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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의 내용처럼 신라시대는 남녀관계가 매우 개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황남대총 옆 황남리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신라 토우는 나체와 과장된 성기, 성교 중인 모습 등 화랑세기처럼 표현이 거침없다. 이런 토우는 다산을 염원하는 의례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를 물리쳐 한강유역을 차지했으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성왕을 살해한 신라의 정복군주 진흥왕(24대, 재위 540~576)이 승하하자 진지왕(재위 576~579)이 왕좌에 오른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인 동륜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진지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 사람들이 4년 만에 폐위시켰다.
진지왕의 뒤를 물려받은 사람은 동륜태자의 아들 진평왕(재위 579~632)이다. 그는 신라에서 가장 오랜 53년 동안 왕좌에 있었지만 아들 없이 천명, 덕만, 선화 등 3명의 딸만 뒀다. 덕만이 우리 역사상 곧 첫 번째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이다.
선화는 서동요 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는 덕만이 맏딸이라고 했지만 천명이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과 결혼하기 위해 보위를 동생에게 양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천명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4~661)의 어머니이다.
▲ 경주시 보문동 선덕여왕릉.
삼국사기는 "덕만의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석하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의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의 칭호를 올렸다"고 쓰고 있다. 선덕여왕은 황룡사와 첨성대를 세워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은 성군이다. 그녀는 특히 독신이라는 점이 우리들에게 깊게 각인돼 있다. 그러다 보니 후사가 없어 승하 후 사촌 여동생인 승만(진덕여왕)이 보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이해한다.
▲ 선덕여왕은 대규모 불사를 통해 신라사회의 통합을 이끌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성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 등 대표적 불교유적들이 다수 만들어진다. 사진은 1916년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삼국유사 기이편에도 "당나라 황제가 나비 없는 모란 그림을 보내온 것을 두고 왕이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는 것은 꽃에 향기 없음을 말하는 바요. 이것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라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고 적혀 있다. 남자와 관련된 스캔들이래야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다가 화귀가 됐다는 '지귀(志鬼)설화'가 유일하다.
과연 그녀는 평생 남자를 멀리한 채 국사에만 전념하면서 수도자처럼 정결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7세기경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1989년, 1995년 연이어 공개되면서 선덕여왕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였던 풍월주(風月主)를 중심으로 화랑의 계보와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서 선덕여왕과 연관이 깊은 김용춘은 13세 풍월주로 나온다.
이에 따르면 진평왕은 처음에 김용춘(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의 형인 김용수를 맏딸인 천명공주와 결혼시킨다. 김용수와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천명은 용춘에게 "제가 본디 사모한 사람은 공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용수가 이런 천명의 속내를 간파하고 동생 용춘에게 공주를 양보하려고 했지만 용춘이 이를 애써 거절했다. 용춘은 아버지 진지왕이 여색에 빠져 폐위된 것을 염두에 두고 평소 여자를 멀리했다.
진평왕은 아들이 생기지 않자 둘째 덕만이 용봉(龍鳳)의 자질과 태양의 생김새를 지녔다며 차기 왕으로 점지한다. 이에 천명은 순순히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고 궁 밖으로 나갔다. 진평왕은 이번에는 용춘과 용수 형제를 번갈아가며 덕만과 정을 통하게 했으나 둘 모두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
덕만은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나 남자를 밝혔다. 덕만은 즉위한 뒤 용춘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역시 아이를 갖지 못하자 용춘은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했다. 그러면서 선덕여왕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용춘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왕은 용춘이 물러나 살 수 있게 윤허했다.
용춘은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았다고 화랑세기는 언급한다. 책은 심지어 김춘추의 아버지가 용춘이 아닌 용수로 묘사한다. 용수가 죽음에 임하여 부인과 자식들을 아우에게 부탁하자 용춘은 천명공주를 아내로, 춘추를 아들로 삼았으며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에 추존됐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가 사망한 원인도 충격적이다.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의 거처를 드나들다가 572년(진흥왕 33) 사나운 개에게 물려 죽게 되는데 진흥왕이 조사해보니 미실(美室)의 측근 중 의심 가는 이가 많았다.
미실은 동륜과 가까이 해 그의 아이까지 갖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실이 질투심에 개를 풀어 동륜태자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왕은 미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신라의 대표적 팜므파탈 미실도 화랑세기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다. 미실은 제2대 풍월주로 신라 23대 법흥왕(재위 514∼540)의 외손자인 미진부(未珍夫)가 외할아버지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妙道)부인과 야합해 나은 사생아이다.
미실은 남보다 뛰어난 재주와 용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등 3대의 왕들을 모셨으며 사다함, 설원랑, 동륜태자, 친동생인 미생 등과도 사통했다고 화랑세기는 서술했다. 미실은 권력자들을 유혹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화랑세기에는 미실이 진흥왕의 총애를 입게 되자 친부인 미진부의 벼슬이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제1위에 해당)으로 승진했다고 기술한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것도 미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0대 풍월주로 미실의 남동생인 미생 역시 여색을 좋아해 처첩이 많았고 100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나열할 수 없다고 책은 적었다.
화랑세기는 화랑의 남녀 관계, 근친혼, 처첩 관계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화랑세기는 신라시대에 신라인이 기록한 유일한 사서다. 고구려의 '유기'나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등 삼국시대 각 국별로 역사서들이 작성됐지만 현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고려 중기 이후의 기록이다.
공개된 화랑세기는 필사본으로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필사본은 1930년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박창화(1889~1962년)가 베껴 적은 것이라고 한다.
화랑세기는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져 있지만 화랑들의 문란한 성관계와 내부의 암투에 집중해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미실이 지은 향가는 상당한 수준의 문학작품이어서 필사자가 창작했다고 보기 힘들며 책에 언급된 '구지'(왕궁인 월성 주변의 해자)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처음 발굴된 점을 들어 위작이 아니라는 반박도 만만찮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물려받은 신라의 풍속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김대문(생몰년 미상)=신라 중대 사람으로 704년(성덕왕 3) 한산주 총관(漢山州 摠管)에 임명된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 저술로는 화랑세기를 비롯해 신라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다룬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들의 전기인 고승전(高僧傳), 한산지방의 지리서인 한산기(漢山記), 음악 관련 저술인 악본(樂本)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가 신라불교 수용에 관한 사실을 계림잡전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화랑과 낭도의 전기도 화랑세기의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고려 중기까지 이들 책이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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