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령지방 사림의 공의로 덕림서원을 창원하고
삼현(점필제, 신당, 우복)을 봉현하고자
개령현 유생을 대신하여
사원액(일명 사액, 사원의 현판)을 청하는 李馥 선생의 상소문 입니다.
우리 고장에 대한 자긍심이 잘 묻어 난 글입니다.
아직 번역문을 찿을 수 없어서 이미지로 등록 합니다 .
글을 번역할 수 있는 분들의 댓글 참여 부탁 드립니다.
국역>카페회원이신 이갑희 님께서 게시해 주신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이갑희님께 감사 드립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신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산골에 사는 백성입니다. 위로는 과거에 등재하여 조정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근무한 적도 없고 아래로는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의 위급에 대처한 적도 없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꾸벅이며 글을 배우고 성현을 우러르며 높은 뜻을 기르는데 마음 쓰고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제나라 왕의 아들 점(墊)이 맹자에게 묻기를 "선비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한 말이 바로 신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오직 논밭 속에 묻혀 성인의 백성으로서 즐기며 살다가 늙어 죽으니 어찌 엄한 대궐의 정사에 관여하여 어의에 오독을 끼치겠습니까.
엎드려 다시 생각하오니 신들은 유적(儒籍)에 이름을 올리고 학문에 힘을 기울여 덕을 기리며 사는 시경의 다북쑥편에 비유한 선비의 모임입니다. 유림에 혹 불행이 닥치면 그 사연을 개진 상소하여 억울함을 씻게 해줌으로써 우리 성상께서 숭상하시는 학문 진흥의 큰 사업을 도와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땅한 직분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감히 사전 모의 없이 선비정신의 발로에 따라 발을 싸잡아 매고 험한 길을 함께 걸으며 마음 쏟아나갈 것을 결심하고 이와 같이 상소문을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초야의 미천한 말이라고 제쳐놓지 마시고 지혜로운 한 말씀 내리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개령현은 지역이 좁아서 옛날에 처음 구획을 정하였을 때에는 벼슬에 등용되는 사람이 없어 무지한 고을이었는데, 다행히 삼현신이 서로 이어 나옴에 힘입어, 제나라의 습속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의 습속이 도(道)에 이르게 된다는 『논어』 옹야편의 공자 말씀과 같이 한 번도 변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덕에 감화되어 선량한 사람이 나오고 그 기풍을 우러러 학문을 닦는 사람도 생겨서, 무지하고 불손한 고을이 마침내 문장학문의 나라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노날가에 군자가 없으면 어찌 이사람과 같은 덕을 취하겠느냐"라고 하신 『논어』 공야장편의 공자의 말씀을 인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 고을의 선비들이 삼현신을 숭모 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로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가령 삼현신에게 불행하고 조급한 일이 일어난다면 죽을 힘을 다하여 몸을 던져 그 일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이에 먼저 삼현신에게 치성을 다하는 연유는 진술하고 다음에 신 등이 오늘 불원천리하고 찾아논 실정을 언급하겠습니다.
고 형조판서 김종직은 선산인으로 그의 부 사예 김숙자에게서 글을 배웠고, 김숙자는 야은 길재에게 수학하였으며, 길재의 학문은 포은 정몽주에게 익혔습니다. 정몽주는 실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이니 학문의 계통이 그로부터 전해 내려온것입니다.
김종직의 문장과 덕행이 일 세대에 유림의 종사가 되었으니 옛 현인 김굉필. 정여창 두 분 군주가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연산 갑자년(1504)에 화가 무덤에까지 미쳤으나 백년도 되기전에 공론이 바로서서 중종 개혁 즉시 원통한 죄를 벗고 치욕을 말끔히 씻었으니 그가 일찍이 영남에 거주 할 때 교화를 입은 사람이 많은데 서원에 배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김숙자가 본현의 현감으로 부임할 때에 그 아들 종직이 함께 수행하여 관아에서 살았는데, 당시의 현 백성은 모두가 문맹이어서 글을 배우는 순서조차 몰랐으나, 종직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배움을 일으키고, 생도들을 불러 모아 깨우치고 가르치며 경전을 강습하고, 뜻과 이치를 밝혀서 따르게 하니 날로 달로 실력이 쌓여 마침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 깊은 은택은 오대가 지난 지금도 옛날 오나라 여몽의 고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학문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김종직이 본 현 학자들에게 끼친 공이 얼마나 큰 것인데 학자들이 감히 평생토록 그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고 홍문관 교리 정붕은 당시에 도량이 넓고 기개가 굳은 선비로서 기상이 높고 품은 뜻이 시원하였으며,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성리의 요결을 터득하니 선현 이황께서 일찍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정붕선생의 학문과 조예의 정교함은 책상위에 펼쳐놓은 도표를 보면 알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책상위의 도표는 정붕이 평소에 만들어 책상위에 두고 옛 사람의 밥그릇에 새긴 훈계를 본떠서 자신의 훈계로 삼은 것입니다.
중종 초에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태평성대가 눈앞에 기약되는데도 정붕은 영달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가올 근심을 예견하며 가벼운 마음로 벼슬에서 물러나와 곧 고향으로 돌아오니 중종께서는 옛날 은나라 아형 이윤이 신야에서 밭갈이 하던 일과, 주나라 재상 여상이 위수변에서 낚시하던 고사에 비유하여 큰 덕을 지닌 사람이 어부및 초부와 함께 시골에 묻혀 살구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붕의 인품을 이와 같이 당시의 임금님께서도 알아주셨으니 향당의 선비들 간에는 얼마나 그가 추중되었는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또 정붕은 본 고을에서 태어나서 본 고을에서 자랐으며, 선산에 옮겨 살다가 선산에서 돌아가신 분으로, 옮겨 살던 곳이 본현과 인접한 고을 이었으므로 본 고을 학자들이 찾아가서 친히 가르침을 받고 높이 받들어 존경하는 명성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 이조판서 정경세는 상주인으로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문인으로서 일찍이 연원을 전수하였는데, 류성룡은 선현 이황의 수제자이므로 정경세의 학문의 연원이 진정하고 독실하여 성도(性道)를 높이고 체용(體用)을 밝히니, 당시의 태산북두로서 중임을 받고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을 섬기며 정승의 벼슬에 이르니 그에 대한 은총과 기대가 큰 만큼 그의 옳바른 조치 또한 정대하였습니다.
대개 한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 시대가 가까워 역사책으로 상고하지 아니하여도 보고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상주는 본 고을과 인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 고을 개령이 정경세의 외가 고을이며, 또 처가 마을도 있어 어릴때부터 왕래가 잦았으므로 고향과 다름 없는 곳이며, 더구나 이 고을 사람들이 당시에 가르침도 받았으니, 오늘날에도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 본 고을은 김종직이 서거한 이후에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또 정붕.정경세 두 분이 돌아감에 따라 다시 세 분을 함께 모시자는 논의가 발의되었으나, 그 의논이 한 번도 아니고 또 그 일의 추진에 성의가 부족한 탓도 아닌데 본 고을의 재정이 잔약하여 그동안 백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뜻만 앞세우고 사업은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유림의 한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였는데 마침내 병오년(1666)에 고을 선비들이 주동이 되어 서원 건립을 추진키로 하였는바, 궁핍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출연하여 십 년동안을 노력한 결과 지난 가을에 서원 건립의 역사를 완료하여 같으해 11월13일에 영위를 모실 날로 정하고, 도내의 향교와 각 서원에 미리 통문을 발송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대한 행례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때에, 비변사에서 상부의 재가를 받아 하달한 공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공문에 의하면 "조정의 허가 없이 사원을 건립하고 조정에 보고도 않으며 사액의 청원도 없이 사사로이 제향을 드리는 자는 유생은 벌을 내리고 현감은 최를 다스릴 것이니 잘 듣고 살펴서 나라의 법을 엄히 지키도록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공문을 받아보고 머리를 맞댄 채 놀라며 수군거리기를, 현대에 와서는 서원이 없는 고을이 없으므로 간혹 그중에서 사론(士論)이 분열되어 말썽을 일으키는 곳이 있는데, 이 공문은 반드시 그런 곳을 지목한 것이며 본 현과 같이 전국을 통하여 조금도 이의가 없이 건립한 서원을 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비변사에서 내린 공문을 받고도, 우리가 세운 서원은 조정에서 설립을 금지하는 서원 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핑계를 삼으며, 또 일이 눈앞에 그렇게 다다른 형편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적당히 행례를 감행한다면, 이 또한 선현을 존중하고 국법을 준수하는 선비가 취할 바르고 밝은 처사가 아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상의하여 도내에 이미 통고한 사항을 고쳐서 다시 발송하여 봉안량사 거행을 취소하였습니다.
백 년에 걸쳐 모의하고 십 년동안 경영하여 이룩한 유학의 전당이, 지금 호숫가에 우뚝 선 채 빈집으로 버려져 있으니, 신 등은 이 가슴에 쌓인 한을 어찌 스스로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이일은 특히 신들만이 한일뿐만 아니라, 본도 (경상도)가 지역이 넓기 때문에 유림에 통고한 서신이 때를 맞추어 두루 전달되지 못한 탓으로, 먼저 받아본 사람은 먼 길을 서두르며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였을 때 추가 통지를 발송한 사실을 그때서야 알고, 헛거름한 것에 놀라며 씁쓸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도내의 사람이 겪는 한 도 신 등에 못지 않게 구구하게 겪고 있는 바 입니다.
신 등이 선비의 이름을 띠고 있으면서, 이번과 같이 유궁(儒宮)의 큰 불행을 겪게 된 곡절을 개진하여 정당한 이유를 밝혀서 끝내 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우리 성상께서 펼치는 유학 진흥의 큰 교화를 져버린다면 신 등이 맡은바 직분을 다 하지 못한 죄를 받아 알 길이 없는 것이므로, 대궐의 위엄에 누를 끼치는 것을 알면서도 천리 길 마다 않고 찿아오게 되었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이 살피시어, 첫째 삼현신께서 본 고을 학자들의 업적에 끼친 공로와 둘째 신 등이 삼현신을 경모 열망하는 정성이 겉으로 꾸민 사실이 아님을 양찰하시옵고, 사원의 배향과 아울러 액호를 내리시어 이미 낙성한 유궁이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면, 일대유림(一代儒林)에 이어질 우리 학문의 행운이 될것입니다.
비준하여 이르나니 "상소문을 살피시니 김종직등 삼인은 일대의 현유의 자질을 갖추었으므로 액호를 새로 걸어서 영위를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니 예관에게 품주 처리하도록 명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