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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九 章 뜻밖의 정사(情事) "네놈은 노부가 누군 줄 아느냐?" 위지강은 씨익 웃었다. "살아갈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고 알고 있소." 음서생은 눈에서 살기를 폭출시켰다. "그 한마디로 네놈의 목숨은 끝났다. 참고로 말하지만 아직까지 노부가 맘을 먹고 죽이지 못한 인물은 없다는 것을 알아두거라." 위지강은 싱긋 웃었다. "귀하가 그 동안 운이 매우 좋았던 것뿐이오. 하지만 그 운도 오늘로써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음서생은 흉광 어린 시선으로 위지강을 노려보았다. "어린놈이 입심 하나는 제법이구나. 하지만 네놈이 뭘 믿고 그렇게 안하무인인지 시험해 보겠다." 음서생은 전신의 진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위지강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내가 믿는 건 바로 이것이오." 촹! 맑은 검명과 함께 찬란한 빛무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위지강이 빼든 검을 쳐다보던 음서생의 두 눈이 확 불거졌다. "그것은 천룡신검……!"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비스듬히 쳐든 채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귀하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알겠소?" "그렇다면 네놈은?" 음서생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렇소. 내가 바로 위지백, 그분의 아들이오. 귀하 또한 강호칠겁에 가담했던 자들 중 하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대를 염왕 앞으로 보내기 위해서요" 음서생의 안색이 썩은 돼지간처럼 흙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거마였다. 어느새 신색을 회복한 음서생은 잔인한 음소를 날렸다.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이 늘 찜찜했는데 잘되었다. 오늘 노부가 네놈을 죽여 영원히 위가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해주마." 후우우우웅! 가공할 선천강기가 음서생의 전신에서 피워 올랐다. "귀하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오. 그러니 최선을 다한 절초를 펼쳐야 할 거요." 위지강은 천지부동의 자세로 음서생을 응시했다. "헛소리는 저승에 가서 마저 나불대고 이제 그만 가거랏! 혈영마강(血影魔 )!" 음서생의 쌍장에서 시뻘건 홍광이 발출되었다. 홍광은 위지강을 향해 섬전같이 날아갔다. 두 가닥의 홍광이 위지강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초― 영― 비(初影飛)!" 위지강의 입에서 낭랑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천마대구식 중 제삼초(第三招)인 초영비가 펼쳐진 것이다. 검막이 위지강의 주위를 감싸며 발출된 일섬검광이 홍광을 꿰뚫어버렸다. "그… 그것은?" 혼비백산한 음서생이 경악성을 토했다. 퍼억! 순간 심장 부위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음서생은 빨랫줄처럼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가슴에는 사발 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린 채 시뻘건 선혈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콰쾅! 음서생의 몸은 벽을 허물고 날아가 전각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처… 천마… 대… 구식을……."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침내 음서생의 목이 힘없이 꺾이며 밑으로 툭 떨구어졌다. 이로서 천하의 공적으로 몰리면서까지 끈질기게 악행을 일삼던 음적 음서생은 무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위지강은 난감지경에 처해 있었다. 지금 매방군의 나신은 용광로같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이 상태로 방치한다면 그녀의 전신혈맥은 터져 버려 죽게 될 것이다. 위지강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매방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방군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신은 불에 달군 듯 시뻘겋게 변했고 맑고 투명하던 두 눈은 시뻘건 실핏줄이 죽죽 그어진 채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눈빛으로 위지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살리는 길은 단 한가지 방법뿐이다. 두 사람이 교합을 함으로서 매방군의 끓어오르는 욕화를 잠재우면 되는 것이다. 시간도 촉박했다. 빨리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매방군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 위지강은 잠시 허공에다 시선을 주었다. '후! 어찌한담?' 위지강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닌가! 우선 사람의 생명부터 살리고 보자.' 이윽고 결심을 굳힌 위지강은 지력을 날려 매방군의 점혈된 아혈과 마혈을 풀어주었다. "아… 나, 날… 좀… 어떻게 해줘요. 어서……." 매방군이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득달같이 위지강에게 안겨들었다. 마치 뼈 없는 연체동물같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이었다. 순간 싱그럽고 풋풋한 체향이 위지강의 콧속 가득 스며들었다. 그녀의 몸은 한마디로 불덩어리였다. 손을 데면 데일 것같이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던 것이다. 찌이익! 쫘악! 매방군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위지강의 옷을 찢어발겼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한가지!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 잔뜩 응축되어 있는 것을 시원하게 폭발시켜야 된다는 절박감뿐이었다. 매방군의 손길에 위지강은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혀와 혀가 만나고 서로의 타액이 교환되기도 했다. 신수궁의 금지옥엽과도 같은 매방군. 허나, 음약은 매방군 자신의 신분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할 만큼 강력했다. 지금 그녀는 단지 온몸에서 분출되는 욕망의 출구를 찾는 하나의 여체에 불과했다. 여체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위지강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들어갈 곳과 나올 곳이 극명하게 구분되어 있고, 휘어져 흐르다 다시 농염하게 부풀어오른 둔부의 곡선은 진정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군더더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아랫배와 그것을 감싸고 도는 세류요의 곡선은 차라리 환상적이었다. 위지강도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아무리 정심한 내공을 지녔다 해도 이런 상태에서 태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마침내 위지강의 손길이 매방군의 나신 곳곳을 샅샅이, 그리고 바람처럼 뜨겁게 훑고 지났다. 매방군은 내부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야릇한 열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음!"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퍼드득거리며 매방군은 입으로 연신 쾌음을 흘려내었다. 드디어 위지강이 매방군의 다리 사이에 들어서서 자세를 잡았다. "음……! 매방군은 젖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위지강에게 매달려 달뜬 교음을 토했다. 치켜올려졌던 위지강의 엉덩이가 힘차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아악!" 파과의 아픔이었다. 매방군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최초로 느낀 기분은 나른한 쾌감이 전신 구석구석을 누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생각해내었다. 자신은 현재 알몸인 상태였고, 하체 깊숙한 곳에서는 은은한 통증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탁자에 묵묵히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매방군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었다. "네놈을 능지처참하고 말리라." 매방군은 폭갈을 내지르며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위지강을 향해 매서운 장풍을 날렸다. 그녀는 위지강을 음서생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순결을 잃은 마당이니 그녀의 이지가 흐려진 것은 당연했다. 매방군은 음서생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리라 마음먹었다. 장력을 날리는 그녀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펑! 마침내 장력은 위지강의 등짝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위지강은 약간 움찔했을 뿐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매방군은 자신의 장력을 맞고도 끄덕도 하지 않는 위지강을 향해 재차 전력을 다한 쌍장을 날렸다. "미안하오, 어쩔 수가 없었소." 이때 이성을 잃은 그녀의 귓가로 나직하지만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음성은 그녀가 그토록 오매불망 그리던 그 누구의 음성과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은 매방군은 급히 장력을 회수하려 했다. 그제야 위지강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콰쾅! 꽈지직! "우욱!" 탁자가 부서져 나가고 위지강은 입에서 선혈을 뿜으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위지강의 얼굴을 확인한 매방군의 얼굴이 밀납처럼 새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지… 강……!" 매방군은 재빨리 위지강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려 위지강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오." 위지강은 죄책감으로 인해 어두워진 얼굴로 무겁게 말했다. 그러나 매방군은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님인가? 얼마나 몽매하던 순간이었던가? 비록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해도 이렇게 그가 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게 꿈은 아니죠……?"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위지강의 얼굴을 바라보는 매방군의 수줍은 태도는 정녕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말투가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되었는지 매방군은 양 볼을 살짝 붉어졌다. 중원에서 처음 위지강을 만났고 또 마지막으로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 다음에 만났을 때도 말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위지강은 빙그레 웃으며 매방군을 쳐다보았다. "그것 보시오, 그렇게 여자답게 말을 하니 더욱 아름다워 보이질 않소." 매방군은 귀밑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위지강은 탱탱하게 솟아 있는 그녀의 육봉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선 무엇을 좀 걸치겠소?" 위지강의 말에 매방군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알몸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맛! 몰라요." 그녀는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며 급히 안채로 뛰어갔다. 한편, 광장에서는 흑백쌍노와 호패웅의 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콰콰쾅! 콰쾅! 장력이 난무하고 권풍이 허공을 갈랐다. 군웅들은 세 사람의 격전을 긴장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흑백쌍노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호패웅의 무공이 강했던 것이다. 자신들과 이렇듯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무림에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호패웅은 혼자의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잘못하다간 많은 군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할지도 몰랐다. 이때 이들의 격전이 지루하게 이어지자 군웅들 가운데서 비영검(飛影劍) 형도추(兄道追)가 나섰다. "세 분은 잠깐만 싸움을 멈추시고 내 말을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어림없다. 내 오늘 저 어린놈을 쳐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갈겠다." 흑노는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계속 쌍장을 쳐냈다. "우리가 신수궁을 찾은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목적을 눈앞에 두고서 이렇듯 자중지란에 빠진다면 득이 될 게 뭐 있겠소?" 형도추는 멈추지 않고 계속 세 사람을 설득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높게 터져 나왔다. "옳소, 우선 보물의 행방이나 알아내고 싸우던지 합시다." "비영검의 말은 백 번 지당한 말씀이오.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우선 패왕별부의 지도부터 뺏읍시다." "나는 신수궁의 공주에게 볼일이 있으니 그녀를 만나야겠소." 콰콰쾅! 군웅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한차례 더 격돌한 세 사람의 신형이 비로소 멀찌감치 떨어졌다. 흑노는 송곳같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호패웅을 쏘아보았다. "놈, 잠시 목숨을 연장시켜주마. 하지만 패왕별부의 보물을 찾은 뒤에는 틀림없이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겠다." 호패웅은 커다란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옷소매로 스윽 문질렀다. "기대하고 있겠소이다." 그는 조금도 기죽지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형도추가 신수궁주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궁주, 우리에게 패왕별부의 지도만 넘겨준다면 더 이상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니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 바라오." "네놈이 지금 협박을 하는 것이냐?" 천수파파가 용두괴장을 들어 땅을 찍으며 노갈을 내질렀다. "협박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오. 만약 무력을 사용하게 한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신수궁은 무림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오." "흥!" 지금까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신수궁주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당신들이 여인들만 있는 곳이라 해서 신수궁을 얕잡아 보는 모양인데 설사 신수궁이 멸문을 당한다 해도 그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다." 백노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얘기는 끝났군. 우선 네년의 껍질을 벗긴 뒤에도 그렇게 도도한지 보겠다." 백노가 신형을 폭사시켜 신수궁주를 향해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흑노가 몸을 날리더니 천수파파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자 나머지 군웅들도 신수궁의 여인들을 향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와! 죽여라." "지도를 내놓아라." "공주는 어디 있느냐? 공주를 데려와라." 바야흐로 신수궁에도 피의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소." 위지강은 매방군을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탁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빤히 위지강을 바라보는 매방군의 눈에는 보석보다 영롱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진정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허나, 나는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가득 짊어진 몸이오. 이 짐을 다 덜어내고 난 뒤 그대를 다시 찾아오겠소." "천첩도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매방군이 위지강을 부르는 호칭부터 달라졌다. 위지강은 고개를 저었다. "강호는 험난한 곳이오. 그대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몸담고 있을 곳이 못되오. 내 말대로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매방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인연을 맺자마자 이별이라니……. 더구나 기약도 없는 이별이 아닌가? "그렇다면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만약 너무 오랫동안 약속을 어긴다면 제가 중원으로 찾아 나서겠어요." 위지강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 매방군이 가늘고 투명한 손가락을 위지강의 입술에 살짝 갖다대었다. "그 정도까지 양보하는 것도 저의 한계예요. 더 이상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매방군은 말을 하면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사내라면 넓은 가슴으로 감싸주고 싶을 그런 슬픈고 아름다운 미소를……. "알겠소. 그 문제는 그대의 생각대로 하시오."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죠?" "무엇을 말이오?" 매방군은 잠시 망설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연해월이라는 소저와는 어찌 되는 사이죠?" 위지강은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매방군은 위지강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잠시 후 위지강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내 첫번째 여자요." 매방군은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을 눈치챘어요. 하지만 천첩은 질투 따윈 하지 않아요. 후일 그녀를 만난다면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위지강의 눈길이 봄 햇살처럼 따뜻해졌다. "고맙소." 이때였다. "크아아악, 아아악!" 차차창! 콰콰쾅! 두 사람의 귀에도 광장에서 혈투를 벌이는 호통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매방군의 안색이 급변했다. "누군가 궁에 침입했어요." 위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질 않는가! "빨리 가봅시다." 이윽고 두 사람은 빠르게 방안을 빠져 나갔다. 광장 안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즐비했다. 군데군데 신수궁의 여인들과 군웅들이 한데 뒤엉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흑노의 공격은 악랄했다. 그는 신수궁주의 급소만을 골라서 장력을 날렸다. 여인들의 급소를 공격하는 짓은 무림인에겐 금기사항이었다. 그런데도 흑노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신수궁주의 몸놀림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이제 끝장을 볼 때가 된 것 같군!" "추잡한 늙은이, 본 궁주가 네놈의 두 손을 잘라버리겠다." 격분한 신수궁주가 분갈을 터트리며 쌍장을 홱 뒤집었다. 하얀 백색의 기류가 흑노의 전신을 후려쳐 들었다. 흑노는 열 손가락을 촤악 펼치며 신수궁주의 얼굴을 할퀴어 들었다. 그의 장기 중 하나인 십지멸혼조(十指滅魂爪)였다. 콰콰콰쾅! 십지멸혼조가 백색의 기류를 파훼하며 그대로 신수궁주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만약 이대로라면 신수궁주의 얼굴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 뻔했다. 고오오오오! 이때였다. 천지진동의 굉음을 토하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빠르기로 흑노를 향해 무엇인가 쏘아져 오는 것이 있었다. 흑노는 흠칫했다.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벌써 가공한 살기는 지척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수궁주를 공격하던 공세를 멈추며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퍼억! 순간 가슴이 불에 덴 듯 화끈해지며 그의 노구가 허공을 날았다. 무려 십 장 정도를 날아간 흑노는 가슴에서 피분수를 쏟아내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겨우 머리를 쳐든 흑노는 사색이 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이것은?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무영검… 처… 천마대구식 중 무영검이……!" 그러나 그의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흑노는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떨구었다. 장내에는 이 돌변한 사태로 이미 싸움이 중지된 상태였다. 신수궁의 여인들이나 군웅들은 이 경악스런 사태에 입을 딱 벌리고만 있었다. 격공살인(隔空殺人)은 그들 모두가 처음 목도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대전의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일남일녀가 그들 눈에 띄었다. 바로 위지강과 매방군이었다. 일순 신수궁주의 반짝이는 눈길이 위지강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대충 어떤 감이 잡혔다. 그것은 딸을 가진 어미로서의 직감력이었다. 위지강은 걸음을 멈춘 뒤 좌중을 둘러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패왕별부는 이미 폐쇄되었소. 또한 공주도 쾌차를 했으니 여러분들이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소이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우리가 불원천리 목숨을 걸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따위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다." 이때 흑노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 있던 백노가 서슬 퍼런 살소를 날렸다. "흐흐흐, 애송이놈! 살인을 했으니 목숨으로 보답을 해야 되지 않느냐?" 위지강은 천천히 광장의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선택은 자유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에서의 삶이 좋다고 했소. 목숨은 하나뿐이니 잘 생각하시오." 백노는 혼자의 힘으론 위지강을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이미 파악했는지라 군웅들을 선동했다. "저 애송이가 비록 천마대구식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인원이 많고 또한 무림에서 명성 깨나 날리고 있는 위인들이오." 장내가 죽음처럼 무거운 정적에 잠겼다. "만일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패왕별부의 지도뿐 아니라 천마비록도 얻을 수가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소?" 천마비록이라는 말이 나오자 군웅들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비영검이 백노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그렇소이다. 우리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오. 어차피 무인의 길이란 한쪽 발을 무덤 속에 넣고 살아가는 것 아니겠소이까?" 대중심리란 묘한 것이다. 부추기는 사람이 있으면 동조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싫든 좋든 간에 그들을 따라가고 마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상황이 꼭 그러했다. 군웅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들고선 위지강과 대치상태로 돌입했다. 위지강은 암울한 시선으로 그들을 휘둘러보았다. '어쩔 수가 없구나. 불필요한 살인은 하지 않으려 했건만…….' "내 말을 믿지 않으니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구려. 부디 저승에 가더라도 소생을 원망하지는 마시오." 위지강은 천룡신검을 빼들었다. "잘도 주절대는 네놈의 주둥아리부터 노부가 찢어주마." 백노가 득달같이 덮쳐들며 쌍장을 홱 뒤집었다. 그러자 비영검 역시 자신의 절초를 펼쳐내 위지강을 공격했다. 두 사람의 공격을 신호로 삼아 군웅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리며 자신들의 절학을 펼쳐내었다. "죽어랏!" "천마비록을 내놓아라." 우우우우웅! 위지강이 쳐든 천룡신검에서 무거운 검명이 울려나왔다. 파앗! 일순, 위지강은 군웅들을 향해 마주 도약해가며 천룡신검을 횡으로 그었다. 비록 단순해 보이는 초식이었으나 그 안에는 무려 사만사천 가지의 무궁한 변화가 숨어 있었다. 바로 경천지대삼결 중 제일초인 폭뢰낙수가 펼쳐진 것이다. "폭― 뢰― 낙― 수!" 검 끝에서 내뿜는 어마어마한 검강의 폭풍은 천라지망이 되어 군웅들을 가두며 그물처럼 휘어 감아버렸다. 화류류류류! 파츠츠츠츠! 너무나 엄청난 위지강의 초식에 군웅들은 넋이 달아날 정도로 경악하고 말았다. 하지만 넋만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검강의 천라지망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피해라, 이건 사술이다." 군웅들은 황급히 자신들의 내력을 끌어올려 강기막을 형성했다. 허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꽈꽈꽝! 수만 개의 바윗덩이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찢어지고 떨어진 육편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비산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이었다. 군웅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호패웅이었다. 그는 비급이나 보물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지강을 공격하는 데는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패웅은 지금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놀라고 있었다. '어찌 인간의 무공이 저토록 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눈앞의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듯 가공한 무공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호패웅은 천천히 위지강에게 다가갔다. 그는 위지강에게 포권을 하며 우렁차게 입을 열었다. "나는 호패웅이라 하오. 내 오늘에서야 비로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나보다 강한 자와 무공을 겨루어 보는 것이었소. 그러나 그대와는 대결을 하지 않을 생각이오." 위지강은 그의 투박한 어투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조용히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그대는 하늘이 내리신 무공을 지녔소. 허니, 내가 평생을 노력한다 해도 그대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이윽고 호패웅은 뒤로 돌아서서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위지강은 묵묵히 멀어져 가는 호패웅을 지켜보았다. 그는 호패웅이 왠지 호감이 가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투박한 말투에 사심 없는 순진무구함이 위지강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신수궁에 불어닥쳤던 일련의 사건들은 위지강의 손에 의해서 모두 일단락 되었다. 은은한 방향이 흐르는 내전이다. 중앙의 넓은 탁자에는 모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수궁주와 매방군, 그리고 위지강과 천수파파였다. 위지강을 바라보는 신수궁주의 눈빛에는 따스한 자애로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딸이 이렇듯 훌륭하고 강한 사내와 맺어졌으니 어느 어미가 좋아하질 않겠는가? "꼭 혼자 떠나야 하겠는가?" "그편이 소생이 활동하기에 편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신수궁주는 말끝을 흐리며 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나 매방군은 이런 신수궁주의 염려를 짐작한 듯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이제 두 번 다시는 앓아 눕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홋호호, 공주님께서 너무 달라지신 것 같아요. 혹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요?" 천수파파가 주름 가득한 노안에 미소를 머금고 매방군을 은근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파파, 놀리지 말아요. 좋은 일은 무슨……." 그러나 대답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목까지 붉게 물들고 말았다. "홋호호호,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지실까?" 매방군은 천수파파의 집요한 질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이때 위지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을 해보였다.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수궁주와 매방군은 매우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매방군의 커다란 두 눈엔 희뿌연 습막이 어렸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위지강을 향해 억지로 웃음 지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그들은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 * * 수려한 산세를 끼고 흐르는 넓은 강이다. 흐르는 강물에 일렁이는 아름다운 산 그림자, 간혹 햇빛을 받아 보석을 깔아놓은 듯 빛나는 물결. 때는 더없이 아름다운 오후, 강 한복판에는 한 척의 유람선이 유유히 떠가고 있었다. 유람선의 갑판에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술을 마시거나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또 어떤 이들은 난간에 기대어 강 양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깎아지른 절벽의 절경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백의를 산뜻하게 차려입고 유난히 돋보이는 남궁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뭉게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연해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대하는 연해월의 얼굴은 언제나 냉랭하기만 했다. 그러나 남궁사는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게 해주리라 굳게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연해월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남궁사는 손바닥을 콱 말아 쥐면서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연해월……!' 삘릴릴리… 삘릴릴리……! 이때 문득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남궁사는 흠칫했다. 남궁사뿐만이 아니었다. 갑판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삘릴릴리… 삘릴릴릴……! "이게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가락이 기막히게 구성진데 그래!" 저쪽 뱃머리의 난간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죽립의 사내가 있었다. 바로 위지강이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피리를 부는 위지강의 모습은 매우 우수에 젖은 분위기였다. 더구나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피리가락에 사람들은 모두 한껏 도취되어 있었다. 그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궁사도 위지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궁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훌륭한 솜씨다!' 이윽고 위지강은 무정유를 다 분 뒤 피리를 입에서 떼었다. 짝짝짝짝짝……! 감탄한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최고다!" "한 곡만 더 부탁합시다, 젊은이!" 사람들의 감탄사와 함께 어느 나이 지긋한 노인이 다시 한 번 부탁을 해왔다. 위지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피리를 품속에 넣으며 노인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불 줄 아는 곡이 하나뿐이라서……." 사실이 그랬다. 위지강이 유일하게 피리를 불 수 있는 곡은 무정유 한 곡이었다. 쨍그랑! 그때 위지강의 옆자리에 동전 두 개가 떨어졌다. 그는 떨어진 동전을 무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위지강의 뒤에는 서너 명의 덩치 큰 사내들이 서 있었다. 턱 버티고 선 모습이 그 자체로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위압적인 자세였다. 우두두둑! 그들 중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가 손마디를 꺾으며 강압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한 곡조 더 해봐. 들어보고 괜찮으면 그만큼 더 준다." 그러나 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풍각쟁이가 아니오." 사내의 솥뚜껑 만한 손이 위지강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흥! 돈이 싫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쾅!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일발의 격타음이 터지는가 싶더니, 사내는 뒤쪽으로 붕 떠서 날아갔다. 위지강의 강한 철권이 그의 턱에 작렬한 것이다. 사내의 면상은 볼썽사납게 우그러졌으며 그의 거대한 체구는 삼 장여를 날아간 뒤 갑판 바닥 위에서 나뒹굴었다. 그는 몽둥이로 얻어맞은 개구리처럼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런 뒤 마침내 두 눈을 까뒤집은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과 사내의 패거리들은 일시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입만 딱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좀처럼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는 남궁사도 이번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빠른 속도라니……. 내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놀란 기색을 추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저 거구를 일격에 잠재웠단 건가?" "행색은 남루하지만 엄청난 무공을 지닌 무림인인 모양이야." 그런 사람들 틈에서 위지강을 바라보며 야릇한 눈빛을 발산하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뚱뚱한 체격에 미간에는 콩알만한 점이 나 있었다. 점박이 사내는 품속에서 슬며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펴들었다. 바로 위지강과 풍천양의 초상화가 아닌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를 도로 품속에 갈무리하였다. '크크크! 천마대구식의 무공에 천추군림가의 후예라. 정보를 사고 파는 나 풍소(風蘇)는 그야말로 재신(財神)을 만난 격이군!'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뱃머리에 서 있는 위지강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는 멀리 자욱한 운무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산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산만 넘으면 하북성!' 위지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다려라, 연해월. 내가 가고 있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석양 속으로 유람선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