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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뉴우스의 마술사
앵커맨 전4권 중 제2권
저자: 로버트 골드버그. 제럴드 제이 골드버그
역자: 박성범
= 차례 =
7. 세트위에서 브로커와 1
8. 피터 제닝스의 수업 23
9. 중국 83
10. 앵커들의 현장이동 97
11. 천안문 광장의 댄 래더 117
12. ABC의 상하구조 177
7. 세트 위에서 브로커와
1930년대에 미국에서 기업의 파워 면에서 한 건축 비평가가 말했듯, (자본주의의
에너지로 맥박치는) 록펠러 광장만한 곳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오늘날
이 광장에서 가장 극적으로 솟구친 저 멋진 회색 기둥을 차지한 글자는 GE이다.
여느 일하는 날은 오전 9시 15분에서 9시 30분 사이면 톰 브로커가 록펠러 30번지
앞에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활보하여 회전문 중 하나를 지나 거대한
죠우즈 마리아 서트 벽화로 실내가 멋지게 장식된 로비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경비 데스크를 휑하니 지나 3층의 NBC로 올라간다. 그의 사무실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긴 복도를 지나 제작 책임자인 빌 휘틀리 (1990년에 스티브 프리드만으로 바뀜)의
사무실 바로 지나서 있다. 이 방에는 비서들의 책상이 점점이 놓여 있다. 브로커의
비서인 게리 젠슨은 줄 끝에 앉아 있다.
3월 하순의 금요일인 오늘은 아직 이른데도 브로커가 전화기를 작동시키는 거대한
로로덱스 기계 앞 책상에 앉아 있다. 그는 자기직업의 매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앵커가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노동집약적임을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는 않는다.
책상위의 선반에는 "세계연감", "워싱턴사전", " 1986년 미국 정치연감",
"신인용구사전" 등의 참고서적으로 그득하다.
야구 관련 카드용의 상자도 있다. 카스트로와 고르비와의 회담 취재를 위해 하바나로
떠나기 앞서 브로커는 소련 연구 분야의 권위자와의 상담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상의는 벗고, 목의 칼라를 연, 셔츠 슬리브 차림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파란색
실크 타이를 매고 파란 줄무늬 셔츠 위로 마룬 서스펜더를 입고 있다. 옷이 썩 잘
어울려 마치 폴 스튜어트 풍으로 고급스러워 보인다. 머리는 TV에서보다 더 헝클어지고
더 하얗게 보인다. TV 이미지와 다르기는 안경도 마찬가지다. 책상위에는 여러개의
안경이 "리치윌드 카운티 신문"이라 새겨진 커피잔 옆에 놓여 있다. 브로커는
커네티컷 주에 "가장 멋진 군"이라 불려져 온 콘월 마을에 커다란 시골집과 수백만
달러 상당의 토지를 갖고 있다.
그의 책상 한 구석에는 그가 당장 관심있어 하는 것들이 널려 있지만 푸근한
사무실 다른 부분은 자전거를 포함한 그의 과거로부터의 유산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식 소파와 의자들 사이에, 팔걸이 바로 밑에 여인의 두상이 새겨져 있는
묘하고 낯설어 보이는 장식이 잘 된 구식 흔들의자가 있다. "제 아버님
작품이죠"라고 그가 설명한다.
한쪽 벽 면에 쭉 놓여있는 유리문이 달린 서가 뒤편에 오랜 친구인 무하마드 알리와
레이건 여사의 사인이 담긴 사진이 있다. L.A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온 토미 래조더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기자 톰에게. 그대와 디저스팀은 위대하도다"라고
써놓았다. 선반 낮은 곳에는 그가 "투데이"의 사회자로 신임 대통령인 지미 카터와
인터뷰하기 위해 조오지아주 풀레인즈에 내려갔던 1976년 12월을 기념하기 위한
삼베로 만든 땅콩자루가 있다. 그의 책상 가까운 벽 위에는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면담하는 자신의 사진이 걸려있다.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은 브로커의 책상 너머에 걸려있는 커다란 포스터 크기의 비석
사진이다. 그 위에는 "크리스찬 선라이즈(1933~1916)"라고 새겨져 있다. 브로커
자신이 찍은 사진이다. (제가 사우스 다코마에서 자랄 때 선라이즈 어덕에서 썰매를
타곤 했죠. 어느날 저는 그 비석을 발견했고, 그 언덕 이름이 크리스찬 선라이즈라는
인디언 이름을 따서 부른 것임을 깨닫게 되었죠)라고 그가 말한다.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피터 젠이스나 댄 래더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배경이나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셋이 모두 친하다. 브로커는
(피터와 저는 친구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우정은 진지합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꽤 되었죠. 진정한 애정이 서로간에 있습니다. 댄과도 친하죠. 오랫동안 알고 지냈죠.
서로의 관계가 피터와의 사이만큼 가깝지는 않다고 봐야겠지만서도요. 피터와 저는
서로 짓궂은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라고나 할까요)라고 브로커는 말했다.
그의 가족사진이 사무실 여기저기 걸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미소를 늘
머금고 있는 그의 아내 메레디스의 사진도 있다. 그들의 세 딸과 야영을 하기도 하고,
베낭을 멘 채 여행하기도 하고, 스키를 타거나 등산하는 모습들이 있다. 그의 아내는
지칠줄 모르는 듯 보인다. 여가시간을 이용, 메레디스는 부모들을 위한 아동 육아 및
놀이 지도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썼음은 물론이고, 뉴욕에 있는 인기있는 장난감 체인
"페니 휘슬" 점포를 네 곳이나 운영을 한다. 이따끔 댄 래더의 아내 진과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 톰으로 말하자면 조깅을 즐기고 카약도 타며 암벽등반도 즐기는 등 그의
온 가족이 야외생활을 즐기고 타는 듯한 정열을 지닌 듯하다.
이날 아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그날 밤 주요 기사거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와 제작책임자들의 집은 방송사 주 컴퓨터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통신들을 수시로 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터" 및 "월스트리트 저널"을 두루 살펴본 연후이기 때문이다.
(음, 확실히 오늘은 좀 편하겠구만)이라고 말한다. 톱 뉴스는 아무래도 환경오염
문제인 엑슨 발데즈의 원유 유출사고가 될 것이다. 다음에 롬 바젤로부터 콜드 퓨전에
관한 소식이 있을 것이고, 쿠바에서 에드 라벨로부터도 뭔가 잇을 것이다. 보통은 빌
휘틀리와 고위 제작자들이 아침 10시 15분에 모여서야 확정이 된다. 브로커도 이따끔
이 미팅에 참석한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휘틀리가 휴가중이어서 그도 참석했으며,
휘틀리 대신 "저녁뉴스"의 선임 제작자인 체리 고울드가 참석했다.
NBC에서는 실제 방송중에는 제작 책임자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고 선임 제작자는
주조정실에서 이어폰으로 브로커의 귀에 이야기를 하지만 오늘은 체리 고울드가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그녀가 제작 책임자의 일과 중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직책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고울드는 일을 잘하며 햇볕에 그을린 피부로 말쑥한 인상이다.
그녀의 금발 파마머리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길고 멋진 귀걸이를 하고 있다.
짧고 회색이 섞인 초록 드레스에 커다란 까만 벨트를 하고 있어 파티에라도 금방
참석할 듯하다.
그날 아침 이미 고울드는 보도국장 마이클 가트너 및 부국장 톰 로스와 죠 앤거티
및 "Nightly News", "투데이쇼",
"Sunrise"프로, "Meet the Press"의 제작 책임자들과
9시 30분에 짧은 중역회의를 마친 후이다. 9시 45분 경이면 방송사의 국내부서와
정례모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각 부서는 고울드에게 "Nightly"에 특파원 빌
셰스너가 얼마전에 미국 시민이 된 한 아시아 여인의 기사를 다루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현대판 베스티 로스인 그녀는 손으로 미국기를 만들어 직업으로 삼고 있다. 셰스너는
전문적으로 보이는 짜릿하고 색다른, 그리고 마음을 잡아당기는 기사거리로 브로커도
좋아하는 것이다. 셰스너는 그날 밤에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울드의 심중에는
다른 "초점"기사가 있다. 그녀는 이미 마이크 레너드의 기사를 내보낼 약속을 한 바
있다. 요즘처럼 방송국 예산이 빡빡한 상황에서 "Nightly"에 이런 집중기사를
내보내기 위해서 더 많은 통신원을 확보하려면 그런 기사는 다른 NBC 프로그램으로
보내야 한다. (우리가 "오늘"프로에서 마이클 레너드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야 돼요.
오늘 내보내질 않으면 쓸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셰스너에게 설명한다.
(하지만 제 기사도 "지난 주에 그녀가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대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셰스너가 주장을 굽히질 않는다.
(어쨌든 이건 뉴스프로 아닙니까?)
체릴이 미소를 짓는다.
(그건 그렇지만요. 안 돼요. 우린 정말 제너드 기사를 안 다룰 수가 없어요. 그를
위스콘신으로 파견까지 했는데)
(그 무거운 기사를 또 다룬단 말이세요? 아니면 좀 가벼운 겁니까?)
(두 가지 다 겸한 거지요)
셰스너가 잔뜩 부어서 나가자 고울드는,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어야 하는 내 직업의 이 면이 싫어요)
전화벨이 울린다. 셰스너가 사과하기 위한 전화이다. 죄송스럽단다. 오후내내 벨이
울리고 사람들은 물으러도 오고 문제가 생겼다고 오고, 또 부탁을 하러 온다. 모든
것이 제작 책임자 대행실로 흘러 들어오는 것만 같다. 도보로, 전화로, 메모로 혹은
컴퓨터로. 기사문 작성 책임자인 에드 데이츠는 아르메니아 지진 기사에 대한 문제를
갖고 온다. 그는 브로커가 내보낼 도입부를 쓰고 있다. 하얀 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어서 그는 넓은 은행원처럼 보인다. 고울드가 고개를 들어 흘끗 본다.
(아르메니아 기사로 25초가 필요하단 말씀이죠?)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그녀는 한숨을 짓는다. 그가 나가기 무섭게 잭 체스넛이 들어온다. "Nightly"의
국내담당 제작자인 그는 40대 가량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팔꿈치에 갈색 조각을
댄 트위트 코트와 골덴 바지를 입고 있다. 콧수염을 기르고 맑은 뿔테 안경을 쓴
진지한 분위기다. 지금 그는 저녁뉴스 방송의 진용을 구상하면서 시간 상황이 어떤지
묻고 있다.
(과중한 편이죠)
라고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뭘 공략해야 할까요?)
그녀와 체스넛이 리스트를 쭉 훑어본다.
그가,
(내 생각엔 마무리의 젠슨이 괜찮을 것 같은데)
라고 말했다.
(톰이 요약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라고 그녀가 물었다.
(좋아요 그거야 블립(blip)이니까)
그리고나서 그는 그녀에게 이미 알래스카의 원유 유출에 따른 동물에 대한 생태학적
피해가 이미 시작되었노라고 말한다.
(동물이야기부터 먼저 하기로 합시다. 그 다음에 항해사의 음주 같은 것을 다룰 수
있겠지요)
그녀는 그에게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다.
(2분 15초면 충분할까요?)라고 물었다.
고울드의 방 아래 톰 브로커의 사무실을 지나 보도실과 스튜디오가 나란히 있다.
브로커는 스튜디오 중앙에 있는 원탁에 앉아 프로모를 마치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오늘밤 "NBC Nightly News"였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방송 대본은 카메라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전자장치인 텔레프롬프터 상으로 스크롤된다. 단어들이 렌즈위로
굴절되어서 그가 렌즈위를 보고 있을 때 실제로는 대본을 읽고 있는 것이다.
다 마치고서 브로커는 뉴스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뉴스룸은 개인별 부스별로 주욱
나뉘어져 있다. 첫 열은 브로커, 휘틀리, 고울드 전용이다. 벽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진
열대의 TV 화면과 모스크바, 텔아비브, 파리, 런던, 그리니치 표준시, 뉴욕, 마나구아,
서울, 뉴욕이라고 표찰이 붙은 아홉개의 작은 시계가 걸려있다.
브로커가 자리에 앉아 또 안경을 치켜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뉴스룸과 세트가
연결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촌스럽게 지었어요. 뉴스룸부터
정하고 거기에 세트를 덧붙였거든요. 상충이 되지요. 잘 되지가 않아요. 우리가 알고는
있어요. 서로 침해하는 수도 있고요) 브로커는 세트가 현대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다른 것에 덧대어진 부속물 같기만 했다. 그는 인터뷰를 하러 온
방문객들을 합류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싫어하는
것은 NBC만이 갖고 있는 "래리, 커리, 모우"라 불리는 세 대의 컴퓨터 카메라로,
카니 정에게는 몹쓸짓을 하고, 앵커의 책상 넓이를 퍽이나 잡아먹었다. 브로커는
그 카메라는 생각만 해도 냉소를 띤다.
(이 로봇같이 생긴 카메라는 참 화가 나요)
잭 체스넛이 부스 칸막이 위에는 "그냥 잭이라고만 부를것" 이라고 쓰여있다.
브로커는 엑슨 발데즈 기사가 어떻게 송고되고 있는가 넘겨다 보았다. 그에게는 이
기사가 무척 관심거리이다. 브로커는 휴가중이면 야외에서 하이킹이나 캠핑, 등산을
하는 활동가이기도 하지만, 그는 또한 적극적인 환경보호자로서 자연보호와 시에라
클럽의 회원이기도 하다. 금년 하반기에는 아이다호 주 선 댄스에서 그의 친구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최하는 "지구 온난화 대책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Nightly", 특히 "미국 어사인먼트"코너에 종종 반영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엑슨 발데즈가 모든 이들의 관심속에 있고. 특히 데이비드
레터맨에게도 그렇다. 뉴스룸에 서 있는 스텝들은 모두 데이비드 "레터맨 톱텐"
코너가 진행되고 있는동안 들으려고 소리를 높여 놓았다. 그는 엑슨 유조선의
충돌사고의 원인 열 가지를 들고 있었다. (열번째로 배가 다가오는 동부의 제트를
피하지 못해서입니다. "샤나, 소리 좀 줄이지") 체스넛이 외쳤다. 그는 알래스카의
죠지 루이스와 통화중이다. (아직도 그냘 게임 플랜을 따라야 하나?) (기름에 젖은
동물들을 내보내고 다음엔 피난을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같은 것은 안 내보내나?) 그가 물었다.
체스넛이 상대편 응답을 듣더니 (좋아. 그러면 거기서 엑슨 뉴스 컨퍼런스로
가서 거기서 그래픽을 내보낸다. 클린업은 어떻게 하지? 좀 볼 수 있나? 날씨가
도움이 못 되고 있다는 점도 빠뜨리지 말고. 그건 언제 내보내지?)
할말을 마치고 그는 (2분 15초에서 2분 30초 정도로 하라구. 그런데 앵커리지에서
FBI에서는 누가 나오나?)라고 물었다.
체릴 고울드가 바삐 뉴스룸에 들어서며 (자자, 이제 라인업을 합시다. 이봐요,
항목별 점검시간이에요. 자, 여러분 시작합시다!)라고 말했다.
체스넛은 전화를 끊으면서, (오늘처럼 일해서 봉급받으면 부자되겠네)라고 말했다.
이제 4시다. 휘틀리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그들은 의자나 바닥에 앉기도
하고 복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노란색 규격 패드를 들고
있다. 체리 고울드는 책상 뒤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이를 "제작책임자로부터의
구술시간"이니 "산상수훈"이라고 부른다. 고울드식 표현으로는 (사람들이 커다란
덩어리를 조그만 가방 안에 틀어 넣는 시간이지요)
그녀는 (죠지 루이스가 2분 20초면 된다고 하던가요?)라고 체스넛에게 물었다. 그는
(제가 이야기 범위를 한정해 주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이츠도 (여기 응답이
왔는데요. 엑슨 기사를 클로져와 같이 넣죠. 그것도 낚시에 관한 것이잖아요?
뱃사람들의 알콜 허용치 문제도 함께 다루죠)라며 거들었다. 모임 전반은 농담과
긴장이 뒤범벅되어 작전 개시 전 파일럿들에게 브리핑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다.
고울드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기사도 있고, 환경에 관한 기사도 일쑤죠.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출입기자인 코츠란에게 더 잘하게 되어 있죠. 우리가 두 기사를 모두
담을 수는 없잖아요. 코츠란에게는 그가 더 맞아 떨어지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다이츠가 그녀에게 자기가 쓰고 있는 브로커의 코츠란 도입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좋아요. 그 편이 코츠란에게 도입을 위한 시간을 할애하도록
해주었군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TB(톰브로커의 약자): 20초라고 쓰인 라인업을
집어들었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톰 20초, 루이스의 원유 유출로 넘어가서 2분 20초, 피난
장면의 코츠란에게 2분) 그녀는 (샌디, 톰에게 꼭 알려주세요)라고 뉴스 편집자 샌디
폴스터에게 소리쳤다.
세 방송사의 저녁뉴스 형태는 거의 같다. 5막의 플레이와 중간 광고시간 4회.
1막마다 약 4분 가량이 소요된다. 시청자들은 이 짧은 시간에 휴식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설사 집중력의 한계 시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방송사에는
긴요하다. 현재 광고에 분당 10만 달러 정도 받는 것도 그렇지만 방송사는 이 중간
시간들을 새롭게 하기 위한 휴식기로 본다. 하지만 세계의 소식을 주로 TV 뉴스를
통해 접하는 대부분의 미국 사람으로서는 광고에 투여되는 시간을 빼게 되면 실제
정보를 얻는 시간은 20분밖에 안 된다. 라인업 미팅은 그들이 이 20분 안에 "넣을
수 있는 만큼 넣기 위한"것이나 다름없다. 고울드는 (2막은 콘트라에 관한
워싱턴발 기사가 들어가요)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그리고 국방성 스캔들, 다음에
시카고 시장 선거에 2분 30초, S, L 15초, 그리고 스톡 범퍼는 거기 넣으세요.
세그먼트 3분, 지진과 도입에 35초, 쿠바의 "에드" 라벨에게 2분 30초.
되겠어요, 마크? 마크?)라고 말했다.
오늘은 국내뉴스를 돕고 있는 해외뉴스 담당 제작자인 마크 커스네츠는, (네,
물론입니다. 할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회의가 끝나 그들이 각 기사별 시간을 정하고 브로커의 뒷배경 장면을 결정한
다음에는, 모두들 어째서 도날드 트럼프가 이스턴 셔틀의 입찰가를 3억 6천 5백만
달러까지 올려야 했을까라는 농담을 하면서 방을 나간다. 이스턴은 자신에게 그
비행기들이 필요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웃음소리가 홀 전체에
가득 메웠다.
고울드는 뒤로 기대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특파원을 불러 기사 방영시간을
줄여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할 겁니다. 저는 15분간 휴식이 생기구요. 그리고는 나가서
시간을 더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꾸를 해주어야지요)라고 말했다.
뉴스룸에는 과학부 기자 로버트 바젤의 퓨전 기사가 위성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모두들 보려고 22번을 틀었다. 대머리에 턱수염을 기르고 철테 안경을 낀 뉴스
편집담당 샌디 폴스터도 기사를 보다가 체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에 안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는 (너무 말이 많아요. 정말 너무 길어요)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폴스터는 전화로
바젤을 불러 (그렇게 세부적인 데까지 들어갈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그동안 데이브 맥코믹 프로듀서가 죠지 루이스 기사의 첫부분이 14번 채널로 위성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고 뉴스룸에 알렸다. 책상에 앉아 뉴스 첫부분과 끝부분에 자신이
읽게 될 도입부를 정신없이 타자치고 읽고 있던 톰 브로커도 14번 채널을 돌린다.
화면에 대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몇 단어를 치고 나서 건너편 옆 부스에 앉아 있는 잭 체스넛에게 편집을
위해 대본을 넘긴다. 브로커는 서서 바지를 치켜올리고는 끝냈다는 흡족한 기분에
배를 쓰다듬는다. 마크 커스네츠가 (그러면 게리 젠슨이 쿠바로 갑니까)라고 물었다.
톰이 (그녀는 비자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잭 체스넛이 브로커의 대본에 대해 제안을
하려고 끼어들었다. (발데즈의 보급이 평상시의 절반 정도입니다)라고만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브로커는, (왜? 긴가?)라고 물었다. 그는 (커스네츠가 국내뉴스에
끼어들어서 그렇기도 하겠구만)이라며 친구를 놀렸다. 그는 (좋아, 줄여봅시다)라고
체스넛에게 말했다. 그는 컴퓨터로 돌아가 다시 일에 착수했다.
방송시작까지 11분 남아 있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앵커에게 11분은
660초로 널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ff
8. 피터 제닝스의 수업
피터 제닝스의 사무실 벽에는 지금은 오래돼 노랗게 바랜 신문 스크랩 넣어둔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1935년 토론토 "Evening Telegram"이었다. 사진에는 영국
신사같은 모습의, 눈에 확 띄게 잘 생긴 남자가 신문이 잔뜩 쌓인 책상에 기대어
서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이렇게 설명을 붙이고 있다. "화려한 아나운서, 찰스
제닝스" 제닝스의 타고난 기름진 목소리는 그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무엇이든,
색깔을 더해주고 있다.
언론인으로서 피터 제닝스의 스토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의아버지 얘기부터 꺼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댄 래더와 톰 브로커와는 달리, 어린 제닝스가 아버지
찰스의 직업을 물려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제닝스는 감개무량한 듯 말한다.
(가업이라고나 할까요?그렇게 말해도 좋겠지요. 제 경우에는 거의 자동적이었으니까요.
저희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큰 영향력이 있으셨지만 그분이 하시는 일에도
대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의사라면 온 집안에 청진기가 널려 있을 테니,
그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찰스 제닝스는 장난치기 좋아하고 유머 감각이 있으면서도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녔다. 비록 결국은
낙제하고 말았지만 그는 지성인, 늘 책 읽는 사람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항상 "The Front Page"의 할디 존슨 같은 기자가 되길 원했었다. 그러나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는 방송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어느날 "토론토 데일리 스타"지에
기자로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우연히 지방 라디오국에 들러보게 된 것이
그의 방송 생활의 시작이 될 줄이야! 당시 캐나다는 라디오의 개척시대였다. 게다가
제닝스 1세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나, 정말 우연히 그 직업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 영국의 BBC를 모델로 한 캐나다 최초의 전국 방송인 CBC가 개국했을
때, 찰스 제닝스는 그 첫번째 목소리, 캐나다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느 뉴스도 읽었고,
교향곡에서부터 오페라까지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캐나다의 "에드워드 R. 머로우"로 알려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엔 CBC
경영의 고위직까지 승진했지만 정작 전쟁을 취재한 사람은 "론 그린"이었다. 제닝스
1세는 주로 아나운서 역할을 했을 뿐 현장 기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말, 제닝스 집안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미국
NBC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 것이다. NBC는 찰스에게 돈은 많이 주겠으니
뉴욕으로 와서 텍사토 오페라 프로그램을 맡아 주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찰스 제닝스는 그 제의를 수락했다.
떠나기 전날, 그의 친구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송별파티를 해주겠다고 모였다.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다음날 아침에야 그는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자신을
발견한다. 드디오 기차가 국경에 도착하고 미국 이민국 직원들이 기차에 탔다. 그
당시는 이민 수속절차가 엄격해서 직원들은 승객들에 대해 삼엄한 문답을 시작했다.
아마도 필요한 서류가 없었는지, 아니면 그 긴 심문을 참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
있지 못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짧은 명령에 따라 제닝스는 기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는 플랫폼으로 나와 토론토로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송별연의 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원래의 CBC 자리로 돌아왔다. (나도 사실 가고 싶진
않았는데...) 하고 제닝스는 변명했다.
이 일화는 제닝스 씨 집안 식구들이 자주얘기하는 농담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서 아들대로 내려오면서 이 일은 더욱 미묘하게 된다. 25년 후, 아들 피터가
같은 여정을 떠나게 되고, 그 아들은 국경을 훌쩍 넘어 도약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1938년 7월 29일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터 찰스 아치볼트 에왈트 제닝스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피터가 태어날 즈음,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 전국에 전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인사였다. 사실 1년 후, 아버지 제닝스는 캐나다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군주인 조지 6세가 기차로 여행할 때 동행하기로 했다.
피터의 아버지 쪽 가계가 기반이 단단한 중산층 집안이었다면(피터의 참점용사 주택
건축가였다), 그의 어머니쪽은 상류사회의 부를 누린 집안이었다. 어머니의 가족은 딸
엘리자베스가 라디오 아나운서와 결혼한다고 했을때 약간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집안은 캐나다의 대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메시 해리스(지금은 메시 퍼거슨)라는
농기계 회사의 원 투자자 중 하나였다.
엄격한 스코트랜드 캐나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피터 제닝스와, 3살 아래의
여동생 사라는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다. 사실 모든 재산은 할아버지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고, 특히 현실적인 캐나다 사회에서 그 가족을
귀족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과장된 면도 없진 않지만, 피터와 사라는 크리켓을
배우고, 좋은 학교 교육도 받으며 응석받이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떤 경제적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린 문화적 배경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터와 사라는 집안을 드나들던 낯설고 이국적인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전쟁 직후였을 거예요. 우리집엔 유럽으로부터 온 난민들로 넘쳤습니다.
그들은 작가, 지성인, 음악가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라는 그때 일을 이렇게
얘기했다. 당시 찰스 제닝스는 아나운서에서, CBC의 제작 간부로 승진되었을 때여서
수많은 유럽 난민들은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왔던 것이다.
(우리집은 언제나 재능있고 재미있는 사람들, 그리고 괴짜들로 들끓었습니다.
그중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프랑스의 호른 주자도 있었고, 무용수도 있었고, 캐나다
국립 오페라단과 국립 발레단을 창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헨리 제임스가
자랐던 그런 집으로, 화가, 음악가, 정치가들로 가득 차, 아이들이 성장하기에
나무랄데 없는 환경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 어린 피터에겐 흥미로워보였다. 10살도
되기 전, 피터는 어느날 마당에서 처음으로 방송수업을 받게된다. 아버지는 위쪽을
가리키며 하늘을 묘사해 보라고 시켰다.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어느때는 아버지를 따라 스튜디오에 가보기도 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찰스 제닝스가 메시 홀의 빨간 플러시 천으로 장식된 아나운서
부스에서, 전국민에게 토론토 교향악단을 소개하는 날에는 특별대우로, 어린 피터는
"절대 성숙"이라는 조건으로 부스 안의 아버지 옆에 앉을 수도 있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어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피터는 말했다.
(그것은 통행권같은 것이었습니다. 더 신나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허가권 같은
것이었습니다)
피터 자신은 9살 때,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일시 입국사증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CBC로부터 엘리자베스 제닝스가 토요일 아침 어린이 프로에 진행자로 아들
피터를 내보내도 되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을 땐, 마침 아버지는 유네스코 여행으로
집에 없을 때였다. 피터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피터 쇼"가 탄생한
것이다. 매주 5달러씩 받으며 어린 피터는 토요일마다 방송에 출연해, 그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 청취자들이 신청한 노래들을 보내 주었다. 어린 DJ에게 가장 많이 쇄도한
것은 "아기 곰의 소풍"이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와 이를 안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이 CBC간부는 높은
도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서, 이 "피터 쇼"는 "친척 편중 등용"의 형태로,
그에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터가 받았던 돈을 모두
돌려주게 했다. 그리고 이미 이 쇼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담당자의 설명에,
그렇다면 차라리 프로를 없애버리겠다고 맞섰다. 결국 마지못해 묵인하고 말았지만,
그 다음 몇 주 동안 피터에겐 수많은 팬 레터가 쏟아져 아버지와 어머니는 답장을
쓰느라 몇 시간씩 고생하기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다녔던 학교와 같은 상류사회 기반을 가진 트리니티 칼리지에
기숙했던 12살의 피터 제닝스의 초상은 조숙한 젊은이의 모습, 그저 잘 생겼다,
운동으로 단련돼 체격이 좋다, 그리고 자신감에 차 있다는 이상이었다. 어린
제닝스에게 모든 것은 너무 쉽사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런 점에는 피터도 만족했다.
교과서보다 만화책이 더 좋은 버릇없는 맏이었고, 종종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어머니는 (피터가 커서 대체 뭐가 되려고 저럴까?) 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트리니티에서 피터는 크리켓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학교
공부에는 재간이 없는 듯했다. 학문에는 따분해 했던 그는 수업을 빼먹고 밖에서 노는
데만 몰두했다. 그런데도 크리니티의 교장 선생님은 제닝스 씨 집안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모에게 (이건 돈과 시간의 낭비입니다) 하는 따끔한 말을
하지 못했다. 중3이 지나자 피터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고1때는 오타와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피터는 학생들간엔 폭발적인 인기를
독차지했지만, 트리니티에서와는 달리 선생님들 사이에는 인기가 없었다. 1년도 채 못
채우고 낙제했다.
17살이 된 피터는 사교적 휴지기간을 갖게 되었는데 게으른 궤변과 여자친구를
사귀고, 우아한 스포츠를 즐기느라 하키에서 스키까지 익혔다. 그가 얻지 못한 것은
공부뿐이었다. 당시는 그것이 제닝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차츰 나이가 들면서
그 점은 그에게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때 마침 아버지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CBC의 라디오와 새로 개국한 국영 TV
체인의 담당국장이었던 찰스는 CBC의 새사무실이 오타와로 옮겨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찰스는 사무실 이전을 무척 반대한 사람이었다. 오타와는
캐나다 정부가 있는 곳이어서, 바로 옆에 방송국이 위치한다는 것은 보나마나 정치적
압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캐나다의 영어 사용 지역의 예술적 중심지인 토론토와의
접촉이 소원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오타와 주재 CBC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방송에서, 진부하고 타협적인 정부의
목소리로 전락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CBC가 제작 쪽보다는 기술 쪽에
더 많은 인사를 갖고 있는 인사를 사장으로 추대하자, 그는 그후 15년에서 20년간,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투쟁했다.
그러한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은 두 자녀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 아버진 결코
자신의 가치 기준과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무리들과 휩쓸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공영방송의 중요성을 꿋꿋이 표지로 삼고자 애썼던
분이셨습니다) 하고 사라가 전한다. 그러나 그후 몇 년동안의 투쟁은 그를 지치게
했다. 여전히 CBC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고, 지도세력중의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간부
투표에선 소수 그룹에 속할 수밖에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었고, 흉내내고 싶은
표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치른 대가는 큰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내과적
질환때문에 65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치셨던 거지요!)
17살이 된 피터는 오로지 방송국으로 들어가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말리고 친구가 경영하는 은행에 금전 출납계원으로 아들을 보냈다.
당시 은행가는 그저 먹는 직장으로, 멋지게 차려입고, 행동만 잘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닝스는 곧 캐나다 왕립은행의 토론토 지점에 자리를 잡아 돈을 세고 숫자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숫자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우아하게 구부러진 "2"라든가, 힘있게 쓴 "7"자라든가, 제닝스의 금전
출납계원으로서의 직장생활은 단지 "멋있는 여성들"을 자세히 볼수 있었다는 것과
독립과 자유에 대한 돌파구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꿈(방송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살 되던 해, 제닝스는 드디어 CBC의 오디션에 응하게 되었다. 방송국에선 이
젊은이의 재능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오디션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친족 등용을 배제하는 CBC는 그의 아버지 때문에 그를 기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난감해진 피터는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도대체 전 어떻게
해야 하지요?) 불공평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찰스 제닝스는 온타리오 주의 브록빌에
있는 작은 사설 방송국인 CFJR을 경영하는 옛 친구 잭 레드포드를 찾아갔다.
브록빌은 세인트로렌스 시웨이에 있는 평탄하고 나무가 많은 작은 마을이었다.
소도시라고 할만큼 큰 도시도 아니었고, CFJR도 방송국이라고 할만큼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곳이 아니었다. 사실 주파수가 너무 약해 들리지 않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피터 제닝스에게는 CFJR도 큰 기회였다. 이 작은 방송국에서 그는 아나운서
겸 제작자였다. 방송되기까지의 모든 일을 직접 담당했고, 방송 외적인 일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는 한사람으로 구성된 방송팀이어서, 뉴스에서부터
한밤의 "Mood and Music"까지, 심지어 토요일 아침 종교시간까지 모두 도맡아 해야
했다. 직접 레코드를 돌리면서, (여러분의 다정한 DJ, PJ 인사드립니다)라고 시작하곤
했다.
1960년 무렵, 피터 제닝스는 에스키모 대상 방송을 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CBS의 북쪽 서비스를 담당하기도 했다. (매일 농업방송을 하곤 했습니다. 농부들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CBC가 그런 일을 담당했던 것이지요. 저희 아버님은,
제게 공공서비스의 강한 인식을 심어 주셨습니다)
1961년, 열심히 뛴 라디오 일이 보상을 받아 제닝스는 TV로 승격되어 갔다. 그는
오타와에 있는 채널 13 CJOH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공영방송에 의해 전파가
독점되다시피 한 시골의 최초의 사설 TV 방송이었다. 그곳에서 피터 제닝스는 CFJR
라디오에서의 일과 상응하는 TV 만능 방송인으로 경험을 쌓았다. 그는 뉴스에서부터
버라이어티쇼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했다.
한번은 전국미인선발대회에서 "미스 캐나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제가 노래를 불렀던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날 초대 손님이었던 고든 맥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부담을 느껴
도저히 노래할 수 없었답니다) 하는 수 없이 피터 제닝스가 유행가 가수가 되어
무대위에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캐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었다오...)하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는 또 어린이를 위한 댄스 파티인 "클럽 13"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캐나다의
딕 클락처럼, 산더미같은 디스크를 틀어주며, 로이 오비슨의 음악에 맞춰 소리치는
10대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비록 그 쇼가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거기에 맞춰
춤을 출 순 없었다. CJOH가 최초의 민영 TV인 CTV의 일부로 흡수되고, 그에게 의회
출입기자로 뒤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그는 해방된 느낌이었다. 그는 전국 뉴스의
공동 진행자로 선정되고, 피터 제닝스는 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버지는 오빠가 CTV의 앵커가 되자 말도 못하게 기뻐하셨습니다. 어렵게 10대를
지냈기 때문에 과연 스스로 제 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셨던 것니다) 하고
사라가 전한다.마침내 아들과 아버지는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는 수준이 되었다(사라도
역시 같은 분야의 일을 했다. 처음엔 BBC에서, 나중엔 CBC 라디오의 실력있는 문화부
기자로 뛰었다). 10대엔 나태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모든일을 취미삼아 했던 피터는,
마침내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초기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학벌이
거론될 때마다 그는 화제를 바꾸느러 전전긍긍했다. (전 그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었지요)
그는 오타와의 찰튼대학 출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실 찰튼 야간에 몇 주동안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간대학에 다니며
방송국 정규직원 일을 병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느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지만, 이 문제는 더욱더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 난 그 문제 때문에 20년동안 정말로 부끄러웠어요. 네, 그래요.
그래)
어쨌든 제닝스의 방송은 반응이 좋았고, CTV의 제닝스와 공동 진행자 베이드 랭튼은,
경제 회의차 오타와를 방문한 국무장관 딘 러스크를 수행해왔던 ABC 뉴스의 엘머
로어 사장에게 전화했다. (여기도 "헌틀리 브링클리" 역을 하는 친구들이 있군요.
그런데 꽤 괜찮은데요) 제닝스와 랭튼은 확실히 부드러우면서도 권위가 있었다.
그들의 방송 모습 테이프를 입수해 본 로어 사장과 책임자들은 두 사람 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오 두 사람은 뉴욕으로 초청되어 그곳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1963년 8월, 가방과 희망을 함께 싸들고 피터 제닝스는 그의 신부 발레리
갇소(그녀는 캐나다 TV의 조사원이었다)와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길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큰 꿈을 안고 갈 만큼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ABC는, 두 경쟁사인 NBC와 CBS의 그늘에 가려있는
처지였다. 언론인들 사이에는, 심지어 ABC소속 방송인들까지 ABC까지 ABC를 "동네
방송국"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세간에는 "여기도 방송국",
"가까스로 방송국"이라는 놀림도 없지 않았다.
한 가지 일화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1963년 11월,
NBC와 CBS는 사건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들은 CBS의 댄 래더와 NBC의 로버트
맥닐 같은 쟁쟁한 기자를 포함, 완벽한 취재팀을 구성해서 사건을 취재했다. 그러나
ABC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CBS에서 일하지만, 당시 ABC의 신참 기자였던 벳시
아론이 황급히 시내로 뛰어가 뉴욕 체육클럽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던 ABC 뉴스의 엘머
로어 사장을 끌어냈다. 로어는 급히 팀을 구성해 달라스로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때는 금요일 오후, 마침 은행이 모두 문을 닫은
후였다. ABC같은 소규모 방송국에서 달라스까지 취재팀을 보낼 자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ABC 스텝들은 그들이 잘 가는 아지트인 맥글래이드의 바로
찾아갔다. 바텐더 패디 맥글래디에게 1만 5,000달러에서 2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ABC가 대통령 암살 사건을 겨우 취재할수 있었던 것은 술집 금고에서
급히 구해 온 술값 덕분이었다는 얘기다. 로어는 그때일이 공평했다고 말한다. (패디가
우리같은 술고래들한테서 충분히 돈을 벌었으니까요)
마침 전당대회가 열리는 때 도착한 피터 제닝스는 6개월간 남부로 파견되어, 당시
불붙고 있는 사건(민권운동)을 취재하게 된다. 로어사장은 이렇게 말해준다.
(캐나다에서는 취재보도를 많이 하지 않고 스튜디오에만 묶여 있던 피터였기 때문에,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과 보안관들에게 쫓기며 미시시피까지 내려가 현장을 취재하는
것은 그에게 무척 신나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당시 경영 부사장이었던 제시 주스머는 제닝스에게 경력 궤도를 설명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 궤도란, 바로 뉴욕에서 5년간 활동, 워싱턴에서 5년, 해외에서 10년,
그리고 다시 미국에서 활동하게 하는 10년을 뜻했다. 그것은 완숙한 기자 한 사람을
창조해내기 위한 장기간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터에게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1965년 초, 피터 제닝스는 겨우 26살의 나이로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ABC뉴스의
앵커가 되었다. 제닝스 자신도 그때 앵커가 된 것은 실수였다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아주 소규모의 보도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무언가 해보려고 투쟁중이었지요) 시청률
3위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ABC는 새로운 얼굴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첫번째 시도로
로어 사장은 CBS의 특급기자 찰스 콜링우드를 끌어오려고 애썼다. 그러나 CBS 소유주
윌리암 페일리는, 달콤한 말로 콜링우드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았고, 별다른 선택이
없게 되자, ABC는 집안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ABC간부들의 눈에 띈 사람이 젊은 새
얼굴 피터 제닝스였던 것이다. 사장의 말이다.
(피터 제닝스가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도 생각했습니다만, 그는 방송 집안에서
자랐고, 화면에서의 그는 개성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ABC는 18살에서 49살 대의 젊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황금시간대 스케줄을 짰고, 그렇게 홍보했습니다. 프라임 타임이
젊게 가면 우리의 뉴스 캐스터도 젊어냐 한다는 방침을 세웠지요.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피터도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 점입니다) 방송국의 누군가 말했습니다. ABC는
뛰고 노는 젊은이 프로그램을 아주 잘 해내고 있으니, 그런 점을 뉴스 프로에도
도입해 보자구요. 그래서 간부들은 (좋아, 당신이 앵커를 하시오)라고 한 것이고...
그렇게 간단히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경험이 없는 피터 제닝스를 기용하는데 져야 할 위험도는 CBS나 NBC보다 훨씬
적은 편이었다. 당시는 아무도 "3대" 네트워크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2와 2분 1"이 있었을 뿐이었다. 만일 CBS나 NBC가 1963년 노동절에 각각 30분씩 뉴스를,
ABC는 15분이었다. 그런 추세는 2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제닝스가 물려받은 것은
경쟁사 뉴스 분량의 절반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반쪽 또한 앵커였다. 경험도 없는 26살짜리가 CBS의 거물 워트
크론카이트와 NBC의 막강한 "헌틀리 브링클리" 팀과 맞붙었으니 말이다. 그 대열에
끼여들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TV에 나와 이런 농담도 한다. (한번은 워도프의 점심 모임에서
헌틀리 브링클리와 월터 크론카이트와 마주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큰 연단에
서서 수많은 청중들과 마주하게 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중 가운데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TV에 나오는 당신들은 쇼 비지니스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헌틀리가 대답했습니다. "잠깐만요, 내가 하는 일 중에 쇼
비지니스에 속하는 유일한 부분은 매일 분장실에 가서 눈밑의 주름을 분으로 가리는
것뿐이지요" 그러자 크론카이트가 말을 잇더군요. "네, 맞아요. 그리고 제닝스씨는
분장실에서 눈밑의 주름을 그리는 것이구요" 이제 와 생각하면 제가 그때 얼마나
애송이였는지...)
피터 제닝스는 1967년까지 3년 동안 ABC 저녁뉴스를 읽었다. 세트의 한가운데
위치한 둥근 탁자에 앉아 오른쪽 어깨위에 큰 타원형 스크린을 두고 뉴스를 진행하던
피터는 종종 이렇게 소개되었다. (피터 제닝스와 함께 15분동안 하루의 뉴스를
정리합니다) 흑백 화면에 나타난 피터 제닝스는 마른 체격에 깔끔하게 빗어넘긴
말쑥한 머리 스타일이 마치 담배 선전에 등장하는 젊은 도시인의 모습, 혹은 제임스
본드 타입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언론인이라기보다는 모델 같은 인상쪽이 더
가까웠다.
ABC에 있는 그의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베트남으로, 뉴펀들랜드로,
산타 도밍고로, 또 인디라 간디를 인터뷰하러 인도로 옮겨다니며 애썼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어리벙벙한 스탠리" "예쁜이 피터"로 비아냥거리기 일쑤였고,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흉봤다. 중요한 의사 결정에서도 그는 당연히 제외됐다.
진나날을 돌아보며 제닝스는 말한다.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젊고 거만하다는
것보다는, 내가 미국에 대해 정말로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캐나다인의 주체성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그는 "스케줄"을 "셰줄"처럼 발음했고,
"Been"을 "Bean"처럼
발음하기도 했다. 그의 보조인들은 정확한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프롬프터에
소리나는 대로 단어를 쓰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런던 B. 존슨"의 취임식을
취재할 때였다. 그의 애들립은 유창했으나, 방송이 끝날때까지, 미 해군가를
"Anchors Away"로 생각해 버린 바람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엘머 로어도 이렇게 말한다.
(피터는 미국에 대해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린 미국에 대해 잘 알고,
유능하고 빠른 작가가 필요했지요. 뉴욕 데일리 뉴스의 "엔터시드 클라인"이
전용작가로 왔습니다. 한때 기자였던 클라인이 방화사건부터 살인사건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써주었습니다. 클라인은 기계처럼 썼습니다. 명사와
동사만 주면 다 해냈지요)
그 신문기자가 피터의 수석작가 노릇을 했다. 그러나 클라인이 앵커를
고난에서 구해 주려고 기용되었다는 사실만은 피터도 몰랐다. 클라인은, 경영
부사장 제시 주스머가 그에게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저 젊은이를 좀 도와줘요.
좀 받쵸 주라구. 지도도 좀 해 주고) 이 신문기자는 앵커의 수호신 역할을 했고
마침내는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종종 피터가 사는 북동쪽의 아파트로
놀러갔고, 제닝스도 클라인네 식구가 사는 우드스탁까지 운전해가곤 했다.
(제닝스는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어요. 영민했고, 잘 생겼고,
또 재능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비하나 거짓된 겸손도 찾아볼 수 었었습니다.
그는 있는 대로 행동했고, 그건 그도 잘 알고 있었지요) 하고 클라인은 말한다.
그러나 클라인이나 제닝스 자신이나 모두 피터가 앵커하기에는 너무 새파랗게
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른 방송사의 어떤 앵커가 자전거를 타고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가겠는가? 재능있는 풋나기 제닝스의 모습이 화면을 통해
비쳐쳤지만, 시청자들과 비평가들은 따라와 주질 않았다. (나는 피터 제닝스를
판매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적다는 것 때문에
여러 곳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장 혹독했던 매체는 신문과 잡지였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피터를 사주려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는 동안 제닝스 자신도 불안해졌다. 앵커 데스크에 쇠사슬로 묶인 것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좀 따분해졌습니다. 자질이 부족한데도 입력하는 것은
매일매일 일하러 나오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1967년 말, 아마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해고될 뻔한 순간에, 제닝스는
자기 발로 사장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앵커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는 다시 취재 일선에 나가길 원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엘머사장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앵커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신뢰감입니다. 피터의 경우도,
얼굴에 주름살이 좀 늘어나고 현실의 때도 좀 묻혀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피터는, 나중에 사라 제닝스가 표시했듯이 "피터
제닝스의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섭섭함과 해방감이 엇갈려 거리로 나왔다. 맨처음 피터에게 맡겨진 일은 1968년
선거의 흔적을 따라 죠지 윌래스와 유진 맥카시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그는 대학 분규에서 환경문제까지 수많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보도했다.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눈을 감고 지도를 짚어가며, 그곳으로 가서, 다음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50년간 범죄가 없었던 유타 주의 브릭햄에 범죄 취재를
갔습니다. 흑인이라고 없던 아이다호의 아버딘의 흑인들도 취재했구요) 그는 웃으며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곧 해외취재에 나서게 되었다. 1967년 아랍rhk 이스라엘간의 -
"6일 전쟁" 취재이후, 얼마동안, 그는 해외취재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앵커자리를 떠날 결심을 확고하게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일이었다. 결국 1969년,
제닝스는 로마 지국으로 발령을 받아, 캐나다의 베리 덴스모어 밑에서 차석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말, 그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자리를 옮겨 미국 최초의
상주지국을 열고, 아랍세계의 전임 TV 기자가 된다. 그후 6년 동안 "짜릿하게
행복했던" 제닝스는 중동에서 살며, 그곳의 모든 것을 호흡했다.
1969년의 베이루트는 훗날의 지옥같은 전쟁터가 아닌, 지중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였다. "중도의 파리" "중동의 스위스"로 알려진 베이루트는 카페와
야자수, 벨리 댄스, 샤넬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보기 드물게 사치와 향락에
빠진 생활이 있었다. 금으로 된 로렉스 시계를 찬 레반트 부호 무역상이 있고,
잘 가꾸어진 골프 코스로 부드러운 지중해의 미풍이 불어왔다. 당시 레바논은
아랍세계에서 주된 세력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리아인, 이집트인, 사우디 사람들의
기착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중립적인 중심지는
점점 즉석 아랍 수도가 되어 갔고, 중동의 중심이 되어갔다. ABC의 존 폴리의 말처럼
"조만간" 베이루트에서 주요인물이 나올 것이며, 그곳은 소문과 정보와
오보로 넘치는 바다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베이루트는 언론인에게는 완벽한 일자리였다. 미국 대학병원 근처에
위치해 베이루트 시내가 훤히 바라보이는 현대식 건물(게피노 건물) 12층의 스위트
룸에 가게를 빌려놓고 제닝스는 글자 그대로 그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지중해의
동쪽에는 자기말고 또다른 ABC 특파원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는 맨 먼저
큰 지도를 펼쳐 놓았다. 그리거 다른 지역과 그곳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를
계산해 보았다. 몇 개의 원을 그려 봤다. 베이루트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비행기로
두 시간... 그런 식으로 뉴욕 데스크에게 파악시켜 주었다. (지금 제닝스가
그곳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에 있답니다) 하는 식으로. 그는 이스라엘과 홍콩과
모든 스토리를 다 망라했다.
부분적으로, 현지 베이루트 미국 대학에서 뽑은 요원(찰리 글래스와 빌 블레이크
모어, 이 두 사람은 나중 ABC 특파원이 되었고 피터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과
함께 제닝스는 나이지리와 캘커타, 중국 국경에 위치한 훈자왕국까지 날아다니며
뉴스를 전했다. 블레이크 모어는 말했다. (우리는 쉴새없이 베이루트를
들락날락했습니다. 언제나 비행기로 타고 오고 갔고, 지프를 운전하고, 봉쇄된
도로도 설득해서 뚫어갔고, 사막 한 가운데서 택시를 대절했습니다) 제닝스는
흥분해서 이렇게 전한다. (6년 동안, 우린 그야말로 잠시도 쉬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33살의 제닝스에게 가장 끔찍했던 여행은 1971년 방글라데시를 놓고 싸웠던 인도,
파기스탄 전쟁을 취재하러 갔던 일이었다. 사라 제닝스는 이렇게 전해준다.
(방글라데시 사태는 오빠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빤 젊었고, 사태는 아주
이국적이었지요. 그런데 그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강변의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일은 오빠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방글라데시는,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젊은이에게 이 세계의 엄청난 잔인함을
직접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빌 블레이크 모어는 제닝스와, 게릴라 지도자 한사람과
함께 산을 넘어 파기스탄 동부로 넘어가던 때를 기억했다. (누군가가 포로를 데리고
길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건장한 군인은 총을 겨누며 말했습니다. "이것봐
공범자들이잖아!" 그는 그 자리에서 포로를 사형시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린 재빨리 뒤로 돌아, 카메라를 낮췄습니다. 그리고는 멀찌감치 걸어가
버렸습니다. 시청자를 위해서 살해할 수 없다는 걸 확신시켜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사건에 대해 우린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피터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면, 그것은 여러
면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TV
외국취재는 "Shoot and Ship"으로 일컬어졌던 일이었다. 무한히 자유롭게 운영되는
특파원제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맡겨진 뉴스를 취재하고, 찍은 필름을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코멘트를 녹음하게 된다. 국제적 방송이 별로
없던 때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대로, 실수도 자유롭게 하면서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그 기간에 제닝스도 많은 걸 터득했다. 그는 그 시기를
"내 인생에 가장 귀중한 기간"이라고 평가한다.
동료들은 점차 베이루트 지국 특파원에 대해 무엇인가 비범한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독서를 하고 있었다. 책이든 잡지든 신문이든, 닥치는대로
읽으며 무엇인가를 잡아내려고 썼다. 10대에는 책을 집어 치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책에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는 역사와 경제, 정치엔 초심자였지만 방송기술은 이미 완전히 습득한
사람이었다. 현장에서 그는 시원스럽게 관대했고, 배우려는 열망과, 그가
아는 것을 나누려는 의욕이 넘쳤다. 동료들은 그때를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피터가 라디오 원고를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린 방글라데시 전쟁 현장을 취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인도
군대를 취재했는데, 저는 여기에 대한 학문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내 생각을
구성하느라 잠깐 시간을 끌고 있는데 피터가 들어왔습니다. "좋아, 잠시 후
다시 올께"하고 나간 피터가 30분 후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뭐라고? 안돼지, 안 돼!"하면서 타이프 앞에 앉았습니다.
종이를 끼우고 내게 물었습니다. "어디엘 다녔왔지?" 내가 대답하자 그는 한
문장을 완성했습니다. "무얼 보았지?"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에 그는 또 한 문장을
쓰고, "왜 갔지?" 하는 데 대한 답을 듣고는 몇 개의 문장을 더 작성했습니다.
타이프에서 종이를 빼낸 피터는 "여기 자네 원고가 있네. 빨리 보내. 자, 그럼,
나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닝스가 전 세계를 다 취재했지만(지금까지 90개국 이상을 다녔다고 말한다)
그가 잘 아는 나라는 역시 그가 베이루트에 있는 몇 년동안 접해 본 중동이었다.
아랍세계를 보도하면서 그는 중동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그 열정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는 그 지역의 모든 나라에 가 보았고, 미국 시청자들에게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지도자들과 인터뷰했다. 예를 들어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PLO의 아라파트 의장, 심지어 파리에 망명해 있는 아야톨라 호메이니까지
만났다. 그의 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허락받은 최초의 TV
기자들이었다.
전 ABC 뉴스 사장 엘머 로어는 말한다. (그는 아랍세계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르단에서 제닝스를 만났는데, 그는 정부 요인들을 모두 알고
있더군요. 후세인 국왕부터 모두 다. 완자가 우리를 위해 헬리콥터를 내줄
정도였으니까요)
제닝스는 아침 9시에 일어나서 아파트 앞의 해변으로 걸어가서 지중해에서
수영을 한다. 그리고 11시엔 언덕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다시 걸어 올라간다.
그 건물의 바로 아래층에는 중동 항공 사무실이 있었다. 카이로까진 비행기로 겨우
45분. 요르단의 암만까진 1시간 거리였다. 이스라엘은 45분 걸렸다. 제닝스와
그의 팀은 아랍의 어느 곳으로도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었고, 늦어도 오후
3시까진 충분히 돌아올수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엔 다마스커스로 가서 실컷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중동에 심취한 나머지, 그 열정은 베이루트에서 만난 젊은 사진작가
아누카 말로프에까지 이어진다. 첫번째 아내 발레리와의 결혼생활은 이미
뉴욕에서 끝난 후였다.
(두 사람은 너무 어렸고 서로 맞지 않는 상대였어요) 그의누이의 말이다.
그러나 아누카(아니)는 좀 달랐다. 쾌활한 세계주의자에다, 예민하고,
놀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또한 대표적인 레바논 혼혈의 아랍 여성인데,
스위스에서 공부했고, 불어, 영어, 아랍어에 능통했다. 옷을 사러 화려한 파리
패션가에 해마다 찾아가는 아니는 유럽풍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랍
재계의 요인으로서, 낫세르가 들어오자 이집트에서 쫓겨났던 사람이고, 어머니는
시리아인이었다. 오늘날까지 그녀의 조부모는 카이로에서 살고 있다. 아니를
통해 제닝스는 보통의 언론인보다 더 깊이 그곳 지역사회에 융화되었다. 사라
제닝스의 말에 따르면, 아니는 피터를 그 지역에 나타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피터를 안와르 사다트에게 소개 시켜준 사람도 아니였다.
피터는 매력적인 아니와 1974년 결혼했다. 그리고 현장에 취재나가지 않을 때는
종종 해변가 아파트에서 교수, 언론인, 정치인들을 초청해 교우하며 지냈다.
피터는 아랍세계를 보도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러한 사교의 시간에 할애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았고 결혼했다. 그는 아랍에 작은 기여를 했다는 생각에
웃게 되는 기억도 있다.
(저는 종종 존슨과 함께 모터를 단 작은 배를 타곤 했는데 어느날, 그 배를
도둑맞았습니다. 지그쯤 팔레스타인 해군함이 되었을 그 배를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납니다)
그곳에서 몇 년동안 제닝스는 아랍세계에 대한 아주 세밀한 지식까지도
얻게 되었고 그것에 매료되었다. 몇몇 이스라엘 유태계 미국인 지도자들은
이러한 경험이 오늘날 앵커가 중동문제를 거론할때 편향적인 저널리스트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편견이 강하게 아랍 편을 드는
성향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사라 제닝스의 의견은 다르다.
(오빠는 중동에서 많은 걸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요.
그리고 그가 거기서 살았기 때문에 아랍세께와 가까와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토론토에서 자랄 때에도 우린 유태 이웃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휴일이면 유태 교회에도 갈 수 있었습니다. 랍비인
아브라함 파인거씨가 길 건너에 살고 있었거든요. 오빠와 저는 늘, 우리가
반 유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2년 말 그의 활동 범위에 약간 따분해진 피터에게 당시 ABC 스포츠의
룬 알럿지 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해 열리는 열리는 뮌헨 올림픽에서
좀더 다양한 국제 뉴스를 취재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기분전환을
위해 그는 선뜩 승락했다. (룬은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바바리에서
기막힌 2주간을 보낼 생각이없나?" 저는 중동에서 도피하듯 뮌헨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중동이 계속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검은 9월단의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이 9월 5일 올림픽 선수촌에 있는 31빌딩을
장악하고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감금했을 때, 피터 제닝스는 올림픽 선수촌에
남아 있던 유일한 기자였다. 모두 쫓아낸줄 알아겠지만, 테러분자들이 점거한
31빌딩의 바로 건너편 건물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피터 제닝스를 목욕탕에 숨겨
주었던 것이다. 지루하게 긴 12시간의 인질극을 벌이는 동안 제닝스는 발코니에
나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이 함께 있는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최첨단
텔레푼겐 워키토키로 사건을 낱낱이 보도했다. 물론 제닝스가 자리를 잘 잡은
덕도 있었겠지만 그에겐 전문지식이 있었다. 그는 검은 9월단에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도, 그들의 원한이 무엇인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영토에서 쫓겨나 테러분자로 바뀌어 버렸던 1970년에 바로 요르단에
있었던 기자였다.
1주일 후, 피터 제닝스는 70년대초에 유행했던 말쑥한 스타일인 금단추가 달린
푸른색 더블 양복을 입고, 귀를 덮고 뒤는 구불구불 늘어진 최신 유행 장발을
해가지고, 올림픽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비극적 사건의 전말을 이렇게 알렸다.
(8월 26일, 올림픽 경기가 개막되었을 때, 그날은 어느때보다도 화려한
날이었습니다. 122개국의 선수들이 입장하고 올림픽 성화가 빛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온한 경기의 서막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9월 5일 아침, 이 순간은 현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카메라는 위쪽으로 움직여 올림픽 선수촌 31빌딩을 보여주고, 흰 수건을 쓴
팔레스타인 지도자(나중에 아부니달로 밝혀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오랜 긴장의
시간끝에 마침내 공황에서 벌어진 비극을 보여 준다. 경찰 사수들이 총을 발사하고
아부니달은 도망가고, 남아있던 9명의 인질들은 살해당했다. 제닝스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들을 지적하면서 이 사건을 요약했다. (뮌헨 경찰은 그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곳엔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이 보도가 나가고 나서, ABC는 여러
개의 상을 탔다.
1973년 가을, 중국과 파기스탄 사이의 산지 카라코룸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하필 카메라가 고장나서 본부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멀리
파기스탄의 길기트에서 그는 뉴욕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빌어먹을,
전쟁이 일어났어. 당장 돌아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울부짖는 듯했다.
아랍은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욤 키푸르즈(Yom Kippur: 유태교의
속죄일. 일을 쉬고 단식한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공항으로 달려간 제닝스와
카메라맨은 팬암이 그들에게 특별히 내준 비행기에 타고 중동으로 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ABC팀은 이집트에 들어갈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닝스가
불법으로 우선 시리아로 들어가 몇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제닝스는 신문 기자 몇 명과 함께 전선으로 가 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시리아 국방장관이 안 된다고 "No"를 한다. 그러나 기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를 설득시켰다. 시리아인은 너무나 체계가 없어 군대감지 장치도
없는 형편이었다.
(군대 감지기는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어디서나 그렇지요) 하고 제닝스는 설명해
주었다. 마침내 그와 다른 기자들이 손수 만든 감지장치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시리아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이후엔 마음놓고 보도를 할 수 맀게 되었다.
제닝스가 아랍, 이스라엘 분쟁을 보도하는 데는 용맹한 사건이 수없이 많았다.
예를들어 이스라엘 공습을 보도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서 지붕 꼭대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갔던 그 중 하나였다. 그가 어린 앵커로서 총알이 휙휙 나르는 산토
도밍고의 혁명을 보도했을 때나, 베트남전쟁을 종군 취재했을 때도 있었지만,
제닝스에게는 "73년 전쟁"은 그 어떤 리포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 제닝스는 자기자신을 가리켜 "열성적인 겁장이"라고 우스개로 말하곤 했다.
(전 결코 영웅적이진 않았습니다. 공격이 시작되면 주저하지 않고 바위뒤에
숨었지요)
베이루트 중심부에 있는 사무실에서 제닝스와 그의 ABC 동료들은 70년대 중반,
점점 고조되고 있는 레바논 내란의 개막전을 생생히 지켜볼수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와 모슬렘교도 사이에 총알이 오고가는 와중에 12층 창문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주요 뉴스를 보도했다. 또다른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에, 제닝스는
베이루트 생활 6년을 결산하며 이제 중동은 충분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변화의 때가 된 것이다.
1975년, 젠이스는 ABC 경영진을 납득시켜, 다시 본사로 돌아가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굿모닝 아메리카"의 전신인 "AM America"의 앵커를 맡는다.
11개월동안 그는 미국의 수도에서, 빌 뵈텔과 스테파니의 가벼운 화제 중심
프로에서 뉴스를 진행했다. 11개월이 지난 후, 그는 이 모든 것에 진력이 났다.
(전 워싱턴 생활을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몰래 사진이나 찍는 기자들로 득실거리는
곳이었고, 스튜디오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역할은 잘못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은 완전한 실패였음을 절감했다. 그리고
그런점은, 중동에서 살다가 도시의 배타적인 파벌사회로 오게 된 아내 아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두 사람 모두에게, 또 두사람의 결혼생활에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제닝스와 테드 커플은 제닝스 말대로 "공모"를 했다. 가능한 빨리
런던에 있던 조지 왓슨을 워싱턴으로 부르고 그가 런던으로 가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1977년 제닝스는 런던에서, 수석특파원으로 정착했다. 1952년 여름 휴가 때
런던을 방문한 적이 있는 친영파인 제닝스에게는 런던에 돌아온 것이 마치 고향에
돌아론 안도감을 주었다. 그가 때때로 말하는 멋진 도시에서의 "꿈의 직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 6년 동안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1977년 6월 7일, 그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1953년 이후, 영국은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변했습니다. 오늘 런던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25년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카메라는 연한 청색 양복을 입고, 금빛 사진틀이 걸려 있고 붉은
커튼이 쳐진 벽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특파원의 모습을 잡았다. (피터
제닝스입니다.힐러리 브라운 기자와 저는 여러분께서 함께 해주신 데 대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싸구려 배경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보도했지만 제닝스는 그의 일을
사랑했다. 그 일은 융통성이 있었고 영향력이 있어서, 미국의 주요 방송사의 외국
주재 특파원으로서 지구 전체를 훑어보게 해 주는 중요한 직업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좀더 낫게 해주는 일이 다음 해인 1978년에 생겼다. 계속 런던에 머무르며
외신을 전하던 제닝스가 ABC 저녁 뉴스의 공동 진행자로 지명된 것이다.
(룬 알럿지 사장이 3명의 앵커 시스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더군요. 우린
크론카이트 같은 스타가 없었으니까요) 트로이카 배역은 워싱턴 주재 프랭크
레이놀스와 시카고 주재 맥슨 로빈슨과 함께였다. (알럿지는 중심 역할자로서의
앵커를 좀 풀어놓자는 의도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한 사람이 앵커로 앉고 나면
나머지 두 명은 리포터로 뛰어야 했으니까요. 제 생각에도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런던 주재 앵커였지만, 그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눈부시게 활약했다. 수 주 동안,
혹은, 잠깐씩 이란에도 파견됐다. 파리에 망명해 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인터뷰한 바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란으로 돌아오는 호메이니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호메이니 옆에 앉았다. 비행기에서는 내내
함께 격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고 그는 털어놓는다. (만일 샤(Shah)가
현명했다면 아마 그렇게 했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일어난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다.
(전 1970년과 71년, Shah(왕)의 통치시절에 이란에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부패상으로 보아, 사람들은 이란의 미래를 점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왕의 파티에 가려던 지미 카터와는
정반대로)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혁명 자체로 보면, 저널리스트에게는
사기양양해지는 행복한 시대엿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질 사건이 벌어졌고,
이란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닝스는 한밤중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혁명 보안대"라고 불리는 학생이나
전문 암살단원을 만나, 이란 TV 센터로 데려가곤 했다. 이란인과 그의 인터뷰는,
"World News Tonight"이나, 나중에 "Nightline"으로 성장한 테드 커플의 특별리포트
"America Held Hostage"시리즈에 생방송으로 보도됐다.
인질이 잡힌후, 며칠간은 긴장의 연속이엇지만, 제닝스는 이란이라는 나라가
특파원에게는 편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부로 그들의 얘기가 보도되길 바랐습니다) 캐나다 시민권을 강조하면서 그는 많은
어려움을 피했고, 나중엔 많은 기자들이 단추구멍에 단풍잎(캐나다의 상징)을 달고
다니게까지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캐나다 대사인 그의 친구 켄 테일러의 집에
가끔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이층에서는, 도망쳐서
테일러의 보호를 받던 인질 몇 명이 머물고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이란의 분위기는 중립적인 언론인들에게도 삼엄해졌다. 기자의
본능으로는 그런 상황을 취재해야 했겠지만, 기자들도 충분히 공격대상이 되었다.
(완이 축출되었을 때 미국으로 전화가 쏟아져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놈들아,
너희가 왕을 쫓아냈다" 이제 다음 차례는 우리들이겠지!...)
이란에서의 보도가 소란했다면 제닝스의 개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 번째 결혼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와 나는,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직후 결혼했습니다. 우리 둘 모두, 그렇게 한 결혼은 실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가족들은 두 사람이 어울리는 한쌍이었다고 말한다.
아니가 명랑했기 때문에 함께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ABC 동료인
존 쿨리는 말한다. (점점 관계가 악화되었을 겁니다. 외국 특파원들의 결혼은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합니다)
런던 사무실 주변에서 제닝스는 매력적이고 바람기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남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 번의 결혼 경험을 갖고 있었고, 또 한번의 결혼은
파행에 처해 있고, 많은 연애사건으로 해서 그는 "아라비아의 왕자"로 불리었다.
ABC의 본(Bonn) 지국장이었던 아름다운 케이티 마틴이 런던 지국에 파견되었을 때,
그녀의 동료 린 셔는 신신 당부했다. (무슨 일을 하든, 제닝스 일에만은 관여하지
말아라!) 이미 여러 외국 특파원들의 구애에 시달려 지친 케이티는 아예 킬드(Kilt,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의 의상)로 차려입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제닝스같은
스코트랜드 사람에게 킬드로 성장한 검은 머리의 날씬한 미인은, 투우장의
황소 앞에서 물결치는 붉은 천과도 같아 보였다. 서로 소개도 받기 전에 제닝스는
마틴에게 다가가서, 킬드에 꽂은 핀이 1인치쯤 너무 높게 달려 잇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미처 주재할 새도 없이 꿇어앉아 핀을 다시 꽂고 조여 주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데이트 날, 그들은 중세 포르투갈 발레 공연을 보러갔다.
휴식시간이 되어 잠시 밖에 나왔을 때 이미 제닝스와 마틴은 아이를 갖으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두번째 데이트에서 두 사람은 심각하게 결혼에
대해 의논했다. 1979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82년엔 두 명의 자녀가 생겼다.
딸 엘리자베스와 아들 크리스토퍼.
런던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한가로운 것이었다면 나머지
두 앵커는 그리 완벽하지 못했다. 맥스 로빈슨은 특히 소외된 감을 가졌다. 최초의
흑인 앵커였던 맥슨 로빈슨은 나중에 인종차별과 뉴스의 불공정한 배분때문에 ABC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제닝스와 다른 동료들은, 시카고에서 지방 앵커를 하다가 막
올라온 맥슨 로빈슨이 전국 앵커로 역할을 수행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트로이카 시대로 들어섰던 3개월간, 3명의 앵커는 각기 그들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이 3인조를 위한 저녁식가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최후의
만찬"이 되었습니다. 테이블에는 불안감이 맴돌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3명의 중간
크기 고릴라가 서로 싸우지 않고 잘해 나갈 것인가를 얘기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제닝스는 프랭크 레이놀드가 가장 연장자이고 신뢰감이 있으니까 그가 주도권을
잡고, 제닝스와 로빈슨이 현장보도를 좀더 해주는 것이 어떻냐고 제의했다. 그것은
제닝스가 진심으로 원하는 바였다. 불편한 휴전이 선포되고 말았지만, 결국 3인의
앵커 시스템은 균형을 잡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전세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혼란스럽게 느꼈고, 누가 뭐라고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새 시대의 뉴스 형태로 트로이카를 선언했던 룬 알럿지는 그들의 뉴스를 보도할
난공불락의 진짜 앵커를 물색하는 데다시 혈안이 되었다.
1982년 1월, "World News Tonight"이 주간 시청률 1위로 올라섰을 때도, 그것은
알럿지의 번득이는 제작기술과 화려한 그래픽 덕이었지, "앵커없는 앵커" 시스템
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럿지는 의기양양했다. 그는 자축의 의미로
샴페인 한 상자를 제닝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축하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
제닝스는 (와인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군요) 하는 메모와 함께 샴페인을 돌려보내,
알럿지의 심사를 긁어놓았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2주만에 ABC 뉴스는 다시
3위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1983년 중반경, 프랭크 레이놀즈가 갑자기 병이 났다. 룬 알럿지와
딕 왈드는 런던으로 급히 날라가, 레이놀즈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그 자리를
메워줘야겠다고 제닝스를 설득했다. 1983년 7월, 불안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상태로, 피터 제닝스는 히드로 공항에서 고향 본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ABC의 앵커 데스크를 떠난지 16년 만에, 그는 다시 옛날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었다.@ff
9. 중국
번쩍이는 외관에 장중한 기둥들이 받쳐주고 있어서, 웨스트 66번가 47번지에
있는 캐피탈 시티즈의 ABC 빌딩은 방송성전처럼 보인다. 대리석과 황연으로 싸여
약간 야한 듯도 하고, 약간 무겁게도 보이기도 하지만 무모하리만치 풍요로운
광채는, 엄청난 부와 20세기 커뮤니케이션의 최첨단임을 과시하고 있다. 이곳은
일반 사람들이, 언론매체의 거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곳이다.
특히, 인부들이 조심스럽게 닦음질해 놓은 핑크빛 화강암의 건물에 발을 들여다
놓았을 때, 그리고 천정은 하늘을 찌를듯 하고 의기양양한 붉은 색과 초록색으로
치장된 현관 홀에 들어서면 그런 느낌은 더해진다. (링컨센터 건너편) 어퍼 웨스트
사이드(Upper West Side) 지역에 있는 많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한때는
센트럴 파크의 말들을 가둬두던 마구간이 있었던 곳이다. 물론 오늘날은 이
번드르르한 구조물이 다른 것들을 가둬두고 있다.
3층 긴 복도 끝에 있는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World News Tonight"의
스튜디오로 사용되는 뉴스룸이 있다. 이 방은 크고 넓게 트인 공간으로, 여기에
있는 책상들은 외신, 국내, 아침뉴스, 동북아시아 및 위성팀 등 네 개 분야로
나뉘어져 무리져 있다. 이쪽끝에는 피터 제닝스의 앵커데스크가 있는데 크기가
작은 수영장 만하다.
같은 기능을 하는 CBS의 방처럼, 이 뉴스룸은 두 층에 걸쳐 터져 있다. 유리를
끼운 2층에서부터, 특파원의 사무실은 복도쪽으로 모두 열려 있어 움직이는
장면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뉴스룸에 있는 세트와 작업공간은 모두
산뜻한 형광색의 내부시설과 무대조명 등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정말 깔끔하고
훤히 불밝혀진 장소, 극적인 뉴스룸이 이곳이다. 직원들은 이곳을
"풍선"이라고 부른다.
5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 11시, 평상시 같으면 세트가 조용할 시간이다. 이 시간은
프로듀서들의 아침회의가 끝나고 엔지니어와 카메라맨들이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닐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플로어에 보통날과 다른 분주함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붙잡고 있거나 컴퓨터를 두들겨 입력시키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TV 뉴스 취재부의 부국장 밥 머피는 한쪽 벽에 빛나는
메르카도르(Mercator) 지도가 붙어있는 자신의 구석진 사무실에서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군) 턱수염을 기른 머피의 각지고 꽉짜인 듯한 체형은
마치 럭비 선수 같았고 에너지를 발산해내는 듯했다.
(중국사태야)
플로어를 가로질러 위성 데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위성은 있는거야?
없는거야?) 그는 저쪽에서 하는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외신부
책상에서는 웨스 다운즈가 전화를 하고 있다. (광장으로 들어섰어요?) 군대가
북경의 중심부로 향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2층 발코니의 바로 밑에는 TV 수상기 28대가 고리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WCBS TV,
WNBC TV, WABC TV, CNN등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CNN 화면에는 이붕
중국총리가 관영 CCTV를 통해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합리적인 수단을 다 동원하겠다고 중국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발표로서, 계엄령이 내려지기 일보직전임을 암시하고 있다. 화면의 그림이
유일하게 정확한 것인 듯,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지켜보느라 CNN 스크린을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다른 모니터들은 모두 게임쇼
등을 방송하고 있었다.
갑자기 피터 제닝스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무엇엔가 몰두해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웃저고리를 벗고, 앵커 데스크에 앉았다. 화면을 올려다 보면서
그는 CNN이 보여주는 것들을 메모해 나갔다. 다시 자기 책상으로 돌아온 피터는
자기 앞에 있는 서류뭉치를 뒤적였다. 턱수염을 기르고 카나리아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머리가 벗겨진 작가 밀트 와이스가 그를 만나러 들어왔다. 제닝스가 말했다.
(지금까지는 조자양이 가택연금 상태여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스라곤
학생들뿐이에요)
특별뉴스를 위해서 그는 또다른 확인 작업과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제닝스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광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는데) 광장이란 북경의 심장부에 있는 천안문 광장을 말하는 것으로,
그 순간 광장에는 수십만명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앵커 데스크 쪽으로 향하고 있는 세 대의 카메라 중 한 대의 뒤에는 올해 30살의
베터랑 카메라맨 모리스만이 뷰파인더(viewfinder)를 통해 피터 제닝스를 보고
있었다. 초록색 가디건 스웨트를 입은 회색 머리칼의 만은 그의 셔츠 주머니에
펜 하나를 비쭉 나오게 꽂고 있다. 그의 공식 직함은 현장 기술자였고, 주머니속의
펜은 기술자의 영예로운 배지였다.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서 렌즈의 오른쪽 위에
그려진 작은 직사각형을 주의깊게 보았다. 그 사각형은 어디쯤에 퀸텔(Quantel:
앵커의 왼쪽 어깨위에 걸리는 네모로서, 앵커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가를 보여 주는 그림 제목)이 위치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카메라 뒤의 어둔 공간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또 한 사람은 헤드셋을
젊은 여성(조이더든)이다. 원래는 "World News This Morning"의 스테이지
메니저인데, 비상사태가 생기고 특집뉴스가 편성되자 늦게가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닝스는 노트를 들여다보던 것을 잠시 멈추고 IFB 이어폰을 제자리에 놓았다.
이어폰은 그와, 두 층 아래에 있는 조정실을 연결해 주고 있다. 책상 밑에는 각종
케이블뿐만 아니라 이어폰 음량조정 장치도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표면이
반짝이는, 주사위 절반만한 작은 마이크도 있다.
특별뉴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제닝스는 원고를 들고 만지작거렸다가는,
책상 끝에 놓인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려 보기도 한다. 조명밑에서, 빛나는
와이셔츠 커프를 단 순백의 셔츠를 입고, 줄무늬 붉은 넥타이를 맨 앵커는
너무 일찍 일어난 듯, 아니면 간 밤에 잠을 못 잔듯한 피곤한 모습이었다.
폴 프리드만 프로듀서가 잠깐 와서 멈추자, 피터는 타이프라이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프리드만은 월스트리트에서나 알맞은 완벽한
복장이다. 깔끔한 주식 브로커같은 가는 줄무늬의 푸른색 정장을 하고 나타났다.
프로듀서는 돌아서서 걱정되는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 밥 머피의 사무실로 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온 프리드만은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보도통제를 하려는
모양이군요) 그러나 밥 머피 부국장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중국쪽에서,
적어도 얼마동안은 위성 전송을 차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신 데스크 가까이에는 뉴스 프리프를 담당하는 엘리제 와이너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그녀는 약간 문제가 생긴 듯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쓰기 시작한다.
벽에 붙은 시계가 11시 22분을 가리키고 있다. 뉴스룸에는 사방에 시계가
걸려있다. 면이 하얀 시계, 탁상시계 등(뻐꾸기 시계만 빼고는) 모든 종류의
시계가 다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좀 더 떨어져 있는 벽에는 붉은 디지탈 시계가
시카고, 덴버, L.A, 홍콩, 베이루트, 멕시코시티, 모스크바, 그리고 북경의
시각을 표시하고 있다. 북경은 지금 자정을 넘어 밤 12시 22분이다. 지금 시각이
몇 시이든, 방송시간까지는 이제 8분이 남았을 뿐이다.
앵커 데스크에는 얼굴이 붉으스름한 분장사가 피터에게 분장을 해주고 있다.
그는 앵커의 이마와 뺨을 콤팩트로 살짝 두들겼다. 그는 조심스럽게, 제닝스 주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치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애써서 손질을
했다. 그는 평상시에는 "Good Morning America" 담당이어서, 저녁뉴스에는 익숙하지
않다. 원래 제닝스를 담당하는 분장사인 샬롯트 테일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1시 28분. 분장사가 빨리빨리 분 두드리는 것을 마쳤다. 갑자기 누가 소리쳤다.
(CBS가 시작했어요)
WCBS TV의 모니터에 "CBS특보"라는 타이틀 글씨가 나왔다. 댄 래더가 북경에
가 있었다. 그리고 이붕 총리가 방금 대국민 연설을 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ABC
뉴스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짝 얼었다. 잠깐동안, 마치 화면이 그들에게
요술을 건 것처럼 그들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 어떤 면에선 그랬다.
이 뉴스에 관한 한, ABC는 CBS에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피터는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IFB을 어깨 뒤로 넘겼다. 밀트 와이스가
다가와 앵커가 진한 감색 쟈켓을 입는 것을 도왔다. 앵커의 가슴 주머니에는
꽤 멋을 부린 붉은색의 얇은 비단천이 꽂혀 있다. 그러나 제닝스의 모습은 상당히
집중해 있는 듯했고,책상 위에 있는 원고를 다시 한반 훑어 보았다. 제닝스의
왼쪽으로 카메라 앵글의 범위를 벗어난 곳에, 밀트 와이스가 작은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초조하게 메모를 하고 있다. 피터는 오른쪽으로 몸을 숙여 작은 나무
탁자 밑에 있는 크리넥스 통에서 휴지를 뽑아 마음이 산란한 듯 코를 풀었다.
갑자기 무대 조명이 모두 켜지고, "World News Tonight"의 원래 스테이지 매니저인
톰 킹이 헤드셋을 쓰고 어디선가 나타났다. 그리고 조이 더든은 어디가고 없었다.
톰은 침착하고 냉정했다. 앵커에게 무엇을 하도록 지시하기 위해 톰이 손으로
자기 머리를 쓸어 올리자, 피터는 성근 머리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제닝스의
머리 위에는 몇 개의 조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무대조명이 켜져 있다. 제외된 그
몇개에는 "다이안"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소이어"라는
이름의 여성 앵커를 위한 것으로, 그녀의 금발을 더욱 반짝이게 보이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이다. 피터는 마주 보이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체크해 보았다. 의자 높이를 약간 올렸다. 그의 모습은 훌륭했다.
그의 뒤편에는 간략하게 그린 큼지막한 지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ABC News New York"이라는 표시 글자가 있는데
"NEWS in`라는 글씨는 푸른색으로 쓰여있다.
방송 시작 수초 전. 킹은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끄덕이며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5, 4, 3, 2, 1" 그리고 피터에게 큐 사인을 준다. 방송이 시작됐다.
피터가 멘트를 시작했다. (중국사태 속봅니다. 이붕 총리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앞에 놓여있는 모니터에 이붕 총리가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다.
화면이 나가는 동안 앵커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깔린다. 카메라 램프가 꺼져있는
동안 제닝스는 초조하게 넥타이를 매만지고 매듭을 조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머리결을 쓰다듬어 내렸다. (군대가 광장으로 향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소식통에
의하면 공산당 지도자 조자양은 사의를 표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굶주린 시위자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온통 소문으로 무성할 뿐입니다)
"무성"이란 표현을 썼지만,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자하다"라는 표현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는 카메라 뒤에 서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스테이지
매니저보다 더욱 침착하게 보였다. 제닝스는 북경에서 떠돌고 있는 몇 가지 소문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특보의 결론을 지었다. (이붕 총리는 곧 계엄령을
발표할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피터는 카메라를 보며 소리쳤다.
(팻! 어딨어요? 팻!) 그는 흥분한 것 같았다. 마지막 멘트는 IFB를 통해서 조정실에
있는 프로듀서로부터 들은 가장 최근의 정보였던 것이다. (계엄령 소식은 어디서
들은 거지요?) 그는 초조했다. 그 루머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아야했다.
만일 이런 유령같은 대화에 답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제닝스만 들을 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들은 것은 결코 마음에 드는 얘기가 아니었다. 피터 제닝스는 기자였을
뿐 아니라, 편집권자이기도 했다. 소식통이 무엇인지, 상당히 조심스러웠어야 했던
것이다.
(커피 좀 드시겠어요?) 톰 킹이 물었다. 몇 번이나 더 되물은 후에야 겨우 피터의
대답이 있었다. 그는 커피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지금 마음속에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CNN 모니터에는 시위 군중들이 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드는
장면이 나온다. 학생 운동가들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런 화면을 보고 있던
제닝스의 얼굴은 화가 난 듯도 했다. 지구 저편 중국에서, 주요 뉴스의 상황이
자꾸 변해 가고 있는데, 그는 지금 웨스틑 66번가에서 속수무책으로 화면만
지켜보고 있으니!@ff
10. 앵커들의 현장이동
최근 TV 저널리즘은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다. 오늘날 "외국 현장 취재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그것이다. 작년, 북경과 베를린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이 이러한 최근의 발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여기엔
새로운 "스타일"의 발전도 있다. 이른바 "현장의 앵커(Anchors Away)"라는 형태다.
보도사업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듯이, 그동안 외국뉴스는
언제나 지는 게임으로 여겨져 왔다. 네트워크 측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은 미국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좋지 않은 평판에 덧붙여, 미국인들은 "지리학", 특히 "국제지리"에
어둡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진 것이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륙의 이름도 틀리게
알고 있고, 새로 결혼한 부부들에게 물으면, 아르메니아가 어디 있는 곳인지
찾아내기가, 새 아파트 하나 구하기 보다 더 어렵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반둥이나 반두라 얘기를 꺼내면 그는 곧 눈길은 먼 산을 바라보고
생각은 저 공원쯤으로 가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현실이라면, 그것은 일면,
근거는 박약해도 사회일반의 습성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방글라데시 얘기보단 뉴저지 얘기를 취재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을 잘 아는 영악한 방송사 간부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중요한 국제뉴스를 취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뉴스가
스튜디오안에서 세 문장짜리 기사로 처리되느냐, 아니면 현장에서 일단의 기자들이
만들어 보내는 보도로 처리되느냐 하는 데 있다.
댄 래더는 오늘날 방송 소유주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상품이든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원칙입니다. 외신은 비쌉니다. 싼 걸
사야지요. 국내뉴스를 사야 합니다. 외국에 관한, 혹은 외국에서 취재한 뉴스는
가장 비싼 물건입니다. "뉴스는 상품에 불과하다"는 생가을 가진 매각인들이
자문위원을 고용해 어떤 뉴스를 듣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그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그들이 제1관심사로 지역뉴스를 꼽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국내뉴스, 국제뉴스는 맨 나중입니다. 제 생각엔 그러한 주장은 반 진실과, 온통
거짓의 오도된 혼합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외국에서 제작해 온 뉴스가 비용이 많이 든다면, 앵커를 현자에 보내는
것만큼 비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를 한 번 움직이는 데는, 적어도 50__100명의
리포터, 프로듀서, 카메라맨, 기술자들이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2년 전부터,
래더나 제닝스, 브로커등의 앵커는 정규적으로, 생방송으로 진행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벗어나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8년 말, CBS가 모스크바에서 미, 소 정상회담을 취재했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때 CBS는 "크렘린이 내부"라는 시리즈를
제작해 상을 받기도 했다) 1989년 1월 초, CBS와 NBC는 양 방송사의 앵커를
히로히토 일본 국왕의 장례식에 파견했다. 그곳에서 일본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취재하면 래더와 제닝스는 시청자들에게 풍부한 정보를 제공했다. 물론 NBC의
톰 브로커도 현장에 갓지만, 늦게 도쿄에 도착했다가 단 이틀만 머물고 일찌감치
떠나 버렸다. 그의 방문이 그렇게 짧았던 것이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느냐는 질문에
NBC 뉴스의 나탈리 헌터 감사는 말한다. (물론 그렇지요. 경제적 문제가 뉴스 자체를
조정하진 못하지만, 뉴스가 방송되는 방법에는 영향을 미칩니다)
일본에서 NBC가 택한 방법은 상황 설명적인 최소한의 정보 전달이었다. 반면 ABC는
미국 시청자들에게 일본 국왕의 장례식 뿐만 아니라, 현대 일본인들의 생활상과
일본식 경영에 대한 교훈도 심층 보도했다. 그러나 압권은 단연 CBS였다. CBS는
흥미를 끌만한 주변적인 한 사건을 계기로 교묘하게도 국제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본 경제의 영향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과 문화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심층적인 보도를 시도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는 수석 프로듀서 톰 베타크는
제일 먼저 앵커인 댄 래더에게, 그리고 나서 CBS의 경영진에게, 이번 뉴스의
중요성을 확인시켰다. 래더는 말한다.
(우리는 비상사태를 맞은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의 위치와 새로운 장이 열리는
미, 일 관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부분은 그 동안 잘 다뤄지지도 않았고,
이해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건 전적으로 언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국왕이 서거했을 때, 우리 스스로에게, 또 경영진에게 확신시켰던
거지요.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라고 말입니다)
래더와 찰스 쿠랄트, 그리고 다른 특파원들의 취재물이 어울려 CBS는 미국
시청자들에게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뉴스 모두를 인상적으로 보도했다. 3대
방송사의 일본으로부터 생중계는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는 것은 지난 20년간 없었던 일은 아니다. 비록 최근 몇 년동안은
그렇게 자주 사용되진 않았어도, 큰 회의나 우주선 발사때는 으례히 써온 방법이다.
그러나 지난 2년동안, 새로운 아이디어 한 가지가 활발하게 등장한 것이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바로 "현장을 느끼게 해 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앵커를 현장에 서게 하는 것만큼 현장감을 살리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해, 앵커들은 크렘린으로부터 시작해서 일본, 쿠바, 중국, 중동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그리고 또다시 동유럽으로 갔다가, 마지막으로 정상회담이 열리는
몰타섬으로 쉴새없이 이동했다. 제닝스와 래더, 브로커는 양복을 벗고, 트랜치코트를
입었다가는, 사파리 쟈켓을 입기도 하고, 다시 외국 특파원들 사이에 유행하는
베이지색 전투복을 입고 화면에 나타났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피터 제닝스가 방송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스티브 텔로
프로듀서의 말에 따르면, 피터는 지난 몇 년간 75개 도시에서 150일 밤을 길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속도는 옛날보다 더 빨라졌다고 한다. (5년전에 비하면
두 배는 더 많아졌습니다. 지난 4월 이후에 유럽에만 6번이나 갔으니까요)
NBC윌리암 휘틀리도 브로커에 대해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지난 4년동안
우리가 방송한 장소는 40개 도시였습니다. 작년 한 해만도 10여개 도시에서
진행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시청자들이 먼저 어디로 가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3대 방송사의 앵커가 된 세 사람에게 이러한 현장 방송은 그들의 일상의
예상하지 못한 아주 흥미로운 변화의 기회가 되었다.물론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그들이 가장 아꼈던 일(바로
현장에서 뛰는 일)을 그동안 하지 못하고 지내 왔던 것이다. 대신 의자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움직이는 앵커" 역할은 래더나
제닝스, 브로커 모두에게 꿈이 실현된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에겐 그렇게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더 네이션"지는
이렇게 비난했다. "외국의 도시들을 전전하면 트랜치 코트를 입고 정말 현장에서
리포터를 하듯 프롬프터를 읽어내려 가는 일을 이제는 그만 하겠다는 맹세를
세 앵커들로부터 받아내는 게 어떨까?" 코미디언들은 부시 대통령이 세 앵커의
뒤를 따라 전세계를 질주하는 것을 빗대어 웃음을 자아냈다. 피터 제닝스 자신도
이렇게 순례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천안문광장 한가운데 서서,
혹은 그다니스크 조선소에 서서 "오늘의 주식시세는..."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우습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제닝스와 그의 동료들은 앵커가 현지에 서야 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 첫번째가 직접적인 선전이 된다는 사실이다. 앵커는 일반
특파원보다 훨씬 스타성이 있다. 제닝스가 인정하듯 앵커가 가면, 일단 그 내용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끈다.
물론 광고나 시청률과 무관한 이유들도 있지만 이런 방법을 취해 만들어지는
국제 뉴스들은 모두, 일단 시세가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비평가는 이
세 앵커가 "진짜 기자"로 활약하는 것이 아니라고 꼬집지만, 그들의 불평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현장에서의 앵커는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가지 않았으면, 접근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사건을
앵커들이 그곳에 감으로 해서 보다 생생하고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댄 래더가 중국에서 진행한 특집을 생각해 보자.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백만
중국인들의 얼국이 비친 장면은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그 군중속으로
뛰어들어 악수하고, 대화하고 주의깊게 경청하는 모습은 가히 의외의 놀라움이었다.
갑자기 우리는 장관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고, 우리가 바로 그 뉴스속에 함께 되었다.
래더가 돌아온 지 1__2주일 후, NBC는 톰 브로커를 북경에 파견했다. 여러
사람의 눈에는 NBC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보였을 것이다. 정부의 계엄령이
내려진 후 취재 보도하기가 어려워졌고, 겁에 질린 시민들과의 인터뷰는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브로커는 부가적인 정보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좀더 다른 것을 시도해 보았다. 그는 우리를 막후로 데려간 것이다.
쓰러질 듯 흔들거리는 소형 자전거를 몇 대 빌려서 그중 한 대에는 비밀 카메라를
부착했다. 앵커와 카메라맨은 피로 얼룩진 북경 시내를 누비며 우리에게 금지된
도시의 발자국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 영상은 뉴스 자체와는 거리가 멀었고,
숨겨진 카메라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위험스런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며
뒤뚱거리며 달리면서 톰 브로커는 우리에게 북경의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긴장과 불확실성, 그리고 계엄령 치하에서의 심한 공포를 실감나게 보여 준
것이다. "위험에 처한 톰 브로커"(바로 그것도 성공적인 화면이 되었다) 그것
자체가 뉴스가 되었다. 좀 다른 형식의 뉴스지만, 이 또한 아주 중요한 뉴스였다.
그 화면은 시청자들에게 마치 자신들이 군인들에게 점령당한 시민인 것 같은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서 앵커의 기능이 그토록 효과적인가 하는 데는 심리학적인
이유가 있다. 외국 특파원들은 시청자들에게 덜 친숙하다. 그들은 언제나 멀리
저편에서만 보도해 왔다. 얼굴로나 감정적으로나 시청자들은 댄이나 피터, 톰과
더욱 가깝다. 시청자들은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시청자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NBC의 죠지 루이스,
CBS의 봅 사이먼, ABC의 개키 주드, 모두 능숙하게 북경보도를 한 특파원들이다.
그러나 본능적이고 노골적인 충격을 주고 그 안으로 더욱 강렬하게 우리를 끌어들인
사람은 처음에 댄 래더, 그리고 그 다음 톰 브로커였다. 그들이 모습을 나타냄으로
해서 그들은 사건을직접 안방으로 전했던 것이다.
브로커와 래더, 제닝스 등이 스타 대열에 낌에 따라, 시청자들은 그들을 연속극의
주인공쯤으로 친숙하게 여기게 되었다. TV 드라마의 기본 관례에 따르면, 각 주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장소로 옮겨져도 반드시 이에 따르는 배역이 나와야 한다고
되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앵커들이 모험을 무릅쓰고 이곳 저곳을
이동하면서도, "그래도 괜찮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무게"요인도 있을 수 있다. 앵커가 현장에 투입되면 방송사의 보도조직은,
그 장소에서 더 많은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 총긴장하게 된다. 내부인들은 이런 상황을
"비중을 둔다" 혹은 "무게(tonnage)"라고 부른다. 이것이 재정적, 조직적 자극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만일 회사가 자기네 스타와 보조요원들을 투입하는데 엄청난 돈(보통
한 번에 백만 달러 이상)을 써야 하는 경우라면, 회사는 들인만큼 뽑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욱이 상점(뉴스 조직)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곳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뉴스를 취재하고, 더 많은
뉴스, 나아가 뉴스 뒤에 숨겨진 뉴스까지 낱낱이 취재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엔
사람들과 역사, 정치, 그리고 그 환경에 대한 미니 다큐멘터리도 있을 수 있다.
사실 보도뿐만 아니라 그 본질을 취재하는 것은 가장 흥미있는 형태의 보도이다.
마침내 이란에서 중앙아메리카까지 발생한 사건들과 새로운 세계주의의
도래(1992년의 유럽, 고르바초프의 "하나의 고향, 유럽")같은 문제로말미암아,
네트워크 뉴스는 미국 시청자들에게 국제적 전망을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통념과는 달리 국제뉴스의 심층보도는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국제뉴스는 다채롭다. 그리고 예를들어 유령의 마을이라든가, 실내 벽타기, 롤러
코스터 같은 시시한 화제보다는 동서관계라든가 공산주의의 붕괴 같은 좀 더 큰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준다.
물론 그러한 취재에는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문제점은
쿠바정상회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었지만
"고르바초프와 카스트로의 만남"이라는기초적인 사실외에는 뉴스 가치가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의 앵커들은 주요 뉴스가 터지는 곳이면
지구 어느 곳이든 계속 가야한다. 그것도 아주 자주. 왜냐하면 앵커가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은 시청자를 함께 데려가는 것은 의미하기 때문이다.
앵커가 더 많이 참여하고 시야를 넓힐 때, 시청자들의 통찰력도 깊고 넓어지는
것이다.
물론 방송사간의 경쟁에 떠밀리지 않았다거나, 기술적인 발달같은 지원이 없었다면
앵커들도 스튜디오를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에 서서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지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게 된 것은 모두 "첨단기술" 덕분이다. ABC의 스티브
텔로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한다. (5년전에 비하면 훨씬 빨리, 계획에도 없던
사건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게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지난 30년 동안 지구궤도를 도는 통시위성도 있긴 하지만(그 첫번째 것은
"에코"라는 이름의 위성으로 1960년 8월에 발사된 것이다) 누군가가 정부 청사에
가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업링크(Uplink, 지상에서 우주선(위성)으로의 정보 전송)가
불가능했다.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피터 제닝스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보조진행을 하며
현장에 있었을 때는 늘 아슬아슬했습니다. 필름을 찍자마자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TV 방송국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만일 전송해 줄 분위가 아니면 그날 뉴스는
방송될 수 없게 겁니다)
그러나 "이동 가능 위성접시(Flyaway Satellite Dish)"는 이 모든 상황을 빠꿔 놓은
획기적인 장치다. 텔로는 이렇게 설명해 준다. ("Flyaway Dish"는 크기가 훨씬
작습니다. 게다가 15__20개의 가방에 나눠 넣을 수 있도록 해체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민간 항공기에, 혹은 더 작은 비행기에도 실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엔지니어들이 가방만 열어 부품을 조립하기만 하면 "바로 이거다" 하고 완성되는
겁니다. 조립식 위성 전송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5년전엔 외국에서의 방송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동식 위성장치와 더 많은 통신 위성들(공중에서 받아
쏘는) 덕분에 뉴스의 무대가 점점 더 열려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방되고 확대된 무대 덕분에 3대 방송사는 그 무대를 서로 장악하려고
경쟁하게 되었다. 해외에서의 생방송은 이제 필수조건(sine qua non)이 되었고,
헌하고 경쟁적인 환경에서 최후의 잣대가 되고 있다. 오늘날엔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든지 큰 사건이 터지면 앵커가 현지에 특파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을
정도다.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경쟁은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CBS의 수석 프로듀서 톰 베타크는 말한다. (3대 방송사의 치여한 경쟁으로 해서,
이러한 경쟁적인 환경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술이라도 사용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서 뉴스는 앵커들의 뜀박질 경주장이 되었고,
누가 먼저 당도하느냐가 성공의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ABC의 워싱턴 특파원 존 맥워시는 말한다. (바로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하겠다는
강박관념일 뿐입니다. 모두가 비정상이에요)
피터 제닝스는 싸움터를 방불케하는 경쟁과, 외국으로부터의 잦은 파견에 대해,
앵커의 시각에서 이렇게 요약해 말한다.
(너무나 빠듯한 일정도 있었습니다. 우리 팀은 동베를린 축성 40주년 기념식에
가려고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1주일 이내에 프라하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로마로,
또 몰타로, 그리고 계속 브뤼셀로, 런던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저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화 "If This Is
Tuesday, It Must Be Belgium"을 보신 분이 계신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아실 겁니다!)
NBC의 모스크바 특파원인 봅 애버네시는 말한다.
(오늘날 앵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질은 바로 스테미너입니다. 프라하에
갔다가 계속 로마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4시간 자고, 깨서는 곧바로 또 몰타로 가야
하니까요)
맥워시 기자의 말은 그 논리를 뒷받침해 준다.
(피터를 좀 보세요. 전 유럽을 끄떡없이 휩쓸고 다니지 않습니까?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ff
11. 천안문 광자의 댄 래더
1989년 5월 11일 목요일. 맨하탄의 한복판 그랜드 하이얏트 호텔의 화려한 정찬에
국제적 엘리트 언론인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와인 잔을 부딪히는 가운데 피터
제닝스는 단상의 마이크 앞으로 올라가 해외언론인 클럽의 다음 수상자를 발표했다.
해외 제작 TV 특집뉴스 보도부문 최고상은 "CBS Evening News(댄 래더와 톰 베타크)"의
"크렘린의 내부"라는 제목의 소련 리포트 시리즈였다.
ABC의 "World News Tonight"에서 시청자들의 눈에 익숙해진 특유의 세련된 자세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피터 제닝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댄 래더는 앵커는 오늘밤
이 곳에 오지 못했습니다. 댄 래더는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중국으로 떠난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제닝스는 그의 경쟁자에게 한방 먹이는 말을 이었다.
(물론 댄은 생생한 보도를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지만, 바로 이곳 미국에서, 중요한
파나마 사태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ABC와 NBC는 중국사태를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간부급 보도회의에서 양 방송사는
그렇게 결정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번 사건이 1959년 이루 공산권 주도 국가의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만남이라 할지라도, 물론 어느 정도 방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으로 전체 방송 제작팀을 보낼만큼 가치있는
일일까? NBC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편집면에서나, 재정면에서나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그렇게 판단했다.
ABC는 그 스토리에 대해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했다.
ABC의 부사장 딕 윌드는 말한다.
(중국인들 자신도 이미, "방문"에 불과하다고 언론에, 또 전세계에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일은 단지 의식을 갖추는 행사이며, 중국과 중국인을 보는 기회일
뿐이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를 보내 취재를 하도록 하긴 했지만, 전체
프로그램을 그곳에서 현지 제작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댄 래더나 CBS도 중국까지 갈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CBS의 간부진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점을 감안해, 출장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 그들은 이미 일본
취재는 물론 소련 방문에도 엄청난 돈을 배정한 터였다. 댄 래더는 그 과정을 이렇게
말해준다.
(1988년과 89년 초 사이에 우리는 공산주의의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 충분히
토의했습니다. 변화의 조짐을 냄새 맡을 수도 있었고, 피부로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감지했고 그 변화의 속도는 빨랐습니다.
그런 점이 우리 취재의 동기가 되었던 겁니다. 공산주의의 내부를 살펴볼 때마다,
이제 공산주의 이념은 퇴물이 되었고 지식층은 믿을 수 없었으며, 경제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부시와 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이 열리는 소련에, 예정보다 규모가
더 큰 방송단을 파견할 것을 제의한 사람도 댄 래더와 프로듀서 톰 베타크였다.
앵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경여진으로부터 단호하게 거절당했었다고 한다.
(현재의 경제적 상황으로 보아, 이 일은 불가능합니다. 절대 안 돼요. 당신 말도
옳긴 하지만, 돈이 없는 걸)
오랜 협상 끝에, 래더는 CBS의 경영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린 이 문제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회사의 입장이 정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돈을 조달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겐 방송 예산이 조금 있었거든요. 우선 우리 돈으로
비용을 치르고 나중에 숫자를 맞춰 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 래더와 베타크는 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또 찾아갔다.
히로히토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일본에 대규모 취재단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경영진은 노발대발했다. (일본? 공산주의이 변화는 어떻게 하고? 미, 소 정상회담은
그렇다치고, 일본은 또 무슨 소리요?)
베타크와 래더, CBS의 여러 기자들은 미, 일 관계의 새시대가 열리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아시아 제조업의 막강 실력자로 세계 경제무대에서
급부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신비에 싸여 있다고 생각되었다.
일본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는 베타크는 그의 경험으로 비춰 보아 많은 미국인들이
아직도 일본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그즈음, CBS 뉴스의 보도이사가 바뀌었다. 데이빗 벌크였다. 데이빗은
ABC에서 룬 알럿지 사장의 밑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던 딕월드 같은 사람들을 입을
모아 그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사리가
분명한 그의 추진력 때문에 몇몇 CBS 직원들은 그에게 "얼음왕자"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래더는, 일본 파견을 가능하게 해줄 사람은 바로 이
인물이다라고 믿었다.
(솔직히 그때 데이빗 벌크 씨가 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점수를 올릴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쉽게 해줄 수
있었던 겁니다)
래더와 CBS에게 화제가 풍부한 일본 취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큰 점수를 얻을
좋은 기회였다. 찰스 쿠랄트와 봅 사이먼, 수잔 스펜스와 그외 여러 특파원들의
활약으로 일본 현지 방송은 가장 수준 높은 문맥이 딱 맞는 뉴스였다. CBS
뉴스의 한 소식통에 그 일은 재정적으로도 엄청나, 자그마치 280만 달러나
소요됐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CBS 팀은 잠시 중국을 들르게
되었다. 북경에서의 어느 일요일, 래더와 베타크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경쟁사들은 이미 철수했고 앵커와 담당 차장만이 남아 대통령의 방문끝에 오는,
혹은 큰 사건을 치재하고 난 후의 전형적인 휴유증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드레날린도
다 빠지고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빈둥거리는데도 곧 싫증이 났다.
중국에 소요의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래더와 해리 레드리프
프로듀서는 상황을 파악하러 북경 시내로 나섰다. 그들은 이미 인민적죽공원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곳은 영어를 연습해 보려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했다. 공원에는 눈에 띄게 많은 군중들이 무리를 지어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Sunday Evening News"에 낼
얘깃거리가 없나 찾아보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나갔다.
래더는 그때 일을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5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해리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우린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래서 곧 표면을 뚫고 나오게 될 것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린 들을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린 그때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그날 오후 내내 래더는 그 공원에서 진을 쳤다. 5시간 동안 그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그는 "Sunday Evening News"에 낼 한 도막을 녹화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인들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대학생, 교수, 용접공, 철학자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제개혁이 정치개혁을 너무 앞질러 달려나가 버리고 말았다고)
그날 저녁,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래더와 베타크는 아떻게 하면 다시
중국을 취재할 수 있을까를 구상하고 계획했다.
(우린 태평양을 건너면서 온통 그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변화는 엄청나게 크게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가 고장이 나 디트로이트에 잠시 기착했다. 남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은 또 중국에 대해 얘기했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다시 취재하러 갈
수 있을까?
이것은 웨스트 57번가에서는 극도로 힘든 모험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미 300만 달러 가까이 썼는데 이제 또 중국에? 어떻게 데이빗 벌크를
설득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이득만을 추구하는
CBS 전체 경영 감독 래리 티쉬를 설득해 그런 투기 같은 일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 당시 데이빗 벌크는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여서 비용 삭감에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CBS 보도부 내에서도 다른 출장 건으로 저항이 없지
않았다. 이제 방금 돈을 쳐들인 일본 출장에서 돌아왔고, 부시 대통령이 NATO
각료들과 만나는 회담에도 따라가 방송할 것을 이미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난 NATO 출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바인데" 하고 래더는
중얼거리지만 이미 이것도 정해진 것이었다)
래더와 베타크는 한 가지 전략을 짜냈다. (일본에 대해선 상당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세를 몰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당히
계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일본에서의 좋은 반응으로
회사 내를 한바탕 환기시키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 벌크에게 찾아갔습니다)
재정적 부담에 직면해 있던 벌크 이사는 쉽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베타크는
수차례 중국 취재 예산 계획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 그에게 보여주었다. 래더와
베타크는 충분히 공격하면 벌크 이사가 결국 승낙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베타크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는 끈질겼습니다. 게다가 톰은 입심도 센 친구라서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마침내 베타크와 래더는 이사를 설복시키고 말았다. 찰스 쿠랄트가 이 결정에
부분적으로 큰 기여를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몇 년간 ABC에서 쌓은 저돌적인
의지로 이사를 설복시켰던 것이다.
(벌크씨는 특별 취재단 전원을 중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그 유스를
CBS가 "소유"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ABC의 룬 알럿지 사장이
취해 왔던 정신이었습니다)
결정은 벌크가 내려 주었지만, CBS 보도이사인 그는 또다시 본부가 있는 6번가
블랙 록으로 가서 사장 래리티쉬와 부사장 제이 크리겔에게 이 안을 팔아야 했다.
벌크 이사가 CBS 뉴스 부서의 지갑끈을 조정하긴 하지만 이 부서는 이미 예산 초과
상태여서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벌크 씨가 중국계획을 갖고 티쉬와 크리켈을 찾아갔다. 그는 판매에 바짝 매달려야
했다. 래더가 옆에서 도왔다. 티쉬 사장은 결국 이 계획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 소식통에 의하면 단서가 붙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는 수표를 써 주면서, 이번에
또 예산초과를 하면 다음 회계년도에는 절대 봐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일렀다. 그들은
사안이 무엇이든 그저 예산에만 연연했던 것이다. 그것은 벌크에겐 정당한 것이었다.
마침내 래더는 청신호를 얻고 의기양양했다.
손에 돈을 쥐고, 베타크와 특집프로 담당 디렉터 레인 베나도스는 래더가 떠날
날짜보다 한 달 앞서, 4월 18일 네 팀을 먼저 중국으로 보냈다. 23명으로 구성된
특별취재팀에는 브루스 모톤, 수잔 스펜서, 봅 사이먼 등 쟁쟁한 기자들이 포함됐다.
그들은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호요방의 장례식날 그곳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학생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매일 아침 우리는 현지에 파견된 취재팀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입니다!"하는 보도를 들었습니다)라고 톰 베타크는 회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베타크와 래더는 혹시 자신들이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국으로 떠나도록 되어있는 바로
그 주일에 파나마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이 반대파인
대통령 후보자 질레르모 빌리포드를 처단하고 선거를 휘어잡는 혈전을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중앙아메리카 국가에 수천명의 추가 병력을 파견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은 쓰라린 결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내기를 포기하고 뉴욕에 머물러야만
파나마와 중국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파나마 문제가 정말 우리의 모든 카드를 점검해 보도록 만들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우리는 큰 결단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린 도박을 한 것이었고,
이 도박에 가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위험 부담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여파를 미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래더와 베타크는 마지막 순간에 데이빗 벌크와 자리를 함께 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벌크 이사에게 신뢰를 심어 주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여러 번 그와
어려움이 많았는데, 어느 때나 잠자코 내 얘길 듣고 있다가 사실에 입각해 결정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정한 일은 결코 흔들리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우린 보든 결정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베타크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절충안으로 뉴욕에 머무른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말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당신들 속마음은 중국에 가는 쪽으로 쏠리고
있어요. 마음 먹은 대로 하시요!" 그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단호했습니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장시간 동안(도쿄까지 논스톱으로 가는 서방행이
아니라 파리와 뉴델리를 거치는 동방행의 긴 여정을 택했으므로) 래더와 베타크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중국 모험이 과연 현명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파리에 내려 뉴욕에 전화해 보니 파나마사태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피터 제닝스가 해외 언론인 클럽시상식 만찬에서 그들을 씹었다고도
한다. 초조해졌다.
5월 13일 토요일 아침, 북경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샹그릴라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동양과 서양이 기묘하게 혼합된 장식으로 치잔된 아주 이상한 곳이었다.
로비에는 연미복을 입은 중국인들이 브람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샹그릴라는
60__70명에 달하는 CBS 팀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5층에
있는 침대를 모두 끌어내리고, 편집기를 설치하고, 연락 사무실을 차려 특파원들의
기사작성용 사무실로 썼다. 조정실까지도 마련했다. 그리고 파고다 공원에는 기자가
서서 리포트할 카메라도 설치했다. 레인 베나도스는 (우리는 완전 무인 상태에서
샹그릴라에 스튜디오를 하나 차렸습니다) 라고 말했다.
앵커와 담당 차장은 곧바로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안문 광장은 "금지된 도시"의 전면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중국의 수도 북경의
심장부였다. 그곳은 그 옛날 황제가 포고령을 발표했던 곳이었고, 모택동이 40년
전 공산주의혁명의 승리를 발표한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 지금 10만 명의 학생들과
수백 명의 굶주린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혁명(민주주의)을 요구하는 혁명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학생시위는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의
핵심 지도자들과 얘기하며 전율을 느꼈을 때, 이것이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움직임이 어떤 쪽으로 발전될 것인지, 혹은
얼마나 크게 번질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가 큰 사건임은
확신하고 있었고, 등소평과 고르바초프의 회동쯤은 여기에 비해선 새발의 피라는
것도 충분히 느꼈습니다)
바로 그 월요일 밤, CBS로 채널을 돌린 시청자들은 그 사태의 첫번째 모습을 TV로
보게 된다. (고르바초프는 오래된 상처를 씻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략적 우위를
중화시키기 위해 이곳 중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의 얼굴을 바꾸려는
학생들의 시위에 그만 눌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CBS 저녁뉴스의 댄 래더입니다.
오늘밤은 중국의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직접 보도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베이지색 사파리 쟈켓을 입은 댄 래더는 광장에 뛰어들어 시위대와 인터뷰를 했다.
(광장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은 학생들과 자전거, 확성기의 소음, 구호를외치는
소리, 노랫소리와 박수소리의 "바다"를 헤치고 와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댄 래더는 100p 문법적으로 정확한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도는 분명 대성공작이었고 그를 온통 불사른 일이었다. 극적이고 감동적이고,
약간 선정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말의 경향이 여기 놀라운 광경에서는 너무나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분노가 아니, 굳은 결의가 그들의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배어 나왔습니다.
고르바초프가 도착하자 광장에서 떠나라는 정부의 명령이 있었지만 시위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에워쌌지만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것 같지는 않았고, 경찰이 애국가를 부르자 학생들은 따라
불렀습니다. 프랑스의 "라 마르세이에즈"처럼 그 노래는 정부를 전복시킬
기세였습니다)
그후 며칠 동안 중국 사태는 단순한 뉴스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커져갔다. 연이은
사건들은 래더의 현란한 언어구사 이상이었다. (무방비로 노출된, 바람이 쓸고 간
이 지역에 굶주림 시의가 시작된지 4일 후, 학생들은 지쳐 떨어지고 몇몇은
필요하다면 죽음을 각오하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중국 문화에 관한 보도를 맡기로 했던 찰스 쿠랄트 기자는 전적으로 다른 사건을
보도하게 되었다. 줄담배는 피는 쿠랄트는 말했다. (저는 대규모 시위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정말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거기엔 자유의 기운이 흘러
넘쳤고, 전투는 이미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과거 어느때도 그렇게 대규모의 기쁨은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수요일이 되자, 시위대의 규모는 가히 가공할 만큼 커졌다. 천안문 광장에서
보도하던 래더는 학생들의 시위가 어떻게 집단 대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민광장은 이제 중국의 역사에 가장 큰 시위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곳 시간으로 지금은 목요일 아침. 3000명의 학생들의 단식투쟁,
제6일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위의 양상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동자를 포함한 여러개의 조직화된 집단이 시위에 가담한 것입니다. 가장 많을 때는
시위대의 숫자가 100만에 다다릅니다. 정부는 더이상 이 지역을 통제하려는 시늉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목요일 아침이면 미국은 아직 수요일 저녁이었다. 지구의 반대편 북경은
뉴욕과 13시간 시차가 차이가 난다. 그 결과, 물론 계산도 복잡하지만, 끔찍하게
혹독한 스케줄을 만들 수 밖에 없어진다. "잠은 두 시간만 자면서"등의...
베타크 차장은 말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하는 것은 살인적이지요.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것은
밤낮으로 리포트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있을 때 하루종일 화면을
찍어옵니다. 그리고 여기 저멱때가 되면 본국은 아침뉴스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호텔로 돌아가 취재한 필름을 정리하고, 원고를 쓰고 하다보면 밤을 꼬박
새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방송할 준비가 되면 아침 6시, 본국에선 그때 비로서
저녁뉴스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낮에도 종일 일하고, 밤에도 꼬박
일한다는 겁니다)
주요 사건이 터진 현장을 내 눈으로 지켜보며 일한다는 짜릿한 흥분에 힘입어서
래더와 그의 취재팀은 정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CBS
뉴스팀은 정말 완곡하게 말해서, "움직이는 기계"처럼 방송했다. 팀은 두 대의
자동차(평상꼴의 트럭 한 대)와 10년 된 낡은 일제 도요타 라이트 밴 두 대로
이루어진다. 래더는 이 도요타를 "자동차 파괴 경기에서 나온 파편"이라고 불렀다.
도요타 트럭은 장비를 가득 실었다. 임시 변통으로 트럭 뒷부분 평상 한쪽끝에
카메라와 삼발이를 설치하고 래더는 그 맞은편에 서서 방송했다. 며칠 후, 트럭
꼭대기가 너무 미끄러워져서 기술팀은 나무 판대기로 래더의 발 밑에 작은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래더는 자기 자리, 그 판대기 위에 서서 이렇게 보도했다.
(거리에는 100만 이사의 인파가 또다시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듭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3시 30분. 때아닌 몬순 기후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하늘의 날씨가 광폭해지는 것은 이땅에 카다란 변화가 도래할 징조라는 중국의 오래
된 속설을 얘기해 줍니다)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지만, 래더는 그 순간 다른 "생각"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세트는 너무너무 약한데 번개가 여길 내려치면 어떻게 한다지.
저 전선에 누구라도 감전된다면 정말 큰 일이지...)
이런 류의 제작과정에서는 늘 그렇듯이 기자가 앞에 나서 보도하지만 막후의
스타들이라면, 바로 기술진(카메라맨, 오디오맨)들이라고 할 수 있따. 전선을
설치하고 마이크로 웨이브를 설치해서 현장에서부터 베이스까지(이번 경우에는
광장에서부터 호텔로) 화면을 전송하는 것이다. 기술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고되게 일하는 셈이다.
(우린 너무 지치고 손이 모자라 모두들 스스로 겨우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도 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비위를 상하게 해도 잊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솜털 침대같이 포시라운 일이 아닙니다. 설사 이
사람들이 해내는 초인적인 작업을 해보라고 값을 지불한다고 해도 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도요타 트럭 꼭대기의 카메라맨 브랜드 심슨은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며칠 밤낮을,
그야말로 거의 잠자지 않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취재했다. 그의 카메라에
붉은 등이 들어오고 래더가 라이브 인서트(하루종일 속보로 들어가는 짤막한 뉴스
중의 하나) 제작에 들어갔다. 앵커는 지친 카메라맨이 약간 휘청하며 앞뒤로
흔들린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런데 그순간, 세계에서 가장 큰 뉴스,
중국사태의 초점인 천안문 광장을 생방송 보도하던 앵커의 눈에 카메라맨이 트럭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거의 카메라와 한께 쓰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피한 것이다. 다행히 트럭 아래로 떨어지진 않았다. 오디오맨이 재빨리 뛰어 올라와
카메라를 잡은 덕분에 미국의 시청자들에겐 약간의 흔들림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CBS 팀이 흔들흔들할 때도 종종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래더는 그 넓은 광장 주변에 화장실 시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얘기해 준다.
(100만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국이었습니다. 우리는
맥도널드 햄버거가 도처에 널려있는 미국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정도는 임시로 소변을 볼 수 있었지만 냄새가 지독해서 결국은 공중시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팀 중에 한 사람이 거길 갔습니다. 내가 그 삶을 공중
화장실로 데려갔는데..., 그 장면을 잘 상상해 봐야 합니다. 그 곳은 대형 텐트였는데,
그 안의 중국인들이 글쎄 가림막도 없이 그냥 길게 도랑만을 파 놓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안으로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냄새와 함께 사람들이 도랑을 따라 주욱 서서
오줌을 누는 장면에 충격을 받은 그는 거의 주저앉을 뻔, 아니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사실, 실신할 정도로 놀라 도망친 뉴스맨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래더가 돌봐야 했던 일은 기절한 동료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의 초반에는
리포트도 하고 학생지도자와 광장에 모여든 노동자들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포터 할 시간도 점점 더 없어져 갔다.
광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래더는 여러 부류의 학생들과 접촉하기 위해
녹화중에라도 해방되고 싶다고 베타크에게 부탁하곤 했다. 현장에서 그는 담당 차장과
꼭 붙어다녔다(사실 다른 두 방송사는 경우가 달라 프로듀서가 현지에 나오는
시간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조정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래더의 말처럼 그와
베타크는 말 그대로 꼭 붙어 다녔다. 해방되고 싶다는 앵커의 요구에 대한 답으로,
베타크는 래더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할 사람을 보내보도록 하지요)
래더는 정말 실망했다. 직접 학생들을 만나봐야지 리포터들의 보도만을 가지고는
불충분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경우만은 프로듀서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다.
이번 상황은 방송사 앵커 몫의 불합리한 면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종종 앵커로 승격하는 데 큰 몫을 하는, 기자로서의 현장보도 실력이 정작
앵커가 된 다음에는 그 최고였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좀처럼 없어지게 된다.
"방송출연"은 앵커로 하여금 "카메라 앞의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심충적인 조사를 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늘 엉성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래더는 이렇게 회상한다.
(커다란 발생 사건에는 으례 있는 일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느슨해져야 합니다.
편집 과정의 핵심이라는 책입감에서도 훌쩍 벗어나서 방송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생방송 작업은 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쇠진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당신이 일을 하건 안하건, 일의 연관성이 있건 없건 계속될
것입니다)
래더와 그의 팀이 중국에서 일했던 24시간 사이클의 작업중에 그들은 십여가지
아주 다른 형태의 방송을 해냈다고 그는 평가한다. 주말이 되어 가면서 상황은 점점
더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 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24시간 동안 40여개의
방송을 해 내는 기록까지 남기게 된다.
(선거가 있는 날 밤도 이와 비슷하고 전당대회 때도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합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압박은 정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예상이나 준비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제대로 쓰고 방송할 시간이
없으니까 애드립으로 모두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일부 노트에
메모를 하거나, 혹은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가 방송을 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맥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전엔, 5분 전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거지요. 이것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구요.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을 확실히 해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립에 맞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때로는 그림에 없는 것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들은 적은
있어도 본 적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시청자와 동시에 보고 있는 화면에 대해
충분한 배경 설명과 세부사항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청자도 어떤 상황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한쪽 귀에다 다음에 진행되어야 할 것들을 말해 줍니다.
아마도 양쪽 귀에서 말하고 있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다시 말해 한쪽 귀는 뉴욕과
연결되어 뉴욕에서는 30초내에 자르라고 소리치면 머릿속에서는 시간을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머릿속 시계를 작동해서 20초 남았다, 15초 남았다, 그렇게
계산하는 거지요. 그리고 다른 쪽 귀에서는 지역 연결이 되어 있어서,
샹그릴라호텔에 있는 레인 베나도스나 지린스키와 연락을 하는 그런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낡아빠진 도요다 트럭 꼭대기에 부착된 카메라 앞 나무판자 발판을
딛고 서 있는 앵커에게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 귀에서 각각 한
사람씩, 그리고 발 밑에 있는 모니터에 나타난 그림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고,
동시에 머릿속에서 가고있는 시계를 인식하면서, 그리고 가슴 한편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이
사람들의 모든 일은, 모든 것이 기자가 분명히 해주는 데 달려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중국 사건은 세게적인 주요 뉴스가 되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러나
CBS는(CNN과 함께) 이 뉴스에 관한 한 거의 독점하다시피 보도했다. 톰 베타크의
말처럼 그 주에 CBS는 다른 방송사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것이 주요 뉴스로 판명된 다음에도 왜 ABC와 NBC는 앵커를 현장에
보내는 걸 거부했을까? ABC의 부이사 밥 머피는 이미 그 시점에서 중국에서
직접 위성으로 그림을 전송할 지상 지국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정부가 전송을 금지했기 때문에 ABC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의 관영 TV의 은혜에 기대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ABC의 경영진에게는 반대한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이사 딕 월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마치 뒤나 쫓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누구든 스타트를 잘해 뛰는
사람이 그사건을 독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시청자는 CBS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보도를 하는 방송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요)
그러나 ABC의 앵커 피터 제닝스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결코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경쟁에 강조를 한 인상을
풍겼다.
(처음으로 중국으로 문을 열고 나간 앵커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제게 아주 심한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모두
이 경쟁적인 사업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그가 거기 가니까, 또 누가 거길 가고,
또 누가. 그래서 고르바초프 건으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분별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정작 큰 사건이 터지자, 글쎄요, 래더가 그곳에
가니까 제닝스도 래더를 따라 갔는데 브로커는 어디 있느냐, 그렇게 되면 사건 내용은
이미 뒷전일테고, 이런 모든 종류의 얘깃거리가 오고 간다는 건, 글쎄요...)
주말이 가까워지자 사태는 좀더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해갔다. 5월 19일 금요일.
그날은 저녁뉴스에서 댄 래더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건과 감동으로 점철된
24시간"이었다. 금요일 새벽 5시, 이붕 총리와 공산당 총서기 조자양이 광장에 나와
단식투쟁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만일 이러한 움직임이 정부쪽의 화해 움직임이었다
하더라도, 설사 조자양이 학생들에게 유화노선을 건의하려 했다 하더라도, 광장이
분위기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축제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장막이
시민들을 뒤덮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얻었다고
생각했고, 그 아수라장에서 빠져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정부가 강경 노선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정이 되자 모든 시위가 금지됐다. 군대가 이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광장에 파다했다.
래더는 방송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정: 시한은 이미 지났다. 군대 이동에 관한 많은 보도와 소문 무성"
"밤 12시 30분: 이붕 총리가 라디오와 텔레비젼에 나와 고위관리들에게 발표. 그리고
군중들에게는 스피커로 발표. 그는 무정부주의와 폭동이 국가를 위협하고 있고 경제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공산주의 통치를 무너뜨리려는 소수의
음모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결국 계엄령을 선언한 것이다.
스피커로 나오는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야유하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붕 퇴진! 이붕 퇴진!"
"새벽 2시: 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트럭에 탄 시위 지원 세력들이 다시 몰려
들고 있다. 학생들은 감히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 4시: 군대가 좀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소극적인 저항에 맞서고 있다고 한다"
"새벽의 여명이 비치는 가운데 학생들은 아직 광장에 있다. 그들은 밤을 이겨낸
것이다"
토요일 아침 해가 떠오르자 잠시 낙관적인 기미가 보이는 듯도 했다. 광장의
군중들은 광장을 가로질러 모택동의 초상화 앞 깃대까지 행진하는 군기 호위병들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깃발이 게양되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바로 그
순간까지 래더는 꼬박 24시간 동안 한잠도 못 자고 순수한 아드레날린을 생성해내며
광장에 머물렀던 것이다.
중국은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지만 뉴욕은 금요일 밤시간, "CBS Evening News"가
방송될 시간이 가까웠다. 천안문 광장에서 래더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곳
천안문광장에서 단식 투쟁자들의 위태로운 삶이 또 하루를 넘겼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곳에 건재합니다.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의 강경노선 분자들이 마침내 정부와 당을 조정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 개혁을 외치는 시위대들의 등을 떠밀기 위한 또다른 약속으로
군대를 출동시킨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정부가 마비상태가 된 후 학생들은
북경거리를 점령하고 그들의 시위가 범국자적 운동으로 확산되자, 군대들이 이곳 북경
중심지에 운집해 있는 시위대에 대항해 밀어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군대가 수
시간 전에 이미 진군을 시작했지만 아직 이 곳엔 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북경은 토요일 아침입니다. 정부를 전복시킬지도 모를
시위대의 단식투쟁이 시작된 지 2주일이 지났습니다. 현재 광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시위대는 이제 곧 군대가 들어오고, 그러면 자신들은 쫓겨나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장은 다시 지지자들로 기운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굶주린 시위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대가 좌정되면 추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또다시 정부는 제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한 낙관주의는 얼마동안 만연했다. 그러나 래더가 생방송 뉴스를 끝내고 몇
시간도 채 안 되어서, 정부는 드디어 첫번째 행동을 개시했다. 래더와 베타크, 그리고
CBS 팀은 군대 헬리콥터가 도착했을 때 아직 낡은 도요타 트럭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정찰을 하기 위해 헬기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저 먼곳에서부터 헬기가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트남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헬기는 시야에
나타나기 전부터 소리를 내고 다가왔던 것입니다)
(헬기를 보는 순간,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내몰리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에는 설마 그러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헬기가 나타난 순간, 이건
확실히 시간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그래 그들은 기총소사를 하고
돌격부대를 내려보낼 것이고 최루탄을 쏠 것이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끼리도 여러번 얘기한 바 있었습니다. 실제 전투
상황에서 그런 일을 겪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래더 자신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잠시 동안이나마 해군에 입대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팀들에게, 만일 최루탄이 발사되면 지하철로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가스는 지하로는 통과하지 못할 테니까. 공포의 분위기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해야만 했습니다. 담벽에 가까이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대규모 군중틈에
섞여 있을 때는 발에 밟힐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우린 진작부터 이런 문제를
관해 얘길 나눴지만 지금 또 점검해 봐야 할 일도 있었습니다. 팀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장비는? 지하철까지는 어떻게 가는가? 이런 것들은 너누나도
드라마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위장한 군용 헬리콥터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두려워 해야 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헬기는 광장을 몇 바퀴 선회한 후 영웅 기념탑을 지나 군중들에게 겁주는
것처럼 낮게 내렸다가 다시 떠올랐다가 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그들이 우리 방송을 차단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헬기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결국 방송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자 방송 시스템을
상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래더와 그의 팀은 도요타에서 내려 천안문 광장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 일본제 트럭은 화면과 음성을 마이크로 웨이브를 통해 근처
호텔의 꼭대기에 있는 접시로 보내고, 다시 베이스캠프인 샹그릴라호텔에 설치된
위성 접시까지 닿지 못하면 생방송으로는 아무것도 중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광장에 있는 래더와 그이 팀에게 있어서 처음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은
샹그릴라호텔과의 화면 전달이 끊어졌을 때였다. 누군가가 마이크로 웨이브
연결장치를 제거해 버린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성 전달도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베이스캠프와의 연결이 전단되고 나자, 래더와 그의 팀이 봉착하게 된 문제는 과연
비디오 녹화만을 위해서라도 머무를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 순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그림을 찍어도 가져갈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언제 군대가 광자으로 밀어닥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CBS 팀은 현장을 촬영하는
것만은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테이프는 자전거 심부름꾼을 통해 호텔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곳곳에 거리통제와 검문이 있어서 호텔까지 가는 것도 너무나
멀고 험한 길이었다. 또한 지상군이 광장으로 들어왔다 하면 바로 그쪽 방향에서 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래더와 베타크는 머리를 짜냈다. 래더가 말했다.
(상황이 지금 이렇습니다. 이젠 모두 시간문제이거든요.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경주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곳을 봉쇄하고나서 언제 샹그릴라를 봉쇄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비디오 테이프가 본국까지 잘
전달되리라는 확신도 없고 화면 전달도 안 되고 음성전달도 안 되고 셀방식 전화도
작동되지 않고. 샹그릴라와는 전혀 연결링 되지 않고 있어요)
비록 북경 시내에서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지만 아이러니켈하게도 베타크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셀방식 전화로 미국과 통화했었다. 웨스트체스터의 집에 있는 CBS의
보도이사 데이빗 벌크와 베타크와늬 통화가 바로 그 전화로 가능했던 것이다.
베타크는 간결하게 몇 마디로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어서 특집방송을
해야만 하겠다고 벌크 이사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작 전화가 필요한
이 순간에 전화가 불통이라니!
시위 학생들, 군중과 군대를 헤치고 샹그릴라까지 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래더와 베타크는 마지막 비디오 테이프 화면을 쏘아 보내기로 하고,
어서 그곳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래더와 베타크, 그리고 몇 명의 제작요원은 곧 자동차에 올라 샹그릴라로 향했다.
한 두번씩 셀방식 전화가 겨우 작동되는 듯해서 베타크는 아주 짧은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잘해 봐야 스케치 정도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밴의 운전기사는 어떤 지방의 노동자였는데, CBS 요원들은 아무리 애를써도 그의
이름이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 한마디도 모르면서 일찍이 CBS 팀들과
유대관계를 단단히 해놓았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단 한마디,
"Hunter(사냥꾼)"이란 영어 한 마디를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이 단어는
그가 즐겨 보던 경찰 액션 드라마의 제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 기사는 TV 장비들을 쳐다보며 씩 웃으며, "아! 헌터!"라고 말했었다.
이제 탱크는 가까이 다가오고 거리의 곳곳엔 군대와 검문소가 있는데, 래더와
베타크는 호텔로 바로 테이프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그들은 속보를
넘겨 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엄지 손가락을 세워
자기를 가리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헌터!" 자동차 추적을 하는
능숙한 스턴트맨처럼 그는 최고의 속도로 학생들과 군대를 가르며 달렸다. 코너를
돌고 군중을 헤치며 골목길로 내달았다. 절반은 통제 불능상태에서 골목길을 24km로
달리다 그만 자전거를 탄 시민과 충돌하고 말았다. 자전거와 사람이 날아갔다.
그러나 다행히 자전거만 박살이 났다. 취재팀은 그를 살펴주고 다시 호텔로 달렸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서커스 단원들이 고물더미에서 떨어지듯 그가
운전하는 밴에서 탈출했습니다)
래더가 말했다.
샹그릴라 호텔 밖에는 군인들이 벌써 주둔해 있었다. 특별한 명령이 있었던 같지는
않은데, 여러 무리가 총을 메고 모여 있어 불길한 분위기를 풍겼다. 래더, 베타크,
그리고 광장에서 온 방송요원들은 기본 방송 세트가 설치돼 있는 파고다공원으로
들어가 CBS 직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엔 단 한 사람도 찾아볼수 없었다. 정말
그곳엔 사람은커녕 카메라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최악의 상태가 올 것을 염려하며 그들은 호텔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복도를 달려
코너를 돌았을 때 그들은 참으로 기괴한, 기상천외한 장면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희미한 불이 켜 있는 5층 마루에는 장비를 가득 쌓아 놓은 무더기가 있었다.
그 부더기 한가운데, 재기에 넘치고 낭랑한 목소리의 토실토실한 특집 담당 레인
베나도스가 거북하게 구는 젊은 중국 관리 두 명과 장황한 끝도 없는 얘기를 하느라
잡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베나도스가 말했다. (우린 외무부에서 아무말도 듣지 못했어요. 우린 새벽
1시까진 방송하도록 정식 허가를 받았단 말입니다)
아래쪽 홀에는 수잔 스펜서가 문 밖에서 이 믿지 못할 장면에 복소리를 입히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통제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보도통제를 가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위성 송신은 금지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펜서가 계속 말했다.
(그들의 이론적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전세계가 갖고 있는 시각에 몹시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묘하게 속이기 작전을 펴가면서 베나도스가 중국관리들에게 물었다.
(신분증은 있나요? 제 말은 아무나 이곳에 들어온다면 내가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위성 장치를 끊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 수잔 스펜서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시청자들에게 보도했다.
(CCTV에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 조정실에 들어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우리
리시버를 끊어 버렸다는 얘기를 방금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방송이 중단된다
해도 그 이유는 분명할 것입니다...)
이런 드라마 같은 장면은 실제로 모두 생방송으로 낱낱이 전달됐다. 나중에 래더가
표현한 것처럼 "부조리극의 장면 그 이상"이었다.
(레인은 누군가, 아니 누구든지 그곳에 올때까지 보루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래더가 말했다. 베나도스는 이렇게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본능적으로 그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댄이 돌아올 때까지
얘기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우려와 격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나보다
댄이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코너를 돌자 래더와 베타크는 그들이 이미 이 협상의 한가운데 처해 있음을, 그리고
이 상황은 바로 이 순간 생방송으로 보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고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래더는 지체없이 이 무리에 끼어들어 중국관리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순간 카메라 위치를 확인했다. 생방송에는 도가 튼 래더였지만 처음엔
생방송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카메라가 단지 녹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참 기이한 일이었다. 레인 베나도스는 앵커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 위해
요점을 간략히 되풀이해 말했다.
(이 신사분들은 방송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오셨답니다. 우리가 중국
외무부와 합의한 사항은 일요일 아침 1시까지 유효한 것으로 돼 있는데 말입니다)
잠시 숨을 내쉰 래더가 말했다.
(우리 동료와 인사하지요. 지금은 아주 난처한 상황이라서, 그쪽이나 우리에게 모두
곤란하게 됐습니다)
지난 열 번에 걸친 중국 원동지역 방문에서 배운 예절에 따라 그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말했다. 불길한 헬기의 출동과 광장에서 숨막혔던 25분간의 여정을 요약했다.
그가 거리의 현장을 묘사할 때(계엄령, 트럭을 에워싸고 있는 학생들, 군인에게 꽃을
던지는 학생들...) 강력한 빛이 커졌다. 그 빛은 래더를 비추고 그의 푸른색 폴로
셔츠와 사파리 자켓을 비췄다. 베타크는 (생방송이에요) 하는 표시를 해보였다.
미국 전 지역으로 밝은 빨강색의 "CBS 뉴스특보"라는 글씨가 각 가정의 안방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없는 논쟁은 갑자기 CBS의 금요일 저녁 10시
인기 드라마 "달라스" 한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J.R을 보려던 시청자들은 갑자기 더
세속적이고 더 신비스러운 장면(즉 방송을 할 권리)을 주장하면서 두 명의 중국
관리들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댄 래더 앵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를 놓고 위압적인 정부와 기자가 대치하는 고전적인 한판 승부였다.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이 장면은 기록적으로 30분이나 계속됐다. 외부와의 유일한
통신선을 열어놓기 위해 래더는 그의 불독같은 저돌성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렇다고 손을 들지도 않으면서 그는 중국 관료들을
견제했다.
(거의 모든 교차로마다 군중들로 가득찼습니다)
래더는 손에 쥔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군대도 엄청난 저항에 맞부딪쳐 있었지만 우리 방송이 플러그를 뽑는데는 저항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CBS 뉴스의 자문역인 중국인 소설가 베트 바오 씨 쪽으로 돌아섰다.
(제 말을 따르기가 힘드시다면 우리 모습을 기꺼이 보여 드리겠습니다)
톰 베타크가 래더를 조정실로 걸어 들어가게 하려고 다가왔다. 그래야만 그들이
찍은 화면을 가능한 많이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두 명의 중국 관리들로부터
몇 발짝 떨어졌을 때 래더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뒤얽힌 정중함으로 그러나 아주
독특하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우리 방송을 끊으러 이곳에 오신 두 중국 관리에게...)
몇 분 후, 네 번째 특보가 나가고 있을 때 래더와 두 명의 관리는 그릴라호텔 밖에
있는 CBS의 거대한 위성 접시 옆에 서 있었다. 이제 논쟁은 CBS의 계약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앵커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앞서의 계약을 파기할 만한 공식적인
문서를 제시해 달라고 중국 측에 요청했다.
좀 이상스런 상황이지만 래더는 중국인들과 좀더 구체적인 얘길 하자고 타협했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이 협상의 내용을 하나하나 불렀다.
(우리는 신의로써 작업해왔다) 중국인들과 이렇게 말한 후 몸을 돌려 시청자를 향해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나라 전체에 권위를 행사하려는 등소평과 이붕의 배경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의 취재를 방해하려는 넋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들은 천안문 광장에서도 치재를 막았었는데 이제 이곳에서 또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계약을 보고 싶어 합니다)
자문역이 래더에게 말해 주었다.
(이것이 텔렉스로 확인받은 계약입니다) 하면서 래더는 손에 쥐고 있는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중국인들이 한마디 하면 베트 바오씨가 번역해 주었다.
(그들이 꼭 우리의 전송작업을 막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필름으로 찍으면 그들이 우리 대신
전송을 해주겠다는 얘기지요)
그것은 바로 중국정부가 방송에 대한 견제를 효과적으로 하겠다는 뜻임을 알고
래더는 잠시 미소를 띄우곤 계속했다.
(베트, 우리가 이 날의 손님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존중합니다. 우리는 그 정부 또한 존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문서계약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부와 문서로 계약한 것이 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바라옵건대, 문서로서 남겨주시기 전엔 제가 편안하게 방송을 끝낼 수 없다는 걸 좀
알아 주셔야겠습니다)
한낮의 햇살을 받고 야외에서 래더와 중국인들은 천천히 협상을 계속했다. 그
어느쪽도 한 치의 진전도, 양보도 없었다.
(전 가능한 한 강력하게 항거할 겁니다. 특히 우리의 합의를 깰 어떤 문서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래더는 통역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비디오물이 전송되었다. 그 화면은 폭동의 맨 처음 모습이었다.
시위 군중들이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는 모습과, 얼국과 손이 온통 피투성이인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래더가 카메라 앞에 섰다.
(정부는 외국 기자들에게 새로운 지침을 시달했습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에 해가
되는 보도는 어떤 것이든 허락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는 보도의 끝부분에서 아주 불길하게 선언했다.
(이제 이 신사분들이 우리 방송을 끊으려는 순간입니다)
그날 밤, 다섯번째 리포트가 나왔을 때 톰 베타크는 래더에게 사인을 주며 이
드라마가 새로운, 그러나 마지막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렸다.
(CBS의 경영진으로부터 제가 받은 지시는 당신들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래더가 분명하게 유감의 표시를 하며 관리들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 동료에게 명령을 내리면 그는 일을 끝낼 것입니다)
카메라 쪽으로 다시 돌아서서 래더는 비디오 테이프의 마지막을 고했다. 그의
특징적인 목소리, 반은 아주 난감하게, 반은 아주 비탄스럽게 끝을 장식했다.
(이것은 엄청난 소요속에 휘말린 북경사태의 마지막 화면입니다. 이 화면은
저희들이 우리 기재로 보내들리 수 있는 것으로는 마지막 장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보여드릴 수 있게 된다 해도 그것이 언제가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북경에서 CBS 뉴스 댄 래더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위성 조정을 하고 있는 중장비 기사쪽으로 몸을 돌렸다.
엔지니어가 스위치를 껐다. 스크린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샹그릴라로부터의 위성송신을 단절시키긴 했지만 쇼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래더와 제작팀은 천안문 광장으로 다시 향했다. 다음은
그가 말하려는 내용이다.
(계엄령이 선포된 바로 그날 밤, 그날밤은 중국 정부가 군대의 광장 진입을
명령한 후였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행동은 북경 시민들의 반대에 의해서 좌절되고
굴복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카메라를 천안문 광장으로 가져가려 했습니다. 새벽
1시,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한 운전기사는 모는 차에 우리 일행은 모두 구겨
탔습니다. 정부가 통행금지를 선포했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끌고 나와 타이어의 바람을 모두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드레일이나 도로의
포장도 모두 뜯어 길로 끌고 니왔습니다. 우리가 도착하는 교차로마다 탱크가 오는
것을 막으려는 듯 수백만 인파와 수천만 대의 자전거가 정렬을 해 있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민들이 우리차를 에워쌌습니다. 운전기사가 우리는 미국
언론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Meiguo)
군중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였습니다.
(좋아요, 찰리) 이윽고 자전거의 물결이 갈라지며 움직일 틈을 내주었습니다. 다음
교차로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Meiguo, 박수. 우리 카메라맨이 광장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어이가 없어 처음엔 말도 못했습니다.
(어디서 왔지요?)
(Meiguo(미국))
미소.
(이 곳에 온 것은 불법이 아닙니까?)
(그럼 당신이 이 곳에 있는 것도 불법입니까?)
또 한번 미소.
(외국 기자들은 모두 국외로 추방되었다고 들었어요!)
(아니에요. 우린 쫓겨나지 않았어요)
(단지 이곳에서 방송할 수 없을 뿐. 그러나 홍콩이나 도쿄로 테이프를 수송하면
그곳에서 방송할 수 있어요)
활짝 웃음.
(당신들이 여기 계시다니, 참 기쁩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비록 그들중에는 다음날 저녁, 밀려드는 탱크 바퀴에 깔려 피흘리며
죽게 될 학생도 있을 수 있고, 광장 북쪽 경계에서 진격해오는 군대의 총탄에 맞아
숨질 학생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댄 래더와 CBS 취재팀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영웅적인 죽음과 정치적 변혁을 갈망하는
순수한 이상적인 메시지는 온 세계에 번져갔다. 동유럽부터 니카라과까지 큰 반향을
전달해 주었다. 드라마 "달라스"보다 더 큰 영향력이나 수익성 있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것 만큼의 영향력은 충분히 있었으리라 믿는다.@ff
12. ABC의 상하구조
6월 하순의 어느날, 오후 5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ABC의 조정실엔 "World News
Tonight"의 디렉터 하인즈가 산성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네드
포터가 보내온 4분짜리 환경문제 보도물은 인터뷰와 위성그림, 그리고 복잡한 삽화로
혼합된 아주 골치아픈 내용이어서, 하인즈는 이것이 한참 후에나 나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을 손질하느라 분주했다.
(부드러운 흰색으로 아래위를 칠 수 없을까?)
그는 인터컴을 통해 페인트 박스(Paint Box: 비디오 화면을 전자적으로 변화시킬때
쓰이는 장치의 상표이름) 편집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요술처럼 그의 앞에 있는
모니터에 나타난 위성그림에 흰 테두리가 생기면서 마치 사진처럼 바뀌었다.
(좋아요, 근사하군)
체격이 크고 흰머리에 흰 콧수염이 난 찰리 하인즈는 얼굴에 붉은기가 돌고
편안하게 배가 나온 사교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약간 아저씨같고 전적으로
신뢰성이 있어 보여서, TWA 대륙간 항공의 조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은 맑게
빛나고 그의 태도는 조용하고 안온했다. 그는 얘기하길 즐겼고, 그가 말하는 것엔
활력과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깔끔한 양말은 겉모습에 숨겨진 어떤 화려한 면도
드러내 보여 주고 있었다.
위쪽 모니터에 포터 기자가 죽어가는 나무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찰리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무엇이 죽어기고 있는지 내가 말해 줄까? 회사식당에 있는 모든 것)
그러자 그의 뒷줄에 앉아있던 젊은 제작 보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퀴벌레만 빼놓고 모든 것)
한 옆에서 농담을 해가면서도 조명이 어두운 ABC의 조정실은 조용하고 잘 정돈된
최첨단 장비를 갖춘 방이었다. 첨단장비와 번쩍이는 불빛, 수많은 다이얼들,
크롬으로 가득찬 항공 관제탑이나 스타 트랙에 나오는 총사령관실을 연상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차리 하인즈는 여러가지 크기의 모니터 50개가 각기 다른 표시를 붙이고
운집해 있는 벽을 마주하고 있다. 그의 바로 앞에 있는 대형 모니터는 "라인"
모니터로서 가정에 있는 시청자가 보는 화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왼쪽에는
"Preview"라고 쓰여있는 스크린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에 송출될 화면을 미리 잡고
있다. 이것이 Video on_deckcircle이다. ABC의 경쟁사들이 지금 무얼 내보내고
있는가를보여주는 모니터도 있다. 또 워싱턴과 뉴욕간 광섬유 라인도 있고 크레딧과
카이론스(Chyrons: 카이론 기계에 의해 캡션을 달 때 쓰이는 장치)만을 위한
모니터도 있다. 그리고 벽 꼭대기에는 52, 53, 54, 55, 56, 57이라고 숫자가 매겨진
화면이 있는데 이것들은 조정실과 지하실에 있는 6개의 중요한 테이프 기계와 연결돼
있다.
조정실 바로 뒤에 유리로 완전히 차단된 곳은 오디오 룸이다. 이곳은 최첨단
음성장비로 가득 찬 작은 공간이다. 그 안에는 두 명의 방송요원이 피자를 먹으며
노닥거리고 있다. 뉴스 프로그램은 24분간 계속되는데 이 친구들은 늘 먹기만 하는 듯
계속해서 피자를 먹고 있다.
10개 테이프 중 9개는 5시 45분부터 방송시작 시간인 6시 30분까지 도착하지
않거나, 심지어 6시 30분 이후에도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인즈는 이렇게 말한다.
(가능한 한 최근의 얘기를 내보내려고 하다 보니 마감시간도 방송시간에 가능한
한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기자들은 매번 우리를 더욱더 조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물론 매일은 아니지만 첫번째 소식과 하나 정도 더 와 있는 상태로 방송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3개 보도물 정도는 아직 이곳 뉴욕에 도착하지 않은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뉴욕에 도착했어도 작업이 더 필요할 때가 많지요. 좀더
잘라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픽을 빼내야 하는 경우, 자료 보관소에서 좀더
첨가해야 할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실 사건의 앞부분은 이미 방송되고 있는 순간에도
뒷부분 보도물은 아직 테이프룸에 도착하지 않아 애를 태우는 일도 아주 없진
않습니다)
조정실 전체에 있는 전화기들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찰리가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든다.
(거 누구시요?)
그는 모니터 꼭대기에 붙어있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6시 13분 41초다. 찰리는
스티로폴 컵에 담긴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한 젊은 여성이 그에게 묻는다.
(활자를 바꿀 건가요?)
(모든 걸 바꾸고 있는 겁니다)
찰리가 대답했다.
그의 바로 앞 화면에 얼굴이 나타난다. 그 얼굴은 마치 떠돌이 예술가의 모습과
같다. 실제로 그 얼굴은 가수협회의 회장 폴 빌저리언으로 판명됐다. 정부는 그를
사기혐의로 구속했다. "빌 저리 언"하고 보조 제작자가 Chyron 오퍼레이터인
바네사에게 이름 철자를 하나씩 불러준다. 그녀는 이름표 글자를 쳐서 얼굴 밑에
나타나게 한다.
글자가 나온 시각은 6시 6분. 순서가 늘어지고 있다. 길이가 좀 긴 편인
남아프리카 보도물은 잘라내야만 했다.겨우 13분을 남겨놓고 기자들이 하루종일 뛰어
만든 주요 뉴스가 한순간에 삭제된다. (남아프리카는 뺐고, 가정 판매하고 인종 분규도
뺍시다) 하고 하인즈가 지시한다.
갑자기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잡고 일에 몰두한다. 마치
우주선 발사 장면인 것처럼, 비상할 준비가 된 새처럼, 잡담도 사라지고 엄숙해졌다.
찰리의 오른쪽에 있는 AD가 시간을 재고 있다.
(3분 반 남았습니다)
찰리의 왼쪽에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기술 감독 개리 보야르스키는 말없이
다이얼을 돌리고 있다. 그 분야의 일에서는 흔치않게 헤드셋(마이크 달린 헤드폰)을
쓰지 않는 차리는 앞에 있는 콘솔을 내려다 보았다. 이것은 방송 커뮤니케이션의
신경 중심이다. 이곳으로부터 찰리는, 예를들어, 폴 프리드만 차장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카메라맨 모리스 만이나 스테이지 디렉터 톰 킹이 할 말이 있을 때도
전달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앵커 마이크가 살아있지 않을 때는 피터 제닝스와도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인해 어떤 것이 누구
목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많으면 여섯 사람의 목소리까지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곤두세우기 때문이지요)
라인 모니터를 비롯한 수많은 스크린이 붙어있는 벽에 제닝스가 마지막 분장을
매만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톰 킹이 그가 옷저고리를 입는 것을 도와 주고 있다.
앵커는 그의 저녁뉴스 원고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무아지경인 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피터, 수고 많으십니다)
연결 상태를 점검하며 찰리가 부드럽게 이사한다. 피터는 넥타이를 다시 한번
펴고 마이크를 조절한다. 마이크의 줄은 저고리 속으로 해서 아래쪽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여러분 수고가 많으십니다)
폴 프리드만 차장이 들어와 둘째줄에 있는 그의 자리에 앉는다. 그는 앞쪽으로
몸을 숙여 라인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피터가 초조하게 입을 크게 벌려 본다. 다시
넥타이를 매만졌다. 다시 하품하듯 입을 크게 벌린다. 폴 프리드만과 두 명의
프로듀서 밥 로이와 데니스 던라비도 하품을 한다.
(밀트 기자의 IFB(Interruptible Feedback) 레벨이 약간 낮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4분의 1만 높여요) 찰리가 말했다.
그들은 밀트 와이스의 IFB 볼륨을 조절했다. 피터의 작가는 그의 왼쪽에, 바로
카메라에서 벗어난 자리에 앉아 있다. AD의 소리가 들인다.
(10, 9, 8, 7, 6, 5, 4, 3, 2, 1. 들어갔습니다)
프로그램의 로고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아나운서 목소리가 나온다.
(From ABC, this is "World News Tonight" with Peter Jennings)
위층 스튜디에 있는 카메라 3 뒤에 있는 카메라맨 모리스 만은 시청자에게 ABC의
뉴욕 뉴스룸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간결하게 그린 세계지도, 컴퓨터,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 그리고는 재빨리 데스크 위로 6피트 정도 모습을 드러낸 앵커에게로
줌 인 한다. 미국 전 지역에서 약 1200만 명의 시청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오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피터 제닝스가 무어라고 말할 것이가를 경청한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녁뉴스는 "정치와 돈"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코미디언 윌 로저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5초 후, 그는 (ABC 뉴스의 브릿 흄이 보도합니다)로 오프닝을 마무리했다.
(커트)
찰리가 지시하자 기술감독 보야르스키가 단추를 누른다. 제닝스의 얼굴이 백악관에
연결된 브릿 흄 기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대통령은 정치적 활동에 부패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중단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예비 화면 모니터에는 피터가 초조하게 하품을 하고 있다. 그는 새끼 손가락을
입에 물고 흄의 보도를 듣고 있다.
폴 프리드만의 비서인 금발의 미녀 진 블레이크가, 그녀가 제출할 스크립을 팔에
한가득 들고 조정실로 들어와 나눠준다. 시간은 벌써 방송이 시작되고도 2분 7초가
지났는데, 이제 마지막 스크립을 쓰고 있다니!
라인 모니터에서 피터가 구회의사당에서 코키 로버츠가 보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코키 기자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옷자락에 공화당 하원이 휩쓸린 지도 35년이 지났습니다)
그녀가 선거법의 개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바쁘게 스크립을 보고 있던 피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한다.
(찰리, 다음 페이지는 "윤리"라는 단어로 끝납니다)
(알았습니다)
하인즈는 냉큼, 그러나 담담하게 대답했다. 폴 프리드만이 가지고 있는 스크립은
이미 구문이 된 것이다. 하이즈는 프로그램이 길어지지도 짧아지지도 않게 하느라
다시 시간을 조정한다. 이것은 제작자의 임무이다. 이는 초를 쪼개 곡예처럼 돌리는
일로서, 이일은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한 가지 요소라도
(예를들어 비디오나 사운드 비트, 그래픽, 특파원과의 생방연결 등) 잘못된 기계나
잘못된 층, 다른 도시에서 가동된다면 모든 것은 비상하려는 순간에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동료들은 이 막중한 디렉터를 카우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침착하게 대처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선에서 이탈하면 그 영향은
전체로 퍼집니다)
잠시 틈이 난 하인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만회할 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짧다는 절박함입니다. 언제나 또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컷!)
찰리가 지시한다. 화면에 피터가 나와 몇 가지 외신을 소개한다. 첫 번째 것은
딘 레이놀즈 기자가 전하는 1분 15초짜리로, 8명의 팔레스타인이 추가로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다시 피터가 나와 말한다.
(지구의 또 다른 곳. 남아프리카의 여당 지도자가 자국 역사의 새장을 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국민들이 오늘 제한적이나마 다수 민족 흑인들과 권력을 나누겠다는
내용의 5개년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는 흑인들에게 정치적 역할을 부여하게 될
새로운 헌법 제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수 통치를 반대하고,
반대자들은 이 제안이 "옛 도그마에다 새 이름표를 붙인것"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독일의 10대와 피임 실태를 살펴봄으로써 미국인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가해 보겠습니다)
조정실의 폴 프리드만이 화가 나서 자기 주면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의 말을
털어 놓았다.
(그냥 "또다른 곳"이라고 말하면, 이번 남아프리카 얘기하고 이스라엘 하고의
계속적인 연관을 떨어버리지 못하는 것 아닌가?)
IFB를 통해 프리드만의 소리를 들은 앵커가 말했다.
(맞아, "내가 또 다른 곳"이라고 말했지)
(신경쓰지 마세요, 피터. 우리가 떠드는 말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프리드만이 다시 말했다.
피터는 불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6시 55분, 마지막 리포터가 소개된다. 이것은 캘리포니아의 보디라고 불리는
광산촌이었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유령이야기로, ABC의 찰스 머피 기자가 보도했다.
이것은 마치 그곳에서 광산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유령을 쫓아내려는 얘기처럼
들렸다. 새로 시작된 채광작업에 놀라 유령도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그렇게 말한
특파원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유령의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캘리포니아의 보디에서, ABC 뉴스 찰스 머피였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는 아마 돌아올 겁니다) 하고 피터가 미소를 지으며 애드립으로
처리한다.
끝나는 자막이 나오자 조정실은 (피터 제닝스와 함께, ABC 오늘의
세계뉴스였습니다) 하는 아나운서 멘트가 울려 퍼졌다. 방송은 28분 26초에 끝났다.
지방국이 1분짜리 광고를 내기 전까지 아주 정확한 시간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피터는 앵커 데스크에 있는 전화를 잡아채듯 들고 프리드만과
얘기하고 있다. 프리드만은 7시에 나갈 두번째 신호에서는 12페이지를 다시 해서,
피터가 USS 아이오스와 스토리 도입 부분에서 실수한 데를 고치자고 말했다.
제닝스를 놀리며 이렇게 말한다.
(앵커가 틀리지 않고 읽었으면 안해도 되는 일이지요)
7시 3분, 두 번째 신호가 돌아갈 때 그들은 조정실에서 CBS 뉴스를 보고 있었다.
밥 로이 프로듀서가 프리드만 쪽으로 기대앉아 있다.
(CBS가 부채 관계 보도를 꼭대기로 올렸다니 아주 흥미로운데요)
7시 5분, 프리드만은 전화를 받고 이렇게 발표했다.
(마르코스사 다시 수술에 들어갔다는군)
로이가 말한다.
프리드만은 L.A 지국이 부고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뉴스 처리는 할 수 있어도 부고 처리는 안되지요)
데니스 던라비가 말한다.
프리드만은 L.A로 전화해 축출된 필리핀의 대통령의 사망이 임박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죽으면 이 사건을 처리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까? 특파원은 있구요?)
게리 셰퍼드가 가능하다고 한다. 하인즈는 말한다.
(페르디난드가 죽으면, 서해안 쪽에 보낸 방송분에는 한 페이지 녹화했으면
좋겠는데...) 피터가 대답했다.
(좋아요, 자 시작합시다)
몇 주 후였다. 하버드 졸업생이며, TV 뉴스의 보조 디렉터를 끝마친 학자 같은
외모의 롭 패툴로가 ABC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뉴스룸을 지나 그의 대장인 전설적 이물 차리 하인즈가 있는 조정실을 지나,
건물의 아래쪽 지하실로 내려갔다. C층에서 내린 패툴로는 테이프 룸으로 향했다.
그는 "테이프1"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데다가 시끄럽고 연기는 자욱하고, 창문도
없는 공간인 이 방에는 6개의 비디오 테이프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모니터들은
모두 켜져 있었다. 안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스크린만 쳐다보면서 다이얼을 움직이고 있었고, 또다른 몇몇은
목청을 한껏 높여 소리지르며 왔다갔다 하고 있는 모습이엇다. 이곳 아래층에서부터
저녁뉴스의 80p가 만들어져 조정실로 올라가 미국 전역으로 송출되는 것이다.
위층에 있는 군상들이 대체로 표백된 듯 깔끔하고 상향지향의 집단이라면 이곳
아래층 3등칸에 있는 자들은 좀더 잡동사니 주머니 같은 느낌을 준다. 젊고 진지한
패툴로말고도 이 테이프1의 잘 통제된 혼란을 총괄 지휘하는 일을 맡은 사람은
오퍼레이션 프로듀서 에이미 캇츠다.
캇츠는 검은 머리칼에 야윈 얼굴을 해서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느낌을 주는 열광적인
여성이다. 프린트가 된 긴 드레스를 입고 여러가지 색깔의 구슬이 엮인 보헤미안식의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앉아 있으면서도 불꽃을 튀기는 듯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연결된 동작으로 전화를 걸고 비디오 테이프를 박동시키고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한 치의 실수도 없다. 그런가 하면 약간 건달 같은 태도의 편집자들도
있다. 올리브 같은 피부의 바비는 운동화에 초록색 캐쥬얼 티셔츠를 입고 목에는
금목걸이, 귀에는 귀걸이를 박아 놨고 콧수염을 길렀다. 모집이 큰 폴은 바지 속에는
"폴" 만으로도 더이상 여유가 없어서 셔츠를 바지 위로 꺼내 입고 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레이몬드는 후추가 선전의 튜바를 불었음직한 모습이었다.
패툴로는 51번, 52번 기계에서 폴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한 시간 내에 방송에
나가야 할 "깨끗한 공기"에 관한 긴 보도물을 제작하고 있다.
"World News Tonight"
프로그램은 특히 환겨문제를 논의하는 데 앞장서 왔고, 이런 낸용은 보통
"American Agenda" 코너에서 소하해 왔다. 이번 것 역시, 차리 하인즈가 약주 전에도
작업했던 네드 포터의 보도물이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밤까지 여러가지 부분들을 잘 조합해내지 못하면 이것은 또 기약없이 훗날의
보도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지금 패툴로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오늘밤 내지 못하면 자살해 버리고 말테다) 하고 단언한다.
52번 모니터에 수술 가운과 마스크를 한 모습이 나타나더니 이어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의사들은 1년에 5만 명의 미국이들이 매연 때문에 미처 수명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맑은 공기 법안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방안에 가득찬 담배 연기가 그의 말이 더욱 심각하게 들리게 한다.
패툴리는 말한다.
(옛날 것보다는 훨씬 낫군)
그느 또다른 편집자 왈리에게 편집을 점검해 달라고 부탁한다.
(카렌!)
캇츠는 벨이 울리는 수화기를 들면서 방 저편을 향해 소리친다.
(워싱턴 그림이 3번으로 들어옵니다)
다른 쪽 구석에서 작업하고 있던 보조 프로듀서 카렌 주커가
(뭐라구요?) 하고 소리친다.
(날더러 직접 하란 말이지?)
캇츠가 되받아치고는 자기가 직접 그림을 받는다.
패툴로가 소리친다.
(왈리, 편집작업 어떻게 됐어?)
왈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 6시 30분 뉴스에 사용될 취재물의 순서를 잡은 라인 업은 지금까지 약 세 번
정도 바뀌어 짜여진다. 그러나 이 라인 업에는 언제든지 극적인 변경이 있을 수 있다.
(항목별 개요는 편리한 소설쯤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패툴로의 말이다. 오후 2시
44분에 나온 마지막 판에는 짧은 제목 목록과 시간, 담당 기자 이름, 그리고 발생장소
등이 적혀 있다. 오늘 뉴스는 워싱턴 것이나 뉴욕 것 모두 꽉 차 있고, 영국의 길고도
더운 여름도 프로그램의 말미를 장식할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밤에는 베티나 그레고리가 전하는 아이오와 주의 수(Sioux) 시티에서 발생한
유나이티드 DC_10 기의 추락사고 소식이 첫 뉴스가 될 예정이다. 그 다음에
워싱턴에서 맥워시 기자가 1분 45초 동안 펠릭스 블로흐 간첩사건의 속보를 전하고,
국방성을 출입하는 밥 젤닉 기자가 1분 15초 동안, 그리고 의회에서 짐 우텐 기자의
보도가 이어질 계획이다. 게리 셰퍼드 기자가 엑슨 발데즈 사태를 전하고, 알 데일이
테네시에 있는 닛산 단지의 전미 자동차노동조합(UAW) 투표에 관한 보도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로우면 "American Agenda" 코너에서 네드 포터의 보도가 나갈
것 같다. 전체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가벼운 보도물로는 영국의 이상기온 뜨거운
여름이 준비되어 있다.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다.
복잡한 것을 좀 덜기 위해 폴 프리드만은 에이미 캇츠를 불러 로렌스의 영국 열파를
잘라내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이미 영국에 연락해 "처리"하겠다는
것을 알렸고, 캇츠가 원한다면 두 컷트 정도는 쓸 예정이다.
(완전히 다 들어낼까요? 좋아요, 좋아)
이렇게 말하고는 전하기를 꽝 내려 놓는다.
이제 겨우 5시 50분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는 시간이다. 40분이나 되는 넉넉한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정말 날아다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54번은 내가 좀 써야겠어요)
롭 패툴로가 작업하고 있는 두 대의 기계 옆에서 캇츠가 말했다.
(바빠요, 바비)
그녀는 초록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에게 재촉했다.
(대장이 전화했어요. 여기서 두 장면만 잘라내래요)
한 번의 유연한 움직임으로 바비는 54번 기계에 테이프를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담배를 끌어당겨 집으면서 그는 모니터를 쳐다봤다. 그의 머리 위에는 "금연"이라는
표지가 벽에 붙어 있다.
(이게 영국이랄 수가 있을까? 차고, 회색빛으로 음습한, 안개낀 영국이 지금 이렇단
말이지? 자연의 실수로 따뜻하고 태양이 비치는 열대 기후의 영국이 되었다? 13년 만에
가장 뜨거운 영국의 여름...)
캇츠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손에 들은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고 있다. 52, 56, 57번
편집기 앞에도 다른 손들이 스톱워치를 들고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 아래층엔 깨끗한
공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벨몬트의 아침과 다를 바 없다. 그녀는 다시
말한다.
(바비 나 좀 도와줘요. 그 첫 번째 나온 여자로 돌아가서요, 그 수영복 입은 여자)
그가 다이얼을 돌리자, 스크린의 수영복 입은 여자가 뒤로 달렸다. 에이미는 수영복
입은 여자부터 8초를 잘라내고 다른 곳에서 16초를 더 끊어냈다.
(그래서 8과 16)
확실히 하기 위해 숫자를 써 넣는다.
(24초. 2분 1초 대신)
그녀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위층에 있는 프리드만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폴? 에이미에요)
(아주 잘 되었는데!) 이제서야 포터의 취재물에 만족한 패툴로가 소리쳤다. 그
자신도 이 골치덩어리가 오늘 저녁에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었다. 캇츠가
전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가 말한다.
(내 일은 끝났어요. 이제 53번 기계에서 더빙할 거예요)
그는 이미 포터 것 복사분 두 개를 갖고 있는데, 아주 안심하기 위해 한 개를 더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얘기에 모든 사람이 투자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있는 후였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것도 차질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방송시간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을 때였다. 두 가지 문제가 새로 생겼다.
아틀란트로부터의 위성 신호는 엄청나게 심한 잡음이 섞여 나오고 있었고,
알래스카의 발데즈로부터는 아예 위성이 열리지도 않았다. 캇츠는 성급히 발데즈에게
전화했다.
(내가 위성 중계실에 전화하지)
하고 말한 패툴로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친다. ("지금 알래스카를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하곤 말할 수 없어요"라고 하는군)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다시 덧붙였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캇츠가 말했다.
(내가 아틀란타에 물어 봐야겠어요)
전화를 든 채 패툴로는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아, 여기서 망하는구나)
캇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월드 뉴스의 에이미 캇츠에요. 도와 주셔야만 할 두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6시 7분 현재로 이쇄된 마지막 라인 업 분홍색 종이를 들고 위층의 폴 프리드만이
문으로 들어섰다. 그는 사람들에게 포고령을 나누어 주었다. 셰퍼드의 1분 20초짜리
발데즈 리포터는 없애고 대신 앵커가 그 내용을 20초로 간추려 읽기로 되어 있다.
닛산 사건은 건재하고, 2분 25초씩이나 배정되어 있다.
그러나 디금이 벌써 6시 14분인데 아틀란타로부터 들어오는 닛산보도는 아직도
잡음이 많다.
(정말 초조하군)
하며 캇츠는 전화를 들고 아트란타 지국을 불렀다.
(누가 아틀란타에 전화하고 있지요?)
패툴로가 물었다.
(나예요. 빌 헨쨀이 받는군요) 하고 캇츠가 소리친다.
(아트란타 쪽에서는 문제가 없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테이프) 하고 소리치며 캇츠는 수화기를 다른쪽 귀에 대었다.
프리드만은 닛산 스토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틀란타 전화는
AD인 존에게 넘기면서 캇츠는 보스에게 말했다.
(이곳에 중요한 사태가 발생했어요)
아틀란타로부터의 생생한 닛산 스토리는 방송시간에 밪춰 받지 못할 것도 같다.
패툴로가 소리친다.
(그룹 W는 들어오고 있다는데 아틀란타는 뭐래요?)
(지금 점검해 보고 있담니다)
넥타이 매듭을 좀 늦추면서 존이 대답한다. 패툴로가 그에게 말했다.
(다시 처음부터 보내라고 하지. 그냥 이대로라도 내야겠는데)
존은 몇 분 아에 아틀란타 것이 다시 올 거라고 말한다.
(좋아, 몇 분만 더 주지, 약 2분)
패툴로가 말했다. 그는 캇츠를 돌아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모두가 2분 내에라고 말해요. 모든 사람이 한 아이템씩 뒤에서 오는 거라구)
마치 내버려둔 어린아이가 보채듯 즉각 방 전체에서 전하벨이 울렸다.
(젠장, 내가 전화 좀 해줄 수 없어요?)
위층에 있는 프리드만에게 연락하려던 캇츠가 소리쳤다.
그룹 W에서 온 소식은, 잡음 문제는 아틀란타 쪽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방송시간 10분을 남겨놓고 패툴로는 54번을 지켜보고 있던 건장한 레이몬드에게
전화를 했다.
(마이크로 웨이브를 교체해서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비디오 전송 루트를
설치하고 있다는군. 레이몬드, 당신 심장을 마구 찌르는 것 같지 않아요?)
오븐에 사용되는 것 말고도 마이크로 웨이브는 단거리 통신 릴크에도 사용되고
있다. ABC는 대체될 필요가 있는 라인을 따라 어떤 곳에도 특수 장치를 갖추고
있다. 레이몬드는 아틀란타 신호를 켜고, 쥐 죽은 듯 고요한 0.5초 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또다시 잡음과 쉿 하는 금속성의 높은 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그런데 아틀란타에서 방해받고 있는 건 뭐지요?)
캇츠가 화가 잔뜩 치밀어 물었다.
패툴로가 그녀에게 말했다.
(마이크로 웨이브 통로를 교체했어요. 나쁘긴 마찬가지지만)
(와...)
캇츠는 소리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마치 책상을 산산조각내어 이쑤시개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갑자기 모니터 스크린에 수자가 나타났다. 5, 4, 3, 2, 1. 그리고 명확한
시그널과 함께.
(저기! 자 이제)
레이몬드가 긴장한다.
(이제 회로를 교체했군)
패툴로가 중얼거렸다.
(이제 동작하군요, 맞지요?)
캇츠가 소리쳤다.
(내쉬빌의 외곡에서...) 하고 시작되는 알 데일 기자의 기름진 바리톤 목소리는
모든 전자적 문제점을 치료해 주는 것 같았다. 칙칙거리는 모든 잡음이 모두
없어졌다.
(야, 해냈다)
흥분한 패툴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울퉁불퉁한 농지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닛산 자동차 단지가 연간
25만대 이상의 자동차와 트럭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캇츠가 전화기를 붙잡았다. 위층으로 다이얼을 돌기 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레이몬드를 불렀다.
(이제 됐지요? 레이. 마이크로 웨이브가 잘못되었던 거지요?)
레이몬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끄덕였다. 캇츠는 위층으로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의 기색이 가득했다.
(이제 됐어요. 마이크로 웨이브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좋아요. 고마워요)
모니터에서는 알 데일 기자의 설명이 나왔다.
(그러나 10억 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투자는 완전 전쟁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2400명의 플랜트 근로자들은 전리품으로 남았습니다)
패툴로 말에 따르면 방송 시작 전 마지막 10분__15분간은 때에 따라 "비극적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만일 편집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패툴로가 6개 테이프 기계 중
어느 것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만, 그 흐름의 순서를
모른다면 정말 큰 곤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밤, 그의 계획으로는 54세는
그레고리, 53에는 데일과 포터, 오프닝 로고를 걸고 54에는... 등등이다.
패툴로가 조정실에 있는 찰리 하인즈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쯤 피터 제닝스의 모습이
몇 개의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앵커 데스크에 앉아 원고를 점검하고 있다.
6시 27분. 그의 뒤에는 작가 겸 프로듀서인 밀트 와이스가 제닝스의 윗저고리에 먼지를
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정실로부터 차분하고 우림있는 목소리가 스피커로 들렸다.
(58, 이제 곧 들어갑니다)
(1분! 1분)
캇츠가 소리친다.
(곧 시작합니다)
폴이 말한다.
(10초!) 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자 모두들 방송시작 10초 전의 순간으로
긴장했다.
패툴로는 숫자를 거꾸로 세며 마침내 소리친다.
(자, 들어갔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팀파니 소리가 울리며 오프닝 그래픽 위에 타이틀
소리가 나온다.
(From ABC, This is "World News Tonight" with Peter Jennings)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날 첫 소식은...)
피터 제닝스가 뉴스로 뛰어드는 그레고리 기자의 유나이티드사 소속 항공기 추락
소식을 전하고, 맥워시 기자의 펠릭스 블로흐 사건의 속보가 나가는 동안, 조정실은
테이프 기계에 그 다음에 나갈 것을 걸도록 지시했다. 마치 통근열차가 그랜드 센트럴
역을 떠나면서 장내 방송을 하는 듯하다.
(다음은 55번, 그리고 곧바로 58번, 바로 그 다음은 48. 그리고 41번은 제 1광고)
맥워시의 보도가 끝나자마자, 제닝스가 스크린에 나타나 라인 업에 없었던 것을
첨가한다.
(지난 금요일 저희 방송에서 처음으로 보도된 블로흐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첫번 보도에서 우리는 블로흐와 소련 첩보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정보원이 알려준 대로 그 거래 장면을 재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재현된
"모조"임을 분명히 명시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를 빠뜨렸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제작상의 실수였습니다. 만일 오해가 있으셨다면 이 점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잠시 후엔 일본 자동차공장을 노동조합에 가입시키려는 전미 자동차노동조합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캇츠의 책상 위에는 슬롯 머신의 화면처럼 세 개의 작은 모니터가 놓여져 있어,
각기 NBC, CBS, ABC의 화면을 보여 주고 있다. 3개의 스크린에 3사의 앵커 톰과 댄,
피터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몇 초 후, 비슷한 "닛산"이라는 박스가 톰의 어깨 위에
튀어 올라온다. 만일 댄의 어깨 위에도 닛산이란 단어가 나오면 잭폿이 되는
건데... 그러나 CBS 뉴스는, 그 몇 분 사이에는 곧바로 닛산 스토리를 올리지
않았다. 비록 전세계의 뉴스를 다루기는 하지만 세 방송사가 같은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비슷한 시간에 내보내는 것은 그리 이상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드 포터의 환경문제 같은 특별한 보도물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위성그림이 옛날과 지금의 산꼭대기 모습을 보여 주면서 포터의 말이
시작된다.
(버몬트에 있는 카멜셤프산입니다. 이곳에 실려오는 구름에는 유황과 납이 섞여
있습니다. 더구나...)
패툴로는 4분간의 이야기가 하나로 꽉 짜여져 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니터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 정말 잘 짜여진 것 같다.
시간이 다 되고, 포터 기자가 끝말을 하자 패툴로는 어깨에서 큰 짐을 벗어 버린
듯 홀가분했다. 그는 웃으며 레이몬드를 돌아봤다. 그는 편집자에게 축하의 말을
보냈다. 패툴로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듯 기뻐했다. 레이몬드도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스 기자의 런던의 열파 보도가 나가고 피터 제닝스가 "안녕히 계십시오"를
할 즈음 위층의 조정실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인터컴을 통해 천둥치듯 들렸다.
감사기도를 울리는 찰리 하인즈였다.
(모두 고마워요, 아주 잘 해내셨습니다)
7시 신호를 끝낸 후, 모두 캇츠의 책상 주위로 모였다. 펠릭스 블로흐의
"모조"문제에 대한 제닝스의 사과 발언에 대해 의견이 오고갔다. 한 AD가, ABC가
그런 "모조"를 사용했다고 비난한 "워싱턴 포스트"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난 기사에 관해 언급했다. 캇츠는 말했다.
(10시 회의에서 폴은 앞으로 "레이블" 붙이기에 주의하라고 말했어요)
그런 비난에 대해 ABCㄹ르 방어하면서, NBC의 새 프로 "Yesterday, Today and
Tomorrow"에서도 그런 방식을 계획하고 있다고 패툴로가 말해 준다.
(그러나 그건 정규 저녁뉴스가 아니지요. 프라임 타임이니까 가능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저녁뉴스엔 모조를 사용할 수 없다고 봐요)
카렌 주커의 말이다. 그녀는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명확성으로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르고 직언을 주저하지 않는 정확한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테이프 편집실에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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