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그만 늙고 싶다
소정 하선옥
문득문득 떠오르는 옛 생각은 왜 이리도 명징한지... 요 근래 생각은 한참을 떠올려도 생각이 감감하고, 어떤 단어는 며칠 후에나 겨우 떠오르기도 하고. 늙었나보다. 지금 내 나이는 어릴적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시든 엄마 나이를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엄마가 해주시든 그맛이 그리워 따라 해보려고 해도 그맛이 나지를 않네.
계절은 바야흐로 4월 말, 보릿고개 넘던 그 시절. 지금 쯤은 작은골, 큰골, 봉산재로 솔가지 꺽어 머리에 이고 갈빗대로 솔갈비를 딸딸 긁어모아 착착 장을지어 한짐 머리에 이고, 때로는 썩둥거리 발로차 넘겨 볏짐가마니에 담아 이고 집에오면 엄마가 아침에 밥하면서 점심 때 먹을 밥 양푼이에 담아서 큰 솥 안에 넣어 둔 따뜻한 밥에 고춧가루 조금만 넣고 지난 김장철에 멸치 젓갈로 담아 누름돌로 눌러 놨던 김치 항아리를 열면 노랗고 맛나게 익은 청방배추 김치를 칼로 머리만 자르고 밥 한 숟가락에 김치 한가닥 척척 올려 먹던 그맛! 그맛에다 애기고추와 고춧잎, 고구마줄을 젓갈에 삭힌 장아찌를 끄집어 내면 노랗게 곰삭아 감칠맛 나는 그맛을 이제 어디가서 맛 보겠노?
언젠가 빼때기 죽이 하도 먹고 싶어서 엄마가 해주신 그때보다 돈부도 더 많이 넣고 좁쌀도 넣고 수제비도 뜯어 넣어 끓여봤더니 영 그맛이 아니더라. 어릴적 그때는 삭카린, 신화당 이런 걸 넣고 끓였을텐데 엄마가 해주신 그맛이 제일이었어. 또 두 손가락으로 잡고 뜯어 먹던 두툽한 갈치젓갈도 먹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혀 끝에 각인된 어릴적 입맛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나 보다.
하루에 두 번, 아침에 한 번 부산으로 나간 여객선은 저녁 네시 쯤에 부산에서 손님을 싣고 옥포항으로 저멀리 비행기 섬을 돌아드는 그때부터 뱃머리에 단 나발스피커에서 부둣가에 울려 퍼지는 '항구의 일번지', '마도로스 사랑', '부기우기 ', 박재란의 푸른 날개 등의 신나는 유행가를 틀고 구슬픈 뱃고동 소리 불며 들어오면 조용하던 갯마을이 들썩 거렸지.
바닷물이 빠진 갯펄엔 돌만 뒤집어면 해삼과 돌게가 나오고, 호미로 갯펄을 파면 바지락부터 우럭조개 까지 갖가지 해산물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던 고향 바다도 생각나네. 노란 유채꽃 활짝 피는 봄철이면 갯가에 나가 파도에 떠밀려 온 성질 급한 멸치 떼들이 축항에 부딪혀 밀려 있으면 바께스들고 내려가 싱싱한 멸치떼를 줏어 담아와 새콤달콤한 '멸치회' 부터 "멸치구이', '멸치찜'을 해 먹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지.
겨울이면 파래 뜯고 김 뜯고 돌미역 뜯어서 반찬하고 어떤 날은 아버지 따라서 낚시대 메고 갯바위에 나가 낚시하고 고둥 잡고 홍합 따오던 그 시절은 이리도 선명한데, 요즘일은 왜 이리 멍청이 가 되어서 까마득하기만 할까... 지금은 추억 속의 그 자리를 매립해서 상업지가 되어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서서 어디가 어딘지를 모를 정도로 낯선 곳이 되었고 가늠으로 여기가 거기 쯤일거야 생각 키울뿐...
아마도 이런 증상이 늙어 감의 전조일테다. 아직은 칠월칠석 그날처럼 엄마 무릎 베고 누워 밤 하늘의 수많은 별을 헤며 북두칠성을 찾고 과연 오늘 밤에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 건너 만날수 있을까?" 조바심하던 아주 작은 소녀이고 싶다. 안 늙고 싶다. 아니 그만 늙고 싶다.
2022년 4월 28일
첫댓글 나이는 숫자일뿐이라고 하니
결국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겠지요.
선생님이 마음에서 나이를 쫒아 내세요.
그리고 젊은이와 소통하시면 나이가 물러 설거예요.
어머니로부터 많은 추억을 물려 받았듯이
자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모두 물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