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보는 주어진 판을 깨는 것” 언변…새내기·모꼬지 등 순우리말 발굴
입력 : 2021.02.15 20:56 수정 : 2021.02.15 21:09
유희곤 기자
백기완과 말
백기완 선생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열린 제13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추대됐다. 김대중(DJ)·김영삼(YS) 두 후보가 야권 단일화를 하도록 민중의 힘으로 압박하는 게 목적이었다. 유세현장에서 백 선생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포효하는 명연설로 청중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87년 12월5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장에 대학생 등 10만 청중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5일 영면한 백기완 선생은 수십년간 민주화·통일운동을 하면서 여러 말들을 남겼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부 비판에 날을 세웠다. ‘새내기’ 등 잊힌 순우리말을 발굴해 보편화시키는 데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백 선생은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20여일 앞둔 2007년 11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진짜 진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어진 판을 깨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의 당선이 확실시될 때다. 그는 민주화운동 세력이 진보적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며 춤꾼이 춤판에 뛰어들며 한마디 외치는 소리를 뜻하는 ‘불림’처럼 “판을 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2012년 3월 인터뷰에서는 “자유당 때부터 독재와 싸워왔지만 그중에서 내 앞을 가장 가로막는 게 이명박”이라고 말했다. 그해 12월 대선을 한 달 앞뒀을 때는 “참된 정권교체는 분단의 현실을 이용해 지배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유신 잔당들을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중도 사퇴한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와 완주한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2월 서울 동숭동 대학로 유세 현장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3자 회담을 요구하며 “죽 쑤어 개 주게 생겼다. 두 김씨는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말했다. 1992년 3월 민중당 성동갑 연설회에서는 양김을 겨냥해 “역사의 낙오자에게 표를 주지 말자. 이제 민중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정권 초기인 2017년 11월 문정현 신부와 낸 대담집 <두 어른> 출판기념회에서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됐다면 민중의 얘기를 요만큼이라도 들어야 하는데…”라고 언급했다.
백 선생은 1956년 부인 김정숙 여사를 만났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던 김 여사가 백 선생의 연설을 듣고 반하면서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됐다. 백 선생은 결혼을 약속할 무렵 “당신은 부러진 우리의 가정을 일으키고 나는 부러진 조국을 일으키자”고 말했다고 한다.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원작자인 백 선생은 ‘달동네’라는 말도 처음 사용했다. 그는 1998년 경향신문의 ‘나의 젊음 나의 사랑’ 기고글에서 “1950년대 중반 서울 남산의 산동네에서 야학운동을 할 때 당시만 해도 일본말로 ‘하꼬방동네’라고 불리던 곳에서 ‘달동네 소식지’를 만든 후 (달동네라는 단어가) 점점 널리 쓰이게 됐다”고 썼다.
백 선생은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 등 순우리말을 발굴해 널리 쓰이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유희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