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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숙명(宿命)의 덫 <1> 벽와성. 목검추는 타오르는 벽난로 앞의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한 개의 옥비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비녀는 아스름한 기억 속에서부터 늘 몸에 지녀온 물건이다. 옥비녀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목검추의 오랜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옥비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가라앉곤 했던 것이다. 목검추가 아는 바 그 비녀는 그의 모친이 남긴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어머니…….' 입 속으로 불러보자니 가슴이 천 겹 만 겹으로 갈라져 그 사이사이로 찬바람이 스며오는 듯했다. 그는 모친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가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의 부모는 모두 타계했다 했다. 그는 구대상노에 의해 자랐으며 잔노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물론 그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부자 소년이며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돈이 많다는 것을 단 한 번도 만족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저만큼 앞, 벽에는 청동장식을 곁들여 세운 사자상의 벽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타다닥… 화르르르! 마른 장작이 벽난로 속에서 기세를 올리며 열기를 전해준다. 불빛에 비추어진 그의 옆얼굴은 옥돌을 깎아 세공한 듯 미려(美麗)해 보인다. 시간은 벌써 인시(寅時)를 넘고 있었다. 벌써 중원 전역에서 표행의 표차를 약탈해 가는 무리들이 나타났고, 심지어는 거침없이 살인까지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마디로 북두표행은 강호인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최근 강호에서 일어나고 있는 표차 약탈, 살인사건 중 구 할 이상이 북두표행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 동안 희생된 인원만도 벌써 수백 명을 넘는다 했다. 그러한 보고를 받는 목검추의 심사가 편할 리가 없었다. "극악무도한 무리들 같으니……." 우득! 목검추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문득 그는 낮에 주루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사건이다. 횡포를 부리던 자들은 비록 삼류무사들이긴 해도 분명 무예를 익힌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 자들을 목검추는 통쾌하게 피곤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최근 상황과 어울려 그는 새삼 무공의 위력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목검추는 옥비녀를 갈무리한 후 대신 소매 속에서 한 개의 빛 바랜 죽골선을 꺼내들었다. '여기 수록된 무공이 그토록 엄청난 것이었단 말인가?' 생각할 수록 묘한 경외감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나는 싸우는 법도 모를 뿐더러 무공을 시전하는 방법은 더욱 모른다. 난 그저 무의식중에 손을 휘둘렀을 뿐…….' 한데 그 위력이 상대를 두부조각처럼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무예라?' 목검추가 점점 무예의 신비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누구냐?" 순간 대답 대신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어 한 소녀가 차 쟁반을 받쳐든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목검추는 멈칫했다. 그녀는 말끔하게 몸단장을 하고 은쟁반을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었다. 탐스런 수발은 가지런히 빗어 어깨 너머로 늘어뜨리고 알맞게 균형 잡힌 몸에는 연자색 유의( 衣)를 걸쳤다. 화장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은 너무도 해맑고 신선해 보이는 소녀는 놀랍게도 무허랑이 아닌가? 한 가지 흠이라면, 생동감 넘치는 용모에 비해 비교적 우아한 분위기가 부족하다는 점이랄까? 하긴 어렸을 때부터 소매치기 무리에 휩싸여 성장한 그녀에게 고상하고 우아한 자태가 배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런 점이 지금 목검추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더욱이 흑백 또렷한 한 쌍의 눈은 목검추가 밤새 쌓은 가슴 속의 번민을 말끔히 씻어내 주는 듯했다. 정말이지 목검추는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무허랑이 이같이 변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였단 말인가? 목검추가 그녀를 묵묵히 바라볼 때 무허랑은 다소곳하게 다가와 그의 옆에 놓인 탁자에 차를 내려놓았다. 살짝 숙여진 이마, 비온 뒤의 풋복숭아 같은 상큼한 이마에서 목검추의 시선이 다시 멎었다. 야심한 밤 예기치 못했던 무허랑의 출현이 번민에 찌든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사르륵! 문득 소매 깃이 스치는 은은한 파향음이 그에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무허랑은 차를 내려놓고 한 걸음 뒤로 비켜섰다. 순간 소녀의 싱그러운 체향(體香)이 목검추의 코끝으로 기분 좋게 파고들었다. 목검추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일순간이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라 할까? 매사가 권태롭던 그에게 그것은 놀랍도록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저 소녀에게…….' 순간 목검추는 자신의 감정적 변화에 적잖은 혼란함을 느꼈다. 그는 착잡한 시선을 타오르는 벽난로에 던졌다. 갑자기 몸 속의 피가 불길처럼 열기를 뿜고 타오르는 듯했다. "드세요, 공자." 이때 귓전에 속삭이듯 맑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목검추는 시선을 돌렸다. 찻잔을 받쳐든 무허랑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고개를 외로 젖힌 터라 귓불과 목덜미의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 하지만 곧 이어 목검추의 눈빛이 점차 차갑게 변했다. 그는 찻잔을 힐끗 내려다보다 냉소를 흘렸다. "흥! 빛깔부터가 틀렸구나. 이것을 차라고 끓였느냐?" "……." 일순 무허랑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보기에 차는 다 같은 것 같겠지만 다도(茶道)야말로 고매한 도리가 있는 법이다. 하긴… 너 같은 무식한 아이에게 그것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 무허랑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야박해도 이처럼 야박할 수가 있는가. 사실 무허랑은 최근 최대한 모든 감정을 죽이고 여인답게 행동하며, 그의 수발을 들려 노력하고 중이었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러하다. 그는 이 한 잔의 차를 끓이기 위해 다도(茶道)에 관한 책자를 서른 두 권이나 뒤적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목검추는 단숨에 그녀의 노력과 정성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힐난은 계속 되었다. "흥! 흙 속의 진주도 진주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지만… 다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돼지 목에 걸린 진주를 진주라고 할 수 있느냐?" 무허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어가는 말. 그것은 한껏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의 용모를 품평하는 소리가 아닌가. 입술을 깨물고 있던 무허랑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만도 무언가 다정한 한 마디를 기대하며 발그레 상기되어 있던 뺨이 아니던가. 그 뺨이 이 순간은 백랍처럼 굳어들고 있었다. "으… 흑!" 쨍그렁! 투명한 수정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며 깨어졌다. 무허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밖으로 달려나갔다. 쏟아진 갈색 차가 감색 융단 속으로 스며들었다. 값비싼 융단에는 순식간에 고통의 흔적처럼 얼룩이 남겨졌다. 목검추는 사라지는 무허랑을 흘낏 바라보다 내심 탄식을 흘렸다. "미안하구나, 무허랑. 더 이상은 널 내 곁에 둘 수 없게 되었구나. 더 두었다가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정이 들고 말 것이기에......." 정(情).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구하고 바라마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대체 그 정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 두려워 목검추는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상대조차 멀리 떨쳐내야 하는가. 사실 그가 무허랑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지 모른다. 그것은 설강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서려 하면 할수록 굳이 그 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정을 향해 번뇌를 하되 또한 정이 다가서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성장해온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현재 고독하다. 그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친구나 사랑하는 여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분히 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었다. 벽와성의 젊은 주인 목검추. 대체 그는 얼마나 더 고독해지고자 하는 것인가? <2> <목검추! 널 용서하지 않아. 오늘 받은 모욕은 언젠가 곱절로 되돌려 주겠다.> 지금 목검추의 손에는 한 통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서찰 위에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제멋대로 휘갈겨 쓰여져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다분히 괴로울 때 그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지금은 새벽이다. 그는 다른 때보다 빨리 일어나 산책을 나가던 중이었다. 새벽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방문을 나섰던 것인데 뜻밖에도 무허랑이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무허랑이 밤사이 종이 쪽지 하나만을 달랑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성주님! 어떻게 할까요? 아마 멀리 도망가진 못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풀어 추적한다면……." 별채의 호위를 담당하던 무사가 흡사 죄라도 지은 듯 머리를 조아리며 눈치를 살피고 서 있었다. 목검추의 시선은 흘낏 허공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새벽기운이 안개처럼 대지 위를 채워들고 있다. 한겨울 중턱의 저 매운 안개를 뚫고 무허랑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눈물은 그쳐 있을까? 가슴의 멍은 어느 정도 아물어 있을까? 온갖 상념이 아프게 가슴을 채워 들었다. "성주님! 명령만 내리시면 한달음에……." 무사는 그녀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과오를 씻어볼 양으로 목검추를 재촉했다. 하지만 목검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내버려 두게." "예에? 아, 예……!" "그리고 오백 리 밖까지 눈치 채지 못하게 호위해 주게. 또 그녀가 어딘가에서 안정할 때까지 은밀히 도와주도록. 물론 돈이 드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써도 무방하네." "예에? 그… 그런 일이?" 무사 장곽(張郭)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가 납득이 안 가는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명인가? 그는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허리가 꺾어지도록 절을 한 다음 물러났다. 그는 화원을 다 벗어날 때까지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젠장! 도대체 그 오만불손하고 무례한 거지 계집애를 성주께서는 왜 그리 총애한단 말인가? 몸매 좋고 얼굴 반반한 계집이라면 지천에 널리고 널렸거늘… 대체 무엇 때문에……?' 일각 후 목검추는 어느 거처에 들어서 있었다. 평소 무허랑이 쓰던 방 안이었다. "……." 목검추는 흐트러진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허랑의 처소는 그녀의 성격답게 다분히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무엇 하나 있어야 할 자리에 정돈되어 있는 물건이 없다. 한데도 그러한 것이 별반 못마땅하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한바탕 장난질을 치고 난 자리를 보듯 웃음기마저 감도는 것이었다. 목검추의 손이 침상 위로 뻗어졌다. 늘 무허랑이 베고 잤을 베개가 손에 만져졌다. 목검추의 눈빛이 늦가을 호수처럼 젖어들었다. "그래, 어딜 가든 나에 대한 증오를 잊지 마라. 증오는 좋지 않은 감정이기는 해도… 어쩌면 널 지탱해줄 삶의 활력소가 될 것이기에." 잠시 베개를 어루만지던 목검추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섰다. 허옇게 서리가 낀 창틀 사이로 이른 새벽의 풍경이 건너다 보인다. '잘 가거라, 무허랑.' 내심 독백하는 목검추의 얼굴은 다시 처절한 고독의 그늘에 덮여갔다. 고독한 젊은 성주. 그는 다시 자신을 고독의 세계 속에 던져 넣고 마음의 자물쇠를 잠근 것인가. <3> 벽와성의 호장무사(護莊武士)들의 수효는 두 배 이상 대폭 늘어났다. 그것은 이금명 노인의 조치였다. 최근 북두표행의 표차가 계속 약탈당하고 인명피해마저 심해진 최악의 사태에 이르자 그는 마수(魔手)가 벽와성에까지 뻗어올까 경계하여 미리 손을 쓴 것이다. 특히 목검추가 거처하는 전각 주위는 이중삼중의 삼엄한 진세와 경계망이 펼쳐졌다. 더욱이 경계를 담당한 인물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일이 맡겨졌기에 그들조차 완벽한 진세의 파해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금명은 이 정도의 경계망이라면 강호고수라 해도 절대 잠입할 수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동안, 목검추는 사흘째 서재에 틀어 박혀 있었다. 그는 한번도 출입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일까? 이금명 노인은 가끔 그가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그 동안 목검추가 과거 읽어왔던 방대한 학문서적들과는 전적으로 틀렸다. 무예도보지(武藝圖保誌), 상평무해서(上評武解書), 호신무학론(護身武學論), 타혈기해경(打穴奇解經)……. 책자들의 이름이다. 그것은 학문서적이 아니라 하나같이 무공비급들이었다. 그 책자들은 특정한 문파의 무공이 아니라 일반적인 무술이론들을 다룬 내용이었다. 목검추는 한 번 일에 집착하면 끝을 보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최근 들어 그는 스스로도 무예의 본질에 대해 놀랄 만큼 빠른 진전을 느끼고 있었다. "……." 지금 목검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다. 다분히 만족감 어린 미소랄까? 그의 앞쪽에는 수백 권의 책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최근 들어 그가 벽와성의 지하서고를 뒤지고 뒤져 무학에 관한 모든 책자들만을 골라온 것이었다. 심오한 무공서적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무를 경시해 왔던 그의 안목을 완전히 뒤바꾸어 준 책들이었다. 특히 타혈기해경의 내용은 그에게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인간의 몸에는 수많은 경락(經絡)과 혈도(穴道)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 혈도 하나를 슬쩍 타혈하는 것만으로도 전신마비는 물론 생사(生死)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 등…… 그러한 잡다한 내용들은 사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목검추는 며칠 전 주루에서의 사건을 떠올렸다. 진작 무공을 익혔다면 다치거나 피를 흘리지 않고도 하류잡배들을 혼내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 이르자 목검추는 가슴이 설레는 경외감을 맛보았다. '정녕 무의 길이란 끝이 없구나. 대체 그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무해무변(武海無邊). 비로소 세상이 넓다는 말이 실감나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가 읽은 서적의 내용은 실로 꿈 같은 것들이었다. 강호를 대표하는 구파일방(九派一幇)과 그 역사가 배출해 낸 기인이사(奇人異士)들,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던 숨은 강호야사(江湖野史), 하늘을 날고 손바닥에서 바람을 내어 바위를 으스러뜨리는 고수들……. 자신과 똑 같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거늘 신비의 무학을 익혀 그런 힘을 낸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더욱이 장구한 무림사(武林史) 속에 명멸해간 숱한 영웅호걸들의 영웅담은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득 목검추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에 관음항마도가 그려진 죽골선이 쥐어졌다. "짐작컨대 여기 수록된 무공기예는 범상치 않다. 한번 익혀 보리라." 한데 그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안 돼! 그것만 절대 안 된다." 홀연 그의 귓속으로 음침한 괴음이 비수처럼 파고들지 않는가? 목검추는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하지만 채 몸을 반도 젖히기 전에 그는 전신의 열 두 군데도 넘는 부위에 찬바람이 비수처럼 쑤셔드는 것을 느껴야 했다. 파파파… 팟! 목검추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전신이 석상처럼 마비되어 버렸다. 동시에 부릅떠진 그의 동공 속으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비쳐들었다. 안개처럼 흐느적거리며 전면에 나타나는 그림자. 그것은 흡사 구름이 뭉쳐진 듯한 왜소한 인영(人影)이었다. 기류에 휩싸여 그 모습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 "누… 누구냐?" 목검추는 애써 심기를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크흐흣! 무공만은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것은 네 운명이 너무도 더럽기 때문이지." 괴음은 냉혹하면서도 끈끈한 연민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목검추는 그 음성이 무척 귀에 익다고 느꼈다. 순간 누군가의 환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갔다. "자… 잔노?" 스스스! 찰나 눈앞의 검은 기류가 풀어지듯 흐물거리더니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등, 봉두난발의 머리칼, 앙상하게 마른 몸매, 기이하게 푸른빛을 뿜는 애꾸눈... 그는 다름아닌 잔노였다. 잔노는 애꾸눈에 안광을 번들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히 잡아먹을 듯 무섭고 예리한 모습이라 할까? 그 모습은 지금껏 목검추가 알던 병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잔노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움푹한 눈에는 철강석이라도 꿰뚫을 듯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고 앙상한 전신에는 잘 갈려진 칼날 같은 예기가 머물러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의 출현이었다. 목검추의 처소 주위에는 수백 이상의 무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고 철통 같은 진세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 이곳을 유유히 파고 들어왔단 말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잔노가 놀라운 능력을 감춘 무림기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잔노가 무림인이었단 말인가?' 목검추는 충격에 사로잡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자신의 전신 혈도가 제압 당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온몸에 천근 추를 매단 듯 손가락 하나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잔노를 바라봤다. 지금껏 말은 없었으되 뭔가 교감이 통한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한데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잔노는 그를 바라보다가 낯을 얼음처럼 굳혔다. "크크! 무학 익히기를 포기해라. 그것은 널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이 잔노는 그것을 막기 위해 지금껏 네 곁을 맴돌았던 것이다." 놀라운 말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곁을 맴돌았다니……? 또한 잔노의 말투는 이미 바뀌어 있다. 또한 그의 말을 반추해 보건대 그는 목검추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엇 때문이오?" 목검추는 따지듯 되물었다. 잔노의 표정과 음성은 더욱 음산해졌다. "크크크! 왜라고 묻지 마라. 넌 그저 내 말에 따르면 된다. 또한 네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잔노!" "거역하면 널 폐인으로 만들 것이다." 목검추는 멍청해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다 있단 말인가? 지금껏 보이지 않는 금제 속에서 새장 속의 새처럼 살아온 목검추였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심한 금제라니? 더욱이 잔노는 그를 폐인으로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잔노… 당신이 감히……!" 목검추는 일순 무서운 분노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입에서 괴성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부릅떠진 채 시뻘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잔노는 전혀 아랑곳없이 거듭 냉혹한 음성을 흘려냈다. "크크! 아느냐? 사실 네게 씌워진 덫들은 다름 아닌 네 모친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 모친이라고 했소?" 일순 목검추는 심장이 떨어져 나갈 만큼 놀랐다. 나이 열 여덟. 이 나이가 되도록 그는 모친의 얼굴은커녕 출생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모친은 그가 철이 들기도 전에 병에 걸려 죽었다 했다. 누구도 그에게 출생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으며 또한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산을 쌓을 만큼 많은 황금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근본을 모르고 자유마저 제압 당한다면 우리에 갇힌 짐승만도 못한 삶인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잔노의 입에서 출신에 관한 단서가 튀어나온 것이다. "흐흐! 네놈이 태어나던 날 탯줄도 끊기지 않은 핏덩이를 받아낸 것은 이 늙은이였다." "아……." 목검추는 일순 망치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크크! 그때 네 모친은 널 내게 부탁했지. 결코 무사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난 약속했다. 내게도 따로 갈 길이 있으니 향후 십팔 년 동안 이 아이를 지켜주겠노라고. 부탁대로 결코 무사로 만들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잔노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목검추를 노려보는 눈빛도 악마처럼 잔혹해졌다. "크크! 그런데 그 약속한 십팔 년이 겨우 한 달 남았거늘 너는 금기(禁忌)를 깨고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 "십팔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난 그 동안 널 아들처럼 키웠고 지켜왔으며 정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되……." 잔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목검추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정체 모를 감정의 응어리들이 응집되어 있다. "하지만 난 이제 떠나야 한다. 결국 널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구나." 목검추의 안색이 대변했다. "잔노! 정녕……!" "미안하구나. 네 운명이 이것 뿐이라면 어찌 하겠느냐? 사실 이 늙은이가 널 말린다 해도 네가 결코 충고를 들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 그 말은 사실이었다. 목검추는 지독한 옹고집의 소유자이며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온 바 있다. 막 무공에 입문(入門)했거늘 잔노가 말린다 해서 그만둘 그가 아닌 것이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잔노는 깡마른 십지(十指)를 꼿꼿이 세워 번개 같이 튕겨냈다. 파파파… 팟! 정적 속을 가르는 경미한 파공음이 방 안에 거푸 울렸다. 찰나 목검추의 전신은 다시 부르르 떨렸다. 전신혈맥으로 얼음장 같은 고통이 수십 자루 창을 일시에 쑤시듯 파고들었던 것이다. 일순 모든 힘이 쫙 빠지며 전신 뼈마디가 일시에 흐물흐물해졌다. 온몸을 휘감던 충격도 분노도 흐물흐물한 충격 속으로 녹아들 듯 풀어져 버렸다. 모든 기력이 탈진되자 심기도 나약하게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검추, 이제 넌 영원히 무학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잔노는 또다시 화광 같은 눈빛을 뿜어냈다. "크크! 아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 "……." 목검추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음성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혈까지 제압 당한 것이다. 그는 부릅뜬 눈길로 마냥 잔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잔노는 목검추를 내려다보며 잔혹한 표정을 지었다. "크크! 넌 지나치게 지혜롭고 총명하다. 그것은 다분히 후환의 소지가 될 수도 있지." '아! 이런 경우가?' 목검추는 절망에 가득 찬 심정으로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파… 악! 한 가닥 빛살 같은 경기가 잔노의 왼손 중지(中指)에서 발출되었다. 그리고 그 지세는 정확히 목검추의 뇌호혈(腦戶穴)을 파고들었다. 파악! "으흑!"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목검추는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 속이 일시에 파괴되는 듯한 굉렬한 충격이 그를 감쌌다. 일순 머리 속이 하얀 백지로 물들어 갔다. 모든 의식이 일시에 지워져 갔다. 전생(前生)이야 잊어 마땅하지만 그토록 고뇌해온 열여덟 인생조차 망각의 강물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잔노는 쓰러지는 목검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검추의 몸은 한 장 가랑잎처럼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 후 옆구리로 날아가 끼워졌다. 놀라울 만큼 강한 허공섭물의 수법이었다. 연후 잔노는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탄식을 터뜨렸다. "으음!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숱한 과오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 오늘의 내 과오는 후일 하늘의 분노를 사게 될지도 모른다. 검추 네놈은… 이 늙은이가 평생 보아온 최고의 인간보석이기 때문이다." 인간 보석! 하거늘 그의 운명은 왜 빛을 상실하고 무딘 암흑으로 빠져들어야 한단 말인가? 잔노는 한동안 짙은 고뇌의 표정으로 어둠의 방 안에 서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정신을 차린 듯 한 장의 종이를 가져다 빠르게 글을 휘갈겨 써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글씨체는 목검추의 필체와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날 찾지 마시오. 얼마간 강호를 유람하고 돌아오겠소.> 스스스……! 수백 명의 호위무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목검추의 처소에서 한 줄기 바람이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느닷없이 곁을 스치는 미풍에 무사들은 그저 서로를 잠시간 멀뚱멀뚱 쳐다봤을 뿐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