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 패한 적 없는 불패의 명장
이병형(李秉衡, 1928~2003) 前2군사령관은 일본 도쿄준대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육사4기로 임관했다. 그는 6.25 전쟁에 대대장과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6.25때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130여 차례의 전투 중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명장이었다.
이 장군은 2001년 3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6.25 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영천에서 재무장을 한 후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이 장군은 인민군은 육탄공격(肉彈攻擊)을 못했고, 국군은 육탄공격을 했다. 누가 시킨 게 아니었다며 국군은 부대단위로 항복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청진 부근서 내가 지휘하는 대대에 인민군 일개 중대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고 했다.
휴전 이후, 그는 1사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5군단장, 합참본부장, 2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또 인민군의 휴전선 도발에 155mm 포탄 400발을 퍼부은 배짱 있는 군인이었다. 그러나 이병형은 중장으로 2군사령관에 그쳤다. 1976년 군복을 벗은 이 장군은 농기계 제작회사인 대동공업 회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율곡계획 입안에 이병형을 발탁하는 판단으로 이병형을 군의 수장(首長)으로 발탁하였다면, 윤필용(尹必鏞) 前수경사령관과 하나회 등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유신(維新)이라는 파탄에 들어선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통수권자로서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이병형 장군에 의해 군이 이어졌다면 10.26, 12.12, 5.18 등의 비극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예비역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는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자였다. 그리고 전쟁기념관 건립사업을 주도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강청(强請)에 의해 이병형은 전쟁기념관 회장으로 국군의 역사를 정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병형이 5군단장일 때 노태우는 예하 연대장이었다. 삼각지 전쟁기념관은 이병형의 역사의식과 구상의 웅대함을 보여준다.
이 장군은 10.26후 퇴직하여 한국판 전쟁론(클라우제비츠)으로 불리는 명저(名著) 대대장(大隊長), 연대장(聯隊長) 등 야전지휘관의 지휘철학을 담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30여년간의 군대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술서적으로, 지금 육군의 중요한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병형 장군은 송요찬의 수도사단장 휘하의 대대장으로서 북진에 참가했다. 그는 이 과정을 모아 대대전투의 실상과 교훈을 정리한 대대장을 저술했다. 육군의 전략단위는 사단이다. 사단의 전술단위는 대대이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나폴레옹,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군제의 기본이다. 대대장은 화력과 병력의 배치, 운용을 내 손과 발처럼 파악하고 운용해야 한다.
사단장은 결국 대대장들의 전술지식과 통솔력에 의존한다. 대대장은 이병형이 북진 간 각종 부딪치는 각종 상황에 대한 조치와 병사들의 통솔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로 대대전술교범의 살아 있는 교본이다. 리델하트가 지은 기계화전술의 교본 롬멜전사록(The Rommel Papers)에 비견될 수 있는 명저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참모습
이병형 장군의 대대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북진중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을 바라보는 어떤 산골마을을 지나 가는데 청년들이 30세 가량의 한 사나이를 땅에 꿇어 앉혀놓고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락민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는 반죽음 상태였다. 나는 그 사나이의 처리를 맡겨 달라고 한 뒤 부하들에게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부락이 보이지 않는 위치까지 그를 끌고 온 다음 나는 무작정 데리고 갈 수도 없어 이쯤해서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마을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느냐고 물었다.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서 했다고 변명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는지 얼굴은 창백했으나 비교적 또박 또박 대답했다.
나는 권총을 들이대고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을 팔자소관이라 하더라도 너의 판단착오는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 나는 그의 머리 위를 겨냥한 채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한 계곡은 총성으로 뒤덮였고 그가 살던 부락을 의식하면서 사격을 했다. 그는 총을 맞은 줄 알았는지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혹시 쇼크로 정말 죽은 게 아닌가 해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이전의 너는 이미 죽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너가 탄생한 것이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가짜 사격으로 부역자를 살려준 이병형 장군. 2001년 3월 기자와 만난 이병형 장군은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참모습 이라고 했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대대장-연대장을 거쳐 1사단장-5군단장-2군사령관 등 지휘관과 사단-군단-육본의 작전참모, 합참본부장 등 작전장교의 주요 보직을 모조리 거친 탁월한 전술 지휘관일뿐더러 국군 최고의 전략가다.
그는 합참본부장으로서 1974년 율곡계획(栗谷計劃)을 입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형을 이런 막중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임지로 보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율곡계획의 집행을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의 회의체인 합동참모회의에 맡기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는 합참본부장에게 맡겼다. 율곡계획의 감사를 위해 특명검찰단을 만들고 단장에 육사2기 동기생인 김희덕(金熙德) 중장에게 맡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율곡계획의 기획(plan) 집행(do), 통제(see)를 대통령이 직접 제시하고 관장했던 것이다.
당시 합참본부장으로서, 한국군 전력증강의 제1 우선순위는 북한을 압도할 수 있는 공군력 건설에 두어야 한다는 호쾌한 철학을 제시한 이병형 장군은 시대를 앞서가는 전략가였다. 육군 장군의 대다수가 북한군 전차를 막기 위해 대전차병기와 대전차방벽에 골몰하던 시기였다.
초전에 우세한 공군력으로 적 공군기를 제압하면 이후 공군력으로 적 전차를 압도할 수 있다는 전략구상을 펴는 이병형 장군을 이세호(李世鎬), 노재현(盧載鉉) 총장 등의 육군 수뇌부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병형은 일본 육군항공대에 복무한 경력 때문인지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이 눈이 떴다. 이 장군은 재래식 무기 개발에도 힘썼다. 1967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치라이트 개발을 시작으로 낙하산 국산화, 105mm 야포 개발 등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통해 무기 국산화에 주력했다.
이병형 장군이 합참본부장으로 있던 1973년 8월, 북한은 연평도 등 서해5도에 대한 침공을 계속했다.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데도 미국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군사원조를 줄이고 아시아에서 군사개입과 공약을 축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은 성능 좋은 무기가 필요했으나 미국은 낡은 재래식 무기만 주려고 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싸고 한미 간에 미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장군은 처음부터 절대고수의 강경론을 굽히지 않아 결국 미국 측이 손을 들고 우리 방침대로 따라주었다.
이때 이 장군은 미국이 공군에 공여한 팬텀기에 달려 있는 벌컨(Vulcan)포를 보고 이것을 국산화하자는 착상을 내놓았다. 8개월간 비밀리에 연구해 그와 똑 같은 성능의 벌컨포를 생산해 내는데 성공했다. 오늘의 국군의 주요무기체계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후에 8군부사령관 프레내건 중장이 이 고성능 최신식 국산무기를 보고 혀를 내둘렸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해-공군의 전술에까지 통달해 합동작전 능력을 갖추게 된 작전통이 아니라면 생각해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탁월한 전술가이자 최고의 전략가
이 장군은 군사문화(軍事文化)를 소중히 하는 민족만이 선진국의 대열에 올랐다고 평소 주장했다. 군사 문화를 가진 민족이 세계적으로 지도적 국가가 되었고, 후에 경제적 리더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군사문화를 소중히 해야 부국강병(富國强兵)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기자에게 미국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군사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자국의 위협요소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고 정보(情報) 훈련이 아주 잘 돼 있다며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돼 있다 고 했다. 그의 지도자 혹은 지휘관론은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로마사(史)에서도 로마 집정관이 전투 선두에 서서 늘 전사(戰死)하지 않았느냐 고 했다.
육군수뇌부의 군맥(軍脈)이 <한신-이병형-채명신>보다 <노재현-이세호-윤필용> 등으로 이어진 것은 우리 군의 불운(不運)이다. 이들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력증강이 물적(物的)인 데 치우치고 사람을 키우는데 소홀하게 된 원죄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전략가는 나 한 사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인이 유고시에는 국군은 텅텅 빈 형해(形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작전권을 전환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력증강은 바로 인재(人才)의 양성이다. 그 인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군이 스스로 노력하고, 통수권자는 이를 정확히 발견하고 잘 활용하는 것이 요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병형 장군의 또 다른 면모는 그가 교양인이었고, 신사(紳士)였다는 사실이다. 퇴임 후 그는 전쟁사-전략론 등 군사서적을 늘 탐독했다. 그는 후배나 동료 장교들에게 늘 프로페셔널(직업적)한 군인이 되라, 한반도는 4강의 이익과 전략이 교차되는 다이어먼드 같은 지역이니만큼 스위스나 스웨덴같은 국방국가로 다져 놓아야 한다, 전술에서 이기고 전략에 지는 일이 없도록 고급 지휘관은 전력능력을 갖추고 있어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는 합참에 있으면서도 해군이나 공군에서 파견 나온 장교들을 각별히 보살펴 타군 장교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군인이었다. 4기생중 유일한 중장인 이 장군은 언행은 차분하지만 어디에서나 돋보이는 군인이었다. 그의 깊은 지식과 인격-두뇌,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능력 때문일 것이다.
이병형 장군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전쟁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으로 발탁돼 1989년부터 1994년 까지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전쟁영웅으로서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희생된 국민의 업적을 눈으로 확인시키는 작업을 마무리했던 것이다. 그의 안목이 담겨 있는 이 건물이 한국 군사문화의 요람(搖籃)이 되고 있다. 이병형 장군은 탁월한 전술가이자 최고의 전략가였다.
① 위 내용은 남정옥/오동룡 공저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 p.156~162에서 발췌하였습니다.
② 박정희 대통령이 율곡계획 입안에 이병형을 발탁하는 판단으로 이병형을 군의 수장(首長)으로 발탁하였다면, 윤필용(尹必鏞) 前수경사령관과 하나회 등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유신(維新)이라는 파탄에 들어선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통수권자로서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이병형 장군에 의해 군이 이어졌다면 10.26, 12.12, 5.18 등의 비극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예비역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③ 그는 합참본부장으로서 1974년 율곡계획(栗谷計劃)을 입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형을 이런 막중한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임지로 보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율곡계획의 집행을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의 회의체인 합동참모회의에 맡기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는 합참본부장에게 맡겼다. 율곡계획의 감사를 위해 특명검찰단을 만들고 단장에 육사2기 동기생인 김희덕(金熙德) 중장에게 맡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율곡계획의 기획(plan) 집행(do), 통제(see)를 대통령이 직접 제시하고 관장했던 것이다.
④ 그는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최초 발상자였다. 그리고 전쟁기념관 건립사업을 주도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강청(强請)에 의해 이병형은 전쟁기념관 회장으로 국군의 역사를 정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병형이 5군단장일 때 노태우는 예하 연대장이었다. 삼각지 전쟁기념관은 이병형의 역사의식과 구상의 웅대함을 보여준다.
⑤ 이 장군은 10.26후 퇴직하여 한국판 전쟁론(클라우제비츠)으로 불리는 명저(名著) 대대장(大隊長), 연대장(聯隊長) 등 야전지휘관의 지휘철학을 담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30여년간의 군대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술서적으로, 지금 육군의 중요한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