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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산 김일훈 선생 연보(年譜)
우촌k 2015. 11. 15. 11:01
인산(仁山) 선생 연보(年譜)
1909년 기유(已酉) 조선 순종 3년 탄생
음력 3월(己巳) 25일(甲戌) 오후 10시쯤(乙亥) 합경남도 흥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김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江陵) 유씨(劉氏)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다.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신룡(神龍)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며 같은 날 밤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은 꿈에 구름 속에서 봉황(鳳凰)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하여 이름을 운봉(雲鳳)이라 지었으나 얼마 뒤 운룡(雲龍)으로 고치다.
1912~1913 4~5세. 한글터득
한글 자득(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글 배우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한글 구성 원리를 알다.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한문본(漢文本) 춘향전(春香傳)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 명사십리(明沙十里) (능라도) 조운전(趙雲傳) 충열전(忠烈傳) 삼국지(三國志) 계명편(啓明篇) 당시(唐詩) 두시(杜詩)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
말과 글에 눈뜨면서부터 인간과 우주(宇宙)의 제현상(諸現象)을 비롯 인신(人身)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유무(有無), 화복수요(禍福壽夭) 등에 대한 예지(豫知)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손자가 '신동(神童)'으로 소문나기 시작하자 일제(日帝)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저어하여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하였다.
1915년 을묘(乙卯) 7세. 구료(求療)시작
비 개인 하늘의 5색(色)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藥理)를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공간 색소중(色素中)의 약분자(藥分子) 합성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병명(病名)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救療)하기 시작하다.
1916년 병진(丙辰) 8세. 폐암(肺癌) 치료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속초 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할아버지[당시 이름난 유의(儒醫)]를 설득하여 그대로 한 결과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다. 동네 아이 중 같은 또래의 어느 아이가 부족증(不足症_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아이를 유인하여 땅벌 둥지근처로 데리고 가서 벌집을 부셔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다. 또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다른 부작용 내지 후유증 없이 완치시키다.
1917년 정사(丁巳) 9세. 죽염제조원리
할아버지가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홉 번째 구울 때는 송진 관솔 등으로 화력(火力)을 돋워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과 원리를 할아버지께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던 약소금의 제조방법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하여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역한 냄새도 나므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제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하면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천상(天上) 태백성(太白星)의 신철분(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묘약(妙藥)합성이 가능하다.
1924년 갑자(甲子) 16세. 대 한민국 임시정부 6년 독립군 입대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수차례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인술(仁術)로 병고(病苦)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다.
1926년 병인(丙寅) 18세. 죽염제조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홉 번 반복하여 완성된 '죽염(竹濫)'을 최초로 생산하다.
1927년 정묘(丁卯) 19세. 진폐증 치료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죽염(竹鹽)을 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동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폐증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백개자(白芥子_妙末), 행인(杏仁_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례씩 복용하여 10일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갑술(甲戌) 26세. 체포, 그리고 탈출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금화군(金化郡) 금성면(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이희룡(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방한암(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송만공(宋滿空), 김수월(金水月), 백벽산의 강(姜)보살[이름 미상(未詳)] 등 선지식(善知識)들과 도요(道要)를 문답하다.
1942년 임오(壬午) 34세. 조선총독부 습격 계획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 강제(康齋) 문창수(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계미(癸未) 35세. 약혼(約婚)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장(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장영옥(張永玉)과 약혼을 하다. 장영옥은 1930년(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여식(女息)과의 정혼(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선약(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을유(乙酉) 37세. 해방조국 입경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靈德寺)에서 하산(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의논하였다.
1948년 무자(戊子) 40세. 천하제일 인재를 몰라본 이승만 대통령
광복 직후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김범부(金凡夫) 정인보(鄭寅普) 장덕수(張德秀) 김준연(金俊淵) 조병옥(趙炳玉) 김병로(金炳魯) 등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논의(論議)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방역(防疫)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50년 2월~8월) 백성욱(白性旭) 박사와 세 차례 만나 경인(庚寅)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백(白)박사의 진언(進言)은 이승만의 묵살로 좌절되고 수백만의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이후 계룡산으로 낙향(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훈장(訓長), 산판목물(木物) 등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간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정운복(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숙식(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순국(殉國)한 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세복(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 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일훈선생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장영옥(張永玉)과 함께 월남(越南)하였다. 이 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50년에 딸 부남은 사망)
1950년 경인(庚寅) 42세. 부산에서 피난민 맞을 준비하다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의 진언(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전쟁피해가 불가피하게 예상되자 이 해 3월에 부산으로 미리 가서 세춘(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다.
1951년 신묘(辛卯) 43세 장남(윤우) 출생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목물(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임진(壬辰) 44세. 아버지는 통천군수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계사(癸巳) 45세. 논산 삼월면으로 이사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도화동(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 박(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박산(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상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955년 을미(乙未) 47세. 차남(윤세) 출생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상도리(上道里) 용화사(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차남(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삼일정신선양회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동회(同會)의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상경(上京), 경무대 서장 김진흥(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정신선양회 전국조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강권(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남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병신(丙申) 48세. 차녀(윤정) 출생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정유(丁酉) 49세. ‘살구쟁이’에서 함배기 파다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원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함양(咸陽)으로 갔다. 함양에서는 명의(名醫)로 이름난 정태진(鄭泰振)의 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산정(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임상윤(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렵 한 친구의 부인이 위(胃)와 담(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므로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하고 오랜 고질병은 완치되었다.
1959년 기해(已亥) 51세. 3남(윤수) 출생
여름에 三男 윤수 얻음
1960년 경자(庚子) 52세. 처(妻), 3남
4월19일, 학생 의거(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즐겼는데 한 번은 누가 그네의 상단 부분을 톱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일훈선생이 첩약을 지어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장(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역시 쑥뜸 권유를 거절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앓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다 죽게 되었으므로 죽염을 '활명수(活命水)'에 타 손가락으로 찍어 밤새 아기에게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 인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김의환(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렸다.
1961년 신축(辛丑) 53세. 소경이 눈 뜨는 인산쑥뜸법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시중(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묘향산(妙香山) 활불(活佛)이 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5·16 무렵 상경(上京)하여 친지(親知)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때 쑥뜸으로 광나루 모사(某寺)의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시신경(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 년 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 활불(活佛)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와 '영구법(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시력(視力)을 회복, 잃었던 광명(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생(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영구법(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족삼리(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 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구료(救療)하였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는 독립운동 시 묘향산 등 명산(名山)에 은거하며 인술(仁術)로 활인구세(活人救世)의 이적(異蹟)을 보였다 하여 석계(石溪) 문채(文彬) 선생(先生)과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_임시정부 독립운동 사장 겸 주필) 선생(先生),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_平北의 大儒) 선생(先生) 등이 붙여준 호이고,
일훈(一勳)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구한말(舊韓末) 의병(義兵)대장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화서(華西) 김항로(金恒老)의 손자인 이광암(李廣庵) 선생(先生)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1962년 임인(壬寅) 54세. 4남(윤국) 출생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4남(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갑신(甲辰) 56세. 15평 집 장만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을사(乙巳) 57세. 재결합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 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정미(丁未) 59세. 급사자 구급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성혜(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모(某) 기업 회장 아들이 음독(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급사자(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기유(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경술(庚戌) 62 세. 신종철학 역비전 연재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가재(家財)를 기울여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쳐 '신종철학 역비전(神宗哲學 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 화상(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66~67세. 함양 이사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68~70세.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 7차례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병자(病者)구제에 힘썼다.
1980년 경신(庚申) 72세. 우주와신약, 구세신방
수유동 399의 9번지에 거주하며 우주와신약(字宙와神藥) 저술하여 출간. 1981년 신유(辛酉) 73세 우주와신약(宇宙와 神藥)의 한글화를 시도한 구세신방(救世神方)을 출간. 12월 31일 경남 함양읍 하동586-3번지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
1983년 (癸亥) 75세. 78회 째 이사
주거지를 하동에서 상동(운림리) 154의3 번지로 옮김 (45년 광복 이후 78회째)
1986년 병인(丙寅) 78세. 신약(神藥) 출간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醫方)을 모아 신약(神藥) 출간. 6월 20일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서 신약(神藥) 출간 기념강연회 갖고 '신약(神藥)의 실상(實相)과 그 활용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이 후 총 33회 대중강연을 국내외에서 실시하였으며 그 녹음이 책(신약본초)으로 출간된다.
1987년 정묘(丁卯) 79세. 민속신약연구회
이준승, 조백간, 남기민 등의 발기로 서울프레스센타 19층에서 2백여 명의 발기인이 동참한 가운데 민속 신약(神藥)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옹을 종신(終身)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90년 3월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9년 기사(己巳) 81세. 월간 민의약 창간
김옹의 인술(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민의약(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1990년 경오(庚午) 82세. 죽림리 1048-2
월간 민의약(民醫藥)의 제호를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변경하여 발행. 이 잡지는 김옹의 특이한 의방(醫方)을 연구 실천 보급하는 한편 동서의학(東西醫學)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다. 4월에 상동(을림리) 154의 3번지 자택(自宅)을 처분하고 함양읍 죽림리(竹林里) 산(山)194의 3번지에 낡은 집을 허물고 26평 규모로 조립식 판넬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79회 ) 그러나
이집이 무허가 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됨으로써(자진철거) 다시 죽림리(竹林里) 1048-2 인산죽염 제조장 부지내로 옮겨 지은 조립식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김옹은 1945년 광복이후 모두 80회의 이사기록을 갖게 되었다.
1992년 임신(壬申) 84세. ‘지혜의 책 신약본초’를 남기고..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와 신약본초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헌신과 나라에 대한 충정,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올바른 가치관 세움'에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 초까지 삼남 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시다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함양아파트 차남 윤세 씨 집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나셨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농장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제 때는 "사후에 출간하라" 유언하였던 '신약본초(神藥本草)'가 영전에 바쳐졌다.
출처 : 신 약 본초 (神 藥 本 草)
글쓴이 : 신약본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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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산 김일훈 선생 연보(年步)
우촌k 2015. 11. 15. 11:01
인산(仁山) 선생 연보(年譜)
1909년 기유(已酉) 조선 순종 3년 탄생
음력 3월(己巳) 25일(甲戌) 오후 10시쯤(乙亥) 합경남도 흥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김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江陵) 유씨(劉氏)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다.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신룡(神龍)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며 같은 날 밤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은 꿈에 구름 속에서 봉황(鳳凰)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하여 이름을 운봉(雲鳳)이라 지었으나 얼마 뒤 운룡(雲龍)으로 고치다.
1912~1913 4~5세. 한글터득
한글 자득(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글 배우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한글 구성 원리를 알다.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한문본(漢文本) 춘향전(春香傳)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 명사십리(明沙十里) (능라도) 조운전(趙雲傳) 충열전(忠烈傳) 삼국지(三國志) 계명편(啓明篇) 당시(唐詩) 두시(杜詩)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
말과 글에 눈뜨면서부터 인간과 우주(宇宙)의 제현상(諸現象)을 비롯 인신(人身)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유무(有無), 화복수요(禍福壽夭) 등에 대한 예지(豫知)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손자가 '신동(神童)'으로 소문나기 시작하자 일제(日帝)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저어하여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하였다.
1915년 을묘(乙卯) 7세. 구료(求療)시작
비 개인 하늘의 5색(色)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藥理)를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공간 색소중(色素中)의 약분자(藥分子) 합성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병명(病名)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救療)하기 시작하다.
1916년 병진(丙辰) 8세. 폐암(肺癌) 치료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속초 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할아버지[당시 이름난 유의(儒醫)]를 설득하여 그대로 한 결과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다. 동네 아이 중 같은 또래의 어느 아이가 부족증(不足症_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아이를 유인하여 땅벌 둥지근처로 데리고 가서 벌집을 부셔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다. 또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다른 부작용 내지 후유증 없이 완치시키다.
1917년 정사(丁巳) 9세. 죽염제조원리
할아버지가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홉 번째 구울 때는 송진 관솔 등으로 화력(火力)을 돋워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과 원리를 할아버지께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던 약소금의 제조방법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하여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역한 냄새도 나므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제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하면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천상(天上) 태백성(太白星)의 신철분(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묘약(妙藥)합성이 가능하다.
1924년 갑자(甲子) 16세. 대 한민국 임시정부 6년 독립군 입대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수차례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인술(仁術)로 병고(病苦)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다.
1926년 병인(丙寅) 18세. 죽염제조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홉 번 반복하여 완성된 '죽염(竹濫)'을 최초로 생산하다.
1927년 정묘(丁卯) 19세. 진폐증 치료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죽염(竹鹽)을 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동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폐증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백개자(白芥子_妙末), 행인(杏仁_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례씩 복용하여 10일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갑술(甲戌) 26세. 체포, 그리고 탈출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금화군(金化郡) 금성면(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이희룡(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방한암(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송만공(宋滿空), 김수월(金水月), 백벽산의 강(姜)보살[이름 미상(未詳)] 등 선지식(善知識)들과 도요(道要)를 문답하다.
1942년 임오(壬午) 34세. 조선총독부 습격 계획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 강제(康齋) 문창수(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계미(癸未) 35세. 약혼(約婚)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장(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장영옥(張永玉)과 약혼을 하다. 장영옥은 1930년(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여식(女息)과의 정혼(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선약(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을유(乙酉) 37세. 해방조국 입경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靈德寺)에서 하산(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의논하였다.
1948년 무자(戊子) 40세. 천하제일 인재를 몰라본 이승만 대통령
광복 직후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김범부(金凡夫) 정인보(鄭寅普) 장덕수(張德秀) 김준연(金俊淵) 조병옥(趙炳玉) 김병로(金炳魯) 등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논의(論議)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방역(防疫)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50년 2월~8월) 백성욱(白性旭) 박사와 세 차례 만나 경인(庚寅)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백(白)박사의 진언(進言)은 이승만의 묵살로 좌절되고 수백만의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이후 계룡산으로 낙향(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훈장(訓長), 산판목물(木物) 등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간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정운복(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숙식(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순국(殉國)한 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세복(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 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일훈선생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장영옥(張永玉)과 함께 월남(越南)하였다. 이 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50년에 딸 부남은 사망)
1950년 경인(庚寅) 42세. 부산에서 피난민 맞을 준비하다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의 진언(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전쟁피해가 불가피하게 예상되자 이 해 3월에 부산으로 미리 가서 세춘(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다.
1951년 신묘(辛卯) 43세 장남(윤우) 출생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목물(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임진(壬辰) 44세. 아버지는 통천군수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계사(癸巳) 45세. 논산 삼월면으로 이사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도화동(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 박(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박산(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상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955년 을미(乙未) 47세. 차남(윤세) 출생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상도리(上道里) 용화사(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차남(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삼일정신선양회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동회(同會)의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상경(上京), 경무대 서장 김진흥(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정신선양회 전국조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강권(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남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병신(丙申) 48세. 차녀(윤정) 출생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정유(丁酉) 49세. ‘살구쟁이’에서 함배기 파다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원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함양(咸陽)으로 갔다. 함양에서는 명의(名醫)로 이름난 정태진(鄭泰振)의 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산정(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임상윤(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렵 한 친구의 부인이 위(胃)와 담(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므로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하고 오랜 고질병은 완치되었다.
1959년 기해(已亥) 51세. 3남(윤수) 출생
여름에 三男 윤수 얻음
1960년 경자(庚子) 52세. 처(妻), 3남
4월19일, 학생 의거(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즐겼는데 한 번은 누가 그네의 상단 부분을 톱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일훈선생이 첩약을 지어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장(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역시 쑥뜸 권유를 거절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앓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다 죽게 되었으므로 죽염을 '활명수(活命水)'에 타 손가락으로 찍어 밤새 아기에게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 인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김의환(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렸다.
1961년 신축(辛丑) 53세. 소경이 눈 뜨는 인산쑥뜸법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시중(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묘향산(妙香山) 활불(活佛)이 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5·16 무렵 상경(上京)하여 친지(親知)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때 쑥뜸으로 광나루 모사(某寺)의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시신경(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 년 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 활불(活佛)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와 '영구법(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시력(視力)을 회복, 잃었던 광명(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생(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영구법(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족삼리(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 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구료(救療)하였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는 독립운동 시 묘향산 등 명산(名山)에 은거하며 인술(仁術)로 활인구세(活人救世)의 이적(異蹟)을 보였다 하여 석계(石溪) 문채(文彬) 선생(先生)과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_임시정부 독립운동 사장 겸 주필) 선생(先生),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_平北의 大儒) 선생(先生) 등이 붙여준 호이고,
일훈(一勳)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구한말(舊韓末) 의병(義兵)대장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화서(華西) 김항로(金恒老)의 손자인 이광암(李廣庵) 선생(先生)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1962년 임인(壬寅) 54세. 4남(윤국) 출생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4남(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갑신(甲辰) 56세. 15평 집 장만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을사(乙巳) 57세. 재결합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 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정미(丁未) 59세. 급사자 구급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성혜(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모(某) 기업 회장 아들이 음독(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급사자(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기유(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경술(庚戌) 62 세. 신종철학 역비전 연재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가재(家財)를 기울여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쳐 '신종철학 역비전(神宗哲學 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 화상(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66~67세. 함양 이사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68~70세.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 7차례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병자(病者)구제에 힘썼다.
1980년 경신(庚申) 72세. 우주와신약, 구세신방
수유동 399의 9번지에 거주하며 우주와신약(字宙와神藥) 저술하여 출간. 1981년 신유(辛酉) 73세 우주와신약(宇宙와 神藥)의 한글화를 시도한 구세신방(救世神方)을 출간. 12월 31일 경남 함양읍 하동586-3번지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
1983년 (癸亥) 75세. 78회 째 이사
주거지를 하동에서 상동(운림리) 154의3 번지로 옮김 (45년 광복 이후 78회째)
1986년 병인(丙寅) 78세. 신약(神藥) 출간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醫方)을 모아 신약(神藥) 출간. 6월 20일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서 신약(神藥) 출간 기념강연회 갖고 '신약(神藥)의 실상(實相)과 그 활용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이 후 총 33회 대중강연을 국내외에서 실시하였으며 그 녹음이 책(신약본초)으로 출간된다.
1987년 정묘(丁卯) 79세. 민속신약연구회
이준승, 조백간, 남기민 등의 발기로 서울프레스센타 19층에서 2백여 명의 발기인이 동참한 가운데 민속 신약(神藥)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옹을 종신(終身)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90년 3월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9년 기사(己巳) 81세. 월간 민의약 창간
김옹의 인술(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민의약(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1990년 경오(庚午) 82세. 죽림리 1048-2
월간 민의약(民醫藥)의 제호를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변경하여 발행. 이 잡지는 김옹의 특이한 의방(醫方)을 연구 실천 보급하는 한편 동서의학(東西醫學)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다. 4월에 상동(을림리) 154의 3번지 자택(自宅)을 처분하고 함양읍 죽림리(竹林里) 산(山)194의 3번지에 낡은 집을 허물고 26평 규모로 조립식 판넬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79회 ) 그러나
이집이 무허가 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됨으로써(자진철거) 다시 죽림리(竹林里) 1048-2 인산죽염 제조장 부지내로 옮겨 지은 조립식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김옹은 1945년 광복이후 모두 80회의 이사기록을 갖게 되었다.
1992년 임신(壬申) 84세. ‘지혜의 책 신약본초’를 남기고..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와 신약본초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헌신과 나라에 대한 충정,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올바른 가치관 세움'에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 초까지 삼남 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시다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함양아파트 차남 윤세 씨 집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나셨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농장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제 때는 "사후에 출간하라" 유언하였던 '신약본초(神藥本草)'가 영전에 바쳐졌다.
출처 : 신 약 본초 (神 藥 本 草)
글쓴이 : 신약본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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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산 김일훈 선생 연보(年步)
우촌k 2015. 11. 15. 11:01
인산(仁山) 선생 연보(年譜)
1909년 기유(已酉) 조선 순종 3년 탄생
음력 3월(己巳) 25일(甲戌) 오후 10시쯤(乙亥) 합경남도 흥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김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江陵) 유씨(劉氏)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나다.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신룡(神龍)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며 같은 날 밤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은 꿈에 구름 속에서 봉황(鳳凰)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하여 이름을 운봉(雲鳳)이라 지었으나 얼마 뒤 운룡(雲龍)으로 고치다.
1912~1913 4~5세. 한글터득
한글 자득(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글 배우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한글 구성 원리를 알다.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한문본(漢文本) 춘향전(春香傳)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 명사십리(明沙十里) (능라도) 조운전(趙雲傳) 충열전(忠烈傳) 삼국지(三國志) 계명편(啓明篇) 당시(唐詩) 두시(杜詩)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
말과 글에 눈뜨면서부터 인간과 우주(宇宙)의 제현상(諸現象)을 비롯 인신(人身)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유무(有無), 화복수요(禍福壽夭) 등에 대한 예지(豫知)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손자가 '신동(神童)'으로 소문나기 시작하자 일제(日帝)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저어하여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하였다.
1915년 을묘(乙卯) 7세. 구료(求療)시작
비 개인 하늘의 5색(色)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藥理)를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공간 색소중(色素中)의 약분자(藥分子) 합성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병명(病名)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救療)하기 시작하다.
1916년 병진(丙辰) 8세. 폐암(肺癌) 치료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속초 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할아버지[당시 이름난 유의(儒醫)]를 설득하여 그대로 한 결과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다. 동네 아이 중 같은 또래의 어느 아이가 부족증(不足症_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아이를 유인하여 땅벌 둥지근처로 데리고 가서 벌집을 부셔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다. 또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다른 부작용 내지 후유증 없이 완치시키다.
1917년 정사(丁巳) 9세. 죽염제조원리
할아버지가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홉 번째 구울 때는 송진 관솔 등으로 화력(火力)을 돋워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과 원리를 할아버지께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던 약소금의 제조방법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하여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역한 냄새도 나므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제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하면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천상(天上) 태백성(太白星)의 신철분(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묘약(妙藥)합성이 가능하다.
1924년 갑자(甲子) 16세. 대 한민국 임시정부 6년 독립군 입대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수차례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인술(仁術)로 병고(病苦)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다.
1926년 병인(丙寅) 18세. 죽염제조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홉 번 반복하여 완성된 '죽염(竹濫)'을 최초로 생산하다.
1927년 정묘(丁卯) 19세. 진폐증 치료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죽염(竹鹽)을 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동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폐증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백개자(白芥子_妙末), 행인(杏仁_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례씩 복용하여 10일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갑술(甲戌) 26세. 체포, 그리고 탈출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금화군(金化郡) 금성면(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이희룡(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방한암(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송만공(宋滿空), 김수월(金水月), 백벽산의 강(姜)보살[이름 미상(未詳)] 등 선지식(善知識)들과 도요(道要)를 문답하다.
1942년 임오(壬午) 34세. 조선총독부 습격 계획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 강제(康齋) 문창수(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계미(癸未) 35세. 약혼(約婚)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장(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장영옥(張永玉)과 약혼을 하다. 장영옥은 1930년(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여식(女息)과의 정혼(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선약(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을유(乙酉) 37세. 해방조국 입경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靈德寺)에서 하산(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의논하였다.
1948년 무자(戊子) 40세. 천하제일 인재를 몰라본 이승만 대통령
광복 직후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김범부(金凡夫) 정인보(鄭寅普) 장덕수(張德秀) 김준연(金俊淵) 조병옥(趙炳玉) 김병로(金炳魯) 등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논의(論議)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방역(防疫)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50년 2월~8월) 백성욱(白性旭) 박사와 세 차례 만나 경인(庚寅)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백(白)박사의 진언(進言)은 이승만의 묵살로 좌절되고 수백만의 참사가 일어나고 만다.
이후 계룡산으로 낙향(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훈장(訓長), 산판목물(木物) 등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간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정운복(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숙식(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순국(殉國)한 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세복(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 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일훈선생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장영옥(張永玉)과 함께 월남(越南)하였다. 이 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50년에 딸 부남은 사망)
1950년 경인(庚寅) 42세. 부산에서 피난민 맞을 준비하다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의 진언(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전쟁피해가 불가피하게 예상되자 이 해 3월에 부산으로 미리 가서 세춘(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다.
1951년 신묘(辛卯) 43세 장남(윤우) 출생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목물(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임진(壬辰) 44세. 아버지는 통천군수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계사(癸巳) 45세. 논산 삼월면으로 이사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도화동(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 박(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박산(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상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955년 을미(乙未) 47세. 차남(윤세) 출생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상도리(上道里) 용화사(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차남(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삼일정신선양회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동회(同會)의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상경(上京), 경무대 서장 김진흥(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정신선양회 전국조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강권(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남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병신(丙申) 48세. 차녀(윤정) 출생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정유(丁酉) 49세. ‘살구쟁이’에서 함배기 파다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원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함양(咸陽)으로 갔다. 함양에서는 명의(名醫)로 이름난 정태진(鄭泰振)의 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산정(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임상윤(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렵 한 친구의 부인이 위(胃)와 담(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므로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하고 오랜 고질병은 완치되었다.
1959년 기해(已亥) 51세. 3남(윤수) 출생
여름에 三男 윤수 얻음
1960년 경자(庚子) 52세. 처(妻), 3남
4월19일, 학생 의거(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즐겼는데 한 번은 누가 그네의 상단 부분을 톱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일훈선생이 첩약을 지어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장(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역시 쑥뜸 권유를 거절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앓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다 죽게 되었으므로 죽염을 '활명수(活命水)'에 타 손가락으로 찍어 밤새 아기에게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 인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김의환(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렸다.
1961년 신축(辛丑) 53세. 소경이 눈 뜨는 인산쑥뜸법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시중(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묘향산(妙香山) 활불(活佛)이 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5·16 무렵 상경(上京)하여 친지(親知)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때 쑥뜸으로 광나루 모사(某寺)의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시신경(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 년 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 활불(活佛)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와 '영구법(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시력(視力)을 회복, 잃었던 광명(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생(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영구법(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족삼리(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 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구료(救療)하였다.
「인산(仁山)」이라는 호(號)는 독립운동 시 묘향산 등 명산(名山)에 은거하며 인술(仁術)로 활인구세(活人救世)의 이적(異蹟)을 보였다 하여 석계(石溪) 문채(文彬) 선생(先生)과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_임시정부 독립운동 사장 겸 주필) 선생(先生), 충제(充齋) 김두운(金斗運_平北의 大儒) 선생(先生) 등이 붙여준 호이고,
일훈(一勳)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개명(改名)한 것이다. 구한말(舊韓末) 의병(義兵)대장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화서(華西) 김항로(金恒老)의 손자인 이광암(李廣庵) 선생(先生)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1962년 임인(壬寅) 54세. 4남(윤국) 출생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4남(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갑신(甲辰) 56세. 15평 집 장만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을사(乙巳) 57세. 재결합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 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정미(丁未) 59세. 급사자 구급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성혜(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모(某) 기업 회장 아들이 음독(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급사자(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기유(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경술(庚戌) 62 세. 신종철학 역비전 연재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가재(家財)를 기울여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쳐 '신종철학 역비전(神宗哲學 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 화상(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66~67세. 함양 이사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68~70세.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 7차례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병자(病者)구제에 힘썼다.
1980년 경신(庚申) 72세. 우주와신약, 구세신방
수유동 399의 9번지에 거주하며 우주와신약(字宙와神藥) 저술하여 출간. 1981년 신유(辛酉) 73세 우주와신약(宇宙와 神藥)의 한글화를 시도한 구세신방(救世神方)을 출간. 12월 31일 경남 함양읍 하동586-3번지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
1983년 (癸亥) 75세. 78회 째 이사
주거지를 하동에서 상동(운림리) 154의3 번지로 옮김 (45년 광복 이후 78회째)
1986년 병인(丙寅) 78세. 신약(神藥) 출간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醫方)을 모아 신약(神藥) 출간. 6월 20일 한국일보 12층 대강당서 신약(神藥) 출간 기념강연회 갖고 '신약(神藥)의 실상(實相)과 그 활용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이 후 총 33회 대중강연을 국내외에서 실시하였으며 그 녹음이 책(신약본초)으로 출간된다.
1987년 정묘(丁卯) 79세. 민속신약연구회
이준승, 조백간, 남기민 등의 발기로 서울프레스센타 19층에서 2백여 명의 발기인이 동참한 가운데 민속 신약(神藥)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옹을 종신(終身)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90년 3월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9년 기사(己巳) 81세. 월간 민의약 창간
김옹의 인술(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민의약(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1990년 경오(庚午) 82세. 죽림리 1048-2
월간 민의약(民醫藥)의 제호를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변경하여 발행. 이 잡지는 김옹의 특이한 의방(醫方)을 연구 실천 보급하는 한편 동서의학(東西醫學)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다. 4월에 상동(을림리) 154의 3번지 자택(自宅)을 처분하고 함양읍 죽림리(竹林里) 산(山)194의 3번지에 낡은 집을 허물고 26평 규모로 조립식 판넬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79회 ) 그러나
이집이 무허가 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됨으로써(자진철거) 다시 죽림리(竹林里) 1048-2 인산죽염 제조장 부지내로 옮겨 지은 조립식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김옹은 1945년 광복이후 모두 80회의 이사기록을 갖게 되었다.
1992년 임신(壬申) 84세. ‘지혜의 책 신약본초’를 남기고..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와 신약본초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헌신과 나라에 대한 충정, 그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올바른 가치관 세움'에 관심을 가졌던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 초까지 삼남 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시다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함양아파트 차남 윤세 씨 집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나셨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농장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제 때는 "사후에 출간하라" 유언하였던 '신약본초(神藥本草)'가 영전에 바쳐졌다.
출처 : 신 약 본초 (神 藥 本 草)
글쓴이 : 신약본초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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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구세의 80년! 병들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활인구세의 80년!
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 기유년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 25일 밤 10시쯤 부친 언양김씨 김경삼과 모친 강릉 유씨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홍리, 구름속에서 용이 품안으로 날아드는 태몽이 있어 구름 운(雲)자, 용 용(龍)자 '운룡'이라 이름 지었으며, 그 이름을 해방 직후까지 쓰게 된다. 본명은 김철진(金哲鎭), 맏형은 두꺼비집을 발명한 김봉진(金鳳鎭)이다.
김일훈 옹은 관향이 언양(彦陽)이다.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이 신라 56대 임금 경순왕(敬順王)이고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인 언양군(彦陽君) 김선(金繕)이 언양 김(金)씨의 제1세조(祖)가 된다.
언양 김씨는 신라시대에 왕으로 38대이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도학(道學), 충효(忠孝), 절의(節義), 장상(將相), 석학(碩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영달을 탐하지 않고 고고히 살다가국가가 외침을 당할 때면 분연히 일어나 선봉에 서서 싸웠던 애국충신이요, 열사들이었다.
언양군 8세손 위렬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장군은 고려 고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북방 거란병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변경 침입을 격퇴한 명장일 뿐 아니라 이름 난 재상이기도하였다.
언양 김씨 가문에서는 이렇듯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던 인물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조 임진왜란 때 활약한 김천종(金千鐘) 장군은 특히 유명하다. 김천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도처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진주성 싸움에서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끝까지 싸우다가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언양군의 17세손 직장공(直長公) 김속(金涑)은 직장공파 계파의 시원(始源)이 되는 인물이다. 직장공 김속의 아들 김사지(金四知)는 조선조 성종 23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典籍), 사량원(司諒院) 정언(正言), 육조의 좌랑 (佐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김사지의 다섯째 아들 김한공(金漢功)은 빈 좌수(座首)를 지낸 바 있다.
김일훈 옹은 언양군의 19세손인 김한공의 직계 후손이다.
좀더 알기 쉽도록 직장공부터 세계(世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언양군 (彦陽君) 17세손(世孫) 직장공(直長公) 김속(金速)-18세 사지(四知)-19세 한공 (漢功)-20세 응호(應虎)-21세 경복(景福) -22세 구(球)-23세 태형(兌亨)-24세 용추(用秋) -25세 익순(益純)-26세 상조(尙兆)-27세 광려(光麗)(진토(進土))- 28세 정은(楨殷)(생원(生員))-29세 면변(冕變)(전교(典校))-30세 경참(慶參) (통천군수(通川郡守))-31세 일훈(一勳). 김 옹의 증조부 정은은 조선 순조 32년(年)(Q진(辰), 1832) 12월에 태어나 고종 건양원년(建陽元年)(병신(丙申), 1896) 3월 22일에 별세하였으며 조부 면섭은 조선 철종 3년(임자(壬子),1852) 5월 8일에 태어나 일정(日政)시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8년(병인(丙寅), 1926) 11월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경삼은 고종 9년(임신(壬申) 1872) 3월23일에 태어나 순종 4년 (경무(庚戊), 1910)에 통천(通川) 군수(郡守)로 발령받았으나 그해 한일(韓日)합방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학문에 힘쓰다가 1952년 윤(閏)5월 23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김경삼의 슬하에는 봉진(鳳鎭) 철진(哲鎭) 익감(益鑑) 영진(永鎭) 순진(順鎭) 무진(茂鎭) 등 7남 2녀가 있다.
김옹은 어린시절부터 홍원의 형제들과 헤어져 아버지(김경삼)를 따라 의주에 가서주로 살다가 16세 때 광복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 가족들과 헤어져 왕래를 끊고살았기 때문에 족보에서 이름이 누락되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는 독립운동시 묘향산 등 명산(名山)에 은거하면서 인술(仁術)을 이용한 활인구세(活人救世)의 행적이 있다고 하여 독립지사 석계(石溪) 문빈(文彬)선생과 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평북의 거유(巨儒) 계운산인(桂雲山人) 김두운(金斗運) 등이 붙여주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일제 때 만주,연해주,백두산,묘향산 등지에서 쓰던 이름은 지을룡(池乙龍)이고 일훈(一勳)이라는 이름은 광복 이후 스스로 개명(改名)한 것이며 개명할 때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이름은 운룡(雲龍)이었다.
구한말(舊韓末) 의병(義兵)대장 류린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화서(華西) 리항로(李恒老)의 손자인 리광암(李廣庵) 선생(先生)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