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 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외워서
인생의 재난을 극복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눈을 밝히고 죽을 경계에 있던 사람이
죽음을 초월하였습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껌팔이를 하던 조만용 학생은 처음 껌팔이를
할 때는 '오늘은 얼마나 파나, 누구 앞에 가서 이것을 내놓고 사라고하나'
'이걸 팔면 본전은 얼마이고 이익은 얼마다. 본전은 어떻게하고 이익은 어디다
쓴다.'하여 가나오나 오직 번민뿐이었는데 이 주문을 알고나서부터는
좋아도 '옴마니반메훔' 나빠도 '옴마니반메훔' 이득이 있어도 '옴마니반메훔'
이득이 없어도 '옴마니반메훔' 이렇게하고 다니다보니까 나중에는
희.로.애.락. 호.오.염.정 모든 것이 오직 이 '옴마니반메훔'으로 집약되어
마음에 평정을 얻게되었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는 신사에게 껌 한 통을 내밀면서 "옴마니반메훔'하니 그 신사가
쳐다보면서 "옴마니반메훔'하면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는 외국에서
온 손님으로서 그 회사 사장님의 친구인지라 사장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곧 사장님은
기특하게 생각하여 조만용 학생을 불러서 사환으로 고용했고 그 학생은 그로부터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은 그 회사의 이사이자 중역으로 일하고있으며 많은 고아와
외로운 노인들의 부모와 자식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62.
서울 동작구에 살고 있는 김간난 부인은 일찍이 외독자 하나만을 두고 살았는데
1.4 후퇴때 피난가다가 그 자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너무 슬픔에 젖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눈이 어두워졌는데 진각종 모법사님의
소개로 불교에 입문한 뒤에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부채를 부치면서 눈을 떠보라하셔서 떴더니
그만 천지가 훤히 비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희한하여 꿈속에서도 합장하고
깨어나서보니 정말로 예전처럼 세상이 훤히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61~62 출처: 한정섭저 천수경강의
......................................................................................................
63.
63-1
잠을 쫓고 불망지를 이룬 수월스님
근세의 고승중 수월(水月, 1855~1928)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대선사(鏡虛大禪師)의 가장 큰 법제자인
수월스님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
나이 서른에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性圓) 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供養主)등의 소임을 3년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기도승)이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송(頌)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 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42글자의
천수대비주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천수대비주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땅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비주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를 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 璲?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수대비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마침내
7일째 되는 날,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이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
63-2
도를 닦는다는 것은 .....(수월스님 말씀)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 반메훔'을 혀서라도
마음을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할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겨.
옛 세상에는 참선을 혀서 깨친 도인네가 많았는디, 요즘에는
참 드물어.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을 말할 것인게 잘 들어 봐.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혔으면 누가 와서 화두 참선법
(話頭參禪法)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가르쳐 주들 않았어.
꼭 도를 통한 스님만이 가르쳐 주었는디, ! 이 도통한 스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여.
"저 사람이 지난 생에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 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도를 통했으니께 환히 다 아실 거 아니여. 혀서 "옳다.
이 화두였구나" 하고 바로 찾아 주시거든.
그러니 이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 생부터 지가 공부하던 화두니께
잘 안하고 배길수가 있남.
요즘은 다 글렀어. 또 말세고 말이야!
모두가 이름과 위치에 얽매이다 보니, 누가 와서 화두를 물을 짝이면
아무렇게나 일러 주고 만단 말이지. 안 일러 주면 자신의 이름과
자리 값이 떨어지니께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아홉번 받았느니, 여덟번 받았느니 하는디,
이래 가지고서야 워찌게 도통을 한다고 할것인겨!
지가 꼭 공부하던 화두를 일러 주니께 틀림없이 공부를 이루고 바로
도를 통하는겨.자신 만만하니께 도통하는겨.
옛날 사람들은 화두 공부가 잘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바꾸지 않고
'나는 열심이 모자라니께 열심히만 정진하면 꼭 성취할 것이다.'는
! 한생각으로 마음을 몰아 붙여 오로지 한길로만 애쓰다가 도를
통하기도 혔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게 아니여. 쓰잘데기 없는 몸과 마음에
끄달려, 조금 하다가 안 되면 그만 팽개치고 "소용 없다"고 하거든.
이게 다 아상(我相)이 많아서 그런겨.
무엇이든지 한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디, 이것이 꼭 밥
먹기와 매한가지여.똑같은 밥 반찬이라도 어떤 사람은 배불리 맛있게
먹지만 어떤 사람은 먹기 싫고 또 어거지로 먹으면 배탈이
나는 뱁이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여. 염불을 열심히 혀야 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겨. 중이 되려면 처자권속을 죄다 버려야 혀. 모두 다
버리고 뛰쳐나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열심으로 닦아야 혀.
아버질 생각한다든지 어머닐 생각한다든지 가족을 생각할 것 같으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가 않거든. 무슨 공부든지 일념으로 해야 혀
위찌케든 일념을 이뤄야 되지, 이 일념이 안 되면 이것 저것 다
쓸데없는겨.
그래서 옛날 도통한 도인네들은 부모 형제 모두 내버리고 중이 되어
홀로 공부했던 거여.!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위하면 효도라도 되는데,
이런 효도도 못하고 집을 나와서는 도도 깨치지 못하니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거 아녀.두 집안에 죄짓지 말고 "워쩌튼 죽어라 혀 보자"
해서 부모 형제 모다 버리고 이렇게 산단 말이지
"한 집안에 천자가 네 명 나는 것보다도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게 낫다." 이런 말을 옛날부터 많이 들었지.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이 공덕으로 조상의 모든 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離苦得樂)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이 세상이라는게 중이 되면, 머리가 있고 없고 글이 있고 없고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여.차라리 그런 것들은 없는게 훨씬 나아.
참으로 살람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 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워디 있을겨.사람 몸 받고도 성불 못하면
이보다 더 큰 한이 워디 있을겨.
부처님께서도 "나? ?너를 못 건져 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그러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 봐라.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 봐라.다 쓸데 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수월스님은 일생동안 한번도 법상에 오른 일이 없다. 여기 실은
수월스님 말씀은 스님께서 얼마동안 머물다 열반에 든, 중국 북간도에
있던 화엄사에서 몸을 다쳐 며칠 머물게 된 어느 독립군 연설단원에게
들려 준 법문이다.
[달을듣는 강물]/ 김진태 지음/ 도서출판 해냄 中
..............................................................................................................
64.
관세음보살 42수주 중 보검수 진언의 영험
예전 어느 여자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꿈에 형체가 일정하지않은 검은 남자가 나타나 매일 괴롭혀 미칠 지경이라고 한다.
무작정 자신의 꿈 이야기와 무속인인 어머니와의 다툼, 불화도 호소한다.
우연히 BTN쇼핑몰을 보다 관세음보살 42수주 보검수진언 목걸이에 단박에 마음이 꽂혔다고 한다.
인터넷 주문하시고 며칠 후 그 보살님에게 전화가 왔다.
"보검수 진언 목걸이를 몸에 지니고 보검수 진언을 외우면서 잤어요.
그리고, 다시 커튼 뒤 그 귀신같은 남자가 나타나 저를 해하려고 했는데
그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을 든 남자가 무찔러 주었어요."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실제의 이야기다.
관세음보살 사십이수주 觀世音菩薩 四十二手呪 중
[보검수진언寶劍手眞言]
귀신과 도깨비를 항복받으려면 이 진언을 외우라.
옴 데세대야 도미니 도데 사다야 훔 바탁
옴 데세대야 도미니 도데 사다야 훔 바탁
옴 데세대야 도미니 도데 사다야 훔 바탁
출처: 파파라챠 블로그 blog.naver.com/borim1533
65. 관세음보살 42수주 중 보발수진언의 영험
담석증 치유기와 보발수 진언 체험담입니다.
작성 시간차가 꽤 있는 두 편의 짧은 체험담을 같이 옮겨놓은 것입니다.
보발수진언의 체험담은 2에 나옵니다. 단지 담석증이나 결석 뿐 아니라 각종 위병, 십이지장 기타 속병이 있는 분은 의학적인 치료와 더불어 관세음보살 염불과 같이 보발수진언을 정성스럽게 꾸준히 쉼없이 외우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
1.
담석증은 간단히 말하자면 인체내 간이나 쓸개또는 담도에 돌이 생겨서 증상이 나타날 때는 담석이
생긴 부위와 그 주변이 몹시 아픈 병입니다.
제게 3여년전 쯤부터 담석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과식하거나 기름진 음식 많이 먹거나 술을 조금 많이 먹으면
가끔씩 쓸개쪽 가슴이 몹시 아프고 결리며 일어서나 앉으나 누우나 그 통증이
가시지 않고 한 번 아프면 보통 반나절 정도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속도 안좋고 구토도 나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체한 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담석으로 아팠던 분들 경험을 들어보면 안 아플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많이 아플 때는 방바닥에 구를 정도로 아프고 여자분들이 출산할 때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을만큼
고통스럽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는 그 정도까지는 가지않았지만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증상이 나와서 아플 때면 누워서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밤늦게나 새벽에 갑자기 아프면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응급실에도 두 번 갔었습니다. 가서 주사를 맞고 진통제와 처방약을 먹고난 후 몇 시간 후면 좀 나아졌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것이 7개월쯤 전이었는데
그 때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쓸개에 2센티미터 가까운 큰 돌이 두 개 있고
작은 돌도 몇 개 있으며 담석으로 인하여 쓸개도 부어있다고 의사선생님이 이야기하셨고
아픈 원인은 그 담석들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6개월정도 주기로 한 번씩 아프더니 일년 전쯤부터는 2~3주 정도 주기로
아프고 평소에도 그다지 속이 편하지않은 것 같아서 위기감을 느끼고 초음파를 다시
찍어보았더니 큰 담석 2개에다 작은 담석 여러개가 있고 당시 쓸개가 부어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 해결방법을 알아보고 의사 선생님이 양방으로 진통제와 약을 처방해주셔서
먹어보니 일시적 효과밖에 없었고 그 약 먹어서는 장기적인 차도도 거의 없고 담석을 작게하거나 배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루사 먹으면 간기능을 좋게하고 돌이 작아질 수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먹어봤는데 과연 그런가싶고 큰 효능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의 큰형님이 대학병원 근무하시는 전문의이고 의학박사이시기에 여쭤봤더니 저와 같은 경우에 쓸개 조직은 너무 연하기때문에 레이저 담석 파쇄나 기타 방법은 어렵고 쓸개를 잘라내는 수술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복강경 수술로 간단히 할 수 있고 쓸개는 간에서 흘러내리는 소화액인 쓸개즙을 보관하고 있다가 지방을 소화하고 분해할 때 내뿜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서 쓸개가 없으면 간에서 소화액이 막바로 흘러나오고 큰 이상이 없으니까 더 악화되어서 복막염이 되거나 담낭암이 되거나 기타 많이 힘들어지기 전에 빨리 수술을 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큰형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니 쓸개는 오장육부의 하나로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양의학에서는 대단치않은 듯 이야기하지만 쓸개가 없어지면 차후에도 오장육부 및 신체의 조화와 기능이 깨어져서 중병으로 이어질 수 있지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외과 수술적 방법말고 한의학쪽으로 방법이 없을까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부산의 한 한의원에서 청간해독탕이라고 해서 간을 맑게하고 기능을 좋게하며 쓸개에 있는 담석도 녹여서 배출시킬수 있다는 약제가 있다고 해서 몇 십만원을 주고 60포를 한달간 매일 먹어보았는데 먹을 때는 안 아팠는데 다 먹고 시간이 지나니 또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안되겠다싶고 이제는 증상도 자주 나타나고 쓸개도 부어있다하고해서 어쩔 수 없이 수술해야하나 싶다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약초에 희망을 걸어보고 약초도 효능이 없으면 수술할 수 밖에 없지않나싶어 이곳 저곳 검색하고 다음 ㅅㅇㅅ 약초 카페에 들어와서 자문도 구하고하다가 참가시나무가 담석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가시나무잎과 가지 말린 것을 인터넷약재상에서 구입해서 건대추도 조금 넣고 냄비에 넣고 끓여서 너무 진하지않고 숭늉보다는 많이 진한 정도로 적당히 진하게 만들어서 보온병에 넣어서 뜨거운 차를 수시로 마셨습니다.
참가시나무 달인 물을 좀 마셔보니 증상이 나아지는 듯하는데 또 가끔씩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나해서 알아보니 참가시나무와 금전초를 같이 넣어서 끓여 먹으면 더 좋다고해서 그렇게하기로 하고 마셔보니 느낌이 더 낫고 효과도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6개월이상 매일 참가시나무와 금전초에다 대추를 조금 넣고 달인 물을 꾸준히 마셔왔습니다.
그랬더니 가끔씩 아프던 증상도 모두 사라지고 증상이 아주 드물게 나타나긴 했지만 이제는 90%이상 나은 느낌입니다.
당시 의사선생님에게 여쭈었을 때 초음파 검사비만도 10만원이 넘는 금액이라 조금만 더 있어보고 언제 시간을 내어서 초음파 검사로 확인해보려고하는데 아무튼 아팠을 때를 생각하면 참가시나무와 금전초 달인 물이 저를 살린 셈입니다.
그 전까지는 약초에 대해서 그다지 대단치않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경험해보니 약초에 신비한 무엇이 있고 양방으로 잘 고칠 수 없는 것도 잘 고칠 수 있구나해서 요즘은 토종약초 전문가 최진규 선생님책 약이 되는 우리 풀, 나무, 꽃 이란 책도 사서 읽어보고 기타 이것 저것 알아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유명 인터넷 한약재상에서 수십 년간 영업하신 어떤 분은 참가시나무, 금전초에다 계내금, 해금사, 까마중, 차전초 기타 몇 가지 약초를 더 섞어서 장복하면 낫는다고 하시는데 참가시나무와 금전초 두 가지만 계속 마셔왔고 상태가 호전되어왔기때문에 그대로 마셔도 좋을 듯하고 더 첨가해서는 어찌될지 경험해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어서 그렇게 복용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오랜 경험이 있는 분 말씀이라 그 처방대로 하셔도 좋은 결과가 있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참고: 네이버 김건일 시인의 블로그).
그래서, 담석, 결석으로 고생하는 많은 분들이 참가시나무와 금전초를 달인 물을 꾸준히 장복하시고 병고에서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요즘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담석과 결석이 생기는데 수의과에서도 참가시나무, 금전초 달인 물을 동물에게 오랫동안 마시게하면 담석과 결석이 녹고 배출되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평소 또 잇몸이 그다지 좋지않아 피가 자주 나고 아프고해서 찾아보고 약초에 대해 잘 아는 분께 여쭤보았더니 소루쟁이가 잇몸에 좋고 또한 무좀에도 좋다고해서 소루쟁이를 분말로 만들어 파는 것을 구입해서 매번 이를 닦고 입에 머물고 있다가 뱉고 있고, 무좀도 오래되었는데 무좀에는 식초에 소루쟁이 가루를 개어서 발에 바르면 특효라고해서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 아주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분은 20년이상 된 무좀이 몇 주만에 완치되고 재발이 없다고 하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양의학이 물론 뛰어난 점이 많지만 당뇨병, 고혈압, 중풍, 아토피 기타 양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
많습니다. 이러한 병도 약초전문가나 정통한 한의사의 처방을 받고 체질에 맞게 꾸준히 약초물을 장복하면 완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많은 완치 사례가 있습니다. 약초에 대해 편견을 갖지말고 한 번 관심을 가지고 바른 처방을 받고 바른 약초를 복용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도움이 되셨으면합니다.
....................................................................................................................
2.
6개월쯤 전에 담석증과 관련하여 담낭 초음파 검사를 받아 보았는데 담석 2개 1.8cm정도 되던 큰 것이 1cm정도크기로 작아졌고 아주 작은 것이 아직 몇 개 남아있다고 하였습니다.
내심 모두 없기를 바랐지만 금방 모두 다 녹아없어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래도 수술하지않아도되고 별 자각증상은 없으나 전혀 걱정할 필요없을 때까지 꾸준히 참가시나무+금전초+ 대추액을 계속 마시려고 하였습니다.
담석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은 이 약초액외에 과식하지 않아야하고 인스턴트 음식, 고기를 포함한 기름진 음식, 술, 탄산음료, 커피를 줄이고 운동을 꾸준히하여야한다고 합니다. 요는 약초액을 꾸준히 계속 마시고 식생활및 생활관리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런데, 1년 6개월이상 계속 약초액을 마셨더니 이제 어지간히 지겹기도하고 약초액에 대해 가끔씩 싫어지고 거부감이 들기도하는 것이었고, 마시는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담낭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여서 다시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담석증에 대하여 담낭을 잘라내는 것밖에 치료방법이 없는데 그 수술을 받기는 싫고해서 저으기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불교관련하여 해인사 강원 어느 강주스님이 법문하신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관세음보살 42수주-천수천안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에서 관세음보살께서 중생들의 갖가지 필요에 응하기위해서 42가지 경우의 성취를 위해 각 한가지씩의 주문을 설하신 것-중 보발수진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보발수진언은 관세음보살께서 모든 속병을 앓고있는 이를 위해서 설하신 것으로서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입니다.
그 해인사 강주스님 말씀에 도반스님이 계셨는데 어려서부터 속병이 있어서 고생이 무척 심하셨다고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관세음보살 42수주중 보발수진언을 발견하고 이거다 싶어서 생각날 때마다 내내외우고 다니셨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새 고통이 모두 없어지고 언제 속병으로 고생했나싶게 완쾌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외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 108배후 관음경 읽고 관세음보살염불하는 기도를 하고있었는데 관세음염불후 보발수진언 108번을 외우고 평소에도 수시로 외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를 마치고 자는데 비몽사몽간에 침대옆으로 산신령같은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약을 주시는 것이었고 그 약을 먹었습니다. 아마 그 분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기하게도 그 경험이후에는 다시 담석증으로 아픈 증상이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결론은 참가시나무 +금전초액을 꾸준히 드시고 생활수칙을 지키시고 불자이시거나 다른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그와 동시에 관세음보살 42수주중 보발수진언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을 속병 치유발원을 하시고 많이 쉼없이 주로 소리내어서 외우시면 좋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십이수주 四十二手呪 중
[보발수진언寶鉢手眞言]
뱃 속의 모든 병고를 없애고자하면 이 진언을 외우라.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
출처: 네이버 상방대광명 블로그 blog.naver.com/lawandme
......................................................................................................
66.
◈돌풍 속에서 맞이한 관음보살의 가피력◈제가 배를 20년 이상 탔어도 풍파를 심하게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동지나해를 비롯하여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해역을 전전하며 어로작업을 하면서 몇번의 폭풍우와 풍랑을 당해보았으나 그때마다 100톤급의 배여서 다소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90년 8월 14일 오후 3시경 동경 33°43′30″ 서경 126°45′50″ 해상에서 갑작스레 맞이한 돌풍은 마치 태풍과도 같아 우리 쌍용선단은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단 구성은 30톤 미만이 3척, 90톤이 2척이었습니다. 선단 중 한 척은 침수되어 한쪽으로 기울며 배가 넘어가기 시작하여 선원들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제가 타고 있던 31쌍용호도 선상으로 바닷물이 얼마나 올라오는지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의 참 불제자가 되길 맹세합니다. 쌍용선단과 선원 44명 모두 무사하게 하여주십시요’ 하고 계속 관음정진을 하였습니다. 산더미같은 파도가 정말 삽시간에 성난 맹수처럼 우리들을 집어삼킬듯 요동쳤습니다. 기관실까지 물이 들어와 배는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기관실에서는 물퍼내는 기계(동키)를 계속 돌려 물을 퍼내면서 항해를 했습니다. 선장은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선원들은 모두가 ‘풍파가 너무나 심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각자 침실에서 나와 선상 위 높은 곳이란 높은 곳은 다 찾아 저마다 올라갔습니다. ‘악마같은 저 폭풍우가 언제나 멎을까.’ 금방이라도 삼킬듯이 날뛰는 성난 맹수같은 파도를 정신없이 바라보며 비를 홀딱 맞고 앉아 있는 것이 비오는 날 전신주에 제비가 비를 맞고 앉아 뭐라고 재잘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원들도 비를 홀딱 맞으며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은 모두 꼭 잡고 앉아 풍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 있었습니다. 악마같은 파도, 배를 타보지 않고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악마같은 풍파. 그 순간 모두가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가정,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하고 생각했겠지요. 이번에 무사히 육지에 도착하면 다시는 배를 탈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벼르며 ‘직업을 바꾸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천번, 만번 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순간만은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악마같은 파도, 말로써나 글로써는 그 고통받던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조타실에서 그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계속 관음정진을 하며 ‘우리 쌍용선단이 무사히 육지에 도달하게 하여주십시요’하고 기원했습니다. 또 ‘부처님, 부처님의 참다운 불제자가 되겠습니다. 우리 선원들이 무사하게만 하여주십시요’ 하고 기도하며 입에 침이 마르고 목이 메이도록 계속 관음정진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 시간,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풍랑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육지에 다가갈 수 있었고 그러자 파도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가까스로 육지에 도달하는가’ 생각하니 관세음보살님의 고마움은 어머님의 따뜻한 마음에나 비할까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배를 타고 20년 이상 책임자로 다녔지만, 그렇게 험난한 풍파를 만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였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습니다. 육지에 다달아 선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로장으로서도 아니고 책임자로서도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정말 얼마나 기쁜지 저는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저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심한 풍랑을 만났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풍랑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가슴 속에 되새겨보았습니다.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우리 모두는 육지 가까이 인도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관세음보살님의 고마움에 감동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없었더라면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고기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지 가까이 와서 닻을 내리고 모두 환희의 기쁨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습니다. 악몽같았던 그 순간을 잊어버린듯 선원들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파도에 휩쓸린 어구들을 손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젖었던 손을 문지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바라보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그 얼마나 큰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잔한 바다는 관세음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는 것같이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대자대비하옵신 관세음보살님 가피의 고마움을 천번, 만번 되새기며 다시는 그런 악몽같은 풍랑을 만나지 않기를 관세음보살님께 계속 빌며 정진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님, 정말 감사합니다.’ 신상용(부산 삼광사 신도)
67. 다음 방생카페(cafe.daum.net/bangseng) 돌아오는 길님의 관세음보살 친견기
돌아오는 길 님 체험기
말을 하지 않으려다가...바로 당신같은 분을 위해서 이 말을 합니다.
참으로 오랜 침묵을 깨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창작불보살설을 말하는 당신은 당신이 하는 행동이 정확히 어떤 행동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흔치 않은 일이니 제 말을 잘 귀담아 주세요
안녕하세요.
얼마나 이 글을 쓸지 말지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이라고 할까봐서요..
하지만 저는 직접 겪은 일이니 안 쓸 수가 없고
또 저의 이 미천한 글이나마
관세음보살님께서 우리 중생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계시는지를 여러분께 억만분지 일이나 밝힘으로써
우리 불자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계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의 빛을
느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1964년도 생 여자로서 집안은 무교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상시는 제사를 지내다가 (유교) 가끔 점집에 가는(샤마니즘) 엄마밑에서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그당시는 대부분 그렇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1970년대 초반)
저는 부처님의 이름도 듣지 못했고 보살이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숙세의 인연으로 어릴 적부터 홀로 앉아서 참선을 하면서 (그게 참선인지도 몰랐지만) 지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홀로 참선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생기는데 물어볼데가 없었습니다.
학교 선생님께 여쭈었지만 대답을 못들었습니다. 엉뚱한 질문한다고 혼만 났지요. 그래도 존경하는 선생님께 계속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결국 나도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온 동네를 다 뒤지면서 물어볼데를 찾았습니다.
시장에 가보니 죄 먹을 식당, 입을 옷가게, 뺑끼가게 (페인트가게) 문방구점이고 먹거나 입거나 팔거나 하지않는 곳은
교회와 무당집 뿐이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물어봤는데 목사님은 집에나 가라고 대답을 안해주셨어요. 질문도 이해를 못하시더라구요.
다른 교회에 몇군데 갔었는데 어린애가 묻는 말이라 비슷했습니다.
무당집은 가봤는데 울긋불긋한 사람들 그림이며 누런 불상이 있더군요.
그런데 상위엔 돼지 머리에 ,춤추다가 칼꽂고 칼 던지고 굿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거기는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생명을 죽이고 그 머리를 올려놓고 하는 곳이라면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더는 물어볼 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늘에 대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동네는 다 돌아 보았는데 더는 물어볼데가 없으니 저를 인도해달라고요.
그리고 그 다음날에 집을 떠나서 ,동네를 처음으로 떠나서, 멀리 떠난다는 것이 초등학교1학년짜리니까
길을 외울만큼 걸어서 갔다가 집에 돌아오고 돌아오고 해서 5일째만에 관음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 갔더니 무당집에서 보던 누런 불상이 있고 울긋불긋하진 않았지만 침착하게 색칠해 놓은 집이 나왔습니다.
거기도 아무 것도 팔진 않았어요. 그냥 이쁜 색칠한 집과 누런 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이 아주 마음에 들었읍니다. 집보다 더 마음이 편해서 그 뒤로는 주말이면 밥만 먹으면 그 곳으로 와서 지냈습니다.
어린애라 그런지 그렇게 만 삼년을 다녔건마는 스님도 아무도 나한테 물어보거나 신경써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당시는 법회도 없었고 그저 법당가서 절하고 가는 사람(주로 할머니)뿐이었습니다.
우두커니 법당가서 누런 동상(불상)의 아저씨 얼굴 보고 수염 한 번 보고 근처 산에서 놀다가 참선하다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초등3년말) 저의 그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관음사가 처음 가본 무당집과 비슷하게 생겨서 계속 물어보길 미루었었거든요.
왜냐하면 잡신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만 삼년동안 관음사에 다니면서 돼지머리를 자른다던가 굿을 한다던가 하는 것은 한번도 못봤거든요.
항상 청정한 향을 피우고 꽃이 있고 초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법당에 가서 불상을 보면서 저 누런 상(불상)은 하나의 상징일 것이다. 분명 저 누런 상은 무언가를 대신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 저 누런 상이 듣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저는 거기 빳빳이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음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
저는 여태 물어볼 데를 찾았는데 다 뒤져도 물어볼 데를 못찾았습니다.
여기가 그래도 가장 믿을만 하고 물어볼 만하다고 생각되어 여쭈어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정말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절을 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무당집에서 본 잡신인지도 만에 하나 혹시 모르니까요...
제가 예절을 지키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잡신에게 절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저는 돈이 없어서 바칠 것이 없습니다.
저기 이 방 밖에 돌틈에 작은 들꽃이 피어있습니다. 잘라서 바치는 것보다 저 상태로 바치겠습니다.
저 꽃이 잘리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을 당신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물어볼 것을 죽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것을 세번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꼭 대답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간절함은 저에게는 뼈가 녹는 듯했습니다.
그리고는 맨 끝에 협박을 햇습니다. 꼭 대답을 해달라고.. (저 참 얼굴 두껍고 나쁘죠)
대답도 안하고 벙어리로 그냥 있을거면 당신은 왜 이렇게 색칠한 이쁜 집에서 사느냐고
사람들이 여기 와서 돈도 쌀도 놓고 가느냐고 당신도 뭔가 불쌍한 사람을 도우니까 이렇게 대접을 받을 것 아니냐고
그러니까 꼭 저의 질문에 대답을 해달라고...
안그럼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있다면 당신은 사기꾼이니까 저기 있는 향로 엎어놓겠다고..(잡신일까봐 무척 경계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례하게 향로를 엎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잡신이 이 말을 듣고 장난칠까봐 경고를 주는 것이니 이해하시라고 저의 이 질문에 대답을 달라고
하면서 똑같은 말을 세번 마음속으로 반복하면서 기도를 마치고 법당밖을 나왓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왔지만 평범한 날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 그 대답이 올 것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미리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질문만 올렸습니다.
그렇게 몇달여가 훌쩍 지났습니다.
나는 사학년이 되었고 초 봄이었습니다.4월말.
엄마는 집밖으로 외출하시고 혼자 대문밖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저를 부르셨습니다.
키는 중간키이고 울엄마랑 비슷한 삼십대 중반의 외모였습니다.
블라우스에 조끼를 입고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폭넓은 하얀 주름치마 밑으로 단정한 카라양말에 짙은갈색 구두를 신으신
옷을 매우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 입으신 모습이 마치 학교선생님보다 더 선생님 같아보였습니다.
제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얘야 네가 0 0 이니? "
"네 맞아요. 어서 오세요. " 하면서 안방으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제 집앞의 하수도 수채구멍의 질척한 부분을 그냥 구두발로 밟고 대문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는 대부분 골목길이 포장이 안되서 질척질척한데 우리집 대문앞엔 하수도가 있어서 일년 내내 질척질척 했습니다.
하필 가장 질척질척한 부분을 발로 밟은 것입니다. 나보다 어린 애들도 안밟는데 저렇게 잘 차려입은 아줌마가 조심성도 없이 그걸 밟다니..
하는데 마치 언땅을 밟은 것처럼 신발에 조금도 흙이나 먼지가 안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리가. 하면서 나는 그 아줌마의 발자국이 난 부분을 고대로 내 발로 밟았습니다.
그랬더니 내 운동화는 완전 하수구 슬러지천지가 되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그런 나를 보고 살짝 웃으시는 것이엇습니다.
흙을 한창 떨어내고 대문안으로 들어가서 "아줌마는 누구세요? 우리 엄마 친구분이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니 난 네 엄마 친구는 아니야. " 그런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엄마 친구인줄 알고 안방으로 모시려던 나는 마루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세요 하고 다시 물으니 내가 누구 같니? 라고 되물으시는데
모르겠는데요 하였습니다.
"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있을때 가르쳐 주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그때 내 머리속에는 " 아...점쟁이구나" 하였습니다.
그당시 집을 다니면서 그렇게 알려주는 점쟁이들이 집을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쟁이시군요 하였습니다. 저렇게 우아한 아줌마가 학교선생님보다 더 선생님같은데 어찌 점쟁이일까 싶어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마음은 뜨내기점쟁이(점집도 없이 돌아다니는 초보점쟁이)를 믿지 않았으므로 마루에도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겨우내 먼지를 둘러쓰고 있던 평상에 모시기로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평상을 치웠습니다. 먼지가 탱탱 쓴 평상에 있는 물건을 치우고 걸레를 빠는데
그 평상위에 그 완전 하얀 새 주름치마를 입은 아줌마가 또 조심성없이 덜컥 하고 앉는 것이었습니다.
아줌마 일어나세요 먼지 많아요. 닦기도 전에 앉으시면 어떻게 해요. 하면서 일어나라고 하니
나는 괜찮다고 하는겁니다. 아줌마 옷 다버렸다고 하면서 일어나는데 세상에 옷에 먼지가 하나도 안묻었어요.
하도 이상해서 아줌마 이 치마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줌마 신발은 초칠을 했느냐고 왜 흙이랑 먼지가 안묻고
아줌마 치마는 왜 먼지가 안묻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당시 학교교실바닥(나무로 됨)에 초칠을 하면서 청소를 하던 시절이거든요.)
아줌마는 신발에 초칠은 안했다고 하시는데 정말 신발에 초칠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평상을 물걸레로 닦고 나서 아줌마를 앉게 하였습니다.
아줌마께 엄마는 출타중이시니 한두시간 있어야 오실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물드릴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그러라 하셔서 우물가에서 누런 양은 주전자에 물을 떠서 드렸는데 잡수시진 않았습니다.
아줌마는 저보고 이것 저것 묻지도 않는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는 앞으로 이런 저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는데 마치 과거를 이야기하듯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어요.
정말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때 엄마가 오셨습니다. 엄마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점쟁이 아줌마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줌마는
점쟁이인데 뭐든지 물어보세요. 하지만 돈은 한푼도 받지 않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엄마가 몇가지를 물어보시는데 말끝마다 귀신이네 귀신이네 쪽집게네를 연발하면서 감탄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끝에 저는 어른들이 이야기 하시니 어린애가 낄 자리가 아니라서 방안에 들어가 공부하려고 했더니
그 아줌마는 내 팔을 딱 잡더니 몇발자국 걸어가서 엄마 못듣는 자리에서 나는 너때문에 이 집에 온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으니 방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줌마는 엄마한테 이 딸은 절에 가서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절에 데려다 주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큰 스님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주 큰 스님은 아니고 약간 큰 스님이라고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
엄마는 중이 되라는 말을 들으시더니 그 왜 막대기 뚜들기면서 쌀얻으러 다니는 거지가 중 아닌가?
내 딸이 거지가 되란 말인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점쟁이가 왔다니까 놀러온 옆집아줌마들도 맞아 중은 쌀얻으러 다니는 거지야 하였습니다. 결혼도 못해.하면서..나를 측은하게 보았습니다.
그당시 저는 한 반이 100여명이 되고 한 학년이 22반이나 되는 그런 학교에서 상장이란 상장은 다 타면서 거의 전교에서 놀던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
그 점쟁이 아줌마 혼자서 스님은 좋은 것이라고 알려주려 했지만 인원수에 밀려서 말이 씨가 안먹혔습니다.
동네 아줌마는 중이 뭐가 좋냐고 네 엄마가 맨날 자랑하던 딸이 고작 커서 중이 된다니 니네 엄마 어떻게 하냐고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중이 좋은 것 같진 않고 거지가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아줌마를 따라서 한 번은 절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줌마 내가 중이 될지 말지는 거기 절에 한 번 가보고 정하면 안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가보고 정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곳은 아주 먼 곳이었습니다. 버스타고 한시간 반이나 가야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 아줌마가 날 데려다 주고 우리 집에 도로 데려다 줄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줌마는 날 데려다 주겠지만 그 절 앞에서는 혼자가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니 왜요? 같이 가면 같이 가지 왜. 아줌마는 거기까지 갔다가 딴데 가고 ,나혼자 산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집엔 어떻게 오냐고 물었더니 걱정을 말라고 스님들이 다 나를 버스태우고 데려다 준다는 것입니다.
부득불 아줌마는 그 절문앞에까지만 날 데려 가고 바빠서 들어가진 못하고 딴데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만 말하고 그 아줌마가 데려다 줬다고 하면 스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너를 너네집까지 잘 데려다 줄거라는 겁니다. 그럴리가 있을까????
나는 어린애였고 오늘 처음 본 그 아줌마만 믿고 가다가 아줌마 가버리고, 산중에 나 혼자 남으면 집으로 오는 버스도 모르고 돈도 없고..길도 모르고 ..
1970년대 초반이라 ...완전 길 잃은 고아가 되는 것이엇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안간다고 했습니다. 산속에서 비 다 맞고 아무 것도 없는데서 며칠 버티다 아무도 없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요.
그랬더니 그 아줌마는 나를 보고 절에 테레비도 있다고 걱정 안해도 된다고 했지만 ...이미 나는 그 아줌마를 따라 산에 가는 걸 포기했습니다.
엄마보고 엄마 나 절대 저 아줌마 따라가게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면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 이름을 말하겠다고 하세요.
아무도 묻지도 않았는데요.
내 이름은 아바로키테슈바라다 합니다.
그래서 뭐요? 하고 물었더니 내 이름은 아바로키 테슈바라다.
다시 물었더니 다시 내 이름은 아바로키 테슈바라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아줌마. 아줌마 머리는 검고 눈이며 코며 영락없는 한국사람인데 왜 이름은 미국이름이에요?
아줌마 미국사람이에요? 한국말도 잘하는데...한국이름은 없어요? "하였습니다.
한국이름도 있다면서 내 이름은 관자재라 하기도 하고 관세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줄여서 관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아줌마 이름이 뭐가 그렇게 많아요? 관음?
성이 관씨고 이름이 음이네.
중학생이던 오빠에게 관씨가 있냐고 물었더니 관씨는 중국성이라고 친구들중에 드물지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관음..아줌마 나 관씨는 처음 들어봤지만 관음사는 아는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 말이 ,맞다고 내가 바로 그 관음사의 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정색을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아줌마 저 그 관음사 잘 알아요 . 자주 가요. 근데 관음사의 관음이 사람이름이었나요? 아줌마가 주인이군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절이 아줌마 이름을 붙인 것이라니...아줌마 그런데 그 관음사에서 어디 아줌마 방이 있나요?
다음번에 놀러가면 아줌마를 또 만나 보게요.
알려주면 찾아가겠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줌마는 말을 바꾸면서 자는 방은 없다고 했습니다.
아줌마가 그 절의 주인이면 자는 방이 있을 것 아니냐고..내가 되물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법당의 누런 상이 잇는 곳이 자기 방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잘 수 없잖아요 밤에는 어디서 자요? 하니까
밤에는 이 절뿐 아니라 다른 절도 많아서 다른 곳으로 다닌다고 했습니다.
밤에 거기서 자지는 않는다고요.
그럼 아줌마를 그 절에 가도 다음에 또보지는 못하겟네요. 하니까 다른 절도 다니니까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곳에서 또 그 아줌마가 의심이 갔습니다.
"그러니까 아줌마는 절의 큰 방에서 낮에 있다가 밤에는 다른 절에 가고 또 거기서도 다른 절로 가고 그런단 말이죠?"
내 생각에 통금이 있던 시절에 그 아줌마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었죠. 밤에 12시 넘으면 아무데도 못다니던 시절이거든요.
그저 관음사에 자기가 주인이지만 자는 방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이번에 나와 우리 엄마 오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른다고.. 내 이름을 못들어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엄마도 아무도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멍-한 얼굴로 한번도 못들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는 내가 그래도 꽤 쪼금 유명한 편인데 한번도 내 이름을 못들어보았느냐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쯧쯧하고 혀를 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그 아줌마를 비꼬았습니다.
아줌마가 가수냐고 탈렌트냐고 유명하게..테레비 나오냐고....
자기가 자기보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처음보았다고..하면서 비꼬았습니다.
그 아줌마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밝혔지만 우리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습니다.
엄마께 엄마 관세음보살이란 이름 들어봤냐고 내가 다시 물어봤습니다.
엄마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시더니
"처녀보살 선녀보살..이런건 들어봤거든...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이 점쟁이 이름이 맞다"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저는 한 편으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기껏 잡신피한다고 벼르고 별러서 택한 곳이 관음사였고
관음사에 기도했고 오늘 드디어 관음사에서 어떤 아줌마가 왔는데
결국 점쟁이였으니까. 관음사가 점쟁이가 사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된거죠. 풀이 죽었습니다.
그만큼 불교에 ㅂ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절 보고 내 평생에 관하여 말씀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평생일에 대해 죽을 때까지 일어날 일을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뭐든 물어보는 것마다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일을 과거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커서 결혼하면 반드시 이혼하고 딸을 하나 낳는데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늦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줌마가 정말 싫었습니다.
아줌마 나는 결혼하기 싫지만 만약 결혼한다면 이혼은 안할 것입니다.
이 동네에 이혼한 사람 하나도 없어요.
이혼은 인생 끝장인 사람이나 하는 것이어요
왜 저보고 그런 인생을 살라고 하시나요? 저 열살밖에 안먹었어요.
하였습니다.
아줌마는 앞으로 네가 어른이 되는 세상에는 이혼이 흔한 세상이 되고 흉이 되지 않으며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혼안한다고 막 우겼습니다.
왜 나보고 막간 인생 살라고 하느냐고 아줌마 나쁘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불쌍한 딸은 어쩌고 나혼자 공부하느냐고 하면서요.
그 아줌마는 그것은 세속법이다. 하셨습니다.
세속법이라는 말이 처음듣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세속법이라는 말에 세상과 다른 법이 있다는 뜻으로 가슴에 확 들어왔습니다.
세세생생 가족에 얽매여서 가족을 못벗어나며 수도 없는 먼지같은 수의 겁을 윤회하면서도 벗어날까하면
또다시 그 구렁에 또 빠진다고 하시는 겁니다.
너는 이다음에 아이를 둘 낙태하는데 그 죄로 지옥에 떨어진다.
또 지옥에 가요? 이번에 또 지옥에 갑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십니다.
(저는 전생에 지옥에 떨어져 고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고생을 하다가 나와서 윤회를 거듭한 후에
사람이 되어서 나오면 다시 또 지금 네 남편을 만나서 다시 살아야 한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
그러니 아이를 남편에게 주고 이혼한 다음에 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당부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결혼하고 애낳으며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이상태로 어떻게 진리에 도달합니까?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진리에 도달합니까?
그 답은 출가하는 것이 빠르고
출가하지 않고 닦는 것은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인과에 얽혀 불가능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1편에 이어서-----)
보통 사람의 경우에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다가 아이 키우고 결혼시키고 늙어 죽죠.
이렇게 사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진리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것이 그당시 제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발원했었습니다.
관음이라는 외자이름을 가진 아줌마는 절보고
결혼하면 서로 전생의 빚을 갚아야 하니 그 구렁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미처 다 갚기도 전에 또 새로운 업을 짓는 것으로 윤회가 끝날 날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을 했습니다.
그말이 진실이라면 진리를 알려는 사람은 출가를 해야 하고 애욕을 떠나 가정을 벗어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진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자코 있었더니 아줌마는 나보고 너 이전에 날 본 기억이 있지? 하고 물으십니다.
저는 아줌마 오늘 저희 집에 처음오신 것 아닌가요? 전에도 오셨었나요? 전 기억이 없네요. 했습니다.
아니 이 집에 오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전에 네가 날 본 적이 있는데...기억이 나지? 하십니다.
아니요. 저 아줌마 오늘 처음봐요.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번을 은근히 물어보셨지만 나는 기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줌마는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니가 이다음에 커서 산골에 조그만 땅을 하나 사는데 거기에 집을 지어서 나에게 바치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인데 그걸 꼭 바치려고 한다.
그걸 이루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 때 내 마음은 " 치, 점쟁이 아줌마한테는 절대로 아무 것도 안준다" 하고 있었습니다.
아줌마는 나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마치 내가 지금 그 일을 한 것처럼 막 야단을 치기도 하고
알려주기도 하면서 저를 설득하기도 하면서 참으로 진땀을 흘리며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게다가 나는 그 아줌마가 점쟁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막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점쟁이는 돼지 머리 잘라서 상차리고 칼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말을 징글징글하게 안듣자 아줌마가 드디어 나에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너 왜 내 말을 그다지도 안듣느냐고..
그렇다면 왜 관음사에서 불상앞에서 말 잘듣겠다고 시키는대로 듣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느냐고
니가 도와달라고 해서 말 잘듣겠다고 해서 왔노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던 ..식구들에게도 말 안하고 입밖에 내지도 않고
관음사의 불상앞에서 빳빳이 서서 기도를 간절히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안다니.....비록 관음사에서 왔지마는 이 사람은 사람이니까 내 기도를 당연히 모를거라 생각을 했습니다.그런데
나는 입밖에 내지도 않은 것을 알고 왔다니 이 사람은 겉은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기가 죽어서 그 아줌마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시는 말씀이 내가 미래에 한다는 일들이 완전히 지금의 내모습과 너무 달랐고 생각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미래는 완전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울면서 아줌마 빨리 가라고 아줌마를 못믿겠다고 했습니다.
미래를 더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살다보면 알겠지 .이제 그만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내 태도가 공손했다가 또 변하자 왜그런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줌마. 나는 관음사가 점쟁이 집인지 모르고 기도 했으니 미안하다고
다음엔 다시는 기도 안하겟다고 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점쟁이 아니라고...하면서 저를 만류하였습니다.
분명 다른 아줌마한테는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점쟁이라고 했는데...공짜라고 하면서..
아줌마는 다시 나를 설득했습니다.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열심히 나를 설득했습니다.
오전 10시쯤에 오셔서 점심도 굶고 컴컴해지려는 시간까지 나를 붙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아줌마한테 내 평생에 일어날 일에 대해 다 들었습니다.
너무나 고생바가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시더니 왜 네가 이런 생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그냥 나를 따라 산에 가자꾸나. 하십니다.
나는 싫다고 했습니다. 그 아줌마 말대로라면 산에 가서 거지가 되던가 아님 고생바가지 인생을 살던가 였습니다.
아줌마 빨리 우리집에서 나가라고 여기 우리집이라고 울면서 아줌마 말 안믿고 아줌마 가면 아줌마가 말한 것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 아줌마는 안가고 끝까지 남는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네가 반드시 집을 나와야 한다고..그 후론 늦는다고.. 반드시 이혼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 아줌마 등을 밀었습니다. 대문밖으로 쫒아내려구요
그러나 나는 어린애고 아줌마는 어른이라 나의 서슬에 밀려 대문앞까지 쫒기더니 대문바로 앞에서 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애의 힘으론 그 아줌마를 집밖으로 내쫒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 아줌마 손을 할퀴었습니다. 아줌마 손에서 피가 났습니다.
기저귀찬 아이한테도 맞고 다닐만큼 나는 지독한 순둥이였지만
내가 평생 아무도 돕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었을때 그 아줌마가 마구니로 보였습니다.
아 마구니가 내가 아무도 돕지 못하도록 기를 쪽 빼려고 왔구나..그 때저는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구니가 사람몸으로 왔으니 그것도 어른 몸으로 왔으니 대문밖으로 쫒아내야겠는데 힘이 없어서
할퀴었던 것입니다. 관음아줌마는 기가 막힌듯 왜 너를 돕는 사람을 할퀴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나는 피가 나면 안되는데 하면서..
하지만 나는 미안한 얼굴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줌마 가시라고 ..다 들었으니 가시라고 여러번 말씀 드렸고 미래 알고 싶지도 않고
더 알고 싶은 마음 없다고 했고, 살다보면 알아지겠지 말씀도 다 드렸는데 왜 안가시면서 악담만 계속 하시느냐고..
저도 오래 참았다고 오늘 하루 종일 악담만 들으면서 참을 만큼 참았고 더이상은 못참아서 가시라고 벌써 몇번 말씀드렸느냐고
그런데도 또 악담만하니 이제 더는 못참겠다고 했습니다. 나도 무서운 면이 있다고 날 어리다고 깔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줌마는 성냥꼴만하게 패여서 피묻고 찢어진 손등을 문지르면서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미래에 일어날 일을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가시라고 저는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안듣겠다고...
그 때 그 아줌마는 이제 앞으로 너의 기도는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앞으로 네가 커서 어른이 되어서 참회를 해도 네 기도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영원히요? 그렇다고 합니다. 다라니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을거라 하십니다.
그게 뭔데요? 하니 나중에 알게 된답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아줌마 말대로 행동해도 안들어줄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십니다.
네가 다른 보살님께 부탁을 해도 안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그 아줌마의 말을 듣고나니...아 이 아줌마는 마구니가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마구니는 자기 말만 들으라고 하지 안들어준다는 말은 안하니까요...
그 한 마디에 나는 이 아줌마가 날 도우러 오신 분이라는 신심이 들었습니다.
마구니가 아니라 날 도우러 오신 분이라고...
나는 그 때부터 아줌마 말씀을 꼬박꼬박 들었습니다.
해는 져서 컴컴해지려고 했습니다.
아줌마가 이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나는 아줌마 팔을 붙잡았습니다. 아줌마 진지 잡숫고 가셔요.
아줌마가 진짜든 아니든 아줌마 오늘 하루 너무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점심도 굶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저의 집에서 저녁을 드세요. 제가 엄마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때 부엌에서 생선국(동태찌개)끓이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 아줌마는
" 사바는 탁해서 먹을만한 것이 없다. 또 만약에 내가 밥을 먹을 것 같았으면 차라리 물을 한 방울이라도 먹었을 것이다. "
하시는데 그토록 비지땀을 흘리며 나를 가르치셨건만 되돌아 생각하니 정말 하루 종일 물 한방울도 안드셨습니다. 하루 종일 죽도록 고생한 아줌마한테 나는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정말 미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 아줌마랑 더 있고 싶었지만 더 붙들 명목도 없었습니다.
대문앞에서 저는 그 아줌마한테 다시 물었습니다.
아줌마 이제 아줌마를 보면 다시는 못보나요? 영원히요?
그렇다 하십니다.
저는 이제야 그 아줌마를 믿게 되었는데 아줌마는 가실 것입니다.
나는 그 아줌마한테 나를 데리고 절에 데려가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찼습니다.
하지만 벼룩도 낮짝이 있다고 ..그렇게 구박하고 때리고 발로 엉덩이 차고 손으로 할퀴어 피까지 낸 분한테
또 부탁할 면목이 없었습니다.
저는 안녕히 가시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대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줌마는 금방 대문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대문을 도로 열었습니다.
아줌마는 거기 서계셨습니다.
나는 다시 공손히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울음이 목까지 올랐습니다.
이제야 이 아줌마를 믿게 되었는데......
아줌마는 다시 대문을 닫고 다시는 열어보지 말라 하십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대문을 열었습니다. 아줌마가 가신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섯번이나 대문을 열면서 확인했습니다.
아줌마는 이제는 정말 안녕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대문을 열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아줌마께 다시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하고 대문을 닫았습니다.
바로 열지 않고 5초쯤 후에 대문을 열었습니다. 아줌마는 없었습니다.
겨우 5초 후에 열었는데 아줌마는 외길인 길목의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아줌마를 보내고 힘들고 긴 하루를 보내고 나는 그 날 있던 일을 다 까먹었습니다.
내가 사십세가 넘어서 인터넷이 생기고 인터넷을 하면서
저는 관세음보살님은 경전상에서 보는 분이고 그 아줌마는 점쟁이라고 생각을 했고 연결을 못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관세음보살영험기를 읽다가....
관세음보살님이 여자의 몸으로 또 특히 젊은 아줌마의 몸으로 다닌다는 점
흰옷을 즐겨 입으신다는 점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특히 그 말투....완전히 그 아줌마 말투였습니다.
나는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그날 일을 다 기억했습니다.
그 아줌마가 말했던 부분은 지금 까지 다 맞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고
아이도 둘이나 낙태하여 죽였습니다.
초기에 모르고 감기약을 먹었고
두번째는 병때문이었지만 낙태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분 말씀이 하나도 틀린 부분이 없었습니다.
나는 관세음보살님을 어릴 때 친견했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분께서 가실 때까지 누누히 말씀하시던 것을 다 기억했습니다.
나는 정말로 땅을 샀고 거기에 작은 선원을 지어 관음선원을 지으려고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릴 때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한 것도 다 까먹었습니다.
아 다 맞는구나.
선원을 지을 때 힘들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까지 다 맞았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그 때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있다가 내가 그 분을 때리고 욕하고 할퀴고 발로 찬 것까지 기억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가지 않고 끝까지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또 내가 앞으로 영원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잃어버린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박박우겨서 아줌마 말은 안들을테니까 빨리 가라고 막 조른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끝까지 저를 염려하여 가르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0살때 36년 후의 변한 세상과 제 인생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다 하나하나 짚어주시며
애욕을 끊고 가족과 애착을 끊고 공부에 매진하라고 하신 그 분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저는 이제야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인터넷을 보니
관세음보살님은 후기 경전에 있고 사람들이 창작한 허구의 창작보살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읍니다.
그런데 제가 입을 다물면 정말 관세음보살이 창작보살인지 아닌지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제가 이렇게 글을 씁니다.
사람들 중에 관세음보살님이 창작보살인지 아닌지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관세음보살님은 경전에 나온 그대로 32응신을 나투시며
직접 사바에 노니시면서 인연있는 중생들을 단 한중생도 남기지 않고 하나 하나 다 굽어살피시는 분이라는걸 압니다.
제가 이번 생에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서 여기 지구에 또 태어나면
관세음보살님이 창작보살이다 아니다가 지금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 이것이 커져서 세월이 갈수록
큰 파장을 일으킨다면 그 죄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 중생이라도 믿음을 잃게 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클 것입니까?
삼보를 비방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는 경전을 보십시요.
오무간죄에 해당합니다.
지옥에 가지 마십시요. 거기는 정말 1초도 가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불쌍한 중생들의 의지처는 불법승 삼보 뿐인데
그 단하나의 의지처를 훼방놓지 마십시요.
잘 알지 못하시면 묵언하시기를...
못믿겠으면 열심히 기도하십시요.
참회하시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요
가피가 왜 없겠습니까?
가피가 있을 때까지 참회하십시요.
수많은 불자들은 참회하고 정진하고 기도하면 정성만큼 가피를 얻습니다.
제가 제 전생을 기억하거나 ,전생에 지옥에 간 것과 그 지독한 고통을 기억하는 것도 모두 불보살님의 가피였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아무에게도 배우진 않았지만 저절로 뭔가를 외웠습니다.
토막났지만 외웠습니다. 외우면서 그게 뭘까 항상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어 절에 가서 보니 바로 신묘장구 대다라니의 앞구절과 중간구절 끝구절이었습니다.
제가 남보다 뭐가 잘나서 전생을 기억했겠습니까.
바로 다라니 기도를 전생에 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생은 불교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부모님 모두 절에 단 한번도 안가보신 분입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살이나 부처님이란 말도 못들어보고 자랐습니다.
관음사란 말도 바위위에 페인트로 빨갛게 칠한 것으로 한글로 썼으니까 초등학생이 읽었지 한문으로 썼으면 못읽었을 것입니다.
관음사란 말이 무슨뜻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인연이 되어 관음사에 가서 기도하였고
그 응답을 들었는데
사람 몸으로 그것도 아줌마의 몸으로 직접 집으로 오셔서 아침10시부터 저녁 7시가 넘도록 하루 종일
그 아줌마한테 혼나기도 하고, 또 불쌍하다고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또 혼나고 하면서 배웠습니다.
저는 그 아줌마를 믿을 수가 없어서 말도 징글징글하게 안듣고 가라고하고
등을 밀고 엉덩이를 발로 차고 손으로 할퀴고 하면서 저항하였습니다.
결국 그 분께 노여움을 샀습니다. 말을 안들었으니까요.
약속을 안지켰죠. 말을 잘듣겠다고 기도해놓고 정작 오셨을 때는 말을 안들었습니다.
그 분께서 네 기도는 안들어줄거라고 하셨지만
그 후로 가실때까지 가장 중요한 말씀은 다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는 인과가 없다고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은 인과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둘 뗀 죄값으로 죽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니 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또 관세음보살님을 할퀴어 피를 낸 5무간죄를 지은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님은 저를 위해서 그 후로도 몇시간을 더 계시며 끝까지 제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관세음보살님의 말씀대로 정말 관음선원을 지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작지만 이미 땅도 사놓았었습니다.
제 소원은 이 사바의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아래 열심히 공부하여 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돕는 것이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제가 관세음보살님의 은혜를 입고 그 분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저야말로 마구니며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용기를 내서 쉽게 믿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님이 저처럼
보잘것 없는 단 한사람을 위해서도 피땀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모두 사실이며 거짓이 아닙니다.
불보살님은 저희들을 부모가 눈동자처럼 자식을 살피는 것보다 더 자세히 살피면서 보살피고 계십니다.
우리가 몰라서 못느끼고 모르는 것 뿐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같은 지독한 죄인을 위해서도 피땀을 흘리신 그 분께 감사를 올립니다.
너무 염치가 없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 드리겠습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씀도 못드리겠습니다.
그저 저를 도와주시러 오셨는데도 못알아뵈었고 , 감사의 말씀을 못드려서 감사를 드리며
염려하신대로 되지 않도록 애를 쓰겠다는 말씀을 올리면서
여러분 모두 견성하고 윤회를 벗어나 함께 해탈하길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들을 함께 진리의 세계에 들도록 하십시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68. 6.25 전란중 관세음보살 염불로 총탄을 피하다.
원제: 6.25난을 벗어난 일 (글쓴이: 최공)
6.25때 일이다. 경인년(1950년) 5월 5일 단오일에 경기도 가평군 상면 청우산 청우사의 불사청을 받아갔다가 5월 11일에 청우사를 떠나 나의 거주지 파주군 안동포교당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청평에 당도하니 어제 새벽(1950년 양력 6월 25일, 음력 5월 10일)에 이북 괴뢰군이 가평읍에서 5리 되는데까지
침입해서 작전중이라고 하면서 피란민들이 인산인해로 밀려서 서울 방면으로 향하여 가기에 나도
피란민들을 따라서 트럭을 얻어탔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다시 내려서 도보로 고생하고 근근히
서울 안국동 선학원(禪學院)까지 가서 밤새도록 총소리에 잠 한숨 못자고 있었다.
6월 27일 새벽에 비로소 선학원 문밖에 나가서 알아보니 괴뢰군들이 벌써 서울 시내 각처에 들어와서
요소마다 점령하고 있고 인심은 극도록 혼란해갔다. 나는 이날 오전에 인왕산에 올라가서 괴뢰군과 국군들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는 것을 보고 비행기가 한강철교를 폭격하여 파괴되는 것도 구경하였다.
6월 28일에 춘성스님과 작반(作泮)되어 선학원을 떠나 경기도 광주군 봉은사 견성암(비구니 선방)으로 건너가서 최혜암 스님과 이수옥 스님 등을 만났다.
그래서 당분간 피란중인데 6월 29일(음력 5월15일) 저녁 예불을 하고나서 총소리가 너무 요란하게 가까이 들리니 위험하므로 내가 대중스님들에게 권해 말하되 "자! 일이 이와 같이 다급해졌으니 별도리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지극히 부릅시다!"하고 혜암, 춘성스님 나 셋은 객실로 돌아갔다.
나는 관세음보살만 일심으로 속으로 부르고 누워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누가 "뒷 방(춘성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으로 가거라."하는 말이 들리기에 '왜 뒷방으로 가라는가?' 의심이 나서, '앞 방과 뒷 방사이에 큰 기둥이 서있으니 그것이 의지가 될 것이니 곧 옮겨야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곧 옮겼다.
내가 들으니 옆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므로 춘성스님에게 "스님도 어서 누우세요."하고 권해도 스님은 장좌불와하시는 모양인지 그대로 앉아 계시더니 땅땅땅하는 총소리가 크게 두 번 났다.
그제서야 내 옆에 누워계시더니 귀먹은 혜암스님이 "이크!"하고 일어나시고 춘성스님도 "이크!"하시더니 옆으로 드러눕는다.
우리있는 집 밑의 큰 방에서 어떤 비구니스님이 소리를 높여서 군인들에게 반항하되,
"아무 일없이 수도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왜 총질을 합니까?"한다.
이 말을 듣고 마루에 나가 서 있으니 괴뢰군 대장이 내가 먼저 누웠던 방을 향하여 "이 방문 좀 열어라."한다.
내가 열어보이니 아무도 사람이 없으니까 또 묻되, " 이 절에는 국방군이 없느냐?"하기에 "한 사람도 없소."하니까 괴뢰군 대장이 줄지어 있는 군인을 향하여 "사격중지!"하고 명령하여도 멀리있는 군인들은 아직도 못듣고 여전히 사격하고 있으니 대장이 또 다시 말하되 "사격중지!"하고 큰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알아듣고 중지한다.
대장이 명령하되, "(뒤)돌아 앞으로 갓!"하니 괴뢰군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그 때 내가 북한군들을 바라보니 눈은 사람 잡아먹은 호랑이 같고 얼굴에는 독기가 심히 나타났다.
내 생각에 '이북서 떠나 남침하여 오면서 사람도 많이 죽였고, 고생도 많이해서 얼굴들이 그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먼저 누웠던 방에는 총알이 두 개나 벽을 뚫고 지나갔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있었더라면 그 총알에 맞아 죽었을 것인데 관세음보살을 부른 공덕으로 뒷방으로 옮겨서 죽지않고 살아남을 천행 만행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알아보니 괴뢰군 삼백명이 따발총으로 정오 11시부터 저녁까지 7~8시간을 두고 총질을 했으나 절에 스님 한 분 다친 일도 없고 법당과 큰 방의 문과 벽이 벌집 구멍같이 뚫렸으나 불상이나 보물하나 상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일반은 참으로 불보살님의 신력과 도량신장들의 옹호하는 힘의 놀라움에 감격하였다.
출처: 속편 영험설화
.........................................................................................................................
69. 관세음보살 염불의 영험
스님[자재만현 큰스님]은 관세음보살, 석가모니 부처님의 염불을 많이 했는데 스님의 경우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이 관음경[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으면 온갖 불가사의한 신통력[가피력]로 거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여러분! 정말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 나는 스물 다섯 살(25세)쯤 되었을 때 병역기피가 되었는데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모르게 도망쳐가지고 부산에 가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서 스님이 되었다는 편지도 안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도 보고 싶어.. 그래서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 당시 50년 전에는 거의 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보안과에서 편지를 검열했습니다. 그런 줄 모르고 순진하게 편지를 그대로 보냈습니다. 생활하는데 있어 뭔가 좀 불안해서 우리 아버지한테 부탁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고을에서 면장을 하셨기때문에 이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증명서 하나를 발급해 달라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냥 떠나왔기때문에 증명서도 없었습니다.
그 편지가 부산진구 보안과에서 검색을 당했습니다. 스님은 그 때도 부산진구 경찰서 유치장을 다니면서 법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유치장에 구속된 피의자를 위해서 법문을 하곤했었는데, 어느 날 스님이 머무르던 절에 형사가 잡으러 왔어요.
그 형사(보안과 직원)와 같이 가니까 부산진구 경찰서로 데리고 가요. 부산진구 경찰서에는 스님이 법문을 하러 다녔는데, 과장들이 나를 데리고 2층 유치장 앞으로 가서 유치인들에게 법문을 하도록 안내를 하니까 나를 아는 과장들이 많아요. 그래서 과장이나 계장이 나를 보고 어떻게 왔느냐며 물어요.
이러이러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 때(휴전 무렵이지요)의 병역기피는 무조건 구속이었습니다. 판례가 8개월 징역이었어요. 그렇게 못박혀 있었어요. 대통령이 특명으로 '병역기피는 절대 용서하지마라'는 거예요.
이제 보안과를 거쳐 형사과에서 전부 조사를 받고하는데 구속영장을 신청하더라고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구속영장을 신청했어요. 그런데, 과장이 와서 나를 보고 "스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병역기피 이것은 구속입니다. 구속인데 내가 서장한테 가겠습니다." 그러더라고. 그래가지고 내가 조사받은 서류를 들고 과장이 자기 사인도 안하고 서장한테 갔어요. 그 결과 불구속으로 해왔더라고.
불구속이 되었어요. 그 때는 엄동설한, 아마 절기상 동지(冬至)쯤 이었을거예요. 만약에 구속되었으면 죽도록 고생했겠지요. 그런데, 불구속으로 검찰까지 갔습니다.
이제 한 두달 있으니까 검찰에서 출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더라구요. 검찰에 출석하니까 담당검사가 불교신자예요. 내가 들어가니까 나를 쳐다보니면서 "어떻게 병역기피를 했소?"라고 묻지를 않아. 불교교리를 비롯해서 불교와 관련된 것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불교교리에 대한 대답을 쭉쭉하니까 그 입회서기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거예요. 나를 살려주려고. 그래서, 검사가 기소유예 처분을 했습니다.
2. 그 다음, 35살 무렵에 서울시내에서 좋은 사찰 주지를 했습니다. 중앙 상임포교사였고 재무부장이었습니다. 그 때 모대학을 졸업한 '장미'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예요. 아마 아는 분이 있을거요.
중앙정보부 직원을 사칭하고 외부전화선을 절단하고, 워키토키를 들고 20여명의 깡패를 데리고와서 저녁에 총무원 청사에 난입한거예요. 그래가지고 국장, 부장, 원장, 종정을 아래층 지하(5층 건물이지요) 방에다가 처넣은 후(감금하고) 전부 옷을 다 벗겨놓고 각목으로 두들겨패는 거예요.
저녁내내 두들겨 맞았어.
그 때 나는 재무부장이었는데 나만 빠졌어요. 나는 시내 주지니까 아침 9시에 총무원에 들어갑니다. 가니까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나하고 무진장스님이 상임 포교사이면서 재무부장을 했는데 거기에 있던 무진장 스님이 너무도 많이 맞았더라고.
그래서 "무슨 일이오?" 하니까 저녁 내내 이렇게 당했다는거예요. 원장이던 영암스님도 무척 많이 맞았고, 종정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 놈들이 종권을 뺏으려고 종정을 칼로 내리칠 때에 총무국장(지금은 돌아가셨을거예요)이 몸으로 막았어요. 그래서 칼이 총무국장의 손목을 관통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그 놈들에게 내줘버리니까 그 사람이 하룻밤 종정을 했지. 그래서, 그렇게 맞았다는거예요. 그런데, 나 혼자만 쏙 빠졌습니다. 참 희한했습니다.
3. 그 다음에 다른 시내의 사찰 주지로 있었을 때에 그 때도 중앙포교사였고, 부장으로 있었습니다. 전두환씨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잖아요.
첫번 째 불교법난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주교, 기독교를 다 잡으려고 한거예요.
첫번째로 불교가 걸린거예요. 본사주지, 삼직, 본부국장, 원장, 종정 등 하루 아침에 150명이 전부 검거되어가지고 보안사에 끌려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종단 지도자층에 속하는 각 스님들의 그 많은 비리를 들이대면서 가리지않고 두들겨 팼습니다. 아마 한 두달 정도 맞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빠진 건 나입니다.
그 때 내가 신문사 편집국장도 맡았었습니다. 재무부장, 역대 재무부장이 다 구속되었던거예요. 그런데, 보안사에서 나만 빠졌다 그거예요. 그래서 나를 언제 잡아가나하고 있는데 아주 빠졌습니다.
4.
그 다음, 서울지검 특수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나는 부장이니까 하루에 수십 건 결재를 하는데, 결재를 한 건 잘못한 것이 있었어요. 내가 부하인 과장, 국장말만 믿고 도장을 콱 찍은 것이 있었어요. 이것이 문제가 되어가지고 어느 사찰에서 나를 고발했어요.
그것이 이제 대통령[청와대]으로해서 밑으로 내려와가지고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다루게 되었습니다. 나를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예요. 그 소식을 내가 먼저 알았죠.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출석하라는 말도 없는데 내가 특수부에 갔어요. 그 때 수사과장이 검사가 아니고 사무관이 히더군요.
그 수사관이 "왜 오라고 하지않았는데 왔느냐? 당신 오라고 하는 날짜가 지금 있다. 그런데, 왜 지금 왔느냐?"라고하여 "나는 죄가 없어서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한 번 조사해보자."해가지고 조사를 다 했는데 완전히 나를 구속시키려 했더라고, 구속을 딱 시키려고 그렇게 유도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사를 끝내고 "이제 오라고하면 꼭 오시오."라고 하더라고요. 오라고 하는 날짜에 꼭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 자신이 좀 불안하더라고. 완전히 구속하려고 하는 눈치예요. 그 때 고등학교 친구가 나하고 참 친한 사이였는데 그 친구가 서울형사지방 검찰청 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 친구한테 갔어. 찾아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지에 있네. 야! 나를 구속하려고하는데 이거 야단났다."하니까 그 친구가 "자네의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특수부 그 사무관은 ㅇㅇ지청에서 내가 데리고 있던 부하야. 너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갔다 오겠네."하고 이 친구가 내 건을 가지고 특수부로 갔어요. 갔다 와가지고는 "야! 너 큰 일 날 뻔했다. 구속하려고 했어. 그런데, 안 할 것이다." 부장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구속을 면했습니다.
여러분도 필수적으로 아침에 '석가모니불 공부'를 하시길 바라고, 그 다음에 스스로 살펴서 나는 '관세음보살 신앙'으로 한 평생을 살 것인가, '지장신앙'으로 살 것인가를 선택하십시오. 두 보살님을 내가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을 염하고 싶습니다'하는 분은 꼭 아침에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시고, 그리고 시간 날 때에 관세음보살님 공부를 하십시오.
그러면,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이 여러분을 아셔요.
여러분이 위급할 때에, 가령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가 4~5미터가 된다? 잘못하면 전부 전복되거든. 그 때 여러분이 그 배에 타고 있으면 살릴 수 있어. 여러분 때문에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살아. 그러니까 이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마어마합니다. 어마어마해.
또 극락가는 문제도 아미타부처님의 좌보처이시기때문에 다리 가교 역할을 해줘,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많이많이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시간이 좀 있을 것이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공부후 한 시간씩 할애해가지고 많이 찾으십시오. 그 대신 석가모니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께서 "햐! 참 요놈, 착하게 사네. 법문듣더니 이제 완전히 180도 새 사람이 되었네'"라고 할 정도로 되어야합니다. 정말로 새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염하면 반드시 가피가 옵니다.
출처: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 2009. 11. 9. 자재만현 큰스님 춘천 법문 정법 관음신앙 중에서 옮김
..............................................................................................................................................................
70. 정글의 법칙 정순영 CP 실종중 25시간만에 관세음보살 염불로 다시 발견되다.
출처: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655448
<정글의 법칙> 김병만도 눈물 흘린 정순영CP 실종기 - 오마이스타
<정글의 법칙>은 김병만 가족만의 '살아남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SBS 리얼 버라이어티 <정글의 법칙>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정순영 C...
star.ohmynews.com
전말은 이러하다. 정순영 CP는 제작진의 수장으로 <정글의 법칙>의 촬영지인 파푸아뉴기니로 떠났다. 50대라는 적지 않은 나이, 정CP는 원래 오지로 향하지 않으려 했지만 유난히 정CP를 따랐던 김병만이 "정CP님이 안 가면 안 가겠다"고 하는 통에 일행에 합류하게 됐다.(일설에는 후배PD가 오지 출장을 모두 마다해 등 떠밀려(?) 출장을 떠났는 이야기도 있다)
▲ SBS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속 한 장면 | |
ⓒ SBS |
뙤약볕의 정글 아래 "나 잠깐 쉴게, 먼저 가"가 발단
촬영지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최소한 2시간이 넘는 거리, 제작진은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 밀림 한 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잠은 땅바닥에서 잤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선발대에 속했던 정순영CP가 먼저 지쳤다. 정 CP는 "나 여기서 잠깐 기다렸다가 뒤에 팀 만나면 갈 테니까, 먼저들 가"라며 팀원들을 보냈다. 그것이 정글 표류기의 시작이었다.
선발대가 먼저 마을에 도착했다. 후발대도 당도했지만 정순영CP가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고, 제작진은 정CP를 찾아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질 시각. 그 전에 정CP를 찾아야만 했다.
제작진이 애타게 정CP를 찾고 있을 때, 그는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4미터만 뒤쳐져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밀림 숲,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설마 나를 버리고 갔으랴" 싶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근처를 서성이면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겁이 덜컥 났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어둠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다
▲ <정글의 법칙>의 정순영CP는 촬영차 간 파푸아뉴기니에서 길을 잃어 변변한 식량도 없이 25시간을 버텼다. 위 사진은 구출 직후 정CP의 모습이다. | |
ⓒ SBS |
움푹 팬 곳을 찾은 정CP는 그곳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정글의 밤은 칠흑보다 어두웠다. 손에는 물 2통과 비스킷 3쪽, 홍삼 절편, 그리고 양초 하나가 있었다. 양초에 불을 켰다. 겁이 났다. 평소 불교신자였던 정CP는 갑자기 신앙심이 두터워짐을 느꼈다. '관세음보살을 외치면 어디 가서도 안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러자, 갑자기 촛불이 마치 부처님의 뒤를 비추는 후광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CP는 자기 눈을 비볐다. 다시 "관세음보살"을 외치자 촛불의 모양이 다시 동그랗게 바뀌었다. "살 수 있겠다!" 싶었던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같은 시각, 제작진 역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정CP를 찾기 위해 아침 일찍 원주민 100명을 모았다. 혹시나 발을 헛디뎌 강에 빠지는 불상사가 일어났을까 싶어 강 앞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지금에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만큼 최악의 사태였다. 가지 않겠다는 정CP를 데려갔다는 생각에 김병만은 울고 있었다.
한편, 해가 뜨자마자 정CP는 조금이라도 기척이 있는 쪽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갔다. 가다보면 제자리인 곳을 몇 번이나 헤매며 길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갖고 있던 물티슈를 하나씩 꺼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물티슈를 발견한 수색대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런 기지와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3시간이 지나 이 '물티슈 나무'를 발견한 제작진이 정CP를 발견했다. 실종 25시간 만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정순영CP는 살아 돌아왔다. 귀국 직후 그의 온 몸은 홀로 밤을 지새우며 모기 물린 자국 투성이었다고. 이 일을 계기로 또 하나의 인생을 살게 된 정CP는 "주변사람들에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요즘 한창 밥을 사고 있다는 훈훈한 후문이 들려온다. 그는 프로그램의 책임 프로듀서로서 이렇게나 현실적이고 치열한 '정글의 법칙'을 몸소 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