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문(책문, 봉황성 터)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갈 때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민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요즘 TV 뉴스에 ‘북·중 무역 ’이나 김정은이 탄 열차의 배경으로 나오는 강변 도시 단둥은 당시 허허벌판이었다. 봉황산 쪽으로 120∼130리를 더 가야 중국 측 관문이 나왔다. 봉황산 자락에 마을을 꾸린 봉황성이었다. 이 성의 문이 봉황문인데 중국에서는 변문이라 불렀고, 조선에서는 책문(또는 고려문)이라고 불렀다. 봉황성 현지인들은 가자 문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니까 압록강부터 변문까지 50여 킬로가 무인 지대였다. 지금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에 비견된다. 이 원시림 속에 온갖 맹수가 도사렸고, 범보다 무서운 마적단이 들끓었기 때문에 아무리 사무역을 원하는 조선 상인이라도 일단 군대가 호위하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 했다. 압록강을 건넌 사람이라면 변문까지 여간해서 길을 잃을 수 없다. 수십 리 밖에서도 봉황산의 절벽들이 장관으로 마중 오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천혜의 군사 요새가 없다. 외부 쪽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의 위용을 뒤로하고는 안쪽으로 우마차도 달릴 수 있는 삼태기 같은 후방이 펼쳐지니, 국경선인 압록강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봉황성에 관문을 차린 이유를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변문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장소이다. 밀사들의 비밀 접선 장소이다. 1789년 조선 최초의 밀사인 윤유일 바오로가 상인으로 변장하고 변문에 나간 이래 수많은 교회의 밀사들이 이곳을 이용했다. 중국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수렴되고, 반대로 대륙을 향하려는 조선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외길이었다. 중국인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조차 1794년 12월 24일 변문에서 연락원을 만났고, 프랑스인인 모방 신부 역시 1836년 1월 12일 변문에서 조신철, 정 하상을 만난 후 조선에 들어왔다. 이 변문을 통해 중국에 들어가고 조선으로 입국한 밀사나 선교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변문의 ‘접선’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다. 암호의 표식으로 허리에 빨간 띠를 매고 오른손에 흰 수건을 든 사람이면 슬며시 다가가서 말을 거는 식으로 시작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게도 변문은 숙명의 문이었다. 1836 년 말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변문을 나갈 때는 세 신학생이 머지않아 사제품을 받고 함께 되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한 명은 바로 병사하고, 한 명은 사제가 되자마자 순교하고, 1949년 말 최양업 신부만이 이 변문을 통과하여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을 밟는다. 요동 차쿠에서 7개월간 압록강이 결빙되기를 기다려 동짓달 눈보라 치는 야음을 틈탔다. 물론, 그 중간에 성 김대건은 신학생 때도, 부제 때도 변문에서 김 프란치스코와 접선하여 조선에 잠입한 적이 있다.
변문에는 12월 말, 밤중에 가야 역사적 현장 속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살을 에는 듯한 국경의 칼바람이다. 영하 35도가 넘는 동토의 바람을 가만히 맞다 보면 최양업 부제의 고별사가 들리는 듯하다.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국경의 막막한 어둠에 대고 낮게 읊었다. “잘 가시게. 내 유일한 벗이시여. 이제는 이 외톨이를 내려다 보아주시게. 거기서 기다리시게. 친애하는 동료, 내 최고의 전우여. 우리나라의 천상 수호자시여 !” (『소설 차쿠의 아침 中 』)
@작성자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 중국 차쿠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