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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38-42 / 또 모세의 율법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고 하였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너그럽다 / 잠언 19:6 상반절에는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라고 하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아량이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은혜를 구하려 몰려온다. 너그러운 사람이 사람을 얻는 법이다. ‘너그러운 사람’이란 히브리어 ‘나디브’인데 ‘관대한’, ‘고관’, ‘귀인’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량이 있고 권세를 가진 자에게 많은 사람이 은혜를 구한다는 말이다. 너그럽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다. 지위가 낮은 자에게 은혜를 구할 리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 너그럽고 권세와 지위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음이 좁은 부자에게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모인다. 사람들이 모이고 따르는 이유 가운데 돈보다 우선 되는 것은 사람의 너그러움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받아 줄 아량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우시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는 뜻이다. 너그러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너그럽기 때문에 변수가 생긴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관대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특히 인간관계에서, 너그러움은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이고, 그 배려는 희생, 희생은 곧 손해라는 인식을 가질지도 모른다.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는 것,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 상대에게 똑같이 대갚음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행동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오히려 이득이다. 상대가 뽀족하게 다가와도 둥글게 받아주면 찔릴 곳이 없다. 그러면 상대의 뽀족함이 점점 뭉특함으로 변해간다.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뭉툭해지다가 둥글게 변해간다. 결국 주변에 둥근 사람들이 많아진다. 둥근 사람들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둥근 사람들끼리 있으면 행복한 일이 가득하다. 재미와 즐거움, 기대감, 열정 등 온갖 긍정적인 감정들이 뇌를 사로잡는다. 그러기에 상대의 뽀족함에 똑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사람마다 또 상황마다 뽀족함이 뭉특함으로 변하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너그러운 마음은 가져보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득을 챙길 기회이다.
■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의 글 / 그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다.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다. 그래서 그는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어느 정도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웃 논 임자가 논둑을 터놓아서 말도 없이 그쪽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까닭이었다. 그는 몹시도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른 척하고 참았다. 그는 또 다시금 양수기를 동원해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 임자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항의를 했다. 물론 이웃 논 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웃 논 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워치만 니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었다. 자기가 분명히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이웃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함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꼭 정당한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러한 음성을 듣고서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양수기를 준비해서 먼저 이웃 논으로 갔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에 충분히 채워 주었다. 그 뒤에 그는 양수기를 자기 논으로 옮겨서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 임자는 마음에 큰 감동하게 되었다. 그때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 논 임자와 그의 온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악한 자를 악으로 대적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을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따라서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를 미워했거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누가 알겠는가? /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어지고, 이가 부러지고, 갈빗대가 부러지며,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이를 갈며 분해하지도 않고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무릎을 꿇고 도리어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여유있는 마음으로 저들을 대했다.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옆에 서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변화를 받기 시작해서 나중에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 이러한 행위가 자기 자신도 위대한 순교자로 하나님 앞에 큰 상을 받을 뿐 아니라 핍박하였던 사울(Saul)을 대사도 바울(Paul)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수록 더 위대한 성도가 되게 하고 더 큰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에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❶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 ❷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❸ 예수님의 가르치심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한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나 또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금도 나와 우리를 선대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라도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자. 그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았으면 한다.
1.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
38절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잘 알려진 말로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이 법을 라틴어로는 전통적으로 lex talionis, 곧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번역이 되지만, 이것을 보상법이라는 말로 번역해 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만큼 보상해 주어야 하고, 내가 피해를 받은 만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해 보았다.
그러면 보상법,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敎父)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오히려 잔인할 뻔하셨다.”
보상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계명의 배후에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보상법의 근본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보상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보상법의 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보상법이 세 곳에 있다.
출 21:22-25 /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밀쳐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곳은 다친데가 없다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배상액은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결정한다. 23) 하지만 다른 사고가 생겼을 경우,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가지로 깨달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누구에게 주셨는가?
22절 끝부분에 보면, ‘재판장의 판결을 쫓아낼 것이니라’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보상법은 우리 개개인이 이 원리를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은 결코 아니다.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이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원리로 주신 것이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다. 왜 그럴까?
창세기 4:23-24에서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뽐내면서 했던 말이다.
창 4:23-24 / 라멕이 그의 두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아내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어보게나.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에 귀기울여 보게나, 누구도 나와 겨루지 못하리라. 아무도 나 라멕과 싸워 이기지 못하리라. 내게 상처 입혔다고 나는 사람을 죽였다네. 나를 쳤다고 젊은 것 죽여 버렸다네. 24) 가인을 죽이면 그 대신 일곱 사람을 죽여 앙갚음한다지만 나 라멕을 죽인다면 일흔일곱 사람을 죽여 앙갚음하리라.’
라멕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 배로 갚아주겠다는 뜻이다. 인간의 복수심이 바로 그렇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마디 욕을 먹었다고 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릴까? 두 마디, 세 마디 해야 갚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이다. 만일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허용치 않으셨다.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2. 재판장은 판결을 내릴 때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할까?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 이상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된다.
예컨대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자.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되겠는가?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재판장이 ‘이는 눈으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했다. 그러면 재판장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려야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재판장이 ‘눈은 이로 갚으라’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는가?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주신 것이다.
3. 이 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즉시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내 이도 저렇게 부러지겠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이로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원리이다.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셨고, 재판장은 반드시 이 원리에 따라 판결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웃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상법, 곧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했다. 아울러 그들은 그 당시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
38절 /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이 말씀의 끝부분에서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긍정적인 차원이 아닌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이렇게 들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무엇일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을 있는 그대로 압축을 해놓은 것이다. 말씀 자체는 전연 잘못이 없다. 그러나 3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다.
39절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나? 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다. 아울러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우선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을 잘못 적용했다. 본시 보상법은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이다. 개인은 사사로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다. 반드시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사사로이 대적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얼마나 원통하게 생각했을까?
그런데 로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헤롯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헤롯은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인 헤롯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개했을까?
급기야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인에게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 바로 열심당이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군인들에 대해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다. 로마 군인들이 당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로마 군인들은 즉시 보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조장되었다. 사회는 점차로 질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보상법이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것을 망각하고,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라고 가르침으로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복수심을 조장시켰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다. 원수를 갚으라고 하신 말씀도 없다. 오히려 신명기 32:35에 ‘보수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에게 선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다.
레 19:18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 25:21 /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악한 자를 대적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 대신 미움을 심어주었다. 용서 대신에 복수를 심어주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악해졌겠는가? 예수님은 그 세대를 가리켜서 여러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심
마 5:39-42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권세로서 보상법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셨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재판장에게 판결의 원리로 주신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개인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악한 자를 대적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원수라도 사랑해 주어야 한다.
곧이어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보상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네 가지 실례를 들어서 일깨워주셨다.
1. 39절 하 /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예컨대 제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뺨을 때렸다. 이때 오른편 뺨을 때리기가 쉽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왼편 뺨을 때리기가 쉽겠는가? 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다. 불편하다. 세게 칠 수도 없다. 왼편 뺨이 훨씬 쉽게 세게 때릴 수 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는 손등으로 남의 뺨을 치는 것은 인격을 이중적으로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오른 뺨을 때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격 모독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른편 뺨을 맞느냐 왼편 뺨을 맞느냐,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나 이유 없이 맞았다 하더라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다른 편을 때리도록 허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 40절 /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였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중에 잠을 잘 때 덮고 자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겉옷을 전당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다. 그만큼 겉옷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누가 재판을 해서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것이다. 빼앗기는 삶을 살지 말고, 주면서 살라는 것이다.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다.
3. 41절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그 당시에는 이러한 법이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킬 수 있었다. 오리에 해당하는 거리만큼은 임의로 동행케 하고 그 이상을 넘으면 대가를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온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계속 쓰러지셨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게 했다. 바로 그 법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라고 하셨다. 역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4. 42절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내가 가진 물질이라고 해서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누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누가 내게 속옷을 달라고 하면 그에게 겉옷까지 주고 나는 발가벗고 살라는 뜻일까? 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해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월급봉투째 다 주고, 나와 내 가족은 한 달 내내 굶고 살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돈이 필요해서 친구에게 가서 돈을 꾸려고 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라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쁘게 이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시는 것이다.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하고서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지겠는가? 사람들은 누가 자기의 오른편 뺨을 치면 돌려댈 생각을 하지 않고 왼편 뺨을 치려고 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고 했다. 누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해졌다. 그러니 그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수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가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라도 대적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 수가 있다.
■ 【 6·25 동란 때였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인민군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그리고는 그를 앞장세워 걷게 했다. 그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지고서 걸어갔다. 뒤에서는 인민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서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 사람과 십리까지라도 가 주어라.’ 정말 자신의 처지가 이와 같았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별반 순종해서 산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될는지도 모르니까 그에게 문득 ‘한 번 마지막으로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앞에 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오히려 짐도 가볍게 느껴지게 되었다. 한 오리쯤 갔을 때였다. 인민군은 그를 불러 세웠다. ‘동무! 수고했소. 이제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좀 더 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동무, 빨리 가시오! 사실은 내가 여기 와서 동무를 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는데 동무가 친절하게 하니까 그럴 수가 없구려. 그러니 어서 빨리 가시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날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악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선으로만이 악을 이길 수가 있다. 빼앗기면서 살지 말고 주면서 살자.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지 말고 기쁘게 친절을 베풀면서 살자. 인색하게 살지 말고 너그럽게 살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족하고 허물이 크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신다. 우리를 언제나 선대해 주신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이웃에게 늘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자.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마음에 담으면 좋은 실례 / ❶ ‘남의 잘못을 탓하지 말라! 남의 단점을 보지도 말라. 나의 단점을 변호하지 말라! 나의 단점을 고치기에 힘쓰라! 경남 양산에 있는 사찰인 통도사(通度寺) 경내의 오래된 기둥 곳곳에 붙어 있는 검은 나무판에 쓰인 경구 중 하나이다.
남을 책망하고 탓하기는 쉬우나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이 어렵고, 어렵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어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변명을 하기 쉬우니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깨우쳐서 고쳐가는 습관이 스스로를 성장하게 된다.
중국 춘추시대 초(楚) 장왕의 일화에서 기인한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말이 있다. 장왕이 나라의 큰 난을 평정한 후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신하들을 아끼던 장왕은 자신의 후궁들에게 이 연회의 시중을 들게 했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순간에 꺼졌다. 칠흑 같은 그믐이라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순간 한 여인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틈타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고, 자신이 그 자의 갓 끈을 뜯어두었으니, 장왕께서는 어서 불을 켜서 그 무엄한 자를 벌해 달라는 고변이었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무엄한 신하가 괘씸하고, 자신의 위엄이 희롱당한 것 같은 노여움에 빠져 들기가 쉬운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장왕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자리는 내가 아끼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니 이 자리의 모든 신하는 내 명을 들으라.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갓의 갓끈을 모두 자르라. 지금 일어난 일은 이 유흥의 자리에 후궁들을 들게 한 나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이니 나의 불찰이다. 또한 오늘의 실수는 그런 이유로 불문에 부치려 하니 그대는 그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라오.” 장왕은 먼저 후궁들을 달래서 연회장에서 내보낸 후 그곳에 함께한 모든 신하들이 갓끈을 자른 뒤에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으니 누가 그랬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자칫하면 연회가 깨지고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는 상황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에 해당하는 불경죄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는 중죄였지만, 장왕은 신하들을 치하하는 연회 자리를 훼손하지 않고 그렇게 보존했다. 그뿐 아니라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임을 인정했다. 장왕이 자존감(自尊感)과 자긍심(自矜心)의 균형이 튼튼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힌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분노하지 않으며,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더 이상 자의적인 확대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 초나라는 진나라와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쟁에서 초나라가 밀려서 장왕이 적장의 칼에 목이 잘릴 위기에 처했을 때 바람처럼 장왕 곁으로 달려와 온몸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서 장왕과 초나라를 구한 장수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를 불러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 쥐고 공로를 치하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 장왕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큰 절을 올렸다. “폐하! 소신이 몇 해 전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소신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제야 그날의 불경에 대해 사죄를 올립니다. 소신은 그날 이후 새롭게 얻은 목숨을 폐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오늘 이 전장에서 그 목숨을 폐하를 위해 바칠 각오로 싸웠습니다. 그날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커다란 성은에 오늘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어 소신은 다행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장왕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그 신하를 끌어안아 일으켜 다독였다. 결국 장왕이 그날 밤 연회에서 베풀었던 배려심이 장왕과 초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갓끈을 자르는 연회’라는 뜻이니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우친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❷ 선비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선비가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려다 봉변을 당했다. 부잣집 아들이 진주 한 알을 갖고 놀다가 잃어버리자 선비가 그만 도둑으로 몰리고 말았다. 사실 선비는 진주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마당에 있던 거위가 날름 삼켜버리는 걸 봤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꽁꽁 묶인 채 헛간에 갇혀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이튿날 아침, 선비를 관아로 끌고 가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때 선비가 거위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거위 똥을 잘 살펴보시오.’ 하인들이 거위 똥을 뒤적이자 잃어버린 진주가 나타났다. 부자는 깜짝 놀라며 선비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비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면 당신들은 당장 거위 배를 갈랐겠죠. 거위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하룻밤 고생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사사건건 화를 내거나 자기 몫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속 좁은 인물’이라고 한다. 반대로 이야기 속의 선비처럼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넓은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상 큰일을 이뤄낸 위인 중에는 이처럼 마음이 넓은 인물이 많다. 마음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받아들일 그릇이 크다는 뜻이다.
양보한다고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마음이 넓어 여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처럼 하룻밤의 고생은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속이 좁은 사람은 여유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선비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선 마음의 여유부터 가져보라.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잠시 생각할 시간부터 마련해야 한다.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올지, 그 감정을 참고 너그럽게 행동했을 때는 어떤 결과가 올지를 함께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다. 너그러운 행동을 할 때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얻을수록 여러분의 마음도 점점 넓어지지 않을까?
❸ 너그럽게 마음 쓰면 몸도 보답 받는다 / 하루를 보내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남을 용서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밝은 내일을 맞이하자. 이렇게 감사와 용서의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건강에도 좋다. 미국의 건강·의료 사이트 ‘헬스닷컴(Health.com)’이 너그러운 태도가 건강에 좋은 이유 3가지를 소개했다. ◆ 혈압을 낮춘다 / 남을 돕는 행동을 하면 심혈관 건강에도 좋다는 연구가 있다. ‘정신생리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돕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혈압이 낮고, 특히 동맥혈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그만큼 되돌려 받는 것도 많다. ◆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 = 찰스 디킨슨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크루지처럼 구두쇠로 생활하면 지갑은 두둑해지지만,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공공과학도서관저널(PLOS One)’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인색하게 행동하면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흥정 게임을 시키고 신체 변화를 측정한 결과, 동료에게 돈을 꿔주는 데 인색한 사람들은 심장 박동 수와 스트레스 수치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기분을 좋게 한다 = 돈을 주는 것은 받는 것만큼이나 좋다는 연구가 있다. ‘사이언스’지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100달러를 얻었을 때나 자발적으로 기부를 했을 때에나 기쁨과 관련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말에는 구세군 냄비나 아니면 다른 기부처에 소액이라도 도움을 주면 어떨까.
마 7:12 /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가르침이요, 예언서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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