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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는지라 (열왕기하 4:31-37)
2023.09.10 주일예배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지도를 말씀드렸었다. 여러 종교에서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600 지수의 평안은 초월적인 삶이고 영속적인 행복한 상태로 천만명중 한명 꼴이라고 한다. 평안입니다가 대단한 수준인거있죠. 최고의 경지는 에너지 수준 700-1,000으로 측정되는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이 깨달음은 신성과 결합되어있다고 했다. 예수님, 부처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는 최악의 마음상태인 수치심, 죄책감으로 뭉쳐진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안할 수 없죠. 깨달음은 신성과 결합되어있다고 하니까 내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평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세상이치에 눈을 뜨게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뜨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좀더 자세히 어떻게 눈을 뜰지 생각해보겠다.
1. 엘리사의 지팡이라고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31절
게하시는 엘리사 선생님이 시킨대로 죽은아이의 얼굴에 지팡이를 놓았다. 하지만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아이는 아무런 반응없이 그대로 죽은채 누워있다. 당황한 게하시는 오던 길로 돌아가서 오고있던 엘리사를 만나 아이가 깨지 않았어요 라고 보고한다. 깨어나다 는 죽은 상태로부터 일으키다, 소생의 의미로 사용되었따.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의 상태를 잠들었도다 하고 표현하시고 그러나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셨다. 죽음 가운데서 깨어나는 부활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게하시의 사역으로는 아이에게 엘리사의 지팡이를 놓았지만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한다. 엘리사도 믿고 보냈지만 게하시를 몰랐다. 지팡이가 부적은 아니다. 유명한 설교를 그대로 해도 진실하지 못하면 결정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어렵다. 엘리사 밑에서는 쉬워보였는데 게하시 혼자 보내니까 아이에게 말씀이 들리지 않네요. 애통함 없이 그야말로 약장수처럼 사기꾼처럼 연기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죠. 똑같이 수넴여인도 연기를 했는데 분별이 안되시나보다.
어떤 목자님이 지난 주 목사님 설교에 100% 수용되지 않는 그런 부분이 있었다. 구원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해도 된다 라고 하신다니, 수용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부목자님이 저는 목자님과 함께한 세월이 5-6년 가까이 되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목자의 역할에 너무 완벽해서 빈틈이 없기에 숨이 막힐정도입니다. 다음 주 목자님의 일정관계로 목원들만 식사 예정인데 그 빈틈을 찾아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험담거리로 나눌 예정입니다.
목자님이 너무 완벽하셔서 조금 망가지셔야 하는데요. 안그러니까 목장식구들이 목자님의 빈틈을 찾겠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수넴여인의 연기가 이해가 안된다고 하시니 오늘 게하시의 연기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이걸 분별하시길 바란다.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자기를 과대평가했다. 게하시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남이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간 그때 제자들은 산 아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담임목사만 찾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수넴여인의 믿음이 더 좋아보인다고 평신도만 찾으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항상 겸손하셔야한다. 곳곳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야한다. 겸손해야 분별된다.
32절
수넴여인은 게스트하우스를 성전으로 여기고 자기 침상에 아이를 눕혀놓고 왔다. 그러니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긴 것 맞다. 여인의 말은 앞뒤가 같다. 이 아이는 죽기 위해 태어난 아이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사건이 해석이 어렵지 않겠는가? 애초부터 여인은 아이를 바라지도 않았다. 누가 아이달라고 했나, 주신 분은 하나님 아니신가. 그런데 왜 줬다가 뺐느냐 말이다. 그러나 이미 여인은 아이가 죽은 문제가 자신을 깨우치시기 위해 주신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들의 가짜 평안에 속아 진짜 평안인 하나님을 멀리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사람을 떠나지 않겠어요 하고 외쳤다. 이때 엘리사는 아이가 죽은 것을 몰랐다. 아들을 안으리라 하는 예언을 주셨지만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엘리사에게 안알려주셨다. 그러므로 그동안 여인이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다면 아이가 죽은 뒤 부터는 수넴여인은 직접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섬기게 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적용 하나하나가 엘리사도 놀란 적용이기에 수넴여인이 우뚝 섰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죽은 일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는가. 그렇게 열심히 섬겼는데. 저 또한 열심히 주님을 섬기다가 30대에 남편이 졸지에 갔는데 얼마나 조롱받을 일이었겠는가. 사실 그 조롱소리를 다 듣게하셨다면 그런 저주가 어디있겠는가. 항상 구속사가 해석이 안되고 안들리는 사람은 비난을 하더라. 제가 아무리 평안입니다를 외쳐도 비난의 소리를 다 들었다면 저주가 따로 없었겠죠. 저에게 알맞게 듣게하셔서 지금까지 살아있다.
여인은 믿음이 좋은 여인이었다. 수준이 높기 때문에 다시한번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통과하게 하시고 생명을 걸만큼 간절함을 여인에게 원하셨다. 한번씩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성경이 잘 깨달아진다. 진리가 보이니까 암초가 그대로 있는데 암초보다 깊은 깨달음으로 암초를 넘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깊은 진리로 다가오게 하시니까 이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사건이 없으면 이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깨달을 수 없다. 이 모든걸 주님의 공로로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을 비교하는 사람은 목사님 고난도 고난인가, 밥을 굶었는가 헐벗었는가 길거리로 내쫓김을 당했는가 하는 분들이 항상 계시더라. 그러나 사람에게는 절대치의 고난이 있다. 나로써는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의 고통이었기에 주님을 만났고 이 고난을 통해 사명을 만났다. 여러분은 고난이 풀려지기만을 바라면 늘 고난도 비교를 한다. 제가 힘들 때 저는 소위 장로님 권사님 집안에 기업가 집안에 의사 남편이니까 저같은 사람이 오픈해서 쓴 책은 없더라. 안희숙씨처럼 가난하고 감옥에 가고 매맞고.. 엄청난 간증 스토리를 가지고있는 분들의 책과 간증이 대세였다. 저같은 사람은 간증도 사역도 도저히 불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이 간 후 저보고 간증책을 내자고 하는데 30대 여자가 앞으로 어떻게 산다고 책을 내겠는가. 저자신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뭘 하자고 해도 절대로 안했다. 할 수 없이 그 인생을 인도하셔서 50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때 까지는 아무것도 안했다. 늘 숨죽이고 나같은 사람이 큐티모임을 하는데 오시는게 이상해서 일절 테이프도 안만들고 녹음도 못하게 했다. 제가 힘들었다는 생각이 안드시는가? 뭔가 주의 일을 하면 내놓고 해야하지 않는가. 그런데 늘 숨을 죽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아무도 안올텐데 그러면 끝내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가니까 맨날 오더만요. 모든 사역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늘 자신이 없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지만 분명 저는 목회 성공이 목표는 아니다.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어떻게 교회를 이익의 재료로 내 자랑의 지팡이로 삼고 올 수는 더더욱 없지 않았겠어요? 한쪽에서는 알려질까 무섭고 한쪽에서는 늘 큐티해야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목회해보니 영혼구원보다 목회성공이 목표인 사역자가 더 많더라. 말로는 다 아니라고 한다. 우리들교회 목자님들도 사명자들이다. 지난 주도 선지생도의 가난과 수넴여인의 아들 없음이 누가 더 큰 고난인가 질문했는데 과부의 가난이 더 큰 것 같다는 답이 더 많이나오더라. 앉으나 서나 돈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이 생기면 사명은 간곳이 없고 세상으로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돈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목표가 확실하지 않을 때 쾌락과 정욕의 길로 빠지기가 쉽다. 그 좋은 돈보다 귀한 하나님이 상급이 되는 인생을 보여야하는 책임이 훨씬 어렵지 않겠는가? 오죽하면 부자가 낙타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는가. 수넴여인은 아들을 잃었다. 죽음에 이르는 아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독생자 그리스도인 아들을 잃은 아픔을 체휼하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은 하나님보다 더 큰 평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 여인은 돈도 가져봤다. 그래서 엘리사가 자기도 잘 살아봤으니 수넴여인이 세상이 감당못할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저를 딱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아니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니는 분도 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를 세우셨다. 그럴때는 저를 좀 믿으시길 바란다. 저를 믿으시면 그런분들을 위해 안타까워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안믿으시면 기도도 다 튕겨나가겠죠. 수넴여인이 엘리사를 절대적으로 믿으니까 이 수넴여인의 죽은 아이를 잠에서 깨우기로 엘리사가 결단한다.
적용
여러분이 자랑하는 엘리사의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모태신앙입니까 유명한 교회입니까 직분입니까?
여러분의 신앙 패턴은 한결같습니까? 늘 오르락내리락 합니까?
2.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33절
살리기로 작정하고 엘리사는 방문을 닫는다. 수넴여인도 아이를 침상에 두고 문을 닫았었다. 방 밖에있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엘리사도 자기와 하나님과의 문제인 것이다. 자기가 아이를 어떻게 하는지 알리지 않는다. 우리들의 행동이 다 남들 보는데서만 하면 안된다. 안보는데서 살려야한다. 문닫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여호와께 기도한다. 전능의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고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기도는 독백이 아닌 대화라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이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언약의 약속을 알고 그 뜻을 알고 그다음 적용해서 순종하는 것이 순서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사건을 주시고 사람을 키워가시고 메세지도 키워가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한다. 어른과 동행할 때도 어른 말씀 먼저 듣고 내가 답하잖아요. 이게 큐티이다. 그래서 퀘스쳔 타임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듣고 내가 또 질문하는거에요.
우리가 무조건 네네가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또 내게 의문이 나서 ’그래요 하나님?‘ 하는게 기도이다. 엘리야나 엘리사나 평소에 늘 하나님과 대화하며 기도했겠죠. 하나님의 사람은 곧 기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열왕기상하에서 문자적으로 엘리야가 기도했다는 표현이 없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은 있었지만 기도 라는 단어가 쓰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딱 두번 나온게 그 첫번째가 33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르짖었다, 간구했다고 해도 되는데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했다는 뜻의 헬라어 팔랄은 공동체 영적 지도자가 간구를 넘어 공동체와 그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쓴다. 아브라함 모세 한나 사무엘 다윗 솔로몬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에스라 느헤미야 다니엘 요나.. 이런 사람들이 이 단어를 썼다. 팔랄은 성경에서 총 84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 간곡히 호소하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을 판단하다, 통회하다.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두가지 뜻이 있다. 호소의 의미가 강하든 통회의 의미가 강하든 간곡한 기도에는 늘 통회가 따라오는 것을 경험하지않는가. 너무 간절하면 내 죄부터 보인다. 그래서 눈물이 나온다. 그만큼 수넴여인의 간절함이 전달되어지고 수넴여인에게 선물로 준 아이가 죽었으니까 엘리사 또한 문 닫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통회자복한다. 엘리사도 회개하는 것이다. 엘리사가 왜 통회자복했을까? 그동안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갈랐고, 말 한마디로 마른 골짜기를 물로 채우고, 과부 집의 빚을 갚고도 남는 기름 한그릇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게하시 편에 보낸 지팡이는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했다. 지금까지 선지자로써 되는 일만 있었는데 가장 사랑하는 수넴여인의 아들이 죽었다. 뜻대로 안된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엘리사는 지금까지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다. 자기 지팡이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말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그런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기도하게 된다. 자녀들을 놓고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땅끝까지 낮아지고 회개가 저절로 나오고 간곡히 중보기도를 하게된다.
저도 잠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야겠는데 문닫고 통회자복을 했다. 제가 너무 회개해야할 것이 많더라. 여전히 교만하고 인정받길 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너무 통회자복이 되니까 골방기도를 하게되고 잠자고 있는 남편이 화를 내도 회개가 되고 때려도 회개가 되고..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잖아요? 큐티를 하는데 에스겔 3:24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하신다. 성령이 임하니까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잘 묶여있으라고. 골방기도하니까 아프리카 선교도 아니고 남의 집도 아니고 내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혼은 무슨 이혼이야, 집에 들어가서 문 닫고 잘 묶여있어. 너를 가둔 사람의 책망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실때만 말해. 한마디로 큐티하며 이 결혼에 잘 묶여있으라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나와 은밀하고 깊게 만나길 원하셨기 때문에 문 닫고 나가지 못하는 세월을 오래 주셨다. 얼마나 교만하면 13년동안 문밖출입을 못하게 하셨다. 다시 생각해도 여러분들이 척 보기엔 ’무슨 그정도 고난가지고 쓰실 수 있나‘ 하실는 분들이 많더라. 저도 그렇다. 그래서 송구스럽기가 그지 없어서 늘 나서기를 싫어했다고 했다. 그런데 절 이렇게 쓰셨다. 뒤집어 생각하면 저만한 사람도 없어서 나같은 사람을 쓰시는거잖아요. 요만큼만 쓰임받길 바란다.
적용
여러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통회자복이 나오나요?
“다 끝났어!”, “이제 이혼이야”, “사표야”, “죽어야 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말씀대로 기도하고 적용하는게 왜 중요한지 이해가 되시는가?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내가 문밖 출입을 못하고 묶여있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러니까 이렇게 쓰신다.
요즘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전능의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질문 훈련 잘 하며 큐티 잘하고 있습니까?
3. 고정관념을 뒤엎고 엎드려야 합니다.
34-35절
이런걸 보이면 안된다. 내가 어떻게 아이를 살리는지 문 열어놓고 보이는게 능사가 아니다. 엎드리다 라는 동사가 세번이 나온다. 첫번째 엎드리다는 원어로 눕다, 두세번째는 원어로 구브리다. 눕다는 부정한 시체를 살리기 위해 끌어안는 행동을 보여주고 구브리다는 그렇게 시체를 끌어안는 행동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알려준다. 구브리다 를 뜻하는 이그하르는 성경에서 총 세번 나오는데 여기 두번이고 한번은 열왕기상 18:42.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에서의 이 꿇어 엎드려가 이그하르이다. 몇년간 가뭄이 극에 달했을때 엘리사가 바알선지자들을 제압하여 아합에게 큰 비가 내릴 것이다 말했었다. 바알 선지자 850명을 죽이고도 결국 아합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에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정죄감.. 감정을 다 꺾고 하나님 손에 맡기며 아합을 위해 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꿇어 엎드리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접고 꺾고 내려놓는 것이다. 엘리사가 아이의 시신 위에 엎드린 것도 이처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고정관념과 판단과 감정을 꺾고 구체적으로 수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세상의 부정함에서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다. 그런데 어제 큐티인 본문처럼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다. 19:11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동안 부정하리라. 그러니까 자신을 부정함에 오염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만지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통회자복한 엘리사가 그다음 이어서 한 행동이 아이의 시신을 만진 것이었다. 그냥 손만 만진게 아니라 자기의 입을 아이의 입에, 눈을 눈에, 손을 손에 딱 갖다 붙였다. 어정쩡하게 부위만 댄게 아니라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다고 했다. 아이 위에 자기의 몸을 눕혔다는 뜻이다. 수넴여인이 죽은아이의 몸을 엘리사의 침상에 눕힌것처럼, 이제 엘리사가 시신 위에 자기 몸을 눕혔다. 둘은 믿음이 통한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이처럼 간절한 기도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가 따라야한다. 자기 처소에서 자기 침상에 누일 뿐 아니라 차가운 시체, 보기도 힘든 시체를 나의 온기로 덮어주라고 하신다. 그런데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시체에 몸을 펴서 엎드렸다고 한다. 엘리사에게 거리낌이 전혀 없었을까? 이래도 되나 라는 의문이 하나도 없었을까? 이렇게 시체를 안았으면 7일이 아니라 14일정도 부정한 채로 지내야하는 것은 아닐까 라며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을까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데 왜 없었겠습니까. 목장식구들이 다 좋아서 맨날 수고하는게 아니죠. 맨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속으로 매일 질문하죠? 문닫고 들어가서 혼자 질문하셔라. 그런 생각 다 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게 연습이 되고 훈련이 된다. 엘리사는 아이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았다. 거리낌과 의문과 귀찮음.. 모든걸 감수하고. 이런 적용을 보면서도 진정성 타령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면 안된다. 내가 인정하는 진정성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믿음이고 적용이다. 적용은 순종이고 순종은 하나님이 진정성 있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적용으로 사과했기때문에 진정성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 여러분, 인간의 사랑보다 하나님때문에 적용한 것이 훨씬 귀한 것이다. 이것이 구속사이다. 그런데 늘 과거의 상처를 들먹이면서 행위구원에서 못벗어난다. 지금 사과해도 진정성이 안느껴진다고 한다. 옛날에 바람피웠고 지금 사과하는데 진정성이 안느껴지면 그럼 어떻게하는가? 날마다 지금, 오늘 사과하는데 말이다. 옛날의 다른 여자에게 한 사랑은 다 인간의 사랑이다. 또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사과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이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고 적용은 하나님 순종이다. 이게 구속사이다. 그러니까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 같아서 이런 얘기는 싫어한다. 내 판단과 감정보다 더 중요한건 구원이다. 이 세상에서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한게 뭐가 있겠는가. 적용으로라도 사과하는게 어딘가.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지 않고 다 구원하시길 원하신다. 그러니까 한사람 살리기 위해 못할 일이 없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생명을 꺾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셨다. 이런 마음으로 엘리사가 엎드렸을 때 그 몸에 온기가 아이의 차가운 몸으로 전해진다. 아무리 진정성이 있다고 해도 받을 그릇이 안되면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진정성 있게 해도 본인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직 시간이 안된거고 기다려야한다. 엘리사도 몇번이나 엎드린다.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응답이 서서히 왔다. 내가 금세 사과를 딱 했는데 금세 받아들이면 여러분이 훈련이 안되기때문에 기다려야한다. 상대방의 진정성 없다는 말을 또 들어내야한다. 여러분은 진정성 없다는 말을 계속 들어도 싸다. 여러분은 진짜 진정성이 없다. 너무 빈틈이 없으신 분은 지난 주 수넴여인의 연기가 어떻게 연기를 하라고 하시지?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저의 진정성이 안느껴졌다. 목자님이 너무 빈틈이 없으셔서 그렇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엎드리는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한다. 내 고정관념을 꺾고 사랑해야한다. 날 힘들게하는 원수같은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구원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를 향한 내 판단과 감정을 꺾는 것이다. 너무 미운 그를 향한 수고가 아니라 나를 살리신 주님을 향한 수고이자 사랑이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고 생색도 내지 않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도 드디어 사명을 받아 저도 생명을 꺾을테니 우리 남편 구원받게 해주세요 했다. 사명은 여기까지 가야한다.
35-37절
엘리사가 엎드리는 사랑으로 아이 위에 엎드리니까 지팡이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죽었던 아이가 부활했다. 엘리사는 살아난 아이를 수넴여인을 불러 돌려준다. 그러자 여인은 다시한번 엘리사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
여인도 엘리사도 쉬운게 없다. 4:8 엘리사가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때가 거룩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7절의 아들이 태어난 날은 기쁜날이고 오늘 35절의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난 날은 더 기쁜날 아니었겠는가? 우리가 인생의 목적이 거룩이 되면 기쁨과 행복은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날이 오기까지 거룩에서 더 기쁜 날을 맞이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삶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데 택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인생이기 때문에 이런 사건을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수준을 높이시려고. 생각지 못한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고난이 더 기쁜 날이 될 날을 신뢰하십시다. 여인이 도움을 청해도 재채기를 일곱번 할때까지, 엘리사가 시체 위에 엎드려 있으려니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눈을 뜨게할 수 없다. 죽기 전 아들의 생명이 수넴여인의 전부였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내 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것인데 이 죽었던 아들을 부활의 기적으로 다시 받으니 이제는 내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제 이 여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전부 다 내 아들로 키우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는 사람이 드물다.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라고 사건이 온다.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깨라고, 여러분도 잠에서 깨라고, 내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다 자녀중독에서 못벗어나잖아요. 최고의 중독은 자녀 집착과 중독이다. 수넴여인은 그 아들을 여전히 엎드려 아들을 안고 나간다. 이 짧은 본문에 엎드려가 네번이나 나온다. 눈을 뜨는데는 이 엎드림의 겸손과 사랑이 필요하다. 엘리사도 수넴여인도 서로 엎드려야지 기적이 일어난다. 엘리사도 수넴여인도 자신들에게는 공로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있다. 평안입니다 는 엎드림의 사랑과 겸손이 절대 필요하다. 지금 엎드리는 수고를 하고있어서 힘드세요? 이렇게 수고하는데 아무 열매 없는 것 같아 낙심이 되는가? 더이상 할 수 있는 힘이 없어 죽고만 싶으신가? 엎드리고 엎드리는데 지쳐서 훨훨 날아 떠나고싶은가? 하지만 엎드리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엎드리는 사랑은 반드시 부활로 결실할 줄 믿는다. 하나님이 살려주신다. 가정마다 부활하는 역사가 이어질줄 믿는다. 주님 편에 선 그 한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주님을 따라 엎드리는 사랑으로 섬기며 부활을 소망하고 인내할 때 우리 주님이 반드시 부활의 열매를 주실 줄 믿는다.
적용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구원 때문에 입과 눈과 손을 맞추는 수고로 엎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섬깁니까, 결과를 얻기 위해 섬깁니까?
이 수고가 헛되지 않고 부활로 결실할 줄 믿습니까? 여러분 눈을 뜨게 하시려고 여러분이 말로 태도로 마음으로 엎드렸기에 다들 눈을 뜨신 줄 믿습니까?
미국 뉴욕 주립대 의대 학장인 마이클 로이진 교수는 당신은 몇살입니까? 달력 나이보다 젊어지는 78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얼마나 젊어졌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예를들어 매일 비타민을 먹으면 1.2년 젊어지고 아침밥을 거르지 않으면 1.1년이 젊어지고 필요한 약을 의사의 처방대로 정확히 복용하면 0.9년, 반면에 처방전과 다르게 복용하면 1.6년 더 늙는다. 많이 웃으면 1.8년 젊어지고 평생 배우는 자세로 살면 2.5년 젊어지고 사고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게임을 배우면 1.3년, 손과 식품을 자주 씻으면 0.4년 젊어지고 하루 5회 과일을 먹으면 1.4년 젊어지고 맛있는 야채를 하루 5회 먹으면 2-5년, 튀기지 않은 생선을 주3회 먹으면 최고 3년, 담배를 하루 한갑 피우면 8년 늙는다. 일정한 시간에 숙면을 취하면 3년 젊어지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며 일주일에 3,200칼로리 이상 소비하면 3.4년이 젊어진다. 체력 강화 운동은 1.3년 젊어지고 대기오염 노출되면 2.8년이 늙는다.
스트레스 받은 친구를 방문해서 위로하면 8년 젊어진다. 반면에 그런 친구를 피해다니면 8년이 늙는다. 그런 친구를 위해서 날마다 전화통화하면 8년이 젊어진다. 감사하면서 긍정적인 태도로 살면 6년 젊어진다. 가장 기가막힌 것은 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해소할 방법이 없으면 본래 나이보다 30년이나 늙는다고 한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학교 직장 대인관계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면 어떤 운동도 음식도 무익하다고 한다.
제가 여러분에게 30년, 36년, 44년 젊어지는 비결을 알려드렸다. 고통의 정도를 지수로 따지면 사별의 아픔은 200%, 이혼의 상처는 70%라고 한다. 이런 해결할 길 없는 고난 가운데서 영적으로 깨달아 살아나니까 세상이 감당 못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시니까 늘 목장에성 스트레스 받은 지체를 위로한다. 남편이 하루아침에 죽었는데 이게 해결이 안되면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겠는가. 정말 죽지 싶다. 성격도 약간 우울질이 되어가지고.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30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지금도 힘든 지체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도우면 서살아가니까 앞으로 몇십년을 더 살지 저도 모르겠다. 여러분 다들 장수하게 생겼다. 제가 인간적인 힘으로 목회한다면 스트레스로 이미 옛날에 쓰러졌을 것이다. 날마다 힘든 한분한분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며 위로하면서 제 피부가 날로 뽀얘진다는거 아닌가.
우리가 그 스트레스받은 목장얘기를 왜 들어 하는게 여러분 주제가이다. 우리들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왜 다 이쁘고 건강하고 치매도 안걸리는지 아셨죠. 옛날에는 이게 과연 우리들교회에 해당될까 반신반의하면서 설교했는데 20년이 지나니 맞았다. 아무리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여러분들 잘 살고 있다.
그당시 한 학생이 큐티나눔을 올렸다. 갑자기 찾아와 이유도 모르고 친구에게 맞았는데 그자리에서 맞받아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는 다짐이 물거품되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팔 가룟유다의 발도 씻어주시지 않았는가 라는 마음으로 그저 맞았다. 그리고나서 학생부에 불려갔는데 선생님 앞에서 때린 친구가 말하기를 그동안 제 말투가 기분 나빴다고 한다. 그것이 쌓였다가 폭발했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맞고만 있기를 잘했구나 내 말투를 고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사건을 주셨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바로 사과했다. 사과도 적용으로 하는것이다. 그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회개를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사건을 통해 조금이나마 혈기를 참게되어 감사하고 잘못된 말투를 바로잡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여호수아 설교할 때 이런 나눔이 올라왔다. 공동체 안에서 목자부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중보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니까 다들 엎드려서 눈을 뜬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고 예수님의 신성이 임해서 우리를 깨달음의 영으로 인도하시니까 이런 놀라운 일을 세상 학자가 연구해서 발표해주셨다 이거에요. 목장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목장에 나와 젊어지셔야 하는지 아셨죠? 인간의 상담도 맨날 남의 얘기를 들어주면 내 노력으로 들으니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눈을 떠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