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3월 27일 정미 8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유생 윤재후 등이 고 군수 김정의 부조묘 은전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다
충청도·전라도의 유생 윤재후(尹載厚) 등이 상소하기를,
"고(故) 군수(郡守) 김정(金淨)은 우리 나라의 큰 현인(賢人)입니다. 그가 을해년016) 에 온릉(溫陵)017) 을 복원(復元)할 것을 청한 상소문은, 이미 추락된 인륜 기강을 다시 세우고 흔들리게 된 나라 근본을 보호한 것으로서, 그 의리(義理)의 엄정(嚴正)함은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심할 것이 없고, 공렬(功烈)의 탁월함은 역사책에 실리어 빛나고 있습니다.
아, 그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강포한 신하가 설쳐대는 바람에 국모(國母)가 쫓겨나고, 간악한 흉적이 기회를 엿보아 원자(元子)가 위험에 놓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윤리가 끊어지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격분하고 있었는데, 김정이 이때 지방 고을에 재임하고 있으면서 위험을 피하지 않고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상소를 올려 극력 말함으로써, 모후(母后)의 억울함이 비로소 드러나고 세자(世子)의 위기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또한 2백 년이 지난 뒤에 온릉이 비로소 복위(復位)되고 의리가 바로 펴진 것은, 모두가 이 상소문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오랜 후세에도 늠름하게 생기(生氣)를 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묘년의 참화(慘禍)가 이 상소로 인해 빚어져 김정이 이 참화를 당했을 때, 그의 처(妻)인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 송씨(宋氏)는 원통하게 여긴 끝에 자진(自盡)을 하였는데, 죽기에 앞서 유언하기를 ‘공론(公論)이 정해지려면 반드시 백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이니 죽은 사람의 원통함이 풀어지기 전에는 비록 백대(百代)가 지나가더라도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손들은 그 유언을 지키어 신주를 그대로 받들어 오면서 온릉에 대한 의리가 펴지는 날을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영종(英宗)기미년018) 봄에 이르러 온릉을 복위하였고 그해 여름에 특별히 김정에게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듣건대, 선정(先正)이 화를 당한 후 그 부인(夫人)이 「신주(神主)를 묻지 말라.」고 한 유언(遺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아직껏 그 집에다 신주를 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나라에서 그를 제사지내주는 날에, 그의 신주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조정에서도 또한 어찌 차마 그대로 묻어버리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에 온릉이 복위(復位)된 것도 진실로 선정(先正)의 한 장 상소로 말미암았고 보면, 또한 나라에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특별히 부조묘(不祧廟)를 허락하고 이어 그 신주에 제사를 지내주도록 한다면 타당할 듯합니다.’고 하니, 상께서 연석의 신하들에게 일일이 물어본 뒤에 ‘이번에 제사를 지내주는 일은 묘소(墓所)에서 거행하고, 부조묘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거나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된 훈신(勳臣) 이외에 대해서는 부조묘(不祧廟)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도리로서는, 본가(本家)에 맡기고 조정에서는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김 판부사(金判府事)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무인년019) 봄에 온릉의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찬집(纂輯)할 때에, 선대왕께서 복위를 청했던 그의 상소문을 친히 보시고 하교하기를 ‘김정은 일개 군수로서 글을 올렸는데 말이 엄하고 의리가 곧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기미년에 단지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은, 흠전(欠典)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시고는, 이어 상상(上相)에 추증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 글을 보고 감동을 느끼시어 충성과 절의를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특지(特旨)로 추증을 하신 은혜는, 진정 예사로운 데서 크게 벗어나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아, 당초 기미년에 수의(收議)를 할 때는 과연 절의를 지키다 죽은 이에게 부조묘의 은전을 허락해준 예가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김재로가 난색을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술년 이후로는 비로소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에게도 부조묘의 은전을 허락하는 전례가 시작되어 차례차례 이 은전을 입었고, 중간에 또 폭넓게 조사하여 공렬(功烈)을 추후 기념하여 부조묘의 은전을 베풀어 준 경우도 한둘이 아닙니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한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등과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등과 임진년에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등과 고(故) 상신(相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모두 절의(節義)로써 부조묘의 은전을 입었고,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 등은 모두 공렬(功烈)로써 부조묘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또한 몇 해 전에 문충공(文忠公) 이시직(李時稷), 충현공(忠顯公) 송시영(宋時榮) 등도 절의로써 유생들의 소청(疏請)으로 인해 모두들 부조묘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또 더구나 근년에는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에 대해서도 그의 신주(神主)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특별히 부조묘의 은전을 내리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전례(前例)가 뚜렷하여 근거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니, 김정만이 유독 이 은전을 입지 못한다면 어찌 실망하여 모로 돌아앉아 한탄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온릉에 비석을 세우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왕의 뜻을 계승해나가는 성상의 효성으로 선후(先后)를 광복(光復)하는 사적을 천명하게 되었으니, 김정의 위충(危忠)·대절(大節)도 장차 명백하게 표창(表彰)될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김정의 살아서나 죽은 후의 운수가 이미 온릉에 관한 의리와 더불어 관련이 있고 보면, 지난날에 결말을 보지 못한 은전은 마치 오늘이 오기를 기다린 듯한 감이 있습니다. 삼가 어서 성명(成命)을 내리시어 부조묘의 은전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에 대하여 부조묘의 은전을 시행할 일은, 기미년에 온릉을 복위할 때 고(故) 상신(相臣)이 연석에서 아뢴 말이, 바뀔 수 없는 상론(常論)이라고 하겠는데, 선조(先朝)의 처분을 윤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에 대해 부조묘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아직 정해진 규식이 없었다가, 갑술년020)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해진 제도가 있게 되었다. 문충공 이정귀, 충숙공 서성 같은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공(事功)이 볼만하다는 이유로 다같이 부조묘의 은전을 베풀었다. 그러니 지금 문간공에 대해 부조묘의 은전을 시행할 일에 있어서,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을 갖겠는가. 더구나 문간공의 아내가 자기 목숨을 끊으면서 유언하기를 ‘공론이 정해지려면 반드시 백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니 원통함이 풀어지기 전에는 비록 백대(百代)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신주를 땅에 묻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말이 매우 애처롭고 그 절의가 더없이 고상하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도 지난 기미년에 신주를 묻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것인데, 올해 마침 온릉에 비석을 세우는 공사를 하게 되었고 유생들의 상소가 이때에 올라왔으니, 또한 마치 기다려왔던 일인 듯하다고 하겠다. 너희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한다."
하였다. 이어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거행토록 하고, 날을 받아 승지를 보내어 문간공의 사당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註 016]을해년 : 1515 중종 10년.
[註 017]온릉(溫陵) : 중종의 비인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능.
[註 018]기미년 : 1739 영조 15년.
[註 019]무인년 : 1758 영조 34년.
[註 020]갑술년 : 1754 영조 30년.
○忠淸、全羅道儒生尹載厚等上疏曰:
故郡守金淨, 我朝大賢也。 乙亥年請復溫陵之疏, 立人紀於旣墜, 護國本於將搖, 義理之嚴正, 質鬼神而無疑; 功烈之卓絶, 載簡策而有光。 嗚呼! 當時之事, 尙忍言哉? 强臣跋扈, 國母廢黜, 奸凶覬覦, 元子危疑。 民彝斁絶, 擧國齊憤, 而淨職在外郡, 不避機鋒, 而糾合同志, 抗疏力言, 母后之冤始暴, 儲君之危復奠。 二百年後, 溫陵始乃復位, 義理克伸者, 莫不權輿於此疏, 百代之下, 澟澟有生氣。 己卯之禍, 因此疏而醞釀, 淨之被禍也, 其妻贈貞敬夫人 宋氏, 痛冤自盡, 臨歿遺言: "公論之正, 必竢百年, 幽冤未伸之前, 雖百代勿埋神主。" 子孫守其遺敎, 留奉神主, 以待溫陵義理之一伸矣。 及至英宗己未春, 溫陵復位, 是年夏, 特命致祭于淨, 右議政臣宋寅明筵白曰: "聞先正被禍後, 其夫人有勿埋神主之遺言, 故其子孫尙奉神主於其家" 云。 今當賜祭之日, 旣知神主之尙在, 則朝家亦何忍使之埋安耶? 況今溫陵復位, 亶由先正一疏, 則亦可謂有功於國家。 今若特許不祧, 而仍令致祭於其神主, 則恐爲便當矣。" 自上歷詢筵臣後, 有今番致祭, 則行於墓所。 不祧一款, 議大臣稟處之命, 判中樞府事金在魯以爲: "國家於文廟從祀、太廟配享勳臣外, 未嘗不祧, 而爲今之道, 付諸本家, 朝家勿與焉。" 命依金判府議施行。 戊寅春, 溫陵誌狀之纂輯也, 先大王親覽其請復疏, 而下敎曰: "金淨以一郡守抗章, 辭嚴義正, 百載之下, 令人澟然。 己未年只錄其後, 可謂欠典。" 仍命貤贈上相, 嗚呼! 我聖祖臨文興感, 奬歎忠節, 特旨褒贈之眷, 誠出尋常萬萬矣。 噫! 當初己未收議時, 則果無節義不祧之例, 故金在魯之持難, 蓋以此也, 而自甲戌以後, 始起節義不祧之例, 次第蒙恩, 間又旁照, 追紀功烈, 而不祧者亦非一二。 南漢斥和臣忠正公 洪翼漢等, 江都殉節人文忠公 金尙容等, 壬辰節死人忠烈公 宋象賢、文烈公 趙憲、忠烈公 高敬命等, 故相臣金宗瑞, 皆以節義不祧, 文忠公 李廷龜、忠肅公 徐渻、文翼公 李德馨、文忠公 金誠一等, 皆以功烈不祧。 至於年前文忠公、 李時稷、忠顯公 宋時榮等, 亦以節義, 因儒生疏請, 而擧蒙不祧之典。 又況於近年, 先正臣文靖公 金麟厚以其神主之尙在, 特命不祧。 已例班班, 可據非一, 則淨之獨未蒙恩, 豈無向隅之歎乎? 伏聞, 溫陵有勒石之命。 以聖上繼述之孝, 闡先后光復之蹟, 淨之危忠大節, 又將表白, 而仍念, 淨生前死後之屈伸, 旣與溫陵義理, 無不相關, 則惟前日未究竟之恩典, 似若有待於今日。 伏乞遄降成命, 許以不祧。
批曰: "文簡公 金淨不祧事, 己未溫陵復位時, 故相筵奏, 可謂不易之常論, 先朝處分, 無異允可, 而在其時, 則節義人不祧, 未有成式。 至甲戌以後, 始有定制, 如文忠公 李廷龜、忠肅公 徐渻諸人, 亦以事功之可觀, 一體不祧。 今於文簡公之不祧, 寧或持疑? 況文簡之室人辦命也, 其說曰: ‘公論之定, 必待百年, 冤未伸, 雖百代勿埋神主。’ 其言切悲, 其節絶高。 以此, 朝家勿許埋置於去己未, 而今年適營溫陵立碑之役, 諸儒之疏, 登徹於此時, 亦可謂若有待焉, 特許爾等之請。" 仍令該曹, 照例擧行, 卜日遣承旨, 致祭于文簡之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