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나무
코로나19로 생활의 폭이 좁아졌다. 사회적인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되었다. 공원에 산책 온 모두가 얼굴에 마스크를 써 가까이 가지 않으면 누구인지 모른다. 그냥 옆을 지나치면 다정하던 이웃도 알 듯 말 듯싶다. 거리엔 사람이 줄고 대로를 지나는 시내버스엔 승객이 한두 명 타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쟁이 따로 없단다. 사람에게 인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서로를 경계하고 피한다면 적과 대치해 치열한 싸움을 하는 전쟁터보다 더한 세상이 아닐까.
매스컴이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코로나19의 감염 예방에 효과가 제일이라 연일 홍보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도 매일 방송이다. 직장에서 퇴직해 생활 반경이 좁은데 더구나 갈 곳이 없다. 하루 생활이 단조롭다. 오전에는 아내와 함께 두류공원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집안에서 지낸다.
아내와 다니는 공원 산책 코스는 둘이다. 하나는 금봉산을 중심으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포장해 놓은 둘레길이다. 길이 편안하고 넓고 안전해 이곳을 오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한다. 다른 하나는 금봉산 중턱으로 난 둘레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산길이라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나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는 다니기 불편하다. 좋은 점은 울창한 수목이 길 따라 이어져 있고, 새 소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남쪽 기슭에는 소나무가 많아 운치를 더한다. 아내와 나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요즈음 ‘내 소나무’ 찾기에 힘을 쏟고 있다. 거창한 일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소나무는 자란 모습이 나무마다 다르다. 나무의 모습에 따라 삶이 참 평탄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삶이 참 고달팠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전자는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볕이 잘 드는 곳에 보기에도 편안히 서 있고, 후자는 돌 틈 사이에 억지로 뿌리를 붙이고 불편하게 서 있다. 소나무는 오랜 세월 목재로 다양하고도 폭넓게 이용된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나무다.
두류공원 금봉산 남쪽 기슭에는 적송이 많다. 적송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다. 아침 햇빛을 받아 줄기의 윗부분이 붉은 기운을 띤다. 큰 산의 중턱에 자리 잡아 잘 자란 적송은 아니라도 내 나이보다 연륜이 더 많겠다. 줄기가 밑동에서 수관(樹冠)까지 미끈하게 뻗어 보기 좋은 것도 있고, 줄기 곳곳에 많은 옹이를 달고 구불구불 몸이 비틀어진 것도 있다. 제각각 자란 소나무에 삶을 대입해 본다. 내 인생과 닮은 나무를 찾는 재미가 산책의 의미를 더한다.
어느 날 내 삶과 닮았다 싶은 나무를 보고 ‘내 소나무’라고 하니 아내는 씩 웃으며 아니란다. 이유가 참 많다. 훤칠한 키에 가지를 멋스럽게 일렁이며 점잖아 보이는 소나무는 나의 삶의 과정과 맞지 않는다나. 수피(樹皮)가 거칠고 줄기에 옹이를 많이 달고 힘겹게 사는 듯이 보이는 나무도 아니란다. 삶이 매몰차지 못해 집안일을 할 때마다 결정력이 부족하고, 매사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두려워 우물우물해 자기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가진 재주나 능력이 뛰어나 남보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매번 꼴찌를 하지도 않는다나. 보통으로 인생을 평범하게 산 모습에 어울러야 한단다. 많은 소나무 중 그런 나무 찾기도 만만하지 않다.
한 시간 정도의 산책 시간이 매번 짧게 느껴진다.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 소나무 저 소나무를 쳐다보며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손으로 줄기를 쓰다듬으며 나무가 주는 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무 둥치를 안고 귀를 대어 껍질 속의 물관과 체관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어 본다. 어떤 때는 나무 바로 아래에 서서 고개를 양껏 젖히고 쳐다보기도 하고 조금 떨어져서 아래위를 살피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무는 나에게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같은 행동에서도 그날 그때의 기분에 따라 전해오는 느낌이 다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가 여러 소나무 종류 중 적송에서 ‘내 소나무’를 찾아보란다. 이곳 두류공원 금봉산 소나무는 대부분 육송과 적송이다. 나무껍질이 길게 터지고 검은빛을 나타내며 빨리 자란 것이 육송이다. 껍질에 거북 등 같은 무늬가 있고 햇빛을 받으면 붉게 보이는 것은 적송이다. 여기는 육송보다 적송이 많다. 적송은 이삼백 년 자라야 훌륭한 재목이 된다. 그것도 산꼭대기나 기슭에 있는 것은 질이 낮고 큰 산의 중턱에 있는 것이 품질이 좋다고 한다.
금봉산은 해발 139m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다. 여기 있는 적송이 고급 목재가 될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도시민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공간에 사철 푸른 모습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영양 부족으로 잘 자라지 못해 굽고 뒤틀린 모습으로 군락을 이루며 솔숲이 된다. 삶이 모두 옆 소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장엄하고 생생하며 소박하다. 그중에는 주위의 나무와 생존경쟁 하면서 제법 하늘 높이 뻗어 자란 것도 있다. 나무도 사람처럼 스스로 험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제자리에 섰을
때 자기 몫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적송이 내뿜은 공기를 사랑한다. 푸른 솔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신선하고 순수하다.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씻는다. 행복이란 편안함도 느낀다. 소나무는 내가 아끼다 병들 육체와 정신이 뿜어내는 탐욕의 냄새를 정확하게 맡고 정화해 준다. 숨 쉬지 않은 듯이 조용히 살면서 위대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소나무에 침묵하며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한자리에 붙박여 있어도 우주의 변화를 감지하고, 처신을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아는 소나무. 솔숲을 지날 때마다 많은 대화를 나눈다. 소나무는 크기나 수형이 다양하다. 자란 햇수나 어느 곳에 터 잡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사람의 얼굴에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행하고 말하는 것이 드러난단다. 산책 때마다 소나무에서 나 자신과 마주친다. 그들이 점점 나의 스승이 되어 간다. 코로나19가 준 생활의 변화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