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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④ 단군릉과 삼성사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입력 2020. 11. 7. 08:00
묘향산, 평양, 구월산으로 이어지는 단군의 흔적
단군 왕검은 묘향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건국했을까?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현재 평양의 중심인 김일성광장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평양학생소년궁전이 나온다. 조선시대까지 장대(將臺)가 있던 자리이고, 그 바로 위쪽에 평양향교가 있었다. 평양향교와 인접해 숭인전(崇仁殿)이 있었고, 길 건너편에 숭령전(崇靈殿)이 있었다.
평양향교는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숭령전(국보유적 제6호)은 원래 그 자리에, 숭인전(국보유적 제5호)은 숭령전 바로 뒤편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 옆에 보존돼 있는 숭인전과 숭령전 전경. 뒤쪽이 숭인전, 앞쪽이 숭령전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뉴스1
숭인전은 고려후기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기자를 제향하던 사당으로,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세운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까지 전해진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피해를 입었으나 보수됐고, 197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평양 숭인전의 측면 모습. 숭인전은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졌고, 기자(箕子)를 제향하던 사당 건물로 지어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뉴스1
숭령전은 단군과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고려시대에는 성제사(聖帝祠), 조선조에는 단군사(檀君祠), 단군전(檀君殿), 단군묘(檀君廟) 등으로 불렸다. 단군의 사당에서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된 것은 15세기 초부터이다. 1429년(세종 11)에 기자사(숭인전) 옆에 정전과 동서행랑을 세워 '단군사 동명왕사'라 칭했으며,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는 1456년에 단군과 기자, 고구려 시조의 사당을 수리하고, 4년 뒤에 평안도를 순행하면서 친히 이곳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이때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고 현판을 붙였다.
평양 숭령전의 정면 모습.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졌고, 조선시대 때는 단군과 동명왕을 제향하던 사당이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뉴스1
평양 숭령전 안에 모셔져 있는 단군(왼쪽)과 동명왕의 위패와 화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숭령전이라는 명칭은 1724년(영조 원년)에 사액(賜額)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지금의 건물은 1804년(순조 4)에 복구된 것으로, 정전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 안에는 단군과 동명왕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원래 단군의 신위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구월산 삼성당(三聖堂)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 단군)을 지칭한다. 그런데 조선 태종 때 삼성당(三聖堂)을 폐하고,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에 함께 모시게 했다. 그러자 이러한 조치의 부당함을 건의하는 상소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1428년(세종 10)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은 상소를 올려 "문화현(文化縣)은 신(臣)의 본향인데, 구월산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산의 동쪽 고개가 높고 크게 굽이쳤으며, 산허리에 신당(神堂)이 있으나 어느 때 세운 것인지는 모릅니다. 북벽에 단인천제(檀因天帝)를 모셨으며, 동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을 모셨으며, 서벽에 단군부왕(檀君父王)을 모셨으니 고을사람들이 삼성당이라 부르고, 그 산 아래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부릅니다…. 어떤 이는 단군께서 처음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셨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에 같이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나라를 세웠으니 기자에 이르기 천여 년이 되는바, 어찌 기자묘에 함께 모시는 것이 옳겠습니까"라며 삼성당 폐지가 옳지 않다고 했다.
상소가 계속 이어지자 1472년(성종 3) 성종은 삼성당을 삼성사(三聖祠)로 개칭하고, 환인·환웅·단군의 위판(位板)을 봉안했으며, 평양 단군묘의 예에 따라 해마다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황해남도 은율군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 전경. 일제강점기 때 없어진 건물을 북한이 2000년에 복원했다. 가장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삼성전이고, 좌우에 영빈당과 양현당이 자리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1916년 음력 8월 15일 대종교 제1대 교주인 홍암대종사(弘巖大宗師) 나철(羅喆)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제천의식을 올리고, 스스로 숨을 거두어 일제의 탄압에 항의하자 일본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삼성사를 헐어버렸다. 북한은 2000년 9월 삼성사(국보유적 제189호)를 복원해 기본건물인 삼성전을 축으로 하여 좌우측에 영빈당과 양현당, 그 아래에 전사청과 숙사, 배집지붕 형식의 대문을 세웠다. 그리고 2002년 10월 처음으로 남측인사의 삼성사 방문을 허용했다.
황해남도 은율군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의 삼성전(三聖殿)에 봉안돼 있는 환인, 환웅, 환검(단군)의 화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숭령전과 삼성사는 조선시대에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신으로 봉안했고, 고조선과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외에도 평안북도 묘향산 향로봉의 남쪽 기슭에는 높이 4m, 너비 16m, 길이 12m의 단군굴이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으로 환생해 단군을 낳았다는 곳이다. 또한 인근에 단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단군대와 과녁으로 쓰였다는 천주대가 있다. 특히 묘향산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환웅 혹은 단군을 산령(山靈)으로 하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고, 고려 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이해되어 단군을 모신 단군암(檀君菴)이나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암(三聖菴) 등이 있었다고 한다.
묘향산, 평양, 구월산으로 이어지는 단군 관련 유적들과 전승설화들은 고구려를 비롯한 제반 전승과 섞여서 전하고 있다. 통상 이러한 설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처음 형성됐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도교사상으로 윤색되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승내용은 고려 때 《고기》·《본기》·《단군기》 등의 다양한 책에 담겼고, 이 책들의 내용 일부가 고려 후기에 나온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인용돼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역사적인 내용의 기본골격만 추려보면 환웅이 태백산(묘향산)에 내려와 여기서 단군을 낳았고, 단군이 왕검성(평양성)에서 나라(조선)를 건국했고, 후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지금의 구월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묘향산이나 평양지역에서는 단군 왕검을 선인(仙人)이라고 지칭하고 단군 중심으로 설화가 구성되어 있고, 구월산지역에서는 단군을 신인(神人)이나 천손(天孫)이라 지칭하며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설화로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려 중기 때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이고,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했다. 단군조선을 개국한 선인의 이름을 처음으로 왕검(王儉)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북한 역사학계는 일찍부터 삼국유사에 수록된 단군신화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단군신화를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평가했다. 다만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고조선의 건국지를 현재의 평양으로 본 것과 달리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 있었다고 봤다. 북한학계에서도 일찍부터 고조선의 중심위치와 영역문제는 가장 큰 쟁점사항이었다.
1960년대부터 1962년까지 북한 역사학자들은 요동중심설, 평양중심설,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설을 제기하며 수차례 토론회를 개최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이었고, 수도가 요동의 가이핑(蓋平)에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됐다. 그런데 1993년 단군릉 발굴을 계기로 북한학계는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에서 평양중심설로 전환했다.
조성연대는 불확실하지만 평양에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있었다. 북한학계는 1974년에 (傳)동명왕릉을 발굴하고 평양지역의 고구려의 벽화무덤, 안학궁터 등을 대대적으로 조사발굴한 뒤 1993년 (전)단군릉을 발굴했다.
1946년 촬영된 단군릉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1990년대 초 발굴 전의 단군릉의 전경. 평양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아래에 있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단군릉(국보유적 제174호)은 오랜 옛날부터 단군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동현조〉 고적란에는 "큰 무덤이 있다.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410자나 된다. 민간에서 단군묘라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 역사학자들도 단군을 의연히 신화적인 존재로만 인정하고 강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단군 관계유적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굴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고조선이 요동에서 나라를 건국해 후에 평양으로 옮겼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주도로 마침내 단군릉을 발굴했다. 발굴과정에서 뜻밖에도 남녀의 것으로 보이는 2개의 유골이 발견됐다. 새로운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북한은 출토된 유골을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 부부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고, 다음해 단군릉을 대규모로 개건했다.
단군릉은 평양의 중심부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2002년 8월과 2003년 2월, 두 차례 단군릉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방문 때는 단군릉 안으로 들어가 유골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평양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에 새로 건설된 단군릉의 정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평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버스에서 내리자 화강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289개이다. 계단 양쪽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좌우 5개씩 대문처럼 세워져 있고 8명의 신하와 단군의 네 아들 상이 좌우로 능을 모시듯 서있다. 그 정상에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단군릉이 우뚝 솟아있다.
"단군릉은 평양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단군릉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1993년 9월 대대적인 단군릉 개축을 단행해 다음해 10월 11일에 준공했습니다. 웅장하게 개축된 단군릉은 18층 건물 높이인 70m에 달하며 아랫부분은 한 변이 50m, 높이는 22m인 9층의 계단식 무덤입니다. 1994년 준공된 것을 기념해 모두 1994개의 화강암 돌을 짜 맞추었습니다."
평양에서 북동쪽으로 40㎞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에 새로 건설된 단군릉의 측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개건된 단군릉 옆에 옮겨 놓은 단군릉수축비. 단군릉 수축비는 강동 일대의 유지들과 각지의 이름 있는 인사들과 유력자들을 망라하여 조직한 단군릉 수축 기성회가 1936년에 단군릉 수축 준공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여성 해설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단군릉 뒤쪽으로 갔다. 무덤 뒤쪽에 무덤 안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석실을 몇 번 꺾어 돌자 석실 중앙에 거대한 두 개의 나무 관이 놓여 있고, 이곳에 발굴된 '단군과 그 아내의 뼈'가 아르곤 가스가 채워진 밀폐된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었다. 빛과 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다시 나무관을 씌워 놓았다.
"단군릉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됐습니다. 유골을 감정한 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유골을 전문연구기관에서 연대측정한 결과 약 5,0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유골이 단군 부부의 것으로 확증됐습니다."
5000년 전의 사람 뼈가 어떻게 삭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북측은 "중성 토양 속에 묻혀 화석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또 단군릉이 돌로 쌓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 흙무덤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 무덤이 고구려시대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단군 유골의 모형. (이준희 제공) 2020.11.07. © 뉴스1
단군릉을 나오면서 '저 유골이 과연 단군 왕검 부부일까', '단군 왕검은 아니더라도 고조선의 임금 중 한 명의 유골일까', '아니면 고구려 지배층의 유골일까' 등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실제로 함께 동행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북한이 사용한 연대추정 방법의 문제점과 원래 무덤의 건축양식 등을 들어 진짜 단군릉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일단은 고려시대 이래로 민간에서 단군릉이라고 전승돼 왔다는 의미에서 '전(傳)단군릉'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유골을 발굴한 것 자체가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북한은 단군릉을 발굴하고 새 능을 대대적으로 신축하면서 종래에 신화적, 전설적 인물로 간주되어온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과 단군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단정했다.
한편 단군릉 발굴을 전후해 북한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평양일대의 고대유적에 대한 발굴작업에도 본격 착수했다. 몇 달이 안 돼 북한 학자들은 주목할 만한 유적과 유물을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고대 성터들이 주목을 끌었다. 황대성(黃岱城) 유적이 대표적이었다.
황대성(국보유적 제183호)은 평양시 강동군 남강노동자구(향단리) 황대마을 앞산에서 발견됐다. 성은 뒷산의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를 등지고 동쪽과 북쪽, 서쪽의 3면이 트인 평평한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성을 발견된 지방 이름을 따서 황대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특히 성터에서는 성의 축조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2기의 고인돌무덤[지석묘(支石墓)]이 발굴됐다. 북한 학계는 고인돌무덤 하나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평평하게 된 성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때까지 여러 성터들이 발굴됐으나 성벽 위에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이 성의 축조연대를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했다. 흙과 돌로 쌓은 황대성은 현재 약 300m 정도 남아 있는데 성벽의 축조형식으로 보아 타원형 성곽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하부 너비는 10m이고, 상부 너비는 5m, 높이는 1m 정도이며 배수구도 발견됐다.
평양시 강동군 남강노동자구(향단리) 황대마을 앞산에서 발견된 황대성과 고인돌. 흙과 돌로 쌓은 황대성은 현재 약 300m 정도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북한은 황대성과 그 성벽 위의 고인돌이 고대국가인 단군조선의 존재 증거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거리 무기가 없던 고대, 중세국가들에서 성은 중요한 방어수단이다. 황대성의 축조연대를 밝히는데서 중요한 열쇠는 성벽 위에 있는 오덕형고인돌무덤이다. 성벽 위에 고인돌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성이 무슨 이유에 의해서인지 폐지된 후에 고인돌무덤을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인돌무덤은 고조선후기인 B.C. 1천년기 전반기까지 쓰였던 무덤형식이므로 그 밑에 있는 성벽은 그보다 퍽 앞선 단군조선시기에 축성했다고 추정된다. 황대성 외에도 대성구역 청암동성의 아래성,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토성의 아래성,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토성의 아래성 등이 단군조선시기의 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단군조선시기에 축성한 성벽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는 황대성이 유일한 실제이다."
황대성 안에서는 이외에도 고인돌과 축조시기가 비슷한 돌관무덤(국보유적 제182호)도 발굴됐다. 돌관무덤은 판돌로 네 벽과 뚜껑돌을 조립하거나 조각돌로 올려 쌓아 만든 것으로 통상 시신 하나를 넣을 만한 작은 것이다. 향단리 돌관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바람에 씻겨 평평해진 황대성 성벽 위에 있다. 약 70㎝ 깊이로 구덩을 파고 2장의 석회암 판돌을 깐 뒤 동서 양쪽에 석관 2개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동쪽 널의 유골은 여자의 것이고 서쪽 널의 유골은 남자의 것인데 머리는 모두 남쪽으로 놓였다. 북한은 이 무덤의 유물에 대한 연대측정 결과 이 돌관무덤이 약 4800년 전 단군조선의 초기 무덤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황대성에 이어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있는 지탑리토성에 대한 발굴사업도 다시 진행했다. 이 성은 이전까지 발굴된 유물들과 주변의 유적들을 통하여 기원전후한 시기에 쌓아진 것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새롭게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성벽의 아래층에 그보다 앞선 시기에 쌓아진 성벽층을 발견됐다. 북한은 이 성의 축조연대도 성벽 축조방법과 성벽 아래에서 나온 유물들에 기초해 황대성과 비슷한 것으로 추산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100여 리 안팎의 지역들에서 단군조선 초기에 쌓았다고 평가되는 고대토성을 발굴한 북한은 "평양일대에 신석기시대로부터 살아오던 주민들이 청동기시대에 하나의 큰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토성과 같은 방어시설까지 구축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북한은 고대 토성에 이어 고대문화의 대표적 증거물인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진행했다.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은 고조선시대에 가장 흔히 쓴 무덤으로 평가된다.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은 한반도와 중국 요동 및 길림지방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북한 학계는 조사발굴과정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 40여km에 해당하는 평양일대에서 1만 4천여 기의 고인돌무덤을 발견했다. 요동지방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많은 수자다.
황해남도 은율군에 있는 관산리 1호 고인돌(국보유적 제84호) 전경. (송호정 제공) 2020.11.07. © 뉴스1
그 중 황해남도 안악군 일대 고인돌 중 가장 큰 노암리(路岩里)고인돌(국보유적 제76호), 황해남도 배천군의 용동리(龍東里)고인돌(국보유적 제78호), 별자리가 새겨진 황해남도 은율군의 관산리(冠山里)고인돌(국보유적 제84호), 순장풍습을 엿볼 수 있는 평안남도 성천군의 용산리(龍山里)고인돌(국보유적 제175호)이 국보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특히 단군릉에서 동북쪽으로 11.5km 떨어진 비류강가에 있는 용산리고인돌 안에서는 모두 38명분의 유골이 발굴됐고, 연대측정을 한 결과 절대연대는 기원전 31세기 중엽으로, 단군유골의 연대보다 얼마간 앞선 것이라고 평가됐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용산리고인돌 전경. 모두 38명분의 유골이 발굴돼 당시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유물로 평가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07. © 뉴스1
이러한 발굴성과에 기초해 북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실학자들의 문헌 등을 재검토한 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주변일대를 우리나라의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재평가하고, 이른바 '대동강문명론'을 내세웠다. 단군조선이 5천 년 전에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유역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고대국가의 하나이며 발전된 청동기문화에 기초해 선진문명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평양의 청암동성으로 본다. 요동지방에서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기존의 설을 뒤엎고, 평양 중심으로 고조선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단군 왕검과 고조선 중심지 찾기는 아직도 미로(迷路)와 같다.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있는 고조선의 성곽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과 달리 남한 학계에서는 단군릉이나 청암동성을 고구려시기의 무덤과 성곽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남한에서는 백가쟁명식(百家爭鳴式)으로 논쟁이 뜨겁다.
과연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북한의 주장처럼 단군 왕검은 평양에서 고조선을 세웠을까? 어쩌면 이 논쟁은 결정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나오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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