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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성과 철학성 김태길
1. 수필 평가의 기준 문제 『계간 수필』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이 되고 말았다. 내 삶의 설계에는 본래 없었던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도대체 이 일에 무슨 뜻이 있느냐?’ 하는 자문(自問)이다. 이 물음은 ‘그 잡지를 내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과 같이 맞물려 있다. 『계간 수필』을 발행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한국 수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자는 의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잡지를 발행하는 행위의 가치는 이 잡지가 한국 수필문학의 위상을 위하여 과연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이 일의 뜻이 클 수도 있고, 헛수고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 수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현재도 한국에는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그러나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이 많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각자 자신이 쓰는 수필을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좋은 수필’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이냐?” 이 물음에 대해서 이론(異論)의 여지가 전혀 없는 대답을 주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평가의 문제에는 반드시 주관(主觀)이 관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관이 관여한다 해서 ‘좋은 수필’의 기준이 전혀 없다고 말하면 지나친 주장이 된다. “어떻게 생긴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냐?” 하는 물음에 대할 때, 주관이 관여한다는 이유로 미인의 기준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 미모(美貌)에 대한 의견에 개인차가 많은 가운데도 같은 문화권 안에서는 대체로 통용되는 미인의 기준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좋은 수필’에 관해서도 같은 문화권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다만 현재 한국의 경우는 수필에 대한 이론이 아직 확립되기 이전이므로, 상당한 의견의 대립이 있는 편이다. 앞으로 하나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과제이다. 2. 좋은 수필 모든 종류의 좋은 글이 좋은 수필은 아니다. 좋은 글 가운데는 좋은 수필도 있고 수필 아닌 것도 있다.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모든 논문은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것들이 모두 ‘좋은 수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들 가운데도 ‘좋은 수필’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을 수 있다. 건강의 비결을 알기 쉽게 소개한 글은 유익하다는 뜻으로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연애의 경험담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글은 재미가 있다는 뜻에서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일률적으로 ‘좋은 수필’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종류의 유익한 글 또는 재미있는 글 가운데서도 ‘좋은 수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간혹 발견할 경우가 있다. 산문 가운데서 ‘좋은 수필’로 인정될 수 있는 글의 특색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필자의 사견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 물음의 대답으로 접근하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글이 독자에게 미적 감동(美的感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나이 어린 문학소녀 몇몇이 사람에게 미적 감동을 일으키기만 해도 ‘좋은 수필’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숙한 수준에 이른 여러 독자들에게 넓은 의미로 ‘아름답구나!’ 하는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미적 감동을 일으키는 힘은 글 속에 담긴 내용, 즉 글 속에 나타난 대상의 아름다움에서 올 수도 있고, 그 대상을 묘사한 문장의 아름다움에서 올 수도 있으며, 저 두 가지의 상승작용에서 올 수도 있다. 글 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대상으로서는 인간을 생각할 수도 있고, 인간 밖의 자연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문장의 아름다움은 표현의 정확성에서 올 수도 있고, 그 간결성에서 올 수도 있으며, 또 음악적 리듬에서 올 수도 있다. 미적 감동을 주는 글의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시(詩)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운문(韻文)에 속하는 시는 수필에서 제외되며, 수필의 범위를 산문(散文)으로 국한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행 또는 상식이다. 다만 시와 산문의 분계선이 자로 그은 듯이 명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산문시(散文詩)라는 것의 존재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과 희곡도 잘된 것은 미적 감동을 준다. 그러나 허구(虛構)의 삽입을 필수조건으로 삼는 소설과 희곡은 수필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며, 수필은 전통적으로 허구를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다만 진실과 허구의 분계선도 자로 그은 듯이 분명한 것은 아니며, 근래는 수필에서도 허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필자는 허구를 애써 배제해 온 수필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실의 순도(純度)가 높을수록 좋은 수필이라는 주장에 공감을 느낀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 자신을 염치없이 미화하고 추켜세운 글은, 세인이 그것을 ‘수필’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장 천박한 붓장난으로서 배척한다. 어느 모로 보나 미남과는 요원한 거리에 있는 화가가 자신을 신성일이나 손창식보다도 더 잘생긴 남자로 그린다면, 만인은 그것을 자화상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수필은 문장으로 그린 자화 심상(自畵心象)이다. 일석(一石)의 ‘오척단구’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신체를 소재로 삼을 수도 있으나, 우리가 그 작품을 수작으로 꼽는 까닭은 그 수필의 독자들이 그 글을 통하여 일석의 해학 가득한 마음의 여유를 볼 수 있음에 있다. 탁월한 수필가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모저모 진솔하고 적절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정신세계의 전모를 광범위하게 그린 장편의 수필도 있을 수 있다. 생애 전체를 다룬 자서전이 문학의 향기 가득한 필치로 쓰여지고 그 내용이 독자에게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장편 수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수필이든 긴 수필이든, 작가의 내면세계가 진솔하고 적절하게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그 문장에 문학적 향기가 가득하고 그 내용에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필자의 마음이 담겨 있을 경우에 독자는 모종의 감동을 느낀다. 앞에서 ‘미적 감동’이라고 말한 그 감동이며, 이 감동이 클수록 ‘좋은 수필’로서의 평가가 높아진다. 3. 수필의 문학성 문장에 문학적 향기가 가득하고 내용에 철학적 깊이가 있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는 말을 하였다. 줄여서 말하면, 문학성(文學性)과 철학성(哲學性)이 모두 높은 수필이 가장 바람직한 수필이라는 뜻이다. 미적 감동은 글의 문학성에서 올 수도 있고, 그 철학성에서 올 수도 있다. 따라서 문학성 또는 철학성 가운데 한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좋은 수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이 두 가지를 아울러 갖춘 수필을 쓰는 것이 수필가의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문학성’과 ‘철학성’ 두 낱말은 그 뜻이 막연하고 애매하다. 이 두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밝히는 일은 아무에게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文學)과 철학(哲學), 두 개념에 대하여 만인(萬人)이 공인하는 객관적 정의(定義)가 내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미숙하나마 나의 사견(私見)을 정리하여 이 글의 마무리 부분으로 삼고자 한다. 언어, 특히 글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예술이 문학이라는 통념(通念)에 입각할 때, 예술의 본질에 언급함이 없이 문학의 본질을 운위(云謂)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선 ‘예술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상식적 수준에서나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예술은 인간에 의한 아름다움의 창조 활동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들고 나와 철학적 논쟁을 시작하면, 이 평론은 끝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매우 불충분한 논의 전개이지만, 꽃, 여체(女體), 저녁노을, 설악산의 단풍 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질에 대한 이름이 ‘아름다움’이라는 상식을 딛고 이 난관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야생화나 자연 그대로의 여체가 가진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주어진 아름다움이요, 이를테면 조물주가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인간이 꽃에 인공을 가하여 꽃꽂이 작품을 만들거나 여체에게 화장이나 의상을 곁들이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 자연 그대로의 꽃이나 여체에 없었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이 창출된 아름다움을 ‘인간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예술 활동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예술품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예술품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아름다움을 창출하기에 사용되는 소재(素材)와 수단 또는 수법(手法)의 차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예술품이 나누어진다. 종이 또는 캔버스 위에 선과 색채를 그리거나 칠함으로써 회화(繪畵)라는 예술품을 만들고, 음성 또는 악기의 소리를 조작함으로써 음악이라는 예술품을 만들며, 나무나 돌 또는 그 밖의 소재를 깎고 새기고 다듬어서 조각이라는 예술품을 만들어 낸다. 모든 예술품이 ‘아름다움’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느끼는 기관(器官)은 각각 다르며, 아름다움의 성질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회화의 아름다움은 주로 시각을 통하여 지각하고, 음악의 아름다움은 주로 청각을 통하여 지각하며, 오페라의 아름다움은 청각과 시각과 그 밖의 여러 심리작용의 종합을 통하여 지각한다. 그리고 회화와 음악과 오페라가 갖는 아름다움의 성질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알고 싶은 것은 문학이라는 예술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것이며, 특히 ‘수필’이라는 이름의 문학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으면 수필의 문학성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글의 예문을 통한 접근을 꾀해 보자. 산호와 진주는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산호와 진주는 바다 깊이깊이 거기에 있다. 파도는 언제나 거세고 바다 밑은 무섭다. 나는 수평선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잠수복을 입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나는 고작 양복바지를 말아 올리고 젖은 모래 위에 있는 조가비와 조약돌을 줍는다. …그것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 예쁘지 않은 아기에게 엄마가 예쁜 이름을 지어 주듯이, 나는 나의 이 조약돌과 조가비들을 ‘산호와 진주’라 부르련다. 피천득 선생이 그의 시문집 『산호와 진주』에 부친 머리말이다. ‘시를 모르는 김태길이라면’ 같은 내용의 머리말이라도 아마 다음과 같이 썼을 것이다. ‘나는 주옥과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역량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내 힘으로 쓸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글들을 틈틈이 써서 모아 두었다. …그리 예쁘지도 않은 아기에게 어머니가 예쁜 이름을 지어 주듯이, 나는 나의 변변치 않은 이 작품집에 『산호와 진주』라는 예쁜 이름을 달아 주고자 한다.’ 내용은 거의 같은 말이다. 그러나 앞글과 이 글은 맛이 아주 다르다. 피천득 선생의 글은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김태길의 글에는 그러한 맛 또는 멋이 없다. 내용은 같아도 그것을 표현한 문장이 다르면 미적 감동에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문학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은 일차적으로 문장에서 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과학적 저술을 번역하기보다도 문학 작품을 번역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사실도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어떤 문장이 미적 감동을 크게 주느냐?’ 하는 문제는 ‘어떤 음악이 감동적이냐?’ 하는 물음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문장론 전문가에게서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상식적인 것, 몇 가지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간결하고 함축성이 풍부한 문장에서 미적 감동을 느낀다. 군더더기는 글의 맛을 깎는다.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이나 가정을 실감나고 선명하게 나타내는 문장에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산문의 경우에는 의사의 전달이 어려운 문장은 일반적으로 좋은 문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해학적이어서 웃음을 자아내는 문장이나 속담 또는 고금의 명언을 적절히 섞은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경우도 있다. 장단(長短)과 억양이 음악적이어서 읽기에 편한 문장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적절한 단어를 올바른 곳에 배치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정확해야 한다. 미적 감동은 문장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피사체(被寫體)가 아름다우면 화가의 솜씨나 사진작가의 기술이 좀 떨어져도 그 그림 또는 사진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듯이, 글쓴이의 마음씨가 아름다우면 그것을 나타낸 글솜씨가 좀 미숙하더라도 독자에게 미적 감동을 줄 수 있다. 소년 가장이나 가난한 어머니가 역경 속에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온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었을 때, 비록 그 문장이 서툴어도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수기를 쓴 사람의 심정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감동이다. 일반적으로 미담(美談)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동은 그 문장에서 오기보다도 주인공의 미덕(美德)에서 온다. 4. 수필의 철학성 ‘철학(哲學)’이라는 말도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가지로 쓰이는 말이다. “철학이란 무엇이냐?”는 물음도 ‘문학’의 경우 못지않게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다만 앞에서 “철학적 깊이가 있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다.”라고 말했을 때, ‘철학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철학적’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이나 사상이 있기 전에 ‘철학한다’는 행위가 있었다. 철학이라는 것은 철학하는 행위의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하는 행위의 특색을 살펴보는 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현명하다. ‘철학 한다’ 함은 ‘더욱 깊이, 더욱 넓게 생각 한다’는 말에 가깝다. ‘깊게 생각 한다’ 함은 겉만 보고 조급하게 결론을 서두르지 않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분석과 비판을 거듭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넓게 생각 한다’ 함은 하나의 시각에서만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그것만으로 철학함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깊고 넓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상(空想)은 철학함이 아니다. 철학함에는 참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진리 탐구의 의지가 없는 생각은 철학함이 아니며, 비록 그러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진리와는 관계가 없는 엉뚱한 생각으로 방황하는 것은 철학함이 아니다. 진리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깊고 넓게 생각할 뿐 아니라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 ‘바르게 생각 한다’ 함은 생각의 출발점인 전제(前提)에 거짓이 없으며, 사유(思惟)의 과정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잠정적 결론을 얻게 된다. 철학성이 풍부한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는 말은 깊고 넓고 바른 생각, 즉 훌륭한 사상을 많이 담고 있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는 말에 가깝다는 결론이다. 수필의 문학성이 주로 그 문장에 비중을 두는 것이라면, 수필의 철학성은 주로 그 속에 그려진 마음의 세계에 비중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주로 마음의 세계를 글로써 그리는 자화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수필을 위해서는 그 표현의 수단인 문장이 탁월한 동시에 그 문장에 의하여 그려지는 마음의 세계가 풍부해야 한다. 마음의 세계가 풍부하다 함은 단순히 지식수준이 높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비록 지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정(情)이 메마르고 의지가 박약하면, 마음의 세계가 풍부하다고 보기 어렵다. 지정의(知情意)를 종합해서 볼 때 마음이 깊고 넓은 사람이 마음의 세계가 풍부한 사람이다. 수필은 작가의 인품(人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고, 인품이 높은 사람은 넓은 의미로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현이나 군자처럼 인품의 완성도가 높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장점이든 단점이든 함축성 있고 깔끔한 문장으로 진솔하게 그리면, 좋은 수필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마음의 세계가 깊고 넓은 사람일수록 글로 나타낼 수 있는 세계도 넓다는 점에서 유리할 따름이다.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수필의 문학성은 주로 글의 구상과 문장 등 그 외형(外形)과 직결되고, 그 철학성은 주로 글 속에 나타난 사상과 인품 등 수필의 내용(內容)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수필의 외형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맞물려 있으므로, 그 문학성과 철학성도 한계선을 명확하게 긋기가 어렵다. 한 작품의 구상과 문장 속에도 작자의 철학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작품 속에 그려진 작가의 인품 안에도 미적 감동을 주는 요인이 들어 있어서, 두 영역을 도식적으로 나누기가 어려운 것이다. 문학성이든 철학성이든 너무 그것을 의식하고 대작(大作)을 노리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이다. 특히 자신의 인품 또는 마음의 세계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처럼 미화(美化)해서 자화상을 그리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좋은 수필을 쓰는 가장 쉬운 길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냄에 있다. 야구의 지도자는 타자(打者)에게 충고하기를 홈런을 의식하고 어깨에 힘을 주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그저 맞춘다는 기분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망이질을 할 때 안타도 나오고 홈런도 나온다고 그들은 누누이 강조한다. 수필의 경우도 근본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음의 밭을 갈며 성실하게 사는 것도 그 준비의 하나가 될 것이고,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 그 깊은 곳을 뚫어보는 관찰의 습관도 준비의 하나가 될 것이며, 좋은 책 또는 좋은 작품을 음미해 가며 읽는 것도 준비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여름 베짱이의 마지막 연주 김우종 그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내가 '서대문 큰집'에서 돌아오던 여름에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고 세상은 더욱 험악해졌었다. 다음 해에 나는 수필집 《그래도 살고 싶은 인생》과 평론집이 판매 배포 금지되고 경희대도 떠나게 되었다. 가깝던 문단 친구들도 멀어져 갔다. '철새들'이 다 떠난 자리에서 기약 없는 긴 방학이 시작되자 나도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한강 너머 양녕대군(讓寧大君) 묘 곁의 약수터로 이사했다. 그리고 날마다 손자 손을 잡거나 업어주며 약수터에 나가 앉아 멀리 한강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처서도 지나고 여름이 다 갈 무렵의 어느 날 저녁이다. 환한 형광등 불빛을 찾아서 방으로 귀여운 손님객이 날아들었다. 낮에 약수터에서 만났던 베짱이가 마을을 왔나 보다. 곤충들이 밤에 불빛을 찾는 것은 당연하지만 행여 밤바람이 차져서 내 방으로 찾아든 거라면 베짱이가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장난을 하고 싶어졌다. 그 녀석을 잡아서 모시옷 같은 날개에 색동옷 무늬를 입혔다. 빨강, 남색, 노랑, 초록 등, 그리고 마당 풀밭에 그대로 놓아 주었다. 웬일인지 베짱이는 약수터 산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바라기와 호박잎에도 앉고, 장미가지에도 앉으면서 우리 색동옷 귀염둥이는 목장에서 늘 혼자 잘 놀아주었다. 어쩌다 안 보이면 나는 궁금해서 이곳저곳을 수색하다가 단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를 먹이다가도 다음 날쯤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여간 반갑지 않았다. 큰 길의 미화원처럼 눈에 띄는 복장을 입혀놓기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 녀석은 몸을 숨겼다가도 내게 들키고 마는 것이었으니까. "아빠, 베짱이는 여기서 살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면 멀리 떠나버리는 거지." "어디루." "그냥 죽는 거야." 딸은 개구리와 도마뱀과 곤충들을 참 좋아하는데 이렇게 죽는다는 말에 좀 시무룩해졌다. 딸이 그날 이후 베짱이에 대해서 매일 생사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관심이 커지자 나도 아침마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하며 그들에게 안부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녀석이 또 내 방으로 들어왔다. 색동옷차림 후 첫 번째 방문이었다. 그런데 창문에 앉아 있던 녀석은 놀랍게도 내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쩍 쩍'하며 입맛을 다시더니 날개를 조금쯤 엉거주춤하게 든 상태를 유지하면서, 기막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쩍 쩍'은 본 연주를 위한 조율이었나 보다. 베짱이의 연주는 엿장수의 경쾌한 가위질 소리이며 치렁치렁한 머리를 사정없이 싹뚝싹뚝 잘라버리는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다. 그 소리는 너무도 경쾌하고 청아하고 시원하다. 그렇게 울던 베짱이는 관람석에 앉아 있는 내가 너무 유심히 보고 있어서 멋쩍어진 탓인지 푸르르 날아서 전등 줄에 동동 매달렸다. 형광등과 백열등과 발갛고 작은 등을 필요에 따라 조종하는 가는 줄에 매달려서 이번에는 그네를 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베짱이는 방 안에 없었다. 목장 풀밭에 내린 이슬이 차가웠다. 나는 그녀석이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봤지만 어디에서도 색동저고리의 행방은 묘연했다. 사마귀에 잡혀 먹힌 것일까. 내 집 뜰에는 커다란 사마귀가 한 마리 있다. 지난 번 아주 무덥던 어느 날 그의 등에는 자기보다 훨씬 날씬하고 작은 사마귀가 업혀 있었다. 수놈이 올라타고 사랑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방에 있다가 얼마 뒤에 나와 보니 너무도 어이없는 광경에서 기가 막혔다. 암놈이 조금 전까지 사랑하던 자기 '남편'을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다 먹어 치우고 이번에는 '등심'을 뜯어 먹을 차례였다. 이런 잔인성 야만성과 왕성한 식욕이면 우리 색동저고리도 벌써 그의 아침 식사거리가 돼 버렸던 것 아닐까? 나는 남편 잡아먹은 죄인을 당장 우리 집 낙원에서 추방해 버렸다. 뱀 잡는 땅꾼처럼 그의 목덜미를 잽싸게 틀어쥔 다음 담 밖으로 힘껏 던져 버렸다. 그런데 그 후 그는 다시 우리 풀밭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다시 그의 목덜미를 잡고 담 밖으로 내던지는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 후 그는 또 스며들었을까? 확실히 알 수가 없었지만 장발장을 쫓던 경감처럼 그는 결코 먹이를 두고 단념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록달록 색동옷 스타복에 멋진 가위질 연주를 해준 베짱이는 결국 그것을 마지막으로 하고 사마귀에게 잡혀간 것일까? 남편 잡아먹은 사마귀를 내가 의심하는 이유는 그 녀석 말고는 아무도 혐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밤 풀밭 어디엔가 잠복해서 삼각형 대가리를 치켜들고 베짱이의 명연주를 다 듣고 있다가 그가 밖으로 나오자 소리 없이 다가가서 잽싸게 덮치고 사라졌을 것이다. 사마귀는 발자국 소리가 없다. 색깔도 풀빛과 꼭 같은 위장색이다. 그의 접근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고 은밀히 먹이에게 접근하는 그는 긴 목을 뒤로 빳빳하게 제키고 상대를 노리다가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내게 접근했던 보안사 사람들도 그랬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교내에 스며들어서 내게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명강의(?)를 다 듣고 있다가 내가 잠깐 목을 축이려고 옆방 휴게실에 들어서자 잽싸게 양쪽에서 달려들어 팔을 꽉 끼고 계단을 내려가 검은 지프차에 밀어 넣었다. 사마귀와 꼭 같았다. 그래서 학생은 물론이고 교내의 아무도 내가 그렇게 사라진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아내는 울면서 며칠 동안 나를 찾아 헤맨 것이다. 나는 그들이 언제부터 내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는지 잘 모른다. 어쨌든 그 당시의 기관원이라는 사람들은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특별한 먹이가 나타나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접근했다. 특별한 먹이는 다름이 아니다. 베짱이처럼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독재 정권 체제에 방해되는 자는 그들의 먹이다. 그들은 남들을 똥개처럼 길들이려 하고 순종을 강요했다. 다만 아파트에서 성대수술을 받고 쉰 목소리만 내는 강아지처럼 조용하고 주인을 잘 따르면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의 베짱이처럼 감히 밝은 조명까지 받아가며 대담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자는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오면 그렇게 짖지 못하는 개가 되기 쉬웠다. 그렇지만 우리 집 베짱이의 그날 연주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삼각형 대가리들이 도처에서 노리고 있는데 밝은 불빛의 무대에까지 나서서 제 목소리를 내는 당당함, 그리고 여름도 다 지나서 생을 마감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그렇게 최고의 명연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가려고 한 치열한 예술정신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런 멋진 연주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제13회 현대수필문학대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