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5년 쯤 되었나? 수도권에 올라와서 주인님이랑 남이섬엘 갔다. 한여름의 별밤 젊은이들을 광란의 장으로 몰아넣곤 하던 팝 페스티벌은 간 곳이 없고, 깊어가는 가을 스산한 분위기의 낙엽들만 이리저리 휘날리던 어느 날이었을 게다.
섬을 한 바퀴 돌아 막 선착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데, 오른편 임시 휘장막으로 둘러쳐진 하얀 건물 안에서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오고, 이어서 한 노인- 노인이래봤자 내 나이 또래였지만-이 허리를 약간 구부리면서 장막을 걷고 나왔다. 아! 그가 누구인가? 긴가민가해서 장막을 약간 들춰서 건물 안에 쳐진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를 보니 '최동욱의 팝 콘서트' 어쩌구 하는 문구가 얼른 눈에 띄었다. 그래 영감님은 분명 최동욱씨였다.
그 옛날 내게 많이도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었음에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최동욱씨를 여기서 만나다니...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최선생께 목례로 예를 표했지만, 물론 그는 나를 알 까닭이 없었으니 뜨악한 표정을 짓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 세기도 지난 과거 누구랄 것도 없이 고등학생이면 대개 늦은 밤까지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다. 방송국들은 서로 경쟁하듯 유명 디스크자키를 앞세워 팝송을 들려주면서 고등학생 청취자들을 끌어모았다. 해서리 당시의 이름난 디스크자키들의 인기는 오늘날의 유명 가수나 배우들의 그것과 견줄 정도였으니,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겐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임은 분명했을 터...
늦은 밤 팝송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시그널과 함께 디스크자키의 멘트는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리면서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 청소년에게 한 가닥 희망이자 어머니의 품과 같은 위안거리였으니...각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들은 학생들에게 그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무척이나 공을 들여 선정된 것인 듯도 했다.
문화방송에서 이종환씨가 진행하는「밤의 디스크쇼」의 시그널 'Adieu Jolie Candy'(Franck Pourcel)나 「별이 빛나는 밤에」의 'Merci Cherie'(Franck Pourcel), 그리고 동아방송에서 최동욱씨가 진행하는「0시의 다이얼」의 시그널 'In the year 2525'(Franck Pourcel)나「3시의 다이얼 」의 'That happy feeling'(Bert Kaemfert)' 등은 지금 들어봐도 내게는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나보다 문화적 수준이 한참 높은 나와의 동년배들 사이에선 당연할 듯도 하다만...
당시 이종환씨나 최동욱씨를 필두로 많은 디스크자키들이 앞다투어 등장하여 각 방송국들의 인기 프로그램을 이끌어간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문화방송의 임국희 아나운서와 KBS의 김기덕씨, 기독교방송의 최경식님, 그리고 동아방송의 김세원씨 등이 곧 그들이었다.
며칠 전 최동욱씨의 부음(訃音)이 인터넷과 신문 기사로 떴다. 기사에는 우리나라 제 1호 라디오 디스크자키이자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왔던 그가 여든 일곱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아방송에서 진행했던 즉석 신청 음악 프로「3시의 다이얼」에 청취자들이 동시에 접속하느라 광화문전화국이 일시 마비된 적이 있을 정도로 그의 인기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적고 있었다.
억겁(億劫)을 살면서 영원히 빛날 것 같았던 별들도 적색거성, 백색왜성을 거쳐 종내는 흑색성운으로 생을 마치는데, 하물며 찰라(刹那)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들에게 여든이나 아흔의 삶은 굳이 차이를 논할 필요도 없고 서러워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래도 음악이라는 외길을 걸으면서 한때 우리들의 삶을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던 최동욱씨의 영전에, 그가 진행하였던 프로그램「3시의 다이얼 」의 시그널 음악 'That happy feeling'(Bert Kaemfert) 을 들으면서 암울한 삶을 살았던 내게 주었던 희망에 대한 감사와 나보다 먼저 떠남에 애도의 마음을 함께 전해 본다.