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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선교의 내적 근거
1. 들어가는 말: 삶과 연결되는 예배
기독교 공동체가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고, 또 그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다. “예배가 무엇인가?” 혹은 “왜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질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나름대로 신앙의 언어로 답을 하지만, “예배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 앞에서는 예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부분적임을 인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배가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하고, 또 삶 자체도 예배의 연속이라는 당위성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물론 예배를 통해 삶에 새로운 힘을 얻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 힘은 대부분 개인적이거나 교회 자체의 확장을 위한 전도의 열정으로 제한되고 하나님의 집인 세계를 변화시키는 선교적 책임과는 거의 연결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물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치체계 아래서 예배는 종종 세상과 구별된 종교라는 영역 안에서 드려지거나 심지어 세상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드려지기도 한다.
대체로 한국교회는 예배 그 자체, 특히 주일 낮 예배에 매우 큰 비중을 둔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어떤 종교적인 분위기나 감정에 잠기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배행위 자체에 관심이 집중된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점을 소홀히 하기 쉽다. 첫째, 일상의 삶이 예배에 반영되지 않는다. 예배는 어떤 경우에도 무에서 시작되지는 않는다. 예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미 알고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하나님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다. 즉, 모든 예배는 어떤 형태로든지 예배자의 삶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는 마치 하나님은 신도들의 일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예배자가 세상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은 적은 없지만, 예배에 일상의 삶을 반영할 만한 교육과 훈련이 지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둘째, 예배가 일상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바르게 드려진 예배는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을 제공한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도와준다. 이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를 넘어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염된 환경이나 정직하지 못한 사회는 예배의 언어가 개인과 공동체의 세상에 대한 책임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삶이 반영된 예배와 삶에 영향을 주는 예배를 말하기 위해서는 예배의 언어가 세상의 가치체계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와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또 예배의 범위를 예배행위 자체에 국한하지 말고 일상의 조그마한 삶의 움직임으로까지 확대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예배의 언어가 제공하는 상상력에 따라 예배의 역할이 달라질 수 있으며, 나아가 예배가 사회변화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은 예배와 선교의 관계, 즉 예배가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선교의 내적 근거가 되는 예배의 의미를 보다 큰 틀에서 이해한다. 이는 예배행위 자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의 궁극적 관심은 교회에 관한 신학을 선교에 관한 신학과 연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번 시간은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로 “예배의 두 중심: 의식과 예전”은 예배를 의식과 예전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예배의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한다. 예배의 전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예배는 삶의 변화에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예배의 선물: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예배가 공동체의 질서, 형성, 변화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본다. 이 단락의 특징은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세 번째 단락인 “예배의 내용: 계속적인 계약의 갱신”에서는 예배행위의 기본구도와 그 의미를 찾아본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체결되는 계약의 갱신으로서의 예배를 강조함으로써 예배가 선교의 내적인 근거가 됨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 이후에 에큐메니칼 진영을 중심으로 관심을 가져온 ‘예배 후 예배’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결론을 대신한다.
2. 예배의 두 중심: 의식과 예전
넓은 의미에서 예배 혹은 의례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남녀가 그냥 동거한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비난받지만, 결혼식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후로는 떳떳한 부부로 인정받는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식 이후 비로소 자신의 직책에 해당되는 권위와 책임을 정식으로 부여받는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 이처럼 예배 혹은 의례는 개인 혹은 공동체를 과거와는 구별된 미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삶 전체를 예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삶 전체를 예배로 이해할 때, 예배는 현실 세계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근거와 방법을 제시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을 바탕으로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즉 의식(ceremony)과 예전(ritual)으로 구별된다. 둘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① 빈도: 의식은 규칙적인 데 비해, 예전은 불규칙적이다. ② 시기: 의식은 미리 예고되고 계획되어 지나, 예전은 필요에 따라 행해진다. ③ 시간의 초점: 의식은 과거-현재에 주로 초점을 맞추나, 예전은 현재-미래를 더 강조한다. ④ 인도자: 의식의 인도는 일정한 훈련을 받고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예전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 ⑤ 목적: 의식의 목적은 어떤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참여자의 신분과 역할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예전의 목적은 참여자의 신분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보자. ① 빈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규칙적인 일과 불규칙적인 일로 나눠진다. 예를 들어 생일, 공휴일, 기념일 등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의식들이다. 반면 졸업, 결혼, 수술 등은 불규칙적인 사건으로 예전의 범주에서 이해되어 진다. ② 시기: 의식적 사건은 규칙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때를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예전적 사건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다. ③ 시간의 초점: 우리는 의식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를 축하한다. 그러나 예전은 현재의 요구를 미래의 가능성과 연결시킨다. ④ 인도자: 의식은 공무원처럼 특별히 주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예전은 전문가만이 인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 교수, 변호사 등은 불규칙적으로 임하는 사건을 담당하는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⑤ 목적: 의식은 공동체의 가치나 구조를 확인함으로써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인식하게 도와주는 기능을 갖는다. 반대로 예전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넘어 보다 나은 공동체를 향해 현재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식과 예전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가령 개천절 기념식은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개천절 행사는 매년 10월 3일이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므로(빈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으며(시기), 기념식을 통해 국가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시간의 초점). 개천절 기념식은 국가 공무원들이 주관하며(인도자), 그 목적은 국민의 현재 신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목적). 이에 비해 결혼식은 예전에 속한다. 아무도 결혼식을 규칙적으로 반복할 수 없으며(빈도), 그 때를 미리 알고 준비할 수도 없다(시기). 개천절이 과거-현재의 시간을 강조했다면, 결혼은 현재-미래의 시간을 강조하면서 전혀 새로운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시간의 초점). 결혼식의 주례는 판에 박힌 말을 반복해서는 안 되고(인도자), 전문가로서 신랑과 신부가 한 집안의 아들과 딸에서 이제는 새로운 가정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목적).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의식은 질서를 유지하고, 예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성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를 질서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 질서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의식과 예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식과 예전은 전체적인 예배를 위해 둘 다 중요하다. 예배에서 의식과 예전의 관계는 출애굽 사건에서 애굽에서의 탈출과 가나안으로의 탈출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으며, 시내산에서의 예배는 의식과 예전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예전으로서의 예배는 이전에 애굽에서 종노릇 하는 노예가 이제는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신분을 변화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예배를 의식과 예전이라는 어느 한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면 이는 예배의 의미와 기능을 왜곡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예배의 위기는 예배가 너무 의식과 연결되어 버리는 데 있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의 균형이 깨어져, 무시당한 성례는 약화되고 강조된 말씀은 오히려 왜곡된 것처럼, 의식과 예전의 균형이 깨어져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은 거의 강조되지 않으면서 예배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예전보다는 의식으로서의 예배에 길들어져 있는 교인은 언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습관적으로 알고 있으며(빈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시기).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자기에게 어떻게 미쳤는가에 대해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시간의 초점). 예배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받은 목사에 의해서 인도되나 이들 중 예배를 통해 신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는 많지 않으며(인도자), 따라서 예배는 거의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진행된다(목적). 물론 의식으로서의 예배의 의미는 어떤 경우라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문제는 예배를 의식으로서만 이해한 나머지 예전으로서의 예배가 주는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있다.
의식에 대한 강조는 교회의 세상을 향한 책임과 연결된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주로 의식에 치우쳐져 있다는 말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관심이 전도에 집중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전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예배가 경배와 찬양 위주의 의식으로서 주로 이해되고 있는데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내용과 목적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을 때, 교회가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세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이해하고 그 세상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선교적 과제를 인식하기란 힘든 일이다. 한국교회가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배가 먼저 전체적인 의미를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예배의 선물: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배가 의식과 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예배는 고백적 형태와 윤리적 형태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이때 예배는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일어나는 장이다.
고백적 형태는 예배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으로, 신앙 혹은 신앙에 대한 확신의 문제와 연결된다. 고백적 형태를 통해 현실의 잘못된 부분이 폭로된다. 고백은 자신이 믿는 것을 수용한다는 선언이다. 또 고백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모험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고백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이때 정치란 세상의 가치구조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가치구조가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정치적인 선언이었다. 이는 이미 알려진 세계는 더 이상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폭로한 것이었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일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고백적 행태는 윤리적 형태와 연결된다. 예배의 과정은 고백적 형태와 윤리적 형태를 연결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고백적 형태와 윤리적 형태로서의 예배는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형식 자체는 과정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배는 형식을 포함하지만, 예배행위 자체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예배의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공동체는 형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공중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형태와 윤리의 형태는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공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방향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의무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적론적이다.
예배가 고백과 윤리를 연결하는 전체적인 과정으로 이해될 때, 예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경험된다.
(1) 새로운 질서의 부여
예배는 일차적으로 우주 질서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사회질서를 확인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예배를 통해 기존 사회의 가치체계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질서가 선포된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된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서 만들어지는 질서는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사회생활을 안정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제시된 바른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질서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공동체로 하여금 지금까지 그들을 지탱시켜 주었던 질서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도와준다.
예배를 통한 질서의 발견은 그 자체로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질서는 공동체의 사랑으로 발전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의 가치는 그다음의 과정, 즉 공동체의 변화를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잘못된 예배나 의례를 통해 얻어진 질서는 오히려 공동체를 나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가령 히틀러의 군중집회에서 선언된 새로운 질서는 군중을 집단적으로 전쟁의 광기 속으로 몰고 갔다. 새로운 질서의 결과는 그 질서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폭로한다. 한국교회 역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이 예배를 통해 어떤 질서를 부여받고 있는가를 신학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배 안에서 어떤 질서가 경험되는가 혹은 무엇이 회복되는가 하는 문제는 공동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공동체는 그분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재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질서 아래서 사회적 차별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극복이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 안에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실제로 개인 혹은 공동체의 사회활동은 본질적으로 예배에서 경험한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만들어진 질서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배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행동이 된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와 문화와의 상호관계에서 잘 증명된다.
예배에서 만들어지는 질서는 일상의 삶에서 나온 언어나 어떤 문학적인 언어가 아닌, 초월적인 언어를 통해 선포된다. 공중예배를 통해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주는 ‘공동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이는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기초가 된다.
(2) 공동체의 재형성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는 예배가 주는 두 번째 선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공동체를 유지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은 점점 약화되면서 공동체는 새롭게 변화된다. 기존의 세상 질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가치로 무장된 공동체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가 극복된 공동체이다. 이때 공동체는 자신의 공동체와 자신이 지금까지 몸담았던 기존의 공동체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고 기존의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는 사회구조가 영원히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 예배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그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공동체로의 문턱을 넘는 경험은 공동체로 하여금 예배는 의무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서 참여하는 것임을 알게 도와준다. 예배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기존의 공동체를 지탱해 왔던 구조는 잠시 깨어진다. 그리하여 공동체는 지위, 성별, 인종 등 온갖 종류의 사회적 차별이 부분적으로 극복되는 경험을 통해 기존의 질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질서가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특별히 기존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갖지 못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예배가 해방의 기쁨을 표현하는 장이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아무리 예배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된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의 질서를 현실 사회 속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배 공동체와 기존 공동체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 지배하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된 기쁨이 실제의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또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형성된 공동체의 가치가 당장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힘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도 힘들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경험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예배는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변화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공동체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예배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들이 살아왔던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 얻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은 선교의 내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제의를 통해 공동체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기에 매우 적합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 굿판 등 전통적인 종교행사에서뿐 아니라 기독교 관련 집회에서도 한국 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은 일상의 삶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공동체로 쉽게 변화된다. 그러나 변화의 영역이 공동체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예배행위에 대한 강조나 그 요란함에 비해 예배의 열기가 예배드리는 장소에 국한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제장공동체’(祭場共同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예배 개혁이라는 과제와 더불어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