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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詩藁卷之三十四 / 詩 / 驪興淸心樓題次韻
冠蓋星馳汗鼻端。一登於此盡歡顏。涼生几案風涵樹。翠滴杯盤雨捲山。長袖輕裾飄席上。繁絃急管烈楹間。何人不感君恩重。鞅掌還兼物外閑。
恨無樓記冠篇端。誰名淸心闕署顏。㧹水功高馬岩石。浮天勢大龍門山。燠居雪落軒窓外。涼臥風來枕簟間。況是春風與秋月。賞心美景更寬閑。
病後驪江幾往還。欲賡高韻泚吾顏。流連最好半篙水。登眺難窮千疊山。明月淸風來左右。白鬚紅頰坐中間。超然自是神仙境。且問牧翁閑不閑。
倦飛孤鳥已知還。晩景淸游得逞顏。天命奚疑卽彭澤。世緣終淺似香山。江湖興味三生外。鍾鼎功名一夢間。歌詠大平吾事業。從今自號李閑閑。
中州人有號閑閑者今偕用云
端字落韻代以還字。狂僭之甚。覽者幸恕之。穡之往來呂江久矣。樓上詩板。非不讀過。一二句非不成。然未有索予下筆者。以是故卒無成篇而去。蓋其時。未嘗不悤遽故也。今之避暑甓寺也月餘矣。而知郡團練李公柬請之又廑。於是慨念古今。情動于中。且自念衰也甚矣。掛名壁間。實天幸也。遂作四首。前二首詠樓。後二首自詠云。
목은시고 제34권 / 시(詩) / 여흥(驪興) 청심루(淸心樓)에 걸린 시에 차운하다.
코끝에 땀방울 맺힌 채 사신들 급히 달려와서 / 冠蓋星馳汗鼻端
여기에 한번 올라서면 모두들 기뻐서 얼굴 활짝 / 一登於此盡歡顔
나무가 바람 머금으면 궤안에 서늘한 기운 돋고 / 涼生几案風涵樹
산에 비가 걷힌 뒤엔 술잔에 푸른빛 듣는다오 / 翠滴杯盤雨捲山
길고 날렵한 춤 소매가 자리 위에 나부끼고 / 長袖輕裾飄席上
가야금과 피리 소리 기둥 사이에 휘몰아치면 / 繁絃急管烈楹間
누군들 임금님 은혜 중한 줄 느끼지 못하리오 / 何人不感君恩重
공무로 바쁜 틈에서도 물외의 한가함 얻었으니 / 鞅掌還兼物外閑
첫머리에 누대의 기문 없는 것이 유감일세 / 恨無樓記冠篇端
누가 청심 이름만 짓고 글씨는 빠뜨렸는고 / 誰名淸心闕署顔
말이 물을 얻어 공이 드높은 마암의 바위요 / 得水功高馬巖石
용이 하늘에 떠서 형세가 웅대한 용문산이라 / 浮天勢大龍門山
따스히 거할 겨울엔 창문 밖으로 눈 내리고 / 燠居雪落軒窓外
시원히 누울 여름엔 침석에 바람이 서늘한데 / 涼臥風來枕簟間
더군다나 춘풍과 추월의 풍류가 또 따르나니 / 況是春風與秋月
상심과 미경이 더더욱 느긋하고 한가하다오 / 賞心美景更寬閑
병든 뒤에 여강을 몇 차례 왕래하였건만 / 病後驪江幾往還
멋진 시에 화운하려니 얼굴에 땀이 흥건 / 欲賡高韻泚吾顔
언제 노닐기 좋으냐면 상앗대 반쯤 물이 찰 때 / 流連最好半篙水
수없이 겹친 산들 역시 조망을 다하기 어렵다오 / 登眺難窮千疊山
좌우에서 오는 것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 / 明月淸風來左右
중간에 앉아 있는 이는 흰 수염과 붉은 뺨 / 白鬚紅頰坐中間
여기는 티끌을 벗어나서 신선이나 살 곳인데 / 超然自是神仙境
물어보세 목옹의 마음은 한가한지 어떠한지 / 且問牧翁閑不閑
날다 지치면 외로운 새도 돌아올 줄 아는 법 / 倦飛孤鳥已知還
만년에 맑게 노니노라니 얼굴빛이 펴지누나 / 晚景淸游得逞顔
천명을 즐기며 의심이 없는 건 바로 팽택이요 / 天命奚疑卽彭澤
세상과 인연이 얕은 것은 흡사 향산거사로세 / 世緣終淺似香山
강호에 대한 흥미는 삼생을 넘어 영원히 / 江湖興味三生外
금석에 새겨질 공명은 일몽 사이에 잠깐 / 鍾鼎功名一夢間
태평을 노래하는 것이 나의 사업이니 / 歌詠大平吾事業
이제부턴 내 호를 이한한이라 하리라 -중주(中州) 사람 중에 한한(閑閑)이라는 호를 가진 자가 있기에, 지금 이를 빌려 써 보았다. / 從今自號李閑閑
단(端) 자의 운(韻)을 쓰지 않고 환(還) 자로 대신한 것은 너무나도 참람된 일인데, 보는 이들이 양해해 주면 좋겠다. 내가 오래전부터 여강(呂江)을 왕래하였으니, 누대 위의 시판(詩板)을 읽고 지나가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또 한두 구절쯤 지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붓을 잡고 한번 써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끝내는 완성하지 못한 채 그곳을 지나가곤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이 급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륵사(神勒寺)에서 한 달 남짓 피서(避暑)를 하고 있는 동안, 지군(知郡)인 단련사(團練使) 이공(李公)이 편지를 보내 또 나의 시를 간절히 청해 왔다. 이에 예와 오늘에 대한 감개한 생각이 들면서 정회가 마음속에서 뭉클 일어남과 동시에, 너무도 쇠한 지금 누대의 벽 사이에 나의 이름을 걸어 놓게 된 것 역시 실로 천행(天幸)이라는 생각이 들기에 마침내 네 수의 시를 짓게 되었다. 위의 두 수는 누대를 읊은 것이고, 아래의 두 수는 나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주-D001] 말이 …… 바위요 : 마암(馬巖)은 여주(驪州) 동쪽 1리 여강(驪江) 가에 있는 거대한 바위 이름인데,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郡)의 이름을 황려(黃驪)라 하였고, 마암이라는 바위 이름이 붙여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라는 말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여주목(驪州牧)에 나온다.[주-D002] 상심(賞心)과 미경(美景) : 감상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경치를 뜻하는데, 여기에 좋은 계절[良辰]과 즐거운 일[樂事]을 합쳐서 보통 사미(四美)로 일컫는다.[주-D003] 날다 …… 법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하게 봉우리 위에서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안다.[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나온다.[주-D004] 천명(天命)을 …… 팽택(彭澤)이요 : 80여 일 동안 팽택 영(彭澤令)을 지내고 돌아와 지은 도잠의 〈귀거래사〉 맨 마지막에 “자연의 변화 따라 죽을 때 되면 가면 그뿐, 주어진 천명 즐기면 되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이 나온다.[주-D005] 세상과 …… 향산거사(香山居士)로세 : 향산거사는 백거이(白居易)의 호인데, 소식(蘇軾)의 시에 “향산의 늙은 거사님과 정녕 흡사하나니, 세상 인연은 얕고 도의 뿌리는 깊은 그것.[定似香山老居士 世緣終淺道根深]”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28 軾以去歲春夏侍立邇英云云》[주-D006] 한한(閑閑) : 한한노인 혹은 한한거사라고 자호(自號)했던 금(金)나라의 조병문(趙秉文)을 말한다. 학문을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능했으며, 육경(六卿)의 관직에 이르는 동안 항상 바른 도로써 임금을 간하였고, 집에서는 한사(寒士)의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金史 卷110》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3
| 태조 | 1 | 1392 | 임신 | 洪武 | 25 | 65 | 4월, 衿州로 유배되다. ○ 6월, 驪興으로 옮기다. ○ 7월, 長興으로 옮기다. ○ 10월, 석방되어 韓山으로 돌아가다. |
| 태조 | 3 | 1394 | 갑술 | 洪武 | 27 | 67 | 부인상을 당하다. |
| 태조 | 4 | 1395 | 을해 | 洪武 | 28 | 68 | 5월, 驪江에서 피서하다. ○ 가을, 關東을 유람하고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다. ○ 11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輔國崇祿大夫 韓山伯에 봉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다. |
| 태조 | 5 | 1396 | 병자 | 洪武 | 29 | 69 | 5월, 여강에서 피서 중 졸하다. ○ ‘文靖’의 시호를 받다. ○ 10월, 韓山 麒麟峯 서쪽 산록에 묻히다. |
| 태조실록7권, 태조 4년 4월 27일 庚寅 1/3 기사 /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이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각도 수령으로 병마 단련을 겸하게 하다 국역이무(李茂)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도승지 한상경(韓尙敬)으로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를 삼고, 장지화(張至和)로 대신 도승지를 삼았으며, 유경(劉敬)으로 중추원 부사를 삼고, 각도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병마단련(兵馬團練)을 겸하게 하여 3품을 사(使), 4품을 부사(副使), 5품·6품을 판관(判官)이라 하고, 고을이 작은 곳은 두 〈고을의〉 수령이 서로 그 직을 겸하게 하였다. 대개 일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은 군마를 거느리고 나가게 하고, 한 사람은 남아서 두 고을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원문○庚寅/以李茂判中樞院事, 以都承旨韓尙敬爲僉書中樞院事, 以張至和代之, 以劉敬爲中樞院副使。 以各道守令, 皆帶兵馬團練, 三品曰使, 四品曰副使, 五六品曰判官。 郡縣小者, 二員互兼其職, 蓋欲有事則一員率兵以行, 一員留治二縣。 |
| 익재난고(益齋亂藁) 이제현(李齊賢)생년1287년(고려 충렬왕 13)몰년1367년(공민왕 16)자중사(仲思)호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본관경주(慶州)초명지공(之公)시호문충(文忠) 益齋亂稿卷第三 / 詩 / 送完山李半刺 楊柳飛綿草似茵。靑郊立馬淚霑巾。春風無限相思意。說與江南坦上人。僧禪坦能詩 ............................ 급암시집(及菴詩集) 민사평(閔思平)생년1295년(고려 충렬왕 21)몰년1359년(공민왕 8)자탄부(坦夫)호급암(及菴)본관여흥(驪興)시호문온(文溫)특기사항최해(崔瀣)와 교유 及菴先生詩集卷之二 / 律詩 大叔菊軒公。新構野莊。與吾壽春莊隔江相望。六月廿一日。予適來吾莊。聞公亦到新莊欲謁。而風作浪湧。不可禁當。不勝鬱鬱。因成絶句 二首。拜呈左右。金永煦 百頃平湖似鏡光。漁村兩岸正相望。晚風吹浪忽難渡。幾恨無因謁渭陽。 樓臺已見白蓮社。風浪未過靑草湖。此是坦師當日句。朗吟空復飮村酤。禪坦 ............................ 허백당집(虛白堂集) 성현(成俔)생년1439년(세종 21)몰년1504년(연산군 10)자경숙(磬叔)호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본관창녕(昌寧)시호문대(文戴) 虛白堂詩集卷之六 男世昌編集 / 詩 / 驪州淸心樓禪坦韻 君不見昔時學士到江上。歌吹殷空樽罍稠。簪珥墮地人爭收。又不見今時學士到江上。煙波滿目空悠悠。芳草惹恨連長洲。篝燈照牕冷無寐。江風入骨淸於秋。客子吟詩主人笑。主人勸客客掉頭。謫仙襟韻竟寂寞。不如槌碎黃鶴樓。脫▦仰空叫明月。月本無言天亦幽。桑門釋子尙欲携妓恣歡謔。梨園逸老豈肯爲子須臾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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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詩藁卷之三十五 / 咸昌吟 / 寄驪興權知郡 二首
遠謫經過數。浮生老病餘。如逢南計點。爲我謝勤渠。
甓寺鎭流水。經函棲素塵。更宜深照覷。曾此祝先人。
목은시고 제35권 / 함창음(咸昌吟) / 여흥(驪興)의 권 지군(權知郡)에게 두 수 부치다.
멀리 귀양 가면서 벌써 몇 차례 들른 이곳 / 遠謫經過數
뜨내기 인생도 이제는 늙고 병든 나머지라 / 浮生老病餘
행여 남 계점사를 만날 기회 있거들랑 / 如逢南計點
나 대신 고맙다고 말이나 전해 주었으면 / 爲我謝勤渠
흐르는 강물 진압하는 전탑의 절간 / 甓寺鎭流水
불경을 담은 궤짝에도 먼지만 수북 / 經函棲素塵
이 절에 관심을 더욱 기울여 주시기를 / 更宜深照覰
옛날에 선인의 복을 여기서 빌었더라오 / 曾此祝先人
[주-D001] 계점사(計點使) : 각 지방의 호구(戶口)와 토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다.[주-D002] 흐르는 …… 절간 : 신륵사(神勒寺)가 여강(驪江)을 굽어보며 서 있다는 말이다. 이 절에 흙벽돌로 쌓은 다층(多層)의 전탑(塼塔)이 많기 때문에 벽사(甓寺)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3
| 이 절에 관심을 더욱 기울여 주시기를 / 更宜深照->覷*엿볼 처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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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詩藁卷之三十五 / 驪興吟 / 驪興守。拏舟來邀老夫同泛。中流四顧可樂也。乘興遡流而上。至鸕鶿岩小留。廻舟順流而下。信乎其快也。醇飮鮮飧。孤吹隻弄。實有餘味。晚歸樓上。如仙遊而還家也。明日援筆錄之。
一片江山似玉人。遨頭蕭灑自相親。孤吹隻弄鄙兩部。醇飮鮮飧眞八珍。忽有長風涼到骨。可誇大暑汗收身。歸來豪氣難除却。誰道仙遊更隔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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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詩藁卷之三十五 / 咸昌吟 / 上都堂
身似粘泥絮。心同帶雨蓮。廟堂如見記。貼字許從便。寧海尋親舊。韓山拜祖先。有時游甓寺。歷懇祝堯年。
목은시고 제35권 / 함창음(咸昌吟) / 도당(都堂)에 올리다.
몸은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 같아도 / 身似粘泥絮
마음은 비에 젖은 연꽃과 함께하오 / 心同帶雨蓮
묘당이 혹 옛 추억을 기억해 주신다면 / 廟堂如見記
편의에 따라 살도록 주선 좀 해 줬으면 / 貼字許從便
영해에 내려가서 친구도 찾아보고 / 寧海尋親舊
한산 땅에서 조상님들도 성묘하고 / 韓山拜祖先
그리고 때로는 벽사에서 노닐면서 / 有時游甓寺
정성을 바쳐 요년을 축수하리이다 / 瀝懇祝堯年
[주-D001] 몸은 …… 같아도 : 자유를 구속당한 채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는 원래 마음이 안정되어서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는 선승(禪僧)의 경지를 비유한 말인데, 목은이 이것을 다른 의미로 전용한 것이다. 송(宋)나라 시승(詩僧) 삼료(參寥)가 기녀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고맙구려 술잔 앞의 요조한 여인이여, 초 양왕 들뜨게 한 그윽한 꿈을 선사하니. 하지만 선승의 마음은 진흙에 붙은 버들개지라서, 봄바람 따라 위아래로 흩날리지 않는다오.[多謝尊前窈窕娘 好將幽夢惱襄王 禪心已作沾泥絮 不逐東風上下狂]”라고 지은 시가 송나라 조영치(趙令畤)의 《후청록(侯鯖錄)》 권3에 나온다.[주-D002] 정성을 …… 축수하리이다 : 임금이 복을 많이 받기를 빌겠다는 말이다.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수(壽)와 부(富)와 다남(多男)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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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10권 / 시(詩) / 신륵사(神勒寺)에 놀러 가려 했다가 가지 못하고 인하여 단운(短韻)의 시를 짓다.
먼 산봉우리는 긴 강의 밖이요 / 遠峀長江外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다 / 疏松翠石傍
사찰은 신선의 경계가 열리었고 / 招提開福地
보제의 영당은 환하게 트이었네 / 普濟敞眞堂
현령은 자주 홀을 허리에 꽂고 / 縣令頻腰笏
산승은 홀로 담장을 향하누나 / 山僧獨面墻
어떻게 하면 거룻배를 찾아가서 / 何當尋野艇
광활함 속에 맑은 휘파람 불어 볼꼬 / 淸嘯倚蒼茫
[주-D001] 보제(普濟) : 고려 말기에 보제 존자(普濟尊者)라는 사호(賜號)를 받은 고승(高僧) 혜근(惠勤)을 가리키는데, 그의 호는 나옹(懶翁)이며,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주-D002] 현령(縣令)은 …… 꽂고 : 당(唐)나라 때 하역우(何易于)가 익창 영(益昌令)으로 있을 적에 자사(刺史) 최박(崔朴)이 봄놀이를 하기 위해 빈객들과 함께 배를 타고서 백성들을 불러 배를 끌게 하려고 하자, 하역우가 홀(笏)을 허리에 꽂고 몸소 배를 끌므로, 자사가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하역우가 말하기를, “봄을 당하여 백성들은 논밭을 갈고 누에도 길러야 하므로 그들을 부릴 수가 없고, 현령은 한가하니 의당 그 노고를 대신해야겠다.”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주-D003] 산승(山僧)은 …… 향하누나 : 승려가 면벽(面壁)하고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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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詩藁卷之三十四 / 詩 / 驪江宴集
驪江形勝天下稀。四時風景披天機。我初來游適夏月。長風吹舟涼滿衣。郡樓百尺縱雙目。野平山遠牧煙霏。誦經甓寺報四恩。罷會進酒魚又肥。臨流高興知者少。兪仙自負誠難譏。春花滿山波底紅。秋月沈璧天無風。我皆不及好時節。況此氷雪成嚴冬。方蒙賜環自踊躍。直似野鶴辭樊籠。雙淸震器杖鉞臨。星山陽村俄會同。大守誠心樂嘉賓。獻酬禮成和氣融。長氷自消雪又來。明月欲出雲還開。天憐我輩久流落。慰此同把黃金杯。衆陽彙征自今始。歌我此曲登春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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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집(陶隱集) 이숭인(李崇仁)생년1347년(고려 충목왕 3)몰년1392년(공양왕 4)자몽가(蒙哥), 자안(子安)호도은(陶隱)본관성주(星州)(경산(京山))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이집(李集)ㆍ정도전(鄭道傳) 등과 교유. 삼은(三隱)의 한 사람
陶隱先生詩集卷之二 / [詩] / 驪江宴集
使相威名大。先生德業崇。天涯數年別。江上一樽同。野曠山如畫。波恬日政烘。彙征從此始。酬唱興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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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7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여강 연집시(驪江宴集詩) / 권근(權近)
황려고을 산수가 워낙 맑고 기교한데 / 黃驪山水自淸奇
관개(옛날 귀족이 타던 수레)들 모이는데 앞서 기약 있은 듯 / 冠蓋相逢若有期
별원에 현가소리 자리가 질서 있고 / 別院絃歌筵秩秩
긴 강에 구름과 달 밤도 더디 가누나 / 長江雲月夜遲遲
띄운 배는 아득히 은하수로 통하고 / 浮査縹緲通霄漢
날리는 눈은 사뿐사뿐 술잔 위에 떨어지네 / 飛雪霏微落酒巵
다행 여러분을 모신 이 성한 모임 / 幸與諸公陪盛集
풍류랑 문채랑이 어느 때보다 낫구나 / 風流文彩勝當時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양촌집(陽村集) 권근(權近)생년1352년(고려 공민왕 1)몰년1409년(조선 태종 9)자가원(可遠), 사숙(思叔)호양촌(陽村)본관안동(安東)초명진(晉)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정도전(鄭道傳)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
陽村先生文集卷之七 / 南行錄 / 驪江宴集詩 幷序
上卽位三年辛未(1391,공양왕3)冬十有一月。吾座主韓山牧隱先生承恩命朝京。次于驪江別墅。都觀察使安公設酌以慰。日旣暮。天朗月淸。登舟中流。興酣而罷。詰朝江氷合。舟難通。越明日。都評議使司牒至。左代言臣詹傳旨若曰。韓山君 穡 在忠驪間。都觀察使其飭廚傳。以禮敦遣。安公祗承。又往置酒。是日雲陰微雪。江氷自釋。先生又與安公同舟沿流而下。時侍座者簽書種學。先生男也。驪興郡守權緫。其甥也。近與都事李愚。俱門人也。獻酬成禮。相與懽洽。雲月微明。天水渺漫。恬波無浪。飛雪時落。亦舟中之一勝也。又明日。陶齋李學士承修文之命。馳馹而至。又與登舟如昨。陶齋。一時文章大手。而先生所試辛亥解元也。安公。雙淸相國之嗣。而雙淸卽先生之同年。世交甚篤。公早以文行淸愼。敭歷華要。今又以重選。專制一方。思輯民生。以宣上德。矧遭先生被徵入朝。豈不欲致誠意於左右。以副聖上優禮徵還之意哉。此其誠心所格。氷自渙釋。以成此日舟中之樂也。顧不美歟。驪江山水之勝。自古而稱。人事多乖。勝友難集。吾儕於流離之餘。値此會合。誠所難得。安公以專制之威萬務之繁。亦未易而得此也。又况仲冬嚴凝之時。浮舟游樂如今日者。不知其有幾。一坐之賓。望尊如韓山。威重如安公。文雅如陶齋。通顯豪英如諸公者相與同舟。又不知其有幾。自有此江以來眞絶無而僅有者也。近以不才。得與斯會。誠幸也。是不可以不誌。故作爲長句四韵一篇。奉獻都觀察使節下。無任慚汗之至。
黃驪山水自淸奇。冠盖相逢若有期。別院絃歌筵秩秩。長江雲月夜遲遲。浮査縹渺通霄漢。飛雪霏微落酒巵。幸與諸公陪盛集。風流文彩勝當時。
양촌선생문집 제7권 / 시(詩) 남행록(南行錄) / 여강연집시(驪江宴集詩) 병서(幷序)
상(上)이 즉위한 3년 신미(辛未) 겨울 11월에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본관) 목은 선생(牧隱先生)이 은명(恩命)을 받들고 명 나라에 조회하러 가다가, 여강(驪江)의 별서(別墅)에 머물렀다. 도관찰사(都觀察使) 안공(安公)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날이 저물자 하늘은 밝고 달은 맑았으므로, 중류에 배를 띄우고 흥이 다하여 파하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강물이 얼어서 배가 통할 수 없었고, 그 다음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공첩(公牒)이 왔는데, 좌대언(左代言) 신(臣) 첨(詹)이 임금의 뜻을 전하기를 ‘한산군 색(韓山君穡)이 충주ㆍ여주 사이에 있으니 도관찰사는 음식과 역마를 신칙하여 예로 우대하여 보내라.’ 하였다. 안공이 명을 받고 또 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날에 구름이 끼고 눈이 조금 내려 강 얼음이 저절로 풀렸으므로, 선생이 또 안공과 함께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왔다. 때에 자리에 모신 사람은 첨서(簽書) 종학(種學)인데 선생의 아들이고, 여흥 군수(驪興郡守) 권총(權總)은 선생의 생질이고, 근(近)과 도사(都事) 이우(李愚)는 함께 문인이다. 술을 드리고 받고 하면서 예를 이루어 서로 흡족하게 즐겼는데, 구름 달이 희미하게 밝고 하늘과 물이 아득히 맞닿았고 고요한 강에 물결이 없고 나는 눈이 때로 떨어지니, 또한 배 가운데의 한 운치였다. 또 명일에 도재(陶齋) 이 학사(李學士)가 수문(修文)의 명을 받고 역마를 달려 이르렀는데, 또 더불어 배에 오르기를 어제와 같이 하였다. 도재는 당시의 큰 문장인데, 선생이 시험보였던 신해년의 해원(解元)이고, 안공은 쌍청 상국(雙淸相國)의 아들인데 쌍청은 곧 선생의 동년(同年)이어서, 대대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은 일찍이 문행(文行)과 청신(淸愼)으로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지금 또 다시 뽑혀 한 방면을 전제(專制)하여 민생을 평화롭게 하고 임금의 덕을 선양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선생이 부름을 받아 입조(入朝)함을 만났음에랴. 어찌 좌우에 성의를 다하여 성상(聖上)께서 징환(徵還)하여 예우하려는 뜻에 부합하려 하지 않겠는가. 이에 그의 성심이 이르러 얼음이 절로 풀려서, 이날 배 가운데의 즐거움을 이룬 것이니, 아름답지 않은가. 여강(驪江) 산수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일컬어졌는데, 인사(人事)가 어그러짐이 많아서 좋은 친구가 함께 모이기 어려웠다. 우리가 유리하던 끝에 이 모임을 가졌으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것이고, 안공은 전제의 위엄과 만 가지 사무로 또한 쉽게 이 자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또 더구나 중동(仲冬) 추운 때에, 배를 띄우고 즐겁게 놀기를 오늘같이 한 것이 몇 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한 좌중의 손이, 명망이 한산(韓山)처럼 높고 위엄이 안공처럼 중하고, 문아(文雅)하기가 도재같고, 통현(通顯)하고 호영(豪英)하기가 제공(諸公) 같은 이가 서로 더불어 배를 탄 것이 또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이 강이 생긴 이래로 참으로 드문 일인데, 근(近)이 변변찮은 사람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장구 사운(長句四韻) 한 편을 지어, 도관찰사 절하(節下)에 받들어 드리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황려의 산수가 절로 맑고 기이한데 / 黃驪山水自淸奇
유람객이 줄 이으니 약속이 있는 것 같네 / 冠盖相逢若有期
별원에 음악소리 아름다운데 / 別院絃歌筵秩秩
긴 강 구름 달에 밤이 더디구나 / 長江雲月夜遲遲
뜬 배는 아득히 은하로 통하는데 / 浮査縹渺通霄漢
흩날리는 눈은 술잔에 떨어지네 / 飛雪霏微落酒巵
다행히 제공과 함께 성한 모임에 참여하니 / 幸與諸公陪盛集
풍류와 문채가 당시에 으뜸일세 / 風流文彩勝當時
[주-D001] 좌주(座主) : 은문(恩門)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국자감 시험에 합격한 자가 시관을 일컫던 말이다.[주-D002] 해원(解元) : 과거의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한 사람을 말하는데, 본래 향시를 해시(解試)라 하였다. 《주기수(珠璣藪)》에 “향시에 첫째로 합격한 것을 해원이라고 하며, 또는 해수(解首), 영해(領解), 발해(拔解), 발해(發解)라고도 한다.” 하였다.[주-D003] 황려(黃驪) : 경기도 여주(驪州)의 옛 이름.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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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하집(蒼霞集) 원경하(元景夏)생년1698년(숙종 24)몰년1761년(영조 37)자화백(華伯)호창하(蒼霞), 비와(肥窩)본관원주(原州)시호충문(忠文)특기사항오원(吳瑗), 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
蒼霞集卷之一 / 詩 / 驪湖雜詠 八首
余居驪湖。朝夕所遊者。淸心樓,燕子灘,馬巖,遊仙臺,笠巖,羊島,東臺,貝藪也。悠然自樂於湖山。不覺手舞而足蹈。百年瞬息。吾復何求於世也。
淸心樓
獨鶴西飛去。連江秋雨色。高樓不見人。長嘯情何極。
燕子灘
朝釣燕灘水。暮釣燕灘水。磯頭看月出。澹澹江雲起。
馬巖
獨坐馬巖石。彈琴復垂釣。煙波時極目。惟有白鷗叫。
遊仙臺
吹簫臺上月。夜靜秋江白。仙人何處去。鸞鶴杳無跡。
笠巖
巖上江月白。巖下江水空。夜深鷗鷺宿。獨有釣魚翁。
羊島
靑靑沙島草。日暮牛羊歸。曠野行人絶。時看白鷺飛。
東臺
明月東臺畔。繫舟芳草渚。夜深萬籟寂。獨與山僧語。
貝藪
日日採薪去。孤鴉啼古木。江空白露寒。客棹沙邊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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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齋先生文集卷之二十 / 雜著 / 東遊記
自靑川至驪州記
金剛。仙山也。擅名天下。而無福緣之淸勝。莫可到焉。故余每有一見之願。而瞻望不及。唯夢想馳神者。三十年于玆矣。歲戊辰暮春。叔父約三四同志。將謀東遊。余亦請行。蓋欲償宿昔之志也。前期而會靑川。參李氏祖妣忌祀。乃以二十一日己巳。發行。叔父乘屋轎。余與潭𦤎族叔 翊洙。以一馬替騎。貞隱金仲見 龍赫 及閔斯文季道 致達,朴斯文子敬 承浩,宋生宅仁 基赫。皆步從。枕泉族叔。亦同約未行。意甚悵缺。出洞外。雨後氣淸。山川皎潔。此心已飄然在九淵萬瀑之間矣。日昃到槐山邑。訪金丈鼎秀。不遇。庚午。小雨。早訪鄭丈海宬。待晴而發。暮宿陰城唐谷。族叔致成氏 聖洙 追來。辛未。早發。午炊忠州無極院。夕宿陰竹長海院。壬申。踰白楊峴。驪州地也。午抵丹江。訪閔侍郞泳緯。請謁丹巖祠宇。又審影幀。儀貌端厚。退上恩歸亭。是相公舊宅。而臨江爽豁。主台出示御筆三張。卽孝廟賜文正先祖密札也。趁卽還納。而流傳在此。誠可異矣。行六七里。過鷰子灘。此牧隱遺居也。越江入神勒寺。寺甚凈潔。憇九龍樓。額是牧隱筆云。宿東寮。癸酉。早起。玩指空,懶翁,無學三禪師像。登東臺。阧臨江上。頗多勝槩。中有六層塔。是懶翁所築。而塔石皆甓。故寺又以此名焉。前立懶翁浮圖塔。後有一碑。陶隱文也。壬辰。爲倭所砲。多破碎痕。覽已。命篙師泛舟。徐行。山川秀麗。無非鍾皷玉帛。左右顧望。意甚樂之。俄而泊淸心樓。下船登覽。襟懷灑落。令人有寵辱俱忘之意。額揭文正公筆。筆勢雄健。與樓爭衡。多揭古人詩。而牧隱捍水功高馬巖石。浮天勢大龍門山之句。尤著矣。走謁大老祠。出坐江漢樓。瞻望寧陵。誦先祖感賦詩。奉審正廟御筆碑閣。歷訪洞山李文丈舊宅。弔其孤福永氏。余於文丈。嘗有灑掃之願。而恨未果焉。刺謁石陵金山丈。瞻拜文谷,夢窩眞像。文谷氷玉之貌。而以手撫帶。夢窩亦樂易忠厚也。轉向三谷。訪見從妹閔氏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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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經齋全集卷之五十八 / 蘭室史料一 / 羅麗遺民傳
李穡字穎叔號牧隱。韓山人。父文孝公糓。事忠定王。官都僉議贊成事。穡學問精博。尤邃於性理書。蔭補元國子監生員。赴庭試對策。翰林學士歐陽玄,禮部尙書王思誠。擢穡第二甲。玄曰吾道東矣。穡知元將亂。棄官東歸。恭愍王命穡及我太祖同參大政。喜曰予得用文武第一流也。辛禑十四年。太祖自威化島回軍。廢禑擇立宗室。曺敏修欲立辛昌。密問穡。穡曰當立前王之子。昌遂立。以穡爲門下侍中。初恭愍薨。太祖皇帝怒高麗每徵大臣入朝。皆畏不敢行。穡曰今國家有釁。王及執政不親朝。無以辨之。遂與李崇仁,金士安。如京賀正。且請王官監國。穡見太祖威德日盛。恐未還有變。以太宗爲書狀官而行。帝素聞穡名甚禮之。從容言曰汝在元朝爲翰林。應解漢語。穡以漢語遽對曰請親朝。帝未曉曰說甚麽。禮部官傳奏曰某久不入朝。語頗艱澁。帝笑曰汝之漢語。正似納哈出。時田制大壞。我太祖與大司憲趙浚。欲革私田。穡以爲舊法不可輕改。持不從。穡謁禑于黃驪府。未幾乞解職。擧李琳自代。恭讓王卽位。新祼于太廟。有司請撤禑母神主。穡曰此事未保其終。姑徐之。於是左司議吳思忠,門下舍人趙璞等。劾穡立昌謁禑。流穡長湍。穡子種學竄順天。又因臺䟽遣思忠,田時,李翺鞫穡。穡言回軍議立之際。敏修與昌外祖李琳謀。某以昌爲對。無首勸擅立之語。去年朝京師。禮部尙書李原明曰汝國逐父立子。天下安有是理。王與崔瑩。何爲被拘。予應之曰崔瑩敎王犯遼陽。將軍曺敏修與李 太祖舊諱 以爲不可。到義州不敢發。瑩數趣之。不獲已回兵繫瑩獄。於是王怒欲害諸將。故太后廢王。置于江華。去開京二十餘里。舊都勝地。怡養性情。且宰相侍衛儀仗器物朝夕膳奉。皆如平昔。何放之有。及還。李侍中曰原明之言。耳可得聞。口不可道。驪興地遠。迎置近地。可免放君之名。吾但語此而已。思忠持取辭乃還。時王昉,趙胖還自京師。白王曰禮部召臣等曰爾國人有坡平君尹彜,中郞將李初者。來訴于帝。言高麗李侍中立王瑤爲王。非宗室。乃李侍中姻親也。瑤與李侍中謀動兵。將犯上國。宰相李穡等以爲不可。卽將李穡,曺敏修,李琳,邊安烈,權仲和,張夏,李崇仁,權近,李種學,李貴生等殺害。將禹玄寶,禹仁烈,鄭地,金宗衍,尹有獜,洪仁桂,陳乙瑞,慶補,李仁敏等遠貶。宰相等潛遣我。來告天子。仍請親王動天下兵來討。仍出彜,初所記穡,敏修等姓名示之。胖與彜,初等對辨曰。本國事大以誠。安有是乎。因問彜曰爾位至封君。頗知我乎。彜愕然失色。禮部官曰天子聖明。亦知其誣。爾速還國。語王及宰相。將彜書中人等鞫問來報。於是㙜諫相繼上䟽。請鞫彜,初之黨。王留中不下。會贊成池湧奇與宗衍善。密語曰公名在彜,初書中。危哉。宗衍懼乃逃。卽下玄寶,仲和,補,夏,仁桂,有獜于巡軍獄。令㙜省刑曹雜治之。初有獜從弟思康無行。甞爲僧犯贓。亡入上國。改名彜。彜家臣丁夫介。從胖入京師。見而不言。及還言于有獜家。有獜在獄。憂憤不食而死。囚夫介。逮繫穡及琳,安烈,仁敏,崇仁,近,種學,貴生等于淸州獄。遣門下評理尹虎,密直副使朴經,右司議李擴,刑曹佐郞申孝昌。田時與楊廣道都觀察使柳玽鞫之。諸囚皆不服。忽雷雨大作。暴毁城南門衝北門。城中水深丈餘。漂沒官舍。民居殆盡。獄官攀木免。王命釋諸囚。安置穡于咸昌。尋宥之。特許從便。三年憲府請復治穡,種學不從。論之不已。王勉從之。復流咸昌。諫官又論之流遠地。尋許京外從便。穡上書謝恩。王驛召穡及崇仁,種學還京。太宗旣殺鄭夢周。鞫諫官金震陽等。辭連穡,種學,種善。流種學,種善于外。王曰卿二子得罪。卿可於兩江之外。惟所適爾。穡憮然曰臣無田宅。安歸乎。遂貶衿州徙驪興。及王氏亡。臣庶罔不歸順于我太祖。而太祖敬重穡。穡時住五㙜山。廷議欲殺之。太祖特原之。乙亥屢以書召之。於是穡以草笠白直領細絛帶。擔轎而來。引對便殿。太祖下座。接以賓禮。穡長揖不拜。太祖曰願安承敎。穡曰亡國大夫。不可以啚存。歸死故山足矣。俄而侍講官以次列進。太祖陞榻。穡曰老夫無座。遂起。太祖知不可留。步出中門。揖而別。賜田及米豆酒肉曰卿老矣。宜養體氣。穡托言齋素故也。又賜室材。令造宅以居。丙子五月一日。請歸避暑於驪興月喃村。時太祖臨朝决機務。不遑引見。初三日。自碧瀾渡乘舟。溯江護行。中使亦來。初七日至淸心樓下燕子灘。將登舟。世傳中使進酒疾作。召男種善於都下。有僧語其道。穡擧手揮之曰死生之理。吾無疑矣。卒於舟中。人多疑之。以爲其卒無愧鄭夢周云。盖王氏子孫多死於舟中。鄭道傳,趙浚之計也。種學官簽書密直司事。種德官知密直司事。皆登第貴顯。麗亡並杖殞。壬申六月。穡在驪江村墅。門生有來謁者。携入深谷。竟日大哭。暮而偕歸曰小豁吾胷臆。盖傷二子之死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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燃藜室記述卷之一 / 太祖朝故事本末
高麗守節諸臣附
鄭夢周
鄭夢周字達可號圃隱迎日人母李氏有娠夢抱蘭益驚墜寤而生公 丁丑生 因名夢蘭肩上有黑子七如北斗形九歲母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公也又名夢龍旣冠改今名恭愍庚子連魁三場擢文科官至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我朝受命伏節而終壽五十六太宗因權近疏請褒節義贈領議政諡文忠錄用子孫
○初公最被我聖朝所知屢辟幕下 甲辰上以兵馬使擊三善三介公爲從事戊午以版圖判書從書從上擊倭雲峯癸亥以東北面助戰元帥從上赴征 威化回軍之後同陞爲相公與金震陽諸公忘身循國欲扶社稷時上功業日盛羣下歸心勢難終於北面公潛謀傾之太宗嘗告於上曰鄭夢周豈負我家上曰我遘橫讒夢周必以死明我若係于國家有不可知及公之謀益彰著太宗設宴請之作歌侑之曰如此亦何如如彼亦何如城隍堂後垣頺圮亦何如 一作萬壽山原頭葛縈綴亦何如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公遂作歌送酒曰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太宗知其不變遂議除之公一日問病於上因察氣色歸過故酒徒家主人出外堦花盛開遂徑入呼酒舞於花間曰今日風色甚惡甚惡連飮數大椀而出其家人恠之俄聞鄭侍中遇害矣公之自上潛邸歸也有櫜鞬武夫衝其前導而過公顧謂隨行錄事曰汝可落後答曰小的從大相何可他往乎再三呵止亦不從行至善竹橋遇害抱持同死 海東樂府當時倉卒無人記其姓名遂不傳於後世
寒崗鄭逑問於退溪李滉曰曺南冥嘗以鄭圃隱出處爲疑鄙意圃隱一死頗可笑爲恭愍朝大臣十三年於不可則止之義已爲可愧又事辛禑父子謂以禑爲王出歟則他日放出已亦預焉何也十年服事一朝放殺是可忍乎如非王出則呂政之立嬴氏已亡而乃尙無恙又從而食其祿如是而有後日之死深所未曉退溪答曰程子曰人當於有過中求無過不當於無過中求有過圃隱大節可謂經緯天地棟樑宇宙而世之好議論喜攻發者不樂成人之美嘵嘵不已每欲掩耳而不聞也 退溪集
○公之祠堂舊在永川縣成廟朝孫舜孝嘗按是路巡過郡境馬上醉睡瞢騰昏昏過圃隱村夢間依俙見一老翁鬚髮皤如衣冠偉然自言圃隱且言所居頺廢風雨無庇如有相屬之色舜孝驚異之詢故老得古址勖郡人營之堂成躬奠而落之自傾大巵醉書堂壁曰文丞相忠義伯兩先生肝膽相照忘一身立人紀千萬世景昂無已惟利所在古今奔走淸霜白雪松栢蒼蒼構屋一間將以蔽風公靈安兮我心安兮 龍泉談寂記
○中宗朝朝廷已許公從祀大臣因他說而難之趙光祖啓曰辛禑之爲王氏與否當時之人亦不明知夢周本非求功名富貴於辛禑者也况册立恭讓之後乃爲死節其賢蓋可想也昔者狄仁傑事武后而終復唐室安知夢周不以狄公之心爲心乎高麗五百年宗社在於一人之身其身亡而宗社卽亡何可輕議此人耶
○松都有公舊址辛未壬申年間就起書院賜額崧陽以公爲主祀配以徐花潭敬德院宇初成有司以題文忠位版事上禀宣廟曰夢周高麗人也豈肯受本朝官爵雖有領議政之贈只書圃隱先生可也 侯鯖瑣語
○宣廟癸卯祭公文以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書之傳曰不書贈職似當且鄭公之稱恐非國家賜祭之式參酌施行禮判李廷龜啓曰古者帝王之於儒先待以不臣之禮雖其一時任事之臣苟其心所尊敬則亦有不名臣等只欲成殿下尊賢之美意云云 朝野記聞
○光海庚戌從祀孔子廟庭 詳典故
○麗末喪制紊弛士大夫遭喪皆百日卽吉公獨廬二親墓哀禮俱盡國家嘉之爲旌其閭自辛丑被兵 契丹之亂 以來學校荒廢恭愍王新刱成均舘選碩儒金九容朴尙衷朴宜中李崇仁及公兼學官以李穡兼大司成公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雲峰胡氏之說與公所論合諸儒歎服穡稱之曰達可論理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 名臣錄
李穡
李穡子穎叔號牧隱韓山人元朝制科翰林知制誥麗恭愍癸巳登第官至三重大匡侍中韓山君恭讓已巳調長湍庚午付處咸昌五月逮淸州獄壬申貶衿陽移驪興革命後流長興碧沙冬放還乙亥十一月入覲丙子卒於淸心樓下流燕子灘 松窩雜記 本朝加韓山君諡文靖
○麗末公朝京高皇帝引見公貌不揚帝曰此翁堪畵 筆苑雜記
○辛禑之廢居江華公微服往省之 松窩雜記
○吉再問去就之義於公公曰當各行其志我輩大臣與國家同休戚不可去爾則可去也再因定去就告歸辭於公公時在長湍別墅贈以詩曰飛鴻一箇在冥冥 月汀漫筆
○恭讓時公承召自貶所還京謁上于潛邸上驚喜迎之上座跪進酒請公立飮公不讓極歡而罷人皆非公之不讓後公入本朝引對便殿上必送至于中門 東閣雜記
○公二子種學種德皆登第貴顯革命後不貳其心皆以杖殞公退去驪州村墅一日門生來謁公携之引入深谷門生莫知其故及至人跡所不到處放聲終日痛哭始與俱出曰今日稍濶吾胸云蓋傷二子之死也公甞有詩曰松軒當國我流離夢裡何曾此事知二鄭况聞參大議一家完聚更何時松軒上軒號也上最與公親厚平日多被薦引故云 海東樂府
鄭摠鄭道傳卽公門人而反攻之不遺餘力種學種善俱被遠謫 識小錄
○公之詩曰演福鍾聲尙未鳴擁衾危坐度寒更一身衰病乾坤老萬象森羅日月明杵臼肯移存趙志華封空抱祝堯情悠悠今古無窮事惹起愁膓作不平此言志詩也 月汀漫筆
○前朝之季圃隱如袁粲牧隱如楊彪此外無論矣 西崖集
○公之詩人情那似物無情觸境年來漸不平偶向東籬羞滿面眞黃花對僞淵明此老心事盡在此矣悲夫 西崖集
○自壬申至乙亥出入韓山驪州五臺山上待以故舊之禮任其所適丙子五月請往驪江避暑登舟暴卒上後疑之怒殺其時按察使 寄齋雜記
鄭道傳與禹玄寶有宿怨請公及玄寶等極刑上不聽後召公待以故舊之禮置酒歡洽賜科田 隨品給田謂之科田 米豆酒肉曰卿已老矣宜復酒肉以養體氣時公事佛斷酒肉故有是命又賜材瓦令造居第尋以爲韓山君仍命爲義成德泉等五庫都提調 龍飛御天歌
○王氏之亡人但知圃隱冶隱二人能成大節而不知牧隱之爲人可惜上受命之後召公至引見公長揖不拜上降御榻接以賓禮俄而侍講以次列進上還陞御榻公昂然而起曰老夫無坐處上曰願承一敎勿以寡昧而棄之公曰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但當將此骸骨歸葬故山而已遂出世傳公之死黯黮難明不愧圃隱云 逐睡篇
○太宗朝中朝太僕少卿祝孟獻之還公之子孫以河崙權近所撰行狀囑孟獻求銘於中國辛卯 太宗十一年 孟獻以國子助敎陳璉所撰碑銘授通事送之其文有恭讓君立用事者忌公不附己劾貶長湍等語太宗覽之謂左右曰璉焉知穡之行事而叙之詳密乎昔本國使臣有因卜筮而生釁者通事何得私通孟獻其召責之成石璘請治公子孫私通中國之罪上不從諫院又請公子種善之罪太宗曰種善欲顯揚其親耳有何罪焉又請河崙權近之罪曰碑銘言用事者忌公不附己指誰而言歟又曰庚午五月誣以遣彝初于上國繫公等三十人于淸州將用峻法鍜鍊成罪天忽大雨舘舍皆沒問事官拚樹僅免淸之父老以爲公忠誠所感彜初之訴于上國已有明降可謂誣乎其用峻法鍜鍊成罪又指誰而言歟水灾穡果有周公之德而致之乎又曰壬申七月我太上卽位忌公者誣公以罪欲加極刑臣等以爲太祖初非有意於開國盡忠王室穡與黨謀去太祖禍在不測豈無罪而欲加極刑乎請訊崙依法治罪近斬棺瀦宅籍沒家產以懲後來於是崙凡四上書自辨曰所謂忌公者指南誾鄭道傳而言也若用事之臣陰謀之事皆以爲出於太祖之命則如縊殺李種學杖殺李崇仁等六七人之事此豈太祖之所知哉太宗曰崇仁種學之事予曾不知以太祖剛明創業之初曾有如是之事乎卽命憲司覈實以聞果敎書使孫興宗體覆使黃居正承道傳誾指興宗杖種學不死縊殺之居正杖崇仁腰不死橫載馬上馳送傍邑而死命下居正興宗於巡禁司太宗曰興宗居正不從太祖之命聽權臣之嗾濫殺無辜以汚太祖好生之德宜論以重律巡禁司當以出入人之罪更以謀殺人當之政府及三功臣 趙英茂韓尙敬鄭擢 等啓以實從南誾道傳之計其情可恕所犯非關宗社太宗曰予非爲崇仁種學復讎也爲天下萬世之計也道傳居正興宗廢爲庶人子孫禁錮誾以功高勿論 國朝寶鑑東閣雜記
吉再
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정몽주(鄭夢周)
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에 난초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공을 낳았다. 정축생 따라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흑룡이 동산의 배나무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 놀라 깨어 나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또 몽룡(夢龍)이라 하였다. 관례(冠禮)하면서 지금의 이름 몽주로 고쳤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연달아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시중 좌명공신 삼중대광 익양군 충의백(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에 이르렀다. 이씨가 천명을 받자, 공은 절의에 죽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권근(權近)의 청에 따라 그의 절의를 포상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 처음에 공은 태조(太祖)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여러차례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갑진년(1364)에 태조가 병마사로서 삼선(三善)을 격퇴할 때에 공은 태조의 종사관이 되었고, 무오년(1378)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를 격퇴하였으며, 계해년(1383)에는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태조를 따라 정벌하는 데 나아갔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자기와 함께 승진케 하여 상(相)이 되었다. 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그 세력을 꺾고자 하여 은밀히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였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혹 근거없는 모함을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청하였다.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혹은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로 되어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하고 읊으니, 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읊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였다. 태종이 공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공이 태조에게 문병을 핑계로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주인은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며, 뜰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은 드디어 뜰 안으로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오늘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나왔다. 그 집 사람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얼마 있다가 정 시중(鄭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활을 메고 그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부(武夫)가 있었다.
공은 수행하는 녹사(錄事 의정부의 관속)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 하였다.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고,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화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함께 죽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당시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 수행 녹사의 성명을 기억한 사람이 없어서 드디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으니, 생각건대 그가 신우를 왕씨의 출생으로 알았더라면 곧 다른 날 신우를 추방하는 데 자신도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신하로서 섬기다가 일조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만일 왕씨의 출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呂政)이 제위에 오름에 영(嬴)씨는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추방되고 살해될 때는 공신까지 되고 다시 후일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퇴계가 답하기를, “정자의 말씀에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여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포은의 큰 절개는 천지에 경위(經緯)가 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남을 공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남의 미덕을 이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기를 마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매양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공의 사당(祠堂)은 옛적에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孫舜孝)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못하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중종(中宗) 때, 조정에서 공의 문묘 종사(文廟從祀)가 허락되었다. 그런데 한 대신이 불가하다고 이의를 주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몽주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唐) 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 5백년의 종묘 사직이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묘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송도(松都)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 신미년과 임신년 사이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숭양(崧陽)’이라 하여 공을 주사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배사하였다. 서원이 완성되자 유사가 공의 신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뢰었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몽주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겠는가. 비록 영의정의 추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다만 ‘포은 선생’이라고만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후정쇄어(侯鯖瑣語)》
○ 선조 계묘년(1603)에 공에게 제사를 내리는 제문에 고려 문하시중 충의백 정공지묘(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라고 쓰려고 하였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추증한 직함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또한 정공(鄭公)이라 칭함은 국가사제(國家賜祭)의 의식이 아닐 것 같으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옛적에 제왕이 선대 학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신하의 예로써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비록 한때 국사를 맡았던 신하라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곧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전하께서 어진 이를 받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룩해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광해(光海) 경술년(1610)에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하였다. 《전고(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
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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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이색은,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원 나라에 가서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하던 중국 과거의 하나)에 급제하여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고, 고려에서는 공민왕 계사년(1353)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시중 한산군(侍中韓山君)에 이르렀다.
공양왕 기사년(1389)에는 장단(長湍)에 귀양가고 경오년(1390)에는 함창(咸昌)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고 임신년(1392)에는 금양(衿陽)에 귀양 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태조의 혁명 후에는 장흥(長興)의 벽사(碧沙)에 귀양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
을해년(1395) 11월에는 들어와 태조를 뵙고 병자년(1396)에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죽으니, 《송와잡기(松窩雜記)》 태조가 한산군(韓山君)을 봉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 고려말에 공이 명 나라에 가니 명 태조가 불러 보았는데, 공의 얼굴이 못났음을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 노인 얼굴은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신우가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 공이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 《송와잡기》
○ 길재(吉再)가 공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하다” 하였다. 길재가 이로 인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공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공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시를 주어 말하기를,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공양왕 때 공이 임금의 소명을 받고 귀양 간 곳에서 서울로 돌아와 태조를 잠저에 찾아가 뵈니, 태조가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올려 공에게 마시기를 청하자, 공이 사양하지 않고 흠뻑 마시며 즐겼는데, 사람들은 공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비방하였다. 후에 이씨 조에 들어와서 태조가 불러 편전(便殿)에서 만나고 갈 적에는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공의 두 아들 종학(種學)과 종덕(種德)이 다 고려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혁명 후에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다 매를 맞아 죽었다. 그 뒤 공이 여주(驪州)의 자기 집에 물러가 있을 때, 하루는 문생(門生)이 와서 뵙거늘 공이 깊은 골짜기에 데리고 들어가니 문생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전연 인적없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 가슴이 시원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 두 아들이 죽은 것을 상심한 것일 것이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에
송헌(松軒)이 국정을 맡았는데 나는 유리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어찌 이럴 줄을 알았으랴 / 夢裡何曾此事知
더구나 이정(二鄭 정총(鄭摠)과 정도전(鄭道傳)이 국가대사에 참여하였다 하니 / 二鄭况聞參大議
우리 가족은 어느 때 다시 모일꼬 / 一家完聚更何時
하였다.
송헌은 태조의 당호(堂號)이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가장 친하고 의가 두터워서 평일에 많이 추천하여 주었으므로 앞 시의 첫째 둘째 구절에 말한 것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정총과 정도전은 공의 문인이면서 도리어 공을 배척하는 데 힘을 다하여 종학과 종선(種善)이 모두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식소록(識小錄)》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연복사 종 소리는 아직 울리지 않는데 / 演福鍾聲尙未鳴
이불 안고 꿇어 앉아 이 추운 밤을 지내도다 / 擁衾危坐度寒更
세월은 흘러흘러 이 한몸 노쇠해 병들었고 / 一身衰病乾坤老
만상(萬象)이 삼라(森羅)한데 일월이 밝았도다 / 萬象森羅日月明
저구(杵臼)가 조씨(趙氏) 후사를 보전할 뜻을 어찌 옮기랴 / 杵臼肯移存趙志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 축하하는 정을 속절없이 품고 있더라 / 華封空抱祝堯情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이 / 悠悠古今無窮事
조심스러운 마음을 끌어내어 불평하게 하는구나 / 惹起愁腸作不平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뜻을 말한 시이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고려말에 포은은 원찬(袁粲)과 같고, 목은은 양표(楊彪)와 같고, 이 이외에는 논할 것이 없다. 《서애집(西崖集)》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인정이 어찌 사물의 무정함과 같으랴 / 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 /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 / 偶向東籬羞滿面
꽃은 진짜 국화인데, 사람은 거짓 도연명이다 / 眞黃花對僞淵明
하였으니, 이옹의 심사가 이 시에 다 담겨 있으니 슬프다. 《서애집》
○ 임신년(1392)으로부터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에 출입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공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1396) 5월에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갔다가 배에 오르자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공이 죽은 원인을 의심하여 당시의 안찰사를 죽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감정이 있어서 공과 우현보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는데, 태조가 듣지 않았다. 뒤에 공을 불러서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흡족하게 즐기고 과전(科田)품계에 따라 전답을 주는 것을 과전이라 한다. 과 미두주육(米豆酒肉)을 주면서 말하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마땅히 다시 주육으로 기운을 보양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 공이 불도를 닦아 주육을 금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또 재목과 기와를 주면서 거처할 집을 지으라 하고 얼마 있다가 한산군(韓山君)으로 삼았으며, 잇달아 명하여 의성(義城)ㆍ덕천(德泉)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로 삼았다. 《용비어천가》
○ 왕씨가 망한 뒤, 사람들이 다만 포은과 야은(冶隱)만 대절을 이룬 줄 알고 목은이 수절한 줄은 모르니, 애석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을 불렀는데, 공이 태조를 만날 적에 길게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거늘, 태조가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 대접하였다. 조금 있다가 시강관이 차례로 열지어 들어오거늘, 태조가 도로 그 자리에 오르니, 공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노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하고, 드디어 나가 버렸다. 세상에 전해 오는 공의 사인(死因)이 애매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나, 포은에 부끄럽지 않다고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태종조 때 명 나라의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돌아갈 적에, 공의 자손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碑銘)을 구했는데, 신묘년 태종 11년 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역에게 주어 보냈다. 그 글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려서 탄핵하여 장단으로 귀양보냈다” 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태종이 이것을 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진연이 어떻게 이색이 행한 일을 알아서 상세하게 이것을 서술했겠는가.
옛날에 우리나라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중국과 틈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통역은 어째서 사사로이 맹헌과 내통했는가. 불러다가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이 공의 자손이 중국인과 사통한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태종이 좇지 않았다. 간원이 또 공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종선은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였다. 간원에서 또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비명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렸다’고 썼으니,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까. 비명에 또 ‘경오년(1390) 5월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를 명 나라에 보냈다고 모함하여 공 등 30인을 청주에 가두고 장차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관사가 다 물에 가라앉고 문사관(問事官)이 나뭇가지에 올라가 간신히 화를 면하니,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니, 윤이와 이초가 명 나라에 고자질한 것은 이미 명 나라로부터 분명히 전달된 말이 있는데 모함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다 함은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이겠습니까. 수재는 이색이 과연 주공(周公) 같은 덕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또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상왕(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을 모함하여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다’고 썼으니, 신들이 생각하건대, 태조가 본래 나라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거늘, 이색이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불칙한 화가 미칠 뻔 하였는데 어찌 이색에게 죄가 없는데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하륜은 심문하여 법에 의해서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관(棺)을 베고 집터는 못을 만들고 가산을 몰수하여 뒷사람들에게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하륜이 무릇 네 번이나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비명의 소위 공을 꺼리는 자라는 것은 남은(南誾)과 정도전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집권한 신하들이 음모한 일들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 7명을 매질하여 죽인 일을 아마도 태조가 알았을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태조의 강명(剛明)하심으로써 창업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곧 헌사(憲司)에 명하여 숭인과 종학을 죽인 실정을 캐내어 보고하라 하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좇아서, 흥종은 종학을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목매어 죽이고, 거정은 숭인의 허리를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말 위에 가로로 실은 뒤 이웃 고을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거정과 흥종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기를 명하고, 태종이 이르기를, “흥종과 거정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고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무거운 형벌로 논죄하라.” 하였다.
순금사에서 그들에게 사람을 출입시킨 죄를 적용하려 하였는데, 태종이 다시 “모살인(謀殺人)한 죄를 적용하라.” 하였다. 정부 및 삼공신(三功臣) 조영무(趙英茂)ㆍ한상경(韓尙敬)ㆍ정탁(鄭擢) 등이 아뢰기를, “그들은 실상 남은과 정도전의 계책을 좇은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그들이 범한 일은 종묘와 사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
도전과 거정과 흥종은 폐하여 서민을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되, 은은 공이 높으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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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하 / 임신년 공양왕 4년(명태조 홍무 25, 1392)
춘정월 사유(赦宥)하였다.
국대비(國大妃)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 권중화(權仲和)를 찬성사(贊成事)로, 이숭인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삼았다.
2월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가 새로 제정한 율(律)을 바쳤다.
정몽주가 《대명률(大明律)》ㆍ지정조격(至正條格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연간에 제정된 법규)과 본조의 법령을 취하여 참작하고 산정(刪定)한 뒤에 신율(新律)을 지어 바치니, 왕이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6일 동안 진강(進講)하게 한 뒤에 매우 기꺼이 받아들였다.
《형법지(刑法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의 제도는 대개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형법에 있어서도 당률(唐律)을 채택하였으되 시의(時宜)를 참작하였으므로 총 60여 조를 일시에 시행하였어도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 폐단은 법망(法網)이 신장(伸張)되지 않아 형벌이 너그럽고 사유(赦宥)가 잦았던 탓으로 간흉한 무리들이 제마음대로 법망을 빠져나가되 금제할 수가 없었는데, 말세에 와서는 그 폐단이 극도에 달하여 이에 원조(元朝)의 《의형이람(儀刑易覽)》과 《대명률》을 섞어 쓰자는 건의가 있었던 것이니, 비록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적실한 일이었지만 이미 대강(大綱)이 허물어졌고 국세가 기울어졌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태백(太白)이 주현(晝見)하였다.
○ 사신을 명(明)에 보내어 사례하였다.
○ 혜성(彗星)이 경천(竟天)하였다.
“정도전은 미천한 출신으로 당초에 우현보의 먼 친척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인 수이(樹伊)의 처를 사통(私通)하여 딸 하나를 낳아 비밀리에 아끼며 키워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딸을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을 가서 정도전을 낳았다. 정당문학의 지위를 도둑질하여 천한 근본을 감추려고 본주(本主 우현보를 말한다)를 모함해 쫓았으며 참소로 죄를 꾸며내어 수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 조준도 한두 사람의 경상(卿相) 사이에서 우연히 원수와 틈을 일으켜 정도전과 마음을 같이해서 권세를 농단하여 많은 사람들을 꾀고 협박하니, 이에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며 시세를 좇아 부침(浮沈)하는 무리와 그 뜻에 영합하여 일을 일으키려는 무리들이 호응하여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남은ㆍ남재(南在) 등은 난을 선동하는 우익(羽翼)이 되고, 윤소종ㆍ조박 등은 말을 꾸며대는 후설(喉舌)이 되어 화답하 듯이 일어나 죄망(罪網)을 널리 펼쳐서 형벌을 가할 수 없는 사람 상고하건대 이는 우(禑)와 창(昌)을 가리킨 것이다. 에게 형벌을 시행하였으며, 본래 죄가 없는 사람 상고하건대 이는 이색 등 여러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에게서 죄를 찾아 내려 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라건대 조준 등의 죄를 국문(鞫問)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바루시고 정도전은 배소(配所)에서 처형하소서.”
하므로 왕이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리니, 심덕부(沈德符) 및 정몽주가 의론하여 마침내 조준ㆍ남은ㆍ남재ㆍ윤소종ㆍ조박 등을 먼 곳에 유배하였다.
2일(계축)에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집의(執義) 정희(鄭熙), 장령(掌令) 김묘(金畝)ㆍ서견(徐甄), 지평(持平) 이작(李作)ㆍ이신(李申)이 또 상소하여 조준 등을 죄줄 것을 청하고, 아울러 판전교(判典校) 오사충(吳思忠)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먼 곳에 유배하였다. 정몽주가 이색ㆍ우현보(禹玄寶) 등과 의론하기를,
“만약 조준ㆍ남은 등을 탄핵하여 극형에 처하면 조박ㆍ윤소중ㆍ오사충 등의 무리는 족히 제압할 것도 없다.”
하고, 은밀히 대간으로 하여금 연일 번갈아 소장을 올리고 전정(殿庭)에 나아가 복합(伏閤)하고 간쟁(諫諍)하게 하여 조준ㆍ정도전 등을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조준ㆍ정도전 등이 공신이라 하여 갑자기 죽이고 싶지 않아, 명하여 먼저 남은 등의 공사(供辭) 관련 여부를 국문한 뒤에 아울러 국문하고자 하였다.
○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왕안덕(王安德)이 졸하였다.
○ 수시중(守侍中) 익양백(益陽伯) 정몽주가 졸하였다.
정몽주는 자(字)를 달가(達可)라 하는데, 사람됨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함이 없었으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기무(機務)가 매우 번잡했는데, 정몽주는 대사(大事)를 처리하고 미심쩍은 일을 결단함에 있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좌우로 수답(酬答)하되 모두가 도리에 합당하였으며, 새로 베푼 일이 많아 당시에 왕을 보좌할 인재라고들 하였다. 당시의 풍속이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의 제도가 문란해지고 오로지 상문(桑門 불교를 말한다)만을 숭상하여 사대부(士大夫)가 상(喪)을 당해도 모두 1백 일만 되면 곧장 길복(吉服)을 입었는데, 정몽주만이 돌아간 양친을 시묘(侍墓)하며 애례(哀禮)를 다 갖추었으므로 국가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겨 정려(旌閭)하였다. 귀하게 되어 국사를 처리하게 된 뒤에는 비로소 사족(士族)과 서인(庶人)들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또 수령(守令)을 참외(參外)나 이서(吏胥)로 마구 임용하여 품계가 낮고 인품이 용렬하므로, 비로소 참관(參官) 중 청망(淸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등용하고 출척(黜陟)을 엄격히 하였다. 또 금전이나 곡식의 출납이 오직 도평의사 녹사(都評議司錄事)의 백첩(白牒)만으로 시행되어서 외람된 일이 많았으므로 경력도사(經歷都事)를 두어 그 출납을 장부에 올리게 하였으며, 또 서울에는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의 각 고을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니 문풍(文風)이 다시 떨쳤다. 나아가 기강을 바로잡아 국체(國體)를 확립하고 용관(冗官)과 산직(散職)을 도태시키고 준량(俊良)을 등용하며, 호복(胡服)을 바꾸고 중국의 복제를 따르며,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자를 진휼(賬恤)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하게 한 것이 모두 그의 계책이었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호방(豪放)하고 준결(俊潔)하였는데 학자들이 포은 선생(圃隱先生)이라 일컬었다. 행장(行狀)을 참조하여 편수하였다.
○ 우리 태종 을유년(1405 포은 연보에는 태종 원년으로 되어 있다)에 권근(權近)이 상소하여 봉작(封爵)과 시호를 주고, 그 자손에게 녹봉(祿俸)을 지급할 것을 청하여 영의정을 중직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하였다. 중종(中宗) 정축년(1517)에 태학생 권전(權磌)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명종 을묘년(1555)에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세워지고, 선조(宣祖) 경오년(1570)에 개성에 숭양시원(崧陽書院)이 세워졌다. 묘는 용인현(龍仁縣) 관아의 북쪽 20리 지점인 쇄포촌(曬布村)에 있고, 또 서원을 세웠는데 지금 능곡(陵谷)이라 부른다.
○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유배하고 조준 등을 소환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뒤 태조가 황희석(黃希碩)으로 하여금 왕에게 아뢰어 조준ㆍ남은 등을 소환하도록 청하여 대간과 변명(辨明)하도록 하였고 또,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는다면 신등을 죄주소서.”
하고 청하게 하니, 왕이 부득이 대간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김진양ㆍ이확(李擴)ㆍ이내(李來)ㆍ이감(李敢)ㆍ권홍(權弘)ㆍ정희(鄭熙)ㆍ김묘(金畝)ㆍ서견(徐甄)ㆍ이작(李作)ㆍ이신(李申) 및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 조호(趙瑚) 등을 국문하여 유배하였다. 이내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인데 뒤에 본조(本朝)에 들어와 좌명공신(佐命功臣 140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이들에게 내린 공신호)에 참여하였으며, 서견은 개국 후에 금천(衿川)에 숨어살면서 나오지 않았다.
허씨(許氏)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가 망할 때 정몽주ㆍ이색ㆍ김진양ㆍ이종학ㆍ길재ㆍ서견 등 몇몇 군자가 〈고려를 위해〉 죽기도 하고 죽지 않기도 했지만 스스로 충절을 지킨 점에서는 한결같다.
【안】 야사(野史)에는,
“서견이 아조(我朝)가 건국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지은 시에,
천년의 신도가 한강을 격했는데 / 千載神都隔漢江
충량한 제제다사 밝은 임금 돕는구나 / 忠良濟濟佐明王
삼국을 통일한 공업 어디 있는가 / 統三爲一功安在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이에 대간이 죄주기를 청하자, 태종은 낯빛을 고치면서 ‘이 사람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같은 유(流)이니, 상은 줄지언정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수찬(修撰) 허봉(許篈)이 계청(啓請)하여 대사헌에 증직(贈職)되었다.”
하였다.
○ 배극렴(裵克廉)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조준ㆍ유만수(柳曼殊)를 찬성사로 삼았다.
○ 지용기(池湧奇)가 배소(配所)에서 졸하였다.
○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이 풀려나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이색에게 이르기를,
“경은 물러가오. 양강(兩江)의 바깥 지방만이 경이 갈 수 있는 곳이오.”
하니, 이색이 실의(失意)에 찬 모습으로 아뢰기를,
“신은 돌아보아도 전택(田宅) 하나 없으니 과연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였다. 드디어 금천(衿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여흥(驪興)에 이배(移配)되고, 겨울에 사유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이색은 자를 영숙(頴叔)이라 하는데 자질이 명민(明敏)한 데다 여러 가지 서적을 두루 읽어 시문을 지을 때는 붓을 잡고 곧장 써내려가되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후학(後學)을 양성하여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여 목은 선생(牧隱先生)이라 일컬었다.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은 지 수십 년에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여 낯빛을 변하는 일이 없고 모난 행동을 드러낸 일이 없었으며, 치산(治産)을 염두에 두지 않아 비록 어려운 처지를 당했어도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정몽주와 시종 뜻을 같이하여 신하의 절개를 변하지 않았으나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하여 세상 사람들의 기롱을 받았다. 문인(門人) 권근이 지은 화상찬(畫像讚)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천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났고, 성학(聖學)은 정미함이 극치에 달해서 마음이 환히 틔어 밝게 빛나네. 실천은 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문장은 표현이 기묘하였네. 증 점(曾點) 같은 광(狂)이 아니면서도 읊조리며 돌아오는 흥취를 가졌고, 유하혜(柳下惠) 같이 화(和)하면서도 불공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았네. 학자들은 태산(泰山)과 북두(北斗)같이 우러러 보았고 나라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어 의지하였네, 높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마음씀이 한결같았고 큰 어려움을 당하여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충성심이 더욱 미더웠고 결백한 지조는 변치 않았네.
【안】 권근이 찬(撰)한 행장(行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임신년(1392) 7월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에게 극형을 가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성 망령된 말을 한 일이 없는데 감히 거짓 자복할 수 있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나는 바른말하는 귀신이 되겠다.”
하자 이 말을 듣고 왕이 특별히 용서해 주었으니 공의 덕택으로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가 한주(韓州)에 돌아갔다가 을해년(1395) 가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불러 옛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고, 병자년 5월에 여강(驪江)에서 졸(卒)하니 향년이 69요, 묘는 지금의 한산군(韓山郡) 서쪽 가지현(加知峴)에 있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을해년에 이색이 오대사(五臺寺)에 거처하고 있을 때 태조가 여러 번 글을 보내어 부르므로 이색이 교자(轎子)를 타고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태조가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옛 친구의 예로 맞이하면서 말 한 마디 해주기를 원하자 이색은 아뢰기를,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 편히 살기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해골이나 고향에 묻히게 해주십시오.”
하니, 이에 태조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中門) 밖까지 전송하고 서로 읍(揖)하면서 이별하였다. 병자년(1396)에 여흥(驪興) 월남촌(月南村)에서 피서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3일에 벽란도(碧瀾渡)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호송하는 중사(中使)도 왔다. 7일에 여흥 연자탄(燕子灘)의 배 안에서 몰(沒)하니 세상에서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개 고려 왕씨의 자손들이 배 안에서 처치된 자가 많았으니, 모두 정도전ㆍ조준 등의 음모이다.
○ 이숭인ㆍ이종학(李種學)ㆍ김진양(金震陽) 등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우리 태조의 휘하 선비들이 상소하여 정몽주의 당을 다스릴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숭인ㆍ이종학ㆍ이종선ㆍ조호(趙瑚)ㆍ김진양ㆍ이확(李擴)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 이숭인은 자를 자안(子安), 호를 도은(陶隱)이라 하는데, 천품은 영민(英敏)한 예기(銳氣)가 있고,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색이 매양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흔하지 않다.”
하였고,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 원장(朱元章))가 일찍이 숭인이 지은 표문(表文)을 보고 칭찬하기를,
“표문의 말이 진실하고 간절하다.”
하였으며, 중국 사대부들이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학(種學)은 이색의 아들로 호를 인재(麟齋)라 하는데, 벼슬이 첨서밀직(簽書密直)에 이르렀고, 형 종덕(種德)은 관직이 지밀직(知密直)이었는데 본조(本朝 고려를 말한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켜, 사직이 바뀔 때 목숨을 바쳤다. 김진양은 박학(博學)하고 뛰어난 재주로 사람들이 크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항상 초가집에 살았으므로 호를 초옥자(草屋子)라 하였으며, 유배된지 얼마 안 되어 졸하였다.
【안】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정도전과 이숭인은 함께 목은(牧隱)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재명(才名)이 쌍벽을 이루었으나 뜻은 판이하였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불평을 품어 우리 태조가 천명(天命)을 받기에 이르러 정도전이 권력을 잡은 신하가 되자, 자기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이숭인이 유배된 고을의 원으로 내보내 곤장을 쳐서 숭인을 때려 죽였으니, 심하구나 소인의 용심(用心)이여! 얼마 안 있어 정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관여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황거정도 정도전의 문객(門客)이었기 때문에 태종 때에 훈적(勳籍)을 삭탈당하면 지금껏 〈그 자손이〉 서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의 화가 숭인보다 훨씬 더하고, 이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나고 있으니,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이 뒷날의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태종이 전교하기를,
“임신년(태조 1 1392)에 곤장을 맞아 죽은 이숭인ㆍ이종학 등의 무리는 실은 곤장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교살(絞殺)하였거나 억울한 형벌로 죽었다 하니 실정을 조사해서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종학이 죽을 죄가 아닌데 죽은 것은 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라 당국자가 보복하기 위하여 부당한 형벌로 죽인 것이니, 그때에 손흥종(孫興宗)ㆍ황거정(黃居正)을 교사해서 왕명을 거짓으로 꾸미고 임금을 속인 죄를 국문하도록 하되 부당하게 중형(重刑)을 한 율을 적용하라.”
하니, 공신 등이 아뢰기를,
“정도전ㆍ남은 등이 황거정과 손흥종을 사주(使嗾)하여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행위는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전ㆍ거정ㆍ흥종은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固)에 처할 것이며, 남은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 야사(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다같이 목은(牧隱) 문하에서 나왔는데 목은이, 도은이 지은 7언 장편시 ‘오호도(嗚呼島)’를 보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자 정도전이 시기하였다. 뒤에 도전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 와서 오호도 시를 지어 중국인의 시 속에 섞어 목은에게 보이자 목은이 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도전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크게 칭찬하자 목은이 말하기를,
“이 시편은 좋기는 좋으나 그대들도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였다. 도전이 이 뒤부터 더욱 자기의 재주가 도은만 못함을 알고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도은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 우리 태조를 시중으로, 태종을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심덕부(沈德符)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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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21권 / 경사문(經史門) / 목은 불굴(牧隱不屈)
목은(牧隱)은 정포은(鄭圃隱)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시(詩)를 지었다.
정부의 공격, 대신의 탄핵 바로 오늘에 이르렀고 / 省擊臺彈直到今
오천 화액이 인심을 놀라게 한다 / 烏川奇禍駭人心
이리저리 오가는 게 뭐 해롭겠느냐 / 往來屑屑何妨事
깊이 애호해 주던 송헌에게 감사한다 / 更感松軒愛我深
또 일찍이 시가 있었는데,
네 무슨 수로 이런 천행을 만났느냐 / 問渠何以逢天幸
다만 송헌이 친구였기 때문이지 / 只爲松軒是故人
하고 또,
송헌이 정사할 때 나는 떠돌아다녔지 / 松軒當國我流離
이런 일 있을 줄을 꿈엔들 어찌 생각했으랴 / 夢裏何曾有此思
하였으니, 이 송헌은 바로 아 태조(我太祖)의 호이다.
또 시가 있었는데,
중용ㆍ대학 읽을 때 증자와 자사를 배웠었지 / 中庸大學學曾思
영왕이 너의 스승이라고 모두 말하였다 / 人道瀛王是汝師
요즈음 장락은 나뿐이 아닌데 / 長樂邇來非獨我
귀거래사 짓는 이가 그 누구인가 / 有誰重賦去來辭
하고 또,
세상의 영욕은 돌고 도는구나 / 世間榮悴似循環
푸르고 푸른 솔과 잣나무 또 추위를 겪어야 한다 / 松栢蒼蒼又苦寒
중니를 배워 아홉 번째 괘를 벌이면서 / 且學仲尼陳九卦
휘날리는 백발로 장단에서 지내련다 / 白頭身世付長湍
하였다. 소위 장락노인(長樂老人)은 바로 영왕(瀛王) 풍도(馮道)의 호인데, 스스로 육인(戮人)과 천부(賤夫)에게 비유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을 심히 슬퍼했으나 가마를 타고 태조(太祖)에게 들어가 보았다는 것은 구차하게 산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본다면 태조에게 굴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슷한 말이나 절개를 세웠다고는 못하겠다. 아홉 번째의 손괘(巽卦) 《주역》계사 하 제7장 참조)는 권도를 행하는 것인데 이런 일을 이른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이에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운다고 선언한 후에 또,
현릉은 갑인년에 책사했는데 / 玄陵策士甲加寅
신조에서 방을 붙여 비로소 출신했네 / 放榜辛朝始出身
하였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낫지 않았겠는가? 결국 연자탄(燕子灘) 배 안에서 후회하였으나 미칠 수 없게 되었었다.
고려 말기의 인망(人望)은 세 사람이었는데, 양촌(陽村)은 목은(牧隱)에 미치지 못하고 목은은 포은(圃隱)에 미치지 못하였다. 남의 신하로서는 마땅히 포은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조(聖朝)에서 포은을 맨 먼저 포숭(褒崇)하였다.
[주-D001] 목은(牧隱) : 고려 삼은(三隱)의 하나인 이색(李穡)의 호. 자는 영숙(穎叔). 이성계(李成桂)가 혁명한 후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여주(驪州)로 가던 도중 태종(太宗)이 보낸 술을 마시고 죽었음. 시호는 문정(文靖).[주-D002] 정포은(鄭圃隱) :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호. 자는 달가(達可).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를 숙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심복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당했음. 시호는 문충(文忠).[주-D003] 오천(烏川) : 정포은의 관향(貫鄕)이 연일군(延日郡) 오천면(烏川面)임.[주-D004] 아 태조(我太祖) : 즉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주-D005] 중용ㆍ대학 : 《예기(禮記)》 중의 두 편명. 송(宋) 나라 주자(朱子)가 이 두 편을 뽑아 《논어(論語)》ㆍ《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만든 것인데, 공자(孔子)의 말씀과 안자(顔子)ㆍ증자(曾子)의 뜻을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것.[주-D006] 장락(長樂) : 오대(五代) 풍도(馮道)의 호. 풍도가 후진(後晉)ㆍ후당(後唐)ㆍ요(遼)ㆍ후한(後漢)의 4왕조를 섬긴 일을, 목은이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성계가 건국한 뒤에도 용납되었다는 세인들의 비난에 대해 변명한 것.[주-D007] 중니(仲尼) : 공자(孔子)의 자.[주-D008] 육인(戮人) : 죄인. 《상자(商子)》에 “刑人無國位 戮人無官任”인란 데서 나온 말.[주-D009] 전왕(前王) :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을 가리킴.[주-D010] 현릉(玄陵) : 고려 31대 공민왕의 능. 여기서는 공민왕을 말함.[주-D011] 신조(辛朝) : 고려 우왕(禑王)이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데서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대를 신조(辛朝)라 하고 여기서는 우왕 대를 말함.[주-D012] 연자탄(燕子灘) : 여주(驪州) 강 이름. 목은이 여주로 가던 도중, 여기에서 배를 건너다가 태종(太宗)이 보낸 술을 마시고 죽었다 함.[주-D013] 양촌(陽村) : 조선(朝鮮)의 문신 권 근(權近)의 호. 자는 가원(可遠) 또 사숙(思叔). 시호는 문충(文忠).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동현사략(東賢事畧)》 등의 저서가 있음.[주-D014] 성조(聖朝) : 조선 태종(太宗)을 말함인 듯함. 태종 1년(1401)에 포은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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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잡설(松窩雜說) / 이기(李墍) 찬
○ 왕씨(王氏)는 용(龍)의 종(種)이므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그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우(禑)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한 비늘이 있었는데, 우는 항상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임영(臨瀛 강릉)에서 죽음을 당하던 날에는 어깨를 드러내어 옆에 사람에게 보이면서, ‘지금 만약 보이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辛)가가 아닌 줄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나?’ 하였다.”
한다.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영 사람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 운곡공(耘谷公)은 통제사(統制使) 최영(崔瑩)이 형(刑)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1
맑은 빛 묻히고 기둥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䫝
사방 백성 모두가 슬퍼하누나 / 四方民俗盡悲哀
빛난 공업 마침내 쓰러졌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이야 죽은들 사그라지랴 / 𥗫爾忠誠死不灰
역사에 기록할 일 편질에 가득한데 / 紀事靑篇曾滿秩
가엾게도 황토더미 벌써 되었네 / 可矜黃壤巳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에서 / 相應杳杳重泉下
동문에 눈을 걸어도 분 못 풀리 / 掛眼東門憤未開
2
조정에 홀로 설 제 뉘 감히 간여하랴 / 獨立朝端誰敢干
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하였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使三韓社稷安
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 未亡邪侫骨猶寒
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세상 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 可笑時人用事奸
3
내 지금 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 위한 슬픔보다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의 비태도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 銛鋒已絶嗟何及
충성스러운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 忠膽常孤恨不支
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 白雲流水摠噫嘻
○ 노산군(魯山君)이 영월군(寧越郡)에 물러간 후에도 매양 아침이면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내려왔으나, 문틈으로 바라보고는 움찔하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날이 차츰 저물자 도사는 때를 늦추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두려워, 걸상 옆에 있는 하리(下吏)와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노산군이 앉은 후면(後面)의 창구멍을 통해, 긴 끈으로 당기도록 하였다. 끈이 모자라자 베띠를 이어서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으니, 관(棺)과 염습(斂襲 시체에 옷 입히고 묶는 일)도 갖추지 않고 짚으로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며 말하기를,
“평소에 이름을 알고 지냈고, 보살핌을 받은 분의(分義)가 있노라.”
하고, 며칠을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다. 지금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이라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편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호)의 글로써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奸臣)이 지휘한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그 한스러움이야 어찌 다하랴? 혼은 지금도 의탁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터이니, 진실로 애달프다.
○ 목은(牧隱)은 우리 태조(太祖)가 크게 존중(尊重)한 사람이었다. 태조가 일찍이 자(字)와 당호(堂號)를 지어주기를 청하고, 또 둘째 아들의 이름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목은은, 계화(桂花)는 가을에 희고 깨끗하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므로 변치 않음을 숭상한 것이다. 그래서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다. 또 셋째 아들의 이름을 방의(芳毅)라 지었다. 전에 둘째의 이름을 방과(芳果)라 지었는데, 과(果)와 의(毅)는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지었다.
추부에 들어서는 난 체하기 부끄러워하고 / 着鞭樞府愧揚揚
같은 날 어깨 겨루며 대성에 들어갔네 / 同日摩肩入臺省
달빛이 가득하니 산과 바다가 어찌나 밝던지 / 月滿海山何皎皎
겨울이 차가우니 송백 더욱 푸르구나 / 歲寒松柏愈蒼蒼
우애와 공순함으로 넉넉한 정을 보겠고 / 友恭可見親情洽
과단하고 굳세니 적의 형세강함을 어찌하여 걱정하리 / 果毅何憂敵勢强
원하노니 일시의 여러 대장들과 / 願與一時諸大將
종시토록 곽 분양을 스승으로 삼으소서 / 共師終始郭汾陽
○ 목은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1389) 12월에 귀양을 당해,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에 부처(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淸州) 옥(獄)으로 왔으나, 수재로 인해 용서를 받고 다시 장단에 와서 있었다. 임신년 4월에 또 금양(衿陽)으로 귀양갔고, 6월에는 금양에서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벽사(甓寺)에서 거처하면서 ‘배를 띄워 노자암(鸕鷀巖)에 갔다.’는 등의 시가 있는데, 시는 이것이 끝이다.
혁명(革命)한 후에 조정에서 중형(重刑)으로 처치하려고 의논하였으나 태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여흥에서 장흥부(長興府) 남벽사역(南碧沙驛)으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산(韓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은 한 곳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을해년(1395, 태조 4) 가을에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해 11월에 태조가 친서(親書)로 여러번 부르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서 뵈었다.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친구간의 예로써 대우하면서,
“덕이 부족하고 식견(識見)이 어둡다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말씀 가르쳐주시길 바라오.”
하니 공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였으니, 다만 이 해골(骸骨)이나 고향 산천에 묻히기를 원할 뿐이오.”
하였다. 태조는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까지 걸어 나가서 서로 읍(揖)한 다음, 작별하였다.
병자년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
○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變亂)에 하위지(河緯地)도 형을 당했다. 그 처자(妻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연좌법(連坐法)을 걸어 금부 도사를 보내서 처치하게 하였다.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하호(河琥)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고, 둘째 아들 하박(河珀)은 나이가 20이 못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도사(都事)를 돌아보며,
“도망할 리는 없으니, 형(刑)을 조금만 늦추어 주십시오. 부득이 모친과 영결(永訣)하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니, 박이 문으로 들어가서 모친 앞에 꿇어앉아,
“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자식으로서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自決)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적몰(籍沒)되어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의리로써는 죽을 때까지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것이니, 훗날 개돼지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두 번 절하고 나와서 조용하게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하위지는 훌륭한 자식도 두었다 하였다.
○ 교리 정붕(鄭鵬)은 선산인(善山人)이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수양하여, 그의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공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므로 비록 문안(問安)하는 예는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이 갈 때에는 반드시 숙마(熟麻 누인 삼 껍질)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었다.
한번은 공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의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 꾸어줄 것을 청하자, 유자광이 쾌히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교리가 지나치게 괴퍅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
하며,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서 옥같은 쌀밥을 보고, 얻어온 곳을 물으니, 부인은 사실대로 알렸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쓴 만큼을 채우고 본디 쌀과 합쳐서 돌려보냈다. 그가 궁핍(窮乏)하여도 절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공이 장성하자 부친이 도적의 손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홍유손(洪裕孫)과 친교를 맺고 여러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姓名)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하루는 그 아전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오다가 중간에 인가(人家)에서 묵었다. 공은 그때에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타서 도끼를 가지고 그 사람이 유숙하는 곳으로 걸어서 갔다. 홍유손을 시켜 불러내어 관청일로 서로 고해 주는 척하게 하고 공은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 다음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집과 동행하던 사람은 마침내 무슨 연고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였다.
○ 고령(高靈 고령은 고을 이름으로 봉호(封號))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 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 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섬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하였다. 공은 말문이 막혀 몸둘 곳이 없는 듯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을해년 여름 노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일로, 진신(搢紳)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 판서 이세좌(李世佐)의 부인 모씨(某氏)는 모관(某官)의 딸이다. 성묘(成廟) 때에 폐비(廢妃)에게 죄를 주려 할 적에, 공이 대방 승지(代房丞旨)로 사약(死藥)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공이 집에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부인이 묻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폐비를 논죄(論罪)한다더니 필경 어찌 되었소?”
하니, 공은,
“벌써 사사(賜死)되었소.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애달퍼라,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려. 어미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으로서 훗날 보복하지 않겠소? 조정에서 세자(世子)를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후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에 공의 아들 이수정(李守貞)이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동쪽 저자[市]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에 폐비론(廢妃論)을 고집하던 벼슬아치의 자손들이 남김없이 모두 죽었고, 나라도 거의 망할 뻔하였다. 부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실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 목은(牧隱)은 고려 말기 새 임금을 세우려고 논의할 적에, 홀로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뭇 사람의 떠드는 중에서 주장하였다. 그후 우왕(禑王)이 폐위되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공은 미복(微服)으로 가서 뵙고, 국화(菊花)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인정이 어이하여 만물처럼 무심하리 / 人情那似物無情
요즈음 경색 보니 마음 편치 못하여라 / 觸景年來漸不平
동리를 우연히 향하니 못내 부끄러워라 /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僞淵明
막막한 용사에 추풍이 부니 / 龍沙漠漠又秋風
시든 풀 이어지는 구름에 낙조만 붉네 / 衰草連雲落照紅
국화를 꺾었으나 누구에게 바치리 / 折得黃花誰上壽
해서 천릿길, 여기가 행궁이네 / 海西千里是行宮
또 국화시가 있다.
울타리 옆 두어 가지 서리 맞은 꽃이 고와 / 數枚籬畔媚霜葩
한산 사람 목은의 집 빛나게 하네 / 潤色韓山牧隱家
이 늙은이 갑자 쓸 줄 어이 알리오 / 此老豈知書甲子
문앞에 푸른 버들 연기 띠고 늘어졌네 / 門前碧柳帶煙斜
공의 간곡한 뜻을 알 수 있다.
○ 판서 이자(李耔)는 자(字) 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거사(陰崖居士)이며, 우리 한산이 본관이다. 문장이 능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엄숙하고 충직(忠直)하여 당시 사람들이 뜻을 크게 펼칠 것을 기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는 인아(姻婭 동서)의 친분이 있고, 또 주계군(朱溪君 이름은 심원(深源))에게 함께 배웠다. 그러나 평생에 하는 짓은 향초와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였다. 그리하여 김안로는 매양 공을 해칠 뜻이 있었으나 공이 올바른 도를 지키므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기묘년(1519, 중종 31)에 여러 현인이 내침과 죽음을 당하던 날에 공도 또한 파직되고 내침을 당해, 용궁현(龍宮縣)에 살고 있었다.
그후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휴가를 받고, 함창(咸昌) 지역에 와서 성묘를 하면서, 먼저 공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가는 길에는 옛 벗을 찾겠노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실상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그의 심사를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온다는 날 아침에 홰나무 꽃물로 낯을 씻고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서로 대면하였다. 김안로는 공의 손을 잡고서 지극히 다정하게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음애공(陰崖公)이 죽게 되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군자(君子)가 소인을 대할 때에 가끔은 스스로를 숨겨서 화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도이다.
○ 목은이 장단으로 귀양 가서 성(省)에 낭관으로 있는 여러 아들에게 시를 부쳤다.
1
현릉 일대에 소인 선비로 / 玄陵一代小人儒
중서성 간의대부 역임했노라 / 揚歷中書諫大夫
시중이 된 것은 요행이었지 / 得至侍中徼幸耳
사문에 무엇으로 맞먹게 보답하리 / 斯文何事答相圖
1
중용과 대학에서 증자ㆍ자사 배웠는데 / 中庸大學學曾思
사람들은 영왕이 네 스승이라 하네 / 人道瀛王是汝師
요즘 와서 장락이 나만은 아니리 / 長樂邇來非獨我
뉘 다시 귀거래사 지을것인가 / 有誰重賦去來辭
1
작년에 큰자식이 황천으로 갔는데 / 去年長子入黃泉
오늘 아침 중씨가 바닷가로 귀양갔네 / 仲氏今朝謫海堧
들으니 셋째 자식 탄핵을 당한다니 / 聞說三郞方被劾
어이한 하늘인가 어이한 하늘인가 / 奈何天也奈何天
1
세상의 성쇠는 돌고 도는 것 / 世間榮悴似循環
송백이 푸르러도 추위에 시달린다 / 松柏蒼蒼又苦寒
중니를 배워 구괘를 벌이고서 / 且學仲尼陳九卦
흰 머리 이 신세를 장단에 부쳤노라 / 白頭身世付長湍
1
벼슬길은 고금이 위태로운 것 / 官途今古足危機
늘그막의 시비됨이 무엇이 괴이하리 / 何怪衰年惹是非
성은에 감사하니 천지도 한없어라 / 再拜聖恩天地大
눈은 산에 가득한데 사립문이 닫혔네 / 滿山殘雪掩柴扉
1
탄핵 상소 큰 기세로 사람을 놀래지만 / 彈章大勢乍驚人
익히 읽고 생각하면 모두 진심 잃었구나 / 熟讀深思摠失眞
노옹을 잡아오라는 그 네 글자 / 捉敗老翁惟四字
쫓아낸 중이 도리어 왕륜 같을까 두렵구나 / 黜僧還恐似王倫
1
장단 태수 생선을 보내왔기에 / 長湍太守送纎鱗
시장할 제 먹어보고 그 좋은 맛에 새삼 놀랐네 / 晩食還驚味更珍
성랑에게 왕의 은혜 심중함을 알았노니 / 始識省郞恩深重
주리면서 공직할 이 어이 없으리 / 忍飢供職豈無人
1
현릉 갑인년 책사에 뽑히고 / 玄陵第士甲加寅
신씨 때 방이 붙어 출신하였네 / 放榜辛朝始出身
지금엔 황야에 물러나 있는 운수이니 / 坐數至今荒野去
온 조정의 귀인들이 한 사람도 없구나 / 滿庭靑紫絶無人
1
천자께서 부르시어 팔진미를 내리시니 / 天子呼來賜八珍
시중의 광채가 조정의 신하를 놀라게 했네 / 侍中光彩動朝臣
화복이란 피하기가 어려운 것 / 請着倚伏難逃處
적적한 시골에서 들 사람과 벗하였네 / 寂寂荒村伴野人
1
송헌은 정권을 잡고 나는 떠도는 신세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이런 일을 생각했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씨가 더구나 큰 논의에 참여했으니 / 二鄭況今參大議
한 집안 어느 때나 모여질런가 / 一家完聚果何時
1
너는 가문 믿고 너의 완악 부리지만 / 汝恃家門逞汝頑
아비가 빙산임을 네 어이 알겠느냐 / 那知汝父是氷山
탄핵문은 죽이고 용서하려 않는데 / 彈文直欲殺無赦
아직도 천지간에 함께 삶이 다행이라 / 尙幸竝生天地間
1
죄주려 하면 할 말이 어이 없을소냐 / 欲加之罪豈無辭
헐뜯는 듯 기리는 듯 세상이 다 아는 바네 / 似毀疑褒世所知
필경에는 하늘 믿고 걱정하지 않노라 / 畢竟有天吾不患
살진 고기 삶아 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리 / 爛烹肥肉倒深巵
목은이 시중(侍中) 송헌(松軒)에게 부친 시는 아래와 같다.
1
죽어 마땅한 신의 죄 성주의 인자로 / 臣罪當誅聖主仁
관내에 살게 되어 몸 편하다오 / 屛居關內得安身
어이 천행을 만났는가 물어 온다면 / 問渠何以逢天幸
송헌이 나의 친구여서라고 / 只爲松軒是故人
1
흰 머리 신세가 사양에 놓였으니 / 白頭身世已殘陽
직 없고 밭 없어도 상관 없어라 / 無職無田赤不妨
산에 노니는 흥취 있는데 / 只有游山高興在
낭묘에서 헤아려 주기까지 바라리까 / 敢煩廊廟一商量
1
들판에 가을 드니 경치 맑게 변하여서 / 秋入郊原淑景移
물화가 산뜻한데 비 또한 적셔주네 / 物華晴好雨仍奇
태평한 낭묘에 훌륭한 모임 많았는데 / 太平廊廟多高會
언제나 연 구경가는 이 그 누구이런고 / 每趣看蓮又是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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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함창길 흥 다시 새롭구나 / 三到咸昌興更新
여전히 꾀꼬리는 친절도 하여라 / 依然黃鳥赤相親
한산은 나의 부모 산소가 있는 고을 / 韓山有我先墳在
중추에 맞추어 양친께 배례하리 / 欲及中秋拜兩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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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이 천명 맞아 날이 방금 한창인데 / 三韓迓命日方中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 百折交情水必東
난리는 저절로 사라지고 화기 동함은 / 乖亂自消和氣動
황각에 맑은 기풍 있어서이네 / 只緣黃閣有淸風
목은은 정포은(鄭圃隱)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우연히 시를 지었다.
성의 공격 대의 탄핵 지금까지 이르더니 / 省擊臺彈直到今
오천의 기화가 남의 맘을 놀라게 하네 / 烏川奇禍駭人心
오고 가며 마음을 쓰나 일에 무슨 방해되랴 / 往來屑屑何妨事
송헌이 날 사랑하는 것 다시금 느꺼워라 / 更感松軒愛我深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자ㆍ기축년(1588~1589, 선조 21~22) 사이에 건원릉(健元陵 태조능) 위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는데 수호(守護)하는 군사들이 가서 살펴보면 들리지 않았다. 수호하는 군사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삭망제(朔望祭) 때에 헌관(獻官)과 집사원(執事員)도 가끔 주산(主山)에서 가느다란 곡성이 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연고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倭賊)이 바다를 건너와서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조(聖朝)의 혼령(魂靈)이 지하에서 걱정하고 애달파하여 이 세상에 정녕하고 간곡(懇曲)하게 가르쳐준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상하(上下)가 모두 어둡고 어리석어서 경계할 줄 몰랐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2백 년이다.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이 백성을 편케 하고 은덕으로 보살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살육(殺戮)을 하였지만, 중종과 명종이 정사를 거듭 밝혀, 너그럽게 돌보았다. 대단한 병란으로 인한 참혹함도 없었고, 9년 홍수(洪水)와 7년 대한(大旱)같은 재앙도 없이, 금상(今上 현재 임금 즉 선조) 때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백성은 번거로운 부역(賦役)에 곤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야(田野)는 개척(開拓)되고 일정한 살림이 있었고 숫자도 많아지고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염집 필부(匹夫)까지 호사하기를 숭상하여, 오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힘을 썼다.
물(物)이 성했다가 쇠하여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상례이다. 수십 년 이래로 역질(疫疾)이 유행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고, 기축년 옥사에 죄를 얽어 만들어서 3년을 끌며 끝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왜노가 온 나라 군사를 몰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거의 다 죽였고, 간혹 남은 백성은 직업을 잃고 농지를 잃어 성안과 지방에 누워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있었다. 또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逆賊)이 있다는 고발이 있어, 그들은 비록 형(刑)을 받았으나, 서민(庶民)들도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
더구나 역질이 한창 성한 중에 학질(瘧疾)이 횡행하는데, 고약한 비바람에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재앙이 잇달아서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이내 죽으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인들 그 어찌 며칠 안 되어서 다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본심인데, 어찌하여 진노(震怒)하기를 그만두지 않는가? 왜노를 불러들여 폭행을 하게 하고 악귀가 흉한 짓을 하도록 맡겨두어 죽이고 또 죽여서, 지금 와서는 더욱 심하게 하니, 인(仁)으로 덮어주고 하민(下民)을 불쌍하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 과연 이와 같은가? 옛 사람이 말하는 죽을 운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별도로 마땅한 사람 하나를 낳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청구(靑丘) 수천 리 지역에 다시는 인간이 없고 원귀(寃鬼)의 터로 변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움이 심하고 비운(否運)이 극도에 이르게 하여 인심이 허물을 후회하고 다스림을 생각하도록 한 다음에 다시 태평한 운수를 열어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진실로 알 수 없다.
○ 삼국(三國) 시대는 예문(禮文)이 소박하고 간략하였으며, 고려도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였으나 상례(喪禮)가 간략함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 와서는 예절 조목이 크게 갖추어져서, 비로소 최질(衰絰 상복)과 거려(居廬 상주가 여막에서 사는 것)하는 제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예법을 탕멸(蕩滅)하여, 드디어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만들고 어기는 자는 죄를 주었다. 사대부(士大夫)가 휩쓸려 따랐으나 또한 예법을 지켜, 심상(心喪)하는 자도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예전의 예법을 회복하였고, 정덕(正德) 기묘년 무렵에는 여러 현인(賢人)이 조정에 가득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강구해서 당시 후진들이 앞을 다투어 따랐다. 그리하여 여염에서는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죽어가는 부모에게 먹이는 것)ㆍ할고(割股 다리 살을 베어서 병든 부모를 살리는 것)ㆍ철죽(啜粥 삼년상 동안 죽만을 마시는 것)ㆍ여묘(廬墓)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들이었고, 혹 애훼(哀毁 지나치게 슬퍼함)하여 얻은 병이 고질이 되어도 오히려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아 그대로 죽는 자가 또한 많이 있었다.
효도란 비록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나, 진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억지로 힘쓰는 데서 나온다면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치상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종 때에는 이에 한 가지 핑계로써 스스로 편리하게 하려는 의논이 있어, ‘3년 동안 여묘를 사는 것은 가례(家禮)의 본뜻이 아니고, 권도를 좇는 것이 성인(聖人)의 남긴 가르침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반혼(返魂 장사지낸 후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하게 되니, 어진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모두 예법을 하는 일이라 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 사이에 옛법을 좋아하는 인사(人士)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으므로 반혼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뜻을 힘껏 말하였으나,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로부터는 상례(喪禮)의 기강(紀綱)이 나날이 무너져 상주된 자가 반드시 궤연(几筵 영궤(靈几)와 혼백ㆍ신주를 모셔두는 곳)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병을 핑계하고 안방에 거처하면서 마시고 먹고, 손님 접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임진년 왜란 이후에 조정에서 무사(武士)에게 기복(起復 거상중에 나와 벼슬하는 것)해서 종군(從軍)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종군하더라도 기복의 복색이 저대로 있었는데, 졸곡(卒哭 삼우제 다음 지내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혹은 연상(練祥 소상)도 마치기 전에, 고기를 먹고 채색 옷을 입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 무부(武夫)에 대하여서는 나무랄 것도 못 되거니와, 문관(文官)으로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도 자기 스스로 기복한 자가 많았다. 혹은 모집을 핑계대고, 혹은 의병을 핑계하여 윤리와 기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이롭게 하기만 일삼았다. 선비로서 스스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이나 예법을 배웠다고 자칭하는 자도 모두 상(喪)을 입지 않고 한 집안에 윗사람 아랫사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도 상례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 예법을 숭상하여 상례를 지킨 자는 아주 없고 겨우 몇만 볼 수 있었다. 아! 전일에 권도를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던 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오늘날에 상주로서 남을 대하고 마음대로 먹는 자는 또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이 이른바 본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대저 삼년상이란, 천경지의(天經地義 하늘의 떳떳함을 얻고 땅의 마땅함을 얻은 도리. 즉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도리)이며,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진 자는 삼년상도 가볍게 여기나, 못난 자는 마땅히 애써야 할 바이다. 이는 어찌 이와 같이 우리 본연(本然)의 애달파하고 망극하게 여기던 본심이 하루아침에 흉악한 왜적의 변으로 인하여 씻은 듯 없어지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들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탄식할 노릇이고, 괴이한 노릇이다.
○ 만력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에 들어왔다. 잇달아 변경 성(城)을 함락시키고, 별다른 저항을 받음도 없이 그대로 달려왔다. 이일(李鎰)의 군사는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신립(申砬)의 군사는 충주(忠州)에서 함몰되었다.
29일 저녁에 급보가 갑자기 왔다. 이튿날 새벽에, 대가(大駕)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동궁(東宮)ㆍ중전(中殿)ㆍ여러 빈(嬪)과 함께 비를 맞으며 허둥지둥 나섰다. 임진(臨津) 나루를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자고, 개성(開城)을 거쳐 다시 관서(關西)로 방향을 바꾸었다. 종실(宗室)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중도에서 도망쳐 흩어지고 대부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 심지어 첨지(僉知) 성세녕(成世寧)ㆍ전 직장(前直長) 성세강(成世康)같은 자는, 사대부로서 또는 7품 녹봉(祿俸)을 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편하게 있다가 왜노에게 항복하였다. 성세녕은 손녀(孫女)를 왜장에게 아내로 주어 귀염을 받아 그 덕에 온 동리가 편하였다. 종친 및 사족(士族) 등이 처음에는 모두 성문을 나서서 기내(畿內) 고을에서 난을 피하였으나, 성세녕 형제가 평안 무사함을 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간 자도 또한 많았다. 삼의사(三醫司)와 각 관청의 서리(書吏)ㆍ전복(典僕) 및 잡색(雜色)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를 벌이고 물자를 교역(交易)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
더욱이 통분(痛憤)한 것은 대가(大駕)가 막 성문을 나섰고, 왜적은 채 입성(入城)하기도 전인데, 성안 사람이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내탕 부고(內帑府庫)에 있던 재물을 서로 탈취(奪取)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궁궐(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및 육부(六部), 크고 작은 관청에다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심사를 살펴보면 흉적(凶賊)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였으니, 매우 두렵다.
그후 중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섬멸(殲滅)되니, 왜적들은 저희들의 형세가 어려워짐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가려고 사방 성문을 모두 닫고, 오직 숭례문(崇禮門)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밤중에 분탕질하면서 성안의 늙은이 젊은이를 몰아다가 죽였으므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 요행으로 빠져나온 자는 도리어 말을 요사스럽게 꾸며서, 전일에 도성에 남고 떠나지 않은 것은 우리 군사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내응(內應)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다. 민정(民情)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그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 야인(野人 여진족)이 모든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간품(看品) 받는데, 변장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각 거둬들이는 것이 있으니, ‘상납(上納) 인정(人情)’이라는 명목이었다.
서울에 오게 되면 각 해조(該曹)와 정원의 하리(下吏)에게도 또한 다 인정물(人情物)이 있었다. 만력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내가 나가서 양주 원 노릇을 하는데 나의 자식이 돌아가는 야인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면서 묻기를,
“네가 진상한 것이 얼마이며, 어떤 것을 상으로 얻었느냐?”
하니 야인은,
“우리가 진상한 담비 가죽이 극히 좋았으므로, 당초 생각으로는 관직(官職)을 얻게 될까 기대했었는데 다만 상으로 포(布)를 받고 돌아왔소.”
하였다.
“어찌하여 관직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인정 쓴 것이 모자랐던 까닭이오. 딴 사람은 다 주었는데 승지(承旨)에게는 주지 못한 까닭에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정원 하리를 지목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변장이란 자가 간품(看品)하면서 인정물을 직접 받았으므로, 저 사람들은 각 관청에 인정 쓰는 것은 모두 관원이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 우리 나라 인정 쓰는 폐단이 그 해가 먼 지방 사람에게도 미쳐, 욕된 말이 조정 근시(近侍)의 반열에까지 이르니, 애닯구나.
○ 성종 때에 손순효(孫舜孝)는 아주 융성한 은총(恩寵)을 받았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으로 나갔는데, 하루는 서울에 들어와서 숙배(肅拜)하게 되었다. 성종은 편전(便殿)에 납시어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리고 조용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파하였다. 손순효가 그날로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양사(兩司)는 손순효가 번신(藩臣)으로서 소명(召命)이 없었는데도, 마음대로 서울에 올라왔다 하여 그를 파직시켜, 무례한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은 편전에 양사 관원을 불러 술을 내리면서 묻기를,
“오랫동안 탑전(榻前)을 떠나 있으면서 그 임금이 그리워서 와서 보고 갔다. 이것은 인신(人臣)으로서 지극한 정인데, 이와 같이 논하니, 죄의 가볍고 무거움은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밝혀라.”
하니, 양사 관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물러났다.
○ 순회세자(順懷世子 명종(明宗)의 아들로 세자였다가 요절함) 때에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로서 나와서 뵙는 자가 모두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새로 제수(除授)된 관원이 동궁에게 사은(師恩)할 때에도 신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았다. 순회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에도 예가 또한 그러하였다. 무릇 춘방(春坊) 관원으로서 동궁의 신하라 하지 않고 궁료(宮僚)라 하는 것은, 대개 위에 군부가 계시므로 나라에 두 지존(至尊)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라가 결딴이 난 나머지 집정자(執政者)가 조종(朝宗) 여러 대를 계속해서 준행(遵行)해 오던 법규를 강구(講究)하지 않고 다만 《오례의(五禮儀)》의 ‘신이라 칭한다.[稱臣]’는 조문에만 의거하여 그 예법을 갑자기 바꾸어 버렸다. 무릇 나와 뵈옵는 관원은 반드시 신이라 일컫고, 사은하는 단자(單子)와 문서에도 모두 신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대개 기묘 제현(己卯諸賢 조광조 등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이 예법 조문을 강구하여, 잘못하거나 빠뜨린 것이 없었다. 그들도 《오례의》에 신이라 일컫는 조문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때에는 신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논의를 고쳐 정할 때에 반드시 정설(定說)이 있었을 텐데 지금엔 얻어 볼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느냐?
○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으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음양(陰陽)의 여러 가지 방서(方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망기(望氣)하는 술법도 잘 알았다. 조정에서 불러서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였으나, 6품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임진년 여름에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의 말이 증명되었다. 대개 공빈(恭嬪)의 부모와 그의 선대가 살던 곳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 30리) 되는 지역인 손이곡(孫伊谷)이었고, 그들의 무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술법이 정묘(精妙)함에 탄복하였다.
○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혀 극도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세 대장이 성씨가 다른 경대부(卿大夫)로서,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이 한 일을 행하여, 광포(狂暴)한 사람을 폐하고 성왕(聖王)을 세워서,중종 40년 동안의 태평한 치적을 이루어 사직에 공업(功業)을 세우고, 명성이 후세(後世)에까지 드리웠다. 세 사람 중에서도 성희안은 더욱 문신(文臣)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성희안은 연산군의 후궁(後宮)을 첩으로 삼아 데리고 살았다. 아! 임금이란 하늘이다. 하늘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섬기던 임금이라도 나라를 망치게 하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만 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일신으로는 만고에 불행한 변고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았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랴? 성희안이 성취한 공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 이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 따위라니. 저 따위라니.
○ 용만(龍灣 의주)은 강 하나가 띠[帶]처럼 서로 막고 있어, 여기에서 서쪽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 보통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역관(譯官)에 의탁해야 된다. 요동은 본디 고구려 땅이었다가 당(唐) 나라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649)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 전에는 반드시 우리 나라 말을 능히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도 중국말을 잘하지 못할 리가 없고 다만 오랫동안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심하역(深河驛) 서쪽과 마파하(馬坡河)동쪽에 유관(渝關)이 있는데 바로 송(宋) 나라가 요금(遼金)과 서로 쟁탈(爭奪)하던 곳이다. 금(金) 나라가 차지하면 철마(鐵馬)와 견갑(堅甲)으로 멀리 휩쓸 수 있고, 송 나라에서 빼앗기면 평주(平州)ㆍ난주(灤州) 등 고을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이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유관을 한계로 하였다.”
하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성터로 볼 만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한계로 할 만한 곳도 아니다. 삼차하(三叉河)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유관에서 삼차하까지는 거의 8백여 리가 된다. 장성이 만약 유관까지였더라면 《사기(史記)》에 반드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렀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형세를 보고 나의 의견을 간추리면, 몽염이 석문령(石門嶺)을 한계로 한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어떤 이는,
“진시황이 한번 포거(鮑車)에 오른 뒤에 부소(扶蘇)가 죽음을 당했고 몽염(蒙恬)이 칼을 받았으니, 준공(竣功)이 되기 전에 벌써 살해된 것이다. 그러면 유관과 석문령이 모두 당시에 역사(役事)를 미처 마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기에 나는,
“《사기》 및 여러 가지 서적(書籍)에는 모두 성 쌓던 역사를 철회했다는 말이 없다. 그리고 조고(趙高)가 몽염을 죽일 때에 오히려 준공을 제때에 못한 것을 죄로 삼았다. 이세(二世)의 말년에 와서도 오히려, 여좌(閭左 땅 이름)의 백성을 일으켜서 어양(漁陽) 수자리에 가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끝내지 못한 역사가 어찌 있겠느냐?”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진시황이 백성에게 해를 끼친 것이 극도에 달했지만, 지금까지 장성(長城)의 덕을 보고 있다. 만약 도(道)가 있어 사방의 오랑캐가 잘 지켜준다면, 성이 있고 없고는 따질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 영구히 다스리지 못하고, 몹시 어수선해진다면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郭]도 오히려 삼가 지켜서 난폭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하물며 화외(化外)에 있는 천교(天驕 흉노)의 사납고 거친 것들이야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시설(防禦施設)을 하고 막아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한 시대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만세(萬世)의 백성을 편하게 하였음은 하늘의 뜻이라 하니할 수 없다. 시황이 비록 포악하고 패려함이 심하다지만 어찌 능히 하늘을 어기면서 이런 거창한 역사를 완성하였으랴?“
한다. 그 말이 이치에 근사하기에 우선 적어두는 바이다.
○ 김안로(金安老)는 폐출(廢黜)되어 풍덕(豐德)에 살고 있었다. 민수천(閔壽千)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안로를 찾아보고,
“영공(令公)이 뛰어난 재주로써 연세도 아직 높지 않은데,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치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안로는 다가앉으면서 넌지시 말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어찌 없으리오. 다만 그 길을 얻지 못하였소.”
하니, 민수천은 말하기를,
“지금 세 허씨(許氏)와 두 심씨(沈氏)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이 끌어준다면 조정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는 허항(許沆)ㆍ허흡(許洽)ㆍ허확(許確)과 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을 말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세 허씨와 두 심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고 묻자,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김안로는 조정 논의가 지향(指向)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 그후부터는 남을 보면 반드시, 기묘 제현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간다면 어찌 이와 같이 어물어물 세월만 보내고 말겠는가?”
하였다. 허항 등이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뜻이 같으니, 김안로를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원하고 싶었지만 명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는 인종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동궁을 보도(輔導)한다는 핑계로 말을 만들어, 힘껏 성원하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전일에 한 말을 뒤집어 기묘 제현의 죄를 더욱 꾸며댔다. 허(許)와 심(沈) 등은 이미 그 당파에 들어가 도리어 김안로의 부리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혹은 매와 개[鷹犬] 노릇을 하고, 혹은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어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의 형세도 위태로워졌다. 다행히도 태평할 운수가 열려서, 간신(奸臣)이 죄를 입게 되어 세 허씨와 두 심씨도 혹은 내침을 당하고 혹은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민수천도 역시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형을 받았다. 소인(小人)이 틈을 타서 진출(進出)하기를 구하는 기미(機微)가 처음에는 아주 하찮은 일이었으나, 악인끼리 서로 결탁하여 돕는 화가 이 지경에 이르니, 매우 두려운 바이다.
○ 목은이 우연히 지은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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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의 장상이 몇이나 남았는고 / 玄陵將相幾人存
벽상의 도형 또한 침침하구나 / 壁上圖形赤已昏
병 많은 목은은 벼슬 그만두었고 / 多病牧老頻任已
지금의 정사는 송헌 홀로 맡았네 / 至今經濟獨松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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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헌의 충의 하늘에 닿으니 / 松軒忠義薄雲天
한의 강후 당의 양공과 어깨 겨루리 / 漢絳唐梁與比肩
태평한 참 기상을 알고 싶거든 / 欲識太平眞氣像
문 닫고 베개 베고 단잠 자노라 / 閉門高枕得安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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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잠 자며 내 이미 무위함을 기뻐하니 / 安眠喜我已無爲
뜬 구름같은 세상 공명 생각 끊었네 / 浮世功名絶不思
다만 한 되는 건 평소의 버릇 남아 / 只恨多生餘習在
때때로 흥이 나면 시를 짓는 것 / 時時寓興卽題詩
○ 목은이 스스로를 읊조린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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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이 신장은 안영 같지만 / 老翁身似晏嬰長
비파 밀치니 증점처럼 뜻이 크구나 / 舍瑟還同點也狂
돌아감 청했으나 어디로 가리 / 縱得乞歸何處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하기만 하여라 / 桃花流水渺茫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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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가 당일에 중용을 지으시고 / 子思當日作中庸
극구 칭찬했네 그 조부의 풍도를 / 極口稱揚乃祖風
대대로 아름다운 건 한산의 문자인데 / 世美韓山文字耳
지금엔 시구도 잘 짓기 어려워라 / 只今詩句尙難工
○ 목은의 ‘실인(室人)’을 읊은 시가 있다.
젊어서는 벼슬하느라 하늘가에 떨어져서 / 少年遊宦各天涯
꿈 속에 서로 만나 그리움을 나누었소 / 夢裏相逢話所思
오늘도 전날과 같은 줄을 어이 알리 / 今日那知是前日
마음이야 기쁘지만 또 한편 의심되오 / 縱然心喜又心疑
○ 또 사물을 대하여 지은 시가 있다.
전 자로 된 창이 구 자 뜰에 닿는데 / 田字窓臨口字庭
조석으로 밥 짓는 연기 빈청에 가득하네 / 炊煙朝暮鎻虛廳
문에 나서서 긴 휘파람 불 만하구나 / 出門可是舒長嘯
눈앞의 관악산이 각별히 푸르러 / 滿眼冠山分外靑
○ 점필재(佔畢齋)가 영해부(寧海府)를 지나다가 목은을 회상하여 지은 절구(絶句)가 세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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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보 뜰 가운데 화씨의 구슬이요 / 無價庭中和氏璧
관어대 아래 북해의 곤어였네 / 觀魚臺下北溟鯤
소매 흔들며 연ㆍ계 지방 놀고부터는 / 自從擺袖遊燕薊
운몽호(雲夢湖)도 시시해서 삼킬 것이 못 되었네 / 雲夢區區不足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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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라 동쪽 끝에 선비를 몰라 / 滄海東頭不識儒
천 년의 간기가 다만 괴소였네 / 千年間氣只塊蘇
선생이 한번 나매 사람의 상서 되어라 / 先生一出爲人瑞
이로부터 단양엔 초목도 시들어지리 / 從此丹陽草木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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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의 연원이 전후에 뛰어나서 / 師友淵源絶後前
청구의 인물을 다 키워내셨네 / 靑邱人物盡陶甄
지금에야 비로소 즐기시던 곳 지나니 / 如今始過軒渠地
동시에 태어나 채찍 잡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執一鞭
○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왕방(王昉)과 조반(趙胖)이 명(明)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등을 불러,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황제(皇帝)에게 나와서 호소하기를, 「고려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세웠으나, 왕요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인친(姻親)입니다. 그리고 왕요는 이 시중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서 상국(上國)을 위태롭게 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다가 곧 모두 죽음을 당하고 귀양도 갔습니다. 귀양간 재상 등이 우리를 보내, 천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하고 이어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윤이와 이초가 기록하였다는 성명(姓名)을 내어보였다. 이리하여 대간(臺諫)에서 윤이ㆍ이초의 당(黨)을 문초하게 하는 한편, 이색등을 청주(淸州) 옥에 가두고 문하 평사(門下評事) 윤호(尹虎) 등을 보내서 문초하게 하였으나 여러 죄수는 모두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과 비가 크게 일고 앞 냇물이 급히 넘쳐 남문을 휩쓸고 바로 북문을 덮쳤다. 성안에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고 잠겨버렸다. 객사(客舍)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들은 허둥지둥 나무를 부여잡아 죽음을 면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석방하였다.
권 양촌(權陽村)은 이런 시를 지었다.
떠도는 말이 불행하게 주공에게 미치니 / 流言不幸及周公
갑작스러운 큰 바람에 좋은 벼 쓰러졌도다 / 忽有嘉禾偃大風
듣건대 서원에 홍수가 넘쳤다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음을 알았노라 / 始知天道古今同
김자수(金自粹)가 한산(韓山)을 제목으로 읊조렸다.
동국 문장을 집대성한 이로 / 東國文章集大成
가정 부자가 뭇 인재 중 첫째였네 / 稼亭父子冠群英
산천의 빼어난 정기 지금도 예와 같은데 / 山川孕秀今猶古
묻노니 어떤 이가 그 성명을 이을런고 / 且問何人繼姓名
조계생(趙啓生)이 그 시를 차운(次韻)하였다.
산은 곰나루를 끼고서 첩첩이 서 있는데 / 山傍態津疊嶂成
마침내 이씨가 그 영기를 받았구나 / 終敎李氏稟其英
부자가 과거에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이 고을 이름을 천하가 다 알았네 / 天下皆知此邑名
‘뽕잎 먹는 누에소리[食葉蠶聲]’에 대한 시로,
푸른 나무 그늘 속에 가을비 뿌린다 / 綠樹陰中洒秋雨
‘솜 타는 활소리[彈綿弓響]’에 대한 시로,
흰 구름 무더기 속에 봄 우뢰가 동한다 / 白雲堆裏動春雷
라는 것을 세상에서 어무적(魚無迹)의 시라 전해 온다. 비록 전해 오는 말이 옳은지는 지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참으로 소리 있는 생생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시가 있다.
밭 가는 소에겐 밤 넘긴 풀 없는데 / 耕牛無宿草
광에 있는 쥐는 남은 양식 있구나 / 倉鼠有餘糧
만 가지 일에 분수 정해 있는데 / 萬事分前定
덧없는 인생 스스로 바빠하네 / 浮生空自忙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인지 알 수 없으나, 또한 재물을 탐내기에 급급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가 될 만하다.
○ 고려 말엽에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어느 날 새벽에 송경(松京) 동쪽 성문 밖을 지나다가 닭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연구(聯句)에,
천 마을 만 부락이 다 꿈속인데 / 千村萬落同昏夢
꼬리 빠진 수탉은 때를 잃지 않는구나 / 斷尾雄鷄不失時
했다. ‘꼬리 빠졌다[斷尾]’는 것은 선탄이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나라가 장차 망할 참인데, 여러 사람이 능히 알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었다.
○ 진사 조욱(趙昱)은 자는 경양(景陽), 호는 보진암(葆眞庵)인데, 만년(晩年)에 용문산(龍門山) 밑에 집을 짓고 용문거사(龍門居士)라 하기도 하였다. 능란한 문장과 조촐한 절조로써 한 세대에 훌륭한 인사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발탁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으나,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곧 병을 핑계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원성(原城)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경장천 냇가에 해가 질 무렵 / 慶莊川上日斜時
문앞에 말 세우고 목동에게 물었더니 / 立馬門前問牧兒
주인은 서울 갔다 알려주누나 / 報道主人京洛去
온 하늘 풍월인데 시 못 지음이 한스러워 / 一天風月恨無詩
○ 선조(先祖)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은 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릴 때에, 공의 손자 이파(李坡)가 예조 판서로 있었다. 연산군이 당시의 재상과 언관(言官)의 죄를 물을 때에 이파는 벌써 죽어 관을 쪼갬[剖棺]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緣坐)되어서 무덤을 허물려서 평평하게 되었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후에도 오랫동안 봉분(封墳)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은 양경공의 형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니, 공에게는 종손(從孫)이 된다. 하루는 일찍 서울 집에 달려와서 봉화(奉化) 원을 지낸 나의 증조(曾祖) 이장윤(李長潤) 공에게 묻기를,
“꿈에 의젓한 어른이 말하기를, ‘집이 부서져서 비가 새어도 자손이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수리하지 못하는데, 문중(門中)에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으니,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 문중에 반드시 변을 겪은 뒤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봉화 어른께서 양경공의 무덤이 허물어진 뒤에 여러 해가 되도록 복구하지 못한 사유를 자세하게 말하니, 상공(相公)은 크게 놀랐다. 드디어 함께 힘을 합쳐 흙을 보태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 연산 무오년(1498)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죽였다. 그후에 연산군은 명문(名文)을 짓는 선비를 이미 잃었으니 이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에다가 유생(儒生)을 크게 모아 시험을 치러 뽑았는데, 전시(殿試)에 책문(策文) 한 가지만 짓게 하였다. 과차(科次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를 정하는 참인데, 한 시권(試券)은 말 꾸민 것이 졸렬하고 껄끄러워 집필관(執筆官)이 차등(次等 4등임)으로 정하려 하였다. 상고관(上考官)은 삼하(三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3등 중 셋째 등급)에 들 만하다 하였으나, 집필관이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관은 계속 우겼고 고시에 참여한 여러 관원은,
“만약 이런 것을 입격(入格)시키면 반드시 과방(科榜)에 오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불가하다.”
하여,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상고관이 삼하로 정하도록 강압하자, 집필관은 분이 나서 붓을 휘둘러 가로 세 획을 그은 데다가 바로 획을 내리긋고 점을 찍은 다음 나가버리니, 실제로는 이하(二下 2등 중 셋째 급)가 되어버렸다. 고사(考査)하기를 마친 후에 등수를 갈라서 서계(書啓)하자, 연산군은 2등에다 낙점(落點)하였다. 훌륭한 문장과 뛰어난 글씨로 삼상(三上)에 입격한 자는 모두 떨어지게 되었고, 다만 김극성(金克成) 등 6인이 뽑혔다. 그릇 이하(二下)로 적힌 자는 횡성 훈도(橫城訓導) 오희증(吳希曾)의 글인데, 말등(末等)에라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니냐?
○ 정소종(鄭紹宗)이 젊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정소종의 손바닥에다,
우임금 발자취 있는 산천 밖이요 / 禹跡山川外
우 나라 뜨락의 새와 짐승 사이다 / 虞庭鳥獸間
라는 시구를 적었다. 소종은 그 시구를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않았다. 연산군 갑자년(1504) 겨울에 특별히 전시(殿試)를 보이는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하였다. 그 글제는, ‘봄에 이원(梨園)을 개방하고 한가롭게 기악(妓樂)을 본다.’라고 하였는데, 연산이 직접 낸 것이다. 정소종은 홀연히 젊었을 때 꿈에 본 노인의 시구가 떠올라 각각 두 자씩을 보태어, 글귀를 지었다.
봄은 우임금의 발자취가 있는 산천에 무르익고 / 春濃禹跡山川外
풍악은 우 나라 뜨락 새와 짐승 사이에 울린다 / 樂奏虞庭鳥獸間
그때 김 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가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석하였다. 상고관이 정소종의 글을 하등(下等)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모재가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라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상등으로 정했다. 그런데 최세절(崔世節)이 다른 시구와 통산[通算]하여 장원이 되고, 정소종은 넷째로 되었다. 과방(科榜)이 발표된 후에 정소종이 은문(恩門 과거 급제자가 시관을 일컫는 것)으로서 모재를 가서 뵙자, 모재는 시상(詩想)이 여기까지 미치게 된 것을 물었다. 정소종이 젊었을 때 꿈을 꾼 일을 자세히 말하였더니, 모재는 더욱 경탄(驚歎)하였다.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 상공(相公) 안당(安瑭)은 평소에 자라 먹기를 좋아하여 가끔 삼강(三江) 어부(漁夫)에게서 구해 오고, 또한 공이 즐긴다는 말을 듣고서 가지고 와서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이 화(禍)를 당하기 전에, 동전(銅錢)만한 작은 자라가 행랑 마루 안팎 뜰에 헤아릴 수 없이 흩어져 다녀 다 쓸어낼 수 없어, 뜰에 독을 두고 집어넣었다가 가득 차면 독을 져다가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런 후 겨우 1년이 되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무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되어 죽었으니, 화가 난 것이 자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라의 요변(妖變)이라 하겠다. 그의 집은 소격동(昭格洞)에 있었고, 무과(武科) 이승종(李承宗)이 살았는데, 임진년 난리에 왜적이 불태워 버렸다.
○ 무과 조현범(趙賢範)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부엌에서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것이 자라탕이었고, 공도 또한 그것을 즐겼다. 한번은 어부가 3~4일 이 지나도록 자라를 바치지 않자, 부엌일을 맡은 아전이 공에게 알려 공문을 띄워서 재촉한 다음에 큰 자라 세 마리를 가지고 왔다. 공은 자라목을 새끼로 잇달아 묶어, 부엌일을 맡은 아전에게 주고 내일 올리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칼[枷]을 쓴 죄수(罪囚) 세 사람이 한 소장(訴狀)으로 호소하기를,
“당초에는 우리 무리가 참으로 번성하였는데, 본디 죄과(罪科)도 없이 날마다 죽음을 당한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고, 이제 우리 세 사람도 또한 잡혀 갇히게 되어, 북쪽 청사 마루 밑에 엎드려 있습니다. 총명하신 부윤께서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꿈에서 깨어, 곧 형리(刑吏)를 불러서 문틈으로 물었다.
“같은 죄로 잡혀서 갇힌 자가 누구누구인가?”
하니, 형리는,
“갇힌 사람 중에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다시 부엌일을 맡은 아전을 불러서 세 마리 자라가 있는 곳을 물었다. 부엌일을 맡은 아전은,
“관청 광 안에 두었는데, 없어져서 지금은 간 곳을 모릅니다.”
하였다. 공이 북쪽 청사 마루 밑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목 묶인 세 마리 자라가 과연 그 밑에 있었다. 공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겨, 곧 건장한 아전을 어부들이 있는 곳에 달려 보내어, 이제부터 다시는 자라를 잡지 말 것이며, 비록 잡히는 것이 있더라도 모두 놓아주게 하였다. 관아(官衙)에 있는 세 마리 자라는 공이 직접 가서 강에 놓아주고, 이날부터 다시는 자라를 먹지 않았다.
○ 무주(茂朱 무주는 지명으로, 무주 원님을 나타내는 것) 윤명은(尹鳴殷)은 집이 흥인문(興仁門) 안 동학(東學) 근처에 있는데, 문간 뜰에 늙은 홰나무가 있었다. 윤명은이 벼슬하기 전에 한번은 사정(射亭)에 있는 친구 집에 걸어서 갔다가, 술을 너무 마시고 흠뻑 취하여 날이 어두워서 홀로 돌아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술이 깨어 머리를 들어보니, 달은 지고 별은 엉성한데 고요하게 사람 소리가 없었다. 다만 남자 한 명이 자신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나 윤명은은 감히 성명을 묻지 못하였다. 술이 덜 깨어서 느린 걸음으로 돌아오는데, 그 남자도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남자와 만나 서로 말하는데,
“어디를 갔었는가?”
하자, 남자가,
“주인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서 맞아 온다.”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 홰나무 밑에 와서 돌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남자가 뜰에 있는 홰나무의 신(神)임을 알았다.
○ 만력(萬曆) 병술년(1586) 겨울에 여강(驪江)에서 어부가 얼음을 깨고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두어 자나 되었다.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날 밤에 고기가 주인의 꿈에 나타나,
“부디 나를 놓아주고, 해를 끼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 삶아 먹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웃 사람의 꿈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나, 이웃 사람은 놓아주지 않고 마침내 잘라서 삶았다. 그런데 그 국을 한 종지라도 맛을 본 사람은 누워 앓지 않는 이가 없었고, 6~7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아! 고기의 신이 능히 어부의 꿈에 급한 신세는 알리면서, 얼음 밑의 낚시바늘은 피하지 못하였고, 또 국 먹은 사람에게 병을 줄 줄은 알면서 식탐 있는 사람에게 삶김은 능히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으로서도 궁(窮)한 바가 있고 지혜로는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안쓰럽구나.
○ 송강사(松江寺) 돌비[石碑]에 이런 시가 있다.
비기를 서로 전해 9백 년인데 / 秘記相傳九百年
앞 사람은 벌써 갔고 뒷사람에게 옮겨지네 / 前人已去後人遷
삼도 한낮에 여우와 토끼 오는데 / 三都白日來狐兎
오부 봄날에는 젓대와 거문고에 취하네 / 五部靑春醉管絃
신숭에 잎이 지니 차가운 비 내리고 / 木落神嵩寒泣雨
궁원에 풀이 나니 새벽 연기 자욱하네 / 草生宮苑曉生煙
황은은 너그러운 바다같이 깊어서 / 皇恩寬宥深如海
삼한을 두 번이나 온전하게 하였네 / 坐使三韓再得全
비석에 이 시가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발견되었고, 또 누가 지은 시인지도 알 수 없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계본(啓本)에,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첩정(牒呈)에, 예전부터 쇠무덤[鐵塚]이라 부르는 곳이 있어 헤쳐 보았더니, 쇠붙이는 없고 다만 지석(誌石)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동쪽으로 15리쯤 되는 거리에 황금총(黃金塚)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면 그 이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식이 아비를 업신여기고, 종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중도 삿갓을 쓴다. 중이 속인(俗人)의 일을 하고 속인이 중의 일을 하며, 유생(儒生)은 붓과 벼루를 버리고, 베짜는 계집은 베틀과 북을 버리고, 농부는 쟁기와 보습을 버린다. 임진년에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가 계사년에는 도로 안정되고, 오년(午年)ㆍ미년(未年)에는 태평하여진다.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피난하는 것이 제일이고, 호서(湖西)가 조금 편안하고, 여강(驪江)은 혈육이 낭자할 지역이다. 한양(漢陽)으로 환도(還都)하면 주(周) 나라 같이 8백 년을 지날 것이고, 중국 군사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넌다면 주 나라보다 2백 년은 더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다. 대개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다. 항상 편하게 보전코자 하건마는 오직 그 인사(人事)의 득실(得失)과 운수(運數)의 소장(消長)으로 감응(感應)하여 간혹 혼란하기에 이르기도 하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본심(本心)이겠느냐? 지금 이런 말로써 본다면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과 흥하고 망함이 모두 일정한 운수에 연유한 것으로써, 하늘도 또한 어찌할 수 없으며, 사람의 힘도 그 사이에 능히 용납되지 못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어떤 사람이 남의 문간 벽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놓고 갔다.”
하는데, 그 시에,
나는 신라의 말엽 사람 / 我是新羅末葉人
나이가 팔백 하고 다시 세 살이로세 / 年將八百又三春
바쁜 걸음에 비는 오고 돌아갈 길 멀어 / 行忙雨濕歸程遠
당신과 더불어 얘기하지 못하오 / 不與高門談笑然
그런데 사람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선(地仙)이 되어,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고운(孤雲)의 시일 것이다.”
고 하였으나, 나는 고운의 시원스러운 문장으로써 반드시 이렇게 속된 시는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고운이 지금까지 생존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으니, 이것은 미친 아이가 한번 희롱삼아 읊조린 데 불과한 것이리라.
○ 중종조 정덕 연간(正德年間 정덕은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505~1521)에 원역(院驛) 벽에 절구 두 수를 적은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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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지난날 놀라게 하여 / 風雨驚前日
문명이 이때를 저버렸다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에 노닐며 / 孤笻遊宇宙
시끄러움 싫어서 시마저 그만뒀네 / 嫌閙竝休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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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무너진 원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頽院穴
중은 석양의 우물물을 긷누나 / 僧汲夕陽泉
천지를 집 삼는 길손 / 天地爲家客
건곤 어느 곳에 끝이 있던가 / 乾坤何處邊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교리(校理) 정희량(鄭希良)이 연산 때에 갑자년의 화(禍)가 있을 줄 알고 몸을 빼쳐 가버렸다. 어떤 이는 ‘강에 빠져 죽었다.’ 하고, 어떤 이는 ‘중이 되어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다.’ 하는데, 이것은 정희량의 시이다.”
한다. 지금에 와서 비록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나, 또한 난을 피해 은둔한 자의 말이리라.
○ 선조 가정(稼亭 이곡(李穀))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 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27세 때에 제과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논란이 있어 억울하게 이갑 제이인(二甲第二人)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목은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 과거에 오른 뒤에,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란 곳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그의 시에,
부자가 중국 과거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천하가 이 고을 이름 모두 알게 되었네 / 天下皆知此邑名
라는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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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와잡설(松窩雜說) / 이기(李墍) 찬
耘谷先生。與李崇仁鄭道傳等。司馬同榜。牧隱嘗謫寓驪興。公委往相見。多有唱酬之什。公聞禑廢謫江華。大書特書曰。國家以先王之子。爲辛旽之子。廢爲庶人。投之江華。仍有詩曰。祖王信誓應乎天。餘澤流傳五百年。分揀假眞何不早。彼蒼之鑑昭昭然。及聞昌廢之江華。禑自江華移於江陵。仍賜死。有詩云。先王父子各分離。萬里東西天一涯。縱使一身爲庶類。寸心千古不遷移。公以禑昌父子爲先王。而題詩哭之。
○ 왕씨(王氏)는 용(龍)의 종(種)이므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그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우(禑)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한 비늘이 있었는데, 우는 항상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임영(臨瀛 강릉)에서 죽음을 당하던 날에는 어깨를 드러내어 옆에 사람에게 보이면서, ‘지금 만약 보이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辛)가가 아닌 줄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나?’ 하였다.”
한다.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영 사람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 목은(牧隱)은 고려 말기 새 임금을 세우려고 논의할 적에, 홀로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뭇 사람의 떠드는 중에서 주장하였다. 그후 우왕(禑王)이 폐위되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공은 미복(微服)으로 가서 뵙고, 국화(菊花)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인정이 어이하여 만물처럼 무심하리 / 人情那似物無情
요즈음 경색 보니 마음 편치 못하여라 / 觸景年來漸不平
동리를 우연히 향하니 못내 부끄러워라 /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僞淵明
막막한 용사에 추풍이 부니 / 龍沙漠漠又秋風
시든 풀 이어지는 구름에 낙조만 붉네 / 衰草連雲落照紅
국화를 꺾었으나 누구에게 바치리 / 折得黃花誰上壽
해서 천릿길, 여기가 행궁이네 / 海西千里是行宮
또 국화시가 있다.
울타리 옆 두어 가지 서리 맞은 꽃이 고와 / 數枚籬畔媚霜葩
한산 사람 목은의 집 빛나게 하네 / 潤色韓山牧隱家
이 늙은이 갑자 쓸 줄 어이 알리오 / 此老豈知書甲子
문앞에 푸른 버들 연기 띠고 늘어졌네 / 門前碧柳帶煙斜
공의 간곡한 뜻을 알 수 있다.
○ 목은의 화상(畵像)은 제용동(濟用洞) 종가(宗家)에 간직되어 있다. 사모(紗帽)와 홍포(紅袍)와 서대(犀帶)를 착용하였고, 권양촌(權陽村 이름은 근(近))이 찬(贊)을 지었는데, 고려 말년에 조정에 있을 때의 화상이었다. 내가 괴원(槐院 승문원의 별칭)에 있을 적에 박식(博識)한 선비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선정(先正)에게 들으니, 혁명(革命)한 후에 공은 항상 초립(草笠)을 쓰고 흰옷에다 가는 실띠를 띠고 거상(居喪)하는 옷차림을 하였는데, 그 화상이 도성(都城) 안에 남아 있어, 직접 보았다 하였습니다.”
하므로, 나는 널리 물어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였다. 왜적의 난리를 겪은 후에는 대성 거족(大姓巨族)이 서로 전해 오던 문헌(文獻)도 씻은 듯 없어져 남음이 없으니, 내가 그의 흰옷 차림의 화상을 볼 수 없음이 확실하다. 한탄스럽다.
세상에 전해 오는 시가 있다.
밭 가는 소에겐 밤 넘긴 풀 없는데 / 耕牛無宿草
광에 있는 쥐는 남은 양식 있구나 / 倉鼠有餘糧
만 가지 일에 분수 정해 있는데 / 萬事分前定 * 萬事分已定<명심보감>
덧없는 인생 스스로 바빠하네 / 浮生空自忙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인지 알 수 없으나, 또한 재물을 탐내기에 급급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가 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