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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6일 병술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의병장 최경장에게 인신을 내릴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의병장(義兵將) 최경장(崔慶長)은 전사한 아우 【최경회(崔慶會)는 진주(晉州) 싸움에서 전사했다. 】 의 군사를 거두어 모아 적을 칠 것을 죽음으로 맹세했으니 충의가 가상합니다. 조정에서 이미 계의장(繼義將)이란 칭호를 내렸으나 모름지기 인신(印信)이 있어야만 부하를 통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명(奉命)이라는 인신 1개[顆]를 제급(題給)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언제 계의장이란 칭호를 내렸는지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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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7년 갑오(1594) 8월 18일(계해)
27-08-18[05] 공주 유생 홍함 등 100여명이 상소하여 세자를 머물도록 요청하다
공주 유생 홍함(洪涵) 등 1백여 명이 상소하여 학가(鶴駕)를 머물러 인심을 진무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의 뜻을 살피고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내가 이미 소명을 받았으니 이제는 머물 수가 없다.”
[주-D001] 학가(鶴駕) : 세자의 행차를 말함.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우 (역)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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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1년 무술(1598) 11월 16일(정유)
31-11-16[04] 정 주사의 접반사 백유함의 치계
정 주사(丁主事)의 접반사 백유함(白惟咸)이 치계하였다.
“주사가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지공(支供)이 부실하다고 매우 노하여 충정 감사(忠淸監司)의 종사(從事)인 송영구(宋英耉)를 곤장 15판(板)을 쳤고, 문경현(聞慶縣)에 이르자 인부(人夫)가 모두 도망치니 주사가 더욱 성을 내서 연기 현감(燕岐縣監) 이문빈(李文薲)과 문경 현감 홍함(洪涵)을 잡아들여 가마를 메게 하고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해권 (역)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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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제1권 / 계사(癸巳, 1593) / 가을 7월
○ 가을 7월〔秋七月〕1일 계축(癸丑)
왕은 영유(永柔)에 머물고 계신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운봉(雲峰)으로 향했다. ○ 나와 정현경(鄭玄卿)은 운봉으로 향하다가 팔량(八良)에 이르러 되돌아왔다. 처음 진양(晉陽)의 상황이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전라 우도(全羅右道) 의병 참모(義兵參謀) 홍함(洪涵)ㆍ양장해(梁長海) 등이 영남의 몇몇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사인(士人)들을 불러 모으고 원수(元帥)에게 글을 올렸으나, 몇몇 고을의 사람들이 적의 기습에 겁을 먹고 한 사람도 와서 모여 상의(相議)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양군(梁君)이 나에게 올 것을 요청했다. 나와 정현경이 곧바로 출발해 팔량에 이르렀을 때, 새로 부임한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출발해서 글보다 앞서 운봉에 도착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진주성(晉州城)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구원할 군대를 요청했으니, 처량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