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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형령주 제1권 제8장 행허, 깨어나다 ━━━━━━━━━━━━━━━━━━━━━━━━━━━━━━━━━━━ 쏴아아- 쏴아아-! 가을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쏟아지 는 폭우는 천지간을 음울한 우막으로 휘감아 놓았다. 구룡소(九龍沼) 기슭. 이끼가 미끄러운데 빗줄기 사이에서 비틀거 리며 일어나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으으… 몸이 으스러졌다." 괴로움에 찬 목소리. 목과 팔목, 발목에 쇠사슬을 걸고 있는 산발괴인(散髮怪人) 하나 가 벌거벗은 채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철컥- 철컥-. 그가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뿌려졌다. "괴롭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세존(世尊)이 정한 나의 길은 이런 형극(荊棘)의 길이란 말인가!" 그는 비통히 외치다가 푹 쓰러졌다. 쏴아아……. 폭우(暴雨)가 그의 몸을 적셨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는 등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한데 어쩐 일인지 그로인해 몸이 더욱 괴로운 것이 아닌가! "으으- 윽-!" 그는 크게 소리치며 눈을 번쩍 떴다. "허허! 모를 일이로다. 설마… 젊은이가 전설(前說)로만 알려지고 있는 역천행공(逆天行功)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순간, 등 뒤에서 아주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수염이 한 자나 되는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등에는 사척고검(四尺古劍)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검자루에 달린 황금색 수술이 아주 탐스러웠다. "뉘… 뉘십니까? 여… 여기는 어딥니까?" 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다. "푹 쉬어야 하네. 일어나지 말게!" 청의노인(靑衣老人)은 소매를 가볍게 흔들어 철수진기(鐵袖眞氣) 를 발휘했다. 그는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등목을 땅에 가져다 댔다. 하늘 위로는 백운(白雲)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젊은이는 누구인가? 어이해 죄수(罪囚)가 되었나?" 청의노인은 그의 오른쪽 한곳을 가리켰다. 수북이 쌓여 있는 쇳조 각이 눈에 들어왔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게. 무슨 죄(罪)를 짓고 죄수가 되었나? 관 상으로 보면 악행(惡行)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거늘?" 노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끌어들 이는 힘을 갖고 있었다. "죄… 죄수라니요?" 그가 크게 놀라자, "흠- 거짓말은 하지 말게." 청의노인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쏟아져 나왔다. "아… 아닙니다. 저는… 으음-!" 그는 크게 말하려다가 뒤통수를 만졌다. 도끼를 맞은 듯 뒷머리가 쑤시고 아팠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다가 말했다. "저는 행허(行虛)라고 합니다." 행허? 산 꼭대기에서 추락한 행허란 말인가! 그는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이 진지한 탓인지, 노인은 만류하지 않았다. 행허는 일어나 청의노인을 향해 합장(合掌)을 했다. "소승은 사숙(師叔)을 찾아 가야 합니다." "소승(少僧)이라니?" 청의노인은 행허를 살펴봤다. 흐트러져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벌거벗어 아무 것 도 가리지 못하는 젊은 몸뚱이. 어디 그뿐인가! 팔목과 발목, 그리고 목에는 붉은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 있어, 얼 마 전까지 철갑에 차여 있던 처지임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소승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을 주신 노시 주께 심히 감사드리나 소승에게는 급한 용무가 있습니다." 행허는 무작정 일어서려 했다. 한데, 전신 혈도에 쇠꼬창이가 들어오는 듯 쿡쿡 쑤시며 식은땀이 났다. 뿐만 아니라 피가 역류(逆流)하며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으으… 음… 내상(內傷)이 심해 몸을 움직일 수 없구나!" 행허는 축 늘어지고 말았다. "쯧쯧- 노부가 뭐라던가! 하여간 대단한 근골(筋骨)이네 그려. 헛헛- 전무림을 통해 자네 같은 근골은 다시 없을 것이네. 혹… 광양전(光陽殿) 사람이 아닌가?" "광양전이라니요?" 행허가 누운 채 묻자, "광양전주인 광양귀서생(光陽鬼書生)이 갖고 있는 옥형금갑비경 (玉形金甲秘經)을 익히지 않았느냐 말이네!" "광… 광양전의 광양귀서생이요?" 행허는 눈을 감아 봤다. 아련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는 동굴 안에서 복면을 쓴 사 람들에게 돌아가며 절기를 전수받지 않았던가! '꿈일까 생시일까?' 행허의 눈빛은 몽롱(朦朧)해져 갔다. 청의노인은 행허를 자세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다가 발견한 젊은이 하나가… 노부가 긍지 로 삼고 있던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지식(知識)에 금이 가게 하는 군.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청의노인은 팔짱을 꼈다. 행허는 눈을 감은 채 옛생각하기에 바빴다. 일각(一刻) 정도 지났을 때였다. 파공성이 들리더니 청의노인 있는 쪽으로 네 명의 무림고수가 들 이닥쳤다. 청포(靑袍), 백포(白袍), 적포(赤袍), 흑포(黑袍)를 걸친 백 세 노인들인데, 각기 다른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보검(寶劍), 보도 (寶刀), 철필(鐵筆), 금소(金簫)……. 노인들은 하나같이 답허능공(踏虛凌空)을 시전하며 다가섰다. 그 들은 다짜고짜 사상진(四象陳)을 치며 내려서더니 장읍(長揖)을 취했다. "청룡전주(靑龍殿主), 명대로 대령했습니다!" "백호전주(白虎殿主)도 왔습니다." "궁주(宮主), 주작전주(朱雀) 명에 따라 불철주야 달려왔습니다!" "성왕(聖王)- 현무전주(玄武殿主)의 절을 받으십시오." 네 사람의 목소리가 근처를 들썩였다. 그곳은 아름다운 단풍림(丹楓林)이었다. 하나, 지난밤 내린 비로 인해 단풍잎이 다 떨어져 꽤나 을씨년스러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 었다. 청포노인은 사전주(四殿主)가 장읍을 마치기를 기다려 천천히 입 술을 떼었다. "원로에 수고가 많았소!" 그의 어조는 행허와 말할 때에 비할 수 없이 묵직했다. 사전주의 나이는 그보다 더 많았다. 하나, 사전주는 청포노인의 비위(臂衛)로 그들의 지위는 천양지차였다. "궁에서 갈라져 오천 리 밖, 이곳 단풍애(丹楓崖)에서 만나야 하 는 사실이 못내 슬프외다!" 청포노인, 그는 누구일까? 매우 부드러운 눈빛. 등에 걸린 고검이 없다면 평범한 문인(文人) 으로만 보일 온화한 표정의 노인. 외모만으로는 그가 당세를 움직 이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사전주는 허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청포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본궁(本宮)의 요직에 있는 자 중 첩자가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오. 그 자가 비밀을 빼돌리는 탓에 본궁의 백 년 세력이 밑둥에서 부터 무너져 버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마종궁(魔宗宮)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 것이오!" 청포노인은 궁(宮)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천하제일궁(天下第一宮)으로 불렸고, 현재에는 마종궁과 함께 동서쌍궁(東西雙宮)이라 불리는… 중원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 무해성궁(武海聖宮). 노인은 바로 그곳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천외대종사와 비무(比武)하기 전에 반드시 첩자를 잡아야 하오. 그래야… 만에 하나 본좌가 천외대종사와 싸우다가 위해를 입더라 도 무해성궁의 기반에는 영향이 없을 테니까!" 그는 엄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사전주는 이제부터 외단(外壇)을 비롯한 제향(諸香)을 돌며 첩자 들을 찾아내 처단하셔야 하오!" "예- 엣!" "명심하겠습니다!" 사전주는 일제히 부복(俯伏)했다. 청포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옥(子玉)이가 거느리는 일천(一千) 무해군영검사(武海群英劍 士)가 은밀히 도울 것이오!" "아아- 소궁주(少宮主)님까지!" 사전주는 조금 긴장을 풀었다. "이 일은… 무태군(武太軍) 사모(師母)의 친명(親命)이시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하오!" 그는 크게 말한 다음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전음(傳音)으로 말 했다. 반면, 행허는 사람들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전념하고 있었다. '천외마벽(天外魔壁)- 내가 거기 갔었을까? 아아- 너무도 길고 도 험한 꿈을 꾼 기분이다. 사숙이 돌아오신 날부터의 모든 것은 꿈이다. 꿈(夢)!' 그는 식은땀을 쭈욱 흘렸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 다. 피가 역류(逆流)하는 가운데 몸이 편안해진 것이다. '이상하다. 운기행공이 거꾸로 되는데도 오히려 몸은 편해지다니 …….' 그는 다시 식은땀을 흘렀다. 그 순간 벽(壁)하나가 보이며 글(文)이 와락 떠올랐다. 쇄옥혈겁공(碎玉血劫功) 다섯 자 이름이 뇌리(腦裡)에 떠올랐다. - 역천지기(逆天之氣) 능어제력(能於制力)……. 쇄옥혈겁공은 이상한 비결(秘訣)이었다. 그것은 현존(現存)하는 어떠한 운기행공과도 상극(相剋)이 되는 것으로 혈맥(血脈)의 구조를 완전히 부정하는 기법이었다. 익히기는 힘드나, 익히면 아주 기이한 힘을 얻게 된다. 혈도(穴道)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몸에서 혈 무(血霧)를 피우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단점이라면, 다른 행공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쇄옥 혈겁공보다 강한 운공법을 배운다면 쇄옥혈겁공을 부숴 버릴 수 있겠지만……. "으으……!" 행허는 피가 거꾸로 돈다는 사실에 몹시 기분이 야릇해졌다. 피가 그립다고나 할까? 이상한 마성(魔性)이 그를 짓눌렀다. 그의 수족(手足)이 시뻘겋게 물들 때였다. "으음! 행허, 자네의 비밀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지 못하겠구먼!" 청의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며, "자, 내가 무행청양단(武海靑陽丹) 한 알을 먹여 주겠네. 그러니 어서 입을 벌리게." 빨아들이는 힘을 지닌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행허는 천천히 입을 벌렸고, 단약 한 알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먹으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삘리리리- 삘리리리-. 그윽한 피리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아주 좋은 소리다.' 행허는 스르르 눈을 떴다. 커다란 달 아래, 청영(靑影) 하나가 있었다. 청의노인은 나무피리 하나를 입에 물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행허는 눈을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행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은 헐렁한 듯한 흑포(黑袍)를 걸치고 있었다. 아마도 청의노인이 입혀 준 듯 싶었다. 삘리리- 리리- 삘릴리-. 피리 소리는 달과 함께 잔잔히 어우러졌다. 달빛도 아름다운 피리 소리에 취한 것일까? 잔잔히 흐르는 소성, 그리고 일렁거리며 은 사를 피어내는 월광. 모든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순간, 피리소리가 끊어지며 노인의 시선이 행허에게로 돌려졌 다. "어떤가?" "멋들어진 솜씨입니다!" 행허가 웃으며 대꾸했다. "헛헛- 천하제일은 아니네, 천하제삼(天下第三) 정도의 실력이 지." "누가 더 잘 부는지요?" "나의 수하(手下)… 아니, 무해성궁의 현무전주(玄武殿主)가 천하 제이(天下第二), 그리고… 노부의 과년한 딸 아이가 천하제일(天 下第一)이네!" "따님이 계십니까?" "있네. 한 번 보고 싶은가?" 청의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품안에 넣었다. 잠시 후, 그는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활짝 펼쳤다. 그 안에는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고 옥사자(玉獅子) 등에 올라앉 아 옥소를 불고 있는 녹의소녀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콧날이 아주 뾰족한 소녀였다. "헛헛- 벽아(碧兒)라네. 아주 오만해 속을 많이 썩이고 있지." "정… 정말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행허는 뺨을 조금 붉혔다. 청의노인은 두루마리를 둘둘 접어 품에 지녔다. 이윽고 행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엄중한 어투로 물었다. "노부는 사실 바쁜 사람이네. 그런데 자네와 더불어 벌써 일 주야 (晝夜) 이상을 보냈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 글쎄요?" 행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자네는… 현재 노부의 선사(先師)가 쌓아 올린 위대한 정도 세력 을 깨뜨리려 하는 마도세력이 쓰는 무공을 갖고 있네!" 청의노인의 눈에서 청광(靑光)이 흘러나왔다. "그…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마종궁 사람이 아니냐 하는 말이네!" 청의노인의 눈빛은 더욱 밝아졌다. "마… 마종궁이오? 그…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요?" "흠- 속이는 것 같지는 않군. 그럼 마종궁의 척후세력이 된 광양 전 비전 옥형금갑공을 어디서 배웠는지 말해 보게!" "옥… 옥형금갑공은 곡비룡……." 행허는 더듬더듬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절기를 배우기 이전…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비록, 나 를 속인 사숙이나… 나의 사숙임에는 틀림없다.' 행허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헛헛- 노부 앞에서 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 네. 헛헛- 출신이 어디이건간에 근기(根氣)가 대단하네. 울지엽 이 천하제일이 아니라, 행허 자네가 천하제일이네!" 노인은 크게 웃었다. 무해성왕(武海聖王. 그는 당세 제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 행허는 그가 얼마나 유명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헛헛- 하여간, 자네는 몸조리를 잘해야 하는 처지이니… 헛헛- 노부가 자네를 위해 쉴 곳을 마련해 주겠네. 화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 자네와 더불어 밤을 새우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네!" 울지엽이 크게 말할 때, 휘이익- 휘익-. 저 먼곳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청의인영 하나가 나는 듯 달려오고 있었다. 몸가짐이 아주 단아한 청년으로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사부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지요?" 그는 바짝 다가와 무릎을 땅에 댔다. "헛헛- 자옥(子玉)이구나. 네가 예정보다 한 시진 빨리 오다니… 헛헛… 최근 너의 절기가 많이 향상된 듯해 기쁘다. 헛헛, 무해성 궁의 무공은 속성(速成)할 수 없는 것이나, 오래 익히면 무적(無 敵)이라는 이치를 네 스스로 터득한 듯해 몹시 기쁘다." 울지벽이 웃을 때, 갑자기, "흐으- 윽-!" 청삼청년의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의 망막에 들어오는 한 사람 때 문이었다. 그는 행허가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대고 있는 광경을 보 고 자지러지게 놀라는 것이었다. 그가 아래턱을 떨자, "왜 그러느냐? 저 사람을 아느냐?" 울지엽이 바짝 긴장해 다가섰다. "아… 아닙니다." 청삼청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땅을 쥐며 부르르 떠는 반면, 행허는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저 사람은 누굴까? 으음-.' 그는 청년이 조금 낯익다고 여겨졌다. 청년은 행허가 아무 것도 모르는 시늉을 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 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 저 사람은 누구인지요?" "헛헛- 사부는 네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네가 저 청년을 안 다고 여겼는데…… 헛헛- 도리어 네가 물으면 어찌하냐?" "……." 청년은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헛헛- 송구스러워할 것은 없다. 헛헛-." 울지엽은 자상히 말하며 손으로 행허를 가리켰다. "저 청년을 일단 네게 맡길 테니, 영약을 아까워 하지 말고 치료 해 주도록 해라. 특히 뇌호혈(腦戶穴)을 크게 다친 청년이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청년의 뺨은 사과빛으로 달아올랐다. 울지엽은 그 에게 전음으로 이런저런 것을 지시했다. 청년을 고개를 끄덕거리 며 말없이 듣기만 했다. 이각(二刻) 후, 울지엽은 할말을 다하고 나서 행허를 바라봤다. "자네와 헤어지게 되어 섭섭하네. 헛헛- 하나, 달포 지나지 않아 다시 보게 될 것이니, 그 때까지 정양이나 잘하고 있게!" "떠… 떠나시렵니까?" "헛헛-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네." 울지엽은 크게 웃다가 위로 날아올랐다. 휘이이- 잉-. 그는 어기충소(馭氣沖 )로 단번에 칠십여 장을 가로질렀다. 이윽 고 경미한 바람 소리와 함께 그는 한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그가 사라지자, "훗훗-." 청의청년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는데, 일어서는 청년의 눈에서는 사악(邪惡)하기 그지없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하, 이것도 대단한 인연(因緣)이 아닌가?" 그는 행허 앞으로 다가갔다. "아미타불-." 행허는 손바닥을 한데 합하며 입을 열었다. "인연이라 하시니 가슴이 저미는군요?" 그의 눈빛은 대조적으로 부드러웠다. "흐흐, 그 사이 중이라도 되었더냐? 후후-!" 청의청년은 손을 등으로 갖고 갔다. 그는 검자루를 움켜쥐며 살광 을 흘렸다. "탁몽영! 너도 꽤나 질긴 목숨이구나." "무… 무슨 소리요? 소승은 잘 모르겠소!" 행허가 얼떨떨해 하자, "훗훗- 딴청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군. 하여간… 훗훗 - 네 덕에 큰 위기를 넘겼다. 그것을 고마워하며… 훗훗- 네게 고통이 없는 죽음을 주겠다!" 말이 끝나는 찰나, 차-앙-! 날카로운 검명과 함게 검이 뽑히며 검 무지개가 허공을 갈랐다. 빛살로 화한 검광은 사정없는 기세로 행허의 가슴 부위를 한일자로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쌔액- 파팍-! "으윽-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행허의 가슴팍에 두 자 길이 검흔(劍痕)이 남았고, 피가 분수처럼 피어났다. "으으… 그… 그래도 죽지 않다니… 네… 네놈은 정말 생매장 당 하기 전에는 죽지 않을 놈이구나!" 청년은 바로 청의옥룡 곽자옥이었다. 그는 중원천하가 알아주는 의협(義俠)이었다. 십삼 세 때, 북해사 살(北海四煞)을 단신으로 꺾어 협명을 날린 인물이 아닌가! 하나, 지금 그는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 새- 액-! 검광이 또 한 차례 허공을 가를 때, "멈추시오!" 행허는 참지 못하고 몸을 위로 날렸다. 그것은 무공초식에 의한 행동이기보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새- 액-! 검기(劍氣)가 야음을 가르는 순간, 행허는 한 마리 학과같이 반공 (半空)으로 날아올랐다. 간발의 차이로 검기가 그의 발 밑을 스치 며 지나갔다. 파팍-! 행허가 서 있던 자리에 먼지가 피어 오르면서 검흔이 새겨졌다. "훗훗,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하나… 흐흐, 네놈 따위에 기 가 죽을 내가 아니다!" 그의 손이 크게 떨쳐졌다. 피이… 잉…….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행허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갔다. '막아야 한다.' 행허는 내상을 악착같이 견뎌내며 손을 쓰려 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피가 거꾸로 흘러, 운기행공을 방해하며 온 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아닌가! "크으으… 역천행공이 저절로 되다니……." 행허는 허공에서 몸을 휘청였고, 그 순간 곽자옥이 어검술(馭劍 術)로 내던진 보검이 그의 하단전(河丹田)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행허는 검에 관통당한 채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그의 몸뚱이가 바위에 핏물을 들였다. "흣훗- 그래도 죽지 않다니… 정말 질긴 놈이군. 훗훗- 하여간, 네놈에게 고통 없는 죽음을 주겠다던 약속을 지켜 주겠다. 후후- 이쪽으로 오다가 우연히 황량한 석곡(石谷) 하나를 발견했었지. 네놈을 거기 묻어 주마!" 곽자옥은 행허를 팔과 허리 사이에 끼었다. 잠시 후, 그는 행허가 흘린 핏자국을 장력으로 지운 다음 나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유… 유성과천(流星過天)이군? 한… 한데… 왜 나를 죽이려 하느 냐? 그… 그 이유를 알고 싶다." 행허는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다. 행허는 장력에 격중되고 검에 괸통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그를 이용해 먹은 다음 제거한 대소자애승의 공로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대소자애승은 그의 몸뚱이 하나만은 정말 제대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으로 인해 곽자옥은 비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곽자옥은 아주 빨리 치달렸다. 그는 벼랑과 계곡을 거침없이 넘어 갔다. 그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탁몽영이 아니란 말인가? 아아- 분명 탁몽영인데… 어이해 나를 몰라본단 말인가?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둘 있을 수 있단 말인 가?' 그도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모양이었다. 그는 행허를 바라보며, "네가 탁몽영이 아니라면 미안하게 되었다. 하나… 나는 네게 본 색을 드러냈다. 그런 이상 너는 살인멸구(殺人滅口) 당해야만 한 다!" "나… 나를 왜 죽이려 하느냐? 탁몽영은 또 누구냐?" "후후- 너를 죽이는 이유는… 내가 네 앞에서 진정한 신분을 밝 혔기 때문이다. 후후… 나는 시시한 무해성궁의 기명전인(記名傳 人) 겸 군영검대장(群英劍隊長) 따위가 아니다. 나는 그 이상이 다!" 휘휙- 휙-! 얼마를 갔을까? 그는 안개 자욱한 석곡(石谷)에 이르렀다. 그곳의 안개는 아주 뜨거웠다. "후후- 이곳은 근처 사람들이 지옥화곡(地獄火谷)이라 부르는 곳 이다. 저 안에는 분화구가 있다!" 곽자옥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르르- 릉-! 용암(鎔岩)이 끓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뜨거운 안개가 하늘 높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후후- 너를 저 안에 던져 주마! 후후- 재가 되어 죽는 맛도 꽤 나 괜찮을 것이다. 후후!" 곽자옥은 행허의 배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파팍-! 행허의 배에서 피가 터져 나와 그의 옷을 적셨다. "인… 인성(人性)이란 이런 것이든가?" 행허는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는 가르침은 틀린 가르침이었 군? 으으- 용서받지 못할 자도 있는 것이 진실이로군? 다… 다시 태어난다면… 중이 되지는 않으리라!" 행허는 자신에게 말했다. "들어가라- 지옥으로! 더이상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한순간, 곽자옥의 손이 흔들리자 행허는 핏물을 뿌리며 뜨거운 용 암 속으로 내던져졌다. 꽈르르… 릉… 우르르… 릉… 꽝……. 끓는 바윗물이 피어 올랐다. 행허의 몸뚱이는 그 속에 가려져 보 이지 않았다. 곽자옥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훗훗… 그 누가 나의 비밀을 알겠는가! 프핫핫… 천외대종사가 천하를 얻으시는 날… 핫핫, 나는 소종사가 되어 무해성궁을 독차 지할 것이고… 내 오른팔에는 마혈(魔血)이, 내 왼팔에는 정벽(正 碧)이 안기리라……." 그는 웃으며 사라져 갔다. 벌겋게 끓어오르는 용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타고 말 것이다. 인간의 마음까지도……. 거대한 지하석부(地下石府). 석부의 위쪽에는 거대한 동혈(洞穴)이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쉬지 않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동혈에서 이는 바람을 살이 익어 버릴 정도의 화기를 지닌 바람이 었다. 그 열풍이 쉬지 않고 드나드는 석부는 의당 화로속처럼 달 궈져야 하거늘 이상하게도 지하석부 안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지하석부 안에는 냉옥석(冷玉石)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냉옥 석에서 흘러나오는 한기로 인해 위쪽에서 불어닥치는 열풍(熱風) 이 식었고, 그 덕에 지하석부 안은 아주 적당한 기온이 유지될 수 있었다. 냉옥석 위. 언제 깎았는지 모를 수많은 불상(佛像)이 세워져 있었 다. 어디 불상뿐인가! 돌 위에는 수천 종류의 불경(佛經)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불경들, 불교에서 흘러나온 유사종교(類似 宗敎)들의 경문(經文), 불교의 뿌리가 되는 갖가지 종파의 경전 (經典)들……. 돌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글과 그림들. 그 안은 가히 만불동(萬佛洞)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안, 마치 푸른 풀밭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상한 이끼가 자라나 고 있었다. 냉옥령지초(冷玉靈芝草). 냉옥성의 영기(靈氣), 그리고 돌 아래를 흐르는 공청석유맥(空靑 石乳脈)의 정기(精氣)를 받고 자라난 천하의 영물들이다. 냉옥령지초의 화원(花園) 가운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 람이 하나 누워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몸에 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털도, 눈썹도… 모든 체모(體毛)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피부는 시뻘갰고, 흉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는 괴로운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간혹, "사부… 으으음… 만경각(萬經閣)……." 그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곤 했다. "문군(文君)… 으으… 나… 나 때문이오. 이… 이 혈겁(血劫)은… …!" 그는 한 여인을 찾기도 했다. 뚝- 뚝-. 열기와 냉기(冷氣)로 인해 김이 뭉쳐 이슬이 되고, 그것은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석부에 있는 구덩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순정(純精)한 물. 거기에는 어떠한 사기(邪氣)도 깃들지 못할 것 이다. 천정에서 흐르는 물방울 중 하나가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한순간, "아아악… 안 돼!" 그는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인상 을 찡그렸다. "껍데기가 홀랑 벗어졌군. 크으으… 쓰라리다……." 그는 제일 먼저 그 누구를 찾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심한 고통 을 느끼며 다시 드러누웠다. 그의 얼굴은 아주 흉칙했다. 화상(火 傷)으로 인해 피부가 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그리고, 나는 누구일까……!" 그는 중얼거렸고,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를 만들었다. 나는… 나는… 누구… 누구… 누구일까……? 긴 메아리. 그는 메아리가 끝나기 전에 다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파계(破戒)했다는 것이다. 훗훗-!" 그는 실소를 흘렸다. 지옥에서도 웃을 수 있는 배짱. 그는 빙그레 웃으며 뜨거운 피부 를 만졌다. 그는 피부를 만지며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는 눈치였 다. 우르르… 릉……. 천정에서 몰아치다가 냉옥석의 한기에 휘말려 되돌아가는 열풍(熱 風). 무시무시한 불의 바람이 그의 얼굴에 붉은 그늘을 만들었다. "탁몽영(卓夢英)- 나는 탁몽영으로 깨어나야 한다. 나는… 그들 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졌다!" 쇠사슬에 묶인 채 떨어졌던 탁몽영이 아직 살았단 말인가! "하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행허(行虛)라는 이름을 주신 분을 잊을 수 없고… 나를 아수라장 (阿修羅場)으로 끌어들인 사숙이란 자를 잊을 수 없다. 웃음 뒤에 칼을 감췄던 자. 그 자야말로… 나의 가장 큰 원수다!" 그는 행허이기도 했다. 행허와 탁몽영! 두 사람은 결국 하나였던 것이다. 탁몽영은 행허의 그림자였다. 행허는 대소자애승(大笑慈愛僧)의 장력에 휘말려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그는 그 때 죽었어야 했 다. 하지만 그는 그 때 죽지 않았고, 그 후에도 죽지 않은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쇄옥혈겁공(碎玉血劫功)이 나를 수 차례 구했다. 그것을 익힌 덕 에 혈도의 위치가 바뀌어 번번이 살아난 것이다!" 그는 행허일까? 아니, 이제부터는 그를 탁몽영이라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살계(殺戒)를 이길 수 있는 처지가 되었으며… 아아- 세상의 악 인들의 피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면…….' 그는 분한 눈물을 흘렸다. 그 때 이상한 향기(香氣)가 후각을 자 극시켰다. "아… 아니? 이상한 버섯이 가득하군?" 탁몽영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옥으로 깎은 듯 아름다운 모습을 한 녹색옥지(綠色玉芝), 냉옥령지초(冷玉靈芝草)에서 일어나는 향 기는 그를 취하게 했다. "이… 이것은 정말 좋은 물건일 것이다. 아아- 이렇게 좋은 향기 는… 문군의 몸 내음 이후 처음이다!" 그는 탁몽영인 동시에 행허가 되는데 오랫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의 기억을 하나로 합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리라. 하나, 둘 모두 그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훗훗- 나도 숨이 꽤나 긴 놈이다. 곽자옥이란 놈의 말대로… 흣 흣- 저 위쪽 구멍 위에는 용암이 있을 텐데, 거기 떨어져서도 살 아남다니…….' 탁몽영은 피식 웃었다. 꼬르르……. 창자가 텅 비었다는 신호성이 울려 왔다. "먹자. 살 수 있는 한 살자. 복수하기 위해……!" 그는 냉옥령지초를 다섯 개 뜯어 입 안에 꾸겨 넣었다. 목에 메이리라 여기는데, 갑자기 냉옥령지초가 스르르 녹아 물이 되었다. 씹을 필요도 없이, 그것은 물이 되어 뱃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으으- 고통이 스르르 사라지다니… 아아- 나는 암만 생각해도 운이 좋아 이곳으로 떨어진 덕에 살았으리라!" 탁몽연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냉옥령지초 밭을 지나치다가 무수한 글과 그림을 보고 아연 실색했다. 비사리유마경(毘沙利維摩經), 금강대승기신론(金剛大乘起神論), 무문관(無門關)……. 그가 아는 불경들의 이름, 그리고 그가 모르는 불경명이 있고, 그 아래 불경의 전문이 파여져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만… 만경각? 으으-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사숙이 화기(火器)로 태운 수만 권 불경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아- 그보다 이십 배 많은 경(經)이 음각(陰刻)되 어 있다니…….' 행허, 아니 탁몽영은 만경각 안에서 보지 못한 책제목을 볼 수 있 었다. 어디 그뿐이랴. 대비자법승이 꿈에서라도 찾고자 했던 희귀불경의 책제목도 허다 했다. 신기한 모든 경문이 한 사람의 필체(筆體)에 의해 파여졌다 는 것이다. "금강지(金剛指) 수법으로 판 것이다." 행허는 너른 석부를 쓸어봤다. 저 앞쪽, 휘어진 곳이 보였다. "가 보자!" 탁몽영은 신비함에 끌리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조금 아프기는 했 으나 걷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는 불경, 탱화를 살펴보며 모퉁이 쪽을 지나갔다. 한순간, "부… 부처……!" 그는 등신불상(等身佛像) 하나를 보고 저도 모르게 합장(合掌)을 하고 말았다. 금불상(金佛像). 하나의 금불상이 석대(石臺) 위에 있었다. 그는 합장한 다음 백팔배(百八拜)를 했다. 등신금불상(等身金佛像)은 너무도 위대(偉大)했다. 승려였었던 탁 몽영이기에 그 위대함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슬퍼하는 얼굴. 그 얼굴은 바로 죽은 대비자법승의 얼굴이었다. 금불상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자세로 죽었다. 탁몽영은 일백팔 번 절을 한 다음 불상 앞으로 다가갔다. 한순간, "으으… 믿어지지 않는다!" 그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불상이 아니라 유해(遺骸)다!' 그는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금불로 만 든 부처상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이라는 것을 알게 되 었기 때문이었다. 불상의 목에는 오목염주(烏木念珠)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는 나무 갑이 떨어져 있었다. 나무 갑은 열린 상태였는데, 그 안에는 목어(木魚)가 뒹굴고 있었 다. "사람이 어찌 금빛 시신(屍身)으로 남을 수 있을까?" 탁몽영은 중얼거리며 조심조심 상자 안의 목어를 쥐었다. 목어(木魚)는 바로 목탁(木鐸)이다. 그것은 옥(玉)보다 단단한 철오목(鐵烏木)으로 된 것이었다. 빛이 검은 것인데, 전후면에 세자(細字)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무진법(無盡法)이 적는다. 첫머리가 되는 글은 그런 글이었다. "무진법! 흠- 그런 고승(高僧)에 대한 글을 본 기억이 있다. 천 년 전의 고승이라고 아는데… 천 년 전의 그분일지도 모르겠군!" 탁몽영은 글을 세심히 살펴봤다. 노납은 파계(破戒)했다. 이미 중이 아니다. 노납은 살인마(殺人 魔)가 되었다 거기에는 노납도 모를 사연이 있다. 노납은 백구십 년간 백만 권(卷)의 불경을 외웠다. 노납은 인간으로 너무 오래 사는 것 같아, 소신공양(燒身供養)할 작정이었다. 노납은 책을 쌓 고 그 위에 올라가 불을 붙였다. 책산(冊山)이 타올랐고, 노납은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하나, 노납은 죽지 못했다. 금강불괴지신 (金剛不壞之身)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납은 세상을 저주했고, 죽지 못할 몸뚱이를 준 부처를 증오하며 미친 듯 살륙했다. 노납 이 손을 흔들면 모든 것이 불탔다. 노납은 막강한 화기(火器)를 마음껏 발휘했다. 노납이 가는 곳에 시산(屍山)이 쌓였다. 노납은 화형광불(火刑狂 佛)이라 불리게 되었다.> 화형광불! 탁몽영은 그 대목에 이르러 일단 눈길을 거뒀다. "혈미인의 시비 향심(香心)이가 한 말이 있지. 무해천존이란 사람 이 제이의 화형광불이라 불렸었다고!" 탁몽영은 중얼거리다가 다시 글을 봤다. 노납은 살생(殺生)에 질렸다. 결국, 노납은 또다시 자결(自決)할 작정을 하고 분화구 안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노납은 결국 이 안 에서 또 한 번 살게 되었다.> 다시 살아났다! 탁몽영은 무진법의 운수가 자신과 비슷하다 여기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분은 나보다도 더 지독한 신체를 지니셨군.'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다. 노납은 괴로워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었다. 일단 노납은 노 납이 외운모든 불경을 여기 새겼다. 한자 한자 새겨 가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오십 년… 노납은 외운 모든 것을 냉옥석에 팔 수 있었다.> 무진법은 굴 안에서 오십 년 살다가 죽었다. 중이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독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 다. 노납은 마지막 한 구절을 파다가 해탈(解脫)하게 되었다. 그것은 노납이 하던 것이었다. 노납은 이제 아무런 후회도 없다. 모든 번 뇌(煩惱)를 떨궜다. 노납은 지금 노납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노납이 최후에 얻은 심득(心得)을 적는다. 그것은 막강한 화광(火光), 화기(火氣)를 토하는 수법이다. 노납은 그것 을 이름하여 광불화형수(狂佛火刑手)라 칭했다. 무진법 합장(無盡法合掌) 절필(絶筆)> 그런 글 뒤로 한 가지 절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오묘한 것이었다. 광불화형수(狂佛火刑手). 그것은 탁몽영이 천외마벽에서 본 구결(口訣)보다도 강했다. 한번 시전하면 거둘 수 없는 것이고, 한번 시전하면 눈앞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수법이었다. 내공이 강하면 그 위력은 무진장(無盡藏) 늘어난다. 가히 한도 끝 도 없는 절기였다. "기… 기연(奇緣)이다. 오오! 이 안에서 두 가지 기연… 아니 세 가지 기연을 얻다니……." 탁몽영은 눈물을 흘렸다. 첫번째 기연, 그것은 타 버린 만경각을 다시 보는 기연이었다. 두 번째 기연, 그것은 광불화형수를 얻은 기연이었고, 마지막 기 연은 바로, 그가 갈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오늘 이 순간을 위해 그리도 고생했나 보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의 입매에 매달린 차고 냉막한 기운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기운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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