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 주최 제13회 신앙체험수기 공모전 응모 |
하느님께서 나를 이끄신 은총 위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순 훌쩍 넘어버린 이 나이에 신앙 체험 수기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바치는 마음으로 진솔하고 겸손하게 쓰겠습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에서 오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내 위로 언니 오빠가 네 명이나 저세상 갔기에 막내이었지만 맏딸로 순번이 바뀌었다. 그 시절 점장이 말만 믿었던 때이어서 이번에 딸 낳으면 대가 이어지고, 아들 낳으면 대가 끊어진다고 하였다. 부모님은 점장이 말대로 두려운 마음 앞섰다. 성주 소재지 한계리 위치한 감응사(感應寺)에 가서 백일 불공 올려 나를 낳았다.
어느덧 성장하여 평범한 청년 아가씨 되었을 때이다. 그 시절 대학 가려고 입시반 공부하였다. 부모님은 딸이라고 남동생들에게 기회를 주라고 하시며 원서 제출 못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구미시의 소재 삼성그룹 회사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때는 집이 멀어서 기숙사 생활하였다. 회사에서 바쁜 하루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학업은 중단되었어도,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취미생활로 새벽에 피아노 레슨 받으며 저녁에는 서예 공부하였다. 그러나 종종 마음 한가운데에 이유 모를 허전함이 밀려오곤 하였다. 삶은 분명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임이 내 안의 깊은 곳까지 닿지 않는 듯한 느낌, 공허함이 들 때가 종종 나를 윽박지르는 듯하였다. 그런 시간을 도돌이표 같은 일상생활 보내었다.
그 시절 직장동료이던 룸메이트가 늘 퇴근 후에는 이부자리 깔고 앉아 지금 알고 보니 묵주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신기하게도 동료의 기도하던 모습에 빨려 들어감을 느끼었다. 그때는 하느님, 성모님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손짓 하여 물끄러미 넋 놓아 룸메이트 친구를 쳐다보았다. 기도를 마친 룸메이트에게“성당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어보았다. 입교하려면 직장인이어서 우선 한국천주교 통신교리부터 신청하라고 안내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통신교리 신청하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문답지 채점이 궁금하였으며 받자마자 보내고, 또 받아 가며 몰입하여 열심히 하느님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로 수료증 받았다. 안내장에 신자가 되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그 시절 내비게이션, 길 찾기 등이 없던 시절이다. 동료에게 “구미에서 성당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물어보았다. 구미역 부근 모 본당을 찾아주었다. 퇴근길에 성당으로 찾아갔다. 성당으로 가는 길은 자그마하게 떨림이 있었다. 저녁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성당의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퍼지는 노란 불빛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이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때는 목요일 저녁 미사참례 시간이었다. 조용히 성당 문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십자가 아래 촛불이 찰랑이는 침묵 속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그 순간 알았다. “아, 여기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름다우신 성모님이 계신 곳, 내가 찾아 헤매던 그곳이구나.”로 한없이 빠져들어 갔던 것 같다.
그날부터 6개월 교리 신청하였으며 수녀님께 이수하였던 통신교리 확인서도 보여드렸다. 주님이 부르던 날 나는 응답하였고, 죄 많은 저에게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찬송 찬미하였다. “요셉피나”라는 세례명 주시어 당신 딸로 불러주신 그 감격 신비함에 너무도 가슴 벅찼다.
첫 신앙 활동으로 청년회 단체에 가입하였다. 활동하던 그해에 두 해마다 주어진다는 견진성사가 있던 해이다. 나는 그때 본당 신부님께 첫 세례 받은 지 몇 개월 안 되어 때가 되지 않을 듯하여 망설이었다. 그랬더니 신부님이 “줄 때 받아둬! 하시며 견진성사 받을 준비 해라.”고 하시었다. 순차적으로 견진세례 받으며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며 웃고, 울며 보내었던 시간 들이 내 신앙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그 시절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방한 소식에 우리는 들떠 함께 200주년 기념 상품 판매 봉사하며 교회의 숨결을 느끼었다. 그때는 젊음의 열정이 하느님을 향해 불붙어 타오르던 성령은 내 삶의 가장 행복하고, 충만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결혼하여 비신자 가정에 신혼생활로 교황님 뵙지 못하여 슬프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매스컴을 통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 나이 스물네살 때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 한국방문 해이었다. 아버지가 이종 여동생 시켜 결혼 독촉으로 연락이 왔다. 이모 지인이라며 선보라고 하였다. 스무날 만에 처제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사성을 보내었다. 그 시절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만 되는 줄 알고 진행에 휩쓸렸다. 신랑 될 사람이 “비신자”라고 한다. 부모님 종교는 불교라 하였다. 본인은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이고! 예수님 골고타 언덕 올라 가실 때 그 고통이 주어 저 첩첩산중이구나.” 내심 짐작을 하였다.
예비 신랑이 “비신자”라는 말을 들은 주변에 있던 지인이었던 사람은 나와 경우가 똑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필수로 관면혼배라는 것을 해야만 된다고 말해주었다. 나에게 일러준 그 사람은 관면혼배 할 시기를 놓쳐 이혼하여서 조당에 걸려 슬프다고 한다. 그 조언으로 예비 신랑 될 사람에게 신앙생활에 뒤탈 없도록 쐐기를 단단하게 박아두었다. 그때는 학벌이나 돈벌이에 대한 조건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무조건 종교가 걸림돌이 될 듯하여 예비 신랑에게 “나는 대모 자격까지 있는 세례를 두 번이나 받았으니 성당못 가도록 하면 이 결혼 못 한다.” 하였다. 그러자 예비 신랑은 시부모한테 전달하였다. 혼인 후 들은 얘기이다. “아가씨한테 가도록 허락한다고 하여라.”라고 하였다. 그때는 얼렁뚱땅 넘기는 말인 줄 몰랐다. 예비 신랑은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묻기에 서둘러 신부님께 알렸다. “결혼 날짜가 무엇이 그리 바뿌노.” 하며 사제관으로 오라고 하였다. 부랴부랴 성물방 반지를 준비하여 서약서 작성하고, “관면 혼배성사” 하였다.
스무날 만에 번갯불에 콩 굽듯 하여 올린 혼인 하던 날 친정어머니가 교통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그야말로 일사불란하였다. 이 주 만에 어머니가 깨어나셨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깨어나신 어머니를 위해 감사기도 드리었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범어시장 안에 단독주택 세 얻어 신접살림 차렸다. 구미에서 교적을 범어성당으로 옮겼다. 그렇게 신혼생활로 접어들어 허니문 베이비로 큰아들 낳았다. 큰아들 낳았던 그해 하청공장 운영하던 남편이 본사 부도로 인하여 덩달아 문을 닫게 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겹치면서 결혼 초기는 사막을 걷는 듯 힘겨웠다. 마음이 지칠 때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흔들릴 때마다 주머니 속 묵주를 꼭 손에 쥐며 간절히 성모님께 매달렸다.
나는 신앙만은 지켜내리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신비를 되뇌며 또 되뇌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생활 속에 육아까지 힘 들어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이를 악물고 살아갈 방도를 생각해야 하였다. 남편은 소규모로 조금씩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 둘째가 태어나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 보내기로 하였다. 아이들을 보아가며 할 수 있는 프리랜서 일을 찾아보았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배워 일일 학습지 배달로 생활비 보태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 시절 육아하랴, 새내기라 아이들 키우며 살아가는 생활은 너무도 힘들었다. 생활에 찌들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손수 십자가 지고 걸으신 십자가 의길 받아들여 무조건 열심히 살았다. 성모님의 성가정을 본받으리라. 꿈꾸어가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생활은 신앙생활 해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