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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風詠樓記[後孫煥弼]
蘫院之創設久矣。始於周茂陵竹溪之後。而創之者。惟介菴姜先生也。介菴生于文獻公五十載之下。慕先生之德。講先生之道。與鄕士若干人。同心協贊。立祠宇講堂東西齋及前門數十餘間。以爲尊先賢牖後學之地。而仍以命名焉各有義。若明誠,居敬,集義之類是也。且夫曰愛蓮。曰詠梅者。齋前鑿塘。塘外築塢。蓮可賞而梅可賦也。曰遵道者。由是而行。道在斯焉。於是乎院之制始大備矣。然而學者於講論游息之暇。不可無暢敍之所。先父老圖惟經始之未遑者。數百年于茲矣。迺於庚子秋。儒議復起。屬家兄煥祖幹其事。蓋以其尊賢衛道。夙有誠力故耳。于以營繕百務。實檢擧是。盧君光表,姜君大魯,族弟煥龍。亦與有相焉。咸以謂與其創立層榭。徒取觀美。曷若因舊貫增新制。恢拓我胸次也。遂就遵道門上。葺之以小樓。樓凡上下十許間。以翌年辛丑六月二十日落之。遠近章甫。濟濟趨賀。主守姜侯彝文亦來會。揖讓之風。進退之節。蔚然可觀也。夫樓之爲制也。不甚宏傑。而奐輪翬革。倏然改觀。不百尺而迥臨。有四望之攸同。郊坰平曠。川澤縈洄。遙林蔥蒨。晩靄依霏。巖山數黛。入暮雨而半隱。㵢溪一面。帶朝旭而全露。竹柏前村。啼鳥催春。䆉稏古巷。老農知秋。風月呈美。煙霞獻技。一瞥千奇。恍惚難狀。登斯樓也。則心廣神怡。涵泳灑落。悠然有自得這意。矧乎頭流萬疊之峯。花林九曲之流。庶可以覽先生之淸風。仰先生之氣象。恰若列侍函筵。有點也鏗爾舍瑟之趣。故因名之風詠樓。若遵道舊楣。則介菴之錫號。梅菴之心畫。列揭于門上。以示不泯先賢遺蹟之意。噫。曾點。夫子之徒也。吾儕。先生之徒也。學夫子而有風乎詠而之趣。則學先生者。烏可無一般這箇想耶。遂援瑟而爲之歌曰。麗景遲遲兮增乎春服。無小無大兮冠童五六。鳳凰高騫兮盍余游息。優遊厭飫兮使自得。已見大意兮融理而蛻慾。蘫水之洋洋兮可以浴。孤臺之屹屹兮可以風。茲樓之適成兮吾將詠歸渢渢。落成之日。鄕長老屬余爲之記。余以謏識。極知僭汰。而長老之勤託。有不可孤。是爲之記。
풍영루기(風詠樓記) [후손(後孫) 정환필(鄭煥弼)] *신축년(1841, 헌종7) 6월 20일 낙성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창설(創設)된 지 오래되었다. 주무릉(周武陵)이 죽계(竹溪)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뒤에 이 서원을 창설한 자는 개암(介庵) 강 선생(姜先生)이다. 개암은 문헌공(文獻公)보다 50년 뒤에 태어나서 선생의 덕(德)을 사모하고 선생의 도(道)를 강론하였다. 향사(鄕士) 약간 명과 마음을 함께하여 협찬해서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및 전문(前門) 수십여 칸을 세워서 선현(先賢)을 존숭하고 후학(後學)을 계도하는 터전을 삼았다. 이어 명명한 것이 각각 의의가 있었으니, 명성당(明誠堂), 거경재(居敬齋), 집의재(集義齋)와 같은 부류가 바로 이것이다. 또 애련헌(愛蓮軒)이라 하고 영매헌(詠梅軒)이라고 한 것은, 재사(齋舍) 앞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언덕을 쌓아 연꽃을 감상할 만하고 매화를 읊을 만하였기 때문이다.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한 것은, 이로 말미암아 행하면 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서원의 제도가 비로소 크게 갖추어졌다.
그러나 학자들이 강론하고 유식(游息)하는 여가에 마음을 후련하게 풀 곳이 꼭 필요했지만, 선부로(先父老)들이 공사를 시작할 겨를이 없은 지가 지금 수백 년이 되었다. 이에 경자년(1840, 헌종6) 가을에 유생(儒生)들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 가형(家兄) 정환조(鄭煥祖)에게 그 일을 주관하라고 부탁하였으니, 가형이 현인을 존숭하고 도를 보호하는 데 일찍이 성력(誠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립하는 모든 일을 실제로 점검하여 거행하였고, 노광표(盧光表) 군과 강대로(姜大魯) 군과 족제(族弟) 정환룡(鄭煥龍)도 참여하여 도왔다. 모두들 이르기를 “여러 층의 높은 누(樓)를 창립하여 한갓 외관을 아름답게 하기보다는 옛것을 인하여 새로 지어 우리들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고, 드디어 준도문 위에다가 소루(小樓)를 지으니, 누가 상하 모두 10여 칸이다. 다음 해인 신축년(1841, 헌종7) 6월 20일에 낙성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많이들 달려와 하례하고 군수 강후 이문(姜侯彝文)도 참석하여 읍양(揖讓)의 모습과 진퇴(進退)의 절차가 성대히 볼만하였다.
누의 제도가 매우 크거나 빼어나진 않지만 장대하고 아름다운 휘혁(翬革)이 면모를 일신하고, 백 척이 안 되지만 높이 솟아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외(郊外)가 평평하고 넓으며 천택(川澤)이 감싸 흐르고, 멀리 있는 숲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저물녘의 노을은 성대하다. 백암산(白巖山)의 몇몇 짙푸른 봉우리가 저녁 빗속에 들어 반이 숨었고, 뇌계(㵢溪)의 한 방면이 아침 해를 띠고 온전히 드러난다. 대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앞쪽 촌락에선 우는 새가 봄을 재촉하고, 농사짓는 옛 마을에선 늙은 농부가 가을철을 안다. 풍월(風月)은 아름다움을 바치고 연하(煙霞)는 기교를 부리니, 눈 깜짝할 사이의 온갖 기이한 모양을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렵다. 이 누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즐거워지며 함영(涵泳)하고 쇄락(灑落)하여 유연히 이러한 의사를 자득(自得)하게 된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의 만 겹 봉우리와 화림천(花林川)의 아홉 굽이 흐르는 물에서 선생의 청풍(淸風)을 보고 선생의 기상(氣象)을 우러러볼 수 있어서 흡사 강석(講席)에 나란히 모시고 증점(曾點)이 쟁그렁 비파를 내려놓고 대답한 아취(雅趣)가 있는 듯함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인하여 ‘풍영루(風詠樓)’라고 명명하였다. 준도문(遵道門)의 옛 현판은 개암(介庵)이 명명하고 매암(梅菴)이 쓴 글씨이므로, 문 위에 나란히 걸어서 선현의 유적을 민멸시키지 않는 뜻을 보인다.
아, 증점은 부자의 문도이고 우리들은 선생의 문도이니, 증점이 부자를 배워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 아취가 있었고 보면 선생을 배우는 자가 어찌 증점과 똑같은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비파를 당겨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봄의 해가 길고 길어 / 麗景遲遲兮
봄옷을 입었도다 / 增乎春服
작은이 큰이 통틀어 / 無小無大兮
관자와 동자 대여섯일세 / 冠童五六
봉황이 높이 날아오르나니 / 鳳凰高騫兮
어찌 내가 유식하지 않을쏜가 / 盍余游息
실컷 한가롭게 노닐어 / 優遊厭飫兮
스스로 터득하게 하노라 / 使自得
이미 대의를 보았으니 / 已見大意兮
이치를 알아 욕심을 벗어나리 / 融理而蛻慾
넓디넓은 남계의 물은 / 灆水之洋洋兮
몸을 씻을 만하고 / 可以浴
높디높은 외로운 대는 / 高臺之屹屹兮
바람을 쐴 만하도다 / 可以風
이 누가 마침 이루어지니 / 玆樓之適成兮
내 장차 읊조리며 가서 노닐리라 / 吾將詠歸渢渢
낙성하는 날에 고을의 장로(長老)들이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부탁하였다. 식견이 부족한 나로서는 매우 참람된 줄을 알지만 장로들의 은근한 부탁을 저버릴 수 없기에 이렇게 기문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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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煥弼 1798 1859 河東 殷賚 梧潭
기정진(奇正鎭)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蘆沙先生文集卷之二十八 / 行狀 / 梧潭處士鄭君殷賚行狀
殷賚甫諱煥弼。鄭氏系出河東。入我朝。有諱六乙以咸吉道虞矦。殉李施愛之難。贈左尹。是生諱汝昌。卽一蠧先生。嗣孫連世蔭仕。玄孫諱弘緖號松灘。文科。有尼之者。官不顯。其七世孫諱東老唐津縣監。年例加折衝。夫人權氏。有五子。殷賚甫卽其季也。正宗戊午三月二十五日生。純祖甲午。中進士試。有賜樂之榮。自後漸不喜赴擧。以薦三擬寢郞而竟不調。哲宗己未五月初七日卒。享年六十二。殷賚甫生於世蔭家。而無進取意。家素饒益。而又泊於財。蓋其恬靜冲澹。天姿然也。平生惟篤好文編。見人有善。若己有之。其好惡甚公正。不可罔以虛聲。文思贍敏。或於對話造次之頃。口占成言。筆畫完厚渾成。無峭刻輕佻態。早師剛齋宋先生。與四方賢士遊。凡於經禮肯綮。多所究覈。而所不數數然者。理氣之說。人物性之辨也。折衝公訓子有法。殷賚甫能順適其意。私室相距稍閒。而冠帶定省。不以風雨寒暑而或懈。視饍寒煖。靡閒三時。年近四十。不敢有私財。居喪毁瘠。衰絰不脫。其於兄弟。終身無閒言。食必均味。酒無獨酌。怡怡之氣。洋溢家門。其接人恕過於嚴。雖於子姪僮僕亦然。坊有故徐孝子綽楔。哀其無子孫而頹圮也。爲捐其財而新之。其不忍如此。常戒其子曰。以謙恭持身。以儉約處家。又以戒宥二字書壁。以欹器之義申戒曰。虛則欹。盈則覆。汝宜以中正之道爲心也。晩年。築竹林精舍於家山牛鳴地。傍無長物。左圖右史而已。靜裏所養。蓋日就昭曠。而遽不起疾矣。葬於某邑某原。妻蔚山金氏。河西後孫參奉章煥女。有賢行。後殷賚一年圽。葬某原。連擧七女。後生二男。男在馹,在悳。金基弘,徐亮淳,奇東敎,安璟煥,任洙直,李言愚,朴來晉壻也。內外孫若干人。在馹以狀草屬正鎭。俾序次之。以正鎭於其先考友也。自念素來未嘗爲人作行狀。恐若拙畫肖人。爽失本來精神眉目也。第在馹之所爲狀草。容有當添刪者。而知殷賚久且深。宜莫如我。吾而不任其責。誰當爲者。篇未成而在馹又逝。人事短促若此。悲夫。秉筆君子欲知殷賚之平生。庶於此攷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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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風詠樓重修記[奇正鎭]
大行王十三年丁未。蘫溪書院之風詠樓燬。粤三年己酉。始克重建。上庠生鄭煥弼。一蠹先生裔孫。致多士之意。命其友生奇正鎭記之。正鎭踧踖不敢卽滋筆。先問樓所以命名之由。煥弼曰。蓋聞聖人之於道。未嘗爲一隅語。且言其一二則如山水言仁智之樂。崇卑狀知禮之德。堂室況造道之域者。皆是也。推斯義也。曾氏之沂上風詠。與顏子之巷居如愚。規模氣象。雖有不同。而學者不可廢一而不講也明矣。是院之有居敬集義齋者。蓋將追曾,孟之志。以事體用之學。是所謂學顏子之所學。而張而不弛。文武不能。發舒精神。休養性情。又烏可無一段事乎。此樓之所以創於後。而命名之不得不然者也。正鎭作而對曰。不亦善夫。其名之也。此固鄙生之所願聞。學者之登斯樓入斯齋者。卽齋樓之扁而體認之。亦可以不迷於所從矣。正鎭又何辭以贊。第念風詠之旨。與鳶飛魚躍。同活潑潑之地。豈可但以張弛言乎哉。此事只問天姿學力。曾氏。惟天姿高。能不由階級而優見大意。無曾氏之天姿。而慕曾氏之風詠。非學力何以哉。惟守之久而後居之安。居之安而後資之深。資之深而後左右逢其原。於是乎舍瑟之對。在吾方寸間矣。所守之地。豈有他哉。不過所謂敬與義而已。先生之淵源實學。雖非後生之蠡測。集諸先生之尙論而想像之。蓋所謂不動而敬。不言而信者。其深厚篤實何如也。及味孤舟下江數句。則隱然有風浴氣象。此豈懸慕企望而得之哉。守之久而自至耳。正鎭衰遲錮廢。雖不獲趁於藏修之列。願與諸君子相勉焉。院有正宇。以享先生。而桐溪,介菴二先生配侑焉。有別祠。㵢溪,松灘二先生享之。頭流,白巖,蘫溪,渭水。皆眺望山水之可記者云。
풍영루 중수기(風詠樓重修記) [기정진(奇正鎭)]
대행왕(大行王) 13년 정미년(1847, 헌종13)에 남계서원의 풍영루가 불에 탔는데, 3년이 지난 기유년(1849, 철종 즉위년)에 비로소 중건하였다. 상상(上庠)의 유생(儒生) 정환필(鄭煥弼)은 일두 선생의 후손인데, 많은 선비들의 뜻으로 그 벗인 유생 기정진에게 기문을 쓰라고 부탁하였다. 정진이 조심스러워 감히 즉시 붓을 적셔 쓰지 못하고, 먼저 누를 명명(命名)한 연유를 물으니, 정환필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도에 있어서 한쪽 면만을 들어 말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우선 그 한두 가지를 말해 본다면, 산수(山水)에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좋아함을 말한 것과 숭비(崇卑)에서 지례(知禮)의 덕을 형상한 것과 당실(堂室)로 도에 나아간 경지를 비유한 것과 같은 것이 모두 바로 이것이다. 이 뜻을 미루어 보면, 증씨(曾氏)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고 한 것과 안자(顔子)가 누추한 시골에서 거처하고 어리석은 듯하였던 것은 규모와 기상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으나, 학자가 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폐하고 강론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서원에 거경재(居敬齋)와 집의재(集義齋)가 있는 것은 장차 증자(曾子)와 맹자(孟子)의 뜻을 추구해서 체용(體用)의 학문을 일삼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는 것이지만 당기기만 하고 늦추지 않는 것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도 능하지 못하였으니, 정신을 발산(發散)하고 성정을 휴양(休養)하는 데 있어서 또 어찌 한 가지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누(樓)가 후일에 창설되고 명명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하였다. 정진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명명한 것이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이는 실로 비루한 내가 듣기를 원했던 바이다. 이 누에 오르고 이 재(齋)에 들어온 학자가 재와 누의 편액에서 그 뜻을 체인(體認)한다면 또한 나아갈 방향을 헤매지 않을 것이니, 정진이 또 무슨 말로 찬양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풍영(風詠)의 뜻은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생동감 넘치는 경계가 똑같으니, 어찌 당기고 늦추는 것으로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자품(資稟)과 학력(學力)만을 물은 것이다. 증씨는 자품이 고상한지라 단계를 말미암지 않고도 넉넉히 대의(大意)를 보았지만, 증씨와 같은 자품이 없으면서 증씨의 풍영만을 사모하는 것은 학력이 아니면 무엇으로 그렇게 하겠는가. 오직 지키기를 오래한 뒤에 거기에 처하기를 편히 하고, 처하기를 편히 하면 그것에 자뢰(資賴)함이 깊게 되고, 자뢰함이 깊게 된 뒤에는 몸의 좌우에서 찾아봐도 학문의 본원을 만날 수 있게 되니, 이에 슬(瑟)을 놓고 대답한 경계가 내 마음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지키는 것이 어찌 다른 데 있겠는가. 이른바 경(敬)과 의(義)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선생의 연원(淵源)과 실학(實學)은 후생의 좁은 소견으로는 헤아려 알 수 없으나, 여러 선생들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일두 선생에 대해 논한 것을 상상해 본다면 이른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된다는 것이니, 그 심후(深厚)하고 독실(篤實)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선생께서 지은 ‘조각배 큰 강을 내려가네.’라는 몇 구절을 음미하기에 이르러서는 무우에서 바람 쐬고 기수에서 목욕한 증점의 기상이 은은히 베어 있으니, 이 어찌 사모하고 바라서 된 것이겠는가. 지키기를 오래해서 자연 이 경지에 이른 것일 뿐이다. 정진은 노년이고 고질병에 걸려 비록 학문에 힘쓰는 반열에 나아갈 수 없으나, 여러 군자들과 함께 서로 권면하기를 원한다.
서원에 정우(正宇)가 있어서 선생을 제향(祭享)하는데 동계(桐溪 정온(鄭縕))와 개암(介庵 강익(姜翼)) 두 선생을 배향하며, 별사(別祠)가 있어서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와 송탄(松灘 정홍서(鄭弘緖)) 두 선생을 배향한다. 두류(頭流), 백암(白巖), 남계(灆溪), 위수(渭水)는 모두 바라다보이는 산수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공근식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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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남(閔在南) 1802년(순조 2)~1873년(고종 10)
晦亭集卷之二 / 詩 / 竹林亭落成日。梧潭老友要余未赴。追和其韻。三首
白雲深處卧高人。門外何曾有雜賓。聞道紅塵時入谷。紛華猶怕損淸眞。
滿庭花木悅人咸。狂客惟知見竹貪。更語主翁留後約。紅桃消息待春三。
知君家在武陵源。何必漁郞更覔村。惟有相思明月夜。海山遺闋拊桐孫。
晦亭集卷之二 / 詩 / 再訪竹林亭主人不遇。復用落成韻追呈。三首
驢背靑山訪主人。竹君當戶笑迎賓。寂寂相看無俗想。更邀林月欵淸眞。
荒唐之說舊桃源。初見舟巖認是村。籍使八年風雨世。竹林閒卧弄稚孫。
蓮蓴蘭菊柳梅咸。觸目芳華供客貪。愧我山庄無長物。石榴花畔但松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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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하용도(河龍圖) 남계서원문루상량문(蘫溪書院門樓上樑文) | |||||
G002+AKS+KSM-XI.1849.4887-20101008.B014a_024_00032_XXX |
분류 | 고문서-시문류-상량문 / 경제-토목·건축-상량문 | |
작성주체 | 발급: 하용도(河龍圖) | |
작성지역 | 함양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 |
작성시기 | 1849년 | |
형태사항 | 크기: 90×43 / 낱장, 1장 / 종이 / 한문 | |
소장정보 | 원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현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
비고 |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24 -남계서원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본 이미지는 원본 소장처인 영암 장암 남계서원의 협조에 의해 촬영되었음. | |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 『고문서집성』24 / 3. 기타문서 / (2) 남계서원문루상량문 / 남계서원문루상량문 / 733 ~쪽 |
灆溪書院門樓上樑文 一有司幼學河龍圖撰
幼學鄭煥文書
菀斯文而輩興丕闡履道之俗/入其門而窺見廣開升堂之階 道之所以當行/樓亦不爲無助 然此機運之回互/故有擧徵之推移 理或極崇而圮/事多乖喪而得 昔乃顚越于火/間者荒陳其墟 洞龍無靈爭及昌平之荊棘/大鶉當紀難救司城之缶罌
棟宇灰飛/榱桷炎熾 遂增多士之僉感/爰謀君子之▣▣ 念玆俎豆之儀/矧乎藏修之址 余亦聞風起者/孰不信道篤乎 地靈三韓/天挺一蠹 嫡傳乎洙泗關閩之上/師友乎佔畢寒暄之間
大江滔滔下孤身而無礙/光風翼翼贊有道而善容 蓋有薰陶而右文/莫不興起而踵武 柧翁之秉義某里後仲連於春秋/介老之賁跡松亭兩子陵於今古 花開而葉落大明之民歟/山高而水長先生之風也 粵瞻㵢水/有卓松灘 奧踐深鈞以孫而纘祖/南來北望移孝而爲忠
綺歟五賢之相傳/允矣百世之永享 東西之庠席翼翼/春秋之絃誦洋洋 奈之何昆玉焚炎/忍可使周道掬草 雲仍首議/章甫應聲 爰擧經歲之營工/丕圖不日之就緖 畵堵于故/定制乎新 伐木丁丁畏呼邪而齊力/運斤齪齪都料匠而繕工
樂擔負而爭先可見氓風之信道/勤樸斲而恐後何患役事之難成 竭巧而智窮/審曲而面勢 橫空列鴈之功必擧/長波臥龍之術斯殫 巨棟流丹勢鴻鳥翬/層甍凝碧氣壓魚鱗 參差粉墉/卷舒珠箔 頭流萬疊當戶而分明/灆水千濤入簾而漾白
玆樓告訖/吾道增光 君子愛蓮顧名而思/後學遵德入戶而奉扃 制度輪扁豈唯遊觀之勝/胸次放曠聿覩風咏之儀 功成旣燬之餘數固存矣/事在積營之後一大幸焉 窃寓羹墻之忱/景仰山斗之望
匪雕匪樸備百工之所圖/苟荒苟專卜千載之永奠 開上庠而顯敞/鎭南服而文明 實爲曠百之鴻休/詎無於萬之▣賀 恭將短引/助擧修樑 抛樑東/曙色當牕睡覺紅 照破冥行迷路者/復今吾道煥天中 抛樑西/入戶徵凉響碧溪
終作盈科歸大海/眼窮叵耐辨端倪 抛樑南/頭流千疊與天參 孤舟剩得推移力/曲曲櫂歌聽兩三 抛樑北/第一天皇凌斗直 却怕吾行止半塗/上峰上上何時極 抛樑上/臥聞星斗回杓響
指天稽首祈無疆/轇轕玄機除祲障 抛樑下/平林道德御珍駕 一聲鼓篋徵生徒/盡在春風範鑄化 伏願上樑之後 孝孫多祉/執籩有儀 覃及韻林/興起斯道 尊德樂善毋懈乎春秋精禋/起敬殫誠益勵于夙夜講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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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상량시집사록(上樑時執事錄)
一有司幼學河龍圖
二有司進士鄭煥弼
成造都有司幼學李熙一
幼學姜胤輔
幼學鄭德奎
幼學鄭東琇
典有司幼學金錫龜
重修典有司幼學陳學道
都片手金俊玉
重修庫直 奴太金
崇禎四己酉二月初四日辰時上樑
· 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분정기 / 교육·문화-서원·향교-분정기
· 작성지역
함양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
· 작성시기
1849년(헌종15) / 숭정4기유2월초4일진시
· 형태사항
크기: 56x42 / 낱장, 1장 / 종이 / 한문
· 소장정보
원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현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24 -남계서원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본 이미지는 원본 소장처인 영암 장암 남계서원의 협조에 의해 촬영되었음.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24 / 3. 기타문서 / (3) 상량시집사록 / 상량시집사록 / 73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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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誌 / 儒行
河龍圖 號疎夫. 人活之后,志氣高尙,才藝絶倫,人稱八能
1940년 민병승(閔丙承) 풍영루중수기(風詠樓重修記) |
G002+AKS+KSM-XG.1940.4887-20101008.B014a_024_00034_XXX |
분류 | 고문서-치부기록류-중수기 / 경제-토목·건축-중수기 |
작성주체 | 발급: 민병승(閔丙承) |
작성지역 | 함양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
작성시기 | 1940년 |
형태사항 | 크기: 28×62 / 낱장, 1장 / 종이 / 한문 |
소장정보 | 원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현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비고 |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24 -남계서원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본 이미지는 원본 소장처인 영암 장암 남계서원의 협조에 의해 촬영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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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詠樓重修記 *신축년(1841, 헌종7) 6월 20일 낙성
天嶺吾東之鄒魯而灆溪其闕里也一蠹鄭先生享焉先生者道學之祖也灆溪者書院之宗也其門遵道往在景陵庚子(1840,헌종6)樓其上榜曰風詠丁未(1847,헌종13)災己酉(1849,헌종15)重建間常葺屋而歲積屋老不可以久安於是遠近章縫咸咨嗟而言曰斯樓而廢者吾林之羞迺於九十三年丁丑(1937)易其舊而改築制度遵舊而完美殊勝自正祠講堂以及東西齋之小廬者幷皆一新粵三年庚辰(1940)冬諸章甫責丙承以記楣顧甚耗昏安敢終辭嗚呼今天下何世夫以堯舜三王之所治孔孟程朱之所敎之華夏禮樂絃誦之聲寥寥者己久則吾東之粵至于今日亦無奈氣數何諸君子乃以此時能重建斯樓以新士子之觀瞻將尋先生之墜緖雖其秉彝之衷有不期然而然者先生之遺風餘韻尙未盡泯於此亦可觀焉所謂文武之道未墜於地者非耶皓天之復愚將拱手而竢之若其名樓之意則肖孫上舍公煥弼蘆沙奇文簡公正鎭之記剖盡無餘蘊學者由是而求之庶可以得其門而入玆不更贅
是歲陽復節(11월)後學驪興閔丙承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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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雲集卷之七 記 蘫溪書院風詠樓重修記
天嶺吾東之鄒魯而蘫溪其闕里也一蠹鄭先生享焉先生者道學之祖也蘫 溪者書院之宗也其門遵道往在景陵庚子樓其上榜曰風詠丁未災己酉重建間常葺庀而歲積屋老不可以久安於是遠近章縫咸咨嗟而言曰斯樓而㢒者吾林之羞迺於九十三年丁丑易其舊而改築制度遵舊而完美殊勝 自正祠講堂以及東西齋之小廬者幷皆一新粤三年庚辰冬諸章甫責丙承 以記楣顧甚耗昏安敢終辭嗚呼今天下何世夫以堯舜三王之所治孔孟程朱之所敎之華夏禮樂絃誦之聲寥寥者已久則吾東之粤至于今日亦無柰 氣數何諸君子乃以此時能重建斯樓以新士子之觀瞻將尋先生之墜緖雖 其秉彛之衷有不期然而然者先生之遺風餘韻尙未盡泯於此亦可觀焉所謂文武之道未墜於地者非耶皓天之復愚將拱手而竢之若其名樓之意則 肖孫上舍公煥弼蘆沙奇文簡公正鎭之記剖盡無餘蘊學者由是而求之庶可以得其門而入玆不更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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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丹雲集 ( 단운집 )
저자 : 閔丙承 ( 민병승 ) 생몰년 : 1865 - 1946
자 : 公佑(공우) 호 : 丹雲(단운) 본관 : 驪興(여흥) 거주지 : 咸安 茅谷(함안 모곡)
판사항 : 石印本
발행사항 : 瀛洋 : 石泉齋, 1956
형태사항 : 線裝18卷8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