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멍하니 문간에 앉아 있던 왕룽은 이렇게 앉아 있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집안에서 그대로 앉아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로 말라만 들어서 허리끈을 졸라 매야 하는 몸에도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우 인생의 봄을 맞이한 청춘을 그대로 무정한 운명에게 내맡기기는 정말 싫었다. 그는 요즈음 형용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이따금 미친 사람 모양으로 마당에 뛰어 나와서 한결같이 푸르고 맑은 구름 한 덩이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하고 무정한 하늘을 향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하늘아!" 하고 아무렇게나 되라는 듯 무엄하게 욕을 퍼부었으나 다음 순간 천벌이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화가 치밀어 원망스러운 듯이 소리를 질렀다. '네 마음대로 해라. 천벌을 받기로니 이보다 더하겠어!' 어느 날 그는 굶주려서 후들거리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사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여신령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의 얼굴에 마음껏 침을 뱉었다. 두 지신 앞에 향을 피워 본 지도 이미 오랜 일이다. 이 몇 달 동안 어느 한 사람도 향을 피워 올리지 않았다. 붉은 종이로 만든 옷이 낡아져서 흙살이 보이건만 어디 바람이 부느냐는 격으로 그대로 앉아만 있다. 왕룽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지신을 저주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무거운 몸을 그대로 침대에 던졌다. 모두 누워만 있었다. 일어난들 별도리가 없었다. 누워 있으면 간혹 잠이 오기도 해서 그 동안만이라도 배고픔을 잊을 수 있다. 그들은 말린 옥수수대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또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말라 버린 겨울 들판을 헤매면서 풀뿌리까지 캐어 먹었다. 동물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소나 당나귀는 커녕 새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의 배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불룩했다. 마을 거리에서는 나와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하나도 구경할 수 없었다. 왕룽의 두 아이도 겨우 문턱까지 기어 나와 햇볕을 쬘 뿐이었다. 무정한 태양은 한결같이 내리 쬐었다. 토실토실하던 그들의 몸뚱이는 여윌 대로 여위어서 닭 갈비처럼 뼈들이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집애는 앉을 때가 됐는데됴 제대로 앉지 못하고 낡은 포대기에 싸여서 몇 시간이고 잠만 잤다. 처음엔 온 집안이 떠나가게 울어 대더니 이젠 힘없이 드러누워 무얼 입에 대어 주면 간신히 빨아 먹을 뿐 울지도 않았다. 얼굴엔 뼈만 남았다. 입은 마치 늙은이 모양으로 언저리가 오므라들고 입술도 파랬다. 움푹 패인 힘 없는 눈으로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되어도 죽지 않는 생명은 부모의 심금을 울렸다. 만약에 다른 아이들이 자랄 때처럼 토실토실하고 생기가 있었더라면 왕룽은 딸 아이인만큼 이렇게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기막히는 일을 생각해서 때때로 왕룽은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것 같으니, 불쌍한 아기야." 한 번은 이 딸이 이빨도 없는 잇몸을 보이면서 방긋 웃는 것을 본 왕룽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왕룽은 앙상해진 그의 손으로 아기의 가느다란 발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웃옷을 헤치고 아이를 품안에 안고 몸을 덥혀 주면서 문턱에 걸터 앉아서 메마른 들판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늙은이는 누구보다도 잘 지냈다. 무엇이든 먹을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는 안 주더라도 늙은이에겐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왕룽을 효자라고 생각했다. 왕룽 자신도 그렇게 자부했다. 그는 살을 떼어서라도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었다. 늙은이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있었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그래서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문턱까지 기어나올 기력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너그러웠다. 어느 날 노인은 마치 깨진 대통에서 간신히 불려 나오는 바람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다 더 심한 해가 있었느니라. 그 때는 얼마나 혹심했던지 아이를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에선 그런 일은 없어요." 하고 왕룽은 이 말이 무서워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는 사람의 그림자 같지도 않은 앙상한 이웃 칭 서방이 왕룽을 찾아왔다. 흙같이 검게 마른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 "성 안에선 개까지 모조리 다 잡아 먹었대. 말이거나 새나 동물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잡아 먹었대. 우리도 농사 지을 소든, 풀이든, 나무껍질이든, 이젠 다 먹어 버렸으니 앞으로 무얼 먹고 살지." 왕룽은 할 말을 잃어 머리만 흔들었다. 가슴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딸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는 아이를 애처로운 듯이 내려다 보았다. 두 눈이 마주칠 때면 아이 얼굴에는 방긋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칭 서방이 해골 같은 얼굴로 다가서며 속삭였다. "마을에선 벌써 사람 고기를 먹고 있어. 자네 삼촌도 숙모도 먹었대. 그 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온 마을이 다 아는 터인데 그래도 살아서 나다니는 힘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일이지." 왕룽은 갑자기 주춤했다. 칭 서방의 눈에 어려 있는 살기를 보자 왕룽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마치 앞으로 닥쳐올 어떤 위험을 피하려는 듯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 이 마을을 떠나세." 그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남방으로 가세. 여기선 다 굶어 죽을 테니. 설마 아무리 하늘이 무심하다 해도 이 한(漢)족을 다 죽이진 못할 테니까." 칭 서방은 서글픈 어조로 왕룽에게 힘없이 말했다. "아, 자네는 젊으니까. 난 자네보다 나이도 많고 마누라도 늙었네. 자식이라곤 쓸모 없는 계집애 뿐이니 나는 죽어도 한이 없으니까 여기서 죽겠네." "그런 말 말게. 자네는 나보다 팔자가 좋으이. 나는 늙으신 노부가 계시고 아이가 셋이나 된단 말이야, 그 뿐인가? 또 뱃속에도 하나 더 들어 있으니. 아무튼 남방으로 안 가고 여기 있다가는 미친 개 모양으로 서로 잡아먹고 먹히게 될 것 같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왕룽은 자기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아내 오란을 불렀다. 오란은 음식거리도 없고 부엌에 불을 지필 나무조차 없기 때문에 언제나 침대에 누워 지냈다. "여보, 여보, 우리 남방으로 가야겠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이 몇 달 동안에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강하고 힘찬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그의 얼굴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늙은이도 침실에서 비실거리면서 나오고 오란도 간신히 일어나서 문설주를 잡으며 말했다. "그럽시다. 죽더라도 걷다가 죽게." 임신한 아내의 배는 마치 허리에 혹이 달린 것 같았다. 살이 빠져서 광대뼈가 바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아요. 그때까진 애를 낳을 것 같아요. 배가 꿈틀거리는 모양이......" "그럼 내일 떠나기로 하지." 하고 왕룽은 대답했다. 왕룽은 아내의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서 느낀 것보다 한층 더 심한 쓰라림을 느꼈다. 저렇게까지 굶주린 아내가 홀몸이 아님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했다. '가엾은 여편네...... 그래서 어떻게 걸을 셈이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때까지 문턱에 기대어 서 있는 칭 서방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자네 집에 무엇이든 있거든 한 줌이라도 좋으니 불쌍한 두 목숨을 살리는 셈치고 나누어 주게. 그러면 저번날 일도 잊어 버리겠네.' 칭 서방은 무안한 얼굴로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자네에게 항상 미안스러워 맘이 편할 날이 없었네. 자네 삼촌이 공연히 자네 집에 곡식이 많이 있다고 해서 그런 짓을 했어. 내 진정 하느님에게 맹세하지만 우리 집 문앞 돌 밑에 팥을 조금 묻어 둔 것밖엔 없네. 그건 나와 내 아내가 숨겨둔 것인데 우리들이 마지막 죽을 때 그래도 뱃속에 무얼 넣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남겨둔 것이지만 한줌 나눠 줌세. 그리고 내일 남방으로 떠날테면 떠나게. 우리 식구들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여기에 남아 있겠네. 나는 나이도 먹었고 아들도 없으니 죽든 살든 상관없네.'" 칭 서방은 집에 돌아갔다 오더니 이윽고 팥 두 줌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왔다. 흙에 묻어 두었던 탓인지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먹을 것을 보자 아이들은 왕룽에게 달려 들었고 늙은이도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왕룽은 이때만은 그들을 뿌리치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오란은 아무 것도 먹질 않으면 해산하다가 죽고 말 것 같아서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한 알씩 먹었다. 왕룽은 몇 알의 팥을 손아귀에 숨겨 두곤 입에 넣어서 부드럽게 씹어 어린 딸아이 입에 옮겨 주었다. 조그마한 입술이 오물오물하는 것을 보니 자기가 먹는 것같이 흡족했다. 그날 밤 왕룽은 가운뎃방에서 밤을 새웠다. 두 아이는 늙은이와 같이 자고 또 한방에선 아내가 해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맏아들을 낳을 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까지 굶어서 쇠약해져도 오란은 해산하는데 남편을 못 오게 했다. 오란은 헌 대야를 방안에 들여다 놓고 기어다니면서라도 손수 뒤치다꺼리를 다 하는 것이다. 왕룽은 몇 번이나 들어서 익숙해진 아이 우는 소리만 나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사내건 게집애건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또 한 식구가 늘어나는 일만이 문제인 것이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으면 태어나서 굶어 죽기보다 불쌍하지나 않지.' 하고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런 때에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울음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온 집안은 또 무거운 정적에 잠기었다. 요즈음엔 어느 집이나 이렇게 조용한 것이다. 모두들 죽기만 기다리면서 누워 있기 때문이다. 왕룽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왕룽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오란이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문틈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기 소리에 약간 기운을 얻었다. "여보, 괜찮우?"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에 아내가 죽지나 않았나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대답은 없으나 약간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내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아내의 한숨 섞인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침대 위에 초라하게 누워 있었다. 얼마나 여위었는지 덮고 있는 이불조차 거의 평평했다. 아내는 어쩐 일인지 혼자 누워 있었다. "아이는 어떻게 했어?" 하고 왕룽은 물었다. 오란은 이불 위로 간신히 손을 뻗어 가리켰다. 마룻바닥에 죽은 갓난 아이가 누워 있었다. "죽었나?" 그는 문득 소리를 놓여 물었다. "죽었어요." 아내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왕룽은 몸을 굽혀 한 줌밖에 안되는 갓난애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말라서 한 줌의 뼈와 가죽뿐인 계집애였다. "방금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살았는 줄 알았더니......" 하고 말하려다가 왕룽은 문득 아내를 쳐다보았다. 오란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잿빛 같았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다. 극도의 고통을 참아낸 그녀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니 그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이 몇 달 동안 왕룽의 고통이라야 자기 한 몸 뿐이었지만 아내는 뱃속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식을 살려 보려고 얼마나 죽을 애를 썼을 것인가! 가슴을 치는 것처럼 아팠다.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 시체를 봉당으로 옮긴 다음 거적을 찾아서 쌌다. 동그란 머리가 이리저리 달랑거리고 목에는 두 곳에나 검은 상처가 있었다. 시체를 거적에 싼 그는 걸을 수 있는 한 집에서 멀리 걸어가서 오래된 무덤이 있는 데까지 아기와 시체를 옮겼다. 그곳은 왕룽의 서편 밭을 따라 있는 언덕의 중턱으로 임자 없는 무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곳이다. 그가 시체를 땅에 내려놓자마자 난데 없이 늑대 같은 개 한 마리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왕룽이 돌멩이를 집어 던져 그 여윈 옆구리를 맞혔으나 그 개는 몇 발자국 물러섰을 뿐이었다. 한 동안 서있던 왕룽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해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그곳을 떠나 버렸다. "이대로 두는 수밖에 없구나."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왕룽은 이때처럼 절망스런 적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한결같이 변함없는 푸른 창공에 태양이 떠오르자 왕룽은 어린 자식과 쇠잔한 아내와 늙은 아버지를 이끌고 집을 떠날 결심을 했던 어제가 꿈만 같았다. 아무리 풍요한 좋은 땅이 남방에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나 처자가 어떻게 몇백 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또 과연 남방으로 간다면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이 있을까? 이 구릿빛 나는 가문 하늘이 끝없이 남방까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힘껏 걷기는 걸어도 여기보다 더 흉년이 심한 구경을 할 뿐이고 마침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낯익은 고향에서 죽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이렇게 용기를 잃어버린 그는 대문 앞에 앉아서 지금까지 먹을 양식이며 땔나무며 열심히 일만 하면 무엇이나 얻을 수 있었던 그의 전답을 바라보았다. 그에겐 벌써 동전 한 닢도 남은 게 없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곡식을 가진 사람은 부자들에게만 판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금의 그에겐 아무 흥미도 없는 일이었다. 성안에만 간다면 먹을 것을 거저 준대도 성안까지 걸어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극도로 절망에 잠겨 이젠 배고픈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배고픈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처음 뿐이었다. 그때가 지난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뱃속에서는 그렇게 절박한 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밭의 흙을 파다가 아이들에게 먹였으나 자기는 먹지 않았다. 이 흙을 물에 풀어서 그들은 며칠간의 요기를 했다. '관음보살님의 흙' 이란 이름을 가진 그 흙에는 약간의 영양분이 있다고 들었다. 이 흙으로 언제까지나 생명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얼마 동안은 배고픔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헛배 부른 배를 메울 수가 있었다. 왕룽은 그동안 누가 뭐라든 먹지 않고 오란이 소중하게 간직해 둔 팥에 손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따금 한 알씩 깨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그 후 또 며칠이 지났다. 문턱에 앉아 있던 왕룽은 만사를 단념하고 침대에 누워 죽음의 즐거움을 꿈같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밭길을 건너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다." 하고 삼촌은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불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서면서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잘 지내는구나. 네 아버지는...... 우리 형님도 잘 계시냐?" 왕룽은 삼촌을 쳐다보았다. 여위기는 했으나 자기처럼 굶주린 것 같지는 않았다. 왕룽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생명력은 눈앞에 선 삼촌에 대한 분노로 불같이 타올랐다. "숙부님은 어떻게 지내왔어요. 어떻게 먹고 살아요?" 하고 그는 무거운 혀를 간신히 움직여 가며 이렇게 물었다. 그는 옆에 함께 서 있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체면도 잊었다. 다만 그는 아직도 뼈에 살이 붙어 있는 그의 삼촌만을 노려보았다. 눈이 휘둥그래진 삼촌은 손을 들어 자기 집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어떻게 먹느냐고? 내 집에 와 봐라. 네가 잘 알다시피 그렇게 살 쪘던 숙모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마치 빨래를 대나무에 널어 놓은 것 같다. 아이놈도 넷밖에 안 남았다. 작은놈 셋은 죽었다, 죽었어. 이 삼촌도 네가 보는 대로 이꼴 이 모양이 아니냐!' 삼촌은 가만히 소매 끝으로 두 눈을 닦았다. "그렇지만 숙부님은 무엇이든 자셨지요?' 왕룽은 바보처럼 거듭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큰집 일만 걱정했다. 너나 네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말야." 하고 그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 증거를 보이러 왔다. 그건 다름 아니고 여기 함께 온 양반들이 성안에서 사시는데 마을의 땅을 사신단다. 그래서 나는 우선 네 땅을 사시게 하여 네 목숨을 연명하게 해 보려고 왔단 말이다. 나는 다른 집보다 큰집 것을 먼저 사게 해 보려고 이렇게 온 거란 말야. 뭐니뭐니 해도 목숨이 제일 소중하잖니." 이렇게 말을 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며 누더기 같은 두루마기를 펄렁거리고 팔짱을 꼈다. 그러나 왕룽은 눈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지도 않았고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이 성안에서 온 것은 틀림없었다. 때묻은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손은 부드러웠고 손톱을 길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 같았고 기운도 나는 모양이었다. 왕룽은 갑자기 그들에 대해 알 수 없는 증오를 느꼈다. 자기의 자식들은 흙까지 파먹는데 그들은 저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며 이제는 이 궁지에 몰린 그에게서 땅을 헐값에 빼앗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해골같이 뼈만 남은 얼굴에 분기를 돋우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난 땅을 안 팔겠소." 그는 한마디로 쏘아붙였다. 삼촌은 또 앞으로 나섰다. 이 때 왕룽의 두 어린 자식이 기어나왔다. 아이들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마치 어린애 모양으로 기어다녔다. "이 애가 네 아이냐?" 삼촌은 놀란 듯이 물었다. "지난 여름에 내가 동전을 준 그 토실토실하던 놈이란 말이냐?" 그들의 눈은 모두 아이에게로 쏠렸다. 이 몇 달 동안에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 왕룽은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목이 메이는 듯 눈물이 볼을 따라 좌르르 흘러내렸다. "값은 얼마나 주겠소?" 마침내 왕룽은 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 아이만은 먹여 살려야 한다. 자신과 아내는 굴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가 죽을 수 있으나 아버지와 아이들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안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한쪽 눈이 푹 꺼진 사내가 다가서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이들이 불쌍하니까, 기왕이면 누구보다 좋은 값을 쳐 드리죠." 하고 잠시 사이를 두더니 곧 칼로 끊듯이 잘라 말했다. "1정보에 동전 백 닢 드리죠." 왕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어요? 그건 거저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오. 나는 그 스무 곱이나 주고 샀소." "그렇지만 당신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산 것은 아니겠죠." 하고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여위었으며 콧날만 우뚝했으나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리가 크고 야비했다. 왕룽은 새삼스럽게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왕룽을 얕보는 태도였다. 굶주린 아이들과 늙은 아버지를 가졌으니 그들의 말대로 땅을 팔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자 왕룽은 땅을 팔려던 약해졌던 마음이 갑자기 무서운 분노로 일변했다. 그는 마치 사나운 개가 도둑에게 달려들 듯 벌떡 일어섰다. "죽어도 땅은 안 팔겠소. 난 이 땅의 흙을 파서 자식을 먹여 살리겠소. 그러다가 아이들이 죽으면 이 땅에 묻겠소. 차라리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아버지나 우리 가족 모두를 먹여 살려 주던 이 땅에서 죽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곤 악을 쓰며 울었다. 전신에 용솟음치던 분노가 사라지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성안에서 온 사람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았고 삼촌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왕룽의 말을 마치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여기고 화가 가라앉기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때 오란이 문간으로 나왔다. 오란은 언제나 다름없는 그 묵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땅은 안 팔아요. 팔아 버리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농사 지을 땅이 없어지니까요. 그러나 탁자하고 침대 두 개, 이불, 의자 두 개, 부엌에 있는 솥을 팔겠어요. 그렇지만 쇠스랑과 괭이나 호미 같은 농기구는 안 팔아요. 아무튼 땅은 안 팔겠어요." 오란의 침착한 이 말은 왕룽이 고함을 친 것보다 더한층 굳은 결심을 보여 주었다. 삼촌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정말 남방에 가려구?' 잠시 후 애꾸눈이 그들에게 눈짓을 하더니 한동안 수군댔다. 이윽고 그는 오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따위 물건이야 땔 나무밖에 더 되겠소. 전부 합해서 은전 두 푼에 판다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겠소." 그는 경멸하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으나 오란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 값이라면 침대 한 개 값밖에 안됩니다만 돈을 가지셨거든 곧 주십시오. 물건은 지금 가져가면 되니까." 그 사람은 허리춤에서 은전을 꺼내 오란이 내민 손 위에 놓았다. 세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 가서 탁자, 의자, 침대, 이불 등을 꺼내고 부엌에선 솥을 들어 냈다. 늙은이 방에서 물건을 들어 낼 때 삼촌은 밖으로 나가서 기다렸다. 형과 얼굴을 대하기 싫었고 늙은이를 마룻바닥에 눕히고 침대를 꺼내는 꼴은 그래도 차마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전부를 들어 내고 두개의 쇠스랑과 두 자루의 괭이와 호미만이 가운뎃방 모서리에 남게 되었을 때 오란은 남편에게 말했다. "이 은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남방으로 갑시다. 이대로 있다간 대들보까지 팔아먹게 돼요. 나중엔 들어갈 움막조차 없어지겠어요.' "그래, 떠나세, 떠나......" 왕룽은 허공에 뜬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밭을 건너서 멀리 사라지는 성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 땅은 있어------ 그래도 우리 땅만은 아직 가지고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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