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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2026년 2월 22일 / 마태복음 25:31-46
마 25:31-46(현대어성경) / [마지막 심판] 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32)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34)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41) 그리고 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 마귀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셨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저희가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 하십니까?’ 45) 그때 왕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고 바르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론 : 심판의 날, 갈라지는 두 무리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그 선택 뒤에는 항상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히 9: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님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될는지에 관해서 확실한 답을 주셨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결론 부분이다. 예수님은 열 처녀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충성됨’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그 종말론적 가르침의 정점을 찍으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면서 심판의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인생을 살았다고 답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겠다.
31절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가설이 아닌 확정된 미래이다. 그날이 오면 모든 민족이 그 보좌 앞에 모이게 될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엄격하고 분명한 분리(分離)가 일어날 것이다.
본문을 통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찾으시는 참된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고자 한다.
1. 심판의 기준 – 관념(觀念)이 아닌 실천(實踐)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양의 무리에 속한 자들과 염소의 무리에 속한 자들 모두가 심판주를 ‘주여(Lord)’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즉, 이 비유는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이방인들을 향한 메시지라기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공동체 내부를 향한 경고의 성격이 강하다.
1. 지식에 머물지 않는 신앙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주님은 복 받을 자들이라 칭찬하시며 그 이유를 나열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35절). 예수님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가졌는지, 얼마나 화려한 기도를 드렸는지를 묻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의 손과 발이 어디를 향했는지를 보셨다.
2.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 주님이 언급하신 행동들은 거창한 순교나 전 재산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굶주린 자에게 빵 한 조각을 건네고,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고 구체적인’ 일들이었다. 기독교의 사랑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것을 채워주는 실제적인 행동이다. 즉 우리가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2. 예수님의 ‘현존(現存)’ – 지극히 작은 자 안에 계신 예수
오늘 말씀의 핵심 반전은 37절과 44절에 나타난다. 의인들도, 악인들도 같은 질문을 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나이까(혹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 무의식적인 선행을 한 의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무언가를 했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들은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품 자체가 사랑으로 변화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웃을 도왔던 것이다.
반면 악인들은 만약 눈앞의 인물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발 벗고 나섰을 것이다. 그들은 권력자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는 민감했지만,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는 무관심, 외면했다.
2.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예수님은 높은 보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병든 자의 신음 속에, 소외된 자의 눈물 속에, 감옥에 갇힌 자의 외로움 속에 계신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대하는 태도가 곧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3. 마지막 심판의 엄중함 - 영벌과 영생
46절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준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중도적인 길은 없다. 양 아니면 염소이다.
1. 무관심은 죄이다. 왼편에 선 자들이 정죄받은 이유는 그들이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의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았다. 성경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 했다
약 4:13-17 / 오늘이나 내일 이러이러한 도시로 가서 일년쯤 자리잡고 앉아 한밑천 잡아 보자'고 계획하는 이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14) 내일 일을 어떻게 기약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아침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여기 있으나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릴 존재입니다.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해야겠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마음대로 계획을 벌이고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러한 자기 확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17)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관심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질병이자, 신앙인이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영적 태만이다.
2. 심판의 필연성. 우리는 흔히 사랑의 하나님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공의의 심판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며, 그 삶의 열매로 우리는 영원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 나의 작은 친절, 무심코 지나친 이웃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영원한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 이 비유는 외식하는 신앙인을 고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율법이나 선지자를 패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5:15)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종교 생활이 어떠했는가?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랑이 없었다.
마 23:3-4 /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저들은 율법 준수자, 안식일 준수자임을 내세우지만 죽은 신앙이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인데도 작은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외식이 어디 있는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 비유가 기록된 본문의 앞장인 마 23:13, 15, 16, 23, 25, 26, 27, 29절을 보면 일곱 번이나 반복하면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셨다. 심지어 화 있게 될 자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시며 헛된 신앙을 강력하게 꾸짖으셨다.
눅 13:23-28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강력한 경고의 비유이다. 지옥이 기다리는 것을 왜 피하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비유를 보면서 믿음이 있기에 죄를 지어도 괜찮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거짓 믿음을 제거하라. 이제부터라도 사랑을 당장 실천하라. 행함 있는 믿음이 되자.
▶ 아울러 우리의 잘못된 선입관(先入觀)을 고쳤으면 한다. 구원받은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얼핏 보면 이 비유는 양과 염소로 분류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행한 선행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행이 구원받은 조건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선행은 구원받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믿음에 대한 증거이다. 구원받은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어려운 곤경에 처한 형제 자매를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 진리를 붙잡기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개신교는 바로 이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진리를 오해한다. ‘나는 선행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행을 강조하면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오해이다. 시정해야 할 점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선언하지만 동시에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사도 야고보는 강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에게 구원 받은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열매를 보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전의 양면처럼 믿음과 행함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약 2:26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심판 받은 사람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악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과 같은 악인들이 심판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영벌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의 죄가 무엇인가? 그들이 살인죄, 간음, 사기죄를 지었나? 아니다. 단지 ‘하지 아니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영원히 지옥불에 던지신다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일 수 있다. 그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단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행치 않았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이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일찍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여러 사도들을 통해서도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갈 6:10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요일 3:14-19 /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5)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달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살인을 하는 자입니다. 살인을 하려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많은 돈을 가지고 잘 지내면서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들이여, 사랑한다고 혀에 발린 말을 이제 그만 두고 진정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19)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오늘 우리 곁의 예수님을 만나자
본문은 우리에게 심오한 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도 강력한 실천적 결단을 촉구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예수님을 찾고 있다. 화려한 찬양과 예배의 분위기 속에서만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 문밖 그리고 소외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지극히 작은 자는 멀리 있지 않다. 교회 내에서도 있거니와 가족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으며,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이웃일 수도 있다. 그들을 대할 때 ‘이분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믿음으로 손을 내밀자.
오늘 하루, 이번 주간, 이번 달, 올해 그리고 앞으로 거창한 계획보다 작은 실천 하나를 시작해 보시기 바란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위해 작은 물질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그리고 시간을 나누자. 그때 심판의 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오늘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기도문 / 사랑의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깁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변의 아픔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양의 무리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참고로 하면 유익한 글들
❚ 성 마틴(St. Martin)과 거지 (전승) / 이 예화는 본문의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라는 대목을 설명할 때 가장 고전적이고 강력한 예화이다. 4세기 프랑스 투르의 주교였던 마틴(Martin)이 아직 군인이었을 때의 일이다. 추운 겨울날, 그는 성문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며 신음하는 한 거지를 발견했다. 당시 마틴에게는 줄 돈이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군용 망토뿐이었다. 마틴은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자신의 망토를 반으로 잘라 거지에게 덮어주었다. 사람들은 반쪽짜리 망토를 입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었지만, 마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밤, 마틴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틴이 낮에 거지에게 주었던 그 반쪽짜리 망토를 입고 계셨다. 주님은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망토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청년 마틴이 나에게 입혀준 것이다.’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이 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다 /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적선을 원하며 다가왔다.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 도와주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거지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받을 때 큰 감격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 마틴' 각색(脚色) / 신앙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작은 자'가 누구인지를 구체화할 때 유용하다. 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내일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할아버지는 설레는 마음으로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온종일 창밖을 살폈다. 하지만 기대했던 주님은 오지 않고, 추위에 떠는 청소부, 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여인,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소년만이 가게 앞을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실망하면서도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목도리를 둘러주고, 화해를 붙여주며 하루를 보냈다. 밤이 되어 할아버지가 ‘주님, 왜 오지 않으셨나요?’라고 묻자,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마틴아, 나는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아갔단다. 네가 차를 대접한 청소부가 나였고, 네가 목도리를 준 여인이 나였으며, 네가 용서한 그 소년이 바로 나였단다.’ 예수님은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인도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 / 테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선행에 대한 교훈을 듣고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테레사에게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라고 말하며 선행을 격려하곤 하였다. 수녀가 되어 오직 주님께 헌신하던 테레사 수녀가 ‘제2의 부르심’이라 부르는 사건을 접하였다. 인도에서 삼등 열차를 타고 다르질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어떤 신비적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무심코 마태복음 25장을 펼치고 읽고 있었는데, 본문 말씀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테레사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 성서 말씀이 폐부 깊숙이 꿰뚫는 것 같았습니다. 거룩한 말씀의 광채 앞에서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처럼 멈추어 서서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테레사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그 부르심 이후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자들이 있는 콜카타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을 도울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만지듯 부드럽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십시오.’ 테레사와 함께 했던 수녀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봉사가 곧 예배였다. 그들은 손가락 다섯 개를 차례대로 하나씩 구부리는 손짓을 서로 피곤할 때마다 인사처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의미는 ‘You / did / it / to / me’의 다섯 개의 단어로, 마태복음 25장 40절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 현대판 예화 : 마지막 시험 / 현대적인 맥락에서 ‘무관심’과 ‘실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때 효과적이다. 미국의 한 신학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설교 과제를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지금 당장 옆 건물로 건너가 설교 평가를 받아야 한다. 늦으면 점수가 깎인다.’라고 재촉했다. 학생들이 급히 복도를 지나갈 때, 문 앞에 한 남자가 쓰러져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랑과 자비’에 대해 설교하러 가던 학생들 대다수가 신음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심지어 그를 밟고 지나간 학생도 있었다. 머리로는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실재하는 고통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반면, 성적이 낮고 평범했던 한 학생은 설교 시간에 늦을 것을 각오하고 그를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갔다. 그날의 진짜 설교 합격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 13살의 바비 힐이라는 미국 군인의 아이 / 어느 날 이 아이는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책을 읽고 유럽 지역 미 공군 사령관 리처드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산 아스피린 한 병을 보냅니다.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처 박사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린제이 장군은 이 감동스런 소년의 이야기를 방송국에 전해 주었고, 이 이야기가 방송에 나가자 유럽 사람들은 40만 달러어치의 약품을 모아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제공한 비행기 편에 바비 군까지 동승시켜 슈바이처 박사에게 그것들을 보냈다. 그 약은 아프리카 빈민들을 치료하는 데 귀중하게 쓰여졌다. 한 어린이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큰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다.
❚ 『새벽을 깨우리로다』란 책으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 / 70년대 청계천 뚝방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건강도 연약해지고, 아무리 도와받자 좋은 결과도 나오지 않자 낙담하여 빈민 목회를 그만 접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떤 집에서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세 아이가 기진해 누운 채 힘없이 울고 있었다. 그들에게 ‘왜 우느냐’라고 물으니 그 중 큰 애가 힘없이 ‘배고파요’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구류되는 바람에 아이들이 사흘 동안 굶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막내 아이가 김진홍 목사님을 바라보며 ‘배 고파요’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 아이의 눈에서 순간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장면을 김 목사님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때 세살배기 막내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엄마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살짜리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눈물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불과 2, 3초였지만 분명히 예수님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에 포개져 나타나 나를 깊은 눈으로 보시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 컴패션(Compassion-국제어린이양육기구) / 에버렛 스완슨 목사는 한국 전쟁 중인 1952년에 미군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집회를 마치고 종로 부근의 한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눈 쌓인 종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쓰레기 차에 쌓인 쓰레기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이 있는 것을 보고 뛰어나갔다. 손짓 발짓 해 가며 어린아이의 손을 보았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목사님은 직접 쓰레기 차 위에 올라갔다. 트럭 위에 올라갔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추운 날씨에 종로에서 얼어 죽은 전쟁고아들의 시신이었다. 그는 지난밤 그 아이들과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편히 잤다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 있는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에버렛, 보았느냐? 이제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래서 시작된 사역이 ‘컴패션’(Compassion)이다. 주님의 음성 앞에 응답했던 한 사람을 통해 전쟁고아 수십만 명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