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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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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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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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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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奮忠서難錄)>1권 등이 있다.
☞ 일화
사명당은 속성이 임이었고
전처 소생의 아들과 후처 소생의 아들이 있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가간 첫날밤에 어느 자객에 의해 목이 잘려지자,
신부는 누명을 벗고자 남복을 하고 집을 떠나서 범인 색출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범인이 바로 시집의 계보의 사주를 받은
하인임을 밝혀내고 이를 시아버지에게 알린다.
시아버지(사명당)는 벽장에 숨겨둔
항아리 속에서 아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후처와 그의 아들을 모두 묶어
집과 함께 불태워버린 뒤 재산을 노복에게 흩어주고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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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왕이 왜국의 시(詩)를 병풍에 적어 지나는 길에 진열해 놓고
자국의 문물이 번성함을 자랑하자
이를 모두 암송해서 모작이라 했다는 것이다.
왜왕은 사명당을 큰 무쇠 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무쇠 막을 달구어 데어 죽게 하였으나,
사명당은 '빙(氷)'자를 천장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왜왕이 방문을 열었을 때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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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왕은 무쇠 말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이것을 타보라고 사명당에게 요구하자,
사명당이 비를 오게 해서 무쇠 말을 식히고
비가 계속 쏟아져 왜국을 물에 잠기게 해서
'왜왕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 삼백 장과 부랄 서말 씩을 조공하도록 했다.
사명당대장진영(四溟堂大將 眞影 : 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