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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스크랩] 지리산 시인들 1 | 허영자 시인
문근영 2013. 12. 10. 10:38
고향집 외 6편
그 날은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강아지풀
송아지는 음메 음메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큰 소리로 울고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미소가 팔려가는 날.
그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어른들은 큰 소리로 웃고
아이들도 신나서 잠 안자고 지켰다
-새 송아지 태어나는 날.
고향 이야기
- 지리산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성지聖地상림上林
태초에 조물주는 산을 일으켜 세우시고 평평한 들판을 만드시고 그 위에 금을 그어 물길을 열으셨다.
산에 나무 심고 들판에 오곡 뿌리고 물속에 물고기를 노닐게 하여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창조하시었다.
지리산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서켠 위천 옆에는 조물주의 이 손길이 다하지 못한 창조의 마무리를 대신한 곳이 있으니 이름 하여 상림上林.
신라의 명철사 최고운崔孤雲을 도와 흰 옷 입고 머리에 흰 띠 두른 함양 사람들, 흙을 나르고 숲을 옮기고 물길을 돌려 만든 땅 상림은 그래서 벌레도 없고 쥐도 뱀도 없는 신령한 땅이 되어 지금도 함양 사람들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어른께서 세배 받으시듯이 큰 절 받고 있다.
고향 이야기
- 멧돼지
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함양의 햇빛
내 고향 함양에 내리는 햇빛은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다
솜씨 좋은 징깽맹이
쟁쟁 징소리로 내리고 있다
옷이 없어 헐벗은 날에도
밥이 없어 배고픈 날에도
맨살에 순금가루 바르고
징소리 신명으로 발을 굴렸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
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 마을
긴 이빨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
버섯 같은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순금가루.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함양 사람들은
영산靈山지리산을 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
서운瑞雲어린 준봉峻峰
그 푸른 기상을 품고 삽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
언제나 품을 열어 맞아주는 산
기쁠 때나 즐거울 때
맑은 이마를 들어 닥아 오는 산
피로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을
위천수 맑은 물로 씻어내고
반달곰과 애기 노루
산나리 고사목도
어울려 사는 그윽한 골짝
예나 지금이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언제 어디서나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영산 지리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일두一蠹 선생 고택古宅에서
그 뜨락에 서면
잔잔한 햇빛과 바람
선생의 고결한 정신인양
옛 숨결 그대로 고여있네
맑음이 죄가 되고
옳음이 시기猜忌를 불러오던
탁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마냥 꼿꼿하던 선비의 기상
소슬한 한 채 고택에 깃들어 있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신 만세의 귀감
문득 옷깃을 여미게 하네
모진 귀양살이도
귀한 목숨까지도
대의를 위하여는 서슴없이 내맡긴
선생의 생애 그 향기 그대로 스며있네.
■ 기획대담/ 허영자 시인
심연의 꽃,
저 아득한 곳에서 길어 올리는 실타래
- 허영자시인을찾아서
■대담_박해림(시인·본지 편집실장)
2월 중순,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강추위는 여전했다. 일기예보에 귀를 세웠 지만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도 용케 성을 가라앉힌 날이 있어 허영자 시인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시인의 건강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으신 것 같아 송구한 마음마저 들었다. 만남은 시인이 사는 인근 혜화동 로터리의 조용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강추위로 꽁꽁 묶였던 발걸음은 머지않아 도래할 봄을 위한 것이려니 생각하자는 시인의 말씀에 힘입어 어렵게 잡은 인터뷰 내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드렸다. 이번 인터뷰는 그간 타 잡지에서 항용 진행되어온 인터뷰와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차별된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정점 지리산을 중심으로 태어난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 특징이며, 두 번째는 시인의 문학과 인생 전반全般을 함께 탐색하고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 부근의 고향 이야기와 그와 연관된 작품과 삶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한다는 데 있다.
허영자 시인은 경남 함양 출생으로 1962년 목월 선생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 시단에 데뷔한 이래, 정년퇴임할 때까지 숙명여대에서 교수로 봉직해왔으며, 창작에도 전념한 시인으로 2004년 제20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2000~2002년 제 32대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문단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님처럼’칠순이 훌쩍 넘어 전업 창작인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고향으로부터 삶의 에너지와 근간이 형성되고 확장된다. 특히 예술인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직관과 섬세한 감각, 예리한 통찰을 소유한 시인에게 있어 그 결과물인 문학 작품을 독자가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고향만큼 요긴한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시인은 5살 무렵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고향에 대한 애틋함과 특별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눈빛은 아득한 시공 저 너머에 있다. 유년 이후,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을 보낸 부산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고향의식이란 무엇이며, 또 고향은 어떻게 온몸에 각인되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을 주고받으며 삶의 진득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문득 우리 모두에게 지금은 퇴색되어버린 그 수많은 고향이 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해졌다. 함께 자리한 시인들의 표정도 그랬던 것 같다.
시인의 고향은 지금은‘장항리’가 되어버린‘손곡리’이다. 마을 자체가 6·25 전란의 여파로 불타 통째로 없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호적을 정리할 때 장항리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함양 휴천면의 휴천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한 부친 덕에 사택에서 태어난 시인은 부산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5년을 함양 사람으로 살았다. 이때의 짧은 기간이 시인의 고향살기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향을 떠올리는 시인의 눈빛이 너무 멀어 하마터면 그 때의 순간을 놓칠 뻔 했다. 기억보다 정신에 녹아 있는 아래의 시를 통해 시인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로 새겨져 있는지 그 행간을 따라가 본다.
그 날은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강아지풀
송아지는 음메 음메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큰 소리로 울고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미소가 팔려가는 날.
그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어른들은 큰 소리로 웃고
아이들도 신나서 잠 안자고 지켰다
--새 송아지 태어나는 날.
--「고향집」전문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연속 풍경화로 그려지는 고향에 대한 회상은 시인만이 갖는 고유의 기억인 동시에 개인적인 신화로까지 이어진다. 집안 어른들만 집안대소사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의 일원으로 영입된 소는 한국인 정서의 특질인 ‘정情’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므로 그 의미 각별하다. 특히 집안의 경제적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에 소는 오랜 시간 동고동락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며 남다른 피붙이가 될 수밖에 없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슬픈 일 있으면 가슴 아파하고 기쁜 일 있으면 함께 기뻐하는 시골집의 정경이 소담하게 펼쳐진 가족사가 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니 마치 동화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첫째 연을 본다. 앞의 이야기가 여러 장 넘어간 어느 날이, 집안은 아이들의 음음소리로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어미 소가 팔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끼와 떨어지게 된 어미 소의 울부짖음은 물론 이별을 알아챈 ‘음메 음메’ 가슴 저미는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식구들도 역시 한없이 슬퍼하는 아이들처럼 겉으로는 내색 않고 있지만 마음은 그지없이 착잡하다. 슬픔의 주체인 아이들은 오래 정들었던 소와의 상호 관계에서 피붙이의 이별을 체험·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훗날 고향을 떠올릴 때 이보다 더 감정을 자극하는 사건이 어디 또 있으랴. 짧은 시행에서 자신들의 사무친 이별인 양 동일시하고 있는 슬픔의 이미저리는 아이들 고유의 영역이라서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다. 오직 감성의 창을 통해 겨우 엿볼 뿐이다. 기억속의 어른 역시‘아무 말이 없’이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있었기에 집안은‘초상집’같을 수 있었다.
둘째 연은 또 어떤가. 기억의 공간은 온갖 것의 저장을 동시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기쁨이 온 집안을 환하게 뒤덮고 있다. ‘그 날은 온 집안이/잔칫집 같았’기 때문이다. 첫 연에서는 팔려가는 어미 소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도가니를 보여주었다면 둘째 연에서는 새 생명을 얻는 환희의 도가니에 든 것이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이들은 식구 하나 느는 기쁨에 잠도 잘 수 없다. 마치 방안의 온기를 외양간에서 느끼고 있는 듯하다. 외양간은 이미 방안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피붙이를 환영하는 아이들은 슬픔만큼 큰 부피의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한다. 시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한 고향은 왁자한 슬픔이거나, 탱탱한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시인의 고향의식은 온통 흐리거나 뿌옇거나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할 수 있다. 가령, 고향 함양을 떠올리면 눈앞에서 어룽대는 ‘하얀지등’과 ‘할아버지의 수염’은 실제로는‘하얀지등=크로바꽃’,‘ 할아버지수염=염소’임을 알았을 때 유년의 단편적인 기억은 고향에 대한 특별한 회상이나 감성을 끌어내기보다 강렬한 순간적 인상에 의해 고착 ? 장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고향의식의 발현은 조부모와 부모의 연결고리가 삶의 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고향 이야기-지리산」전문
지리산은 해방 이후, 좌우대립의 극한점에 놓여있던 살벌한 현장으로써 전쟁 이후에는 그 피해가 막대했던 공간으로써 익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지리산 인근 마을 대부분 이 비극적 사태와 후폭풍을 거의 피해갈 수 없었기에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후일담도 많다. 시인의 고향인 함양 역시 그러했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격전을 치를 때는 부산에서 살았다. 그렇더라도 지리산의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시인의 삶 깊숙이 뿌리내리며 파고들었고, 지금까지 실뿌리가 이어진다. 한학자를 조부로 두었던, 결국 사형을 피할 수 없었던 남로당 중책자이며 빨치산 대장인 하준수의 이야기하며, 다리가 하나 없는 산청 출신 여성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와 거창, 함양, 산청의 양민학살 사건은 시인의 삶을 관통한다.
위의 시「고향 이야기」는‘지리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비극적 서사에서 시인이 결코 놓여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형과 아우의 비극적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땅의 분단역사에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형상을 도저히 그냥 볼 수 없었던 지리산.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품에 품고 지리산은/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음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 흐르는 피 끓는 죽음을 묵묵히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고향에서 내가 태어난 그곳에서 혈육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기가 막힌 현장을 목격한 것은 기실 지리산이 아니고 시인 자신이다. 이념이 달라서 서로 적이 되는 시대, 차이가 만들어 내는 극명한 생과사의 교차점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지만 역사의 증언 한 가운데 우뚝 선 지리산이 시인의 삶에 내재되어 있는 한, 고향이 시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시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고향을 안타깝고 비극적인 곳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지聖地상림上林이라는 시를 통해 특별하고 남다르며 신성한 곳으로 명명하고 있다. ‘태초에 조물주는 산을 일으켜 세우시고 평평한 들판을 만드시고/그 위에 금을 그어 물길을 열으셨다.//산에 나무 심고 들판에 오곡 뿌리고 물속에 물고기를 노닐게 하여/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창조하시었다.//지리산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서켠/ 위천 옆에는 조물주의 이 손길이 다하지 못한 창조의 마무리를/ 대신한 곳이 있으니 이름 하여 상림上林.//신라의 명철사 최고운崔孤雲을 도와 흰 옷 입고 머리에 흰 띠 두른 함양 사람들,/흙을 나르고 숲을 옮기고 물길을 돌려 만든 땅 상림은/ 그래서 벌레도 없고 쥐도 뱀도 없는 신령한 땅이 되어 지금도 함양 사람들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어른께서 세배 받으시듯이 큰 절을 받고 있다.「(성지聖地상림上林」전문)’상림上林은지금은천년기념물로지정된곳이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人工林으로 원래는 하나의 숲이었는데, 중간에 마을이 파고들어 위아래로 나뉜 뒤 상림·하림으로 명명되었다. 하림은 한국전쟁 당시 정찰기 비행장이 생기면서 사라졌고, 대신 지금의 군부대와 마을이 자리 잡았다. 신라 진성여왕 말기 지방관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했다 하며, 1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분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하자,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린 뒤 둑을 보호하려고 나무를 심은 것이 숲의 기원이라고 한다. 시인은 고향 함양이 이토록 오랜 푸른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 푸르고 단단한 줄기가 자신에게 깊이 뻗어있음을 알고 있다.
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고향에서 -멧돼지」전문
이따금 낯선 곳을 더듬듯 고향 함양을 말하는 시인은 차분한 경상도 억양에 순화된 표준말을 쓰고 있다. 시인의 부드러운 말속엔 어딘지 비어 있는 느낌이 든 것은 아마이 말을 듣기위해서인 것 같다. ‘ 나는 남쪽에 고향이 있어도 실향민’, ‘ 나는 남쪽에 고향을 두고서도 가지 못하고 그리움에 얼룩져있다’, ‘ 나는 남쪽에 고향을 두었기에 직접 확인할 수 있는데도 늘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시인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고향을 두고서도 왜 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요즘은 도로 사정이 좋아서 몇 시간이면 달려갈 그곳을 왜 가지 아니하고 겉으로 맴도는 것인가. 가지 못하는 건가. 아니 가는 건가. 이 두 물음을 놓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곧 그 답을 듣게 되었다.
지금까지 점쟁이 한 번 안 찾고 복권 한 번 산 기억이 없다는 시인은 조심스레 이야기 하나를 꺼내든다. 사실 고향이라는 말만 나오면 의도적으로 기피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릴 때의 일이긴 하지만 일종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 중이었고, 어머니와 남동생이 외가에 가 있는 동안 갑자기 어린 남동생을 병으로 잃게 된 것이었다. 시인도 심하게 앓아 하마터면 둘 다 잃을 뻔 했다는 할머니의 말씀 이후 고향을, 외가를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점을 보니 시인이 외갓집에 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들은 이 말은 곧 시인의 발걸음을 고향 밖으로 내쫓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었다. 이후, 시인이 32세 무렵 큰마음을 먹고 옛 기억을 더듬고 금기를 넘어 서울에서 고향 찾아가기는 했다. 외할머니가 생존했을 때였지만 이미 옛날 번성했던 외가댁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고 작은 집으로 이사한 후였다. 외할머니가 쥐어주던 곶감과 온갖 선물을 주던 풍성하고 정다웠던 외가는 이미 예전의 외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시인은 씁쓸하게 떠올렸다. 일찍 고향을 떠나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고 형제 없이 외롭게 자라온 시인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선연했다.
내 고향 함양에 내리는 햇빛은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다
솜씨 좋은 징깽맹이
쟁쟁 징소리로 내리고 있다
옷이 없어 헐벗은 날에도
밥이 없어 배고픈 날에도
맨살에 순금가루 바르고
징소리 신명으로 발을 굴렸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
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 마을
긴 이빨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
버섯 같은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순금가루.
--「함양의 햇빛」전문
하지만 함양은 시인이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고향임은 틀림없다. ‘ 내 고향 함양이 내리는 햇빛은/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는 것을 실눈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시인의 귀에는‘솜씨 좋은 징깽맹이’가 징을 쟁쟁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징깽맹이’는 징잽이의 함양 사투리인 모양인데 특이한 이름이다. 징 두들기는 소리가 시인의 머릿속에 가득하고 햇빛으로 충만하다. 함양 어디든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어 축복 받은 곳임을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다. 공기가 그만큼 맑고 산수풍광이 아름다운 곳인 게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곳이다. 비록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다고는 하나 시인의 가슴엔 함양의 모든 것이 가득한 것이 틀림없다.
어릴 적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시인은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지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하신다. 해방 전 영자英子라 불렸는데 일본식으로 ‘에이꼬’여서 그것이 싫었던 어머니가‘유선’이라 이름을 새로 짓고 밥그릇, 숟가락에도 새겨 넣으면서 시인에게 새로운 이름에 적응하도록 했지만 시인은 어쩐지 낯선 것만 같아 이름을 그냥 별 생각 없이‘영자’라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냥 이름만 불리기보다‘허영자’로 성씨를 꼭 붙여서 불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하니 이는 뿌리에 대한 올곧은 의식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일본식으로 유행하던 것은 싫었지만 이미 이름으로 받아들인 것은 내 것이라는 강한 자의식이 작동되었을 것이고, 또 성을 강조한 것은 어디에 사는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을 당당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의 시를 보면 시인은 영락없는 지리산 사람이다. 시인을 두고‘섬세한 필력으로 고도의 정제된 시를 노래하는 걸로 유명하며, 깊이는 서정주를 닮았고 전통적 운율은 박목월을 닮았으되, 그녀만의 독창적인 어법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허영자 시인’이라는 독창적 브랜드를 갖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기에 지리산은 더욱 뗄 수 없는 관계망에 놓인다. ‘함양 사람들은/영산靈山 지리산을/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서운瑞雲 어린 준봉峻峰/그 푸른 기상을/ 품고 삽니다//괴로울 때나 슬플 때/언제나 품을 열어/맞아주는 산//기쁠 때나 즐거울 때/맑은 이마를 들어/닥아 오는 산//피로 얼룩진/역사의 한 장을/위천수 맑은 물로 씻어내고//반달곰과 애기 노루/산나리 고사목도/어울려 사는 그윽한 골짝//예나 지금이나/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언제 어디서나/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영산 지리산이/우뚝 솟아 있습니다.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전문’시인의 선조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인 만큼 그 기운이 어디 가겠는가.
예전에 한 동네에서 재주 있는 한 사람만큼은 크게 공부를 시키고 유학을 시켰던 전통에 따라 아버지가 일본 유학을 가고 친할머니가 살림을 맡아서 할 때 오직 근검절약, 근면성으로 재산을 일구고 그 삶의 본보기를 시인에게까지 보여주셨던 것은 절대 잊지 못할 모습 중의 하나다. 비록 여성이지만 남성의 면모를 가지고 집안을 다스리고 친척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불자로서도 열심이었던 모습은 지금도 시인의 가슴에 우뚝 솟아 있다. 함양 사람들 가슴 속에 지리산을 품고 사는 것은 아마도 지리산만큼 넓고 큰 윗대 어른들의 모습일 것이며 그것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은 아닌가. 시「일두 선생 고택古宅에서」를 보더라도 어릴적 타향을 전전했어도 외가와 친가가 한 동네에 있어 두 집안의 든든한 울타리를
배경으로 꿋꿋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 까 싶다.
함양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변에 허영자 시인이 쓴 시를 오석에 음각한 시비를 볼 수 있다. 유림면 청년회의 주관으로 세워진 시비는 그의 대표 시‘은발’을 비롯해 ‘자수’, ‘작은 기도’등 3기이다. 시비 제막식 날, “이것은 나의 시비라기보다 고향을 찬양하는 시를 청탁받고 쓴 기념물입니다. 시비란 업적이 다대한 문학인들이 타계한 뒤에나 만드는 것이지 저같이 이룬 것이 없는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향에 오니 많은 분들이 저보고 시단의 거목이니 하면서 과분한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내게 너무 무겁습니다. 나는 지금도 끝없이 노력해야함을 알고 나의 재능을 회의하는 어린 나무, 유목幼木입니다. 시 앞에서만은 한없이 겸손하게 한 획 한 점을 아껴가며 엄격하게 시 쓰는 일만이 제가 할 일입니다.” 라는 말을 통해 시인과 지리산, 고향과 문학의 함수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향 함양은 내 문학의 모티브”라고 강조하며 삶에 겸손하고 문학에 겸손하고 고향에서조차 겸손의 모습을 보이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지리산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오래 건강하시고 고향 함양의 햇빛을 듬뿍 받으며 문학의 향을 이어가시기를 소망한다.
▣ 허영자 시인 약력
허영자 시인은 1938년 함양군 휴천면에서 출생해 경남여중, 경기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비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장(2000~2002년) 등을 거쳤다.
1961~62년 박목월 선생에 의해‘현대문학’에‘도정연가’등이 추천돼 등단한 뒤 1963년 김후란 시인 등과 함께 한국문학사상 최초의 여성 순수시 동인‘청미회’를 창립했다.
시집으로는‘가슴엔 듯 눈엔 듯’(1966), ‘친전’(1971), ‘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1977), ‘빈 들판을 걸어가면’(1984), ‘그 어둠과 빛의 사랑’(1985), ‘조용한 슬픔’(1990),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1995), ‘목마른 꿈으로써’(1997), 시선집으로는 ‘암청의 문신’(1991)과 ‘허영자 전시집’(1998) 등이 있다.
이밖에 산문집으로 ‘한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1971) 등이 있으며, 이론서로는‘한국 여성시의 이해와 감상’(1997) 등이 있다.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1972년), 제20회 월탄문학상(1986년), 제2회 편운문학상(1992년), 제3회 민족문학상(1998년)을 수상하고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 박해림
시인, 1996년《시와시학》(시),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으로《고요, 혹은 떨림》《저물 무렵의 詩》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