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는 두 달 전부터 재가 요양보호사를 통해 집(재가)에서 돌봄을 받았다.
어머니를 돌봄 하시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78세로 요양보호사 경험이 무척 많으신 분이다.
어머니와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언니, 동생 하면서 서로 감사하며 지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께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니를 돌봄 하셨다.
어머니도 따님도 요양보호사 선생님께서 얼마나 극진히 돌봄 하는지 탄복을 할 정도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어머니가 까만 변을 보기 시작하였다.
요양보호사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제 어머니가 오래 사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복지 센터에 할머니의 상태를 전하였다.
그리고 이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성을 다하셨다.
요양보호사 선생이 없는 시간에는 자녀가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돌봄 하였다.
어머니의 기력을 돕기 위해 매주 1차례 포도당 수액 주사를 맞아 왔는데
어느 날부터는 몸에서 수액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죽음이 정말 가까이 왔다는 신호다.
어머니께서는 자녀에게 이제 포도당 주사를 그만하라고 하시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신다.
그날 센터장도 어머니께 인사를 하러 갔는데
덥수룩한 머리를 보고 당장 미용사를 불러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따님까지 세 사람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머리를 이쁘게 깎아 드렸다.
그날 어머니는 따님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여 밥을 해드렸는데
상당히 많은 양을 드시고 변까지 보셨다.
그리고 두세 시간이 흐른 뒤 호흡이 거칠어져
돌봄 중이던 따님이 가족들에게 연락하여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머리까지 깎고 얼굴도 화사한 모습으로 곱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하셨다.
자식에게 “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가고 싶지 않다.”
대신 집에서 며칠만 있다가 갈 테니 절대 요양원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였다.
효심이 지극한 자녀들이 끝까지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포도당 주사액을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자
곧장 곡기를 끊고 스스로 죽음을 수용하셨다.
삶도 그렇지만 좋은 죽음은 죽음을 맞는 자의 선택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사회는 죽음의 긍정적 의미에 무관심하다.
지금은 죽음을 호상과 흉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을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경험하면서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수의를 만들거나 미리 짜둔 관을 닦으면서 해결하지 못한 관계나
해야 할 일들을 찾아 스스로 삶을 정리하며 죽음을 준비하였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대응도 가족과 마을이 함께 준비하였다.
당시에는 임종을 맞는 주요 공간은 고인의 집이었으며,
그 공간 속에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죽음 문화에 참여했다.
병원에서 죽는 것도 객사라 하여 죽을 때는 집으로 모시고 왔는데
요즈음은 죽음 증세를 보이거나 심지어 집에서 죽은 경우에도 병원으로 모시고 간다.
죽음에 대한 인식변화로 의례도 급격하게 변화해 가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높은 의료수준에 비해
죽음 질이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어
‘비참한 죽음의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죽음 당사자는 물론 죽음을 지켜보며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조차
비참한 죽음 상황에 노출되어 있음을 지적받고 있다.
점점 비대해지는 의료자본과 기업화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죽음의 물질화로 삶의 문제에서 죽음을 도외시하게 한다.
이러한 변화는 급기야 ‘돌봄의 외주화’, ‘임종의 의료화’, ‘죽음의 상업화’
그리고 고독사 형태로 나타난다.
돌봄의 외주화 현상은
2000년대 이후 노인 돌봄의 사회적 제도화 과정과 맞물려 나타났다.
돌봄 책임의 주체를 가족에서 국가로 전환하면서
가족 돌봄의 한계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돌봄의 상품화 경향으로 돌봄을 개인의 삶에서 분리하게 한다.
결국, 노인 돌봄은 효용성, 편의주의, 상업화와 맞물려 시설 돌봄 위주로 구조화되고,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전적으로 내맡겨져 서비스 영역으로 상품화되어
가족 돌봄 부담 완화와 노인의 효율적 돌봄을 위한 기술적 돌봄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삶의 중요 부분으로서 갖는 돌봄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면서
가족 중심의 유대관계도 약화 되어가고 있다.
이제 노인은 상품화되어 외주돌봄을 받다가 죽음을 맞고 있다.
임종의 의료화 현상은 죽음 과정이 의료적으로 관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요양시설과 집에서 임종이 임박하면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어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 처치를 받다가 고립된 상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의료서비스 제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임종이라는 사건을 처리하는 형식적인 절차로 나타난다.
임종의 의료화로 수행되는 연명의료는 죽음 돌봄에 대한 갈등을 증폭시켜
죽음의 선택에 대한 자기 결정의 문제와
존엄사에 대한 윤리적, 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죽음의 상업화는 사후돌봄을 위한 상·장례가
상조업체와 장례식장으로 외주화되면서 상업화된 현상을 말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상・장례는
고인의 삶에 대한 회고와 상실에 대한 애도를 통해
산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의식이 아니라
유가족의 체면치레와 주검을 처리하는 형식적인 절차로 채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pandemic)로 장례문화는 급변하였다.
고인과 작별하는 상·장례는 엄숙하기 마련인데
코로나19로 기본적인 의식절차마저 다할 수 없어 죽음의 존엄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제 사후돌봄은 남은 가족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후를 대비해 생전에 스스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몽테뉴는 죽음 준비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찍이 아무도 나만큼 철저히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은 없으리라.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모른다.
죽음의 도(道)는 모든 예속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불행이 아닌 까닭을 깨닫는 자에게는
이 세상에 불행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생각을 정리하여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내게는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죽음이란 선물의 마중이다.
필멸의 존재라는 인간이 지닌 유한성의 비극을 초월하여
마지막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살면서 무한한 영생을 꿈꾸기에 비극이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그 유한성을 통해 참된 의미를 발견할 때
인간은 유한성의 비극을 극복하고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사후 대중의 평가를 받는 사람은 3% 정도이고
대부분은 가족의 평가를 받는다.
가족을 위해 얼만큼 헌신했던가? 가족을 얼만큼 사랑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