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訥先生文集卷之四十二 / 墓表 / 展力副尉盧公墓表
公諱𡼎字叔仁。盧氏中國范陽縣人。唐宣宗末。翰林諱穗率九子東來。九子皆以功食采。長淵伯諱坵其一也。自是事高麗。名公巨卿凡十二世。至諱國柱吏曹判書始家昌寧。生諱抃素。我恭定王召拜慶州府尹不赴。諡淸敏享蘇谷書院。於公間五世。曾祖諱士英參奉贈參議。祖諱沉參奉號晩翠。從享蘇谷。禰諱忠彥原州判官。妣坡平尹氏殷賢女。嘉靖戊午十一月初四日。公生于金泉里第。十四歲而孤。晩翠公收育之。晩翠公方辭官講學。寒岡鄭先生有時來訪。公與表兄成芙蓉安義。自幼拜寒岡。深被誘掖。後寒岡宰本縣。設八書齋。安玉川主勿溪。我十世祖沃村主冠山。芙蓉主芙蓉。公從遊其間。進而質疑於寒爺。退而與諸賢切偲。壬辰叔父諱弘彥糾鄕兵守臺山殉于孝。公收餘卒以禦敵。朝廷錄其勩。授展力副尉。崇禎庚辰正月十五日考終于月未村正寢。享年八十三。葬縣西游長里習禮洞沙旨枕亥原。配善山金氏越女合祔。男克興。孫男尙說。曾孫男碩英。公之沒已歷年三百餘矣。文獻又寥寥矣。然惟寒岡先生弟子傳略有所載。先生夏山勸懲案曰奉養以色。事兄以道。臨事接物無所差謬。時公年二十三而見許於師門已如此。先生浴行錄曰舟至馬首院。昌寧縣監尹民哲。縣之士人輩各設供帳于沙上以待。舟不泊不得入。盧𡼎等八九人僅得入太守舟。於是而見從師勇前之大槩也。漁村楊公祭文曰公賦性實得大朴之淳而未嘗有世俗矯飾之態。又以公稟才之美稱之。俱可以證公平生也。十世孫啓洪氏擬改豎隧表。屬相稷識之。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실체 최초 확인"
박소연입력 2009. 7. 21. 10:23수정 2009. 7. 21. 10:23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조선 고종 때 서원이 당파싸움의 뿌리라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의 실체가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경남 창녕의 사액서원인 관산서원 사당터에서 땅속에 묻힌 위패를 발견했다고 21일 밝혔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서원철폐령(1868ㆍ1871년)을 내려 전국의 미사액ㆍ사액서원(약 1700여곳)을 47개소(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를 명했다.
이번 사액(1711년, 숙종37) 관산서원 사당터 조사에서는 온전히 확인된 매납시설을 통해 서원을 철폐하고 신주를 묻은 역사적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관산서원은 창녕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이자 영남5현(嶺南五賢, 김굉필ㆍ 정여창ㆍ이언적ㆍ이황ㆍ정구)의 한 분으로 숭앙(崇仰)된 영의정(추증) 문목공 (文穆公) 정구(鄭逑, 1543~1620년)를 기려 그가 사망하자 세운(1620년, 광해군12) 서원이다.
정구가 임지로 첫 부임한 창녕현감(1580~1581년)시절 관산재(冠山齋)를 비롯한 8개의 서당인 8서재(八書齋)를 세우는 등의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서고, 사망 당해에 바로 관산재 아래에 세워진 서원이어서 더욱 그 의의가 높은 곳이다.
이러한 서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견된 매주(埋主)시설은, 철폐시킨 사당터 자리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속에 신주, 곧 정구의 위패를 봉안하고는 그 둘레에 사당에 얹은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겹겹이 둘러싼 기와 사이에는 습기제거나 벽사용으로 보이는 숯덩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옹기 속에는 옻칠이 된 목제 위패 1점이 모셔져 있음이 비디오 내시경(Video-scope)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관계자는 "이번 창녕 관산서원 터에서 발견된 매주시설과 형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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