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지금 함부로 대하지 않는 대상, 중심에 둔 가치는 아마 인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더없이 소중하고 고귀한 가치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외에도 우리가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많다.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그게 뭘까. 밤섬은 무엇을 상징할까.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 억눌러야 할 인간의 파괴력? 기술문명과 환경이 유지해야 할 적당한 거리? 20세기 한국에살았던 약자들의 아픔?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후손들은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우리 역시 아버지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 인간의 이해를 훌쩍 초월한 섭리와 예상치 않은 구원?
밤섬은 그 모든 것의 상징이고, 우리는 자연의 힘을, 우리 안에 있는 파괴적인 욕망과 우리가 소유하게 된 기술을, 인간의 강함을, 인간의 약함을, 사람들의 고통을,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시간이 해내는 일들을, 아이러니와 불가사의를, 복잡하고 연약하고 중요한 연결들을, 세계의 질서와 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무섭게 여겨야 한다는 게 내 대답이다.
그런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공간이 모든 동네에 한 곳씩 있기 바란다. 우리는 그런 마을에서 그 공간을 의식하며 살면서도 동시에 유쾌함을 잃지 않고, 농담을 즐기고, 미신과 유사과학을 배격하고, 체계적인 회의주의와 지적인 도전정신을 추구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리라.88p
현수동이라는 동네는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현수동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상상한다. 현수동에 대해 상상할 때마다 그 상상에 빠져든다. 그 동네를 사랑한다. 에, 이런 얘기가 좀 변태적으로 들리려나?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든가, SF 영화의 무대라든가…. 그렇게 내게 현수동은 실존하지 않지만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대상이다.
현수동은 '내가 만든 세계'이기도 하다. 이 동네는 내가 쓴 소설들에 자주 나온다. 아예 제목에 '현수동'을 넣은 단편소설도 썼는데(현수동 빵집 삼국지」), 이 작품은 현수의 지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현수의 역사를 소개했다. 현수에 사는 이현수라는 청년이 주인공인 단편도 썼고(「되살아나는 섬」), 『시간의 언덕, 현수동이라는 소설을 출간하기 위해 현수동에 사는 이현수라는 청년을 찾아야 하는 편집자가 나오는 소설도 썼다(「마법매미」), 『시간의 언덕, 현수동』도 언젠가 진짜로 쓰려고 한다(이쯤에서는 변태적으로 보인다 해도 할 말이 없겠네요).
그 외에도 내가 쓴 다른 소설에서 현수동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분량으로도 종종 나오며,9p
국가나 역사가 아니라 거리의 아침을, 골목의저녁을 상상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거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 표정들 아래 자리한, 어떤 한 기관이 일괄 조율할 수 없는 복잡한 욕망의 부글거림도 그런 사실을깨달을수록 그 골목과 거리를 모두 포괄하는 깔끔한이념은 그만큼 더 불가능하게 여겨진다.15p
내가 현수동 상권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것은 이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내가 사는동네가 연남동이나 망원동처럼 '힙'해지기를 바라지않는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모든 골목이 그렇게될 수도 없다. 그런 핫 플레이스들은 어떤 면에서는궁궐이나 민속촌과 다르지 않다. 외부에서 구경 온사람들을 위한 장소다. 나는 취객과 야간 소음에 질색하는 북촌과 연남동 원주민들을 안다.
즉 현수동 식당과 술집, 상점들은 주로 현수동주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현수동 상인들은 그런영업으로도 충분히 이윤을 거둔다. 그래서 그들은 절박한 표정이나 비굴한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 글쎄, 특색 있는 동네 축제가 있어서 그런 때 잠시 거리가 왁자지껄해지고 외부인들이 와서 돈을 쓰고 갈 수는 있겠다. 그러니 현수동에서는 마음에 쏙 드는 바가 없다면 참아야 한다. 그리고 그곳 생활물가 또한그렇게 낮지 않을 것이다.11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