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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빛 교회에서 후원하는 파이 미니스트리 에서 2020년 첫 번째로 영성, 일, 예술 부분을 코포스, 프뉴마틱 그리고 포이에오 연구소를 통하여 각각 팟 캐스트로 진행한 에피소드 내용입니다.
영성,일,예술
(서론)
파이 미니스트리
소금빛 교회 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상)의 하나됨” 이라는 핵심가치를 가지고 첫 예배를 드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 성도가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모든 곳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살도록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금빛교회는 그리스도 영성, 일, 예술에 대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소금빛교회는 지난 8월31일 2년여 동안 동업자 관계로 함께 사역했던 ‘일터변혁을 위한 연구소’ 의 한국지부(IMT Korea)와 협력사역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변경하고, 2020년 9월1일 파이 미니스트리(Π Ministry)를 설립하여 여러 다양한 일을 계획, 실천해 가고 있습니다.
파이 미니스트리(Π Ministry) 사역
소금빛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일, 영성 그리고 예술 영역에서 삼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에 알리고자 2020년8월31일에 파이 미니스트리를 설립했습니다. 파이 미니스트리는 각각 코포스(Copos :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일의 영역을 양육), 프뉴마틱코스(Pneumatic :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영성 영역을 양육) 그리고 포이에오(Poieo :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예술 영역을 양육) 연구소를 세워 각각 특성에 맞는 사역을 진행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영성에 대해서 다루는 프뉴마틱코스 연구소는 유진 피터슨, 제임스 휴스턴 교수가 가르쳐온 과목인 ‘영성신학’과 ‘성경적 영성’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교 일에 대해서 다루는 코포스 연구소는 폴 스티븐스 교수가 가르쳐 온 여러 과목을 계속해서 온라인으로 양육하여 이에 대한 저변을 확대할 것입니다. ‘일의 신학’ 양육에 이어 ‘소명, 일 그리고 사역’ 과목과 ‘일터 신학’ 과목을 진행합니다.
셋째, 그리스도교 예술에 대해서 다루는 포이에오 연구소는 팟캐스트(Potcast) 송출에 집중할 것입니다. 이후에 “그리스도 상상력”의 과목을 양육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각각의 사역을 팟캐스트와 소책자로 발행될 것입니다.
파이 미니스트리(Π Ministry) 출범소개
파이 미니스트리(Π Ministry)는 소금빛교회가 대한민국 교계와 사회를 섬기고자 2020년 9월 설립하는 단체입니다. 파이 미니스트리의 파이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첫째, 파이 미니스트리가 앞으로 대한민국 교계와 사회를 섬기고자 하는 세 영역의 그리스 단어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그리스어 알파벳 Π(파이)를 앞세우는 말입니다.
①πνευματικός(영성)
②κόπος(일)
③ποιέω(예술)
둘째, 성경에 나오는 샬롬(שָׁלוֹם)의 정신을 경제학용어인 파이(Pie)와 연결하여 묘사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계에서 그 동안 평화(Peace)로 이해하던 샬롬을 풍요로움(Flourishing)으로 이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영역에서 "파이(Pie)를 키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아니다, 파이(Pie)를 나누는 일에 더 열심을 내야 한다"는 토론의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파이 미니스트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잠재성이 그분의 형상인 사람의 거룩한 활동을 통하여 나타나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온 세상에는 사랑으로 나누는 일이 가득해지는 것이 샬롬(שָׁלוֹם)의 진정한 의미로 인식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파이를 키우는 것이 바로 창조세계의 잠재성을 실현시켜 풍요롭게 만드는 것과(Flourishing) 서로 사랑하며 나누는 것(Serving)에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 있음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파이 미니스트리는 이 세 가지 화두를 가지고 창조-타락-구속-완성의 구속사 관점에서 대한민국 교계와 사회에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삼위 하나님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론 : 첫 번째
영성 :~~
그리스도교가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πνευματικός(영성) 연구소에 대한 내용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영성과 프뉴마코스란 용어에 연결점과 차이점이란 부분을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듯이 영적인 영이 충만한 이런 뜻을 가진 그리스 단어입니다. 이 말을 엄밀히 따진다면 영서이란 말로 직역해서 번역하기에는 사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영성이다 얘기하는 Spirituality 라는 말이 과연 성경에 쓰여져 있는가 했을 때 명시적으로 쓰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신 분들께는 결국에는 프뉴마코스라는 말 자체를 성경에 나와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영성이란 말 자체는 성경에 나와 있는 단어도 아니기 때문에 영성이란 말을 기도교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비평이 일면은 사실입니다. 영성이란 말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성이란 말 자체가 결국에는 유대 배경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배경에는 너무 다른 배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드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분들은 프뉴마틱코스라는 말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느냐면, 플라톤으로부터 육체의 것은 우리의 몸, 육신적인 것들은 모두 하찮고 하능하며 비천한 것들로 오직 영적인 것 이데아인 것들만이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기에 프뉴마틱코스라는 말 자체가 풀라톤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이와같은 이분법이고 이원론적인 관점을 사람들에게 주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 영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다 사람의 몸, 육체, 세상, 물질 이런 것들은 모두 하찮게 여기고 저 하늘에 있는 것, 저하늘에 속한 것, 영적인 것만이 거룩한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원론적인 관점은 잘못된 과점으로 이것이 주는 영성이라는 말은 기독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도 일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기독교영성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이야기했던 많은 분들 지금도 얘기하고 계신 분들은 드러내놓고 이원론적이다 이분법적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저분들의 무의식속에는 거룩하고 하찮은 것 세속적인 것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가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이란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이런식의 그분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고도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이란 단어들 우리가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가 만나봤던 분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이라고 얘기함에 있어서 성경이라고 말하지 말고 성서라고 얘기해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목사님들도 성서라고 얘기합니다.
어느 불자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성서라고 한 단계 낮추어 말합니까. 원래 경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사용하던 말로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경전을 성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불교에서 경이란 말을 쓰기 어려워졌다 합니다.(한국에서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역사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경전이라고 하면 주로 성경으로(BIBLE)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남기신 것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불경이란 말에서 왜 불자들이 경이란 중요하고 고귀한 단어를 놓쳤는지 안타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서라고 격하시키려 하는냐 는 말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기름부으셔서 성령의 성품,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결국에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통해서 가능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닮음과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맺게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는다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충만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품이 곧 성령님이 우리에게 부으시는 성품이다고 했으면 성령이란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 하나님이 보내신 호흡, 생기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 자체도 성령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닮은,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의 성품이다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프뉴마틱코스라고 성경에서 기록되었던 단어도 결국에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었다.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을 입었다, 이런 식의 것들이 결국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백성이 된 의인된 사람이라는 것을 통칭해서 프뉴마틱코스이기 때문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과 성경에 프뉴마틱코스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나오지 않고 명시적으로 쓰여져 있지 않지만 우리가 충분히 유추해서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기독교의 고유한 것으로 삼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이것 때문에 성경과 성서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말이라 해서 너무 고귀한 것일 수 있고 고차원적인 것을 왜 놓으려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성경이라는 말 자체도 결국에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단 한권의 책이라는 말로서 경전인 것입니다. 물론 그 말 자체가 만구불변의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뜻에서 경이란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말 자체도 결국에는 성경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없는 것이듯, 그 성경에 보면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통해서 계속해서 기록되고 필사되어 오늘날 전해지는 것처럼, 영성이란 단어를 성경에 나오는 새옷을 입는다 새사람을 덧입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이와같은 용어와 연결해서 본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의 영성이다는 말은 충분히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사용해야하는 단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용어는 사용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논쟁점과 나름의 논리에서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 : ~~
그리스도인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루는 파트너인 폴 스티븐스 교수에 대한 소개
이 팟 캐스트를 들으시는 분들이 폴 스티븐스 (R. Paul Stevens) 교수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기독교인의 일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20-21세기에 걸쳐 여러 기독교인중에 대표적인 이라고 말합니다.
이분은 캐나다 동부 몬트리올에서 1937년 출생하였습니다. 맥매스터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30여 년간 목회자로, 때로는 자비량 사역자로 섬겼으며, 1986년 밴쿠버의 캐리홀 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여 이듬해부터 리젠트 칼리지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평신도 신학과 리더십, 생활 영성 분야를 가르쳐 왔다. 2014년 현재 리젠트 칼리지에서 ‘장터 신학'과 리더십 분야 명예교수로 있으며, 워싱턴 시애틀에 있는 바케대학원대학교와 싱가폴에 있는 비블리컬 신학대학원의 겸임교수이기도 합니다.
철강회사를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잡역부에서부터 회계, 사무직 등을 두루 경험하였고, 목수 일을 배워 건설업 분야에서 일하며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긴 경험을 통해 예배당에 갇힌 신학이 아닌 삶의 현장을 신학의 무대로 삼는 ‘생활 신학'을 삶으로 살았으며 저서로는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일삶구원」, 「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 「폴 스티븐스의 결혼이야기」,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IVP),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죠이선교회), 「그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공저, 복있는 사람), 「평신도를 세우는 목회자」(공저, 미션월드) 등 30여 권이 있습니다.
저는 이분의 ‘일터신학’을 2013-2015년 리젠트 칼리지에서 문과로 Market Theology MA을 전공했습니다. 그분과 같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계시다가 학교의 사정에 의해 몇 년이 정규직 교수로 복직하신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일에 대한 관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졸업시험에 대한 지도교수였습니다. 그 뒤에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IMT(일터 변혁을 위한 연구소) 를 창립하신 설립자로 같이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폴 스티븐스가 중요한 인물인가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온 백성의 신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20세기의 중요인물중 한분입니다. 이 말은 그분이 기독교의 일에 신학에 대한 것을 먼저 이야기했다거나 분명하게 드러냈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는 맥매스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부터 이미 그분안에는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 가운데에 위계라는 구조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성직자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사역을 하고 나머지 평신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의 사역을 돕는 일을 할 뿐인가 그리고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거룩하고 속된 것이란 구분이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을 가졌다고 합니다. 에배소서4:16-17절(11-14)을 읽을 때, ‘아 ! 우리가 에배소서를 잘못이해해 왔군아 발견하게 되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하게 부름을 받아 이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참여하도록 보냄을 받은 동일한 사람들이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일 기독교인의 Marketplace 일상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학문과도 연결되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도 폴 스티븐스의 책들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성도들로부터 알려져 있지는 않은듯합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교 영성에 관련한 내용을 다루는 중요한 파트너로 유진 피터슨. 제임스 휴스톤 이분들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아무턴 유진 피터슨과 폴 스티븐스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함께 공유하며 리젠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정작 그분들의 책이 대한민국에 많이 번역되어 있다하지만 정작 그분들을 잘 아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책을 보기는 보았고 이름을 알기는 하지만 이분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전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그 내용을 가르치고 나누는 일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폴 스티븐스가 이야기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일터사역자분이나 직장인 목회를 하시는 분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정작 이분의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하는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차원에서 폴 스티븐스가 이야기했던 부분중에서 본인이 정말 감명을 받아서 그 내용을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있지만 이분이 서구에서나 동아시아권에 영향을 끼친 20-21세기 기독교 일에 관한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이라는 관점을 잘 알고 전달해주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강의와 책들이 이분의 중요한 족적이 될 수 있는데 한국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코포스 연구소에서는 그분을 소개하고 그분이 이야기했던 ‘하나님의 온 백성의 신학’ 과 ‘하나님의 일에 기독교의 일’에 관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특별히 삼위일체론적인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창조적이고 구속사적인 관점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일에 대한 관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진부하거나 지루한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앞으로 기독교인의 현안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의 이슈에 대한 일과 영성 그리고 예술의 좋은 관점의 조언을 통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길 바라며 여러 가지를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팟 캐스트의 목적은 파이미니스트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리젠트 칼리지의 제임스 휴스톤, 유진 피터슨, 폴 스티븐스 그리고 고든 스미스 등의 영성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시켜온 삼위일체론 적인 기독교 영성 기독교 일, 기독교 예술을 하나로 소개하는 외부창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예술 : ~~
그리스도교 예술이라는 말의 타당성
2020년 가을에 열어가는 파이 미니스트리에서는 그리스도의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장을 열어갑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기독교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짧은 스케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술이다는 말을 들으면 고차원적인 영역 또는 일반사람이 쉽게 다가가지 어려운 것은 아닐까 하기도 합니다.
보통 예술이다 하면 많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면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마음가운데 떠오르는 것은 순수예술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일반예술, 순수예술, 대중예술 등으로 많이 나누지만 음악도 마찬가지로 순수음악 과 대중음악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술이다는 말을 보면 약간 이원론적인 관점이 있는 것같습니다. 파이 미니스트리에서 ‘일’에 대한 부분에서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에 대한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성직자가 하는 일은 거룩한 것이요, 일반성도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세속적이라는 관점이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예술이라는 영역에서도 들어있지 않은가 추측해 봅니다. 순수예술을 하면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지만 꾸준히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 자기 고집으로 놀라운 예술을 이루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순수예술은 조금 높은 자리에 있고 대주예술은 약간 낮은 위치에 있다는 식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포에이오에서 다루고자 하는 예술은 순수예술만을 다루거나 대중예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는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파트너로는 ‘행동하는 예술이다’의 저자 니콜라스 워터스코프는 ‘창조 세계에 살롬을 회복하는 예술의 실천적 본질이다’ 고 합니다. 창조세계에서 살롬, 여기서 살롬이라는 말은 좀더 나누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니콜라스 워터스코프는 살롬을 우리가 번역한 ‘평화’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살롬은 평화를 넘어 선 풍요로워지는 것, 번영하게 되는 것을 포용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일을 하게 하시고 그들의 일을 통해서 창조세계가 더욱 더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잠재성이 풍요로워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으로 살롬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니콜라스 워터스코프 와 폴 스티븐스가 말합니다. 원래 창조 타락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였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누구를 위한 아름다움인가, 누구를 위한 아름다움인가, 그리고 누구앞에 아름다움인가 했을 때 당연히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기사는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예술이다 하는 이야기는 순수예술이나 대중예술이다고 하는 이원론적인 관점을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 하나님이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으신 재능, 달란트, 기질, 성품을 통해서 발휘되어서 나오는 모든일에 결과물과 그 과정들이 다 예술이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에이오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의 예술이다는 것입니다.
포에이오 단어는 일을 말하는데 창조때 사람들이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로 하나님과 관계 맺어서 하게되는 아름다운일에 결과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모두 예술이라는 것입니다.기독교 예술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다룬다에 있어서 많은 성도들은 의아해 하거나 혼란스러워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점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땅에서 벗어나 저 천국에 간다. 이땅에서 탈출하여 하나님께 속한 낙원으로 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하늘 새땅에서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땅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아름다운 일의 결과물이 아름다움이라는 이야기가 기독교예술이다 고 언급함이 크게 와 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부분과 연결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는 ‘성도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되어서 창조와 구속하시고 완성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면 그 일은 새하늘 새땅에서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다.’ 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예수님이 재림하고 난 이후에 열리게 되는 새하늘 새땅이 완전히 불연속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죄와 악 모든 더러움과 추악함 그리고 음란한 것과 모든 폭력적인 것은 완전히 단절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재능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기름부으시고 어떠한 기질적인 모든 것들을 통하여 창조세계에서 일하게 하시는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완전한 회복 형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진짜 제대로 된 일,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 성도로서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인 그 살롬을 회복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하는 모든 일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것이 예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술은 특정인들이 소유하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 모든 하나님 백성들이 하는 각자 영역에서 각자의 예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일들은 창조세계의 살롬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일이고 예술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다 예술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기독교 예술이 무엇인가는 것과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술을 하는 예술가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시도하고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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