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가톨릭
선교역사
1626년 스페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대만의 북부지역(치롱, 탄수이 등지)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나, 1642년 북부일대가 네덜란드에 점령되고부터 스페인 선교사들은 발붙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59년 5월 18일 페르난도 사인스 신부를 비롯한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필리핀에서 중국의 샤먼을 거쳐 가오슝에 도착한 뒤부터 정식으로 대만에 천주교 선교가 시작되어 역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대만은 원래 대륙의 복건성 교구에 속하였는데(1883년), 교황청이 이를 푸저우와 샤먼 두 교구로 양분할 때 샤먼 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대만은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고, 1913년 7월 19일 겨우 독립된 감목대리구로 승격되었다. 당시 감목은 스페인 선교사 클레멘테 페르난데스 신부와 토마스 데 라 오스 신부(1913-1941년)가 맡았다.
이후 일본인 사토와키 아시지로(里協淺次郞 : 1941-1946년) 신부가 감목으로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항복하자 모든 교무는 대만 본토의 투민쩡 신부에게 위임되었고, 그가 곧 대표가 되었다. 1949년 중화민국 정부(당시 국민당)가 대만으로 옮겨올 때 중국 대륙으로부터 많은 교우들과 성직자들이 오게 되었고, 1952년부터는 로마 교황청에 속하는 전교지역이 되었다. 지난 2009년 10월에는 천주교 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경축의식이 있었다.
교세
현재 대만은 7개 교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교황청 직할의 서리구역도 하나 있다. 주교는 18명, 신부 700여 명, 수녀 1,200명 정도로, 모두 800개 본당과 기타 교회기구에 분포되어 일하고 있다. 신자 수는 30만을 조금 넘는 정도로, 총인구의 100분의 1 정도가 천주교 신자인 셈이다. 몇십 년이 지나도 성장의 변화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천주교 단체나 기구가 대만 사회의 각 부분에서 우수하고 현저한 실적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특히 교육, 의료, 문화와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수도회 수가 많지는 않지만 수사들도 100여 명 있는데, 성직자 수도자 할 것 없이 외국인 선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만인은 가뭄에 콩 나듯 할 정도이다. 우리 한국 성직자 수도자도 20명 정도 있다.
대신학교는 두 군데인데, 타이베이는 극소수의 신학생들이 큰 신학교를 지키고 있고, 가오슝은 외국인 신학생들만 있다. 타이난의 대신학교는 성소 감소로 이미 20년 전에 문을 닫았고, 건물은 교구 활동용으로 쓰고 있다. 소신학교는 화련 교구에 하나만 남아있다.
대만교회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딱 하나 있다. 선교용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립할 능력이 없어 다른 방송국을 빌려 특정한 시간에만 방송을 한다. 특히 천주교 학교를 통한 선교는 참담할 정도로 선교실적이 없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일반학교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깊이 잠자는 교회로 보인다.
중화 성인 성녀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여 성인 성녀가 117위 있다. 중국 대륙 교회가 힘써 이룬 것이 아니고, 대만교회가 한국과 베트남교회 등을 참고하여 시복시성을 계속 추진하고 기도한 결과이다. 성인 성녀들이 중국 대륙에서 순교했으나 세계 모든 중국인들의 교회에서 공경받고 있어 중국 성인이라 하지 않고 ‘중화 성인’으로 통용되고 있다.
2000년 10월 1일 시성식을 하였으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 정부)의 불만과 항의가 있었으니, 중국 정부의 내정을 간섭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현재 상황
한 분뿐이셨던 싼 바오로 추기경이 지난해 선종하시고, 대주교 세 분을 비롯해 18명의 주교님이 계시는데 거의 다 대만 본토 분들이시다. 그 전에는 전부 중국 대륙에서 오신 분들이었는데, 대만어도 배우지 않고 고향인 대륙의 교회에 미련을 두어서 그런지 선교에 진전이 없었다. 본당이나 교회기관이 문을 닫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으니, 선교 상황은 위기에 가깝다.
대만교회의 위안과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주민들(16개 부족)이 전 신자 수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나 젊은 세대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학교 공부와 사회 진출에 바빠 교회에 투신하는 젊은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성소문제만 하더라도 몇 년 만에 1개 교구에서 1-2명의 사제가 배출될 정도이다. 어떤 교구에서는 10년을 두고 한 명의 사제도 나오지 않는다. 동부 산악지역,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는 한 사제가 10개 본당이나 공소를 담당해야 하니, 사목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어렵다. 그러니 어떻게 교리다운 교리를 배우거나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물론 수녀님들이 있는 곳도 있지만 몇 개 본당과 공소를 모아 거리와 교통이 불편한 가운데 전전긍긍 배우고 생활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내가 속한 본당도, 한 신자를 얻으려고 예비신자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신부나 수녀가 교리를 가르치는 형편이다. 뜻있는 인사들의 기금으로 대신학교에서 3년 과정으로 평신도 교리교사를 양성하고는 있으나 만족할 수준이 못 된다.
사제들도 자취생활을 하듯이 살고 있으니, 한국에 계시는 신부님들은 따뜻한 가정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 보통 본당들에서 신부님 영명축일도 모른 채 지나가기 일쑤다. 사제들이 존경받는 분위기는 성소의 증가와 많은 관계가 있는데,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신부가 되려고 하겠는가?
한국교회처럼 갖가지 신심운동단체들이 있지만, 그 규모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레지오 마리애만 하더라도 한 본당에 보통 1지단, 많아야 2-3지단이 있다. 단원들의 활동도 판박이처럼 형식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노장들이 대부분이다. 사제들이 너무 바빠 알뜰히 참석해서 각 단체들을 다독거리기가 힘들다. 사실 그럴 여력들이 없다. 하루에 세 끼 식사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특색
어디나 원주민이 많이 있기에 전례나 모든 면에서 그 지역에 맞는 언어나 지역적 특성을 살려 토착화하는 광경을 늘 보게 된다. 봉헌물을 바칠 때에도 거창하고 흥겹게 춤추며 음악에 맞춰 드린다.
조상위패를 모시고 있는 성당도 상당수이다. 청명절과 위령성월에는 매일 기도를 드린다. 성당 한 곳에 납골당을 모시는 등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효도정신이 눈에 많이 띈다.
종교 간 대화에서 특히 불교와 천주교의 호의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는 본받을 만하다. 서로 기탄없이 돕고 우의를 다지는데, 불교가 발행하는 신문에도 꼭 종교 면을 신설하고 각 종교의 동향과 활동을 소개하여 종교 간의 이해와 협력을 도모한다.
교회일치운동도 그러하다. 선교활동은 물론, 예수님의 큰 축일이나 성탄축제 등을 몇 개월 동안 협력과 교육을 통해 스스럼없이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 한 자녀인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풍습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살아가는 오늘의 교회 모습을 바람직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 박규우 토마스 아퀴나스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사제품을 받고, 타이베이교구 루저우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박규우 토마스 아퀴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