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이유가 존재할텐데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군사혁신이다. 북방민족은 강력한 신무기인 등자(발판역할)의 발명 덕에 중기병이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등자 덕에 말에 오르거나 균형을 잡는데 매우 유용하여 기마병의 무기가 창으로 되어 그 이전 활보다 무력이 증진되었다 (실제로 전한 초무제는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창고에 식량과 귀금속이 가득했다)
* 무제는 당대에 흉노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는 비단길 개척을 통해 기마군단 육성에 성공했고,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사막 너머로 몰아내었다
만만찮은 적수인 흉노를 몰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한나라는 기나긴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말을 비롯한 다양한 물건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과정에서 귀금속이 서역으로 유출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때 황금 한 근이 동전 1만개에 해당했는데 대략적인 금과 동의 교환비율은 130:1이었다. 현재 가격으로 치면 놀라울 정도로 금의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서방과의 교역이 시작된 후 금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 통화공급=귀금속 이 줄어들자 경제전반에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화공급이 줄어들때 가장 일반적인 대응은 화폐사용을 줄이는 것이다. 화폐사용을 줄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실제 후한부터 남북조시대까지 장원문화가 이어져왔다. 즉 부유한 귀족들이 넓은 땅을 개척하는 한편,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의탁한 사람들을 이용해 대규모 농장에서 식량을 재배하는 일종의 자급자족 생활권을 건설한 것이다. 경제 전체 차원에선 대단히 비효율적인 행동이라 할수 있다. 애덤스미스의 핀 공장 사례에서 보듯 분업과 교환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니 말이다
도시가 위축되고 시장이 사라지면 혁신은 사라진다.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 긴 침체기)
* 그런데 약해진 경제력 보다 더 큰 문제는 인구의 급격한 감소였다. 황건적의 난(184년)이후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삼국시대 초기에는 약 6천만에 달했던 인구가 심국시대 말기에는 1천6백만명 수준으로 급감했다.(이는 장원에 숨은 인원, 정부 행정력의 부재를 반영) 결국 삼국시대 이후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기는 했지만 불황의 흐름 자체는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약해진 경제력과 줄어든 인구가 북방 유목민족에게 최적의 활동 조건이 된 셈이다. 막강한 경제력이 농경민족 국가의 최대 장점인데 장원경제의 출현으로 무너진 이상 북방유목민족의 공격을 저지할 힘은 없었다. 결국 고대 중국은 한나라 무제때 정점에 도달한 후 남북조시대까지 약 500년에 걸쳐 내리막을 걸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