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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속에 활짝 피어난 철학자 최경호씨
무지 또는 무심함을 일깨워준 것은 경북대 철학과 신오현(申午鉉) 교수가 보내온 한 통의 이메일. “한국 철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신기원을 이룩한 대작으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동료 학자에게 인색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우리 학계에서 원로교수가 박사학위도 없는 재야학자의 저서에 흥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메일을 보냈다는 것부터 사건이다.
책을 찾아내 저자 소개를 읽는다. ‘최경호는 현상학을 연구하다가 선에 관심을 두면서 거기에 몰입하다. 2001년 여름 작업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선과 존재라는 주제를 붙잡아 마음을 가다듬고는 그 해 겨울부터 글쓰기 작업에 들어가 이 책을 완성하다.’ 이게 전부였다. 저서목록에는 ‘죽어서 다시 태어난 바람아’ 등 시집 3권도 포함돼 있었다.
수소문 끝에 만난 최씨는 말을 심하게 더듬고 있었다. 최씨의 후배인 서울대 철학과 이남인(李南麟) 교수가 의사소통을 도왔다. 71년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시를 쓰기 위해 1년 만에 중퇴하고 73년 다시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큰 시련이 닥친다. 원인 모를 언어장애가 온 것이다.
“79년 석사과정에 입학하는 데 전제조건이 붙었어요. 언어 교정을 받으라는 것이었지요.” 두 달간 교정을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다. 20년 전 한국 학계는 그랬다. 박사를 하는 것은 교수가 되려는(학자가 아니라!) 준비였고, 강의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아예 들어오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언어 교정을 받아 보니 그게 결국은 마음을 억제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억제하다 보니 자유롭게 사고할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저는 그때 자유로운 사고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그에게는 ‘재야(在野)’학자라는 딱지가 붙게 됐다. 당장 생활고가 찾아왔다. 90년대 초부터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지금도 한양대 산학기술관 신축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하는 철학자’다.
“봄 여름에 일하고 가을부터는 수고를 씁니다.” 말 그대로 그는 손으로 원고를 쓴다. “컴퓨터 안 해요. 컴퓨터를 치면서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새벽에 글 쓰고,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책 읽고 잠든다. 2년 전에 첫 저서 ‘현상학적 지평에서 규명한 선(禪)’이란 책을 냈고 이번이 두 번째 저서다.
첫 책이 말 그대로 자신의 선 체험에 대한 현상학적인 서술이었다면 이번 책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통해 다시 한번 선 체험을 학술적으로 풀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단순한 해설이 아니라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겨냥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뜻하는 현존재(Dasein)에 집착했기 때문에 무아(無我)의 경지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철학 교수의 꿈은 완전히 접은 것일까? “책을 쓰고 나면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합니다. 그때 한 6개월 막노동하고 나면 육체는 힘들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노동 안 했으면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강단에 서는 것은 사양합니다.”
공사장 동료들도 그가 철학을 위해 막노동하는 걸 안다. “이번에 책 나왔을 때 동료들이 ‘나도 고등학교 나왔으니 철학책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주변에 돌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대요.” 인터뷰 내내 자리를 함께했던 이남인 교수는 “선을 주제로 현상학적 기술(記述)을 충실하게, 밀도 있게 해나간 ‘탁월한’ 저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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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현상학적 지평에서 규명한 선(禪)!
ㅡ2년 반의 긴 작업 끝에 최경호는 자신의 선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규명해내는 일을 해냈다. 어린 시절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의 시작은 자연 철학과로 향하게 했고, 특히 E. 후설(Husserl, Edmund, 1859∼1938)의 현상학(現象學)은 그를 매료시켰다. 판단이나 추론 등을 개입시키지 않고 체험 속에서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 직관하여 드러나는 곳에서 논리적 구조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에 와 닿았다. 최경호는 나라는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실재가 스스로 내비치도록 하는 것, 즉 선험적 자아를 넘어서 있는 곳에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을 따라가 보려 했다.
ㅇ머리로 규명하기보다 체험을 중요시했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은 결국 선(禪)으로 향하게 되었고, 현상학에 대한 관련 서적들을 번역하면서, 선(禪)의 생생한 실재감에 휘감기어 거기에서 일어나는 영감들을 시로 적어보기도 했다.
ㅡ“선의 세계란 언어에 의해 포착되어지면 이미 그것은 죽어버린 실재이며, 언어 그 너머에 생생히 살아있는 실재이기에 궁극적으로 그것은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아니하고 몸에 의해 직접적으로 포착되는 우주의 생생한 흐름이다.
ㅡ생동하는 지금, 여기의 흐름이기에 글로써 선의 세계를 표현하여 제시했을 때 이미 선을 잃고서 언어와 의식 속에서 걸러지는 선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1990년 초부터 시작된 그의 선에 대한 관심과 그 체험을 기술해내고자 하는 열정은 해가 지날수록 식을 줄을 몰랐다.
ㅇ그런데 97년 이맘 때였던가. 어느 순간 최경호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나의 것, 나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 현상학에 대한 관련서적들을 번역하면서 선적 체험을 추구하여 떠오른 영감들을 시로 적어 몇 권의 시집도 내봤지만 도대체가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이 아닌, 그저 그림자만 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 쓰기와 선적 체험 기술하기, 이 둘 밖에 없었는데 예민한 시적 언어감각의 결여, 한마디로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다. 동시에 자신이 모든 것을 던져 그렇게도 목마르게 갈구하던 깨달음이라는 것도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절망감에 빠졌다.
ㅡ‘아! 나는 정말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무 것도 없구나.’ 심장의 박동소리마저 서서히 일을 멈추고 늦춰지고 있음을 느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오로지 무료함뿐이었다. 전화도 TV도 없는 집에서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그저 반복했다. 몸과 두뇌는 무엇인가를 활동할 것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지만 맥이 끊어진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도 의지마저도 끊겨져버렸다.
ㅇ그렇게 한 보름쯤 지났을까. 그 동안은 그나마 몸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 날은 누워있는 목의 신경이 마비되면서, 몸조차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또 일어나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신이 움직일 수 없는 마비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처음에 밀려오던 불안감이 이내 어떤 안도감, 마치 자연의 품에 안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ㅡ바로 그때 갑자기 뜻하지 않은 경계가 열렸다. 극적인 반전이 온 것이다. 어느 순간 창가로 스며든 오후 햇살에 몰입되면서 내 몸이 하나, 나로부터 벗어나 햇살과 하나가 됨을 느꼈다. 동시에 내 몸이 머무는 곳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나의 얼굴 곧 본래적인 ‘나’가 떠오름을 보았다. 햇살과 하나가 되어 춤추는 내 몸, 곧 본래적인 ‘나’가 실재가 되어 영생을 얻었음을 알았다. 객체라고 생각했던 자연이 실재가 되어 나의 몸과 하나된 것이 실제로 느껴졌다. 그리고 한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몸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ㅇ“그 때 내 머리에 떠오른 말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바로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여 ‘그 것’의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ㅡ끊임없이 뭔가를 지향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선험적 자아를 뛰어넘어 무아(無我)에 이르려는 시도가 선(禪)입니다.
ㅡ선험적 자아라는 능동적 의식주체가 사라진다고 해도 최소한 몸은 남는 것입니다. 모든 관념을 버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아가 남아있는 것이지요.
ㅡ그 하나된 몸을 통해 만물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하나가 된 몸의 머무는 바 바로 거기에서 ‘그’ 마음도 생하는 것이지요.”
ㅇ자아를 붙들고 있는 한 선체험에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철저히 자신을 버린 순간, 몸마저도 자신을 떠나는 순간 햇살과 동화되어 실재가 되어 떠올랐다.
ㅡ전혀 에고(Ego)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의 ‘나’, 최경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어찌 보면 이제야말로 침묵해야 하고, 함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바를 현상학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생겼다.
ㅡ지금까지 선에 대한 이해와 학술적 진술은 많았지만 선체험에 대한 기술은 보지 못했다. 대개의 책이 선에 대한 암시와 은유적인 진술에만 그쳐왔던 것이다.
ㅡ그는 선적 체험을 그대로 기술하는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방법으로 현상학을 택했다. 현상학은 체험을 기술하는 최고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윤명로·한전숙 두 교수로 부터 체험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을 익힌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진정한 체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분명 숨겨져 있는 존재 자체, 즉 사실(fact)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ㅇ“철학은 지향적인 존재를 보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를 떠나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선은 나를 떠나는 순간 압도해오는 의식의 현장, 곧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존재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지요.
ㅡ오히려 자아에 대한 에고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의식의 차원이 열려지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은산철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절대 절명의 완전한 절망 속에서 솟아 나와 주어지는 것이지요.
ㅡ예전에는 내가 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했는데 이제는 하나가 된 그 자체가 이미 스스로 넘쳐흘러, 스스로 의식에 드러나면서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들려오고, 그대로 올라옵니다. 명명백백한 사실로서 주어지지요. 쉽게 말해 무아(無我), 하나가 된 상태에 주어져 있는 자기의 본래 얼굴, 숨겨진 의식 차원, 자기의 마음 찾기가 선입니다. ‘그 것’의 마음을 찾는 기쁨은 정말 굉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 수도 있지요.”
ㅇ‘그 것’의 마음, 혹은 자체 명증적인 숨겨져 있는 의식차원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숨은 자산이기에 꼭 알려져야 하는 것이다. 최경호는 선의 체험을 얻은 후 그 작업을 위해 아파트 공사현장의 목수 일을 다시 시작했다.
ㅡ목수 일은 7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1982년 대학원 졸업 후 전공 관련 서적 번역작업과 글 쓰는 작업을 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았기에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이 육체노동이 그에게는 오히려 정신의 휴양이 되었다. 해마다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던 정신이 육체적 노동으로 충만 되곤 하였던 것이다.
ㅡ7년 가까이 공사현장에서 일하다보니 특별한 전문적 기술을 갖게 되지는 않았지만(사실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거의 달인이 되었다. 머릿속 계산 없이도 그냥 일이 되어졌다. 그리고 작업 중 떠오르는 생각들을 땀땀이 메모했다. 다행히 좋은 십장을 만나 언제나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 6, 7, 8월 정도 공사현장에서 ‘최 씨’라는 이름으로 목공일을 하면 그 나머지는 글을 쓸 수 있어 좋은 일이다.
ㅇ그 동안은 일 년에 서너 달을 노동하고 그 대가로 생활을 하며 그 나머지를 번역하고 글쓰는 일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책을 쓰기 위해 1년 반을 건축현장에 나갔다. 그리고는 2년 반을 꼬박 틀어박혀 글을 썼다.
ㅡ그것이 이번에 출판된 『현상학적 지평에서 규명한 선』( 2001년 5월 경서원 발행)이다. 550여 쪽의 대 작업이었다. 이 책은 선적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선적 체험의 세계에 몰입하여 만난 ‘그’ 가 ‘그 세계’를 기술해나간 것이다.
ㅡ그런데 기술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현상학적 지평이기에 현상학적 의식주체로서의 선험적 자아와 선의 의식주체인 무아(無我), 무아의 자기와의 대비가 시종일관 주제가 되어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며 장광설로 펼쳐지고 있다. 최경호 그가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이 진정한 선 체험을 했느냐. 그리고 그 체험의 세계를 제대로 기술했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이 책으로 인하여 눈 밝은 스님으로부터 경책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그는 가지고 있다.
ㅇ누군가 혼자라서 외롭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이 의아스럽다. 몇 백년을 준다고 해도 다 표현하지 못할 무한한 빛(?), 그 빛을 퍼내는 일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 무슨 일을 하더라도 행복하다며, 속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함박웃음을 활짝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