사상가(大思想家)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장씨(莊氏)는 장보(莊甫)로 그는 고려조 명종 때 무신으로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냈다. 본관으로는 금천(衿川ㆍ果川 지방), 장련(長連), 전주(全州) 등이 있다. 대부분 북한(北韓)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163. 광평 전씨(廣平田氏)
시조는 전호겸(田好謙). 본래 명(明)나라의 경적예(經籍隸) 향학생(鄕學生)으로, 명(明)이 청(淸)나라에 망하게 되자 인조 14년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전씨(田氏)의 선조는 중국 조(趙)나라 사람이다. 인조가 그를 가상히 여겨 훈련장(訓練將)에 예속시켰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궁을 호위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164. 남양 전씨(南陽田氏)
시조는 전주(田柱). 본래 성명은 왕강(王康)이었으나 조선조의 왕씨말살정책(王氏末殺政策)으로 태조 3년에 화를 당했다. 그의 손자가 두차례의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전흥(田興)이라 사명(賜名)되고 몰락당한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전흥(田興)은 그의 조부가 외직(外職)으로 나갔던 지명을 따서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하였다.
165. 담양 전씨(潭陽田氏)
시조는 전득시(田得時). 고려 때 현량(賢良)으로 천거(薦擧)되어 문과에 장원하고, 의종조 때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시조 전득시(田得時)의 선계는 상고할 수 없으나 중국 제(濟)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 ‘갑자보(甲子譜’)에는 제(濟)나라의 종실(宗室)의 후예라 하였다. 연안 전씨(延安田氏). 하음 전씨(河陰田氏ㆍ하음은 강화의 속현)는 모두 전득시(田得時)의 후손이다.
166. 문경(관산) 전씨(聞慶ㆍ冠山錢氏)
시조는 전유겸(錢惟謙). 원나라 사람으로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다. 그는 오월개국왕(吳越開國王)인 무숙왕(武肅王) 전략(錢략)의 후손이다. 1351년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를 배행, 최영 장군의 누이와 결혼하여 개경(開京)에 눌러살게 되었다. 우왕 14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듬해 최영 장군 등이 피살되자 관산(冠山ㆍ지금의 문경)에 유배되어 살기 시작하면서 문경 전씨(聞慶錢氏)의 기틀이 잡혔다.
167. 서산 정씨(瑞山鄭氏)
시조는 정인경(鄭仁卿). 고려 고종 41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오른 뒤 추성정책안사공신 벽상삼중대광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사(推誠政策安社功臣 壁上三重大匡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가 되고 서산군(瑞山軍)에 봉해져 화려한 족보를 이루었다.
서산 정씨(瑞山鄭氏)는 본래 중국 절강(浙江)에서 대대로 벼슬을 해온 오랜 씨족이다. 정인경(鄭仁卿)의 증조(曾祖) 정응충(鄭應冲)은 송(宋)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였고 조부 정의(鄭儀)는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를 지냈다.
168. 랑야 정씨(瑯琊鄭氏)
시조는 정선갑(鄭先甲). 명나라에서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부의 랑야(瑯琊)에서 출생하였다. 인조 22년 명청전쟁(明淸戰爭)에 창의(倡義) 기병(起兵)하였으나 포로가 되어 심양관(瀋陽舘)에 집류(執留)당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결과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길에 배종(陪從)하게 되어 입국, 정착하였다. 랑야 정씨(瑯琊鄭氏)의 원조(源祖)는 중국사람인 정문겸(鄭文謙)으로 정선갑(鄭先甲)의 증조가 된다.
169. 정씨(丁氏)
정씨(丁氏)의 시원은 중국 제(濟)나라 태공(太公)의 아들 급(伋)이 주실(周室)의 훈척(勳戚)으로 정(丁)땅에 봉함으로 비롯되었다. 급(伋)은 사악(四岳)의 후손이고, 사악(四岳)은 염제 신농씨(炎帝新農氏)의 후손이다. 우리나라 정씨(丁氏)는 신라 문성왕 15년인 853년 중국 당나라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던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이 우리나라 서해남부에 있는 압해도(押海島ㆍ전남 신안군 압해면)에 유배되어 와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정씨(丁氏)는 모두 한 시조 대양군(大陽君)으로부터 태어났으나, 지금은 영성(靈城)ㆍ나주(羅州)ㆍ선창원(先昌原)ㆍ후창원(後昌原)ㆍ의성(義城) 등 5개 파로 나누어지고 있다.
170. 하남 정씨(河南程氏)
시조는 정우(程羽). 중국 후진(後晋)의 진사(進士)로 송(宋) 태종(太宗) 때 태자소사(太子少師)를 지냈다. 우리나라 하남 정씨(河南程氏)는 그의 18세손 정사조(程思祖)로부터 계세되었다. 그는 원(元)나라 순종 때 위위교승(衛尉校丞)에 올랐고 고려 공민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공소(孔紹) 등 20여 명과 함께 배종하여 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어 우리나라에 하남 정씨(河南程氏)의 터를 닦았다.
171. 칠원(고성) 제씨(漆原ㆍ固城諸氏)
중시조는 제문유(諸文儒). 고려 충숙왕 7년, 상왕(上王)인 충선왕이 토번(吐蕃ㆍ티베트)으로 귀향갈 때 호종(扈從)했다. 상왕(上王)이 환국 뒤인 충숙왕 17년에 그 공으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이 되고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지금의 칠원(漆原)인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칠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제씨(諸氏)는 중국 한(漢)나라 제갈영(諸葛嬰) 장군이 시조(始祖)로서,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은 그의 6세손이다. 제갈량(諸葛亮)의 증손 제갈충(諸葛忠)은 한(漢)이 망하고 부형(父兄)이 순절하자 13세 나이로 동래(東來)하여 신라에 입국하였다. 고려 현종 때 제갈영(諸葛嬰)의 34세손으로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가 탄생하자, 형 제갈홍(諸葛泓)은 제씨(諸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아우 제갈형(諸葛瀅)은 갈씨(葛氏)로 하여 랑야군(瑯琊君)에 봉함으로써 성(姓)이 나누어졌다.
172.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
중시조는 제갈충(諸葛忠). 중국 위(魏)나라 사람으로 위(魏)의 지배를 싫어해 신라 미추왕 때 우리나라에 와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그의 선계(先系)는 전한(前漢) 말기에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지낸 제갈규(諸葛珪)를 시조로 삼고 있는데 그는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로서 제갈충(諸葛忠)은 그의 5세손이다. 중국의 본관인 남양(南陽)을 관향으로 쓰고 있다.
173. 김제 조씨(金堤趙氏)
시조는 조연벽(趙連壁). 고려 고종조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벽성군(壁城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벽성은 김제(金堤)의 옛이름이다. 김제 조씨(金堤趙氏)의 선계는 ①기자(箕子)가 데리고 온 12사람 중 하나인 조식(趙寔)이 원조(遠祖)라는 설, ②조식(趙寔)의 후손인 조세주(趙世冑)가 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오계(五季)의 난(亂)을 피해 동래하여 원조(遠祖)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174. 백천 조씨(白川趙氏)
시조는 조지린(趙之遴), 그는 송(宋)태조 조광윤(趙匡胤)의 큰아들 조덕소(趙德沼ㆍ魏王)의 세째 아들로 황제(皇帝) 등극에 얽힌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와 지금의 황해도 백천(白川)에 정착, 고려 현종 때 금자광록대부 좌복야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左僕射參知政事)에 오른 분이다.
175. 임천 조씨(林川趙氏)
시조는 조천혁(趙天赫). 고려 현종 때 거람군(契丹軍)을 격파, 그 공으로 가림백(嘉林伯ㆍ지금의 林川)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관향을 임천(林川)으로 하였다. 조천혁(趙天赫)은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우리나라에 피난, 부여(夫餘)의 임천(林川)에 정착하였다.
176. 직산 조씨(稷山趙氏)
‘갑자보(甲子譜)’에 의하면 “기자(箕子)의 종실(宗室) 한 분인 두원(斗元)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기 위해 조(趙)씨로 변성, 도망쳐 살아 남았는데 그 다섯 아들이 평양(平壤)ㆍ풍양(豊讓)ㆍ한양(漢陽)ㆍ백천(白川)ㆍ옥천(玉川) 등에 봉해짐으로서 각기 본관이 되었고, 시조인 조성(趙成)은 한양파에서 분파, 백제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고 한다. 조성(趙成)이 직산백(稷山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 관작(官爵)에 따라 직산(稷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177. 평양 조씨(平壤趙氏)
시조는 조춘(趙椿). 고려 예종과 의종 연간의 인물로 금자광록대부 의병상장군(金紫光祿大夫義兵上將軍)이 되어 남송(南宋)을 도와, 금(金)나라 정벌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평양 조씨 문중에서는 선계가 기자(箕子)와 함께 왔다는 설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 중국의 북송(北宋)이 금(金)나라에 망하자 조익(趙翼)ㆍ조경(趙慶)ㆍ조광(趙廣) 등 세 왕자가 고려에 망명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손이 번창함에 따라 백천(白川)ㆍ한양(漢陽)ㆍ양주(楊州)ㆍ평양(平壤)ㆍ임천(林川) 등 여러 조씨로 분관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 조씨 사이에는 관향이 다르지만 동조동원(同祖同源)이라 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오랜 관습을 갖고 있다.
178. 한양 조씨(漢陽趙氏)
시조는 조지수(趙之壽). 중국에서 건너 왔는데 그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조씨오천년사(趙氏五千年史)’에는 조지수(趙之壽)의 선대는 중국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로 송(宋)의 태조인 조광윤(趙匡胤)이 선조이며, 그 후손인 조익(趙翼)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명종, 신종, 희종, 강종 등 4조에 걸쳐 벼슬하여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에 이르렀고, 그 후손 가운데는 많은 명신현유(名臣賢儒)가 배출되었다.
179. 함안 조씨(咸安趙氏)
시조는 조정(趙鼎). 중국 후당(後唐)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두 아우 조부(趙釜)와 조당(趙鏜)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왔다.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기의(起義), 후에 고창성(古昌城ㆍ安東)에서 후백제 견훤군(甄萱軍)을 대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 대장군(開國壁上功臣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함안(咸安)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삼았다.
180. 횡성 조씨(橫城趙氏)
시조는 조익(趙翌). 고려조 광종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져 득관(得貫)하게 되었다. ‘임인보(壬寅譜)’ 횡성 조씨 근원편을 보면, “조씨의 근원은 중국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로 주(周)나라 때부터 크게 번성한 씨족이었다”고 한다. 주(周)의 목왕(穆王) 때 조국(趙國)의 군주(君主)가 되었는데, 혜왕 5년에 진(秦)의 소왕 2세인 안국군(安國軍)에 망하여 그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고려 정종 때 조첨趙瞻)이 우리나라에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광종 9년에 고려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에 조익(趙翌)이 장원급제,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오르고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181. 영암 종씨(靈岩鍾氏)
종씨(鍾氏)는 송나라 환공(桓公ㆍ皇帝)이 둘째 아들을 종성(鍾城)의 왕(王)으로 봉하고, 종씨(鍾氏)를 내림으로써 이루어진 성씨라고 한다. 그 후에 동수(銅修), 지란(芝蘭)이 조선에 들어왔다 했으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의 태조가 개국 후에 낭주(郞州ㆍ靈岩의 옛이름)를 영암(靈岩)으로 고쳐 종관수(鍾寬秀)를 영암백(靈岩伯)에 봉하였다. 본관을 하음(河陰). 강화(江華) 등으로 하는 종씨는 모두 영암 종씨(靈岩鍾氏)의 후손이다.
182. 청주 좌씨(淸州左氏)
시조는 좌형소(左亨蘇). 원(元)나라 천관시랑(千官侍郞)으로 고려 충렬왕 때 탐라(耽羅ㆍ제주)의 목마장(牧馬場) 감목관(監牧官)으로 와 그 곳에 정착,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본관을 청주(淸州)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83. 상주 주씨(尙州周氏)
시조는 주이(周頤).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신라 원성왕 2년 부사(副使)로 우리나라에 와 시위부대감(侍衛府大監)과 병부령(兵部令ㆍ상주총관()尙州摠管)을 지냈다. 후손들이 상주(尙州)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상주로 삼게 되었다.
184. 철원 주씨(鐵原周氏)
시조는 주승광(周承光). 상주 주씨(尙州周氏) 시조 주이(周頤)의 조부로 당의 중종조에 동북면지휘사(東北面指揮使)를 지냈다. 그는 당 태종비 축천무후(測天武后)가 황실을 장악, 국호를 장악하는 등 ‘혁당(革唐)’이 일어나자 탄식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신라 효소왕 1년에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 때 함께 온 아들 주행검(周行儉)과 주효검(周孝儉)이 철원에 터를 잡게 되어 그 곳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185. 초계 주씨(草溪周氏)
시조는 주황(周璜). 중국 주(周)나라 왕실의 후예로 당(唐)나라 말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신라 효공왕 11년, 오계(五季)의 난을 피하여 변(卞), 정(鄭) 등 두 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 초계(草溪ㆍ지금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 세거하게 되어 자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그 뒤의 자손이 장흥(長興), 삼계(森溪), 함안(咸安), 안의(安義), 풍기(豊基) 등으로 분관되었다.
186. 신안 주씨(新安朱氏)
시조는 주잠(朱潛). 중국 남송(南宋)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주희(朱熹ㆍ흔히 朱子라 함)의 증손이다. 그는 남송(南宋)이 원(元)나라에 망하자 우리나라에 망명, 재야(在野) 사림(士林)으로 청절한 기풍을 지켰다. 그 후 후손들이 세거지를 따라 능주(綾州), 나주(羅州), 전주(全州), 함흥(咸興) 등 관향을 써오기도 했으나 고종 39년 종중의 합의로 본관을 신안(新安)으로 통일하였다.
187. 충주 지씨(忠州池氏)
시조는 지경(池鏡). 중국 송(宋)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고려 광종 11년 태학사(太學師)로 봉사관(奉使官)이 되어 우리나라에 와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金紫光祿大夫太保平章事)에 올랐다. 충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도 운엄공(雲巖公) 지종해(池宗海)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서 충주에 살아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되었다고 한다.
188. 광동 진씨(廣東陳氏)
시조는 동린(東璘). 중국 명(明)나라 장군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어왜도총관(御倭都摠管)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인조 22년 명(明)나라가 청(淸)에게 망하자, 그의 손자 해사공(海沙公) 진영소(陳泳溸)가 우리나라에 망명, 광동 진씨(廣東陳氏)의 동래조(東來祖)가 되었다.
189. 양산 진씨(梁山陳氏), 임피 진씨(臨陂陳氏)
*양산 진씨(梁山陳氏) : 시조 진보재(陳普材). 원(元)나라 말 한제(漢帝)로 자칭하였던 진우량(陳友諒)의 아버지이며 조선조 태종 때 순덕후(順德候)에 봉해진 진리(陳理)의 조부로 고려조에 승상(丞相)에 증직(贈職)되었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양산(梁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임피 진씨(臨陂陳氏) : 시조 진리(陳理). 중국 원(元)나라 때 양산(梁山) 사람으로 세칭 진왕(陳王)으로 불렀다. 양산 진씨(梁山陳氏)와 같은 계통을 이루며, 그 후손들이 남원과 청양에 세거하였다 한다.
190. 진씨(陳氏)
시조는 진총후(陳寵厚). 고려 예종조에 상장군(上將軍) 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이 되었고 적신(賊臣) 이자겸(李資謙)을 토평한 공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진총후(陳寵厚)의 선대는 본래 중국 사람으로 북송(北宋) 말엽 우윤(右尹) 벼슬을지내던 복주(福州) 사람 진수(陳)가 요금(遼金)의 난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배를 타고 고려에 건너와서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인 여양(驪陽)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광동 진씨(廣東陳氏), 양산 진씨(梁山陳氏), 임피 진씨(臨陂陳氏) 등 선계가 다른 진씨를 제외하고 삼척(三陟), 강릉(江陵), 나주(羅州), 신광 진씨(新光陳氏) 등은 모두가 다 진총후(陳寵厚)의 후손이다.
191. 풍기 진씨(豊基秦氏)
시조 진필명(秦弼明). 중국 오주(吳州) 출신으로 당(唐)나라 고종조에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이었다. 신라의 3국통일을 돕기 위해 파견된 소정방(蘇定方)의 막장(幕將)으로 참가, 패주(浿州)에 눌러 살게됨으로써 우리나라 진씨(秦氏)의 시조가 되었다.
진필명(秦弼明)의 선계는 중국 황제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복야공(僕射公)을 지낸 진숙보(秦叔寶)와 청주후(靑州侯) 진창(泰昌)이 모두 그의 선조가 된다고 한다. 남원 진씨(南原秦氏), 대원 진씨(大元秦氏), 진주 진씨(晋州秦氏)는 모두 풍기 진씨(豊基秦氏)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2. 창씨(昌氏)
창씨(昌氏)는 본래 중국 성씨로 황제(黃帝)의 아들 창혜(昌慧)의 후손으로 전해오나, 우리나라에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193. 창씨(倉氏)
‘조선 씨족통보’에 보면 창씨(倉氏)는 중국 태원(太原)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창씨(倉氏)도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때 등장한 성씨이다.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194. 광주 채씨(光州蔡氏)
시조는 채순희(蔡順禧).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일부에 알려지기로는 그의 선계는 중국 고신씨(高辛氏)의 아들 계(契)의 후손으로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채림(蔡琳)이라고 한다.
195. 평강 채씨(平康蔡氏)
시조는 채송년(蔡松年). 고려 고종 떄 최충헌(崔忠獻) 집권시 발탁돼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채씨(蔡氏)의 원뿌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채국(蔡國)에 봉함을 받은 주문왕(周文王)의 일곱째 아들 채숙도(蔡淑度)다. 후손 채원광(蔡元光)이 신라 내물왕(奈勿王) 때 신라에 와 내물왕의 부마가 되고,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비조(鼻祖)가 되었다고 전한다.
인천 채씨(仁川蔡氏)도 동조동원이나 고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亂) 때 문신들이 대량 학살당하고 문헌들이 흩어져 평강 채씨(平康蔡氏)와의 관계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196. 영양 천씨(潁陽 千氏)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무과(武科)에 장원(壯元)하여 태청전(太淸殿) 수위사(守衛使) 겸 총독오군사(總督五軍師)를 역임하고, 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량사(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두 아들과 함께 왔다. 천만리(千萬里)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평양ㆍ직산ㆍ동래ㆍ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크게 세우고 귀화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 공을 인정하며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영양 천씨(潁陽千氏)의 시조는 천엄(千嚴)으로 명나라 홍무(洪武)연간에 도총장(都摠將)에 오르고 판도승상(版圖丞相)을 지냈다. 관향인 영양(穎陽)은 중국의 지명이며, 우리나라 천씨(千氏)는 모두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다.
197. 제주 초씨(濟州肖氏)
시조는 초고도(肖古道).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초씨(肖氏)는 원(元)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로 제주도에 정착,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원래는 조(趙)씨였으나 ‘주(走)’를 떼고 ‘초(肖’)로 개성(改姓)하였다고 한다.
198. 파릉 초씨(巴陵 楚氏)
시조는 초해창(楚海昌).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명(明)이 망하자 청(淸)나라의 신하가 될 것을 거부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했다. 경북 성산(星山)에 터를 잡고 성산백(聖山伯)에 정해졌다. 관향인 파릉(巴陵)은 중국의 지명으로, 당시 악주(岳州)의 한 현(縣)의 이름이다.
199. 양주 최씨(楊州崔氏)
시조는 최억(崔億). 고려 공민왕조의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으며, 학행이 뛰어나 사부(師父)로 천거되었다. 공민왕 2년에 양주군(楊州君)에 훈봉되었다. 양주 최씨(楊洲崔氏)의 상계(上系)는 18명의 학자를 당(唐)에서 파견, 그로 인해 중국의 사대부가 많이 와 살았는데, 그중에 청하 최씨(淸河崔氏)가 있었고, 양주 최씨(楊洲崔氏)가 청하(淸河)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고 양주 최씨(楊洲崔氏) 세보(世譜)에 적혀 있다.
200. 충주 최씨(忠州崔氏)
시조는 최승(崔承). 당(唐)나라 사람으로 압신라발해양번등사(押新羅渤海兩蕃等使)를 거쳐 박릉군개국후(博陵郡開國侯)로 있을 때 당(唐) 소종(昭宗)의 명령에 따라 진성여왕 3년 원종(元宗), 경노등(京奴等)의 반적(叛賊)을 소탕하기 위해 상장군(上將軍)으로 왔다.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특제(特除)되었고, 예성(蘂城ㆍ忠州 옛 이름)에 눌러 살게 되어 충주 최씨(忠州崔氏)의 시조가 되었다.
201. 추씨(秋氏)
시조는 추엽(秋饁). 중국 송(宋)나라 고종 때 사람으로 문과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함흥(咸興)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함으로써 추씨(秋氏)의 시조가 되었다. 수십 개의 관향으로 분적되어 있으나 크게는 추계(秋溪), 함흥(咸興), 전주(全州) 등으로 나뉘어진다.
*함흥 추씨(咸興秋氏) : 시조 추엽(秋饁)이 처음 정착한 지명이란 이유에서 연유한다.
*추계 추씨(秋溪秋氏) : 추엽(秋饁)의 손자 추적(秋適)이 고려 고종 때 뛰어난 학자라 그의 본관을 추계(秋溪)라 한데 있다.
*전주 추씨(全州秋氏) : 추엽(秋饁)의 10세손 추수경(秋水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明)의 부장(副將)이 되어 큰 전공을 세운 뒤 전주에 살다 죽은 뒤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데 연유한다.
202. 광산(광주) 탁씨(光山ㆍ光州卓氏)
시조는 탁지엽(卓之葉). 고려 선종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태사(太師)가 되었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선대는 중국 한나라 포덕후(布德侯)로부터 시작됐는데, 중세에 동국(東國)사람이 되어 고려 선종조에 시조 학포공(學圃公)이 광주(光州)에 서석정(瑞石亭)을 쌓고 도(道)를 강(講)하고 인륜을 밝임으로써 종유(宗儒)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203. 영순 태씨(永順太氏)
중시조 태금취(太金就). 발해국(渤海國) 창업주 대조영(大祚榮)의 원손(遠孫)으로서, 고려 고종조의 금교(金郊)에서 몽고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오르고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영순(永順ㆍ지금의 상주)를 관향으로 삼고 그를 중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발해(渤海)가 망한 후 세자인 대광현(大光顯)과 발해유민 수만(數萬)이 고려에 옮겨왔다. 고려 태조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광현세자에게 태(太)씨를 사성(賜姓), ‘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뀌었다고 한다.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진국공(震國公) 대중상(大仲象)을 시조로 하고 있다.
204. 합계 태씨(陜磎太氏)
중시조 태집성(太集成). 발해(渤海)의 진국공(震國公) 대중상(大仲象)의 후손인 태화균(太和鈞)의 8세손이다. 고려 고종조에 어사대부 대장군(御使大夫大將軍)에 올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몽고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합계군(陜磎君ㆍ합계는 지금의 沃川)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관향을 합계(陜磎)로 하고 있다. 진국공(震國公) 대중상(大仲象)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합계 태씨(陜磎太氏)에서 태맹례(太孟禮)를 중시조로 하는 남원 태씨(南原太氏)가 분적되었다.
205. 용강 팽씨(龍岡彭氏)
시조는 팽적(彭逖). 중국 금릉인(金陵人)으로 고려 충정왕 3년 내각학사(內閣學士)가 되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호종하여 동래하였다고 한다. 그가 용강백(龍岡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용강(龍岡)을 관향으로 삼았다.
206. 절강 팽씨(浙江彭氏)
시조는 팽우덕(彭友德).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조선조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중군부총병서(中軍副摠兵署)가 되어 아들 팽신고(彭信古)와 함께 동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팽신고(彭信古)가 명나라 의종의 순사지복(殉社之伏)이 되었으므로 명(明)나라가 망하자 그의 아들 팽부산(彭富山)이 우리나라로 귀화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원향(原鄕)인 중국의 절강(浙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207. 절강 편씨(浙江片氏)
시조는 편갈송(片碣頌). 그의 선대는 당(唐)나라 종실(宗室)이며, 남송(南宋)의 유현(儒賢)인 문청공 이동(李侗)의 9세손 이지(李址)의 현손(玄孫)이다. 명()明나라 신종조에 어양총절사(漁陽摠節使)가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유격장(遊擊將),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도독중장(提督中將)으로 우리나라에 와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뒤 간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208. 충주 평씨(忠州平氏)
시조 평우성(平友聖). 조선조 선조 때 사람으로 그의 묘가 인천시 남구 서창동 앞산에 있다. 고려조 태조 14년 평환(平喚)이 강덕진두(康德鎭頭)를 지냈다고 전하는데, 지금의 평씨(平氏)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평씨(平氏)는 원래 중국 성씨로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평당(平堂)이 식읍명(食邑名) 평릉(平陵)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209. 포씨(包氏)
포씨(包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풍덕(豊德), 순천(順天) 등 2본이 있다. ‘한국성씨통보(韓國姓氏統譜)’에 의하면 “주(周)나라 신백(申伯)의 후예로 ‘신포서(申包胥)’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이름으로 성(姓)을 삼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포씨는 고증할 문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210. 신창 표씨(新昌表氏)
시조 표대박(表大圤). 고려 광종 11년 중국에서 귀화했다. 그는 당시 후주(後周)의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송(宋)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등 여덟(張, 方, 韋, 邊, 尹, 秦, 甘, 皇甫) 성씨를 인솔해 고려로 망명, 귀화했다. 표씨(表氏)는 문헌에는 37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실제로는 신창(新昌) 단일본이며, 신창(新昌)은 충남 아산시에 있는 지명이다.
211. 임구 풍씨(臨朐馮氏)
시조는 풍삼사(馮三仕). 명(明)의 진사(進士),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낸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부(靑州府) 임구현(臨朐縣) 출신이다. 숭정 연간에 청(淸)의 침입으로 포로가 되어 심양(沈陽)에 있던 중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질이 되어 그곳에 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1645년 귀국할 때 배종(陪從)하여 온 9의사(義士) 중 한 사람이다. 9의사는 모두 귀화하였고, 후손들은 선조의 출신지를 관향으로 삼았다.
212. 괴산 피씨(槐山皮氏)
시조는 피경정(皮慶廷). 중국 원(元)나라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피기광(皮起光)이다. 원(元)나라 순제 때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 신경위대장(金紫光祿大夫神慶衛大將)이 되어 남변(南邊)을 정벌하였으나 전세가 불리,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망명해 왔다. 공민왕은 그를 우대, 괴산군(槐山君)에 특배하게 됨으로써 괴산(槐山)을 관향으로 삼았다.
213. 홍천 피씨(洪川皮氏), 단양 피씨(丹陽皮氏)
피씨(皮氏)는 주(周)나라 때 향사(鄕士)인 번중피(樊仲皮)의 ‘피(皮’)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전해온다.
*홍천 피씨(洪川皮氏) : 시조 피위종(皮謂宗). 원래 송(宋)나라의 금오위상장(金吾衛上將)인데 고려조 정종 때 안렴사(按廉使)로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후손 피인선(皮寅善)은 정당문학 좌복야(政堂文學左僕射)를 역임하였는데, 그가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홍천(洪川)을 본관으로 삼았다.
*단양 피씨(丹陽皮氏) : 시조 피인고(皮寅古). 피위종(皮謂宗)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대상(大相),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짐으로 단산(丹山ㆍ丹陽)으로 관적하게 되었다.
214. 달성 하씨(達城夏氏)
시조는 하흠(夏欽). 중국 송(宋)나라의 대도독(大都督)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달성(達城ㆍ지금의 大邱)에 정착함으로써 달성 하씨(達成夏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아들 하준(夏濬)이 호병(胡兵)을 무찌른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데에 연유한다.
215. 곡산 한씨(谷山韓氏)
시조는 한예(韓銳). 고려 희종조에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평장사 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政堂文學平章事門下侍中)에 이르고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가 중국 남송(南宋) 영종조의 승상(丞相) 한규철(韓奎哲)의 손(孫)으로써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있다가 고려 희종 2년, 8학사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에 온 것이 곡산 한씨(谷山韓氏)의 시조 유래가 된다. 충주 한씨(忠州韓氏)는 곡산 한씨(谷山韓氏)에서 분적(分籍)한 성씨이다.
216. 청주 한씨(淸州韓氏)
중시조는 한란(韓蘭). 고려 태조때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문하대위(三中大匡門下太尉),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에 서훈되었다. 고려 태조 11년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기 위해 청주(淸州)에 당도하자 군량을 풀어 구원했고 일족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그는 기자(箕子)의 원손(遠孫)으로,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한 것과, 위만에게 억류당한 그의 가족이 한씨라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준왕 이전부터 한씨성을 썼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주(嘉州), 금산(錦山), 면천(沔川), 부안(扶安), 안변(安邊), 양주(楊州), 평산(平山), 한양(漢陽), 홍산 한씨(鴻山韓氏)는 모두 청주 한씨에서 분적되었다.
217. 한씨(漢氏)
한씨(漢氏)는 원래 중국 성인데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본관은 담양(潭陽), 옥천(沃川), 충주(忠州)가 있는데 시조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218. 강릉 함씨(江陵咸氏), 양근 함씨(楊根咸氏)
시조는 함규(咸規).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은청광록대부대위 광평시랑 평장사(銀靑光祿大夫大尉廣評侍郞平章事)에 올랐다. 함씨(咸氏)는 그 선계를 중국 한(漢)나라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우리나라에 와 용문산을 중심으로 적을 토평, 성을 쌓고 부족국가를 세운 함왕(咸王)을 원조로 한다. 그 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른 함혁(咸赫)을 비조(鼻祖)로, 21세인 함규(咸規)를 시조로 하여 다시 기세(起世)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219. 김해 해씨(金海海氏)
시조는 해서필(海瑞必). 중국 명태조(明太祖)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명태조(明太祖)의 명을 받아 대도독(大都督)으로 우리나라에 온 뒤 공을 세워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로부터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관향을 삼았다고 한다.
220. 진주 형씨(晋州邢氏)
시조는 형옹(邢顒). 중국 당(唐)나라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에 8학사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에 와 문학과 유교의 홍보에 공을 세우고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충선공 형공미(刑公美)가 정왜(征倭) 도원수(都元帥)로 왜군을 격파, 일등공신이 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 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221. 전주 호씨(全州扈氏)
시조는 호준(扈浚).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우리나라에 와 많은 전공을 세운 뒤 귀화하여 전주(全州)에 터를 잡고 세거함으로서 전주(全州)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222. 파릉 호씨(巴陵胡氏), 가평 호씨(加平胡氏)
시조는 호극기(胡克已). 중국 건령(建寧) 사람으로 명(明)나라 순정조에 문과에 올라 직각한림학사(直閣翰林學士)로 도어사대부(都御使大夫)가 되었다. 인조 22년 명(明)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뒤, 명(明)나라가 청(淸)에게 망하자 귀화하여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함북(咸北) 북청(北靑)으로 옮겨 여생을 살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 : 6세 호세익(胡世翼)의 큰 아들 호숙(胡叔)의 후손들은 중국의 파릉(巴陵)을 관향으로 삼아 파릉 호씨(巴陵胡氏)가 되었다.
*가평 호씨(加平胡氏) : 호세익(胡世翼)의 둘째 아들 호징(胡澄)과 셋째 아들 호준(胡濬)의 후손은 가평(加平)을 관향으로 삼아 가평 호씨(加平胡氏)가 되었다.
223. 남양 홍씨(南陽洪氏-唐洪系)
도시조 홍천하(洪天河). 고구려 영류왕 22년 당태종(唐太宗)의 명령으로 온 8학사(學士) 중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와 예도(禮道)와 유학(儒學)에 힘썼다. 그는 당(唐) 태자 이승건(李承乾)의 난(亂)을 피해 요동에 은거하다가, 당태조(唐太祖)의 명령으로 은수포(銀樹浦)에 도착하자 왕은 예로 맞고 그 곳을 당성(唐城ㆍ지금의 南陽)으로 개명하고 관향을 삼게 하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그를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책봉하고, 신라의 5대왕(大王)으로부터 스승으로 섬김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홍씨(洪氏)는 대부분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이다. - 토홍계 남양 홍씨도 있다.
224. 진양 화씨(晋陽化氏)
시조는 화명신(化明臣).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조선조 중엽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한국에 와 귀화했다. 랑야(瑯琊)사람인 그는 명(明)나라 중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화광신(化光新)으로 본성이 화씨(花氏)였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회씨(花氏)의 세계는 명조(明朝) 개국공신인 화운룡(花雲龍)에서부터 비롯된다.
225. 황씨(黃氏)
우리나라의 황씨(黃氏)는 항주 황씨(杭州黃氏)를 제외하고 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의 삼대본(三大本) 외에 상주(尙州), 우주(紆州ㆍ전주의 속현), 회덕(懷德), 덕산(德山), 제안(齊安) 등 10여 본(本)이 있으나 모두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황씨(黃氏) 도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으로 신라에 터를 잡은 황락(黃洛)으로 전해진다. 그는 신라 유리왕 5년(서기 28년) 교지국(交趾國ㆍ지금의 越南)의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 경북 울진군 평해에 상륙했다고 한다.
226. 항주 황씨(杭州黃氏)
시조는 황공(黃功). 항주에서 지휘사(指揮使) 황빈(黃賓)의 아들로 태어나 진사(進士)에 합격 중도유수(中都留守)에 이르렀다. 숭정(崇禎) 17년(인조 22년) 청군(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관(沈陽舘)에 집류(執留) 중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로 그 곳에 볼모로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배종(陪從)하여 9학사(義士) 중 한 분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원조(遠祖)는 명(明)의 선무사(宣撫使)를 지낸 황갑(黃甲)이며, 후손들은 황공(黃功)의 출신지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항주 황씨(杭州黃氏)라 하였다.
227.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
시조는 황보능장(皇甫能長). 고려 태조 때에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으로 통일에 공을 세우고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후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 목사를 지낸 황보안(皇甫安)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능장(能長)의 선조가 신라 말 당(唐)나라에서 귀화해 온 씨족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그러나 황보(皇甫)라는 성(姓)이 우리나라 토착의 성이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歸化)했거나 유입(流入)된 성씨인 것은 분명하다. 영천 황보씨에서 황주 황보씨(黃州皇甫氏)가 분적되었다.
[출처] [펌]중국에서 도래한 성씨 (순흥안씨문숙공파) | 작성자 치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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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한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이제 저도 멋진 인생을 꿈꾸며 하루 하루를 시작 하려고요
웃으면 복이 온다하니
아침을 웃음으로 힘차게 열어볼려고요
님들께서도 날마다 좋은꿈을 갖고 매일들을 시작 하시지요
이제 주말을 잘 마무리 하시고 행복한 저녁시간 되십시요.
올 봄은 기후 온난화로 일찍 봄이 오고
꽃이 피었는데 거기다가 봄비가 잦아
꽃은 피기가 무섭게 낙화하고 잦은 봄비에 초원은
푸르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초목들이 짙게 푸른빛을 발산하고 우거진 신록으로
싱그럽게 숲을 조성하고 가는 발길마다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도 푸르름이 짙게 매일 싱싱하게
물들어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