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인가. 들녘엔 베어 넘긴 볏단들이 쓸쓸히 누워있고 길섶의 구절초는 소복
한 여인처럼 애절하다. 남쪽에서 출발한 우리들의 대간 길도 어느새 충청도까지
올라왔다. "구름도 자고 가는/바람도 쉬어 가는...." 남상규의 노래는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남한쪽 대간 길에서 표고가 가장 낮은 곳(230m)이 추풍령이라니
말이다. 오늘 우리는 궤방령에서 추풍령까지 간다. 평탄한 코스에 4시간 반 예정
한다. 7시 30분, 망향휴게소에서 아침 먹고 경부고속도 황간 인터체인지로 나간다.
가로수가 전부 감나무인데 먹음직스런 빨간 동이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심기는
김천시에서 심고 감 따 가는 것은 지주 몫이란다.
9시 30분 궤방령 도착, 대간로 입구에서 기념촬영한다. 기자가 오늘 사진기자로
처녀출전했는데 미숙하더라도 어여삐 봐 주시기 바란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17산행사의 좋은 기록을 남길 것을 약속드린다.
산행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날씨다. 울창한 숲엔 향기로운 바람이 가득하고
아침 이슬에 촉촉이 젖은 오솔길은 밟기가 미안할 정도로 부드럽다. 경사도 완만해
모두 싱글벙글. 핸디줘야 한다며 일찌감치 앞서 간 김숭자여사는 보이지도 않는다.
김여사의 일취월장 산행실력에 모두들 감탄한다.
유수자여사가 싸온 웬 떡? 으로 간식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오르막에서 노창송
동문이 나뭇가지에 찔려 얼굴을 다쳤다. 피가 조금 났는데 회장님이 응급처치로
아까징끼를 발라주었다. 그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마치 큰 상처를 입어 피가 철철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다친 사람한테 죄송하지만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노동문이 "몇 번이나 찍는 겨?"하며 포즈까지 취해준다.
2시간 정도 힘 안 들이고 걸었는데 벌써 가성산(710m)이다. 17악동들의 자상한
보모 김숭자여사가 섬섬옥수로 노동문의 상처를 다시 치료해줬다.
오늘 저녁도 일찍 먹게 될 것 같은데 점심도 일찍 먹자는 김회장 제의에 따라
가성산 정상에서 11시 30분에 점심식사. 5위로 도착한 김여사가 오랜만에 점심
식사에 동참하게 돼 정말 기쁘다고 인사해 그 동안 후미를 기다리지 않고 내뺀
선두와 중간그룹을 무안하게 했다. 가성산 정상은 평평한 산마루에 여러명 둘러
앉아 점심 먹기 좋게 콘크리트 포장이 돼있다.
가성산을 출발하자마자 급경사의 내리막이 거의 아래 동네 마을까지 이어진다.
오전에 올라온 고도를 몽땅 반환할 만큼 내려갔다. 회장님이 "이러니까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지."하며 웃는다. 아이고, 아시니 다행입니다.
다시 오르막을 기어올라 장군봉(606m). 잠시 숨을 돌리는데 누군가 버리고 간
소주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임종수동문이 말없이 소주병 하나를 집어
자기 배낭 옆주머니에 꽂는다. 역시 17산우는 다르다.
오늘 산행중 최고점인 눌의산(743m)에 도착한 것이 1시 40분. 정상에 서니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 사방 탁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멀리 김천시가 보이고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는 까마득히 추풍령이 내려다보인다.
하산길은 정말 쏟아지는 내리막이다. 게다가 미끄러운 진흙길이어서 모두들
나뭇가지를 부둥켜안고 곡예를 하며 내려간다. 40분 정도 급경사와 씨름하자
드디어 묘지와 포도밭과 채소밭들이 어울린 동네 뒷산이 나타난다. 초추의
양광 속에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골풍경이다.
지하통로로 경부고속도로를 건너고 복선인 경부선 기찻길도 두 개나 건넌다.
정겨운 송리 마을 돌담길을 돌아 3시 5분 추풍령에 도착, 5시간 30분에 걸친
산행을 마쳤다. 후미 도착을 기다리며 기차길 옆 벤치에 앉아 등산화의 진흙을
털어 내고 있는 동문들의 표정이 느긋하다.
산행코스가 늘 이 정도면 얼마나 좋을까. 김계숙여사가 남편 잘둔 덕에
백두대간을 다 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자 장변호사님이 "그럼 난 할 수 없이
부인 덕이라 해야겠네" 하신다.
아침에 김회장이 오늘 저녁은 금강휴게소 뒤 마을에서 도리뱅뱅이(피라미
조림)를 먹게 해준다고 해 기대가 컸는데 김숭자여사께서 직지사 앞 한정식이
먹을만하다고 해 갑자기 메뉴가 바뀌었다. 어쨌거나 식당이 목욕탕인 김천
파크호텔 바로 앞이니 편리하다. 현출발은 벌써부터 오늘 죽전 도착 8시,
양재동 8시 30분, 집에 가서 모든 연속극 다 볼 수 있겠다며 싱글벙글이다.
목욕하고 '대구식당'에 들어가니 벌써 상다리가 부러지게 한정식이 차려져
있다. 숯불에 구운 돼지갈비며 불고기에 조기 구이, 구수한 띄운 비지,
가죽장아찌, 고추 부각에 말린 도토리묵과 갖가지 산채...별미가 끝이 없다.
TK들이 오랜만에 고향 음식인 띄운 비지를 먹으면서 즐거워하는데 평소
별볼일없기로 소문난 경북지방 음식을 모두들 칭찬하니 대구식당이 경북
체면 세워줬다고 신이나 어쩔 줄 모른다.
신이 난 김에 장변호사님이 저녁을 쏜다 하시니 구총무는 쏘는 것도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기고, 대구식당에 왔으니 우리가 낸다는 김여사 대답에
그럼 앞으로는 어디 가더라도 대구식당만 찾아가자고 이구동성.
5시 40분, 귀경길에 오르니 서쪽 하늘에 뭉게구름 뒤로 넘어가는 저녁 햇살이
찬란한 황금빛살을 쏘아 올린다. 천지창조의 장관을 연출한 자연 앞에 우리는
문득 숙연해진다.
아침에 10분 지각한 대가로 임종수동문이 죽암휴게소에서 아이스케키를 샀다.
아이스케키 한 개에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동문들을 보며 임동문이 "돈 만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발견했다며 흡족해한다. 그나저나 이종범동문께서는
언제 아이스케키 사주러 나오실 건지....
낮에 피를 보고도(?) 노창송동문의 멀미가 다스려지지 않아 버스 안에서
2차가 벌어졌는데 놀라운 것은 7시가 넘었는데도 잠잘 생각을 안 하는
구총무였다(구총무의 저녁 7시 취침, 새벽 3시 기상 습관은 모르면 간첩).
본인조차 무슨 변고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김계숙 여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아침에 구총무가 자기는 폐활량이 지나치게 적어서
(아무도 안 믿었지만) '미스틱 에너지'라는 건강보조식품을 먹기 시작했다고
광고를 했는데 그 식품인지 약품인지의 성분이 마그네슘과 비타민 B6라는
것이었다. 김계숙 여사 진단에 따르면 마그네슘이 vitality를 지나치게
촉진한 것 같다는 것. 한마디로 에너지가 넘치고 흥분해서 잠이 안 온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흥분한 구총무의 그칠 줄 모르는 재롱에 귀경길이 순식간
이었다.
회장님의 다음 산행 안내. 백두대간 5대 험로 중 하나인 이화령-조령 3관문을
사진회와 합동으로 하기로 했다고. 마침 단풍철이고 문경새재 근처에 사진
찍을 것도 많으니 사진회가 등산대원들 하산할 때가지 기다리는 것도 문제없을
거란다. 집행부에서 안전준비를 확실하게 할 것이므로 겁먹을 필요는 없고 대신
경치가 기막힌데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게 마련'이라고 하시니 겁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어린 백성들은 잘 모르겠다.
현출발의 시간계산은 한치의 오차도 없어 8시 죽전, 8시 30분 양재역에서 작별,
'출발' 직함의 권위를 드높였다. "김명용이 왔으면 3차 갈 뻔했는데 안 와서
다행"이란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참가자(16명): 구명회, 김숭자부부, 김영길 부부, 김윤기부부, 김종남,
노창송, 박정수 부부, 이정수, 임종수, 임한석, 전정원, 현해수(노순옥 기)
첫댓글 사진을 곁들이니, 훨씬 재미가 있어지네요.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리고, 기법도 많이 향상되리라 믿습니다.
노기자의 사진솜씨가 글솜씨 못지 않습니다. 앞으로 산행기 읽는 재미가 배가 될 듯합니다.
'프로'는 역시 다르다 는 것을 새삼 느끼네요. 언제 그리 많은 수준 높은 사진을 찍으셨은지...모델이 되려면 이제 노기자를 수행해야 할테니 갈등 생기네요. 이제 음악만 추가하면 완벽(?)한 산행기가 될텐데...기대가 큽니다.
사진 넣는 것도 간신히 했는데 음악 넣는 것까지 배워야하니 스트레스 쌓입니다.(노순옥)
사진들이 증명사진모음이 아니라서 좋다.
금상첨화라! 글과 사진이 어우러지니 기억력 나쁜사람도 당시 상황이 생생해 지내요. 역전의 용사의 모습도.....
산행기 스타일이 종전보다 더더욱 감명스럽고 기억을 생생케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