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물레길] ⑤ 금호강~낙동강 뱃놀이-금호선사선유 춘삼월 내로라하는 선비들 뱃전에서 시 읊으며 소통 "백년에 한번 만날 좋은 날"
부강정(浮江亭)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의 중류지대는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張顯光). 낙재 서사원(徐思遠) 을 비롯한 문인들이 수시로 선유(船遊`뱃놀이)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놀이 때마다 적게는 20여 명, 많게는 70~80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참여했던 선유놀이는 누군가가 주축이 되어 스승과 벗들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또 주어진 운(韻)자에 따라 서로 돌아가며 시를 짓고, 읊기도 하며 즐겼다.
낙재 서사원(徐思遠)이 1601년(선조34) 3월 금호강 선사(仙査)에서 낙동강 부강정에 이르기까지의 뱃놀이인 ‘금호선사선유(琴湖仙査船遊)’의 주인이 된다. 낙재 선생은 그해 2월에 자신의 거처인 금호강 이천에 완락재(玩樂齋)를 지어 낙성했다.
낙재 서사원(徐思遠) 등 선비 23명이 1601년(선조34) 3월 금호강 선사(仙査)에서 낙동강 부강정에 이르기까지의 뱃놀이를 그린 ‘금호선사선유(琴湖仙査船遊).
낙재가 만년(52세)에 세운 완락재는 이후 달성을 포함한 지역에서의 특별한 강학처이자 낙재학(樂齋學)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낙재 선생이 금호강 이천(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의 완락재에서 공부하는 기쁨과 후학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흠뻑 취해 있던 시절 장현광을 비롯한 선비들이 찾아왔다. 이들 일행의 방문은 완락재의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완락재 아래로 흐르는 춘삼월 봄날의 강물은 뱃놀이의 욕구를 한없이 자극했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가랑비도 어느새 뚝 그치고 하늘은 쾌청하기 그지없었다. 선비들의 마음은 더욱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배가 강 나루에 도착하자마자 이번 선유의 주인인 서사원을 비롯해 여대로, 장현광, 이천배, 곽대덕 등 선비 23명이 올라탔다.
10리에 펼쳐진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강물에 몸과 마음을 모두 내던졌다. 강 언저리에는 개나리 등 봄꽃들이 돋아나고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능수버들은 휘영청 늘어져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이들을 맞아주었다.
이들 일행은 땅거미가 질 무렵 하루 묵을 요량으로 부강정에 들렀다. 부강정의 방이 넉넉하지 못해 일부는 가까운 지인들의 집에 묵었다. 다음날 아침에 부강정에서 다시 만난 선비들은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적삼이랑 옷이 눅눅해졌지만 뱃놀이만큼은 그만둘 수가 없었다. 다시 배에 올랐고, 선비들은 곧 던져질 시의 운자(韻字)에 대해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으로 선상이 숙연해졌다.
명색이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아회(雅會)에서 시가 빠질 리 없었고 이왕이면 가장 흠모하는 주자의 시를 분운(分韻)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시의 총자수가 20자이고, 참석자 23명 가운데 곽대덕, 서항, 정정 등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나이순으로 운자를 배당받았다.
서로 다투듯 시를 짓기 시작한 가운데 여대로는 하목정 주인인 이종문이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 흥취에 젖은 장현광이 시를 다듬지 못하고, 여대로 또한 주위의 닦달에 하는 수 없이 긁적이는 등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선유에 참여한 23명의 선비들 가운데 52세로 가장 나이가 많은 서사원이 첫 운자인 ‘출'(出)자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봄저물자 하도야 안타까워서/노을가득 싣고야 뱃놀이 가네/사방에서 뜻있는 이 모여들어/운무도 활짝 개니 내맘 기뻐라/이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윗물이 깊고도 물살 빠르네/주변 빛은 아름답게 고이 빛나고/광풍이 숲 그늘을 흔들어대네/한들한들 구름헤쳐 은하를 넘어/똑바로 월궁을 찾아 들제/청풍이 겨드랑을 스쳐/흠뻑 취해 신선 끼고 창공을 나는 듯하구나
조선 중기의 학자 여대로(呂大老)의 시문집인 감호집(鑑湖集). 금호선사선유 놀이에 참석한 여대로 선생이 그 당시의 상황을 감호집에서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선유놀이는 완락재의 낙성을 기념하고 대자연 속에서 평소 친한 벗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며 소통하는 데 있었지 시를 잘 짓는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어 ‘학'(鶴)자 운을 받은 양졸재 정수도 시를 지어 구성지게 읊었다.
꽃피는 강가에 풍경이 아름답고/노니는 백조깃은 더 한층 희구나/복숭아 꽃잎은 강물 따라 더욱 붉고/늘어진 능수버들 강변 따라 푸르런데/자연의 천리를 군자들과 즐기지만/마음이 흔들릴까 젊은이들이 걱정하네/조용히 모신어른 그 말씀을 들으면서/술도 취하고 그 덕풍도 만끽하네/고상한 모임에 부평처럼 만났거늘/뒷날 다시 어떤 일로 상봉할꼬/석양빛 받으며 강바람은 부는데/조촐한 이 흥취야 그 어이 비속하랴
‘금호선사선유록’에 이름을 올린 23명의 선비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서사원과 21세인 박정효와 김극명의 나이차는 31세였다. 한마디로 세대를 초월한 모임을 했던 것이다.
뱃놀이 참가자들의 거주지는 서사원, 곽대덕, 이종문, 정용, 정수를 비롯한 13명이 달성이었고, 이천배, 이규문, 이흥이 등 3명은 성주, 장현광은 구미 인동, 정사진은 영천, 여대로는 김천, 송후창은 창녕, 박증효는 영양, 김극명은 서울이었다.
이 가운데 달성 출신이 많았던 것은 선유의 주최자인 서사원의 주거지와 그의 강학기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학문적으로도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낙재 서사원 문인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날 선유는 달성지역의 서사원 문인들이 완락재의 낙성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한 행사였고, 여대로, 장현광 등 평소 서사원과 친분이 깊은 인사들이 손님으로 초청된 것이다. 선유놀이 이후 서사원의 문인인 여대로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또 이들 23명은 서로 직간접적인 혼맥으로 얽혀 있기도 하다. 이종문은 서사원의 고모부이고, 서사신, 서사선, 서항은 서사원과의 사촌지간 및 아들, 정선은 처이종동서 사이였다. 여대로는 이종문의 아우 이종택의 장인이기도 했다.
선유놀이를 이끈 서사원은 젊은 시절에 채응린, 전경창, 정사철과 사우문인 관계를 맺고 28세 되던 1577년(선조10) 한강 정구 선생을 사사하게 된다. 그의 한강 문하 입문은 사승(師承)의 외연 확대를 넘어 한강학의 대구지역 확산의 실마리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컸다.
또 그는 장현광, 손처눌 등의 지역 석학들과 교유하는 한편 31세 때부터 후배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는데 악재연보(樂齋年譜)에서 확인되는 첫 번째 문인은 한려문인으로 더 잘 알려진 완정 이언영(李彦英)이었다.
이천정사(伊川精舍)에서 본격적인 강학에 들어가 문인을 양성했고 최소 50여 명에 이르는 그의 문인은 대구, 칠곡, 성주, 인동 등 주로 낙동강 연안지역에 분포했다.
서사원의 학문적 입지와 권위의 상승, 문도의 증가는 강학거점의 확대로 이어졌는데 완락재 건립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옛날 신라 최치원이 노닐던 자리에 세워진 완락재는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를 비롯해 세심지, 무릉교, 난가대, 연어대 등이 딸린 건축물이었다.
장현광은 자신의 문집(旅軒集)을 통해 이날의 선유놀이에 대한 글을 남겨 놓고 있다.
어제 유람한 일 곰곰이 생각하니/일은 지나갔는데 생각은 어이 길게 남았는가/ 젊은이 늙은이 수십명이/ 한 배 타고 취했지/ 바람따라 가는 대로 따라가니/ 갈수록 방향을 몰랐다오/ 아득하고 아득한 이 가운데의 즐거움/ 어찌 시 읊고 술마심에만 있겠는가/ 저녁에는 강가 마을에 유숙하니/ 배꽃 향기 멀리서 풍겨왔지/ 이번 선유놀이 길이 잊지 마소
감호 여대로(呂大老)도 이날 선유놀이를 끝내고 “이 날 가랑비 내리다 이내 활짝 개이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물속에 거닐고…<중략>…, 십리까지 이어 있는 비단병풍인 양 아름다운 풍경미가 거울속 별천지를 이룬다. 인간세상 백년에 한번 만날 좋은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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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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