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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 성지 해설
◾ 도입
ㆍ배론 성지의 행정구역 상의 주소: 배론 성지의 행정구역상 주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 성지길 296입니다.
ㆍ배론 성지의 의미:배론 성지는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관리하는 성지로서 전국의 크고 작은 약 180여 곳 성지 중 가장 큰 성지 중의 한곳입니다. 대개 큰 성지는 피 흘린 곳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피 흘리지 않은 성지입니다.
배론 성지는 한국 교회의 세 가지 보물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쓴 토굴과 가마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묘소가 있습니다
배론 성지 해설봉사자 해설 자료
▣ 만남
◾ 간단한 첫 인사
ㆍ자기소개: 찬미 예수님! 저는 천주교 원주교구 성지해설봉사단 (여인희 글라라)입니다.
ㆍ환영 인사: 여러분들의 배론 성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지요? 다 모이셨으면 시작 기도로 오늘의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 시작 기도 : 각 성지에 알맞은 기도문을 성지 담당 사제와 협의하여 추후 제작하여 배포 예정
◾ 순례 전 안내
ㆍ주요시설 안내:
배론 성지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북쪽에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쓴 토굴과
성 요셉 신학교 터,
십자가의 길,
최양업 신부님 묘소와 성직자 묘소,
지학순 주교 기념관이 있고,
남쪽에는 대성당과 소성당,
조각공원,
잔디공원,
로사리오 기도길,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있습니다.
ㆍ순례 순서 및 소요 시간 안내:
오늘 순례는 대성당과 소성당, 조각공원, 순교자 현양탑과 백서를 쓴 토굴, 성 요셉 신학교 터, 최양업 신부님 묘소, 지학순 주교 기념관 순서로 하겠습니다. 장소별 해설 시간은 이동 시간을 합하여 10분 정도로 잡고 약 한 시간 삼십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안전 및 기타 주의 사항 안내:
순례 전에 개인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다녀오십시오. 음수대는 양업교 옆과 최양업신부 조각공원 두 곳에 있으며, 화장실은 성지사무실 옆에 있습니다. 이동이나 기타 단체 활동에 어려움이 있으신 분은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따로 기도나 묵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동 시 각자 개인 안전에 유의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안내와 해설
배론 성지의 지리적 위치는 주론산의 좌측맥이 배론 성지의 주산이 되고 우측맥은 파랑재를 지나 배론 성지 안산이 됩니다. 이 두 산맥의 가운데가 배론 성지의 터가 됩니다.
박달재를 넘어 서쪽으로 가면 충청도, 전라도, 북쪽으로 가면 강원도, 아래쪽으로는 경상도로 가는 길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던 신앙선조들에게 배론은 숨어 살기도 좋았지만 도망가기도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배아래 바닥처럼 생겼다하여 ‘배론(舟論)’이라 한다고 전해집니다
동선 별 소개
- 대성당과 소성당:
이 성당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으로 정식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입니다. 이곳은 흔히 대성당으로 불리며 바로 옆에 붙어있는 소성당과 함께 90년대 후반 순교자성월에 봉헌되었습니다. 성당 앞 오른쪽에 있는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입니다.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오른손에는 묵주를, 왼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오늘도 깊은 산골짜기 교우촌을 찾아 걷고 또 걷는 길 위의 신부님을 표현한 듯합니다.
성당의 전체적인 모양은 배 모양으로 설계ㆍ시공되었습니다.
첫째, 배론 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입니다.
둘째, 노아의 방주처럼 3000년 기를 향하는 구원의 배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셋째, 최양업 신부님이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함입니다.
대성당의 특징 및 성당 내부의 벽화와 성인화 및 성인 유해에 대해서는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성당에는 십자고상이 없습니다. 대신 제대 오른편에 예수님과 우도와 좌도의 조형물이 있습니다.
천정에서 비치는 일광으로 평소에는 인공조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친환경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제대를 향해 좌측에는 성화(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남종삼 요한), 성인화와 성인들의 유해(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남종삼 요한, 장주기 요셉(소성당 제대))가 모셔져있고, 특히 최양업 신부님 관련 그림이(가계도와 출입국 경로도, 사목지도) 있으며 고해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되시면 잠시 묵상시간을 가져도 좋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 최양업신부님 조각공원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님입니다. 1821년 충남 청양 다락골에서 부친 순교성인 최경환(프란체스카)과 모친 복녀 이성례(마리아)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836년 12월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교육을 받고, 1849년 4월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귀국 후 약 12년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었던 지역인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의 4,000여 신자와 127개의 공소를 맡아 사목하셨습니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배론에서 180리 정도 떨어진 문경 근처에서 선종하셨고
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쓴 것을 시작으로 선종하기 1년 전 1860년 9월3일에 안곡에서 쓴 마지막 편지까지 총 19통의 라틴어 편지 중 1통을 제외한 18통이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간행하고 기도서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하였으며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천주가사를 저술하였습니다. 특히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보내는 열한 번째 편지는 이곳 배론에서 쓰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약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 해마다 7,000리를 박해를 피해서 숨어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최양업 신부님은 2016년에 가경자로 선포되셨고 현재 시복시성 절차를 밟는 중입니다.
이곳은 최양업 신부님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350여 평 규모로 조성되어 2004년 준공되었습니다. 매장문화의 폐단을 없애고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국토를 물려주겠다는 취지아래 유해 1,100여기를 안치할 수 있는 봉안당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개울을 건너 무명 순교자 묘소에 잠시 인사를 드린 다음 진복문을 지나 올라가면 바로 앞에 경당이 있고, 경당 왼편에 순교자 현양탑과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동상 및 가마 모형, 경당 뒤쪽으로 백서를 쓴 토굴, 경당 오른편에 성 요셉 신학교가 있습니다.
- 황사영 백서와 백서를 쓴 토굴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아버지 황석범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창원이며 자를 덕소(德紹)라 합니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로부터 스무 살이 되면 중용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후 정명련(정약현의 딸)과 결혼으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어
조선 최초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이 처 고모부, 한국 신앙 성조 이벽(세례자요한)이 처외삼촌,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은 처삼촌으로 모두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황사영은 처삼촌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혀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 후 부귀영화의 길을 스스로 버리고 교리 연구와 하느님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는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26세의 나이로 대역죄로 능지처사 되었습니다.
순교자 현양탑 앞의 황사영 알렉시오의 동상은 손들이 세운 것으로 동상은 북한에서 제작되어 공수되어 온 것입니다.
신유박해로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습니다.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정도였으며 입구는 1m 반 정도를 돌로 쌓아 올렸고,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입니다.
황사영이 1801년 9월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특히 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쓴 것을 시작으로 선종하기 1년 전 1860년 9월3일에 안곡에서 쓴 마지막 편지까지 총 19통의 라틴어 편지 중 1통을 제외한 18통이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배론 성 요셉 신학교 터
이곳은 1855년부터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10년 넘게 유지해왔던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앞에 있는 십자가상은 신학당 표지석입니다. 그리고 초가 옆에 있는 두 분 사제상은 푸르티에 총장신부님과 프티니콜라 교수신부님으로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이십니다. 방인사제 육성을 위하여 조선에 신학교를 세우고자하던 차에 배론 교우촌 회장인 성 장주기요셉(시성: 1984년 요한바오로2세)이 자신의 거처였던 세 칸짜리 초가집을 봉헌하여 1853년 이래 교구장 직무대행을 하던 매스트로 이(李) 신부가 주보성인을 성 요셉으로 하는 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성 장주기 요셉은 한문도 가르치고 신학교의 잔일을 도맡아하며 교회의 집주인 노릇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신학교를 ‘성 요셉 신학교’라고 명명하여 공식적으로 인준하였습니다.
11년간 숨어서 가르친 10여 명의 신학생들을 한분도 사제로 서품시키지 못하고 두 신부님은 186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같은 해 집주인 장주기 역시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함에 따라 신학생들은 모두 흩어지고 신학교도 11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묘소
최양업 신부님 동상 아래 새겨진 것은 사향가(思鄕歌)의 일부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신자들의 향한 사랑과 세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글 모르는 평신도들을 위해 교리를 4ㆍ4조의 가사로 지어 가르치신 것으로 교우들을 본향(하늘나라)을 찾아가는 신앙의 벗들로 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방팔해 어느곳이 본향인가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쳤고 / 복지에로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네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 빈궁재화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랴
이렇듯 한 풍지세계 안거할 곳 아니로다 / 인간만복 다 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로다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그만이라 / 천주님을 믿으세요 영혼불멸 하여보세”
‘평화를 위한 기도 동산’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은 초대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을 비롯하여 현재 11분의 신부님이 안장되어 있는 성직자 묘소 옆을 지나 이곳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 바로 앞에서 끝이 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묘비에는 『최도마정구지묘』로 기재되 세례명이며 양업은 아명이고 정구가 관명인 까닭입니다.
최양업신부님의 무덤은 1861년 안장 후 박해로 인해 마치 주인 없는 무덤처럼 버려졌던 것을 1942년에 무덤을 단장하고 묘비까지 마련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세우지 못하다가 1945년 해방 후 9월 27일에 제천 본당과 원주, 풍수원, 양평의 신부님들과 인근 교우 3,4백 명이 모여 묘비를 세웠습니다. 현재 증거자로 시복 추진 중에 있으며 지난 2016년 가경자로 선포 되셨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전구를 비는 기도를 많이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함께 최양업 신부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
- 지학순 주교 기념관
이 기념관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불의 앞에서 당당하게 정의를 외치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시며 진정한 사목자로, 사제로 사신 지학순 주교님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그분의 삶을 기리며 그 뜻을 본받기 위한 공간으로 2011년 3월 12일, 선종 18주기(1993년 선종) 되는 날에 개관하였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관련 유품과 일기ㆍ활동기록ㆍ사진 ㆍ관련 자료 등 모두 1000 여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고, 지 주교님이 세상에 남기신 뜻을 기리고 본받는 연구와 출판 작업을 진행하며 지 주교님의 삶과 뜻을 기억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1968년 원주 지역사회 문화 활동의 전당이 된 가톨릭센터를 세우고, 1971년 10월 원주시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3일간에 걸쳐 교구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와 함께 열어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주교의 지도 아래 공개적, 대중적으로 사회악과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계기를 여는 등 1970~80년대 독재와 부정부패의 시기에도 ‘양심선언’ 같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사회 정의를 밝혔습니다.
▣ 마무리와 기도
◾ 마무리
ㆍ 간결한 요약과 정리:
- 오늘 순례한 장소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 있으신가요?
- 순례를 마치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마침 기도
ㆍ 끝 인사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과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성지 순례를 마치신 여러분께 축하의 박수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