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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 누가복음 11:2-13]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 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말씀나눔]
조금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 연휴가 되면 타지에 살다가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 것이 꼭 어떤 용건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 해결하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니죠?
그저 얼굴보고 함께하기 위해 가지 않습니까?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죠!
여러분은 부모님과 대화할 때 항상 부모님께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또는 어떤 의사 결정을 위해서 대화합니까?
식구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마다 협상해야 한다면 매우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상태에서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정상적인 가족의 대화라고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녁에 부모님과 식탁에 앉아서 하루 중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내어 놓고 수다를 떨 때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이 없어도 가족 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대화가 없는 가족이 과연 화목하다 할 수 있을까요?
화목하려면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가 없으면 사소한 일에도 오해가 생기고 그 작은 일이 갈등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데 대화가 필수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다보면 필요에 따라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화의 목적이 단지 문제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관공서 민원업무나 은행 업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민원 창구도 아닌데 매번 무언가 요구하고 항상 무슨 결정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습니까?
결혼한 자녀가 날마다 찾아오는데 올 때마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한다면 부모님들이 다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요구사항을 들어줘도 똑같은 요구를 계속 반복한다면 어떻게해야 될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부모님들이 어린자녀들을 양육할 때 자녀들이 부모에게 해달라고 하는 것들 다 들어주나요? 들어주지 않는 것도 있지요?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아이에게 불필요하거나, 오히려 해가 된다면 해주지 않습니다.
기도의 자리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가면을 벗어버리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더 친근해 집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마음에 있는 말들을 다 털어 놓고 수다를 떨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멀리 바라만 보시는 근엄한 하나님이 아니라 친근하게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매번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는 기도만 한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시죠?
마태복음 6:31-32에 보면,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보다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부모가 퇴근길에 집에 전화 했더니 아이가 과자를 사달라고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어떤 과자를 좋아하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사달라고 할 때 그 과자를 사가지고 집에 갑니다. 아이가 그 과자를 손에 들고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함께 기뻐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은다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기도 노트를 기록하고 있습니까? 기도노트를 사용하면,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 노트를 적다보면 시간이 흐른 뒤에 응답하지 않으신 내 기도들이 오히려 내게 복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응답 받지 않음도 결과적으로 보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응답 받아야 좋은 기도이고 능력 있는 기도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이 응답하시기 전에 기도를 포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급하면 기도 응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은 인내로 이루는 것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유유 부단함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유 부단함이란 전투의지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전투준비를 갖추고 언제든지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5분 대기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중요한 몇 가지만 확인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절에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는 이 첫 번째 부분이 기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응답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바로 이 부분에 저촉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할 때에 내 유익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언급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두 번째,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4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말씀은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조건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으로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건을 예로 들자면 출애굽 과정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극적인 장면을 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4:13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함께 구원을 받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어마무시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만 달란트 빚 진자가 그 빚을 탕감 받고 그 은혜에 감복하여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음을 용서하기를 결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라는 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3절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일용한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과 영적인 양식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언급되는 생명의 떡과 같이 우리의 영이 살 수 있는 양식과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기 위해 먹어야할 양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일용할’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4에 보면 생존에 필요한 하루 양식만큼만 만나를 거둘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거두기 위해 날마다 광야로 나서야 했습니다.
즉, 양식을 거두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을 상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영적 양식도 중요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날 주신 일용한 영의 양식으로 하루를 살아내다가 하루를 살아내며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으로 일기를 쓰듯이 하루를 돌아보며 마무리하면 적어도 하나님을 하루에 두 번 이상 상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4절 하반부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시험을 당합니다.
누가복음 4:13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얼마동안’이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마귀들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얼마동안만 떠나있었다는 것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발자국 물러서서 공격할 틈을 옅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은 한번 통과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유는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함입니다.
앞에 기록한 네 가지 이유 또한 성령 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3:16과 6:19에 성도들은 이미 성령의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미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는데도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될까요?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교인들에게 성령 충만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신비한 체험이라고 설명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어떤 황홀경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주님의 통치가 내 삶의 전반에 미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언제나 성령님이 주인 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이란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이 우리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신앙의 연륜과는 무관합니다.
이제 막 교회에 출석하는 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 충만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때어 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고, 또 주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 됨은 주님이 마지막까지 애타게 기도하시던 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살펴본 기도의 목적들은 모두 성령 충만에 관련된 것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걸림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기도의 원칙을 지켜서 바르게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주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문제가 우리 안에 있었듯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실마리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미리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릴 적에 원하는 부모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부모님의 모습과 실재 부모님의 모습이 일치했습니까?
저는 어릴 적에 자상하고 따뜻한 부모님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고 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이셨기 때문에 다정한 면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정을 느끼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어릴적 엄격한 아버지, 여장부 같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는지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엄격하고 냉정한 분이셨습니다. 입술로는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라고 노래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주님은 멀리 계시는 심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 자녀들에게 비친 제 모습도 제 부모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녀들에게 냉정한 모습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첫째와 둘째가 상담 중에 그린 가족의 모습을 보면, 저는 전지가위를 들고 나무들을 다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저는 정원사와 같이 비쭉 삐져나온 부분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잘라내는 심판자와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이후로 저는 자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자녀들과 대화를 통해 차츰 차츰 자녀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저를 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녀들과 사소한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치는 사이가 되어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기도스타일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격식을 가지고 진중하게 기도하던 제가 하나님 앞에 푸념도 하고, 때로는 아이처럼 조르기도 하고, 때로는 자녀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듯이 저의 마음을 하나님께 풀어 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 스타일이 바뀐 후로는 하나님이 엄격한 심판자의 모습보다는 보다 지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저를 다정히 안아주시는 친밀한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변화되는 제 모습을 통해서 자녀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향해 제 마음을 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친구들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나요?
만약에 하나님과 여러분이 친구들보다 더 친밀하지 못하다면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상담을 하다보면 갈등이 표현을 잘 못해서발생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마음과는 다르게 표현되어서 상대방을 오해 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담 시간에 대화에 관련한 교육을 시키고 다음 상담할 때 한 주간 생활 하면서실재로 적용해 보고 올 것을 숙제로 부여합니다.
이런 상담과 훈련을 통해서 가족 간의 관계가 많이 호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화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어색하든지... 손발이 오그러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말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쉬워 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면 그 다음부터 기도가 부드러워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대전에 있는 아들과 자주 전화 통화를 합니다.
아들이 퇴근길에 전화를 하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기도하다보니 한두 시간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경험이있으십니까?
기도하겠다고 자리에 앉아서 10-20분 지나면 더 이상 할 기도가 없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서 살펴 본 것처럼 왜 기도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는 잘 알지만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은 여전히 내 인식이 경직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이시지만 우리에게는아버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과 식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며 식구가 맞다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친밀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대통령이나 교장 선생님 대하듯이 기도한다면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직 응답 받기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응답받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세상의 계산법과 처세법은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십시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묶어주는 대화의 끈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 마음을 숨기고, 내가 원하는 가면을 써서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됩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마음을 토해 놓았던 것처럼
하나님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린다고 가려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목적은 성령 충만 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또 나를 위해 주시는 일용한 양식을 날마다 받아먹으며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삶!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후로 저와 여러분 모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찬송가]
365장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Bb),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F)
[은혜의 찬양]
오늘 집을 나서기 전(D),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D),기도 할 수 있는데(G),
찬양의 제사드리며(G), 예수 예수(A), 이제 역전되리라(A), 그리 아니하실지라도(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