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흔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할 때가 있다. 성경에는 의를 위하여 소외와 핍박을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고 반대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들에게는 화를 선언함으로써, 세상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福)과 화(福)의 개념을 제시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선생에게도 두 종류의 선생이 있다면 어폐가 있는 것일까? 이를 빗대어 ‘선생은 있으나 스승은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승에게는 필설로 표현 할 수 없는 근엄함이랄까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옛 사람들은 부모에게는 낳아준 은덕이 있고 스승을 통하여 인간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배우고 임금의 큰 은혜로 먹고 사는 것이라 생각하여 군사부의 위상을 동일 시 하는 마음으로 살아 왔음이 분명하다.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스승의 위상은 너무나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다. 살기 좋은 세상 모습이 올바른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지듯 개개인의 올바른 인격은 교육에 의해 완성된다는 생각이다. 그 교육의 중심에는 사회가 교권을 존중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 왔다. 이제 교권은 너무나 참담하게 무너져 입에 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수 없이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줄잡아 초등학교 선생님이 여섯 분이요,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학년별 열 과목정도면 서른 분이요, 어림으로 商計해도 대학교육을 담당하신 선생님 마흔 분을 합하면 여든 분의 선생님으로 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조곤조곤 셈하여 보니 무슨 큰 이치를 깨달은 듯 스스로도 놀라운 마음이 된다. 그 교육을 바탕으로 우리는 원시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월이 되면 특별히 생각나는 두 분 선생님이 있다. 한분은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고 또 한분은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다. 순서에 따라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학교는 한 학년이 두 개 학급뿐인 면 소재지에 자리한 공립중학교였다. 시골이고 오지여서인지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이외 모든 선생님들이 대부분 초임 발령이었다. 그 가운데 가끔은 50대 초로의 선생님이 발령을 받기도 했다. 서점가게 아저씨와 문방구가게 아저씨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 촌구석이라 죄다 초임 발령 아니면 승진 대상자들이여 ” 그 당시는 무슨 이야기인 몰랐지만 초임 발령이라 부교재 선정이 쉽다고 했다.
2학년 담임은 초로의 역사 선생님 이었다. 역사는 재미 있는 과목이기도 했지만 나는 특히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 교수 방법이 좋았음인지 평가 때문에 열심히 가르쳤음인지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과목에 비해 성적이 좋았던 것은 그러한 담임과 좀 더 가까워지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마음속으로만 좋아했던 선생님은 무슨 일인지 이듬해 안동에 있는 중학교로 전근이 되었다.
교정의 버즘나무 잎이 다시피고 무성하던 여름이 지나자 담임 선생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진학지도 시간을 가졌다. 우리 집 사정을 아셔서인지 대구에 있는 공고를 권유 하였다. 나에게는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는 못된 습관이 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아무 대책이나 구체적 목표도 없이 막연하게 미루는 습성이 있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진학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 외에는 누구 하나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원서를 내기는 하였으나 비둘기의 마음은 콩밭뿐 이었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것이 아버지와 단 둘이서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나들이가 되고 말았다. 마을에서 중학교 시험을 혼자 합격한 전력이 있어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동행하였을 아버지께 죄스런 마음은 지금도 가슴이 저미어 온다.
한해를 책이라고는 한 페이지를 넘겨보지 않으며 무의미하게 보내고 입학시험을 보았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했다. 제때 해결을 하지 않고 더 준비를 해서 좋은 결과를 내어 보려는 마음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나를 괴롭혀 왔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었다. 이대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는 영락없이 직공이 되는 길뿐임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2차 고등학교 원서를 써서 다행히 합격을 했다. 부모님도 몹시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성적은 바닥이이어서 장학금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였다. 당시는 학비를 보탤 아르바이트라고는 신문을 배달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중고 자전거를 가까이 계시는 외갓집 쪽 친척 아저씨를 보증 세워 구입하여 신문사 지국을 찾았다.
그 시절만 해도 아파트가 없고 신문을 보는 가구가 가뭄에 콩 나듯 하여 60여부를 배달하는데 세 시간은 족히 걸렸다. 배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신문대금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받는 한 달 월급이 이천 원 정도였다. 엄청난 노동력의 착취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엔가 신문대금을 받으러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온 몸이 소금기둥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학생들에게 존경받고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역사 선생님이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표현은 안했지만 반가움에 와락 눈물이 났다. 각설하고 지금도 잊혀 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잊을 수가 없다. 사모님이 집에 없으니 신문대금은 다음에 받으러 오라는 말이 어깨 뒤로 들려왔다. 신문을 돌리며 학교를 다니는 기특한(?) 제자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쯤 할 수는 없었을까? 목을 축일 음료수라도 한잔 줄 수는 없었을까? 또 다른 한 분 선생님 고3담임 선생님 이다. 졸업 20주년 행사로 ‘스승의 날’을 맞아 초대를 했더니 아흔이 넘으신 지금도 명절인사를 먼저 보내며 칭찬과 격려를 잊지 않으신다. 너와 같은 제자를 둔 것이 큰 보람이라고 자랑삼아 말씀 하신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