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 [무극대도] 1권 제8장 완벽한 승리 ① 백 명의 마검대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불과 삼십이 명. 그 중 온 전한 몸을 유지한 무사들은 겨우 이십 명 정도. 작은 방파 하나쯤은 하루만에 없앨 수 있는 힘을 가진 마검대가 단 한 명에게 처참하게 당하였다.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 해가 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검문의 위신이 땅에 추락하기 일보직 전이었다. 게다가 검문주인 혼례 날은 점점 다가오고……. 옷에 먼지 한 홀 묻히기 싫어서라기보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푼 몸집 때문에 이런 깊은 산 속까지 여덟 명이나 되는 장정이 메는 팔인교(八人轎)를 타고 와야 했다. 검문의 삼당 중 마령당주(魔領黨主) 강백호(姜白虎). 그는 강호에서 탈명쾌검(奪命快劍)이라 불리던 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뚱뚱한 몸집 때문에 쾌검이라는 말이 좀 부끄러워 진 그는 숨을 씩씩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회의인, 즉 구환금도(九環金刀) 두진(杜 眞)이 급히 허리를 꺾었다. 그는 마령당의 부당주였다. "예." 두진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이는 머리로 외우지 못할 만큼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강백호는 솥뚜껑 만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뭔 자랑이라고 떠들려고 그래? 이리 내놔! 내가 직접 보지." 강백호의 말처럼 자랑이 아니라 수치다. 자신의 입으로 수치의 수 치를 읽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진은 망설임 없이 종이를 건넸고, 종이로 시선을 돌린 강백호의 얼굴이 굳어지며 절로 한숨 어린 탄 식이 나왔다. "이렇게 피해가 많다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사망: 첫번째에서 혈검대 십칠. 네 번째에서 혈검대 구, 마령당 이십오. 부상: 두 번째에서 혈검대 십, 마령당 칠. 세 번째에서 혈검대 십사, 마령당 십사. 사망 사십일, 부상 칠십. 현재 전투 능력이 있는 인원: 혈검대 칠십. 마령당 백 오십사.> 엄청난 숫자였다. 처음 출발할 때, 마령당 이백에 혈검대 백이십이 출동했다. 이는 검문의 일당일대가 총출동한 것이다. 그런데 녹산영웅문의 코빼기도 보기 전에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 은 것이다. 게다가 부상자가 이리 많다니! 사망자는 솔직히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부상자는 다르지 않은가. 부상을 당한 동료를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니, 부상자들은 동료에게 업히거나 혹은 들것에 뉘여 이 곳까지 데려왔다. 강백호의 눈이 후미(後尾)로 향하는 순간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개새끼들! 일부러 부상만 입혔어.' 이 모든 것은 기관장치라고도 할 수 없는 방법에 당했다. 아주 원 시적인, 사냥꾼들이 맹수를 잡을 때나 사용한다는 방법들. 발목에 흰 천을 칭칭 감고 연신 신음을 흘리는 이들은 땅위를 스 치듯 날아오던 수십 개의 반월형 병기에 발목이 잘린 것이 분명했 다. 그리고 온몸에 흰 천을 두르고 있는 부상자들은 투석(投石)에 당한 것이다. 깊이 판 땅을 교묘하게 위장한 함정에 빠져 꼬치가 되어 죽었고, 나뭇가지를 창같이 날카롭게 만든 것에 역시 꼬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십 장 길이밖에 안되는 사곡을 뻔히 보면서도 단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 은 뱀들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와락 움켜진 손에서 풀썩 연기가 솟구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 쳐 자신도 모르게 내가진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부당주! 혈검대주!" 앞에 있는 두진이 대답하는 순간, "예!" 뒤쪽에서 높은 고음(高音)을 가진 목소리가 들리며 한 청년이 득 달같이 나타났다. 시뻘건 장포를 걸친, 매부리코에 날카로운 인상 을 가진 그는 혈검대주 장수길(長水吉)이었다. 강백호는 싸늘한 안광(眼光)을 뿜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의 동태는?" 누구라고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있었다. 부름이 있기 전까지 사곡 입구를 포진하고 있던 장수길이 대답했 다. "가끔 한 놈씩 나타나 약만 올리고 있습니다." "약을 올리다니……? 어떻게 말이냐?" "그건, 저……." 이번에는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어찌 그 장면을 설명할 수가 있 단 말인가? 엉덩이를 까 내리고 춤을 추면서 '에라! 똥이나 빨아 먹어라!' 하는 그 장면을.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 부하 몇 놈을 뱀의 먹이로 만들기로 했지 만 지금은 만성이 됐는지 똑같은 방법으로 되돌려 주는 여유까지 생겼고, 이에 시들해진 녹산영웅문에서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은 실정이었다. 대체 어떤 놀림을 받았는지 모르나 가히 좋은 장면은 아니라는 느 낌을 받은 강백호는 손을 저었다. "알았다. 그건 그렇고… 도저히 들어갈 방법은 없는 거냐?" "몇 번 시도는 해봤으나 워낙 맹독을 가진 뱀들이라… 실패했습니 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큰일이군. 날도 어두워지고 건량도 다 떨어져 가는데……." 그때였다. 두진이 귀가 번쩍 뜨일 계책을 내놓은 것은, "횃불로 뱀들을 쫓으면……."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② "저 자식들도 어지간히 멍청해. 이제야 화공(火攻)을 생각하다니 말야." 팽후의 말에 단호삼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한 손에 불을 들고 뱀을 쫓으며 들어오다니요. 저러다 화살을 퍼부으면 어떻게 피할는지… 원." 팽후의 고개가 돌려졌다. "직접 지시하지 그러나? 왜 항상 내가 말을 해야 하지?" 단호삼은 그게 무슨 말씀이냐는 듯 짐짓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문주가 아니잖소. 하니 문주께서 하시죠." 너스레를 떠는 단호삼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팽후는 한숨을 쉬었다. "문주 시켜주련?" 단호삼은 히죽 웃었다. "좋지요. 하지만 속이 뒤집혀서 어떻게 살려우?" "떠나면 되지." "하지만 예전같이 자유롭지 않을 텐데요. 아마 이름도 숨겨야 할 것이고……." "숨기면 되지. 그까짓 게 무슨 대수냐." 단호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얼굴은요?" 순간 팽후의 얼굴이 소리 없이 구겨졌다. "제기랄… 떠기랄!" 빙글 몸을 돌린 그는 신경질적인 음성을 토했다. "궁수부(弓手夫), 준비됐나?" 대답은 즉각 들려왔다. "완벽합니다, 문주님." 화끈한 대답에 팽후의 얼굴이 마음이 펴지듯 펴졌다. 그는 손을 번쩍 들었다. 녹산영웅문주가 된 후 생긴 버릇이었다. 이럴 때는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를 거느린 대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 다. "전원 위치로!" 쏴아아―! 비가 쏟아지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어찌 비가 위에서 아래로 쏟 아지지 않고 수평으로 날아올 수가 있단 말인가. 선두(先頭)에서 횃불을 휘저으며 나아가고 있던 혈검대주 장수길 은 심장이 멈추는 듯이 놀랐다. 얼마나 놀랐던지 입 밖까지 튀어 나오던 욕마저 삼켜버린 그는 풀쩍 허공으로 솟구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피해라! 화살이다―!" 피하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장정 열 명이 어깨를 맞대고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곳에서 옆에는 쉭쉭거리며 이지창(二指 槍) 같은 혓바닥을 내미는 독사 떼가 득실거리고, 뒤에서는 동료 들이 쿠역쿠역 밀려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화살이라니! 이런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살고자 하는 본능이 먼저였다. "으아악! 난 살아야 돼!" "너만 살고 싶나? 나는 더 살고 싶다! 비켜!" 살고 싶다는데 누가 말릴쏘냐? 하지만 말리려는 사람이 있었다. 장수길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화살에 맞아 죽기 전에 밟혀 죽고, 좀 덜떨어진 놈 들은 바위 뒤에 숨으려다 뱀에게 물려 죽고, 걸음아, 나 살리라고 도망치던 놈들은 팽개치는 횃불에 불타 죽을 테니까. 장수길의 머리가 좋아 이런 상황을 미리 추리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런 일들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놈의 시끼들!" 녹산영웅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도망갈 길을 모두 차단한 수하들 에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기어코 욕을 하고만 그는 빙글 몸을 돌리며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야― 이, 병신들아! 그렇게 도망가면 어떡해! 화살을 막으며 질 서정연하게 물러서야지. 나처럼 말이다!!" 쏴아아! 하늘을 새까맣게 만든 화살이 드디어 목전(目前)까지 밀어닥쳤다. 생각할 것도 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풍차처럼 돌렸다. 파파팟―! 화살이 사정없이 부딪혔다. 다행히 내공이 실리지 않았는지 자신이 만든 검막을 뚫고 들어오 는 것은 없었다. 또한 장수길의 눈물겨운 솔선수범으로 정신을 차 린 몇몇이 똑같이 행동했고, 금세 화살이 발밑에 수북이 쌓였다. 그러나 그들은 절세고수가 아니었다. "큭!" "아악!" 비명이 터지며 혈검대원들이 죽어 가면, 그 자리를 메우는 무사들 또한 혈검대원들이었다. 혈검대가 선두에 섰다가 지금은 후미가 된 까닭이었다. 수족 같은 부하들의 속절없는 죽음에 장수길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다음 공격에서도 선두에 서라면… 차라리 항복하고 말겠 어!" 힘없는 설움을 만끽한 자의 뼛골 시린 외침이었다. ③ '문주님께 혼례 선물로 드리려 했는데…….' 도착 즉시 작살을 내고 올 것이다,라고 큰소리 땅땅! 쳐놓은 터라 회군(回軍)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부들부들! 살 떨림으로 안되었던지 강백호는 교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밥통 같은 놈들아! 저런 거도 하나 못 뚫어! 그러고도 너희가 대(大)검문의 무사라고 할 수가 있어, 엉?!" 두진과 장수길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생각도 못하라는 법은 없다. 특히 변변한 싸움도 못해 보고 혈검대원 칠 할을 잃은 장수길의 주둥이는 연신 꼬무락 거리고 있었다. '네가 직접 해봐라! 살이 쭉쭉 빠질걸.' 이때 두진도 불만이 있는지 뭐라고 쫑알거렸다. "그러게 벽력탄(霹靂彈)을 가져오자고 하니까, 안 가져오더니만 꼴 좋다." 강백호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원래 칭찬은 잘 들리지 않지만, 욕은 아무리 작게 말해도 이상하게 잘 들리는 법 이다. "뭐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들었나?' 두진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일단은 버텨야만 하였다. 혹시 알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 갈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변죽을 울렸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래?" 순간 강백호의 눈에서 이상야릇한 빛이 뿜어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의 고개가 돌려졌다. "장대주, 자네도 못 들었는가?" 고자질하고픈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후일 닥쳐올 보복이 무서워 어떡할까 하고 망설이는 사이 강백호가 그의 갈등을 완전 히 해소시켜 주었다. "말하면 이번 공격 때는 혈검대를 후미로 빼주겠다." 깎아지른 천장단애(天仗斷崖)에 시커먼 연기가 가득했다. 코를 찌 르는 송진 냄새 속에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트는 뱀들의 살 타는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소나무에서 관솔을 채취해 사곡을 태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뱀들이 불길에 쫓겨 곡 안으로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 사왕 지다생과 땅꾼들이 부는 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 다. 삐… 삐익! 오도가도 못한 뱀들은 대책 없이 통구이가 되고, 후끈한 열기에 얼굴이 벌개진 단호삼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았네요." "그러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팽후는 문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봤자 죽는 것은 매일반 아니겠나." 계곡 위에 숨겨둔 벽력탄을 믿고 하는 소리였다. 거금을 주고 구 입한 벽력탄은 사곡을 완전히 붕괴시킬 정도의 많은 양이다. "옳은 말씀이오." 무심결에 대답한 단호삼은 어두운 얼굴로 자신에게 하듯 말을 던 졌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군요." '이게 다 자네가 저지른 짓 아닌가?'라고 하려던 팽후는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힐끗 본 그가 진실로 마음 아파하는 듯했기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는 다만 먹고살기 위해 비적질을 했지만 인명을 해치지는 않았네. 그런데 놈들은 체면 때문에 우리 들을 죽이려 하니, 아주 나쁜 놈들이야." "……." 이에 단호삼이 아무 말을 않자, 팽후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사곡을 노려보는 녹산영웅문도들의 코밑이 그을음으로 인해 더 이상 코로 호흡하기가 곤란할 때였다. "죽이자!" "그냥 죽이지 말고 밟아 죽이자!" 살벌한 말씨와 함께 회의인들이 물밀 듯이 사곡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선두에는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인간의 형상을 잃은 구환금도 두 진이 체면을 만회하려는 듯 아홉 개의 고리가 달린 구환도(九環 刀)을 허공에다 휘두르며 제일 먼저 달려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황금(黃金)으로 만든 고리가 흐릿한 연기 속에서 반 짝거렸다. 번쩍거림을 노려보던 팽후는, "어때? 지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뛰어난 수하를 모신 비애랄까? 혼자 결정해도 될 일을 항상 단호 삼에게 묻고 있었다. 내공을 돋구어 사곡을 샅샅이 살피던 단호삼은 지체없이 입을 열 었다. "부상자까지 들어온 것을 보니 얼추 시간이 된 것 같군요." "좋았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해 몹시 흡족해지자 크게 고개를 끄덕인 팽후 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서황에게 시선을 돌렸 다. "부문주, 신호를 보내게." "예!" 서황은 신이 난 얼굴로 뿔고동을 불렀다. 뿌웅! 뿌웅! 꼭 엉덩이가 하품하는 듯한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지는 순간 용기 백배하여 달려오던 두진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우뚝 발을 멈 추었다. 동시에, 꽝꽝꽝―!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轟音)이 울리는데 이어, 우르르 꽝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절한 비명이 줄이어 터지고, 땅이 지진을 만난 듯 들썩거리며 뿌연 분진과 함께 작은 돌가루가 퉁겨 등에 부딪혔다. 그리고 짐승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숱한 인영들이 번개같이 앞으 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상황은 이미 끝난 것이다. 하늘 높이 들려던 구환도가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완전히 전의 (戰意)를 상실한 두진은 불현듯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을 혈검대주 장수길의 얼굴이 떠오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그가 고자질을 하지 않았다면……? ④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래산은 어둠과 침묵으로 빠져들 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천장단애에 걸린 넝쿨을 타고 두 사람이 내려오 고 있었다. 사나운 바람에 넝쿨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능숙한 솜 씨로 땅에 내려선 그들은 얼굴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다 한 사 람이 입을 열었다. "흐흐, 우리가 검문을 이리 쉽게 이길 줄이야… 상상인들 해봤을 까?" 그 말에 황달호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처음에는 어림도 없는 짓이라 생각했는데, 아무튼 단호법 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그렇기도 하지만… 흐흐, 우리도 참 대단하이." 황달호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가 대단하다니?" 윤장경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 두 사람이 단번에 검문 놈들을 묵사발로 만들지 않았나?" 단애 위에 설치된 벽력탄을 터뜨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야 그 뜻을 깨달은 황달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맞아. 자네 말이 맞아!" 두 사람이 웃고 즐기는 사이 눈앞에 시커먼 절벽이 나타났다. 녹 산영웅문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는 곳이다. 윤장경은 잡목(雜木)과 어른 키만큼 자란 풀을 헤집으며 입을 열 었다. "초소를 지키던 친구들은 철수했을까?" "글쎄, 벌써 들어갔는지도 모르지." 그러자 돌연 윤장경은 다급히 말했다. "우리도 빨리 들어가세." "갑자기 왜 그러나?" "생각을 해보게. 아마도 지금쯤이면 잔치가 벌어졌을 것인데, 우 리가 늦게 가면 찌꺼기만 남지 않겠나?" 이어 그는 황달호가 뭐라 하기 전에 손짓으로 부르며 집채만한 바 위에 손을 갖다대었다. 이 바위를 밀어야만 비밀통로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서 같이 바위를 미세." "원, 사람도 급하기는……." 느긋한 말과는 달리 황달호도 빠르게 바위에 손을 대었고, 두 사 람이 동시에 '끙' 하고 용을 쓰자 바위가 움찔하며 조금 밀려나며 희미한 빛이 흘러 나왔다. 비밀통로를 밝히는 횃불이었다. 비록 조금이지만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에 쓸데없이 더 힘쓰기를 멈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 다. 스읏……. 혹시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할 정도로 미세한 소리에 한 발 뒤에 처 져 따라 들어가려던 황달호가 고개를 갸웃할 때, 그는 자신의 머 리가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큭!' 목이 잘린 사람이 어떻게 비명을 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생각 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 그가 마음속 비명을 지를 때였다. 이상한 기척과 뜨거운 물 같은 것이 등에 와 닿는 느낌에 윤장경은 고개를 돌렸고, 퍽! 기문혈에 쇠뭉치보다 단단한 그 무엇이 깊숙이 박혔다. 오장육부가 부서지는 통증에 울컥! 응혈을 토하던 그가 기문혈에 박힌 것이 사람의 주먹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윤장경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스르르 앞으로 기울어지는 윤장경을 한 손으로 받친 흑의복면인은 혀를 찼다. "이놈들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검을 쓰면 어떡해?" 검을 신경질적으로 검집에 꽂던 또 다른 흑의복면인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겨우 황금 백 냥에 천하의 천지쌍살(天地雙殺)이 나섰는데, 성질 이 안 나!" 천지쌍살―! 이들은 쌍둥이 형제로서 돈을 받고 상대를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들 이다. 그러나 떠돌이 살수가 아니라, 살수들의 집단인 살청막(殺 請幕)의 특급살수로 실패를 모르는, 그래서 최소한 황금 이천 냥 은 있어야 움직이는 초급살수들이었다. 불과 반각 차이로 형이 된 천살(天殺)은 고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 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그렇다고 혹시나 이류급을 보내 본 막이 살행(殺行)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나면 이제까지 쌓아올린 명 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그러니 잔소리 말고 어서 옷이나 벗겨 라!" 전후사정을 아는 지살(地殺)은 여전히 속이 상하는지 황달호의 옷 을 벗기며 연신 궁시렁거렸다. "등신 같은 검문 자식들! 대책도 없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다니, 제놈들이 놈을 죽였으면 얼마나 좋아. 그랬으면 우리가 나서지 않 아도 되는데 말야. 제길! 쇠신이 닳도록 찾았더니, 별거 아닌 놈 이 갑자기 절세고수가 되어 가지고 애먹이네." 쉬지 않고 주절거리는 지살을 보며 천살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 었다. '정말 내 동생이지만… 지겹다!' ⑤ 이렇게 좋을 수가!! 서황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도무림(白道武林)의 터줏대감인 칠파일방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 진 검문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박살냈다. 보잘것없는 이 산적 떼가 말이다. 더욱이 그 두 번의 전투에 자신 이 모두 참여했다는 사실! 의자에 앉아 왼다리를 포개고 연신 싱글벙글하던 서황의 눈이 반 짝 빛났다. 옷이 본래 회색이었던지, 아니면 적의에 회색이 조금 묻어 그리 보이는지 모를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청년이 눈알을 굴리며 슬그머 니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야! 거기 좌에서 두 번째! 그래, 뒤돌아보는 너 말이다. 손 똑바 로 안 들어!" 지적당한 청년은 찔끔하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고, 서황은 으름장 을 놓았다. "너 한 번만 더 요령 피우면 이 몸이 일어나시겠다, 이거야! 알 간?" 좀 전에 '아무리 포로라지만 너무하지 않소?' 하던 혈검대원 하나 가 서황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었다. 한데 그 결과는 앞니가 몽 땅 빠지고, 이목구비가 구별되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고도 모자라 지금 자신과 똑같이 무릎 꿇은 채 손들고 있다. 청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예." 서황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오른손을 귀에 갖다대고 부드럽게 물었다. "방금 뭐라 그랬니?" 뭐라 하긴 뭐라 해? 대답했지. 질문의 요지가 접수가 안된 청년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멀뚱거리 며 입을 오물거렸다. "아무 말 안했는데요." "뭐야! 감히 대답을 안했다고?" 서황의 눈썹이 곤두섰다. 덩달아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을 본 청 년은 뜨악했다. 그러자 머리에 불이 번쩍 들어와 자신도 깜짝 놀랄 큰 음성을 부 르짖었다. "대답했습니다! '예'라고요." 서황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붙었다. "진즉 그리 크게 대답할 것이지, 건방지게 말야, 들리지도 않게 대답을 하고 있어. 그리고 아직 너희들이 사태파악이 안되는 모양 이니 이 몸이 다시 알려주겠다." 그때였다. "그만해라, 부문주." 앉아 있어도 될 칼칼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사내다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음성이었다.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이 좋은 기분을 망쳐 놓다니… ….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서황은 머리를 긁적이며 불퉁하게 말했 다. "벌써 끝났어, 단호법?" 단호삼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 겨우 이 짓거리 할려고 '나 같은 돌머리가 회의를 해봐야 무슨 수가 있어? 하니 여기서 포로들이나 지키고 있을 게.' 한 거 야?" 쑥스러울 때는 그저 적당히 넘어가는 최고다. "헤헤헤, 회의 결과는 어떻게 됐어?" "알 것 없어!" 싸늘하게 외친 단호삼은 서황 곁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낮은 음성 으로 중얼거렸다. "강등(降等)시키던가 해야지. 속이 상해서 못 데리고 있겠어." '강등이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흠칫 놀란 서황은 감히 단호삼에게 따지지는 못하고 바로 옆에 서 있는 팽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나 팽후가 무섭게 노려보자 나오 던 말을 꿀꺽 삼켜야만 했고, 이때 단호삼의 음성이 들렸다. "모두들 일어나시오." 당연히 기뻐하며 일어날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찾다가 서황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머뭇거린다. '쩝! 얼마나 공갈을 쳤으면!' 내심 혀를 찬 그는 극히 온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고 일어나시오. 나는 녹산영웅문의 호법직을 맡고있는 단 호삼이라 하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놀람이 가득한 탄성이 터졌다.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보름만에 당금 강호무림의 떠오르는 샛별 로 등장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때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오른, 그래서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 는 맨 앞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당신이 정말 철탑검귀(鐵塔劍鬼) 단호삼이오?" '내게 철탑검귀라는 명호를 붙인 모양이군. 후후, 검귀라… 내 손 속이 그리 잔인했던가?' 자신의 기억으로는 맨 앞에서 예사롭지 않은 무공으로 날아오다, 맨 뒤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오던 사내였다. 단호삼은 씁쓸하게 웃으며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사내를 내려 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모양이오. 그런데 당신 이름은?" 맞단다. 두진은 즉시 포권을 취하며 풀죽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구환금도 두진이라 합니다." 순간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강호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의 귀에 익을 정도로 일급고수라서가 아니다. 흉흉한 싸움터에서 뒷짐을 지고 걸어와도 좋을 두진이 선 두에서 왔다는 사실이 뜻밖의 일인 것이다. 그가 두진이 어쩔 수 없이 선두를 맡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살아 있다는 것도. 단호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마주 포권지례를 취했다. "대명(大名)은 익히 들었소. 한데……." 말끝을 흐린 그는 두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 다. "귀하가 이번에 파견된 사람들의 수뇌요?" 하고 묻던 단호삼은 내심 아차 했다. 검문에서 파견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아직 없었기에 짐작으로 물은 것이지만 지금 얼굴 모습이 영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이다. ⑥ 불과 얼마 전에 누구에게 실컷 두드려 맞은 저 얼굴. 아니나다를까. "마령당주인 강당주가 수뇌였지요. 하지만 그가 죽고 없으니… …." 아무리 몰지각한 사람인들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으리라. 이 무렵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마령당의 무사들이 하나 둘 일어 났다. 하나 그들은 다리가 저린지 휘청거렸다. 두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 어린 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내가 수뇌라고도 할 수가 있겠군요." "알아들었소." 두진의 내심을 파악한 단호삼은 손을 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부상자도 있고 하니 간단히 말하겠소." 문득 두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몰라도 단호 삼이 지금부터 하는 말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음이었다. "기실 당신들이 투항(投降)할 줄은 정말 몰랐소. 그래서 대비책도 서 있지 않고……." 문득 단호삼의 눈에서 사람의 속을 꿰뚫을 듯한 칼날 같은 신광이 뻗어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대체 왜 투항했소?" "으음!"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두진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 나왔다.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목숨이 아까워서? 그럴 것이다. 만약 무 (武)를 닦은 무사의 몸으로서 목숨이 아까워 허리를 꺾었다 하면 이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마 침을 뱉을지도……. 그럼, 목숨 은? 꼭 집어 무어라고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같았지만 생각도 잘 나지 않았고, 지금 상황에서는 구차한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 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두진은 아랫입술에 피멍이 생기도록 깨물었다. "부끄럽지만… 죽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오." 일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뒤에서는 왜 그런 말을 해서 우리까지 죽이느냐고 야단들이고, 앞 에서는 야유를 퍼붓고 있다. 예상외로 심한 반응에 두진은 쥐구멍 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시끄럽다! 이 새끼들아!" 서황이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런 너희 놈들은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말이냐? 그런 거야? 그 리고 너, 너, 너!" 말을 하다보니 더욱 화가 났는지 그는 침이 튀는 것도 모자라 삿 대질을 해댔다. "아까 보니까 제일 먼저 병기를 던지더구만. 그런 놈들이 뭐가 잘 났다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좋아, 다 좋으니까 목숨을 여벌로 가 지고 다니는 놈 있으면 이리 나와 봐! 구경 좀 하게!" 있을 턱이 없다. "없어? 그런데 왜 뒤에서 호박씨 까고 있어." 뜻밖의 인물이 생각지도 않은 멋진 말을 하는 통에 잠시 넋이 나 가 있던 사람들 중에 단호삼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 다.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고 싶은 충동을 겨우 달랜 단호삼은 서 황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진정해라, 부문주." "놔! 한마디만 더 하고!" 서황은 왼손으로 단호삼의 손을 홱 뿌리쳤다. 감히! 팽후로 착각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멋진 말 에 기(氣)가 천 장(千丈)까지 뻗쳤을까? 머쓱해진 단호삼이 어깨를 으쓱하며 멋쩍어할 때, 서황은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내숭떠는 너희들보다 사내답게 솔직한 두진이 열 배, 아니 천만 배 낫다는 것을 알아야 돼, 네놈들은!?" 서황답지 않게 끝까지 멋지고 옳은 말을 하고 말았다. 스스로 생 각해도 엄청 대견스러워진 그는 두 손을 툴툴 털며, "짜식들이 까불고 있어." 이렇게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몸을 빙글 돌려 건방지게 단호삼의 어깨를 툭 치기까지 하였다. "대충 주위를 정리했으니, 이제 단호법이 맡아." 단호삼이 할말을 자기가 다해 놓고 이제 와서 설거지만 하라는 것 이다. 그는 쓰게 웃으며 두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솔직히 말했으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겠소. 회의를 했지 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소. 해서 말인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 소?" 생각한 바가 있었던 두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를 믿을 수 있다면 거두어주시오. 만약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 배신을 안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을 신봉(信奉)한다 면……." 두진은 어깨를 펴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죽여주시오!"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살려 보내면 녹산영웅문의 행로(行路)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고, 투항한 자를 죽이자니 그렇고, 믿고 받아들이기도 그렇고. 하지만 두진은 죽여 달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죽음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 잘은 모르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호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미소를 머금고 말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간 두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믿어… 주시겠소?" 단호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이거 손부끄럽소이다." 더 이상 망설일 것도, 물은 것도 없다. 두진은 두 손으로 덥석 잡 았다. "고맙소!" "별말씀을……." 가볍게 겸양의 말을 한 단호삼은 뜨겁게 맞잡은 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그는 태산 같은 기도로 중인(衆人)들을 쓸어보 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늘 부로 한 형제가 되었소. 비록 좀 전까지 칼을 겨누 었으나,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듯이… 그렇게 형제가 되었 소! 이는 바로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점지해 주신 일이오!"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전신에서 용광로같이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는 모두의 가슴 깊숙이 전달되었고, 단호삼은 끝을 맺었다. "녹산영웅문의 전 형제를 대표해 그대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
첫댓글 즐독 ㄳ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